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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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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序 |
Ⅲ. 近距離 武器의 變遷史 | ||
Ⅱ. 遠距離 武器의 變遷史 |
1) 磨製石劍 | ||
1) 磨製石鏃 |
2) 鐵矛 | ||
2) 鐵鏃 |
Ⅳ. 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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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序
그림 1) 기원후 2세기의 쇠낫(김해 양동리 162호분 출토)
武器는 적과 싸울 때에 쓰는 도구로, 때로는 무기가 생활재료를 얻기 위한 중요한 생산도구의 역할도 겸하였다1). 그런데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시기의 무기는 주로 전쟁의 도구로 쓰였으며 농기구와 무기의 구분은 확연히 나기 시작했다. 특히 전쟁이 잦았던 삼국시대에는 특별히 힘을 기울여 여러 가지 무기를 만들었는데 무기의 소재도 돌로부터 청동, 철로 변화하였고 또 그 기능도 다양해져서 공격용 무기에 대하여 방어용의 무기가 개발되었으며 전쟁의 기술, 즉 戰略, 戰術도 고도로 발전하였다.
전쟁에 쓰인 무기는 일정한 특징에 따라 공격용 무기와 방어용 무기, 그 밖의 전투용구로 나뉘게 된다. 전투용구란 군대의 전투 행동을 돕는 데에 쓰이는 여러 가지 기재들, 곧 통신기재, 수송기재, 군마, 군기, 악기 등을 말한다. 그렇지만 본고에서는 무기라는 의미를 공격용 무기에 제한해서 사용하도록 할 것이며 방어용 무기나 전투용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또한 시기적인 범위 또한 화약무기가 발전하기 이전으로 제한하도록 하겠다.
공격용 무기는 시기에 따라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기 때문에 기능이나 종류, 크기, 재질 등이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원거리 무기와 근거리 무기로 구분할 수 있겠다. 원거리 무기로는 쏘는 무기가 있을 것이며, 근거리 무기로는 베는 무기, 치는 무기, 찌르는 무기, 걸어 당기는 무기 등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역할에 해당하는 무기들을 정리하자면 쏘는 무기로는 활과 화살, 쇠뇌(석궁) 등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며 베는 무기에는 검(劍)과 도(刀), 치는 무기에는 도끼[斧], 찌르는 무기에는 앞에서 언급한 검과 도 이외에 창[槍, 矛]이나 끌창[鑿形矛]이, 마지막으로 걸어 당기는 무기에는 꺽창[戈], 낫[鎌], 가지창[戟], 갈고리 등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본고에서는 가장 일반적으로 쓰였던 검과 창, 석촉 10점에 대해서 언급하도록 하겠다2).
Ⅱ. 遠距離 武器의 變遷史
그림 2) 쇠뇌의 발사장치[牙](평양 석암리 219호분 王光墓 출토)
원거리 무기의 가장 대표적인 무기로는 활[弓]과 화살[矢], 쇠뇌[弩] 등이 있지만 선사시대에는 쇠뇌의 용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쇠뇌는 중국 전국시대에 출현해 후한과 삼국시대에 성행하였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왕광묘, 왕근묘, 평양 석암리 212호, 정백리 356호 등의 평양 낙랑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일명 弩機라고도 하는데 나무로 된 활틀과 활틀의 뒤끝에 구멍을 파고, 끼워 넣어 2개의 못으로 고정시킨 청동제의 발사장치로 구성되어 있다. 발사장치는 시위걸개와 시위걸개를 꽉 물고 있는 방아쇠 멈추개, 그리고 그 아래에 위치하는 방아쇠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화살을 발사할 때는 먼저 시위를 당겨 시위걸개에 걸고, 화살을 활틀 윗면의 홈에 놓는다. 이후 표적을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기면 시위걸개가 밑으로 내려가는 동시에 시위가 튕겨져 나가 화살이 날아간다3).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쇠뇌는 기계장치의 힘을 빌기 때문에 순수 筋力으로만 화살을 날리는 활에 비해서 힘이 덜 든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활을 사용하는 것보다 훈련도가 낮아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으며 대량생산 체제 하에서 쇠뇌를 생산해 보급한다면 일반 궁수보다 훨씬 많은 규모의 군대를 보유하는 것이 가능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은 사거리가 더 길고, 연사 속도가 쇠뇌에 비해 압도적으로 빠르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기에 이는 훈련이 덜 되었지만 더 많은 부대를 보유할 수 있다는 유혹을 뿌리치기에 충분했다5). 그 결과, 동아시아에서는 쇠뇌보다 활에 더 의지했으며 근세에 이르기까지 활은 전쟁의 향방을 가를 정도의 위력적인 무기로서 그 위치를 굳혔다. 그렇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쇠뇌가 아닌 활과 화살에 대해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활은 나무나 뿔, 뼈 같은 유기물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유물이 남아 발견된 예가 없으며 화살 역시 그 실물이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다만, 고구려 벽화고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화살은 활촉, 화살대, 화살깃으로 이루어 졌는데 선사시대의 화살 유물로는 석촉만 남아 있을 뿐이다.
석촉은 그 제작기술에 따라 크게 타제석촉, 마제석촉으로 나눌 수 있으며 타제석촉은 흑요석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 가장 많은데 형태상 크게 무경촉(無莖鏃), 유경촉(有莖鏃), 그 중간형으로서 버들잎형[柳葉形鏃]으로 나눌 수 있고, 3가지 형태 중 무경촉이 압도적으로 많이 보인다.
마제석촉은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는 것으로서 형태상 크게 무경촉(無莖鏃), 유경촉(有莖鏃)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특징은 촉신의 가로자름면[橫斷面]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석기시대는 平六角形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고, 청동기시대는 兩翼有莖鏃과 柳葉形, 三菱形, 三角形 등이 있다6). 마제석촉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7).
이러한 활과 화살은 수렵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도구였던 만큼 이른 시기부터 발달했으며, 이들은 수렵에 쓰일 뿐만 아니라 무기로도 사용되었다8). 특히 신석기시대에 들어 집단적으로 대형동물을 사냥하는 것 뿐만 아니라 소형동물을 개별적으로 사냥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활과 화살은 그런 사냥법에 맞춰 개량 ? 제작되었고9), 작은 사냥감에 창을 던지는 것보다 더 정교한 사냥이 가능해졌다. 그로 인해 평지가 아닌 숲에서의 작은 사냥감에 대한 사냥이 더 용이해진 것 역시 당연하다 할 수 있다10).
