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연구대상 및 연구목적) 본 논문의 연구대상은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칭의론(稱義論)이다. 물론 칭의에 대한 웨슬리의 특이한 체험1)과 특징적인 견해에 대한 해석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여러 가지로 시도되었으나, 그 정확성에 있어서는 여전히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 그래서 웨슬리의 칭의론을 그의 저술에 근거하여 보다 더 정확하게 재구성하고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 본 논문의 첫째 목적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를 통하여 칭의라고 하는 현상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과연 무었인가 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 본 논문의 둘째 목적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웨슬리의 칭의론을 연구하는 이유는 적어도 웨슬리에게서 하나님의 칭의하시는 역사(役事)가 비교적 전형적인 형태로 나타났고, 그가 이 칭의하시는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성경의 증언에 일치되게 체험하였으며, 자신의 체험을 지극히 절제된 방식으로 냉철하고도 세밀하게 관찰2)하였고, 그 결과를 특히 그의 설교문들에서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웨슬리의 칭의론을 연구할 때, 우리는 종교적으로 뛰어난 인물 웨슬리의 특이한 체험과 개인적인 견해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범적인 예를 통하여 나타나고 표현된 영원히 동일하신 하나님의 칭의의 역사(役事) 일반을 좀 더 그 하나님의 현실에 일치되게 알고자 하는 것이 이 논문의 본래적인 목적이다.
(0.2.: 연구방법) 웨슬리는 칭의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다음과 같은 다양한 유형의 텍스트에 피력하였다: (1) 회심 (즉, 칭의와 중생의 체험)3) 간증문,4) (2) 설교문, (3) 회의록,5) (4) 변증문,6) 이와같은 각 유형의 문서에서 웨슬리는 칭의에 대한 자신의 동일한 이해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각 문서의 해석방법도 이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0.2.1.: 회심 간증문을 해석하기 위한 방법론) 웨슬리의 회심 간증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하여 죄인을 용서하시고 열납하여 새생명으로 중생하게 하시는 칭의와 중생 현상에 있어서 개인적 체험의 차원이 웨슬리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지극히 세밀하게 관찰되었다. 따라서 그의 회심 간증문을 분석하여 칭의가 무엇인가를 알고자 할 때는 칭의라는 현상의 개인적 체험의 차원이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심리학적 방법의 적용에서 초래되는 오류) 그러나 개인적 체험의 차원이라고 해서 심리학적 방법으로 접근해서는 칭의현상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칭의의 본질은 인간의 심리 안에서 일어나는 심리학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외적 관계의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변화라는 칭의현상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면, 결국 '하나님'을 인간의 심리적 내면의 理想的 상태로 환원하게 되고 '칭의'를 심리적 내면에서의 나 자신과의 화해로 대체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칭의해석을 위한 심리학적 접근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단지 인간 자신의 심리적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로 왜곡할 뿐만 아니라, 신학을 심리학으로 변질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7) 된다.
(지식사회학적 방법의 적용에서 초래되는 오류) 또는 개인의 사고방식과 사상은 그가 처해 있는 사회적 환경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보는 지식사회학의 방법8)으로 접근하여 칭의체험의 현상을 사회적 상황에 대한 개인의 사상적 반응의 한 형태로 파악하고자 할 경우에도 칭의의 본질은 파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칭의의 핵심은 오히려 칭의받는 자가 바로 칭의받는 그 시점에서 처해 있는 어떠한 사회학적 상황(예컨데, 그의 신분, 성별, 연령, 사회적 계층 등)과도 상관없이 오로지 믿음, 그것도 특정한 의미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초래되는 하나님과 칭의받는 자 사이의 관계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변화를 의미하는 칭의현상을 해석하기 위하여 사회학적 내지는 지식사회학적으로 접근하면, 결국에는 불가피하게 '하나님'을 '사회적 관계 안에서의 理想的 인간과 理想的 사회환경'을 의미하는 소위 '인간화'라는 것으로 대체하게 되고 칭의받는 자를 소위 '인간화의 대상이요 주체'로서 자신의 주변상황에 대하여 사회학적으로 반응하는 존재로만 보는 오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결국에는 신학의 모든 개념을 일종의 인간학 내지 사회학의 아류개념, 즉 신학이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로 변질시키게 된다.9)
(성경과 체험 사이의 상호호환 관계에 근거한 신학적 접근방법) 그렇다면 칭의현상의 개인적 체험의 차원을 성경에 증언된 바로 그런 의미의 칭의라는 사실에 일치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칭의현상을 성경이 증언하는 의미에 따라 관찰해야 하고, 둘째로 칭의의 개인적 체험의 근거를 역시 성경의 증언에 따라서 이해해야 한다.
첫째 항목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칭의현상을 증언하는 원천적 문서인 성경이 이 문제에 있어서도 유일한 기준으로서의 권위를 갖는다고 인정한다면, 칭의의 개인적 체험은 당연히 칭의에 관한 성경의 증언에 따라서 관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칭의라는 것은 오로지 성경에 증언된 바로 그런 의미의 현상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또한 성경에 증언된 칭의의 의미는, 적어도 웨슬리 자신의 회심 간증문을 따른다면, 성경 그 자체의 증언들의 상호비교만으로, 즉 "문자적 해석"(literal interpretation)10)만으로 명료하고도 충분하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둘째 항목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칭의라는 것은 성경에만 증언되고 끝난 과거의 종교적 내지 문화적 현상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증언하고 또한 웨슬리가 간증한 바와 같이,11)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하시고(시 90:2) 동일하신(시 102:25-27)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각 개인에게 차별없이(롬 3:22) 성경이라는 책 바깥의 현실 안에서 언제 어디서라도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그의 회심 간증문에서, 칭의에 관하여 성경에 '믿음으로만 칭의를 받는다'는 내용으로 증언되어 있다는 사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먼저 확인하고, 그런 다음에 실제로 성경이 증언하는 바로 그런 방식과 내용대로 칭의를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을 듣고 '믿음으로만 칭의를 받는다'는 성경에 증언된 하나님의 약속이 성경 밖의 오늘의 현실 안에서도 실현된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한다.12) 이것이 바로 웨슬리 자신도, 그가 간증한 대로, 칭의의 약속과 칭의의 개인적 체험의 차원을 비로소 올바로 이해하고, 그런 다음에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칭의받게 하는 믿음(justifying faith)을 간구하여 받음으로써 칭의와 중생을 스스로 체험하게 된 비결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학적 방법을 통하여 웨슬리의 회심 간증문을 분석하면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칭의의 개인적 체험의 차원은 성경에 증언된 바로 그 하나님의 칭의약속이 '칭의받고 구원받게 하는 믿음'(justifying, saving faith)13)이라는 특정한 의미의 믿음을 받는 자 각 개인에게 실현되는 현상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둘째로는 성경에 명제의 형식으로 표현된 일반적인 약속이 한 개인의 체험과정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진행되며 실현되는 것인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이를 통하여 칭의에 있어서 성경에 함축되어 있고 교리에 명시된 일반적 명제와 칭의받는 각 개인의 구체적인 칭의체험 사이의 동질적 일치와 상호호관 관계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과 체험 사이의 상호호환 관계의 궁극적 근거는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의 구원하시는 활동, 즉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웨슬리의 구원관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일반적 명제들에 의하여 증언된 하나님의 구원활동과 이 명제들이 실현되어 구원받는 각 개인에게 체험되는 하나님의 구원활동 이 두가지를 동시에 표현하는 말이 웨슬리에게 있어서는 바로 '은혜'라고 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원의 순서에 따라 '선행하시는 은혜'(preventing grace), '죄를 깨닫고 자백하게 하시는 은혜'(convincing grace), '칭의하시는 은혜'(justifying grace), '성화하게 하시는 은혜'(sanctifying grace)라고 세분하므로,14) 그 자신의 구원의 과정도 이런 순서의 은혜의 역사에 따라 진행되었다고 보았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웨슬리의 회심 간증문을 해석할 때, 또한 이러한 순서의 은혜 개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현상의 개인적 차원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렇게 접근하는 방법을 '성경과 체험 사이의 상호호환 관계에 근거한 신학적 방법'이라 부르고자 한다.
