와서 조반을 먹으라
요한복음 21:1-14
어릴 때 시골에서 개울물을 건너 교회를 다녔습니다. 여름에 비가 오면 돌다리에 물이 넘쳐 건널 수 없을 때 겉옷을 벗어 머리에 이고 위에서 물살을 따라 헤엄쳐 물을 건너 교회를 갔던 일이 있습니다. 물을 건널 때는 겉옷을 벗어야 한다는 것은 어린 아이라도 알 것입니다. 벗고 있던 겉옷을 입고 물에 뛰어내린다면 정신 이상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고기 잡다가 바닷가에 서신 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았을 때 벗고 있던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7). 겉옷을 입고 있었더라도 벗고 바다로 뛰어 내려야 할 것인데 벗고 있던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 내렸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별것도 아닌 것처럼 넘어갈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로 하는 것도 있지만 비유나 상징적인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된 말씀이 많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 성경 말씀의 권위가 떨어집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상징적으로 이해를 하면 상당한 큰 교훈이 됩니다.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두른 겉옷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를 상징하는 옷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제사장으로 직분을 맡길 때 겉옷을 입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40:14; 레8:7). 그래서 아론과 그 아들들은 겉옷을 입고 제사장 직무를 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소 몰고 밭가는 엘리사에게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져줌으로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습니다(왕상19:19).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갈 때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엘리사가 주어 그 겉옷으로 요단을 치매 물이 갈라졌습니다(왕하2:14).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벗어 준 겉옷은 선지자를 상징하는 것 이였습니다.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이 자신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줌으로 차기 왕이 될 권한을 다윗에게 넘겨주었습니다(삼상18:4).
이와 같이 베드로의 겉옷은 예수님의 제자를 상징하는 옷입니다. 베드로에게 겉옷을 입혀 제자로 삼으신 것처럼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예수님께서 입혀주신 겉옷이 있습니다. 목사에게 목사 까운이 있습니다. 찬양대가 까운을 입고 찬양을 합니다. 공예배 시간에 장로가 까운을 입고 기도하며 집사도 까운을 입고 수전합니다. 편의상 까운을 입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도들 모두에게 상징적인 직분의 겉옷을 입혀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겉옷을 언제 입혀 주셨습니까? 고기 잡던 베드로를 불러 제자 삼으실 때 입혀 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베드로는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겉옷을 언제 벗었습니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3)고 할 때 벗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 일곱이 베드로를 따라 물고기 잡으러 바다로 간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직분을 포기하고 제자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빈 무덤 안에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모인 방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보여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몇 번이나 보았으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제자의 직분을 감당해야 했음에도 고기 잡으러 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버리고 고기를 잡아보았지만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버리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들에게 겉옷이 매우 중요합니다. 공직에 있던 사람이 공직을 떠날 때 ‘옷 벗었다’고 합니다. 판사는 검은 까운을 입고 재판을 합니다. 경찰은 경찰복을 입습니다. 의사는 하얀 까운을 입고 환자를 돌봅니다. 버스나 택시 기사도 겉옷을 입고 운전합니다. 예비군복을 입으면 아무데나 주저앉고 딩굴기도 합니다. 이렇게 겉옷은 그 사람의 하는 일을 상징하는 옷입니다.성도에게도 예수님께서 사명감을 주시고 겉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사명감을 따르지 않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은 보기에도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어설퍼 보입니다.
목사가 생활에 어렵다고 택시 운전을 한다든지, 노동판에 나가 일한다고 할 때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비참해 보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소득보다는 손해가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는 것이나 목사가 택시 운전하는 것은 다를 바 없습니다. 베드로가 겉옷을 벗고 고기를 잡았지만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처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버리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은 소득이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어려서부터 바다에서 고기 잡고 자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시기 전까지도 고기 잡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고기 잡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혹 주일을 지키지 않고 세상적인 일을 할 때 혹시 어떤 화를 당하지 않을까 염려를 했습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도 혹 사고가 나지 않을까, 어떤 손해를 보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면서 조마조마하게 하루를 지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 작은 사고라도 나든지 손해를 보면 잘못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인데 별일 없이 지냈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시고 화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처럼 하지 않으십니다. 맡겨준 사명을 버리고 다른 것을 했을 때 반드시 득보다는 손해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성도들에게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겉옷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재능과 소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따라 노력하면 성공하지만 재능을 떠나 다른 일을 하면 실패합니다.
베드로가 겉옷을 벗었을 때의 모습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는데도 예수신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서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는 말씀을 듣고 그물을 던져 많은 고기를 잡았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영안이 어두워 예수신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겉옷을 벗으니까 영안이 어두워지게 됩니다.
교회가 맡겨주신 직분을 버리고 세상적인 일을 할 때 영적 감각이 무디어지게 됩니다.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하물며 말씀 듣고 큰 복을 받았음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겉옷을 벗었다는 것은 완전히 예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찾아 오셔서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고기를 잡도록 하신 것은 어둔 영안을 열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을 때 비로소 어둔 영안이 열려지게 되었습니다.