1) 磨製石鏃
그 중에서도 본고에서는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유물 중 하나인 마제석촉에 대해서 언급하도록 하겠다11). 타제석촉은 전세계에서 골고루 발견되고 있지만 마제석촉은 北歐, 中國, 滿洲, 韓半島, 日本 九州 등지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서 우리나라에서 마제석촉의 출현은 신석기시대이다. 하지만 청동기시대를 거쳐 원삼국시대까지도 지속적으로 사용하였으며 홍련봉 2보루 고구려 유적에서도 석촉이 발견되는 등 역사시대에도 석촉은 철촉과 함께 지속적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12).
마제석촉은 여러 형식이 있는만큼 그에 대한 형식분류가 이뤄져 있는데 맨 처음 마제석촉의 형식분류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사람은 일본의 ?田亮策이다. 그는 마제석촉을 무경삼각식(無莖三角式), 유엽식(柳葉式), 유병식(有柄式)으로 분류하였다. 그는 석촉에 대해서 1회의 실용성을 인정하였지만 정밀가공된 것이나 긴 것은 부장품으로 쓰인 것이 많을 것이라고 해석했으며 마제석촉은 청동촉을 모방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13).
또한 李白圭는 경기도 지방의 무문토기 편년을 시도하면서 마제석촉의 형식분류를 시도했는데 크게 장릉형석족(長菱形石鏃), 유경석촉(有莖石鏃), 삼각형만입석촉(三角形灣入石鏃), 삼각형석촉(三角形石鏃) 등으로 분류하고 타유물과의 공반관계에 의해 장릉형석족, 유경석촉, 삼각형만입석촉이 A群, 삼각형석촉이 B群에 속하며 전자가 후자보다 앞선다고 보았다14). 하지만 이는 좁은 지역을 대상으로 한 형식분류였기 때문에 이것을 두고 마제석촉 전체의 형식분류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비해 한반도 전체의 마제석촉을 재검토한 任世勸은 단면을 기준으로 마름모촉과 납작촉으로 나누고 다시 마름모촉은 莖部의 형태에 따라 뾰족뿌리, 납작뿌리, 버들잎형으로, 납작촉은 곧은밑형, 홈밑형, 제비날개형으로 분류하기도 하였다15). 하지만 이에 대해서 崔盛洛은 임세권이 마름모촉을 경부의 형태에 따라 뾰족뿌리와 납작뿌리로 나누고 있는데 이는 화살대와의 결합방식의 차이일 뿐이고, 그 자체가 시 ? 공간적으로 크게 의미를 갖고 있지 않으며 마름모촉은 석촉에 있어 가장 중요한 屬性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다16).
그러면서 최성락은 석촉을 크게 3종 10형태로 분류하고 특징적인 것은 기타 형식으로 추가 정리하기에 이른다. 먼저 무경식(無莖式)은 A式이며 AⅠ式은 쌍각촉(雙脚鏃), AⅡ式은 장엽촉(長葉鏃), AⅢ式은 삼각만입촉(三角灣入鏃), AⅣ式은 삼각형촉(三角形鏃)으로 분류했다. 그 다음 중간식(中間式)은 B式이며 BⅠ式은 유엽형촉(柳葉形鏃), BⅡ式은 능형촉(菱形鏃), BⅢ式은 장능형촉(長菱形鏃)으로 분류했다. C式은 유경식(有莖式)이며 CⅠ式은 일단경촉(一段莖鏃), CⅡ式은 이단경촉(二段莖鏃), CⅢ式은 세장형경촉(細長形莖鏃)으로 분류했으며 마지막으로 기타 형식으로는 삼릉촉(三菱鏃), 창두형촉(槍頭形鏃), 원통촉(圓筒鏃), 유구촉(有溝鏃), 석침형촉(石針形鏃), 타제석촉(打製石鏃)을 분류했다17). 거기서 더 나아가 주거지와 분묘에서 출토되는 마제석촉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음과 같이 편년하였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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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지 |
분묘 | |
신석기시대 |
AⅠ, AⅡ, 打製, 槍頭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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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
전기 |
AⅢ, BⅠ, BⅡ, CⅠ, CⅡ, 打製 |
AⅢ, BⅠ, BⅡ, CⅠ, CⅡ, 打製 |
후기 |
AⅢ, CⅠ, CⅡ, 石針形, AⅣ |
AⅣ, BⅢ, CⅢ | |
원삼국시대 |
AⅢ, CⅠ, C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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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최근에는 마제석촉에서 제작자의 의도를 알 수 있는 가장 쉬운 부분이 슴베와 슴베 단면형태임을 주목해 이들의 모양을 중심으로 마제석촉의 분류 기준을 세우고 계통을 파악한 연구도 나온 바 있다. 박준범은 무경식 타제석촉을 A식으로, 유경식 타제석촉을 B식으로 파악했으며 무경식 마제석촉을 灣入의 유무에 따라 만입이 된 것들은 CⅠ으로, 유엽형은 CⅡ으로 분류하였다. 마지막으로 유경식 마제석촉을 D식으로 분류하여 촉신부와 경부의 단면이 다른 것은 DⅠ식으로, 일체형은 DⅡ식으로 분류하여19) 신석기시대에는 CⅠ식, CⅡ식 계통의 무슴베식 석촉이 많았으며 청동기시대에는 DⅡ식과 DⅢ식 계열의 유경식 마제석촉이 많았음을 확인하였다.
그렇게 봤을 때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삼각만입촉은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 전기, 일단경촉은 청동기시대 전기, 이단경촉은 청동기시대 전기, 세장경형촉은 청동기시대 후기 분묘 유적에서 주로 발견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로 시기적으로 삼각만입촉, 즉 슴베가 없는 무경식석촉이 유경식석촉보다 이른 시기부터 발생해 가장 오랫동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일단경촉 → 이단경촉 순으로 석촉이 발전했지만 양자의 발생시기에 대해서는 미세한 편년이 이뤄지지 않은 듯 하다. 마지막으로 세장경형촉은 길이가 길고 정밀가공된 제품인만큼 실용기가 아닌 부장용으로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며 상당히 후기에 제작되었다고 보인다.
마제석촉은 高麗大學校 考古環境硏究所가 보관 중인 麻田里 遺蹟 C地區, 舟橋里 遺蹟 두 곳의 유물 중에서 십여점을 선별해 실측했으며 그 중에서도 서로 다른 형식의 마제석촉 4점을 선별해서 위에서 살펴본 발생 순서별로 정리한 다음, 소견을 정리하도록 하겠다.
위의 석촉은 주교리 유적 KC-018 유구에서 출토된 삼각만입석촉이다. 잔존길이는 4.5㎝, 폭은 1.5㎝, 두께는 0.4㎝이며 회색 셰일로 만들었다. 단면은 방형에 가까우며 평면형태는 삼각만입형을 이루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마연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표면이 거칠고 날이 세워져 있지 않다. 마연흔이 불규칙하게 이곳저곳에 나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 만들다 만 미제품으로 추정되는데 이 유구가 청동기시대 주거지인 점, 같은 유구에서 비록 파손되었지만 똑같은 형태의 잘 가공된 석촉 2개가 추가로 확인된 만큼,
이 석촉은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져 실용기로 쓰려던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20).