(0.2.2.: 설교문을 해석하기 위한 신학적-논증적 접근방법) 둘째로, 웨슬리의 설교문들에 피력된 그의 칭의론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의 설교문의 형식적 및 내용적 특성에 적합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그의 설교문들은 거의 한결같이 소위 교리적 설교로서의 특성을 보인다. 여기서 교리적 설교라함은 해당 성경귀절에 포함된 교리적 내용을 명제와 논증의 형식으로 표현하여 증거하는 설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칭의에 관한 웨슬리의 설교문들도 증거하고자 하는 교리들을 명제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그 각 명제를 해당 성경귀절들로써 뒷받침하며 신학적-논리적 논증으로써 입증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또한 제시된 명제들이 어떤 논리에 근거하여 어떤 순서로 상호연결되어 하나의 교리체계를 이루는 것인지를 보이고자 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러므로 칭의에 관한 그의 설교문들을 분석할 때도 우리는 그가 증거하고자 하는 교리의 명제들을 발견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성경적 및 신학적 논증을 정확하게 추적하여 재구성해야 한다. 그리하여 각 설교에 피력된 그의 칭의에 대한 교리적 이해를 신학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파악할 뿐만 아니라, 이들 명제와 논증들로써 구성되는 칭의에 관한 그의 이해의 전체적이고 체계적인 구조를 재구성해야 한다. 이런 방법을 우리는 '신학적-논증적 방법'이라고 부른다.
(0.2.3.: 회의록을 해석하기 위한 합의이론적<cosensus- theoretical> 접근방법) 회의록에 피력된 칭의에 관한 명제들은 설교문들에 피력된 칭의에 관한 명제들과 동일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이 양자 사이에는 적어도 한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진리이론적 차원의 차이이다. 즉, 설교문들에 피력된 칭의명제들은 성경적이고 정확하고 세부적인 논증으로 뒷받침이 되어 설득력이 있더라도, 아직은 성경에 근거한 웨슬리 개인의 주장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감리회원들의 공식적인 회의에서 결정된 칭의명제들은 이제 적어도 감리회원들에게는 교리적인 구속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로써 어떤 명제가 진리적 성격을 더욱 확보하고 사회적 구속력을 갖게 되는데 필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합의(cosensus)로서의 성격을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의록에 피력된 칭의명제들을 분석하여 웨슬리의 칭의명제들과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웨슬리의 칭의명제들이 잠재적으로 갖는 감리교 교리로서의 합의적 구속력을 소급하여 확인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과정이다.
(0.2.4.: 변증론을 해석하기 위한 신학적-사회학적 접근방법) 웨슬리는 자신의 칭의론을 다양한 방향으로부터의 오해와 비판에 대하여 변증하는 글들을 남겼다. 이 변증론들은 웨슬리의 칭의론이 가졌던 (a) 신학사상사에 있어서의 위치와 (b) 신학사상과 사회적 집단 사이의 역학적 관계에 있어서의 위치를 아는 데 도움이 된다.
(ad a) 웨슬리의 변증론은 비판자들이 자신들의 어떤 신학적 오류로 인하여 웨슬리의 칭의론을 이단설로 오해했는가를 알게 함으로써 웨슬리의 칭의론이 그 당시 뿐만 아니라, 기독교 사상사에 있어서 칭의론에 관련된 다양한 신학사상의 조류 가운데 어떤 신학적 위치에 있는가를 알게 한다.
(ad b) 또한 그의 변증론은 비판자들의 칭의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어떤 사회집단에 속해 있는가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알게 하는 바, 이들의 잘못된 칭의론들이 어떠한 사회학적 및 사상적 환경과 이유에서 발생하고 주장되는가를 알게 함으로써, 웨슬리의 칭의론이 그 사회 안에서 갖는 의미를 알게 한다. 즉, 어떤 사회적 집단들이 웨슬리의 칭의론을 혐오했으며, 또 어떤 사회적 집단이 그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웨슬리의 칭의론을 따랐는가를 알게 한다. 그러므로 칭의론에 관한 웨슬리의 변증론을 해석할 때, 이러한 상황에 주목해야 웨슬리의 칭의론이 갖는 사회학적인 의미와 기능을 파악할 수 있다.
(0.3: 연구자료) 본 논문의 연구목표를 위하여 우리는 (1) 웨슬리의 회심 간증문과 (2) 그의 설교 가운데 칭의론과 관련되는 설교들과 (3) 회의록에서 칭의론에 관련된 부분과 (4) 칭의론에 대한 변증문들을 분석하고자 한다.
(0.3.1.) 그의 회심 간증문을 분석하는 이유는 웨슬리에게 있어서 회심(conversion)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고, 즉 칭의받고, 거듭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6) 이 회심 간증문에서 웨슬리는 그로서는 칭의와 중생에 대한 최초의 체험과 본격적인 깨달음을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0.3.2.) 칭의론에 관련된 그의 설교로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Justification by Faith"("믿음에 의한 칭의").17) 이 설교는 문서로서는 1746년에 처음 발표되었으나, 이 설교의 본문인 로마서 4장 5절을 근거로 하여 칭의에 관하여 구두로 설교를 행했다는 사실이 그의 일지 1738년 5월 28에 기록되어 있다.18) 그렇다면 이 설교가 사실은 웨슬리의 회심(1738년 5월 24일) 이후 칭의에 관한 본격적인 설교로서는 최초의 것이다.
(2) "Salvation by Faith"("믿음에 의한 구원").19) 이 설교는 웨슬리가 회심 후 18일 지나서 1738년 6월 11일에 Oxford 대학 채플에서 행한 칭의에 관한 설교이다. 소위 대학설교로서는 칭의에 관한 그의 최초의 설교이며, 그의 칭의에 관한 설교들 가운데 가장 전체적이고 체계적인 설교이다.
(3) "The Almost Christian"("거의 그리스도인").20) 이 설교는 1741년 7월 25일 Oxford 대학에서 행한 설교로서, 그 중심 내용은 칭의와 중생 이전의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에 관한 비판적인 묘사이다. 이 설교에서 웨슬리는 칭의와 중생 이전의 자신의 상태를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의 전형으로서 소개하고 있다. 즉, 이 설교는 칭의의 길이 아니건데 사람들이 흔히 칭의의 길이라고 오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므로, 웨슬리가 말하고자 하는 칭의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소극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기여를 한다.
(4) "Christian Perfection"("그리스도인의 완전").21) 1741년에 문서로 발표된 이 설교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에서 완전한 것인가를 설명한다. 이 설교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무엇보다도 먼저,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완전한 것이요, ......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다'".22)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라 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상태와 연결된 것을 볼 때 칭의받고 중생한 자이지만 성화에 있어서는 아직 초보의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완전하다는 것이 웨슬리가 이해하는 완전의 무엇 보다도 중요한 국면이다. 그런데 성화에 있어서 초보라는 것은 아직도 죄를 범하지 않는 일에 있어서 온전치 않다는 뜻이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의 상태의 그리스도인은 이런 의미에서는 완전한 것이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는 왜 그들을,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즉, '죄를 짓지 않는다면'이라는 조건문이 아니라, '죄짓지 않는다는 측면에서'라는 사실판단의 문장이다!) 완전하다'라고 말하는가? 여기에 웨슬리가 깨달은 칭의의 완전성이라고 하는 중요한 비밀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웨슬리가 깨달은 칭의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 설교는 더 없이 중요하다.
(5) "Scriptural Christianity"23)("성경적 기독교"). 이 설교는 1744년 8월 24일에 Oxford 대학에서 행한 대학설교이다. 여기서 웨슬리는 그가 깨달은 칭의와 중생을 중심개념으로하여 기독교의 역사적 발전을 이해하고 있다. 즉, 칭의와 중생은 단지 개인적인 차원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 전체와 인류 전체를 포괄하는 기독교의 역사적 발전의 동력이요 핵심으로 이해되고 있다. 웨슬리가 깨달은 칭의와 중생의 본질(인간을 데리고 하나님 자신이 전개하는 갱신의 役事)과 그 작용범위(개인과 歷史 전체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전개하는 갱신활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설교이다.
(6) "The Righteousness of Faith"24)("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1746년에 문서로 발표된 이 설교에서 웨슬리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비교하면서, 왜 칭의는 후자에 의해서만 가능한가를 설명한다. 이런 설명의 의도는 칭의는 왜 인간에게서 나오는 어떤 무엇으로도 안되고, 오로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으로만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고자 한다. 웨슬리의 칭의론을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죄인인 인간을 칭의하시는 하나님과 그 앞에 선 인간을 구별하지 못하는 오류를 고치며, 하나님이 사실로 누구시고 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를 이해하도록 돕는 설교이다.
