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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 평 속에 숨은 대한민국 ― 진해 경화시장
신미란
벚꽃의 도시 진해, 처음은 이랬다
경상남도 진해시. 마산, 창원과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낯선 도시다. 벚꽃이 활짝 피는 봄에만 잠깐 주목을 받을 뿐이다. 마치 벚꽃이 일년 중 며칠만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처럼. 그래서 진해는 벚꽃의 도시다.
나 또한 ‘군항제’로 유명한 작은 도시의 이미지만 간직한 채, 겁 없이 그곳을 찾아 나섰다. 여기저기 수소문하며 오래된 골목을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경화시장’이란 단어에 귀가 번쩍했다.
진해시립도서관에서 찾은 경화시장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화동에는 조선시대부터 풍덕개(풍호동 해안통)에서 열리던 3.8장이 있었다. (개 : 개펄) 그러다가 군사시설 쪽으로 시장을 옮기게 되었다. 시장은 광장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동시장은 불편한 점이 많아 상설시장을 두자는 요구가 생겼다. 시에서는 1955년 8월 25일에 경화동 906번지 주변 2,255평에 공설시장을 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정기적으로 열리는 3.8 장날만이 성황을 이루었다. (주* ?진해 땅 이름? 황정덕, 진해 문화원, 1992년)
‘장이 선 지가 50년이 넘었다’는 말에 무작정 맘이 끌렸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내 발길은 어느새 경화시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경화시장의 현재 모습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처음 경화시장을 찾은 날은 무더위가 막 시작되려는 6월 중순의 어느 일요일이었다. 창원에서 좌석버스를 타고 물어 물어서 시장 입구에서 버스를 내렸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시장 아래쪽에 있는 철길이었다. 무성한 풀들이 무릎 가까이나 자라고 있었다. 철길을 뒤덮고 있는 많은 풀들만큼 막막한 기분으로 시장에 들어섰다. 어릴 적 외가집 담에서나 볼 수 있었던 진한 주홍색 능소화가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그 옆엔 도종환 시인의 시에 나오는 접시꽃이 고상하게 자태를 자랑한다. 철길 주변에 무성한 풀들과는 퍽이나 대조적이다. 꽃길 사이를 돌아 처음 맞닥뜨린 시장길은 꽤나 가파른 언덕길이었다.
닫힌 건 가게 문만이 아니었다.
일요일이지만 장날이 아니라 가게 대부분이 닫혀있다. 텅 빈 시장 길은 낯선 산을 오를 때처럼 막막하다. 이 낯선 곳에 대한 탐험 계획은 일단 시장 아래에서 위로 걸어 올라가는 거다. 찬찬한 걸음으로 10여분 정도 올라가자 시장의 끝이 나왔다. 남북으로 뻗은 시장의 총 길이는 200~300미터 정도 되지만, 다소 경사진 언덕길이라 그보다 길어 보인다.
현재 경화시장은 상주하는 상인들보다는 경남 인근지역에서 장사하러 오는 노점상의 수가 훨씬 더 많다. 장날에 이곳으로 모여드는 상인은 거의 5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은 장날마다 자릿세 명목으로 면적에 따라서 적게는 500원에서 많게는 3000원 까지 진해시에 납부한다. 여기에는 경화동 토박이 노점상들도 가끔 보인다. 이들은 인근에 있는 자신의 밭에서 직접 키운 야채들을 가지고 나와 팔기도 한다.
시장 안에 가게는 현재 105개 정도 남아 있는데, 이들 상인은 평수에 따라서 차등적으로 가게세를 진해시에 납부하고 있다.
국밥집이 늘어선 가게들 앞에는 양철로 지붕을 씌운 실외 가게가 있는데, 이를 ‘장옥’이라고 한다. 장옥은 벽이 없는 가게라 세가 저렴하다. 이 장옥은 공동으로 세를 얻은 셈이어서, 가게마다 얼마나 자리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나누어 세를 낸다.
처음 시장을 찾았을 때 화장실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왜냐하면 다른 시장과 달리 공중화장실이 무려 5개나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장의 규모가 크다는 말일까.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았다.
경화시장은 닷새마다 서는 5일장이다. 그런데 물건을 파는 상인이 여러 곳에서 오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다. 게다가 사러 오는 손님도 장날마다 일정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유동적인 사람들을 배려하다보니 화장실이 5개나 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상주하는 가게도 많은데 5개나 필요했을까.
내가 화장실에 집착하다시피 한 것은 다름이 아니다. 시장에 온 목적이 물건을 사러 온 게 아니라 시장을 관찰하러 오다보니 이런 것들이 더 눈에 띄었는지 모른다. 상주하는 상인과 외지에서 온 노점상과의 보이지 않는 거리감이 화장실을 통해 느껴졌다는 말이다. 얼마나 인심이 각박했으면 화장실도 이렇게 따로따로일까. 두 상인 세계 사이에는 말 못할 깊은 골이 건널 수 없을 만큼 패여 있는 것은 아닐까.
현재 경화시장에는 가게가 105개, 장옥이 39개, 공중화장실이 5개 있다.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오다
시장 제일 위쪽 작은 빵가게에서 빵 굽는 냄새가 풍겨 나왔다. 입맛이 당긴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정오가 지났다. 정상에서 하산하면서 천천히 시장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기로 했다.
장이 서지 않는 날, 평소의 모습은 ‘휑하다’는 한마디로 표현된다.
닫힌 가게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나마 장날에는 사람이 제법 북적인다. 그러나 사고파는 물건이랬자 흔한 채소, 과일, 옷, 반찬 정도다.
장이 처음 섰을 때는 3일과 8일로 나뉘어 각 날자마다 품목이 다르게 장사를 했다 한다. 처음엔 어판장과 우시장이 설 정도로 품목이 다양했던 것 같다. 세월이 흐르면서 풍속이나 물정의 변화에 따라 많이 달라져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쌀가게에서 꼼장어 골목까지……
빵 가게 맞은편에 쌀가게가 있다. 장날에만 연다. 주변 가게 중에서 제일 넓다.
가게 안에는 20kg 쌀 포대가 제법 쌓여 있고, 온갖 잡곡들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가게 안은 어디까지나 물건을 쌓아두는 창고인 셈이다. 장사는 주로 가게 앞 노점에서 이루어진다. 이 가게 앞에는 다른 노점상이 없다. 쌀가게 주인이 노점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평소에 하도 장사가 안 되니까 장날이나마 바짝 팔아볼까 하는 요량인 모양이다. 하얀 쌀이 담긴 큰 양은 다라이와 잡곡이 담긴 빨간 고무 다라이를 양 옆에 나란히 벌려 놓고 장사가 한창이다.
