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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석탑리방단형적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1호)에 대해 문화재를 사랑하는 어느 분이 우리와는 다른 시각으로 조명하고 있어, 우리지역의 문화재를 연구, 조사하는 우리회원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퍼온 것입니다. 우리것과 비슷한 안동,산청 돌무지 사진도 곁들였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시길...
출처:http://blog.naver.com/skyloverjy/60013302641(네이버 불로그 천손의나라)
(의성석탑리방단형적석탑/사진 의성향토사연구회)
의성에서 안평으로 약 5Km 정도 가다보면 석탑리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곳 골짜기 안에는 안동 석탑리 피라미드와 규모와 모양이 비슷한 돌무지 무덤이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경북 의성군 안평면 석탑1리 (慶北 義城郡 安平面 石塔一里) 에 속하며, 안동 피라미드에서 직선거리 약 37Km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안동 피라미드와 상당한 관련이 있음을 추측케 한다. 단지 안동 피라미드와 다른 점은 이 돌무지 무덤 사방에 감실 (龕室)을 만들어 조그만 돌부처를 그 안에 안치하였는데, 현재는 동쪽과 남쪽의 감실에만 남아있다. 현지 주민이 전하는 말로는 동, 서, 남쪽의 감실 안에 모양과 크기가 비슷한 돌부처가 있었으며, 3,4년 전에 서쪽 감실 안의 돌부처가 도난당하면서, 돌무지 서편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쪽 산기슭에는 과거에 절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다.
(안동석탑리방단형적석탑/사진 문화재청)
이 곳은 동, 서, 북쪽이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 트여있는, 남북으로 길다란 분지 (盆地)에 해당하며 석탑1리 마을에 서 북쪽으로 이백여미터 가다보면 왼쪽 산자락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북쪽으로 고개를 넘게되면 단촌 (丹村)이라는 마을로 향하게 되며, 여기서 비롯된 하천은 안평 (安平 또는 朴谷) 을 거쳐 안계 (安溪)를 지나 낙동강과 합류하게 된다. 이 곳의 지형은 두드러지게 높다할 만한 산이 없으며 해발 300 ~ 400m 이하의 야산과 구릉이 대부분으로 별다른 지형적 특징이 없는, 여기에서 매우 일반적인 계곡 중 한 곳에 이 피라미드가 위치하고 있으며, 또한 주변에서 쉽사리 눈에 띄지 않게끔 좁다란 계곡에 터를 잡았다. 게다가 넓은 터 한가운데 세울 법한 석조물이 비스듬한 경사면 (현재는 밭) 끝자락에 얹혀 있기에 축조 당시 터잡기에 그리 여유가 없었지 않았나 생각되는 현장이며 그런고로 북쪽의 돌들이 붕괴되어서 이 마을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수시로 보수하여 왔다고 한다.
(산청 전구형왕릉/사진 문화재청)
사면 (四面)은 동서남북을 정확하게 가르키고 있으며, 현재 동쪽의 하단에서 제1단을 알아볼 수 있고, 이를 감안하여 보면 전체는 7단의 방형단으로, 남쪽과 서쪽의 제일하단은 2단으로서 주변의 토사가 쌓여 제1단이 묻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사진에서도 보이듯이 아랫단이 동서로 기울고 동과 서쪽의 단의 높이가 달라서 지금의 경사면과 단이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토사가 쌓일 수 있는 지형이 아닌 깍여 내려가는 경사면 끝자락이여서, 1m 이상의 차이가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며, 어느 정도 파묻힌 부분이 있겠지만 지금의 모습이 원래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으리라 추정된다. 또한 주민들이 보수하여 원래와 달라졌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연석의 축조는 밑에서 부터 다시 쌓아야만 제대로 유지할수 있기에 그 보수작업도 최소한도 내에서 이루어졌지 재축조에 버금가는 정도는 아니었으리라 생각된다.
현재 남쪽의 제1단은 길이 12.7m 이며 서쪽의 제1단은 11.4m 이고 남쪽 중앙에서의 높이는 약 3.5m 로서, 3,4년전 도굴범이 정상부터 서쪽 감실까지 돌을 들어내면서 정상의 단이 원래와 달라진 것 같다. 약 10여년전 어느 재일교포가 이 피라미드를 답사하여 책으로 소개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 책자에 그 당시의 모습과 제원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1) 거의 정방형인 맨 아랫단에서부터 윗단으로 갈수록 동서가 좁고 남북으로 길게 단을 쌓았으며, 각각의 단의 높이는 제각각이지만 평균하여 약 90Cm 정도의 높이이고, 제7단인 정상은 3.6m x 1.6m 의 직사각형이다.