위의 석촉 역시 주교리 유적 KC-003 유구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잔존길이 8.3㎝, 폭 0.6~1.7㎝, 두께 0.5㎝에 흑색 셰일로 만든 것이다. 촉신의 단면은 능형이지만 일부 유실된 경부의 단면은 육각형이다. 신부는 전체적으로 사선으로 마연되었으며 날이 잘 세워져 있다. 전형적인 일단경식석촉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다음 석촉은 주교리 유적 KC-008 유구에서 출토된 것으로서 거의 완형에 가까운 것은 물론 전형적인 이단경식석촉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잔존길이는 5.0㎝, 폭 0.3~1.0㎝, 두께 0.2~0.3㎝이며 흑회색 실트스톤으로 만들었다. 신부의 단면은 육각형으로 살짝 찌그러진 능형이며, 횡방향으로 날이 날카롭게 잘 서 있다. 경부의 단면형태는 일, 이단 모두 사각형이며 아랫부분의 끝부분으로 내려갈수록 원형에 가까워진다. 경부의 윗단은 측면만 마연되어 있어 앞뒷면은 거칠지만 아랫단은 전체적으로 잘 마연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석촉은 마전리 유적 C지구 KM-026 유구에서 출토된 것으로서 주거지가 아닌 분묘에서 발견된 것이다. 길이는 무려 15.4㎝이며 폭 1.6㎝, 두께 0.5㎝이며 회색 셰일질로 이루어져 있다. 앞의 석촉들에 비해 거의 2배 이상의 길이를 갖추고 있고 정밀가공된 흔적을 봤을 때 처음부터 실용기로서 만든 것이 아니라 부장품으로서 만든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촉신부의 단면은 능형이며 등날은 뚜렷하게 세워져 있는데 등날이 경부까지 형성된 길다란 유엽형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하겠다. 경부의 단면은 육각형이며 촉신부와 경부는 부드럽게 연결되어 있다. 촉신부는 종방향으로 마연되어 있고, 경부는 사선으로 마연되어 있는데 인부 우측이 일부 파손되었다.
이상으로 십여점 실측한 석촉 중에서 특징적인 석촉 4개만을 추려서 간단하게 정리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석촉은 형태와 기능에 따라 형식분류가 가능하며 실제 출토사례에서도 그런 형식분류와 적합한 결과가 나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위에서 언급했던 다양한 형식의 석촉들을 일일이 實見하지 못한 채, 일부 석촉만으로 특정 정보를 취득한 것은 합당하다 할 수 없겠지만 자료 수집의 한계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그나마 이 정도의 유물을 실견하고 특징적인 4개의 석촉을 선별해 위와 같은 결론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라 여긴다.
2) 鐵鏃
화살촉은 일반적으로 석촉 → 청동촉 → 철촉의 변화과정을 겪는데 원삼국시대가 되면 철촉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일단 역사시대 이후의 화살 완형이 발견된 예가 없어 철촉만 주로 발견되고 있지만 나머지 내용들은 문헌에서 부수적으로 찾을 수 있다.
먼저 화살의 길이는 문헌에 의하면 肅愼의 화살대 길이가 1자 남짓하고21) 揖婁의 것은 1자 8촌이라고 하였다22). 또한 고구려 벽화고분의 활 쏘는 모습에서 짐작하면 적어도 60~70㎝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실제 화살촉의 출토상태로 볼 때 부산 복천동 38호분의 경우 철촉이 5열로 바닥전면에 깔려있는데 그 열의 간격이 70㎝ 정도였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화살대의 길이를 추측해 볼 수 있다.
화살대의 재질로는 문헌의 ‘弧矢’에서 짐작해 볼 때 싸리나 대나무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깃은 화살대의 뒷부분에 달았는데 화살의 비행을 고정시키고 그 추진력을 강화하는데 필요한 것으로 대체로 새의 날개를 달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경산 조영동 유적, 김해 대성동 유적에서는 활의 시위에 물리는 뼈로 된 오늬(괄)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철촉은 그 형태와 기능이 다양하며 크게 뿌리의 유무에 따라 유경식(有莖式)과 무경식(無莖式)으로 나누어진다. 다시 유경식에는 경부의 길이에 따라 장경식(長頸式)과 단경식(短頸式)으로 나누어지며, 촉신의 형태에 따라서는 도자형(刀子形), 유엽형(柳葉形), 유경삼각형(有莖三角形), 역자형(逆子形), 착두형(鑿頭形), 삼익형(三翼形), 골촉형(骨鏃形) 그리고 ‘Y’자형, 나선형(螺旋形)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철촉은 이와 같이 촉신이나 단면의 형태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기는 하나 그 변화는 기본적으로 무기로 사용했을 때 貫通力과 刺傷力을 증대시키기 위해 끝을 예리하게 하고 무게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변화의 방향은 결국 방어용 무기인 갑옷의 발전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나는 형태는 무경식촉(無莖式鏃)으로 원삼국시대 초기에 출현하여 4세기까지 이어진다. 형태는 촉신 폭이 넓은 삼각형으로 양 역자의 사이에 화살대를 끼우고 촉신부와 결박하기 위한 구멍이 나있다. 그러나 2세기 후반대 유경식(有莖式)이 등장하면서 종래의 무경식철촉은 점차 사라지고 여러 가지 촉신 형태로 삼국시대까지 이어지는데, 이는 결국 전쟁의 수행에 있어서 철촉이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였을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촉신에 구멍을 뚫은 유공촉(有孔鏃)은 화전(火戰)에 사용되었을 것이며, 촉신의 너비가 넓은 것(유엽형, 유경삼각형, 역자형, 착두형)은 의례적인 성격이 짙은 것, 너비가 좁은 것(유엽형, 도자형)은 실용 철촉으로 그 용도가 달랐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실용 철촉은 5세기 이후가 되면 더욱 좁고 길어진 형태인 장경식철촉(長頸式鐵鏃)으로 변화한다23).