쌀가게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맞은편에 만물상 철물점이 망부석같이 버티고 있다. 장이 서지 않는 평소에도 이 철물점은 항상 문을 열어 놓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철물점이 시장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지 싶다. 취급하는 품목도 몇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가게 안도 난잡하지만, 가게 밖에 내놓은 물건도 만만치 않다. 육십이 넘은 듯한 내외가 가게를 지키고 있다.
조금은 어수선한 철물점을 지나서 맞은편으로 길게 건강원이 한 줄로 나열하듯 서있다. 그 중 길가에 세워진 한 입간판이 재미있어서 가게 앞에 걸음을 멈췄다. 네모난 철제 간판에 써있는 ‘멍멍집’이라는 상호가 단연 눈길을 끈다.
크게 한번 웃었다. 보통은 ‘보신탕’이니 ‘영양탕’이니 하는 말로 표현하는데 반해서 이 간판은 너무나도 솔직하고 쉬운 우리말로 자신의 업종을 당당하게 소개하고 있다. 한국적인 정감을 물씬 풍기는 위풍당당한 똥개 한마리가 저절로 떠올랐다. 이 상호가 노리는 효과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군침을 절로 삼키게 하는 것, 솔직하게 먹고 싶은 것을 드러내는 것, 낡은 것 같으면서도 새롭게 느껴졌다. 거리낌 없이 간판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후로도 이 인상적인 간판에서 느낀 유쾌함은 오랫동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철물점 아래는 이 시장에서 드물게 골목을 형성하고 있는 거리다.
예전 시장 지도에는 가운데 시장통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뒷골목마다 노점상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차지했던 흔적이 보인다. 그런데 지금은 그 자리에 주택들이 들어차있어 노점상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철물점 아래 거리만은 골목들이 아직도 살아있다.
장날에 구애받지 않는 가게가 있다. 바로 음식점들이다. 이 음식점들은 골목에 위치해 있다. 골목이라기보다는 장이라고 해도 좋을 듯싶다. 벽이 트인 양철지붕 아래 음식점들이 들어차 있다.
입구엔 국수와 순대를 파는 간이 가게가 있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아주 오래된 국밥집도 있다. 편한 기계를 놔두고 덩치 큰 맷돌로 콩을 가는 콩국수집, 새벽부터 국물과 고기를 연탄불로 준비한다는 국밥집이 이 골목을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다.
음식점 골목을 우회전해서 돌아 나오면, 보기에도 오래된 방앗간이 나온다. 간판도 그냥 양철판에 페인트로 상호를 새겼다. ‘경남 방앗간.’
가게는 두 칸으로 나뉘어 있다. 안에는 오래된 제분기계 2~3대와 켜켜이 쌓인 장작이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전기도 가스도 아닌 나무와 연탄으로 그 맥을 잇고 있다. 맞은편에도 방앗간이 있는데, 요즘 어디서나 흔히 보는 현대화(?)된 방앗간이다. 신기하게 현대화된 방앗간보다 구식 방앗간에 손님이 더 붐빈다. 자리 탓인지 아니면 주인의 상술 때문인지, 아니면 그 어떤 다른 이유 때문인지…….
‘경남 방앗간’ 옆길엔 수족관을 끼고 있는 꼼장어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가게 앞에는 큰 나무도마가 놓여 있다. 바깥에서 꼼장어를 손질하기 위해서다. 어시장 어디나 가면 횟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꼼장어 골목을 나오면 철길이 보인다. 이렇게 하여 시장이 끝난다.
상주하는 가게는 이 정도 뿐이다. 장날을 장날이게 하고, 모든 길을 메우고 활기차게 장사하는 건 노점상들이다. 철길 주변은 물론이고 그 아래 약국 쪽 도로변까지 노점상들이 가득 메우고 장사를 한다. 그래서 장날에 가면 ‘장이 섰다’는 느낌이 든다.
경화시장 사람들
‘경화동’이란?
‘경화동’이란 취락이 이루어지기 전의 땅 이름이다. 예전엔 ‘한일거리’라 했다. 그땐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였고 그 동북쪽에 병암마을, 서북쪽에 초전마을이 있었다. ‘한일’의 ‘한’은 ‘크다, 넓다, 하나’ 라는 뜻이고 ‘일’은 첫째 또는 하나라는 뜻이다. 따라서 ‘경화동’은 ‘넓고 큰 공간’을 장래 개발의 전망이 밝다고 예견하여 지은 이름이 아닌가 싶다.
‘경화동’은 역사적으로 웅천현 중면 ⇒ 웅천군 하중면 ⇒ 웅천군 부중면 ⇒ 창원부 웅중면 ⇒ 마천부 진해면 ⇒ 창원군 진해면 ⇒ 창원군 진해읍 등의 관할로 변천하였다. 그러다가 1955년 시로 승격하면서 경화 1가동과 2가동으로 확정되었다. 그 후 1996년 행정동 축소 조정에 따라 ‘경화동’으로 통합되었다. (주* 진해시청 홈페이지 - 경화동사무소 참조)
나름대로 애써 보았지만
― 이석조, 51세, 신흥식육점 주인
‘신흥식육점’을 운영하는 주인이다. 또한 몇 년째 경화시장 번영회 회장이기도 하다. 흰머리가 거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오십대 초반이다.
처음 봤을 때 시원한 모시남방이 잘 어울렸다.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음에도 끝내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곤혹스러웠다.
장이 거의 끝나가는 늦은 오후였다. 장판이 깔린 가게 한쪽 작은 평상에 앉아서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체구에 목소리 또한 차분한 편이다. 식육점을 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 10년 정도다. 그래서 그런지 변화한 시장의 모습에 익숙해 보인다.
사십대에 장사를 시작한 셈이다. 일반적으로 보면 40대는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가는 시기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나이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굴곡이 심한 장사를 시작한 걸로 보면 다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면 그때보다 상권이 심하게 변했다는 지금은 어떨까?
“많이 침체되었죠. 최근엔 경화동 부근에 대형마트가 생기면서 장이 많이 죽은 편이예요.”
비단 진해 경화시장뿐이 아니다. 인근의 마산?창원에도 갑자기 생기는 대형할인점으로 인해 소규모 상인들이 설 곳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장을 찾는 손님들도 이젠 실내의 환한 조명아래 편안하고 우아하게 가트를 밀면서 장을 보는 분위기에 젖어들고 있다. 춥고 더운 것을 참을 손님이 어디 있을까. 다리품을 팔아가며 한 푼이라도 깎아 보겠다고 밀고 당기며 흥정하는 맛을 과연 알까. 이제는 그런 시장의 정겨움은 다 잊혀진 건 아닐까?
“경화시장은 이 부근에서 제법 큰 시장인데 상설시장의 몫을 제대로 못하는 게 문젭니다. 알다시피 5일장의 특성이란 게 항상 시장이 서는 상설시장이 아니라는 거 아닙니까. 장날에만 장사를 하기 때문에 장날이 아닌 날은 장사가 안 되는 것 같아요. 저도 회장을 맡아서 이 시장을 활성화시켜 보려 했지만 잘 안됐어요.”
