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n―Paul Sartre 장 폴 사르트르
1905년
파리 출생
1931년
르아브르의 고등중학교에서 교편
1933년
1934년까지 베를린에 유학하여 E.후설의 현상학을 공부
1936년
{상상력} 저술
1937년
{자아의 초월}출간
1938년
장편소설 {구토} 저술
1940년
{상상력의 문제} 출간
1943년
{존재와 무}출간
1952 - 1954년
{공산주의자의 평화}를 쓴 후 공산당에 동반자가 되어 반전·평화운동에 참가
1960년
{변증법적 이성비판} 출간
1980년 4월 15일
사망
사르트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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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 사르트르, 푸코, 부르디외를 잇는 비판적인 사회참여적인 지식인 상은 프랑스 문화의 독특성의 일부로 형성하고 있다. 프랑스는 지식인이 가장 자유롭게 활동하는 나라이며 대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나라였다.
그 곳에서 사르트르는 그 누구보다도 비판적 지식인을 대표한다. 한 사회의 주어진 질서를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더욱 자유로운 삶이 가능한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읽고 생각하고 쓰고 토론하고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사르트르보다 더 잘 보여준 사람은 없다. 그는 철학자, 소설가, 희곡작가, 문학비평가, 사회이론가, 잡지 출판인, 논쟁가, 사회운동가 그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 없었다.
사르트르는 일생에 거쳐 수많은 감동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선택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표출하였다. 그러기에 사르트르라는 이름 뒤에는 실존주의란 말이 따라오지만 그의 실존주의는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요소들과 융합하며 변형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2차대전 상황 속에서 쓰여진 {존재와 무}로 대표되는 초기의 사르트르가 순수한 의미에서의 현상학에 터한 실존주의자였다면 냉전 상황 속에서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쓴 후기의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적 실존주의자였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했고 또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라고 선포하였다. 그가 볼 때 인간 은 기독교적 교리와 사회적 제도의 구속을 넘어서,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만들어나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가톨릭 교회와 프랑스 공산당의 비판에 대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말로 응수하였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 자신을 던지고 자유롭게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생성의 존재로서의 인간 모습을 사르트르는 스스로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어느 곳에 정착하지 않는 보헤미안적인 삶, 그리 고 시몬느 드 보브와르와의 특별한 관계는 부르조아적인 안정과 삶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자 비판이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냉전 상황 속에서 사르트르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자신의 존재론을 사회적 분석 차원으로 발전시켜야 했고 어떤 방식으로든 마르크스주의와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를 넘어서 '마르크스주의는 20세기의 넘어설 수 없는 지평이다'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교조화되고 결정론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는 그냥 아무 내부적 관계없이 하나의 시간과 공간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인간들의 집합이 아니라 집합적인 의지를 가지고 역사를 만들어 가는 '융합된 집단'의 모습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를 결합시키려고 하였다. 그것은 소외와 착취의 관계를 벗어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적 관계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대부분의 좌파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1956년 소련의 부다페스트 침공 이후 사르트르는 공산당과의 동반자적 관계로부터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의 독립 전쟁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서문을 통해 폭력의 피해자인 식민지 사람들이 독립을 위해 사용하는 폭력의 정당성을 옹호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청년들에게 식민지 유지를 위한 비열한 전쟁에 징집을 거부하라는 내용의 '121인 선언'을 주도하였다. 1968년 5월 운동 과정에서 사르트르는 '50년만에 민중과 지식인이 다시 손을 잡았다'라고 말했고, {우리들의 저항은 옳은 것이다}라는 제목으로 대담록을 출판하기도 했다.
사르트르의 철학은 60년대 이후 구조주의의 열풍과 포스트구조주의의 유행 속에서 심하게 훼손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인간존재에 대한 신뢰를 허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식인으로서의 사르트르의 삶은 후대 지식인들의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이제 푸코가 말했듯이 사르트르 같은 일반적 지식인이 아니라 특수한 지식인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인은 '전통적'이 아니라 현실에 대해 항상 비판적이고 아카데믹한 강단 속으로 몸을 숨기는 나약한 지식인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시위현장의 늙은 사르트르와 푸코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지식인을 기대하는 것은 우리에겐 너무 지나친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