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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향토사란 우리나라 역사학에서는 뒤늦게 분화된 학문으로 서울이 아닌 지방중심의 역사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국사의 한 자료로서 향토지(鄕土誌)는 있어도 역사학으로서의 향토사(鄕土史)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지방문화는 하층문화로 외화성보다 전통성이 강해 어는 민족이나 국가문화의 정통성을 규명하기 위해 중하게 쓰이며, 그렇기 때문에 향토사는 방치되어서는 안 되며, 향토사의 중요성과 의의를 확인하고, 더욱더 ‘향토사를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하는 데 더욱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2. 향토사의 일반개념
1) 향토사의 정의
향토사 또는 지방사(地方史)란 용어는 어떤 합의에 의하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편의에 따라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유럽, 일본 등은 지방분권적인 봉건제의 발달로 지방자치제도가 일찍 형성되고 자연적 조건, 역사적 조건에 있어서 지방적 다양성이 매우 풍부하여 개성적인 지방공동체가 발달되어 왔고, 거기에 상응하는 향토사 지방사 서술도 일찍부터 시작되어 향토사에 대한 연구도 독립학문으로 전문가에 의해 조사⋅연구되고 있다. 현대사학의 흐름은 세계사나 국사연구가 궁극적으로 인간연구라는 점에 비중을 두고 향토사를 중시하는 경향이 일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중앙집권의 성격이 강하여 향토사와 지방사의 개념이 분화,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향토사 또는 지방사는 역사파악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학술단위이다. 그러나 이 역사학은 가장 쉽고도 어렵다. 지역의 소단위란 국지성에서는 가장 쉬운 것 같지만 사실은 역사파악의 기본이 되는 문헌자료가 부족하고 관련되는 학문분야가 너무 많아서 세계사나 국사 등 외적요인에 대한 지식과 종합관찰 능력이 크게 필요하다.
향토사와 지방사의 개념과 비교하면, 향토사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내 고장의 역사에 대한 애향심의 입장, 그리고 자기 고장에서 태어난 사람에 의해 연구된다. 지방사는 자기 고향이건 아니건 일정한 지역의 자료를 조사한다는 제3자적 입장이 강조, 타고장에서 이주해온 사람에 의해 연구되는 것을 말한다. 아무래도 그 고장에서 태어난 사람은 타 지역에서 이주해온 사람보다 애향심이 앞서게 되므로 연구자가 누구냐에 따라 연구하는 내용 및 자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즉 지명유래, 전설 등은 그 고장에 오래 살아온 사람이 더 잘 알 수 있다. 타 지역에 이주해온 연구자가 그 고장의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을 깨닫지 못할 때, 그 고장출신의 향토사가 인식시킬 때, 그 내용과 연구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질 수 있다.
‘향토’의 지역적 범위는, 유럽의 경우 Goubert에 의하면 지방사의 지리적 범위는 한 촌락 혹은 수 개의 촌락, 중소도읍, 영국의 County, 이탈리아의 Contado, 독일의 Land, 프랑스의 baillicage나 Pays와 같은 공동체들보다 더 크지 않은 범위라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영국의 경우 1831년의 국세조사에 따르면 40개의 주(County), 약 700여 개의 도시(town and city), 약 10,000여 개의 교구(교구: parish)와 최말단 행정구역인 교구(교구) 밑에는 촌락(villiare)이 있다. 여기서의 주(county)는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도시의 규모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우리나라 촌락의 변천
조선 전기- 현(縣) 이상이 540여 개(동국여지승람에 의거) 중 지방관이 파견된 곳은 330여 개였으며 그 나머지는 면으로 개편되고, 이와 아울러 특수행정구역인 향(鄕), 소(所), 부곡(部曲)도 함께 존재하였다.
조선 후기- 면리제(面里制)의 확립으로 이들은 다시 500여 개의 면리로 개편. 이와 같이 군현제도(郡縣制度)의 정비 및 행정구역의 개편이 있었으나 비교적 구역 자체의 분해는 상당히 적어서 면, 동, 리의 명칭이 그대로 내려왔다. 향촌사회 내에서의 자치규약을 현 이상에서는 향규(鄕規)⋅향약(鄕約)이라 하였고, 동 단위에서는 동계(洞契)⋅동규(洞規)⋅동약(洞約)이라 하였다. 특히 동계의 경우는 이들 지역 독자의 특성이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향토의 한 지역공동체는 그 지역의 언어, 관습, 풍토 등의 동질성의 여부 등 다양한 기준에 의해 구분할 수 있다. 그러므로 향토라 할 때 동질의 지역적 공동체의 지역 범위를 군, 면, 동 등 어느 지역까지로 정할 수 있는지는 오늘의 행정구역의 변천과 아울러 전통시대에 있어서 주, 부, 군, 현, 면, 동, 리 등이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가의 전반적인 고찰을 요한다. 이상과 같은 기준으로 보면 향토사는 ‘향토사란 자기 고장 사람이 애향심을 바탕으로 서술한 자기 향토의 역사’라 정의할 수 있다.
