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1:8-19, 내 아들아 들으라
잠언 1장안에는 1-7까지 도입부와 8-19절까지의 지혜와 미덕, 그리고 우매함, 악인이 대조의 20-33절의 말씀입니다. 그 중에 오늘 말씀은 부모의 훈계와 순종, 또 한부분은 악인의 유혹과 거부에 대한 이중적인 권면을 다루는 부분입니다.
8절을 보면 '쉐마으 삐니 무싸르 아비카' 아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라 ' 이 단어는 단순히 아들에게 아비의 말을 들으라는 의미가 아니고 주의를 기울여 듣고 그들은 것을 마음에 동의하여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듣는다는 솨마으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어 반드시 들어야하고 순종해야 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한 말을 들어야 하는 아들'뻰'은 제자의 의미도 있어(왕상20:35, 왕하2:3,5) '내 아들아' 이 말은 스승이 제자를 부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아비를 4가지로 분류해서 호칭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아버지를 의미하고 둘째는 육신의 아비를 의미하고 셋째는 스승을 의미하고 넷째는 멘토를 의미하고 있기때문입니다.
특히 부모는 교육에 있어서 하나님의 모형으로 부모의 권위와 교훈은 하나님의 권위와 말씀을 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할수 있습니다. 신32:7절에는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4:10절에는 "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 하시매" 그러므로 신앙교육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선택 과정이 아니고 꼭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해야하고 선생으로서 가르쳐야 합니다. 이 명령을 강력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8절에서 또 주의해야 할 부분은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떠나지 말라' '웨알 티토쉬'는 미완료형 동사가 결합된 단어로 가정내에서 교육은 어머니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비의 훈계는 강제성을 띠고 있는 반면 어미의 법은 아비의 훈계보다 부드러운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가정에서 자녀들을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바로 이일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듣는 자녀들은 부모님의 가르침에 또한 그 권위에 순복해야 합니다. 무엇처럼 하나님의 말씀처럼 무겁게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의 바른 자세입니다.
그런데 분별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가르치시는 훈계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 된다면 그때는 거부해야 합니다. 그 모델이 요나단인데요,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할 때 요나단은 사울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윗을 살려서 보내 주었습니다(삼상20:30-33) 또한 우리의 예수님도 아직 때가 아니지만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을 방아 들여서 순종하므로 가나 혼인집에서 최초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요2:4) 바로 우리 자녀된 성도들이 본 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그동안 부모님의 훈계를 잔소리로 듣고 흘려 들었다면 회개하고 돌이켜 이제부터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무관심으로 무시했다면또한 회개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부모님을 멸시하면 그는 거짓말쟁이 입니다. 이렇게 부모님을 공경하고 그 권위를 인정하고 순복할 때 9절에서 아름다운 관이요, 금사슬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존귀하고 아름다운 영광된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부분을 성도들에게 적용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듣고 '슈마'순종하여 충성스러운 자에게 '의의 면류관'(딤후4:8), '생명의 면류관'(계2:10)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축복들을 다 받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3:20)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해야 합니다.
10절입니다. 악한자가 너를 꾈지라도 다시 말하면 악한 생각을 가지고 와서 과장되게 말로 유혹하더라도 거기에 동의하거나 행동을 같이 하지 말라고 훈계합니다. 11절에서 자신의 몸을 숨기고 잠복해있다가 12절에서 무덤으로 내려 가는자, 즉 죽이고 13절에서 온갖 보화를 빼앗자, 그 탈취물로 우리 집에 채우자, 14절에서 함께 제비를 뽑고 전대 하나만 두자 다시 말하면
제비뽑고는 공평하게 분배하고 전대 즉 남은 것은 공동의 재산으로 하자, 다시 말해서 공동 운명체가 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달콤한 말로 유혹하고 꾀이는 말을 분별해서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랬다면 아담과 하와가 결코 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고 낙원에서 쫓겨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사단은 다윗을 격동시켜 인구조사라는 교만에 빠지게 하고 그일로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알수 있는 것은 하늘의 지혜로 악한 유혹을 분별하고 끊어 버렸다면 처참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터 오는 분별의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일이 있기 전에 먼저 깨닫고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알아야 하는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 하시기를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하셨습니다.