(7) "The Way to the Kingdom"25)("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 문서로서는 1746년에 발표된 이 설교에서 웨슬리는 칭의에 이르는 과정을 단계별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칭의하시는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을 이 하나님에게 일치되도록 인도하시는 과정이며 동시에 인간이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과정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설명이다.
(8) "The Witness of the Spirit I"26)("성령의 증거 I")과 "The Witness of the Spirit II"27)("성령의 증거 II"). 1746년과 1767년에 각각 발표된 이 두 편의 논문은 웨슬리의 신학적 인식론을 피력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나에게 행하시는 일을 나는 어떻게 사실에 일치되게 인식하고 확신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웨슬리는 이 문제를 특히 칭의와 중생 및 성화와 관련지어 설명한다. 그러므로 이 두 편의 논문은 웨슬리가 파악한 칭의의 현상에 있어서 특히 인식론적인 측면, 즉 칭의의 확신 또는 구원의 확신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0.4.: 연구범위) 본 논문에서는 우선 웨슬리의 회심 간증문의 분석 및 해석에만 국한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위에 소개한 자료를 모두 분석하여 웨슬리의 칭의론을 해석하고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본 논문의 제한된 지면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의 칭의론을 이 제한된 지면에 압축할 경우에는 앞선 연구들의 피상성을 답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에 언급된 나머지 자료들의 분석과 해석은 "존 웨슬리의 칭의론 연구 (II)" 등으로 연속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에 부합한다고 보인다.
(1.) 회심 간증문에 나타난 웨슬리의 칭의 이해
(1.0.1.: 회심 간증문에 나타난 웨슬리의 칭의이해의 본질) 회심(즉, 웨슬리에게 있어서는 칭의와 중생)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최초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 갔고, 그래서 하나님을 이제 처음으로 올바로 알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회심 간증문에는 자신이 회심 전에 하나님을 오해했고 실제로는 알지 못했다가 이제는 하나님을 실제로 안다는 사실과 그 내용을 이제 하나님에 의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 이 하나님을 실제로 알기 시작한 사람의 입장에서 서술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해서 사실대로 알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서술하게 된다.
그러므로 회심 간증문에서는 무엇 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오해의 내용과 그 원인,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올바로 알기 시작한 내용과 그 근원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전혀 다른 세계를 구분짓는 획기적인 사건이 칭의와 중생인 바, 바로 이 칭의와 중생을 발생시키는 주체인 하나님의 활동에 또한 주목해야 칭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올바로 이해하는 길로 인도된다.
(1.0.2.: 회심 간증문의 서술 구조) 회심 현상에 대한 웨슬리의 이해가 그러하기 때문에, 그의 회심체험에 대한 서술도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1.a.) 자연인28)은 하나님과 그 앞에서의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다. (1.b.) 회개 이전의 자연인은 이러한 상태로부터 스스로 벗어나지 못한다.
(2.a.) 자연인은 자신의 원죄상태를 체험적으로 깨달을 때,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올바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율법적 회개"29)이다. (2.b.) 그러므로 자신의 원죄상태의 체험적 깨달음이 곧 칭의와 중생의 체험은 아니다. (2.c.) 자신의 원죄상태의 인식이 비로소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 인도한다. 여기서 복음의 올바른 이해는 아직 믿음이 아니라, "복음적 회개"30)이다. (2.d.) 자신의 원죄상태의 인식(율법적 회개)과 복음의 올바른 이해(복음적 회개)는 칭의약속을 실현하시는 하나님에게 기대를 걸게 한다. 여기까지가 '칭의 이전의 회개'31)이다
(3.a.) 하나님이 이 기대에 응답하시므로 칭의의 약속을 실현하시고, 이에 따라 당사자는 칭의와 중생을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순서는 웨슬리가 말하는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 각 단계마다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다음과 같이 상호부응한다:
(1.a.)와 (1.b.) 항목은 '선행하시는 은혜'(preventing grace)가 역사하는 단계이다.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원죄 하에 있는 죄인'이라는 것을 언제나 처음 느끼듯이 찰나적으로 희미하게 인식하다가 망각하다가 하는 것을 반복할 뿐, 원죄에 대한 명백한 인식이 아직 없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2.a)부터 (2.d.) 항목까지는 '죄를 깨닫고 자백하게 하시는 은혜'(convincing grace)가 역사하는 단계이다.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는 자신이 원죄 하에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이제 "그 자신의 어떠한 종류의 공로도 의도 의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음으로 ......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죄책을 져야 하는 자로서 하나님께로 나아오는"32)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을 이해하게 되고 복음의 약속에 기대를 갖게 되는 단계이다.
(3.a)와 (3.b.)의 단계는 '칭의하시는 은혜'(justifying grace)가 역사하는 단계이다. 왜냐하면 이 단계에서는 하나님이 복음의 약속에 기대를 걸고 있는 죄인에게 약속대로 칭의받게 하는 믿음을 허락하시고 이를 통한 칭의와 이와 동시에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1.1.) 하나님과 그 앞에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전적인 오해
(ad 1.a.) (명제 1: 칭의와 중생 以前의 자연인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오해하거나 또는 이해하는 것 같아도 사실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웨슬리는 성직자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고 그 가르침을 철저히 따라간 경우에 속한다. 그러는 동안에 그의 목적은 구원에 있었고, 이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여 내적으로 외적으로 하나님에게 일치하는 것이었다.33) 그러나 그는 1738년 5월 24일 그의 나이 35세에 비로소 칭의와 중생을 체험하고, 그 순간에 하나님께 일치되기 시작하였고, 이 때부터 처음으로 하나님을 사실대로 알기 시작한 것이다.
웨슬리의 경우, 그가 35세에 이르기까지 칭의와 중생을 체험하지 못했던 원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믿음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이에 일치하는 행위가 있어야 칭의를 받는다'는 잘못된 칭의론을 배워 자기 것으로 삼고 따랐던 데에 있다.34) 잘못된 칭의론을 정확하게 따르고 있는 동안에는 당연히 진정한 칭의에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잘못된 칭의론은 그로 하여금 올바른 칭의론을 거부하게 하고, 따라서 올바른 칭의론이 지시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칭의의 활동을 이해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의식적으로 거부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바른 칭의론을 지적으로 이해하고 행동으로 따른다고 해도 그것이 곧 칭의와 중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웨슬리의 간증문에 의하면, 그가 페터 뵐러(Peter Böhler)를 통하여 올바른 성경적 칭의론을 듣게 되었을 때, 일단의 검증과정을 통하여 그 칭의론의 진리성을 확인하게 되고, 그런 후에 그 칭의론에 따라 자신의 상태가 하나님께 내적으로 외적으로 일치되도록 노력해야겠다고 각오할 정도로 그 칭의론을 지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확신하게 된다.35) 그러나 그가 이 올바른 칭의론을 알고 따랐다고 하는 것이 곧 그가 칭의와 중생을 체험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적 칭의론의 핵심이 바로 칭의와 중생은 인간의 인식이나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이요 그 결과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웨슬리도 올바른 칭의론을 인식의 차원에서는 확신한 후에도, 하나님이 손수 그에게 칭의와 중생으로 역사하시기 전에는, 한 달여 동안36) 여전히 칭의와 중생 이전의 상태에서 칭의받게 하는 믿음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말하여, 사람이 잘못된 칭의론을 따를 때는 물론이거니와 올바른 칭의론을 따를 때에도, 만약 하나님이 아직 그에게 칭의와 중생으로 역사하시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 칭의와 중생 이전의 자연인인 것이다. 즉, 칭의와 중생은 칭의받고 중생하기 이전의 자연인의 인식이나 행동, 심지어 올바른 내용의 칭의론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그에 따른 올바른 행동 그 자체에서부터 생산되는 무엇이 아니라, 이런 과정 안에서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서 주어지는 바 죄인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구원활동에 의해서만 결과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와 중생 이전의 자연인은 혹은 잘못된 칭의론을 따르므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오해하며 거부하고 있거나, 혹은 올바른 칭의론을 지적으로나 행동으로 따르고 있어도 하나님을 사실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실대로 알게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내가 하나님께 일치되는 새로운 피조물(자연인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됨으로써 비로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를 웨슬리는 성경에 따라 칭의와 중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ad 1.b.) (명제 2: 회개 전의 자연인은 하나님과 그 앞에서의 자신의 진정한 정체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오해하며, 따라서 칭의에 대하여 잘못된 관념을 지속적으로 갖되, 이 오해와 오류로부터 스스로 벗어나지 못한다) 웨슬리의 회심 간증문에 의하면, 칭의와 중생 이전의 자연인으로서의 웨슬리는, 특히 성직자가 되는 길로 들어선 1725년 이후로부터 올바른 칭의론을 알고 그것을 따르기로 결심하는 1738년 4월까지, 자신의 잘못된 칭의론에 따라 하나님께 일치하고자 최선을 다하여 노력했으나 그런 노력이 오히려 칭의하시는 하나님을 힘써 거부하는 것이었다.37) 그러나 그는 칭의와 중생 이전에는 자신의 이러한 상태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잘못된 칭의론을 진리라고 확신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논리정연하게 그리고 열성적으로 설교하며 설득력있게 가르쳤다. 소위 "신성 클럽"(Holy Club)에서의 활동도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38)