‘시장의 활성화’란 과연 무엇일까? 요즘 ‘재래시장의 활성화’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겉보기에 반듯한 건물을 높이 높이 짓고, 시장에 들어서는 길목에도 모두 일률적으로 같은 모양과 색으로 단장한 진해시 중심부에 있는 ‘중앙시장’이 생각난다. 전통만 고수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장터에서만 맛볼 수 있는 서민의 정감을 살리고 맥을 끊지 말았으면 한다.
“제일 먼저 ‘번영회 회칙’을 만들어보려 했는데, 아직 그것조차도 못하고 있어요. 상인들의 협조가 너무 부족해 어려움이 많았어요. 무엇보다 상인들 간에 유대관계가 부족한 게 제일 큰 일이예요. 전대의 회장단에서 회칙조차도 마련해 놓지 못한 상태라 제가 활동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그동안 회장이 된 후 시장 안의 노후된 시설을 수리하면서 시장의 현대화를 시도했는데 상인들의 무관심과 비협조가 너무 많아서 어려웠어요. 너무 단합이 안돼요.”
왜 유대관계가 안 좋은 걸까?
“그것도 5일장의 특성과 무관하지는 않아요. 이 시장 안에서 항상 상주하면서 장사하는 상인은 얼마 되지 않아요. 장날에만 장사하러 오는 노점상이 거의 500명이 넘어요. 그러다보니 외지 상인들이 뿌리를 내리지 않은 이 시장의 발전이나 현대화에 관심을 가지기가 어렵다고 봐요. 게다가 그 노점상들에게 받는 자릿세조차도 번영회에서 운영?관리하지 못하는 현실이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상인들의 복지나 시장의 발전을 위한 자금 마련이 쉽겠어요?”
그의 말처럼 상주하는 상인보다 노점상들이 훨씬 많다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밀어부치기로는 안 될 것이다. 모두가 이 시장을 너무나도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공설시장이다 보니 노점상의 자릿세는 번영회에서 거두어서 진해시에 납부하고, 상주 상인이 내는 임대료는 고지서를 발부해 시에서 직접 징수하고 있어요.”
그는 시장 번영회가 체계가 없고 힘이 없음을 제일 많이 한탄한다. 이렇게 시장이 시에 귀속되어 자생적인 발전이 없게 된 건 어디서 실마리를 찾아야 할까?
현재 경화 장날에는 노점상 500여명이 장사를 하고 있는데, 평수에 따라서 500원에서 3000원까지 자릿세를 내고 있다. 또한 상주 상인들은 가게 평수에 따라서 연간 임대료를 시에 납부하고 장사를 한다.
자릿세는 장날에 번영회에서 노점상에게 받아서 전액을 진해시에 납부한다. 또한 상주상인 가게와 장옥은 직접 진해시에 납부한다.
장옥은 연간 9천원을 납부하고, 상주 가게세는 일년에 두 번으로 나누어서 낸다. 이것은 진해시에서 각 상인에게 지로용지를 우송하고, 이것을 가지고 은행에 납부한다.
이석조 씨는 그동안 초안을 작성한 ‘번영회 회칙’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얼굴에 가득 담았다. 처음에 보였던 의심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만큼 그의 지난 몇 년간의 여정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지쳐가는 그의 모습이 마지막 말에 묻어 나왔다.
“현실은 참 내 맘대로 따라와 주질 않네요.”
지난 2000년에 진해시에서는 현대화를 추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상인들에게 설문조사도 실시하였다. 그러나 반대가 심하여 중도에 그만두었다. 올 2005년에는 진해시에서 경화동 영신아파트 뒤편에 공용 주차장 설치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이는 ‘재래시장 활성화사업 추진’의 일환이다.
‘경화방앗간’에서 쫓겨나다
― 박철민(가명), 55세, 경화방앗간 주인
지난 번 찾았을 땐 운 좋게 방앗간 안을 들여다보고 입구에서 사진도 찍었다. 하지만 이번엔 한마디 말도 못해 보고 입구에서 쫓겨났다.
들어서자마자 두껍게 쌓인 먼지에서 냄새가 난다. 먼지 냄새가 이런 냄새일까? 켜켜이 쌓인 나무 장작이 그렇고 요즘은 구경하기 힘든, 무거워 보이는 제분기계가 몇 십 년을 그 자리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어디서 왔어요?”
길을 지나다 한번쯤 관심을 가질만하다. 요즘엔 보기 힘든 신기한 가게의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만큼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곧장 가게 주인아저씨에게 눈길이 간다. 그의 입에서 구수한 옛날 얘기를 들을 수는 없을까.
“얘기는 무슨…… 할말 없으니까 가시요, 어서. 전에도 어디서 무슨 글을 쓴다고 사람들이 많이 왔었는데…… 전부 내가 다 쫓아냈어요.”
그러고는 몇 걸음 들어서려던 몸을 밀쳐내면서 막무가내로 쫓아낸다. 어쩌랴. 무턱대고 찾아간 것부터가 잘못이지.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을 수도 없다. 기지를 발휘해야지. 어쩌면 처음 찾아갔을 때 덜컥 반겨주었더라면 몰랐을 요령을 스스로 터특하게 된 셈이니, 고마워해야할지…….
뒷날 오후 다시 경화방앗간을 찾았다. 이번엔 당당하게 미수가루를 사러 온 손님이 되어 찾아간 것이다. 아저씨는 안보이고 부인인 듯한 아주머니가 나왔다.
그냥 불쑥 저번처럼 내쫓길까 싶어 나름대로 말까지 준비했다. 제일 만만한 ‘미수가루’를 들먹이면 되지 않을까 하고.
“미수가루요? 어쩌나! 아직 덜 됐는데…… 어디서 사러 왔어요?”
여름에 방앗간 앞을 지나갈 때면 고소한 미수가루 냄새가 손님을 끈다. 무엇보다 이 방앗간은 문 앞에서 직접 콩을 볶기 때문에 더더욱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래서 들먹인 게 미수가루다. 마침 그날도 노란 메주콩을 볶고 있었다.
“잠깐만요. 저기 아저씨 나오시네. 미수가루 다 됐어요?"
검은 안경을 낀 지난번 그 아저씨가 나왔다.
“미수가루? 아직 다 안 됐다. 콩이 아직 덜 볶였는데…….”
“아직 멀었다네요. 어디 들리실 데는 없나요? 좀 있으면 다 될 것 같은데.”
다행이다. 저번처럼 첫마디에 거절당하지도 않고, 손님 노릇을 제대로 했는지 주인 내외의 행동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다른 여느 손님을 대하듯 한다. 용기백배하여 한마디 더 보탰다. 콩이 아주 고소하고 맛있어 보인다고 농담하는 여유까지 생겼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아주머니가 말을 받는다.