위의 유물은 관창리 유적 KM-404 유구에서 발견된 유엽형철촉이다. 촉두의 길이는 4.0㎝, 촉두 최대폭은 10.3㎝, 촉두 두께는 0.3~0.5㎝, 촉신 폭은 0.4~0.7㎝, 촉신 두께는 0.4㎝이며 전체적인 잔존길이는 8.1㎝로서 경부 끝부분이 유실되었다. 촉두 중앙에 등날이 거의 세워져 있지 않으며, 전체 길이에서 촉두가 차지하는 비율이 크다. 촉두는 끝이 뾰족하며 단면이 납작하고 넓어 관통력과 살상력이 높았을 것으로 보이며 경부의 단면은 원형이다. 촉신에는 철촉과 결합했을 화살대의 목질흔이 남아있어 실용기로서 사용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관창리 유적에서는 99기의 주구묘와 101기의 주거지가 보고되었는데 1기만이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주거지이고, 나무지 100기는 모두 송국리형 주거지였다.
하지만 주변의 水路와 水田에서 A.D 2세기 무렵의 목재가 출토되었고 주거지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치는 KC-020호가 420±70 B.P, KC-038호가 2400±90 B.P, KC-040호가 2810±90 B.P, KC-048호가 2630±70 B.P, KC-059호가 2480±70 B.P 로 제시되는 등 오랜기간 사용되었던 곳인만큼 그 하한연대를 백제 초기까지 잡을 수 있을 것이며, 이와 같은 유엽형의 유경식철촉 역시 실용기로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위의 철촉은 상당히 뒷시기의 철촉으로서 아차산 3보루 S7E1 그리드에서 발견된 것이다. 아차산 3보루는 아차산 일대의 다른 보루들과 함께 대략 500년을 전후한 시점에 축조되어 551년 백제군에 의해 함락당할 때까지 약 50여 년 동안 사용되었던 곳이다. 특히 이 곳에서는 S1W3 그리드에서 실물자료로 확인된 가장 오래된 방앗간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 곳에서도 다른 보루들과 마찬가지로 철모, 철부, 철촉, 철준, 찰갑 등의 다양한 무기류와 철겸, 철서, 집게 등의 농 · 공구류, 솥 등의 용기류가 다수 출토되었으며 특이한 점이라면 비교적 양호한 상태의 찰갑이 다수 출토된다는 점이 다른 보루들과는 다르다24).
아직 복원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아 전체적인 형태를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잔존상태로 봐서는 장경식철촉으로서 검신형(檢身形)을 띠고 있으며 촉신의 폭은 0.4㎝, 촉신 두께도 0.4㎝, 잔존길이는 9.9㎝에 이른다. 촉신과 경부의 단면은 약간 일그러진 원형으로서 경부 일부가 파손되었다. 검신형철촉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철촉으로서 실전용 철촉 중에서 넓적촉의 대표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의 貊弓이 强弓으로 이름높은 것도 그렇거니와 동명왕릉 부근 12호묘에서 척추골에 박힌 상태로 출토된 철촉을 상기한다면 이와 같은 고구려의 검신형철촉은 대단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25).
Ⅲ. 近距離 武器의 變遷史
근거리 무기로는 위에서도 살펴봤지만 칼이나 검, 도끼, 낫, 창 등 굉장히 다양하고 많은 무기들이 있다.
특히 고구려의 안악3호분을 보면 고구려의 다양한 병종을 파악할 수가 있다. 물론 이것이 전쟁을 위해 출정하는 군대의 모습이 아닌, 고구려 태왕의 巡狩를 호위하기 위한 군대의 모습이기 때문에 실제 전쟁시 출정모습과는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벽화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바로 고구려에서 활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모든 병종이 벽화 안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버린 蓋馬武士, 輕騎兵, 刀手, 斧手, 槍手, 弓手 등등 그야말로 다양한 종류의 병종이 모두 이 곳에 표현되는 것이다26). 하지만 이는 역사시대 이후의 경우이다. 그 이전 시기에는 어떤 병종이 어떻게 갖춰져 있었는지 파악하기에는 관련 자료가 적은 것이 사실이다. 물론 기병과 각종 병종의 보병이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조직을 구성했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석기를 사용하던 시기에는 다양한 병종을 구성하는데 많은 제한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앞에서 살펴봤듯이 마제석촉은 충분히 위협적인 무기로서 활용되었겠지만 근거리 무기는 打擊으로서 적을 살상해야 하므로 재질의 강도에 따라 활용도가 상당히 제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석기시대가 지나서 청동기시대에 이르러서도 석기로 만든 무기류가 꾸준히 확인되고 있어 주목된다. 바로 마제석검이 그러한데 마제석검은 돌을 갈아 만든 단검으로서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석기이며 沿海州와 日本 九州 地域에 국한되어 분포하고, 중국이나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어서 우리나라에 고유한 특징적인 석기로 보고 있다. 그나마 일본 큐슈 지역에서 출토된 마제석검 역시 한반도 남해안 지역의 것과 형태는 물론 석질까지 흡사하여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청동기시대에 꾸준히 마제석검이 생산되고 있는데 이것만 본다면 마제석검이 분명 실용기로서만 쓰이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이미 당시에는 遼河 유역에서 한반도에 걸쳐 일본 긴키[近畿] 지방까지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과 세형동검(細形銅劍)으로 구분하는 청동단검이 폭넓게 생산되어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청동단검과 함께 실용기로서 마제석검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재질이 약하다 하더라도 날이 곧게 선 마제석검은 찌르는 무기로서의 기능을 얼마든지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적으로 무기로서 활용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연유에서 본고에서는 마제석검 역시 특수한 경우의 공격용 무기로 파악하였다. 이렇게 마전리 유적 C지구, 주교리 유적에서 출토된 마제석검과 함께 관창리 유적, 아차산 3보루 유적에서 출토된 철모에 대해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1) 磨製石劍
마제석검의 형식은 손잡이의 유무, 피홈의 유무, 劍麵의 형태, 손잡이의 형태, 슴베[莖部]의 길이와 형태, 검신의 형태 등에 따라 분류가 가능하나 주로 손잡이 부분과 슴베의 형태를 기준 삼아서 자루를 착장하기 위한 슴베가 달린 슴베[有莖式], 손에 쥐는 손잡이가 달린 자루식[有柄式], 슴베나 손잡이가 없는 형식[無莖無柄式] 등으로 분류된다. 슴베식은 창으로 보기도 하였으나 부여 송국리 주거지에서 목제 손잡이가 탄화되어 발견된 이후 마제석검으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손잡이나 슴베가 없는 형식도 상당수 발견되고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돌창[石槍]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마제석검은 주거지와 같은 생활유적에서도 발견되므로 자르거나, 찌르는데 사용되는 실생활 용구로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 주거지 출토 마제석검은 실용적인 것으로 길이가 짧아서, 여주 흔암리 12호 주거지 출토 마제석검 3점 중 1점은 검신이 10㎝ 정도 밖에 안 된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고인돌 등의 무덤에서 출토되면서, 그 중 상당수가 날 부분이 손상이 없고, 자루 위와 아래 끝이 심하게 벌어져 실용품으로 볼 수 없는 예가 많다. 대표적인 예가 김해 무계리 고인돌에서 출토된 것으로 자루의 위아래 폭이 20㎝ 정도 되어 심하게 돌출되어 의기로서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마제석검의 연대는 B.C 8세기설과 B.C 5세기설이 있는데, 청동기문화와 관련하거나 중국식동검의 연대에 비교하여 설정된 것이다. 청동기시대 조기 유적에서는 마제석검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전기에 해당하는 장방형과 세장방형 주거지에서 홈자루식, 통자루식, 슴베식이 모두 출토되고 있다. 방사성탄소연대 등의 절대연대자료로 보아 적어도 B.C 13~12세기까지 상한 연대를 올려볼 수 있게 되었다. 하한은 덧띠토기나 검은간토기[黑色磨硏土器]를 표지로 한 한국식 동검문화기에는 거의 출토되지 않는 것을 보아 B.C 3~2세기경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B.C 2세기에서 기원전후에 형성된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자루식 목제검이 출토된 점이나 철검형 마제석검의 존재에서 더 늦은 시기까지 잔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겠다.