영안이 먼저 열려진 사람이 누굽니까?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요한입니다. 요한이 “주님이시라”고 베드로에게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신줄 알고 벗었던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려 예수님께로 달려온 것입니다.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제자로 예수님 앞에 선 것입니다.
이렇게 벗은 겉옷을 입고 다시 선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은 무엇을 어떻게 했습니까? 여기에서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먼저 예수님의 용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몇 번을 보여주었음에도 맡겨주신 사명을 버리고 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을 책망 한마디 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는 예수님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부름받기 전의 옛 모습으로 되돌아간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다시 불러 제자로서의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12)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춥고 배고플 때 입니다. 춥기 때문에 따뜻한 숯불을 피었습니다. 배고프기 때문에 생선과 떡을 구워놓았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내려도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가장 필요한 것이 숯불이요 먹을 수 있는 생선과 떡이였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준비해 놓으시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입이 열개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감히 ‘춥습니다’, ‘배고픕니다’라고 말 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마땅히 책망을 들어야 할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책망 한 마디 하지 않으시고, 따듯한 숯불을 피우고 구운 생선과 떡을 준비해 놓으시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책망을 듣고 꾸지람을 듣는 것 보다 더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이제부터 제자로서 최선을 다할 것을 마음속으로 각오를 하였을 것입니다.
실패한 사람이 돌아왔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책망과 훈계입니까? 다시는 떠나지 말라는 권면입니까? 많은 사람이 실패하고 돌아온 사람에게 나무라고 책망과 훈계와 권면을 합니다. 예수님은 책망대신 그들이 구하기도 전에 필요한 것을 준비해 놓으시고 초청하셨습니다.
‘고기’라는 말을 원어 성경에 기록된 것을 살펴보면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3),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5), ‘고기가 많아’(6), ‘큰 고기 일백쉰 세 마리’, 그리고 숯불 위에 ‘생선’(9,13)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에는 이들 모두를 ‘fish’로 기록하였는데 원어 성경에는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는 ‘물고기’는 ‘알레온’ 즉 어부가 되어 고기 잡겠다는 직업적인 뜻으로,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는 ‘고기’는 ‘프로스파기온’ 즉 먹을 고기, 먹고 배를 채울 수 있는 고기로, 그리고 그물을 내려 잡은 ‘고기’는 ‘익뒤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익뒤스’는 헬라어로 ‘이에수스 그리스토스 데오스 휘오스 소테르’라는 말의 단어 첫 글자를 모아 만든 단어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라는 말의 단어입니다.
‘익뒤스’라는 고기 일백쉰세 마리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를 믿는 성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도를 상징하는 고기로 초대 교회 교인들은 물고기 모양으로 부호를 삼은 마크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를 부를 때 잡았던 고기 역시 ‘익뒤스’로 기록했습니다(눅5:4,6).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잡은 일백쉰세 마리의 고기는 베드로가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성도가 되도록 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위해 숯불에 구운 생선(고기)는 헬라어로 ‘옵사리온’ 즉 먹을 수 있도록 요리해 둔 고기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원어로 보니까 예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버리고 먹고 살기 위해 고기를 잡으러 갔지만 먹을 수 있는 고기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물을 내려 많은 고기를 잡음으로 처음 불러 제자 삼으신 목적을 깨닫게 하시고, 겉옷을 두르고 사명을 다하기로 작정하는 제자들에게는 구하지 않아도 미리 아시고 따뜻한 숯불과 먹을 수 있는 생선과 떡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부르신 목적대로 살고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 충성할 때 먹고 사는 문제는 주께서 풍족하게 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아먹고 살려고 했던 것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춥고 배고픔을 미리 아시고 숯불을 피워놓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생선과 떡을 구워 준비해 놓으신 것을 먹는 것이 큰 복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헬라어의 ‘고기’라는 단어를 풀어보면 사명을 떠나 하는 일은 실패하게 되지만 다시 사명을 위해 노력하면 주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먹고 살기 위해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버리고 먹고 살기 위해 노력해도 실패하지만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 하면 주님은 나의 필요한 모든 것을 풍족하게 주신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제자들을 초청하셨습니다. 만약 ‘만찬을 먹으라’고 했다면 먹은 후 쉬라는 의미가 있지만 ‘조반을 먹으라’고 한 것은 먹고 일하는 낮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옷을 두른 제자들을 향해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초청은 제자로서의 사명을 끝까지 다할 것을 암시해 줍니다. 조반을 먹은 제자들은 일생을 겉옷을 벗지 않고 맡겨주신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가 맡겨주신 사명을 다하기를 다짐할 때 구하지 않아도 우리의 가장 필요한 것을 준비해 놓으시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초청의 말씀을 듣고 맡겨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