2) 향토사의 의미
단순히 향토 내에서 과거에 일어난 사건 및 현상을 말해 주는 ‘향토사(鄕土事)’가 아니라 ‘향토사(鄕土史)’라 할 때 그 의미는 달라진다. 동서고금의 어떤 역사가도 역사가 과거사실의 기록임을 부인할 수 없다.
과거에 발생한 사건의 자취가 남게 되는 사정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당사자가 직접 쓴 기록물인 자서전, 비망록, 일기 등
※ 당시의 사람이 구전 또는 기술하는 경우
※ 관련 문헌과 실물이 남겨진 경우
그런데 문헌과 실물이 곧바로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 당사자가 직접 기록한 것과 목격한 것도 있으며 들은 것도 있을 것이고, 또한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것도 있을 것인데, 이것들 모두 넓은 의미로는 역사라고 할 수는 있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그것들 중의 대부분은 과거의 사료일 뿐이다.
과거의 사건에 대한 당사자와 동시대인의 기록이 진실과 의미를 갖고 있는가는 보증하기는 매우 어렵다. 어떤 사람이 몸소 어떤 사건에 참여했거나 직접 보았다 하여 그 사건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중에는 고의적인 왜곡과 편견이 있으면 진실은 감추어져 버린다. 즉 기록으로 남아 있다고 해서 꼭 그와 같은 사실이 있었다고는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과거의 기록에 그치는 역사는 쓸모없는 문서더미 또는 잡동사니에 불과하다.
과거의 사건은 이미 사라졌지만 남겨진 사실은 많아서 사가(史家)는 다 정리할 수도 없고, 또 그것들이 모두 역사적 가치가 있을 수도 없다. 그러면 어떤 사실이 역사적 가치가 있는 역사사실일까? 하는 문제에 봉착된다. 사가는 의미 있는 사실을 선택하여 역사를 서술하고 의미 없는 것은 버리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역사의식, 역사가의 관찰력은 곧 사실을 선택하는 능력을 말한다. 선택한다는 것은 현재와 관계있는 사실, 그리고 현대인이 흥미를 갖는 사실 및 현재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사실의 선택이며 이는 역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향토사의 주인공은 결국 자기 향토사람일 것이다. 즉 자기 고장의 고유한 것을 인식하는 것이 곧 향토사의 이해라 할 수 있다. 향토라는 특정한 공간 내에서 향토사가가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의미 있는 자료를 선택하여 시대적으로 종적으로 연결하고, 사회적으로 횡적 연결관계를 맺어줄 때 오늘날 우리들과 함께 공감하며 생생히 살아 숨 쉬는 향토사가 될 것이다.
현재 우리의 향토사는 좀 더 자기 향토의 자랑거리를 찾아내어야 하지만, 지나치게 자기 고장의 특성만을 내세워 다른 고장과 내용상의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된다. 자기 향토의 특성과 아울러 타고장과의 특성을 비교하여 객관적인 성격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지방적 특색과 더불어 한국사 전체의 흐름 속에서 향토사의 위치를 찾아야 한다.
이와 같이 향토사가가 향토 내에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를 가질 때, ‘향토사(鄕土事)’가 아니라 ‘향토사(鄕土史)’로서의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 향토사의 연구대상과 방법 및 문제점
1) 향토사의 연구대상
향토란 말은 지방을 뜻하며 중앙과는 대칭되는 말이다. 결국 향토사는 중앙 중심이 아닌 지방 중심의 역사이다.
대다수의 역사기록은 중앙을 중심으로, 즉 지배층을 위주로 연구⋅기록되어 왔다. 이는 인구의 대대수를 차지한 서민에 관한 기록이나 문헌이 없는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오늘날 향토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태도는 중앙 중심에서 지방 중심으로, 지배층 중심에서 서민 중심으로, 정치 중심에서 생활 중심으로 그 대상을 옮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까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서민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미진하였기 때문이지, 엄밀하게 지배층의 역사와 서민의 역사로 양분하여 별개의 것으로 구분할 수는 없으며, 이 양자를 보다 상호 보완적으로 파악하여 자기 고장 역사로서 수용하여야 할 것이다. 즉 지배층과 서민층과의 관계를 어떻게 연결시키는가 하는 것이 역사학의 궁극의 목적인 것이다.