청동기시대 초기에는 생활의 대부분이 마제석기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를 이용한 기술은 현재 우리가 아는 상식을 뛰어넘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추정된다27). 따라서 마제석기의 소유는 당시의 생업경제와 관련된 다양한 기술의 보유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마제석기를 다량 소유한 주거민의 경우 생업활동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함으로써 보다 높은 위계를 유지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게 봤을 때 주거지간의 위계차에 따라 석기의 제작량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상위 계층에서 보다 활발하게 석기 제작이 이뤄진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28).
그러다보니 마제석검과 같은 제작에 있어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특수한 유물의 경우에는 전문적인 장인집단이 존재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29). 그렇지만 지석이 대부분의 주거지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을 봤을 때 석기의 재가공이나 단순한 형태의 제작은 구성원 누구에게나 가능하였음이 추정된다30). 고로 마제석검에 대한 해석은 의기와 실용기로서의 2가지 가능성을 다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위의 유물은 마전리 유적 C지구 KM-008 유구에서 출토된 일단병식석검이다. 잔존길이 37.5, 폭 6.1㎝, 두께는 0.9㎝이며 회백색 셰일로 이뤄져 있다. 검신과 병부의 단면이 능형으로서 검신부와 병부가 확실히 나뉘는 유절식이다. 등날은 뚜렷하지 않으며 검신부의 끝에서 병단부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면을 정밀하게 마연하여 표면이 매끄러울 정도이며 좌측 검신부 상단이 일부 파손되었지만 실용기로서 사용하다가 파손된 것은 아닌 듯 싶다. 왜냐하면 석관 바닥에서 노출된 채 수습된 유물이기 때문이다. 석관은 개석을 갖추고 일단의 토광 안에 축조된 형태인데 개석 주변에는 무문토기편도 확인되었던 만큼, 매장 당시 의례적인 용도로 매납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31).
이와 같은 경우에는 마제석검 전면에 어떠한 사용흔도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약간의 파손 역시 인위적인 파손으로 보이지 않는데다가 출토 당시 너무나도 깨끗한 형태로 석관 바닥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실용기로서의 기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유물은 주교리 유적 KC-013 유구에서 출토된 유혈구이단병식석검으로서 잔존길이는 19.5㎝, 폭 6.2㎝, 두께 1.0㎝ 크기이며 녹회색 셰일로 이뤄져 있다. 석검은 전반적으로 여러 방향으로 마연이 이루어져 있어 표면이 매우 매끄럽다. 석검의 신부는 날이 잘 세워져 있으며 길이 8.7~8.8㎝, 폭 0.2~0.7㎝의 血溝가 앞뒷면에서 모두 확인된다. 병부에는 폭 0.5㎝의 홈이 둘러져 있고 단면은 볼록렌즈 형태이다.
이 유구는 청동기시대 세장방형 주거지로서 유적이 입지한 구릉의 남서사면에 위치하며 확인된 유구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주거지의 내부시설로 노지 2개, 다수의 주공, 저장공, 벽구시설 등이 확인되었으며 주거지의 상면에서는 다량의 목탄이 확인되고 있어 아마도 화재폐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거지 내부에서는 옆에 보이는 석검 이외에도 유혈구석검편이 하나 더 발견되었으며 형태와 재질이 완형과 같아 아마 동일한 석기를 여럿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 밖에 이단병식석검 미제품과 이단경식석촉이 4점,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는 석기 2점이 발견된 것으로 봐서32) 주거지 내부에서 마제석검을 비롯한 다양한 석기들을 가공 · 보수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전리 유적에서 출토된 마제석검과 달리 주교리 유적에서 출토된 마제석검은 주거지에서 발견이 되었는데, 그렇게 봤을 때 후자는 실용기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형식상 혈구가 있고, 이단병식이라는 것을 상기했을 때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후대의 것으로 판단되며 이는 상당히 후대까지 마제석검이 실용기로서 활용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2) 鐵矛
창은 오래전부터 인류가 사용해오던 무기로서 오히려 검(劍)이나 도(刀)보다도 보편적으로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인류 문명이 해를 거듭할수록 분쟁과 긴장의 정도는 더해갔으며 개인용 무기를 갖고 개별적으로 다투던 시대는 지나갔다. 어느덧 대규모 인력과 자원이 동원된 집단 간의 대립이 가시화되었고, 대규모 군대끼리의 접전은 短兵器보다는 長兵器인 창과 같은 무기에 의해 주도되기 시작했다33).
아마 청동기시대 정치체가 등장하면서 집단간의 긴장 상태가 가속화되던 때가 되면서 이미 장병기인 창은 대량생산되어 전쟁에서 중요한 무기로서 활용되었을 것이다. 이후 기병이 군대의 중요한 병종으로 활용된 이후에도 역시 단병기보다는 장병기인 창이나 원거리 무기인 활이 선호되었으며 길다란 창을 들고 적을 향해 돌격하는 중장기병은 당시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김성태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기병은 대체로 자루가 긴 장창을, 보병은 이보다 자루가 1/5 정도 짧은 창을 사용했다고 한다. 장창은 보병이 휴대하기에는 불편하며 오히려 말 위에서 휘두르기 편한 무기인 셈이다34). 실제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보면 중장기병은 모두 창을 들고 있는데35) 이는 중장기병이 어떤 식으로 운용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빠른 기동력을 이용해서 적을 교란시키고 원거리에서 활을 이용해 적을 공격하는 경기병과 달리 대오를 맞춰 적을 향해 하나의 무리로 뭉쳐 돌격하는 중장기병에게는 활이 아닌 길고 강한 창이 필수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중장기병의 활용으로 고구려는 당대 동아시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기병만이 창을 활용했던 것은 아니다. 서양에서 그리스의 중장보병이 유명하듯이 동양에서는 동옥저(東沃沮)가 보병이 강하기로 소문이 났다. 소와 말이 적은 대신 동옥저 사람들은 장창을 활용한 보병전에 강했다고 하니36) 창수는 병종들 중에서 상당히 오래전부터, 그리고 오랫동안 운용된 병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나 환호취락과 같은 방어성 취락이 등장하는 청동기시대부터는 攻城戰 차원에서 단병기보다는 원거리 무기나 장병기가 더 선호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봤을 때 이른 시기부터 돌창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철모는 청동기시대 銅矛를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양날(兩刃)의 몸체(身部)와 자루를 끼우는 투겁(空部)으로 나누어진다. 이들 철모는 길이에 따라 단봉식, 중봉식 및 장봉식 등으로 나누어진다.