그렇게 하는 가운데 잠깐 동안 자신의 칭의론에 회의하는 때가 있었으나,39) 이런 회의가 올바른 칭의론에 대한 관심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또 하나의 오류인 소위 신비주의에 관심을 갖게 한다.40) 그러다가 신비주의에도 실망하고 다시 처음의 잘못된 칭의론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곧 이어서 선교사로서 미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 만난 모라비아교도들이 '믿음으로만 칭의를 받는다'는 말을 했을 때, 웨슬리는 오히려 그들의 올바른 칭의론을 오류라고 보았으며, 그 오류의 원인을 그들의 무식 탓으로 돌렸다. 41)
이런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자신의 칭의 개념이 오류라고 하는 것을 지적으로 깨닫고 인정하기 전에는, 즉 그 오류에 대한 지적 회개 이전에는,42) 성경적 칭의론을 듣거나 읽어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잘못된 칭의론에 대한 지적인 차원의 회개 이전이라는 것은 잘못된 칭의론에 의거하여 스스로 만들어 추종해 왔던 여하한 형태와 내용의 소위 '하나님'을 버리기 이전의 상태요, 따라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 전적으로 하나님으로서 활동하시는 전적 수동의 상태에 들어가기 이전이므로, 여전히 그 오류적 칭의 개념에 의하여 그의 생각과 삶이 주관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신의 칭의 개념의 근본적 오류에 대한 깨달음과 회개조차도 자연인으로서는 그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으로써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웨슬리에게 있어서 '자연인'이라는 개념은 아직 원죄 아래 있는 인간이라는 뜻인데, 원죄 아래 있다는 것은 바로 스스로 선을 알 수 없는 본성의 전적 부패와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는 전적 무능력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구원의 각 순서마다 각각 해당되는 은혜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가 있음으로써43) 구원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 가운데 잘못된 칭의 개념의 오류를 깨닫게 하시는 은혜는 '선행하시는 은혜'(preventing grace)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백하게 하시는 은혜'(convincing grace)이다.44) '선행의 은혜'를 통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즉 원죄 개념을 체험적으로 알고 난 후에 돌이켜 보건대 원죄 하에 있는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최초로 (또는 매번 최초이듯이) 찰나적으로나마 희미하게 인식하는 것이요,45) 이것이 반복되다가 '죄를 깨닫고 자백하게 하시는 은혜'를 통해서는 원죄 하에 있는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두려워하며 이 원죄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려는 염원으로 복음의 약속에 기대를 걸게 되는 것이다.46) 이 기대에 하나님이 '칭의하시는 은혜'(justifying grace)로써 응답하실 때, 칭의받게 하는 믿음과 칭의와 중생이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요, 이를 통하여 원죄 하에 있던 그 자연인은 비로소 원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 밑으로 자녀로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 전의 자연인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원죄 하에 있는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한 오해 속에 지속적으로 있으며, 따라서 그릇된 칭의관념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지 못한다.
(1.2.) 하나님과 그 앞에서 죄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지적인 이해, 즉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
(ad 2.a.) (명제 3: 자연인은 원죄 개념을 체험적으로 깨달을 때,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의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올바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율법적 회개'이다) 그 후에 웨슬리가 미국 선교사 활동에 실패하고 귀국했을 때, 그의 잘못된 칭의론에 대하여 회의하고 비로소 올바른 칭의론에 관심을 갖게 된다.47)
이런 변화를 초래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이었던 것은 그가 그의 잘못된 칭의론의 중추인 '구원의 기준에 스스로 도달할 수 있다 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실제로 의심하고 상실하게 됐다는 사실이다.48) 이것이 곧 교리적으로 표현하여 '원죄'라고 하는 것에 대한 체험적 깨달음이다. 즉, 인간은 그 본성이 전적으로 부패하여 스스로 선을 알지도 못하며, 그리하여 스스로 선을 행할 능력이 전적으로 없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무능력의 현실'을 실제로 사실에 일치되게 깨달은 것이다.49) 웨슬리는 이러한 자신의 원죄상태의 깨달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사반나에 있었던 기간 동안 내내 나는 이런 식으로 허공만 치고 있었다. 그 분을 믿는 살아 있는 믿음에 의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의 義'를 몰랐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 그러나 나는 '육적이요 죄 아래 팔려' 있었다. ...... 의도하는 것은 내게 있으나, 그 의도하는 바 선을 어떻게 실행하는지를 나는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의도하는 바 선을 나는 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히려 내가 의도하지 않는 바 악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 '내 지체 가운데 지배하고 있는 법이 내 마음의 법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여전히 나를 죄의 법에게 포로로 잡히게 하고 있는 것이다'".50)
이러한 원죄의 깨달음은 교리적으로 말하여, 특히 웨슬리에게 있어서는, "믿음에 앞서는 첫번째 회개, 즉 죄의 깨달음과 자백, 또는 자기인식"51)이라고 하는 바, '칭의 이전의 회개' 가운데 '율법적 회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칭의 이전'이라고 하는 것은 달리 말하여 아직 원죄 하에 있다는 것이므로, 이 상태에서는 스스로 원죄상태를 인식하지도 자인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 자신의 원죄상태를 인식하며 회개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곧 '죄를 깨닫고 자백하게 하시는 은혜'(convincing grace)요, 이 은혜에 대한 인간 편에서의 유일하게 합당한 반응 가운데 한 단락이 곧 원죄 아래 죄인으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는 '율법적 회개'이다.
(ad 2.b.) (명제 4: 자신의 원죄상태의 체험적 깨달음이 곧 칭의와 중생의 체험은 아니다.) 그러나 원죄의 체험적 인식이란 의미의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적인 한 면을 그 사실에 일치되게 인식했다는 뜻이요, 아직은 하나님을 사실에 일치되게 인식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통하여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는 칭의하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아직은 올바로 인식하고 믿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원죄상태의 체험적 인식은 칭의와 중생 이전의 율법적 회개일 뿐이라는 의미에서 웨슬리는 "우리가 복음을 믿을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52)라고 말한다. 여기서 '복음에 대한 믿음 이전의 회개'라는 것이 바로 자신의 원죄상태의 인식인데, 그렇다면 이 원죄상태의 인식은 복음을 믿기 이전에 복음에 대한 믿음과 상관없이 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원죄상태의 인식은 믿음을 통해서만 허락되는 칭의와 중생 그 자체도 아니요, 칭의와 중생 이전의 자기인식이므로 더구나 칭의와 중생의 결과는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웨슬리는 칭의는 회개를 통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명제를 웨슬리는 '믿음만이 칭의의 유일하고도 필요충분한 조건'이라고 표현한다.53)
(ad 2.c.) (명제 5: 자신의 원죄상태의 인식이 비로소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 인도한다. 여기서 복음의 올바른 이해는 아직 믿음이 아니라, '복음적 회개'이다.) 그러나 자신의 원죄상태에 대한 체험적 인식은 죄인이 칭의와 중생으로 인도되는데 있어서 중요한 길목이다. 왜냐하면 원죄 하에 있는 자연인이 이러한 죄인으로서의 진정한 자기 정체성, 즉 죄짓게 하는 세력(the power of sin) 하에 종으로 잡혀 있는 자신의 실제 모습을 알게 되었을 때, 이제 비로소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따랐던 여하한 형태와 내용의 칭의관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된다.
