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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風景ㆍ2
〈꽃다지〉
Ⅰ
제비꽃이란 강남갔던 제비가 올때 피어 나거나 또는 제비같이 생겼다고하여 〈제비꽃〉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어릴때 논두렁이나 밭에 잉크색으로 파랗게 지천으로 피어 있었으며, 우리는 그 꽃을 〈오랑케꽃〉이라 부른곤 했다. 보통 4~5월에 저수지둑이나 논두렁에 핀다.
도심의 소음이 싫어 최근까지 시골에 생활하면서, 서울출퇴근을 하였다. 태생이 산골출신이어선지 시골생활이 마음 편했다. 집사람은 도시출신으로 적응하는데, 아마도 몇 년간 고생을 했을 게다.
시골생활은 긴 겨울이 나기가 힘들다. 집 뒤엔 깨나 높은 산과 저수지가 있지만, 겨울이면 눈으로 설백월백 雪白月白하여 마땅히 다니기가 힘들다.
그런 날은 대개 집안에서 책을 보며 지나기가 일쑤다. 용인 백암에 5일 시골장이 서는 날은 버스를 타고 가 보지만, 황량하기 거지 없다.
봄이 되어 황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겨우내 텅빈 들판 길에 꽃다지가 피기시작 한다. 꽃다지의 크기는 한 2~3㎝정도쯤이면 하양ㆍ노랑ㆍ연붉은색으로 피어 봄바람에 나폴거리기 시작한다. 꽃다지가 몇포기 피어나는 게아니라, 시골 온 들판이 거의 물감을 뿌린 것처럼 피어 바람에 한들거리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다.
그런 날이면 아내와 칼ㆍ나물바구니 그리고「야화 野花」란 아주 작지만 영리하고 털이 눈같이 하얀개와 함께 봄외출을 간다.「야화」가 자욱히 핀 꽃다지 천지를 내달리기 시작한다.“야화야! 꽃다지가 아파하니 밟지 말아라.”라고 아내가 달려가면서 소리쳐도 소용이 없다.
들판에 앉아 봄 바람에 하양ㆍ노랑색으로 자욱히 흔들거리는 꽃다지를 바라다보면, 세상에 부러운 게 없고 그저 아득할 뿐이다. 한참을 그저 그렇게 꽃다지 보며 넋을 놓고 있으면, 아내가 이제 나물캐러 가자고 보챈다.
다시 발길을 옮겨 마을들판을 지나 산골길로 간다. 양지켠 논두렁ㆍ밭두렁엔 빌금다지ㆍ씀바귀 등 봄나물이 돋아 나 있다. 도시출신 아내 대신 나는 그 봄나물을 정성스레 뜯어 바구니에 담는다. 향긋한 봄나물 내음이 조용히 온몸에 스며든다. 봄나물이 아직 어려 먹을 만큼만 뜯었다.
다시 발길을 산골길로 올라가면, 산골 다랑이논이 나타난다. 논 위쪽의 옹달샘에서는 졸~졸~졸 청량한 물이 솟아난다. 허리를 굽혀 그 물을 손으로 뜨서 먹어본다. 봄내음처럼 향긋하고 상큼했다.
놀랍게도 겨우내 흘러 내린 옹달샘가엔 돌미나리가 자욱히 자라고 있었다. 깊은 땅속에서 솟아 난 옹달샘물이 미나리가 자랄 정도로 따뜻했던 모양이다. 아내가 칼로 먹을 만큼의 돌미나리를 뜯어 바구니에 담았다.
집안에 갇혀 있던「야화」가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천방지축으로 돌아 다닌다. 개의 본성이 뛰어 다니는 것인데 겨우내 그렇지 못했으까, 이해가간다. 「야화」를 따라 산길로 계속 오르다 보니 음지에는 아직 눈이 수북히 쌓여 있고, 산개울도 아직 얼음이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흥에 겨워 아내ㆍ「야화」와 더불어 산을 쏘다니다 보니, 해으름이 깔리기 시작한다. 아직 봄날은 짧은가 보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내달리는「야화」을 겨우 달래서 집으로 왔다. 쌀밥을 하여 뜯어 온 봄나물과 돌미나리를 넣고 참기름에 비벼 먹었다. 알싸한 봄나물 향기가 입맛을 돋웠다. 참 모처럼 시골생활 맛을 만끽했다. 사는 게 오늘만 같더라도 얼마나 좋으려만ㆍㆍㆍ.