단봉식(短鋒式)은 길이 20㎝ 이내로 몸체가 유엽형(柳葉形)을 이루고 단면은 능형(菱形) 내지 볼록렌즈형이며, 투겁의 단면은 방형(方形)이다. 몸체와 투겁의 비율은 1 : 1이다. 이 형식에 속하는 것은 영흥 소라리 유적과 제주도 용담동 유적 출토품이 있다.
중봉식(中鋒式)은 길이가 30㎝ 전후인데 몸체와 투겁의 비율이 3 : 2이며 몸체의 단면이 능형 내지 볼록렌즈형이고, 투겁에 있어서 봉부(鋒部)쪽의 너비가 비교적 넓어지므로 전체 너비의 차이가 작다. 이 형식에 속하는 것은 김해 양동리 출토품이 있다. 양동리 7호분 출토 철모는 투겁이 2단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경상도 지역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형식이다.
장봉식(長鋒式)은 길이가 40㎝ 이상의 것으로 창원 다호리 유적과 부산 노포동 유적 등에서 출토되었다. 창원 다호리 1호 널무덤 출토 철모는 모두 4점으로 길이가 40㎝로 긴 편이다. 봉부의 단면이 편육각형이고, 몸체와 투겁의 비율이 1 : 1에 가깝다. 투겁은 봉부 쪽의 너비가 좁아 전체 너비의 차가 심한 편이다. 이러한 점은 평양 정백리, 평남 대동군 용악면 상리의 출토품과 비슷하다. 부산 노포동 유적의 경우 장봉식의 철모만이 출토되나 그 형태는 다양하다. 그런데 시기가 내려올수록 철모의 길이가 대체로 길어진다37).
위의 유물은 관창리 유적 KM-423 유구에서 출토된 것으로서 전체길이는 35.8㎝, 봉부의 길이는 22.1㎝, 공부의 길이는 13.7㎝, 봉부의 단면두께는 0.7㎝, 공부의 단면외경은 2.9 × 3.0㎝, 공부 최대외경 역시 2.9 × 3.0㎝이다. 봉부의 중앙에 능이 확인되지 않으며 봉부 단면은 볼록렌즈라고 하기에는 너무 납작한 원형으로 공부 단면은 원형이지만 안에 녹이 가득 차 있어 공부의 깊이를 알 수가 없다.
봉부도 직기형이 아니라 창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형태이며 공부 하단에는 녹이 많이 생겨서 형태를 확실히 알기 어렵다. 하지만 공부 끝부분을 살펴봤을 때 창자루를 끼우고 공부를 조여서 투겁을 고정시켰던 것처럼 공부 뒷부분이 갈라진 형태를 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봤을 때 이 철모가 이른 시기의 것이므로 투공을 통해 창자루와 고정시키는 방법은 이때는 아직 사용되지 않은 듯 하다.
창의 크기가 상당히 크고 긴 형태로서 장창을 들고 전투에 임하는 창수가 사용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반도 남부의 특성상, 아직 기병이 본격적으로 활용되기도 전이므로 보병 위주의 군대가 운용될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그리스의 중장보병처럼 크고 긴 장창을 촘촘히 배열해 대오를 맞춰서 적과 싸우는 식의 전투가 진행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38).
그런데 위에 보이는 아차산 3보루 S6W1 그리드에서 출토된 철모는 위의 철모와는 분명히 형태상 차이가 있다. 일단은 잔존길이가 24.0㎝, 봉부 길이 11.5㎝, 공부 길이 12.5㎝, 봉부 단면두께 1.0㎝, 공부 단면외경 2.2 × 2.2㎝, 공부 최대외경 2.6 × 2.6㎝으로서 전체적인 크기가 위의 것보다 작음을 알 수 있다.
봉부 중앙에는 능이 있어 봉부가 끝나는 부분까지 이어져있다. 전체적으로 직기형 철모로서 봉부 단면은 확실한 능형이며 공부 단면은 원형이다. 봉부와 공부의 전체적인 형태가 잘 남아있으며 공부 끝부분이 다소 파손되었지만 원형을 복원하는데는 큰 무리가 없다. 봉부와 공부의 비율이 1 : 1 정도를 이루고 있는 단봉식으로서 6세기를 전후한 시기, 고구려에서 사용하던 장병기이다.
아차산 3보루가 평지가 아닌 산지에 위치한 요새라는 점을 상기했을 때 아차산을 중심으로 하는 작전 수행 범위에서는 기병보다는 보병 위주의 병력 운용이 중요시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창의 길이가 짧고 작은 것으로 봐서 이 창은 기병이 아닌 보병이 사용하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전쟁 수행의 주체가 보병이 전부가 아니었던만큼 창수라 하더라도 창 이외에 부수적인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산지라고 하는 특징이 있음으로 오히려 크고 긴 무기는 활동에 제약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 정도 크기의 창이 운용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근거리 무기로 대도(大刀)와 같은 단병기도 같이 확인을 하려고 했으나 적당한 유물이 없어서 미처 정리하지 못 했고, 그 다음으로 집단전에서 확실한 효과를 보였던 창에 대해서 알아봤다. 하지만 창 역시 종류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모(矛)에 대해서만 알아봤기 때문에 이 역시 부족한 정리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같은 철모라 하더라도 크기와 형태에 따라 기능적인 분류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다소간의 의문점을 남긴 채 나름대로의 공부를 진행할 수 있었다는 것에 의의를 갖도록 하겠다.
Ⅳ. 結
지금까지 마전리 유적 C지구, 주교리 유적, 관창리 유적, 아차산 3보루 유적 등 서로 시 ? 공간적으로 다른 4곳의 유적에서 선별한 마제석촉과 마제석검, 철촉과 철모 등 10점의 유물에 대한 실측 작업을 정리해 보았다.