안동 피라미드와 비교하여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는 감실은 현재 동, 서, 남쪽에서만 확인할 수 있으며, 북쪽에서는 감실의 흔적을 찾지 못하였고, 주민들 또한 북쪽 감실을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분명 북쪽 감실이 있었으리라 추측은 되지만 현재 상태로서는 이를 알기가 힘들다. 그리고 감실이 애초부터 설치되었다고 하기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각각의 감실은 지표면에서 일정한 높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남, 서쪽의 감실은 지표면에서 부터 3단에 있으며, 동쪽 감실은 지표면에서 부터 2단째이고, 동쪽에서 드러나 보이는 제1하단을 포함하면, 3단째에 위치하는데, 동쪽과 서, 남쪽 감실이 같은 단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감실이 각각의 단에서 들어가 있어야 올바른 감실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각단의 표면에 돌부처를 세워놓고 그 위와 옆에 돌을 쌓아 감실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현재 잔존하는 돌부처의 석질이 여기에서 쓰여진 돌과 다른 것으로 연한 노랑색의 풍화된 사암 (砂岩) 종류이며,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석질이 아니다. 주민의 말로는 이 돌부처와 크기와 모양이 매우 비슷한 것이 인근의 옥련사 (玉蓮寺)에도 있다고 하는데, 필자는 아직 확인하여 보지 못하였다. 돌부처의 크기는 대략 높이 85Cm, 너비 45Cm 이며, 두께가 약 30Cm 로서 길죽한 타원형의 돌을 깍아 가부좌하고 있는 부처를 부조하였으며, 동쪽 감실의 부처 하단에는 다섯 갈래의 연꽃 무늬를 새겨 놓았다.
이런 점에 비추어 여기의 감실과 돌부처는 돌무지무덤을 축조한 이후에 가설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집안의 장군총과 같은 계단식 돌무지무덤에서 볼 수 있듯이 내부에 돌방을 두기는 하여도 이와같이 돌무지 외부에 감실을 설치한다는 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로 특이하다 할 수 있다. 어쩌면 후대에 불교의 영향으로 이 돌무지무덤에다 감실을 설치하여 불교의 옷을 입혔다고 생각할수 있겠다. 이러한 피라미드 형의 돌무지무덤이 주로 고구려와 관계된 영역에서 등장한다는 지금까지의 사실로 인하여 이 곳의 돌무지무덤도 안동 피라미드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와 관계된 유적으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며, 안동과 청송 그리고 영일군의 청하면까지 한때 고구려의 영역이었다는 학설이 (2) 이를 어느정도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중부 지방의 고구려 유적은 남쪽을 등지고 북쪽이 트여진 계곡에 위치하는데, 여기서는 남쪽이 트여진 계곡에 위치하며 게다가 아직까지 의성 지방에서는 고구려와 관계된 유물이 전혀 출토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주민들이 전하는 전설에는 아주 오래 전에 여기에서 부터 남서쪽으로 75Km 떨어진 해인사 (海印寺) 에 불이 났었는데, 이 피라미드 옆에 살고있는 어느 영험한 스님이 여기에서 정화수 (井華水)를 적신 솔가지를 들고 주문을 외우며 물을 뿌리니 해인사의 불이 꺼졌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누가 이 돌무지무덤을 만들었는지는 전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없다는 점이다. 축조에 대한 전설이 없다는 것은 축조 당시의 주민이나 관계된 사람이 이 곳에 주거하지 않고 이주하였거나, 모조리 사멸 (死滅)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새로 이주한 사람들도 이 유적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 돌무지를 쌓았는가? 또 이 지방에서 쉽사리 볼 수 있는 전탑이나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 아닌 독특한 고구려 양식의 돌무지를 무슨 이유로 쌓았을까? 단지 안동의 돌무지무덤을 모방한 것일까? 모방작이라고 생각하기에는 하등의 근거나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물론 고구려의 전방 경계선의 표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와 유물이 너무 빈약하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계곡에 숨어서 누가 오나 안오나 옅보듯이, 산 사이에서 고개를 비죽 내민 이 돌무지는 석탑리의 감추어진 보물로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묵묵하게 세월을 지켜보면서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우리의 고대 역사에 대하여 넌지시 의문 부호를 보여주고 있었다. (1997년 3월 촬영, 1997년 3월 작성) -------------------------------------------------------------------------------- (1)필자는 아직 이 책자의 제목이나 출판사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하였다. 이를 아는 독자가 있으면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2)박진욱의 조선고고학전서에서는 대략 서기 511 년에서부터 629 년 신라군이 랑비성 (청주) 을 함락시킬 때까지의 기간으로 보고있으며, 모 학자는 고구려가 영풍지역을 5 세기초 40 년간 점령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유린군은 고구려의 우시군이며 그 속현인 해아현은 고구려의 아예현이고 지금의 청하현 이라고 씌여있다. ... 전성기의 고구려 남쪽 계선은 서쪽은 충청남도 례산 (예산)으로부터 동쪽으로 연기와 충청북도의 문경군, 례천군 (예천군), 안동군, 청송군을 지나 영일군의 청하면에 이르는 계선으로 된다. " 인용; 조선고고학전서 (고구려) 189쪽 , 박진욱, 과학백과사전 종합출판사, |
첫댓글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꾸~벅.
안평 석탑리가 외가여서 관심있게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정보
얼마전 지표조사를 다녀오다가 산청군의 전 구형왕릉에 다녀왔습니다. 한창 복원 공사 중이었습니다.
사진 앞쪽으로 목조건물을 짓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