Ⅱ
오랑케꽃, 왜 하필 이름이〈오랑케꽃〉이라 했을까. 오랑케꽃의 유래는 오랑케(만주족)의 머리모양과 비슷한 형태의 꽃이라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이 풍진세파 風塵世波에 지치고 삶의 무게가 몹씨도 무거워질 때, 꿈속에 잉크빛으로 피어난 그 〈오랑케꽃〉이“너무 힘들어 하지 마세요. 사는 게 다 그래요.”라고 날 위로 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그 아득한 모습이 엊그제 일처럼 눈에 마음에 가득 밟히는 까닭은 왜인가. 산골촌놈이 어렵게 대처大處로 와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일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 왔다가, 복학하여 기숙사생활을 하게 되었다.
캠퍼스가 백만평이 넘을 정도로 광활하였다. 기숙사는 ‘남매지男妹池’란 저수지가 있는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기숙사에서 바라본 모습이 한폭의 풍경화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의도 시들해 지고, 그 시간에 도서실에 틀어 박혀 전공과 관련없는 문학등 잡서에 빠져 살았다.
그 생활도 지루해 나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허전한 심사 달래려고 무작정 버스를 타고 야외로 나갔다. 벌판에는 사과과수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사오월 하얀 사과꽃 향기가 들판을 감쌓다. 사과밭 울타리는 탱자나무로 쳐져 있었고, 아직 노랑탱들이 주렁 주정 달려 있었다.
그렇게 종일을 걷고 거의 파김치가 되어 기숙사로 돌아오면, 그런 날은 가슴이 후련했다. 산골고향이 생각났다. 지금 고향 산골은 갖가지 산꽃들로 잔치를 이루고 있을 게다. 십리가 훨씬 넘은 산골을 따라 밤늦도록 그 꽃들을 한아름 꺾어 꽃다발을 만들어 주었던, 그녀가 몹씨도 그리웠다.
기숙사 옆「남매지」저수지가 바다처럼 넓고 크다. 봄바람이 불 때면, 출렁이는 물결이 긴 파도처럼 하얀 포말을 내며 기슭에 부딪쳤으니 말이다.
〈남매지〉
‘남매지’란 이름은「조선 선조 때 어느 마을에 오누이와 눈 먼 홀어머니가 살았는데 오빠는 머슴살이 중에도 틈틈이 공부하다가, 마침내 과거날이 되었지만 노자돈이 없어 여동생을 마을에서 제일 부자집에 식모살이로 보내고 노자돈을 빌려 과거길에 올랐다.
마침내 오빠가 장원급제해 금의환향했으나 여동생은 이미 부자집 아들에게 겁탈 당해 마을앞 못에 빠져죽고, 어머니도 딸을 말리다 함께 죽은 뒤였다.
장원급제를 하여 어머니와 여동생을 호강시키려 했던 오빠는 부자 아들의 소행을 알리는 상소문을 조정에 올린 뒤, 보름달이 밝은 어느날 이 못으로 걸어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후로 사람들은 이 못을 남매지라 불렀다.」라는 애틋한 전설에서 기인되었다고 한다.
거의 대부분의 강의를 빼 먹고, 그래도 내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책 한두권과 함께 저수지 산책을 나섰다. 사오월이 되면 캠퍼스엔 발그레한 ‘잔디꽃’이 불번지듯 피고 지고, 저수지둑에도 ‘오랑케꽃’이 피기 시작했다.
〈오랑케꽃〉
저수지가 크고 넓어서인지 저수지둑도 거의 500미터가 되었다. 그 길고 높은 저수지둑 전체가 파란 잉크를 뿌린 것처럼 ‘오랑케 꽃’으로 뒤덮였다. 너무나 크낙한 아름다움은 우릴 그냥 처연스럽게 한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저수지둑 위에 핀 오랑케꽃 더미에 팔베개를 하고 벌렁 누웠다.