무기는 인류가 살아가면서 여타 생산도구만큼이나 자주 지니고, 사용했을 도구인데 출토사례가 부족하고 관련 연구도 미진한 부분이 많이 있는 것 같다. 마제석촉의 경우만 하더라도 정교하게 만들어진 석기인데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수백점씩 출토될 정도로 많은 양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그 해석에 있어서 수렵과 같은 경제활동에 사용했을 것이라는 해석과 함께 무기로서 전쟁에 쓰였을 것이라는 해석이 공존하고 있다. 공반유물이나 유적의 경관을 통해서 마제석촉이 어떻게 쓰였을 것이다, 라는 해석을 하고 있는 상황인데 이는 보다 심도있는 고찰이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심지어 마제석촉과 같은 만들기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석기를 어떤 용도로든 사용했다면, 그것이 일회용으로 끝났는지 아니면 다시 수습해서 재사용했는지에 대한 것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그 밖에 마제석검에 대해서는 이제 상당한 연구성과가 진행되어 형식분류는 물론 마제석검을 통해서 당시의 사회상을 복원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더 이상 마제석검이 실용기가 아닌 부장품으로 쓰던 의기라는 주장도 사라진지 오래다. 하지만 아직도 정확한 석검 사용 흔적이나 방법 등에 대해서는 연구가 진행되지 않고 있으니 이 부분 역시 차후에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될 부분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철기의 경우, 출토되는 경우가 많지도 않을 뿐더러, 주로 특수한 경우에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는 녹이 슬고 수백년간 땅 속에 있다보니 본래의 형태나 무게, 크기와는 달리 많이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철제유물, 그 중에서도 특히 무기로 쓰이는 다양한 철제유물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형식분류를 진행하다보면 분명 토기나 석기에 비해 불리한 부분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고 말이다. 토기나 석기는 썩거나 녹이 슬지 않으니 말이다.
암튼 이번에 석제 ? 철제 무기 10점을 실측하고 관찰하면서 나름의 보고서를 작성해 봤는데 보면서 늘 느꼈지만 역시 책으로만 보고 외워서 알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중에 무기 관련된 자료가 더 많이 발견되서 이 분야의 연구가 더 활발해지기를 바라며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1) 농기구이지만 무기로도 쓰일 수 있는 도구로는 도끼[斧]와 낫[鎌]이 가장 대표적일 것이다. 안악3호분을 보면 고구려 군사편제상 도끼를 사용하는 刀斧手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쇠낫은 일종의 꺽창[戈]이나 칼[劍]의 역할을 대신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밖에 屈指具로서 쓰였을 鑄造鐵斧라든가, 쇠스랑과 같은 농기구, 끌[鑿]과 같은 工具類 역시 무기로서의 역할을 대행했을 가능성은 높다 하겠다.
2) 본고에서는 麻田里 遺蹟 C地區, 舟橋里 遺蹟, 寬倉里 遺蹟, 峨嵯山 3堡壘 遺蹟 등 서로 다른 시기와 지역차를 보이는 총 4군데의 유적에서 마제석검, 마제석촉, 철모, 철촉 등을 10점 選別해서 직접 실측하고 무기로서의 각 유물들에 대한 간단한 고찰을 덧붙여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하겠다.
3) 國立文化財硏究所, 2003,『韓國考古學事典』, 학연문화사, p.702.
4) Geoffrey le Baker, Chronicle, in Barber, The Life and Campaingns of the Black Prince, p.43. 石弓[crossbow]이라고도 불리는 서양식 쇠뇌는 중세에 폭넓게 개발되어 사용되었지만 여전히 전장터에서 유럽 각국은 다수의 長弓手를 보유하고 있었다. 100년 전쟁 중 크레시[Crecy] 전투에서 당시 유럽에서 최고로 평가받던 이탈리아 제노아 출신의 석궁 용병부대 6,000명이 프랑스왕 필립 6세와 함께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영국왕 에드워드 3세가 보유하고 있던 장궁수 7,000명에게 전멸했다. “석궁의 화살은 영국군 대열에 도달하지 못 했다.” 는 당시의 기록은 이를 반증하며 사거리가 길고 발사속도가 빠른 장궁의 위력은 이 전투에서 여지없이 보여졌고, 15차례의 접전 끝에 프랑스군은 영국군보다 3배나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패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승리의 요인을 영국군의 장궁수에서 찾는다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5)『三國史記』券6「新羅本紀」第6〈文武王〉上, “冬, <唐>使到傳詔, 與弩師<仇珍川{仇珍山}>沙?廻. 命造木弩, 放箭三十步. 帝問曰: “聞在爾國造弩射一千步, 今?三十步, 何也{耶}?” 對曰: “材不良也, 若取材本國, 則可以作之.” 天子降使求之, 卽遣<福漢>大奈麻獻木. 乃命改造, 射至六十步. 問其故, 答曰: “臣亦不能知其所以然, 殆木過海, 爲濕氣所侵者歟.” 天子疑其故不爲, 劫之以重罪, 而終不盡呈其能.” 당시 신라의 쇠뇌 제작기술은 당나라가 탐낼 정도로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만큼 신라에서 쇠뇌를 사용하던 군대를 운용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쇠뇌를 사용하는 부대의 존재나, 전투에서의 쇠뇌의 활용도를 짐작할만한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쇠뇌가 활보다 더 중요시되었던 무기였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日本書紀』卷19「欽明天皇」15年,“餘昌遂見圍繞. 欲出不得. 士卒遑駭不知所圖. 有能射人筑紫國造. 進而彎弓占擬. 射落新羅騎卒最勇壯者. 發箭之利通所乘鞍前後橋. 及其被甲領會也. 復續發箭如雨. 彌?不懈. 射却圍軍.” 오히려 위의 기록과 같이 强弓은 사람과 말을 꿰뚫을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었고 숙련된 궁수들이 쏘아대는 화살은 비오듯 하늘을 뒤덮어 적을 살상할 정도였으니, 쇠뇌 제작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각국은 궁수들의 활용도를 결코 낮출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6) 주 3)과 同, p.410.
7) 박준범, 2005,「우리나라 선사시대 간돌화살촉의 형식과 그 변화에 대한 연구」『사학지』37, 단군사학회, p.11 그림 1 참조
8) Edward McEwen, Robert L. Miller, and Christopher A. Bergmn, “Early Bow Design and Construction”, Scientific American 264(1991), p.50.
9) 최복규, 1986,「중석기시대」『한국사론』12, p.423~427.
10) Jacques Bordaz, Tools of the Old and New Stone Age (New York, 1970), p.89~90.