“이거 다 우리 국산이예요. 우리 집에선 국산만 써요. 참깨만 빼고.”
여느 장사꾼같이 얘기했지만, 그렇게 약삭빨라 보이진 않는다.
이번엔 아저씨가 안경테를 한번 쓰윽 올리더니 가게 자랑을 늘어놓는다. 노련하고도 재빠른 솜씨다. 지난번에는 할 얘기 없다더니 선전에 열을 올린다.
“여기서 장사한 지가 30년도 넘었어요. 우린 중국산은 안 써요. 미수가루도 일일이 하나하나 다 볶아서 만들어요.”
은근한 연탄불에 볶아지는 콩 냄새가 정말 고소하다.
재래시장, 특히 5일장을 모르고 사는 요즘 애들과 손잡고 장날에 구경 오고 싶어진다. 점점 잊혀지고 있는 이런 장터를 생생하게 눈으로 보고 귀로 듣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미수가루 하나를 만들어도 이렇게 정성으로, 반듯하게 다룰 줄 아는 이런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
손님으로 가장하고 방문했지만, 느낌은 좋았다.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게 사는 모습이 느껴졌다. 콩을 볶을 때 쓰는 연료도 모두 연탄을 쓰는 걸 직접 보았다. 화기가 은근하고 오래가지만 손이 많이 가는 단점도 있다. 하지만 연탄하면 잊었던 예전의 정감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그 외관 때문에 세간의 관심을 더 끌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주인은 한마디로 취재를 거절했다. 처음엔 ‘웬 고집인가’ 했지만, 그 맘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그냥 진실하게 남 속이지 않고 살아가고 싶을 뿐 그걸 떠들썩하게 자랑하거나 드러내고 싶지 않는 심정일 것이다. 묵묵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우리의 많은 이웃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낮게 낮게 엎드려 피어 나는 노란 민들레가 생각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장이 뭐, 내나 이랬지
― 이간난(가명), 70세, 국밥집 할머니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일년 중 가장 덥다는 중복이다.
하루 중에서도 가장 더운 오후 1시쯤, 국밥집을 찾았다.
음식점 골목의 중간쯤이다. 양철지붕이 서로 맞닿은 그늘 밑에 평상 몇 개와 작은 주방이 딸린 가게가 할머니의 국밥집이다.
덥고 허기가 져서 우선 ‘돼지국밥’을 주문하고 주방 바로 옆 탁자에 앉았다.
할머니는 1미터 50센티에 못 미치는 자그만한 키에 안쓰러워 보일 만큼 야윈 체구다. 앙상한 팔로 어지럽혀진 탁자 위를 분주하게 치우는 할머니를 보자 마음이 짠했다. 할머니의 얼굴에서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귀티가 흘렀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할머니를 만났다면 국밥집을 할 거라곤 짐작할 수 없는 그런 기품 있는 인상이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쉬지 못하고 고생을 해야 하는 할머니의 사연이 궁금했다.
“이 장사 시작한 지도 40년은 더 됐지 아마. 아주 젊었을 때부터 시작했으니까.”
할머니의 얼굴에서 짐작되는 나이와 장사를 시작한 40년의 시간을 합친 나이가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
“나? 나이 많이 먹었제. 벌써 내가 칠십이야.”
아직도 얼굴에 뽀얀 테가 난다. 거기다 자그마한 얼굴에 체구까지 작아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다만 얼굴에서 느껴지는 눈빛이 조금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아마도 그것이 할머니의 살아온 삶을 고스란히 떠받치고 있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주문하자마자 금방 쇠 쟁반에 반찬이며 국밥이 담아져 나왔다. 제일 먼저 오징어 젓갈에 손이 갔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게 맛있게 삭았다. 쪽파가 들어있는 나박김치는 아삭아삭 씹히는 게 시원했다. 밑반찬 하나에도 이렇게 손맛이 느껴지는데, 국밥의 기본 재료는 또 얼마나 손이 많이 갈까?
“아침에 손님 없을 때 얼른얼른 준비하제. 고기도 미리 삶아서 다 썰어놔야 하니까 손이 참 많이 가.”
주위를 둘러봐도 할머니의 일손을 도와줄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와 힘이 안 들겠노? 손님이 많은 장날엔 우리 손주들이 와서 도와 주제.”
가게 평수는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할머니의 국밥 맛을 보고 나면 결코 이 적은 평수의 가게를 청소하고 관리하고 운영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영감이 있으면야 얼마나 좋겠어? 근데 우리 영감 없어. 벌써 돌아가셨어. 몇 년 전에 가게에 불이 났는데 그때……”
미처 말을 다 잇지 못한다. 이제껏 단단해 보이던 할머니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보였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계시는 걸까? 가게 바닥을 힘없이 내려다보신다. 할머니의 기분이 전염이라도 된 걸까? 덩달아 할머니의 시선을 따라간다.
“가게가 워낙 오래돼서 배선이 낡았어. 그래 전기 누전으로 불이 난 거야.”
할머니는 묻지도 않았는데 화재 사건을 꺼낸다. 가게는 말끔한 현대식으로 꾸며져 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누전이 될 만큼 낡아 보이지도 않았다. 누전이란 단어가 왠지 지금의 가게와 너무 동떨어져 보인다. 마치 시간을 몇 십 년 거슬러 올라간 느낌이다.
“지금이야 그때 불이 난 후로 새로 수리를 해서 싹 다 고쳤지. 벌써 7,8년 전이야. 불이 나지 않았다면 이 정도도 못 고쳤지.”
불이 나기 전에 미리 수리했더라면 불행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의아한 눈빛으로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자 눈치를 챈 할머니가 설명을 보탰다.
“이 시장이 시 꺼라서 내 맘대로 못 고쳐.”
할머니의 소유가 아니라서 할머니 맘대로 시설을 변경하거나 수리할 수가 없다는 말에 잠시 의아했다. 그래도 그렇지 낡고 위험한 배선을 그냥 놔두다니 말이 안 된다. 시는 시설을 소홀하게 관리한 책임을 져야 한다. 시에서 혹시 보상을 받았을까? 받았다면 얼마를 받았을까. 물어보려다 나는 그쯤에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너무 사생활에 깊이 참견하는 것 같았다.
“가게세는 14만 원이야. 일 년에 두 번 나누어서 내는데, 14만 원만 내면 돼.”
처음엔 한 달에 14만 원인줄 알았다. 비싸지도 싸지도 않은 액수라고 생각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하니 일 년에 14만 원이면 월세로 치면 한 달에 1만4천 원인 셈이다. 아무리 재래시장이지만 여기도 장사하는 시장인데 점포세가 1만4천원이라니 싸도 너무 싸다.
상주하는 가게는 다 할머니의 국밥집과 같은 처지라고 했다. 보증금이나 전세로 영업을 하는 게 아니라 일 년에 한번 납부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가게들은 장사할 수 있는 허가권만 갖고 있는 셈이다.