그래서 웨슬리도 미국에서의 선교활동 실패 과정에서 원죄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후 귀국했을 때, 지금까지 자신이 따랐던 칭의관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새로운 문제해결의 길을 암중모색하게 된다: "1738년 1월 영국으로 돌아올 때, 죽음의 절박한 위험 속에서, 그리고 이 이유 때문에 매우 마음이 불안한 가운데서, 나는 이 불안의 원인은 불신앙(unbelief)이라는 것과 그리고 무언가 참된 살아 있는 믿음(a true, living faith)을 얻는 것이 나에게 '필요한 유일의 것'이라는 것을 굳건히 확신하게 되었다."54)
여기서 "불신앙"이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칭의관에서 말하는 믿음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그의 칭의관에 의하면 사람은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따라55) 행하는 율법의 행위에 근거하여 하나님 앞에서 칭의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에 있어서 실패하면서 자신의 원죄상태를 인식하고 있었던 웨슬리로서는 죽음의 절박한 위험 앞에서 영원히 칭의받지 못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가능성 때문에 매우 불안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신앙"은 이 하나님에게 이런 상태로서는 구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곧 지금까지 그가 따랐던 칭의관에 대하여도 더 이상 기대를 걸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자신의 원죄상태를 인식했는데, 이 칭의관은 인간의 능력과 노력으로 행하는 율법의 행위에 의한 칭의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웨슬리는 "무언가 참된 살아 있는 믿음"에 기대를 걸게 된 것이다.56)
그러나 그는 이 믿음이 과연 무엇인지 또 어떻게 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 믿음을 이 믿음의 올바른 대상에 고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즉, 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을 생각하고 있었고, 그리스도를 믿는 또는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 믿음을 전적으로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57) 이것이 바로 자신의 원죄상태를 인식했으나 원죄로부터 벗어나는 길, 즉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는 믿음에 의한 칭의의 길을 듣기는 했으나 아직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그 믿음과 칭의를 향하여 암중모색하는 형태이다.
여기서부터 웨슬리는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며 복음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길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페터 뵐러(Peter Böhler)가 이 때 웨슬리에게 복음의 핵심인 믿음에 의한 칭의를 설명했을 때 웨슬리는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뵐러가 말한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에는 두 가지 열매가 동반된다는 사실이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이것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에 대하여 단언하기를, 이 믿음은 이에 불가분리적으로 동반하는 두 가지 열매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죄를 이기는 것'(dominion over sin)과 '용서의 확신에서 오는 항시적 평화'(constant peace from a sense of forgiveness)라고 했을 때, 나는 매우 놀랐으며 이를 마치도 새로운 복음인양 생각했다".58) 여기서 '죄를 이긴다'는 것은 지금까지 나를 원죄의 형태로서 지배하고 종으로 삼고 있던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어 더 이상 그 지배를 받지 않게 됨으로 죄의 유혹을 이기며 죄짓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고, '용서의 확신에서 오는 항시적 평화'라는 것은 이제 내가 하나님과 화해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상태로 들어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정확하게 나중에 웨슬리가 칭의에 관한 설교들에서 정리하여 피력하게 되는 올바른 칭의론의 기본구조이다. 즉, 웨슬리는 뵐러를 통하여 복음의 핵심 내용인 올바른 칭의론의 기본적 내용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는 뵐러의 그런 칭의이해가 "새로운 복음"처럼 들렸다고 했다. 여기서 '새로운 복음'이라는 말은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단적 오해라는 의미로서 쓴 말이다. 그 이유는 웨슬리가 생각하기에 뵐러의 견해는 첫째로 성경에 일치하지 않고, 둘째로 이성적 상식에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즉, 웨슬리는 지금까지 칭의에 관한 성경의 증언들을 모두 그릇된 칭의론에 따라 해석하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에, 뵐러의 올바른 칭의론에 따른 성경 해석이 오히려 오류처럼 들렸던 것이다.59) 또한 웨슬리는 성경적 사고가 아니라, 그 당시의 경험주의적 이성주의의 사고로 교육받고 그것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적 사고에 일치하는 뵐러의 칭의명제가 오히려 오류처럼 들렸던 것이다.60) 즉, 뵐러의 주장은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죄의 용서가 있는 것이요, 죄가 용서된 확신이 없다면, 그 믿음도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이 두 가지 열매가 없는 경우에도, 특히 용서의 확신이 없는 경우에도, 믿음은 있을 수 있는"61)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웨슬리로서는 자신이 (물론 오해된 의미의) 믿음이 있다고 전제하고 있는데, 지금 그는 자신의 원죄상태를 인식하고 있으므로 용서의 확신이 없는 것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뵐러의 명제가 오류라고 추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웨슬리의 오류는 두가지이다: 첫째로는 '용서의 확신'이라는 칭의하시는 하나님과 칭의받은 나 사이의 관계변화에 대한 인식을, 즉 웨슬리가 8년 후에 "성령의 증거 I"이라는 설교에서 옳게 말하게 되는 바 이 관계변화에 대한 성령의 증거에 의한 직관적 인식을62) 일종의 경험주의적 심리학의 방법으로, 즉 감각적 인식기능과 이성적 인식기능을 통하여 인식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그는 이러한 경험주의적 관찰과 이성적 추론에서 얻은 인식을 전제하고, 그렇다면 (물론 뵐러 자신의 개인적 주장이라고 오해된) 성경의 칭의명제가 오류라고 판단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성경의 칭의명제의 진위여부를 감관의 관찰과 이성의 추론으로만 얻은 인식에 따라 판단하는 오류이다. 이것이 오류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적어도 칭의론에 있어서는 칭의 이전의 인간은 원죄 하에서 그 본성이 완전히 부패하여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 볼 수 없다고 하는 바, 이러한 인간이 성경에 증거된 칭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명제들의 진위여부를 원죄 하에 있는 감관과 이성의 판단력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시사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웨슬리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칭의론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포기했으나, 그 칭의론을 가능하게 한 경험주의적이고 이성주의적인 사고의 틀63)은 여전히 그의 사고방식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사고의 틀이 복음을 이해하지도 수용하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복음의 이해와 수용을 방해하는 이러한 사고의 틀이 수정된 것은 그가 (a) 성경해석의 방법을 소위 "문자적 해석"(literal interpretation)으로 바꾸고, (b) 이렇게 해서 얻은 성경의 명제가 실제로 경험적 사실로 실현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ad a) 여기서 성경의 '문자적 해석'이라는 것은 "인간들의 주석들을 배제하고,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만을 숙고하되, 말씀과 말씀을 서로 비교하며, 모호한 구절은 보다 명료한 구절에 의거하여 설명하는"64) 방법이다. 이러한 성경해석 방법의 핵심은 성경을 신학적 인식의 유일한 권위요, 필수적이고, 명료하며, 충족한 근거로 인정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올바른 방식이다.65) 이것이 웨슬리의 잘못된 경험주의적 사고방식을 진정한 의미의 신학적 사고방식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즉, 인간의 감관의 관찰과 이성의 판단에서 나온 인식이 하나님 말씀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감관의 관찰과 이성의 판단의 내용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웨슬리는 비로소 복음의 문자적 내용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되며, 자신의 칭의관이 성경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성경구절들은 모두 나의 의견(즉, 그릇된 칭의관: 역주)에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66) 이것이 소위 '복음적 회개'의 중요한 일단면이다.
(ad b) 성경의 명제가 경험적 사실로 실현된다는 것을 웨슬리는 성경의 칭의약속의 실현을 체험한 사람들의 간증을 듣고 확인하게 된다: "그 세 사람은 모두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하여 증거하기를,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살아 있는 믿음은 과거의 모든 죄들에 대한 용서의 확신 및 현재의 모든 죄들로부터의 해방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고 하였다. 그들은 한 입으로 또한 말하기를,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과 하나님은 이 믿음을 진지하고도 끈기 있게 구하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든지 이 믿음을 필히 베풀어주신다고 하였다".67) 이러한 확인을 통하여 웨슬리에게 일어난 변화는 다음과 같다: 성경의 약속과 그 실현에 대하여 사고하고 판단할 때, 웨슬리의 사고방식은 단순히 인간의 경험과 이성의 인식을 통한 귀납법적인 사고에서부터 이제는 현실을 성경의 약속이 실현된 현상으로 보는 연역법적인 사고로 수정된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복음은 이미 우리의 현실(칭의, 중생, 성화의 현실)을 약속의 형태로 결정하고 있으며, 우리가 칭의받는 것은 이 약속의 경험적인 실현이라고 보게 된 것이다. 이것도 역시 '복음적 회개'의 중요한 일단면이다. 즉, 우리의 사고방식이 성경의 사고방식에 맞추어 변화되어야 성경의 명제가 비로소 이해될 뿐만 아니라, 그 명제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ad 2.d.) (명제 6: 자신의 원죄상태의 인식<율법적 회개>과 복음의 올바른 이해<복음적 회개>는 칭의약속을 실현하시는 하나님에게 기대를 걸게 한다.) 웨슬리는 성경의 칭의약속과 칭의체험자들의 증언에 설득된 후에, 이제 그 자신을 성경의 칭의약속이 지시하는 하나님에게 일치시키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믿음으로만 칭의를 받는다'는 약속에 따라, (a) 지금까지의 自己義, 즉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율법을 행하므로 하나님 앞에 세우고자 하는 공로를 전적으로 포기하고, (b) 칭의받게 하는 믿음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게 된다.68)
(ad a) 자기의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신의 원죄상태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즉 '죄를 깨닫고 자백하게 하시는 은혜'(convincing grace)에 실천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자신의 원죄상태에 대한 진정한 인식의 표징이 바로 자기의를 전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다. 자기의를 포기하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의를 나에게 극대화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를 포기하는 것은 믿음에 의한 칭의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칭의하시는 은혜'에 순종하기 위한 준비이다. 이것이 웨슬리가 말하는 '율법적 회개'의 극치이다.