봄햇살이 따스했고, 봄 바람도 살랑였다. 멀리 하얀 사과꽃 만발한 들판에는 아지랑이 한들거리고, 하늘가엔 노고지리가 우지짖으며 날랐다. 살포시 봄잠에 빠져 들었다. 몇 시간을 잤는지 배가 고파 일어났다. 노루꼬리마냥 짧은 봄날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하들짝 낮잠에서 깨어나, 저수지가를 걸었다. 저수지 둘레가 족히 이십리가 넘은다고 하니 얼마나 큰 저수지인가. 이 곳 캠퍼스와 저수지가 삼국통일을 이룩했던 신라화랑들의 훈련장이었다고 하니, 그 옛날부터 이름 난 곳이었던 모양이다.
저수지가를 한시간 정도 돌다 보니, 외딴집이 나타났다. 낡은 초가집이었다. 저수지 옆에는 우물이 있고, 그 때 우물을 뜨러 온 아가씨가 나타났다. 검은 머리채를 엉덩이까지 내리 뜨리고, 깜장 짧은 치마와 하양 저고리를 입었다. 요즘도 저런 아가씨가 있을까 하고 놀라, 우물가로 갔다.
〈산꽃〉
늘씬한 몸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이었다. “미안합니다만, 물 한모금 얻어 먹을 수 있을까요?” 라고 말을 붙였다. 아가씨가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고개를 돌리고 건네 주었다.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홍조가 된 그 처녀는 물을 건네준 후, 종종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한 떨기 청초한 산꽃이었다.
최근 우리나라 소설계의 거목이신 박완서 소설가가 타계 하셨다. 참 많은 상처를 가슴에 앉고 살다가신 분이다. 6ㆍ25동란때 오빠와 삼촌을 잃고 1988년 남편에 이어 외아들까지 잃자 남편을 부르며 “나좀 데려가 달라."며 자살까지 시도하였다고 한다.
이 분은 가슴속의 그 살을 애이는 생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한다.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그 글쓰기, 인간을 위로 하려는 따스한 그 분의 소설과 수필이 이 한겨울 더욱 그리워짐은 왜 그런가. 이런 아쉬움도 있고 저런 어려움도 있지만, 「그래도 인생은 살만하다.」라는 그 분의 삶에 대한 믿음때문인지 모르겠다.
“이 풍진세상에서 문학이 필요한가?”란 의문이 많지만, 작가들의 가슴속의 아프고 쓰리고 때론 기쁜 이야기를 통해, 문학이 삶의 덧없음을 조금이나마 견디게 하는 힘이 될런지도 모르겠다.
「아프지 않은 청춘은 청춘이 아니다.」라고 어느 작가가 말했 듯, 지나쳐 온 내 청춘이 왜 그리도 검붉은 상처투성였던지 나는 모르는 일이다.
아마도 그 분노인지 아님 주체할 수 없었던 그 청춘의 생채기가 없었다면,내 생애는 많이도 빈곤했을 게다. 언제쯤 삶의 덧없음으로 세상을 헤매었던 그 한때의 아팠던 청춘시기에 나를 위로했던, 그〈오랑케꽃〉이 꿈이아니라 현실로 내 가슴에 한떨기 산山꽃으로 피어날 수 있을까.
東 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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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동파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젊은 날 고향산천이 그리워지는 따뜻한 글이네요. 남매지의 애달픈 전설조차도 아름답게 느껴지네요. 아마도 동파님의 삶 속에 아름다운 한떨기 산 꽃으로 제비꽃도, 오랑케꽃도, 아팟던 청춘도 함께 피어나 향기를 발하고 계실 것으로 생각되네요. 항상 행복하세요.
신 방수 장로님!! 마음 글, 표현의 느낌이 대단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이십니다)
고난주간 예수님의 고난을 동참하시는 한주가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