시장에서 장사한 지 40년이 넘은 할머니는 지금도 가게세를 꼬박꼬박 내고 장사한다. 그런데 형편이나 사정은 처음 장사를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지금이나 내나 똑같지 뭐, 장이 똑 이랬지 뭐.”
겉으로 드러나는 물리적인 환경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생활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의미로 들렸다. 칠십을 넘긴 나이에도 아픈 몸을 이끌고 장사하는 모습만 봐도 그렇다. 심하게 관절이 아플 때는 고양이도 고아서 먹어봤다고 한다. 효과는 그때뿐이지만 ‘진짜 아플 때는 덕을 본다’고 한다.
나는 시장에 갈 때마다 할머니의 국밥집부터 찾는다. 늘 시장을 찾을 때는 배고프거나 지쳤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할머닌 이 곳에 서서 40년 동안이나 오가는 사람들의 허기와 지친 다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래서 제일 찾아가기가 쉽고 만만했나 보다. 거창하게 ‘시장의 활성화니 현대화’니 하는 문구를 쓰지 않아도 가장 잘 살고 싶은 사람이 할머니다. 하지만 현실은 제자리걸음에서 두어 걸음 더 뒤로 쳐지고 있다.
경화시장 철로변의 무성한 풀을 보며
― 이재용, 73세, 전직 군인
창원역에서 기차를 타고 진해로 가다보면 진해역 다음이 경화역이다.
이 철로는 경화시장 윗길에 위치하여 주로 사람들을 태우고 학교나 직장을 오고갔다. 말하자면 출퇴근용 열차, 아니면 통학열차라고나 할까? 50여 년 전 경화시장이 생기고 장이 번성했을 땐 장날에 각지의 상인들의 손과 발이 되었다고 한다.
경화시장 아랫길에도 작은 철로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이 철로는 주로 비료나 탄약 수송을 전담했다고 한다. 지금은 진해 해군의 탄약 수송용으로만 아주 가끔 운행하는 것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예전의 그 활기찬 모습을 지금은 무성한 풀이 대신하고 있다.
물건을 나르는 운송수단은 철로만이 아니었다. 육로로도 다녔다. ‘장차’라고 하는 트럭이 지금의 택배처럼 상인들의 물건을 각 장에 배송했다.
예전에 경화시장 번영회 회장직에 있었던 이재용 씨를 만났다.
그는 경화시장 중간 지점인 철물점 뒤 작은 건물에 산다. 현관이 미닫이문으로 된 집이다. 칠십을 넘긴 나이에도 아침저녁으로 밭일을 할 정도로 활력이 넘친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두 눈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10년 넘게 군인 생활을 했다는데, 아마 그래서 시장 번영회 회장직을 맡았던 모양이다.
“한 6~7년 정도 했지요. 처음엔 총무로 회장을 돕다가 나중에 회장을 맡아 2~3년 정도 했어요. 하지만 시장이 발전할 것 같다는 기대를 할 수가 없어서 몇 년 하다가 그만 두었어요.”
그가 지금의 부인을 만나 결혼하고 곧장 이곳에 정착한 때가 1955년이라고 하니까 그때가 얼추 경화시장이 처음 열렸던 시기와 맞아떨어진다고 할 수 있겠다.
“시장을 처음 개장한 게 1955년일 거예요. 소방서 골목인 ‘아침시장 길’ 한 칸 위에 ‘거리시장’이라고,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번개시장 있잖아요? 그런 시장이 있었어요. 그 시장의 상권을 정리해서 지금의 경화시장으로 개장한 거죠.”
시장이 생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경화동의 오랜 역사까지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농사를 짓던 시절에서 지금과 같은 소도시로 발전하기까지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 논이었던 지금의 경화동 땅을 지역 유지들이 사들여서 거기에 건물을 짓고, 그 건물을 진해시에 기부 형식으로 납부했어요.”
국회의원도 아닌 사람들이 왜 지역 발전을 위해서 시에다 기부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보통의 상식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경화시장의 허가권, 즉 시장의 간판을 얻기 위해서 그랬던 거죠. 하지만 저도 그 당시의 일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상설(5일장)시장의 허가권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는데 말이죠. 현재는 건물에 대한 사용 허가권만 가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대목에서 그의 언성이 다소 높아지고, 어조 또한 더 단호해졌다.
유지들이 건물까지 지어 시에다 헌납했다는 당시 상황을 한번 상상해보았다. 시장 사용 허가권을 얻기 위해서라는 목적이 성립하려면 허가권이 땅값 건물값과 맞먹을 만큼 비싸야하는데…… 정말 그들은 그만큼 돈을 번 걸까. 아니면 정말 순수한 말뜻 그대로 사심 없이 자진 헌납했다는 것인가.
“일종의 권리금 같은 건데, 시에 건물을 기증한 유지들은 시로부터 건물을 다시 배정받고, 그것을 위치와 평수에 따라 차등적으로 건물을 사용하여 장사할 수 있는 권리를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넘겨주었다는 겁니다.”
경화시장을 개장할 당시인 1955년에 진해는 진해읍에서 진해시로 승격했다. 하지만 막상 시로 승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를 운영할 재정은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따지고 보면 경화시장이 상설시장으로 허가되는 과정에서 당시의 유지들은 자진해서 시 재정을 확보해 준 결과가 되었다. 지역 유지들이 정말 순수하게 아무 이해관계 없이 바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시로 승격함으로써 땅값이 상승했을 것은 물론 시장까지 생김으로써 주위 땅값은 몇 배나 껑충 올랐을 것이 틀림없다. 시장 땅과 그 땅에 지은 건물 가격보다 더 많은 이득을 얻었으면 얻었지 절대로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계산이 분명히 나옴에도 불구하고, 요즘 세상 잣대로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쌀 99가마니를 가진 사람은 1가마니를 가진 사람 것을 뺏어서라도 100가마니를 채우려한다는 말도 있다. 그만큼 돈에 대한 욕심이라는 것은 끝이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더 돈 벌 욕심을 그나마 자제했으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장이 서는 날엔 철길 아래의 약국이 있는 도로까지 노점상들이 길을 장악하고 있다. 장날이 아닌 평일의 휑한 분위기와 180도 다른 풍경이라 조금 놀랐다.
개장할 당시의 시장터보다 더 넓어졌다고 한다.
“약국 쪽은 민간 사유지이고 시에서 허가받은 시장터는 철로 위에서 위쪽 도로 아래까지죠. 시장 부지가 예전보다 많이 줄어든 셈이죠.”
시장 길은 동서남북 사방 여기저기로 많이 뚫려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중심부에 도로가 생기면서 부터죠. 사방이 논밭으로 둘러싸여 있을 땐 특별히 도로가 없어도 논밭을 통해 다니면 되잖아요?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도로의 필요성이 생긴 거예요. 도로가 생기면서 그 도로 주변으로 집이 들어서게 되고, 그러다보니까 자연히 시장터가 좁아질 수밖에요. 시장이 개장되던 때만 해도 3,000여 평이었는데 현재는 1,547평 밖에 안 남았어요. 그만큼 도로로 많이 빠져나갔어요.”