(ad b) 여기서 웨슬리가 간구한 믿음은 다음과 같은 의미의 믿음이다: "바로 이 믿음,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주) 칭의하시고 구원하시는 믿음, 바로 '나'를 위하여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온전히 의지하는 것, 그리스도를 바로 '나'의 그리스도로서, '나'의 유일한 칭의요 성화요 구속으로 신뢰하는 것"이다.69) 이 믿음의 내용이 바로 자기의를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의 의가 나에게 극대화된 상태이다. 달리 말하여, 하나님이 나에게 온전히 하나님이 되시고 나는 온전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칭의의 약속이 실현된 상태이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을 간구한다는 것은 칭의의 약속을 실현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웨슬 리가 말하는 '복음적 회개'의 극치이다.
웨슬리는 이러한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를 그의 칭의체험 하루 내지 이틀 전에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전형적인 내용으로 표현하였다:
"...... 하나님의 율법 전체는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 것을 나는 안다. 내 영혼의 모든 생각과 모든 기질이 하나님의 형상과 그 위에 쓰신 것을 당연히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내가 죄 아래 팔려 있다'는 것을 나는 명백히 안다. 나는 모든 혐오스러운 것으로 가득 차서 진노 밖에 받을 것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 혐오스러운 것들을 속죄할 만한 선한 것이나 하나님의 진노를 제거할 만한 선한 것이 내게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모든 나의 선행, 나의 의, 나의 기도 드리는 것들 자체가 속죄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나의 입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나는 이유로 내세울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나, 나는 거룩하지 못하다. 하나님은 살라버리시는 불이신데, 나는 전적으로 죄인이니, 나는 그 불에 살라져 마땅하다. (여기까지가 율법적 회개이다: 역주).
그러나 나는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하시는 한 음성을 듣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겠는가?) 믿는 자는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미 이 믿음을 얻었은 것처럼 누가 헛된 말로 우리를 속일지라도 결코 속지 말라. 그 열매로 우리는 그 믿음이 있는 줄을 알 뿐이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과의 화평'과 '성령 안에서의 기쁨'을 가졌단 말인가? '그의 영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가'? 아, 나의 영에 대하여는 성령이 그렇게 증거하시지 않는다. ...... 인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 당신 이외에 어떤 무엇을 신뢰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소서. 당신만을 따르게 하소서. 우리 자신을 비우게 하시고, 믿음 안에 있는 화평과 기쁨으로만 우리를 채우소서. 그리고 이 땅에서도 또한 영원히 우리를 당신의 사랑으로부터 어떤 것도 끊을 수 없게 하소서. (여기까지가 복음적 회개이다: 역주)".70)
(1.3.) 칭의하시는 하나님과 그 앞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체험적 인식
(ad 3.a.) (명제 7: 하나님이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에 응답하시므로 칭의의 약속을 실현하시고, 이에 따라 당사자는 칭의와 중생을 체험한다.) 웨슬리는 이렇게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의 과정을 한 달여 동안 거친 다음에 1738년 5월 24일 그의 나이 35세에 칭의와 중생을 체험하게 된다: "저녁 때 나는 매우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가에 있는 한 모임에 갔다. 거기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를 위한 서문'을 읽고 있었다. 9시 15분 전 쯤에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일으키시는 변화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동안에, 나는 나의 마음이 이상하게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신뢰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나의' 죄를, 바로 '나의' 죄를 이미 가져가 버렸고, '나'를 죄와 사망의 율법으로부터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나에게 주어졌다".71)
(a) "나는 내가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신뢰한다고 느꼈다": 여기서 그리스도만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 믿음의 대상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으나, 그 믿음의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되고 있지 않다. 웨슬리는 이 믿음의 내용을 그의 설교 "믿음에 의한 구원"에서 구체적이고도 세부적으로 설명한다.72) 그러나 위에 언급한 바, 그가 간구한 믿음의 내용 가운데 "나를 위하여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라는 것으로 볼 때, 전통적인 의미의 종교개혁적 십자가 신앙, 즉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믿음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b) "그리고 그가 '나의' 죄를, 바로 '나의' 죄를 이미 가져가 버렸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통하여 그리고 그것을 믿는 '나의' 믿음을 통하여 '나의' 죄가 용서된다. 죄가 용서된다는 것은, 웨슬리의 회개의 내용을 볼 때,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진 것이다: 원죄 하에서의 나의 모든 행위는 범죄하는 것이다. 이것을 자범죄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반응은 정죄, 즉 유죄선언이다. 이 정죄의 결과로 나는 나의 죄에 대하여 죄책을 지게 된다. 이 죄책에 따라 형벌을 받게 되고, 그 궁극적인 형태가 영벌 또는, 웨슬리의 회개문에 표현된 대로, 하나님의 사르시는 불에 살라지는 것이다. 그러면 죄의 용서라고 하는 것은 자범죄를 간과하시는 것이요, 이것은 유죄선언을 취소하는 것이고, 따라서 죄책을 말소하는 것이요, 결과적으로 형벌과 영벌을 거두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웨슬리가 칭의는 한마디로 "용서, 자범죄의 용서이다"73)라고 하는 말의 기본적인 의미이다.
(c) "'나'를 죄와 사망의 율법으로부터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나에게 주어졌다": 죄와 사망의 율법으로부터 구원하셨다는 것은 원죄 아래에서는 결코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여 지킬 수 없는 상태에 있었는데, 이제 그런 본성의 전적 부패와 율법에 대한 전적 무능의 상태로부터 나를 구원하셨다는 뜻이다. 이런 변화의 이유는 위에 (b)에서 설명한 의미의 죄의 용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자범죄가 용서되고 따라서 죄책과 형벌이 말소되었으면, 그러한 순간에 나의 상태는 하나님 앞에서 죄에 관련된 모든 현상이 없는, 즉 거룩한 상태이다. 이런 거룩한 상태로 죄의 세력(the power of sin) 밑에 종으로 있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그러므로 그 순간에 이미 나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어 칭의하시는 하나님 밑으로 들어 온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과의 화해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 곧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 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웨슬리에게 있어서는 칭의와 중생은 내용에 있어서 구별되나, 불가분리적으로 결합된 것이요, 동시적인 사건이다.
(d)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일으키시는 변화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동안에, 나는 나의 마음이 이상하게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칭의와 중생에서 일어나는 죄의 용서와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은 칭의의 믿음을 받는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다. 칭의의 믿음은 칭의와 중생이 동시적이요 순간적인 것과 같이, 이 둘과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이다. 그래서 웨슬리는 이 믿음을 "마음의 상태"(a disposition of the heart)74)라고 표현한다. 지적인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존재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변화를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이 손수 행하신다는 사실을 웨슬리는 '칭의하시는 은혜'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약어: BE = The Bicentennial Edition of the Works of John Wesley, Nashville: Abingdon Press, 1984 -.
1. 일차문헌
1.1. 일지 (Journal)
Wesley, John. The Journal of the Reverend John Wesley, A.M., Ed. Nehemiah Curnock 8Vols., London: The Epworth Press, Vol.1.
1.2. 설교 (Sermons)
Wesley, John. "Justification by Faith", in: BE Vol.1, Ed. Albert C. Outler 1984, p.181-199.