11) 이기길, 2004,「장흥 신북 유적의 발굴성과와 앞날의 과제」『동북아시아 후기구석기문화와 장흥 신북유적』, 전라남도 장흥군 ? 장흥 신북 구석기유적보존회 ? 조선대학교박물관. 후기구석기시대 유적에서 이미 마제석부가 출토되고 있지만 아직 후기 구석기시대의 마제석기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신석기시대의 마제석기, 그 중에서 마제석촉에 대해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12)『三國志』券30「魏書」第30〈?婁傳〉,“其弓長四尺, 力如弩, 矢用 , 長尺八寸, 靑石爲鏃, 古之<肅愼氏>之國也. 善射, 射人皆入(因)[目]. 矢施毒, 人中皆死.” 3세기대 읍루에 대한 기록만 보더라도 靑石으로 만든 석촉에 독을 발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만큼 역사시대 이후에도 석촉은 꾸준히 사용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철이 나지 않는 지역이라든가, 주변에 가공하기 쉽고 구하기 쉬운 석재가 많은 지역에서는 석촉이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철촉의 예비 무기로서 석촉을 일정량 보유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겠다.
13) ?田亮策, 1948,『朝鮮考古學硏究』, 京都, p.124~130.
14) 李白圭, 1974,「京畿道 無文土器 ? 磨製石器」『考古學』3, 韓國考古學會, p.55~111.
15) 任世勸, 1977,「우리나라 마제석촉의 연구」『韓國史硏究』17, 韓國史硏究會, p.3~34.
16) 崔盛洛, 1982,「韓國馬蹄石鏃의 考察」『韓國考古學報』12, 韓國考古學會, p.264.
17) 주 16)과 同, p.268.
18) 주 16)과 同, p.300.
19) 주 7)과 同, p.16 그림 2 참조.
20) 도성재 ? 박용희, 2004,「舟橋里遺蹟 靑銅器時代 遺構의 考古地磁氣 硏究」『舟橋里遺蹟』, 高麗大學校 埋藏文化財硏究所 ? 韓國道路工事, p.153~154. 연구 결과, 이들 주거지는 B.C 335±60년 경으로 추정되지만 이는 주거 유적지가 처음으로 세워진 연대가 아닌 아궁이가 최후로 사용된(가열된) 시기를 나타내기 때문에 유적지의 건립시기는 당연히 이보다 앞선 시기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즉, 위의 석촉 역시 B.C 4세기 이전에 제작될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21)『晉書』券97「列傳」第67〈肅愼氏傳〉,“有石?, 皮骨之甲, 檀弓三尺五寸, ?矢長尺有咫.”
22) 주 12)와 同.
23) 주 3)과 同, p.705.
24) 高麗大學校 考古環境硏究所, 2005,『峨嵯山3堡壘 1次 發掘調査 略報告』
25) 金性泰, 2005,「최근 보고된 고구려무기의 검토」『高句麗硏究』20, 高句麗硏究會, p.124.
26) Albert E. Dien, ‘A Study of Early Chinese Armor’ ARTIBUS ASIEN Vol.43 Ⅰ/2, Institute of Fine Art ? New York University, 1982, p.5~41; Albert E. Dien, ‘The stirrup and Its Effact on Chinese Military History’ Arts Orientalis Vol 16, Department of The History of Art, The University of Michigan, 1986, p.34~38. 중국 고대의 갑주 ? 마구 전문가인 디엔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중장기병이 중국의 어느 벽화자료보다 세밀한 묘사를 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27) 김경칠, 2003,「韓半島 出土 一段石斧에 對한 小考」『목포대학교박물관 20주년기념논총』, 목포대학교박물관, p. 99.
28) 孫晙鎬, 2005,「寬槍里遺蹟 磨製石器 分析」『송국리문화를 통해 본 농경사회의 문화체계』, 고려대학교 고고환경연구소, p.268.
29) 金仙宇, 1994,「한국 마제석검의 연구 현황」『韓國上古史學報』16, 韓國上古史學會.
30) 安敏子, 2001,「前期無文土器時代 石器의 特性檢討」, 公州大學校大學院 碩士學位論文, p.61. 이러한 砥石의 출토양상은 청동기시대 전기 유적의 예에서도 확인된다.
31) 高麗大學校 埋藏文化財硏究所, 2004,『麻田里 遺蹟 - C地區 -』, p.37~41.
32) 高麗大學校 埋藏文化財硏究所, 2004,『舟橋里 遺蹟』p.41~47.
33) John A. Lynn 著 ? 이내주, 박일송 譯, 2006,『배틀, 전쟁의 문화사』, 청어람미디어, p.42~43. 그리스의 重裝步兵[hoplite]은 처음에는 둔중하게 걷다가 적진 근처에 오면 달리기 시작해 적과 부딪친다. 뒷줄에 있는 병사들은 동료들의 힘에 합쳐져 앞으로 전달되도록, 방패에 어깨를 붙이고 앞으로 밀쳐댔고 근접거리에서는 칼이나 창 손잡이의 날카로운 뒷끝으로 적을 공격했다. 즉, 전투의 시작과 대부분은 항상 장창으로 이뤄졌으며 그런 중장보병의 전법은 이후 마케도니아와 로마에 그대로 전해졌다.
34) 金性泰, 1994,「高句麗의 武器(2)」『文化財』27, 國立文化財硏究所.
35) 이인철, 1996,「4~5세기 고구려의 남진경영과 중장기병」『군사』33, p.6~7.
36)『三國志』券30「魏書」第30〈東沃沮傳〉,“便持矛步戰.”
37) 慶北大學校博物館, 1990,『原三國時代文物展』.
38) 金性泰, 2001,「高句麗 兵器에 대한 硏究」『高句麗硏究』12, 高句麗硏究會, p.824. 북방계와 비교해서 남방계 병기체계를 살펴봤을 때, 창의 크기가 초대형 ? 대형이 일반적이며 이단병식 철모도 존재했다고 한다. 게다가 비실용적 의기로서의 창도 다수 확인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차이가 생긴 이유를, 북방계와 남방계의 사회구조의 차이에서 찾고 있다. 즉, 약탈경제에 기반한 북방계와 달리 남방계는 농경사회에 기초하고 있었고, 정복전을 통해서 주변지역을 복속하고 피정복민으로부터 인적 · 물적자원을 수탈하던 북방계와 달리 남방계는 그러한 면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암튼, 중요한 것은 4세기말 무렵, 고구려의 급작스러운 팽창에 한반도 남부의 정치체가 속소무책으로 당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분명 고구려가 무기라고 하는 수단에 있어서 질적 ? 양적으로 압도적이었음을 알려주는 사실이라 생각한다.
첫댓글 대단하세요
아...별말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