이재용 씨가 직접 작성했다는 시장 지도에는 거의 완벽하게 시장터의 평수와 위치가 상세하게 나타나 있었다. 처음엔 직사각형이던 시장터가 동서로 작은 도로가 하나 둘 씩 생기면서 평수를 조금씩 갉아먹어서 현재는 절반정도만 남아 있다. 예전 장이 번성했을 땐 우시장까지 설 정도로 넓은 터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는데 말이다.
그는 군에서 10년 넘게 복무했었던 만큼 군인의 사고방식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진해시의 지형을 살피는 안목에서부터 자유경제의 장?단점을 아주 상세하고도 핵심을 관통하는 말투가 그렇다.
“진해는 장복산에서 내려오는 급경사의 지형으로, 큰 수해가 없는 편이라 요새라 할 수 있죠.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 때 진해를 군사적인 요충지로 만들려했던 거죠.”
군인시절부터 그 나름대로 파악한 진해시의 자연지형적인 장점과 인근 지역에 가려져 전쟁 시 큰 요충지로서의 진면목을 발휘하게 될 거라고 덧붙였다.
또한, 경화시장 번영회를 이끌면서 현대화를 위한 계획을 아주 세밀하게 추진했었다. 그 당시엔 시에서 상주상인들의 100%가 동의하지 않으면 허가를 주지 않았다. 그는 상주상인들의 95%까지는 동의를 구했으나, 나머지 5%를 채우지 못해서 몇 년간 계획한 일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그가 느낀 감흥은 중국의 ‘국유재산’의 장점을 몸소 체험한 것 같다.
“우리나라와 같은 자유경제는 전면은 서로 경쟁하면서 경제활동을 자유롭게 할 순 있지만, 그 이면은 좋지 않은 면도 있는 것 같아요. 요즘의 ‘지역이기주의’를 예로 들 수 있죠. 자신의 이익과 맞지 않으면 무조건 반대하는 걸 많이 봐요. 지금 우리나라는 돈으로 움직이는 경제예요. 중국은 안 그렇죠. 전 국토가 국유지이기 때문에 개인의 합의가 어려운 부분은 국가에서 통제하는 경제라는 거죠.”
지역이기주의나 지역감정을 얘기하면서 정치에서도 다소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지역감정도 참 큰 문제예요. 그러니까 누가 정권을 잡아도 결과는 똑같아요.”
처음 봤을 때 눈에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현재도 그의 사고는 군인복무 시절의 생각들이 많이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얘기 내내 그런 것을 느꼈다.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단호하고, 포용하는 것 같으면서도 막힌 듯한 그의 생각들이 많은 부분 드러났다.
노점상들은 주로 대도시에, 그것도 아주 번화한 거리에서 볼 수 있다. 진해시 같은 중소도시에서는 노점상들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진해 경화시장은 다르다. 장날이 되면 차가 다니는 도로변까지 노점상들이 와글와글 몰려든다. 상인들도 손님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자유스럽게 물건을 팔고 산다.
“창원이나 다른 지역은 환경미화 등의 이유로 노점상들을 단속하지만, 여기는 특별히 단속하지 않거든요. 장날에만 민유지인 약국 아래 도로까지 장사를 하도록 묵인하고 있어요. 예전엔 골목골목마다 장이 섰는데, 지금은 길가에만 장이 서요.”
개장 당시에 3,000평에 달했을 시장 부지가 지금은 절반만 남은 형국이다. 그 골목들이 사라지면서 이 시장도 길가에만 장이 서는 형편이 되었다.
“어느 때부턴가 상인들 중에 재정적으로 영세한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장사도 하고 거주도 같이 하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거주하는 집 골목 주변엔 거주한다는 이유 때문에 장사를 하지 않게 되었고, 사람이 다니는 길에서만 장사를 하게 된 거죠. 거의 난민촌 비슷한 지경이 되었어요.”
이곳 경화동에서만 50년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재용 씨는 사투리를 거의 안 쓴다.
“원래 일본에서 태어난 데다, 젊은 시절을 군에서 보내다 보니까, 표준말에 익숙해서요.”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일본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을 군에서 보냈다고 한다. 해방 전까지도 우리말과 글을 거의 모르고 지내다가, 관비로 운영하는 ‘체신학교’를 다니면서 우리말을 배웠다고 한다.
“말보다는 글을 통해서 말을 배웠어요. 그래서 사투리는 전혀 몰라요.”
군인의 모습은 그가 꼼꼼하게 작성한 지적도를 보면 그대로 짐작이 간다.
“제가 1955년인 소위 때 결혼을 했는데 1968년 대위로 제대할 때까지 군에 있었어요.”
군인생활을 접은 건 20년도 채 안 되어서였다. 그 이면에는 많은 굴곡이 있었을 것이다. 남편의 입장을 대변하듯이 부인이 가끔씩 거들고 나선다.
“우리 집 아저씨가 성질이 워낙 꼿꼿해서, 군 생활이 체질에 맞지 않았어요. 윗사람들의 부정한 모습을 참지를 못해서 중간에 군 생활을 그만 둔 거예요.”
군대에서 나온 뒤에는 한동안 시장의 ‘장차’를 모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 때는 자동차도 귀했고,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는 군대시절에 운전을 한 경험이 있어서 그 운전기술을 십분 활용한 것이다.
큰 트럭에다 이 시장 저 시장으로 장사를 떠나는 상인들의 물건을 실어 나르고, 때론 사람들까지 태워서 여러 장을 돌아다녔다. 지금의 택배와 비슷한 장차를 운전하면서, 중도에 퇴직한 후 겪었던 3년간의 방황을 접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옆에서 남편을 지켜보는 부인의 심경 또한 견디기 쉽지는 않았을 터이다.
부인은 남편을 뒷바라지 하는 한편, 철물점 뒤편에 있는 ‘시장한복’에서 바느질을 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키웠다. 한복 짓는 일은 결코 수월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은 당시의 어려웠던 살림살이를 씩씩하게 일구어 살림을 마련했다.
서로를 존경하고 신뢰하는 정명해 씨 부부의 삶이 시장 철로 변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처럼 강인하고 힘차게 느껴졌다.
“경화동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 신경옥(가명), 84세, 경화동 토박이 할머니
시장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의 모습을 알기 위해선 이 경화동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의 생생한 얘기가 빠지면 안 될 것 같았다.
경화동 주택가를 둘러보다가 어렵게 경로당을 찾았다.