악인들과 함께 불의한 이를 나누는 자는 그들과 함께 파멸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13,14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악한 자들이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수단이 보화입니다. 11,12절에서 제안하는 일은 악한 일임에 틀림없는데도 거기에 유혹당하여 죄를 짓게 되는 이유가 보화입니다. 악한 죄임에도 거절못하고 끌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13,14절 에는 '우리' 라는 4번이나 반복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뭘 말하고 있을까요? 같은 운명체라는 것입니다. 가는 길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발람 사건입니다. 발락이 제시하는 유혹에 넘어가서 잘못된 길을 선택하고 그의 입은 하나님이 막으셔서 저주는 못했지만 악한 궤계를 쓰도록 알려주고 결국은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민31:16, 계2:14)오늘에도 불의와 결탁하여 악을 자행하고 불의한 이를 나누는 것은 스스로 악인의 심판의 자리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물질을 외면하고 살수는 없지만 그 물질이 어떻게 얻고 어떻게 쓰느냐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물질에 깨끗지 못한 자가 하나님앞과 이웃 앞에서 깨끗할 수 있을까요?벧후2:4절에서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
인간의 본능은 절제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15절에서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이중적으로 금하고 있는데 첫째는 그 길에 다니지 말라, 이 말은 기본적으로 걷다라는 말이지만 '행동하다, 따르다, 계속하다'라는 의미로서 삶속에서 행동의 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악한자들과 삶을 같이 하거나 악한자들과 일을 도모해서는 안된다는 권면입니다. 두번째로 금하고 있는 말씀이 '발을 금하여 밟지 말라'하라고 했습니다. 원문 '메나으'의 기본형 '마나으'는 '발을 묶어두다, 억제하다'의미입니다. 본절에는 명령형 동사로 강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이 죄를 지향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원어 직역성경을 보면 '네발이 그들의 통로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라'라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함을 말씀합니다. 갑자기 할수는 없습니다. 날마다 절제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많이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을 먹음으로 영이 자라야 합니다. 베드로사도는 우리에게 권하기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벧후1:5,6)더하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119:101절에는"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또한 바울은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 이 두 말씀이 주시는 메시지는 의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죄의 본성을 억제하고 제어하는 자신의 노력이 필요함을 말씀합니다. 내 혼자의 힘으로 안될 때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신앙의 동역자들의 도움을 구하는 것도 지혜일 것입니다.
이일이 훈련이 되지 않으면 16절에서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악을 행하는데 적극적으로 빠르다라는 것은 죄를 향해 달려간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본절에서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인내의 훈련을 삶속에서 해야 합니다. 늘 의식 속에서 예수님을 부르고 바라보는 훈련도 겸하면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도와 주실 것입니다. 이 훈련이 쌓이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됩니다. 그러면 바울처럼 고백할수 있습니다."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악을 계획하고 불법을 행하는 자는 스스로 멸망의 구덩이로 들어가는 자입니다.
17,18절에 "새가 보는 데서 그물을 치면 헛일이겠거늘 그들이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하고 의인을 치려고 함정을 파도 하나님께서 아시니 그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고한 자의 피를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고 그의 상응하는 댓가를 악인들에게 치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이고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살펴보면 에스더에 나오는 모르드개입니다. 하만이 자기에게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때문에 그와 함께 유다인도 함께 제거하려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으나 하만의 계획과 반대로 모르드개를 달려고 세워 놓은 장대에는 자신의 목이 달리는 결과를 성서 에스더를 통해 알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인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에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하십니다. 탐하다는 말은 남의 것을 약탈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남의 재산을 아무런 수고하지 않고 약탈할 때 자신의 생명이 약탈당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9절에 '무릇''콜'은 누구나 예외없이 모두 다 이와 같은 비참한 운명에 빠지는 즉 자살같은 행위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때로 악이 승하고 하나님이 안계신것처럼 느껴질때도 있지만 그러나 종국에는 악과 불법의 희생양으로 버려 두시지 않고 심판 하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힘쓰고 또한 말씀으로 훈련하여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말4:1)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3:19)
내 아들아 들으라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우리는 이 귀한 말씀을 잊지 말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같은 부모가 되어 자녀들로 하여금 또한 자신도 하나님을 만나시는 은총이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의정부 등대지기 하늘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