___________ . "Salvation by Faith", BE Vol.1, p.117-130.
___________ . "The Almost Christian", BE Vol.1, p.131-141.
___________ . "Christian Perfection", BE Vol.2, p.99-124.
___________ . "Scriptural Christianity", BE Vol.1, p.159-180.
___________ . "The Righteousness of Faith", BE Vol.1, p.202-216.
___________ . "The Way to the Kingdom", BE Vol.1, p.218-232.
___________ . "The Witness of the Spirit I", BE Vol.1, p.269-284.
___________ . "The Witness of the Spirit II", BE Vol.1, p.285-298.
___________ . "The Marks of the New Birth", BE Vol.1, p.417-430.
___________ . "On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 BE Vol.3, p.199-209.
___________ . "The Means of Grace", BE Vol.1, p.378-397.
___________ . "On Predestination", BE Vol.2, p.415-421.
___________ . "The Lord Our Righteousness", BE Vol.1, p.
1.3. 회의록 (Minutes)
Wesley, John. "Minutes of some late conversations between the Rev. Mr. Wesleys and others, Coversation I, Monday, June 25th, 1744", in: The Works of John Wesley, Zondervan Publishing House, Vol.VIII, p.275-281.
1.4. 변증론 (Apologies)
Wesley, John. The Appeals to Men of Reason and Religion and Certain Related Letters, in: BE Vol.11, Ed. Gerald R. Cragg, 1989.
1.5. 주해서
Wesley, John. Explanatory Notes upon The New Testament, London: The Epworth Press, reprinted 1950.
2. 이차문헌
2.1. 국외단행본
Mannheim, Karl. Ideologie und Utopie, 6. Aufl. Verlag G. Schulte-Bulmke, 1978.
Schmidt, Martin. John Wesley. A Theological Biography, Vol.1, tr. N.P. Goldhawk, Nashville: Abingdon Press.
2.2. 국외논문
Lloyd-Jones, D.M.. "Conversions: Psychological and Spiritual", in: D.M. Lloyd-Jones, Knowing the Times, The Banner of Truth Trust 1989, p.61-89.
2.3. 국내논문
이선희, "한국신학에 있어서 신학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 의 문제", 목원대학교 논문집 제 31 집 (1997.3), p.23-40.
_____ . "존 웨슬리(John Wesley)의 回心에 관한 연구", 목원대학교 논문집 제33 집 (1997.12), p.75-100.
미주
1) 웨슬리에 의하면 엄밀하게 말하여 칭의는 칭의받는 당사자에 의해서도 체험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칭의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 편에서의 법정적 무죄선언이요, 이 무죄선언에 근거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외적 관계의 변화인데, 인간 편에서는 칭의받는 당사자가 이 무죄선언 자체와 하나님 편에서 일어난 이러한 관계변화를 인간의 인식기능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웨슬리는 칭의를 "관계의 변화"(a relative change)라고 부른다(J. Wesley, "The Great Privilege of those that are Born of God" in: The Bicentennial Edition of the Works of John Wesley, Nashville: Abingdon Press, <이하 BE로 표기>, Vol.1, p.431-443, 특히 p.431-432 (2.)). 그러나 이에 비해서 칭의와 동시에 일어나는 중생은 칭의로 인하여 발생하는 칭의받은 당사자 자신의 내적 변화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웨슬리는 중생을 "실제적 변화"(a real change)라고 부른다(ibid.). 그렇기 때문에 중생은 중생한 당사자 자신에 의하여 당연히 인식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칭의와 중생은 마치도 동전의 양면같이 동시적인 사건이요, 중생은 반드시 칭의를 전제하는 것이므로, 칭의는 중생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인식되며 체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의 체험'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2) John Wesley, The Journal of the Reverend John Wesley, A.M., Ed. Nehemiah Curnock 8Vols, London: the Epworth Press, 1909, Vol.1, p.464-484. 이하 Journal로 표기.
3) 칭의와 중생의 체험을 회심과 동일시 하는 이유는 이선희, "존 웨슬리(John Wesley)의 回心에 관한 연구", 목원대학교 논문집 제 33 집(1997.12) p.75-100, 특히 p.95-97 참조.
4) John Wesley, Journal Vol.1, p.464-486.
5) "Minutes of some late conversations between the Rev. Mr. Wesleys and others, Conversation I, Monday, June 25th, 1744", in: The Works of John Wesley, Zondervan Publishing House, Vol VIII, p.275-281. 이하 The Works(Zondervan)으로 표기.
6) John Wesley, The Appeals to Men of Reason and Religion and Certain Related Open Letters, in: BE Vol.11, Ed. Gerald R. Cragg, 1989, p. 108-117(="A Farther Appeal to Men of Reason and Religion", Part I의 일부), 329, 437-438, 443-458(="A Letter to the Rev. Mr. Horne"). 이하 The Appeals로 표기.
7) 회심의 심리학적 해석의 오류에 대한 비판은 D.M. Lloyd-Jones, "Conversions: Psychological and Spiritual", 그의 강연집 Knowing the Times, The Banner of Truth Trust 1989, p.61-89 참조.
8) Karl Mannheim, Ideologie und Utopie, 6.Auflage, Verlag G. Schulte-Bulmke, p.227: "Seinsverbundenheit des Wissens", 또는 "gesellschaftliche Gebundenheit von Theorien und Denkweisen" 참조.
9) 이선희, "한국신학에 있어서 신학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의 문제", 목원대학교 논문집 제 31 집 (1997.3), p.23-40, 특히 p.5-7 참조.
10) John Wesley, Journal, Vol.1, p.471.
11) 상게서, p.472, 475-476.
12) 상게서, p.471-472.
13) 상게서, p.472.
14) 예컨대, John Wesley, "On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 BE Vol.3, p.199-209, 특히 p.203-204 (II.1.)에서는 구원의 각 순서마다 해당되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을 그 순서에 따라 "preventing grace"(先行하시는 은혜), "convincing grace"(죄를 깨닫고 자백하게 하시는 은혜), "justification"(칭의), "sanctification"(성화)로 표현하였고, 또 "The Means of Grace", BE Vol.1, p.378-397, 특히 p.381(II.1.)에서는 "preventing, justifying, or sanctifying grace"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On Predestination", BE Vol.2, p.415-421, 특히 p.421(16.)에서는 "(1), God knows all believers; (2), wills that they should be saved from sin; (3), to that end justifies them; (4), sanctifies; and (5), takes them to glory."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활동을 은혜라는 개념을 중심하여 정리하면, (1) preventimg grace, (2) convincing grace, (3) justifying grace, (4) sanctifying grace의 순서로 정리된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위에 언급된 '하나님의 예지'라는 개념과 '영화'라는 개념은 은혜라는 개념과 조합되어 사용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두 개념 모두 구원받는 자에게 지상에서의 구원의 과정에서 적용되며 인간 편에서의 순종의 반응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전자는 지상에서의 구원의 과정 이전에 이미 일어난 일이고, 후자는 그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 재림 시 마지막 심판 때에 있을 일이다.
15)
16) 이선희, "존 웨슬리(John Wesley)의 回心에 관한 연구", 전게서, 참조.
17) BE, Vol.1, ed., Albert C. Outler, 1984, p.181-199.
18) John Wesley, Journal Vol.1, p.481-482. 또한 BE, Vol.1, p.181.
19) BE, Vol.1, p.117-130.
20) BE, Vol.1, p.131-141.
21) BE, Vol.2, p.99-124.
22) 상게서, p.105 (II.2.).
23) BE, Vol.1, p.159-180.
24) BE, Vol.1, p.202-216.
25) BE, Vol.1, p.218-232.
26) BE, Vol.1, p.269-284.
27. BE, Vol.1, p.285-298.
28) John Wesley, Journal Vol.1, p.470, No.10: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내내 지속되어 온 이와 같은 자연과 은혜 사이의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에 나는, 특히 고통 가운데 처하게 될 때마다, 다시금 눈에 뜨이게 기도로 돌아오고는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 그러나 나는 여전히 '율법 아래' 있었고, '은혜 아래' 있지 않았다." 웨슬리의 이 간증은 미국에 선교사로 있었던 동안의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것인데, 여기서 그는 아직 칭의와 중생 이전의 자신을 "자연과 은혜 사이의 싸움" 가운데 있는 인간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것을 다시 '은혜 아래 있는 인간'과 반대되는 의미의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또는 구원하시는 役事의 범위 밖에서, 즉 아직 원죄 하에서, 단지 타고난(즉 자연적) 능력과 노력으로 율법을 지키고자 하나 지키지 못하고 그 반대로 어기며 사는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반대로 '은혜 아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은 칭의와 중생 이후에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役事의 범위 안에서 율법을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으로 지켜나가는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리에게 있어서 자연인이란 칭의와 중생 이전의 인간으로서 아직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29) John Wesley, Explanatory Notes upon The New Testament, London: The Epworth Press, reprinted 1950, p.23 마태복음 3장 8절에 대한 주해: "회개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율법적 회개'라 부르는 것과 '복음적 회개'라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율법적 회개는 여기서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의 회개로서 죄를 철저히 깨달아 자백하는 것이고, 복음적 회개는 마음을 (따라서 삶을) 모든 죄로부터 온전한 거룩으로 바꾸는 것이다".