주택가의 길은 비슷비슷해서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경로당은 특이하게도 동사무소를 연상시키는 단조로운 2층 건물이었다. 내부는 보통의 단독 주택과 비슷했고 남녀를 따로 구분해서 방을 배치하고 있었다. 1층엔 여자, 2층엔 남자로 구분했는데, 1층 거실에 할머니 5~6명이 모여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들어가기가 머쓱했는데, 할머니들이 먼저 반색하면서 의외로 편안하게 맞아주었다.
“내가 경화동 토박이데이. 내가 여서 오래 살았는데…… 1925년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았응께네.”
할머니는 자청해서 자신을 소개한다. 그리곤 대뜸 묻는다.
“내가 몇 살인가 한번 퍼뜩 계산해 봐라.”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굴린다. 올해 81세다. 분명 계산은 맞는데도 영 숫자가 믿기지 않는다. 너무 젊어 보인다. 팔순이라면 자글자글한 주름에 허리도 반쯤은 접혀져 있을 것이라 연상된다. 그런데 눈앞에 앉아있는 할머니의 모습은 전혀 딴판이다.
“내가 지금 사는 2층 집에서 태어나서 여지껏 경화동을 안 떠나봤거든. 거 안 적어도 되나?”
눈을 껌뻑이며 너무 열심히 들었나? 적지도 않고 기억하겠냐는 투다. 할머닌 팔십이 넘게 살아온 인생의 보따리를 슬슬 풀어 놓을 심산인가 보다.
할머니의 인생이 특이한 것은 대부분의 할머니들과 달리 할머니는 결혼한 후에도 친정집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눌러 앉아 살았다는 점이다. 그것도 남편과 함께 말이다. 할머니의 남편은 체격이 약해서 직접적인 군 생활은 하지 않고 해군 시설창에서 줄곧 일했다. 이 때문에 할머니는 친정인 이 동네를 떠나지 않고 평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살던 집은 골목이 아홉 개였는데, 나는 다섯 번째 골목에 살았다 아이가. 바로 앞에 ‘왕자 목욕탕’이 있었고.”
할머닌 예전 주소지의 번지수까지 또렷이 기억할 정도로 총기가 대단했다. 도저히 나이가 믿기지 않는 기억력이다. 한번은 토박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좋은 일도 한 적이 있었다.
“전에 마산에서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64년 전에 경화동에서 살았던 사람을 찾는다고 수소문한 기라. 그러자 동사무소에서 나를 소개해서 그 사람이 찾아 왔는 기라. 근데 알고 본께네 우리 사촌오빠의 친구를 찾더란 말이야. 그 사람이 재수가 좋았제. 날 찾았기 망정이지 안 그랬음 몬 찾았지. 나 땜에 아다리가 딱 맞은 기라. 참 세상이 넓고도 좁은 거를 그때 실감했제.”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흐뭇하고 감격에 겨운 모양이다. 오랜 세월 경화동을 떠나지 않았음을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았다. 경화시장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을 테니까. 그래서 다짜고짜 경화시장에 대해 물었다.
“경화시장? 저 아래 상가시장 말하나? 내는 여 아침시장에 많이 댕기는데……”
지금의 경화시장을 주민들은 상가시장이라고 부른다. 시멘트 건물 안 상가에서 장사를 하는 시장이란 뜻이다. 반면에 ‘아침시장’이란 아침에만 번개처럼 열리는 노점상 시장으로, 지금의 경화동 소방거리에 자연발생적으로 서게 된 시장을 말한다. 할머니가 15살쯤인 50년 전에도 활발하게 섰던 장이라고 하니 역사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경화시장은 아침시장보다 훨씬 뒤에 생겼음에도 지금 현재는 장날 이외에는 거의 손님이 없다. 반면에 경화시장보다 더 오래된 ‘아침시장’은 여전히 활기차게 성업 중이다.
“경화시장은 3.8장인데, 3.8장이란 거 알제? 8일장에는 여기(아침시장)에 장이 서고, 3일장에는 저 동사무소 자리에 장이 섰제.”
8일 장에는 곡물을 주로 많이 팔았다고 한다. 지금은 곡물이 거의 침체되었고, 밭에서 나는 야채와 과일 위주로 장이 선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옆방에 구십이 넘은 듯한 연로한 할머니 세 분이 의심쩍은 눈초리로 흘낏거렸다. 경로당에 들어서자마자 사들고 온 과자와 음료수를 내놓고는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드는 게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한 것 같았다.
“보소. 거, 약장사가? 약장사 아이가?”
순간 나도 모르게 픽 하고 웃음이 터졌다. 처음 만난 사람을 상대로 일 분도 쉬지 않고 떠들어 댔으니 약장수로 오인할 만도 하다. 한편으로는 혹 당신들에게는 말을 걸지 않아서 서운했나, 말벗이 그립다보니 그런 오해를 했나 싶었다. 오해는 금새 풀렸지만 할머니들의 외로움이 내 코끝까지 전해져 찌르르 시려왔다.
“경화시장 거는 잘 안 다녀.”
하긴 할머니가 걸어 다니기에는 조금 먼 거리다. 경로당을 찾아올 때 걸어봤지만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옛날엔 노다지 길가에서 장사를 많이 했제. 시장이 첨 생길 당시에는 암 것도 없었응께네……”
작년에 아침시장을 없애고 경화시장으로 옮기려고 했지만 잘 추진되지 못했다고 한다. 상가 점포의 상인들은 노점상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고 불만이 빗발쳤다. 결국 시에서도 민원에 밀려 단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손님이 없으면 경화시장으로 갈려고 했제. 근데 계속 손님들이 아침시장을 찾는 기라. 결국 합치지 못했다 아이가.”
할머니의 이 말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손님이 많이 밀려드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는데, 알고 보면 주민들이 원하는 시장은 아침마다 번개처럼 반짝 섰다 사라지는 아침시장이나 3.8 장날이었던 것이다.
상가에 상주하는 점포들은 백화점과 대형마트에 밀린다. 가격과 품질 면에서 경쟁이 될 수 없다. 그에 비해 ‘아침시장’이나 3.8장날에 반짝 열리는 노점상들은 가격과 품질 면에서 상주시장뿐만 아니라 백화점과 대형마트보다도 더 유리했다. 이것이 고객이 많이 찾는 이유였다.
사실 진해시는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해군의 배후도시로서 최근까지 큰 변화가 없이 조용했던 도시다. 할머니 역시 이런 도시에서 군인 남편이 꼬박꼬박 타온 월급으로 자식을 키우면서 큰 굴곡 없이, 큰 풍파 없이, 편안하게 살아왔다. 진해시의 역사와 할머니의 삶이 꼭 닮아 보인다.
“근데 와 돌아 댕기면서 이런 거를 하노?”
순간 나는 당황했다. 내가 물어보는 것마다 자상하게 대답해주던 할머니가 느닷없이 반대로 나에게 질문을 하니 그럴 수밖에. 아닌 게 아니라 이 일을 시작한 이후 수없이 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던 질문도 바로 이거였다. 그래서 마치 할머니에게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만약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면 이런 얘기들을 아무도 모를 거 아녜요? 그래서 기록으로 남겨놓으려고예.”
경화시장의 내일
산과 바다에 불도저 소리가 요란하다
경화시장에 왔다 갔다 하면서 나도 모르게 진해시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진해시는 일제강점기 때 해군 병참기지의 배후도시로 개발된 이후 1990년대까지 도시의 모습이 거의 변하지 않았고 인구 변동도 크게 없었다. 유동 인구가 적고 토박이가 많은 건 이 때문으로 풀이된다. 물론 1970년대 마산에 수출자유지역이 생기고, 80년대엔 창원에 기계공단이 들어선 이후에는 도시의 모습이나 주민 수도 변화가 생겼지만 그건 마산, 창원의 급격한 팽창에 비하면 거의 미미한 수준에 불과했다.
이렇듯 진해시는 군대에 종사하는 봉급자들이나 연금생활자, 그리고 군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도시경제 덕분에 반 백 년 가까이 풍요롭지는 않아도 안정적인 경제 환경을 누려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2000년 들어서자마자 진해시가 급성장하고 있다. 불도저 소리가 요란하다. 산 여기저기가 파헤쳐지고 고층 아파트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는가 하면, 바다 위엔 거대한 다리가 세워지고 있다. 해양공원 조성이라는 화려한 청사진 속에는 화려한 조명으로 단장한 음지교, 군함전시관, 해전사 체험관 등의 첨단 시설이 속속 보인다.
이렇게 진해시가 급작스럽게 개발되면서 경화시장도 들썩거린다.
물론 경화시장도 다른 재래시장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불황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셔터를 내린 가게가 대부분인 상가는 유령이라도 나올 듯 스산하고 썰렁하다.
어디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다른 지역이나 다른 시장에서 듣는 똑같은 말을 듣게 된다. ‘재래시장의 활성화’니 ‘재래시장의 현대화’ 추진 사업이니 하는 말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말 속에는 현대식 빌딩으로 단장한 새로운 시장의 청사진이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들어있다.
싼 가격과 좋은 품질로 재래시장을 살려야
경화시장의 5일장은 아직도 북적댄다. 펄펄 살아있다. 왜 그럴까? 거기엔 분명 이유가 있다. 백화점과 대형마트가 줄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경화시장 바로 인근에도 현대화된 큰 시장이 있음에도 주민들은 그 시장보다는 5일장이 열리는 경화시장을 더 찾는다. 시설은 낙후되고 정비도 덜 됐지만 여전히 장날만은 북적댄다. 그 이유가 뭘까?
연탄불에 오래오래 끓여서 깊은 맛이 우러나는 국밥 한 그릇은 5일 장날이 아니면 맛볼 수 없다. 방금 텃밭에서 캐온 싱싱한 야채들은 길가 노점이 아니면 찾아볼 수 없다. 이런 것은 백화점과 대형마트가 해 줄 수 없다. 현대적 시설이나 경영으로는 불가능하다. 현대적 시설이나 경영이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진해시에서도 2000년에 경화시장 ‘현대화 사업’을 추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상인들의 거센 반대로 중도에 포기했다. 시장 상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현대화’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5일장의 단골고객 입장에서도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5일장만큼 가격이 파격적으로 싸고 물건의 신선도가 월등히 좋은 곳은 없다. 값싸고 품질 좋은 물건을 살 수 있는데도 장날을 이용하지 않고, 굳이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를 찾을 까닭이 과연 있을까?
사실 재래시장은 가격과 품질에서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와 경쟁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경화시장만은 그렇지 않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와 비교해도 가격에서나 품질에서나 떨어지지 않는다.
?告?? 그것은 경화시장이 진해시의 소유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시장은 개인소유로 되어있다. 그런데 유독 경화시장만은 진해시가 소유권을 갖고 각 점포를 세주어 운영한다. 이 때문에 다른 어느 시장보다 점포 임대료가 싸다. 노점상 자릿세 역시 파격적으로 저렴하다.
이 점이 다른 시장보다 유리한 점이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큰 이점이다. 말하자면 토지나 건물의 사용료가 턱없이 싸기 때문에 물건 가격을 결정하는데 월등하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취재를 하면서도 이 점을 주의 깊게 관찰하지 못했다. 상인들도 특별히 이 점을 강조하거나 특화해서 말해주지 않았다. 글을 쓰면서, 그것도 초고를 거의 끝내갈 무렵에서야 갑자기 깨달음이 왔다. 다른 시장에 비해 유난히 노점상이 많이 몰리는 이유라든가, 40여 년 동안 한 장소에서만 국밥집을 연 할머니의 사연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하긴 상주하는 가게 임대료가 1년에 14만원인 시장이 대한민국에 경화시장 말고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애초에 시장이 처음 들어설 때만해도 상인들은 상설시장이라는 이점만을 생각하고 입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 상주 상인들은 경화시장에서 장사와 거주 공간을 동시에 해결하고 있다. 이 때문에 겉보기에 건물은 형편없이 낙후되어 난민촌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이들이 이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저렴한 임대료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이 시장은 상설시장이면서 동시에 공설시장이라는 특색을 갖고 있다. 처음 개장 때부터 50년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공설시장이다. 누구나 일정한 돈만 내면 어디서나 난전을 펼 수 있다. 때문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이곳을 지키며 장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경화시장은 다른 시장과 다르다. 느긋하다. 가장 낮고 따뜻한 시장이다.
골목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잊혀질 뿐이다
처음엔 아주 오래된 골목과 재래시장만 두리번거리며 찾아 다녔다. 그러나 음식점 골목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골목은 사라지고 없었다. 부재중이었다. 아니 있지만 하나 둘 거주공간이 들어서면서 골목길을 내어준 상태라 골목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몇 번 더 골목길을 돌고 또 도는 동안 많은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다양하고 굴곡 많은 삶들을 만나면서 비로소 또 다른 골목을 발견했다. 아니 진짜 골목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힘들게 지켜온 서민들 마음의 골목이 바로 그것이다. 세상에 알려지지는 않은 채로, 제가 서 있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간직하고 살아가는 소박한 마음들을 절실하게 읽었다.
오늘 우리가 찾으려고 했던 골목 역시 눈에 보이는 골목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외형적으로 보면 좁은 골목길에서 큰 길거리로 이동했을 뿐, 사람들은 여전히 그 길에서 먹고 자식을 키우고 싸우고 사랑하고 웃고 울면서 살아간다.
내가 찾아낸 이 소중한 마음의 골목들을 글로 표현할 능력이 없다. 아니 단 몇 줄로써 표현할 수도 없다. 그래도 이런 행로를 멈추고 싶지 않다. 그 골목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배웠기 때문이다.
보잘 것 없는 기록이지만 이 시간들이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