30) 상게서.
31) John Wesley, "The Way to the Kingdom", BE Vol.1, p.225 (II.1.): "This is the way: walk ye in it. And first, repent, that is, know yourselves. This is the first repentance, previous to faith, even conviction, or self-knowledge."
32) John Wesley, "The Marks of the New Birth", BE Vol.1, p.419 (I.3.).
33) John Wesley, Journal Vol.1, p.465.
34) 이선희, "존 웨슬리(John Wesley)의 回心에 관한 연구", 전게서, 특히 p. 76-88 참조.
35) John Wesley, Journal Vol.1, p.471-472, No.11-12 참조.
36) 웨슬리의 회심 간증문에(J. Wesley, Journal Vol.1, p.472) 칭의와 중생을 체험한 세 사람의 증언을 웨슬리가 듣고 성경적 칭의론의 진리성에 대하여 지적으로는 완전히 설득되었다고 되어있는데, 그 날짜가 1738년 4월 23일 주일이라는 것은 그의 회심 간증문 자체에는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으나, Martin Schmidt, John Wesley. A Theological Biography, Vol.1, tr. N.P. Goldhawk (Nashville: Abingdon Press), p.240에 Peter Böhler의 해당날짜의 일기가 소개됨으로써 설득력있게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때부터 거의 정확히 한달 후인 1738년 5월 24일에 웨슬리는 칭의와 중생을 체험한 것이다.
37) 이선희, "존 웨슬리(John Wesley)의 回心에 관한 연구", 전게서, p.10-14 참조.
38) John Wesley, Journal Vol.1, p.467-468, No.5-6: 예컨대,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 자신의 삶을 그것에 따라 살았던 그 종교적 사상에 따라 종교적으로 살라고 조언하였던 것이다."
39) 상게서, p.467-468, No.6: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몇 년을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나서, 내가 죽음의 문턱에 가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일을 당했을 때에,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시리라는 어떠한 위로도 확신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나는 적지 아니 놀랐다."
40) 상게서, p.468-469, No.7.
41) 상게서, p.469-470, No.8: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로써 나에게 26명의 모라비아 교도들을 동반자로 주시기를 기뻐하셨는 바, 이들이 나에게 '보다 뛰어난 길'(즉, 믿음으로만 칭의를 받는 길: 역주)을 보여주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나는 너무도 학식이 많았고, 너무도 아는 것이 많았던 것이다."
42) 잘못된 칭의론에 대한 지적인 회개에 대하여는 이선희, "존 웨슬리(John Wesley)의 回心에 관한 연구", 전게서, p. 94-95 참조.
43) 각주 14 참조.
44) 이선희, "존 웨슬리(John Wesley)의 回心에 관한 연구", 전게서, p.82-90 참조.
45) John Wesley, "On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 BE Vol.3, p.203-204 (II.1.) 참조.
46) 상게서, p.204 (II.1) 참조. 또한 John Wesley, "The Marks of the New Birth", BE Vol.1, p.417-430, 특히 p.418-419 (I.3.) 참조. 또한 John Wesley, Journal Vol.1, p.464 참조. 여기에 소개된 바, 웨슬리가 칭의와 중생을 체험하는 1738년 5월 24일이 되기 하루 이틀 전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난 그 자신의 믿음 전의 회개가 바로 '죄를 깨닫게 하고 자백하게 하시는 은혜'(convincing grace)에 대한 전형적인 죄인의 반응이요, 이것이 곧 원죄 하에 있는 진정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본격적인 인식의 모범적인 예이다.
47) John Wesley, Journal Vol.1, p.471 (No.11) 참조.
48) John Wesley, Journal Vol.1, p.470-471, No.9-10.
49) 이선희, "존 웨슬리(John Wesley)의 回心에 관한 연구", 전게서, p.88-90 참조.
50) John Wesley, Journal Vol.1, p.470 (N0.9).
51) 각주 30 참조.
52) John Wesley, "The Lord Our Righteousness", BE Vol.1, p.458 (II.11).
53) John Wesley, "Justification by Faith", BE Vol.1, p.195-196 (IV.4-5).
54) John Wesley, Journal Vol.1, p.471 (No.11).
55) John Wesley, Journal Vol.1, p.471 (No.11): "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을 생각하고 있었고, 그리스도를 또는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56) 웨슬리가 올바른 의미에서의 '믿음에 의한 칭의'에 관하여 들은 것은, 그 자신의 기록에 나타난 바로는, 적어도 미국행 배 안에서 모라비아 교도들을 통해서 였고(J. Wesley, Journal Vol.1, p.470 No.8), 또한 미국에서 모라비아 교도의 선교사 Spangenberg를 통해서 였다(J. Wesley, Journal Vol.1, p.151, Sun. Feb. 8. 1736). 물론 웨슬리는 이 두 번의 경우 모두 원죄개념도 칭의개념도 잘 못 알고 있는 상태였고, 따라서 그들의 설명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7) 상게서.
58) 상게서.
59) John Wesley, Journal Vol.1, p.471 (No.11) 참조.
60) 상게서.
61) 상게서.
62) John Wesley, "The Witness of the Spirit, I", 전게서, p.274 (I.7-8) 참조.
63) 웨슬리가 회심 후에 경험과 이성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이다. 우선 경험이라는 것은 인간의 감관을 통하여 얻은 감각적 데이터 자체가 인식의 최초의 출발점이라는 지금 여기서 말하는 일종의 철학적 이데올로기로서의 경험주의적 의미의 경험이 아니라, 성경적 명제가 먼저 계시로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져 있고, 이것은 인간의 건전한 상식의 의미에서 경험적 세계 안에서 경험적 사실로서 실현되고 또한 경험적으로 인식된다는 의미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이에 관하여는 이선희, "존 웨슬리(John Wesley)의 回心에 관한 연구", 전게서, p.92, 97 참조). 또한 웨슬리가 말하는 본격적인 의미의 경험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특히 칭의, 중생, 성화의 약속의 실현)은 웨슬리가 말하는 의미의 인간의 영적 감각("spiritual sensorium": BE Vol.1, p.117 각주 5 참조. 또한 BE Vol.1, p.276 각주 46 참조)을 통하여 직관적인 의미에서 체험적으로 인식된다는 의미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회심 후의 웨슬리가 말하는 이성이라는 것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최초의 직관적 이해력이 육에 의하여 둔화된 인간의 추론적 인식의 기능으로서 말하자면 타락에 의하여 초래된 인간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이해되고 있다(J. Wesley, "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 in: The Works <Zondervan> Vol.XI, p.412-413 참조). 그러나 웨슬리가 신앙생활에서 이성의 추론하는 논리적 기능을 과소평가도 과대평가도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순전히 자연인에게도 있는 바 인간 사이의 이성의 이해능력과 의사소통의 기능 때문이다 (J. Wesley, "The Case of Reason Impartially Considered", BE Vol.2, p.587-600 참조). 이 이성의 기능은 타락 이후 모든 자연인에게 있는 현상이요,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선행하시는 은혜의 한 현상이 아니다.
64) John Wesley, Journal Vol.1, p.471 (No.12).
65) John Wesley, Explanatory Notes upon The New Testament, 전게서, p.8-10 (No.10-12)에서 웨슬리는 동일한 성경관을 피력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종교개혁적 성경관의 전통에 서 있으며, 그의 성경해석 방법도 정확히 종교개혁자들, 특히 마틴 루터가 강조한 그것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66) John Wesley, Journal Vol.1, p.471 (No.12).
67) 상게서, p.472 (No.12) 참조.
68) 상게서.
69) 상게서.
70) John Wesley, Journal Vol.1, p.464-465.
71) 상게서, p.475-476 (No.14).
72) John Wesley, "Salvation by Faith", 전게서, p.121 (No.I.5.) 참조. 이에 대한 분석은 게획된 논문 "존 웨슬리의 칭의론 연구 II"에서 제시하게 될 것이다.
73) John Wesley, "Justification by Faith", 전게서, p.189 (No.II.5.).
74) John Wesley, "Salvation by Faith", 전게서, p.120 (No.I.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