현 단계에서 연구하여야 할 대상들을 검토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땅이름(지명)
땅이름은 사람들이 생활해 가는데 편리하도록 특정한 장소에 붙인 이름이다. 그래서 땅이름은 구비전설(口碑傳說)⋅민담(民譚)⋅역사적인 사건 등 많은 사실들을 함축하고 있어 역사연구에 많은 도움을 가져다준다.
※ 1979년 예성동호회에서 발견한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도 입석(立石)마을이라는 그 지명이 실마리가 되어 발견. 이것은 495년 고구려의 남진을 실증하여 주는 유일한 고구려비임이 확인되었다. (한국교원대학 정영모 교수)
※ 1970년 12월 25일 원효가 세운 ‘반고사’를 찾던 중 천전리 바위그림, 반구대 바위그림 발견(동국대 문명대 교수)
※ 다산문화시리즈 01『남양주땅이름』(경인문화사, 2006)
※ 양정역↔평구역
※ 고산대로↔정수장로
※ 미사대교↔덕소대교, 남양주대교
(2) 향촌 자치규약(自治規約)
향촌의 자치규약은 시행주체⋅규모⋅지역 등에 따라 향규(鄕規)⋅동약(洞約)⋅동규(洞規)⋅동계(洞契)⋅일향약속(一鄕約束)⋅향립약조(鄕立約條)⋅향헌(鄕憲)⋅면약(面約)⋅촌약(村約)⋅촌계(村契)⋅이약(里約)⋅이사계(里社契) 등 많은 명칭으로 불린다.
시행시기와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내용을 하며 기본적으로 유교적인 예속(禮俗)을 보급하고, 농민들을 향촌사회에 긴박시켜 토지로부터의 이탈을 막고 공동체적으로 결속시킴으로써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목적에서 실시되었으나, 동리(洞里)의 자치규약인 동규⋅동약은 당시 사회의 풍습⋅관행⋅인보관계 등을 잘 보여 주며 더 나아가 그것을 오늘날에도 끌어다 쓸 점이 있다.
(3) 선사유적과 유물
주거지, 패총, 지석묘(고인돌), 석관묘, 토기⋅석기⋅청동기
※ 가운동 고인돌(문화재자료 80호)
※ 도농동에 있는 선돌
※ 삼패동 고인돌(삼패동 186)
※ 금남리 고인돌
※ 지금동 고인돌
(4) 고분유적과 출토품
토광묘, 적석묘, 석실분, 옹관묘, 철기류⋅금속류 반출유물
※ 고려장터 - 조안 진중
(5) 불교미술사적
사지, 탑, 부도, 불상, 불화, 석등, 범종, 당간지주, 와전, 사적비, 사찰지(誌)
※ 와부읍 : 묘적사/8각7층석탑
※ 화도읍 : 보광사
※ 진접읍 : 봉선사/봉선사대종(보물 397호)/봉선사 소종/봉영사
※ 진건읍 : 견성암/봉인사/봉인사 사리탑
※ 별내면 : 내원암/흥국사/불암사
※ 조안면 : 수종사/수종사 부도/구절터(진중리)
(6) 성지 및 관방유적 : 읍성지, 산성, 봉수, 역원, 영진(營鎭)
성곽은 관방(關防)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고대에는 짐승이나 적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생활주거지로서의 읍성이 많았다. 삼한시대부터 고려 중기까지 주민의 대부분은 성내에서 살았고 경지(耕地)는 있었다. 따라서 한 개의 군에 수십 개의 성이 있었고, 이외에도 작은 성이 있었는데, 대개 1㎞ 내외의 토성⋅석성이 많았다.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는 남한 내의 성곽을 직접 답사하여 20만 분의 1 지도에 일일이 성곽의 위치를 표시하고, 아울러 이에 대한 문헌들을 참고하여 『조선성곽일람(朝鮮城郭一覽)』을 만들었다. 일본의 경우 아마추어 성곽연구자만도 수천 명에 이르고 있으며, 왜병들이 임진왜란 당시 부산 등지에 쌓은 왜성(倭城)을 연구하기 위하여 현지답사를 오기도 한다. 향토사가 혼자의 힘으로 하루가 다르게 훼손되어 가는 성곽들을 복원⋅수리할 수 없으나, 향토지역 내의 성들을 필히 현장답사를 통하여 확인하고 자료를 남길 필요가 있다.
봉수대는 유사이래 19세기 말엽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통신수단이었다. 문헌에 의하면 남한에만 성곽이 1,246개소, 봉수대 623개소가 있다.
※ 성 : 수석리 토성-해발 82.3m 경기도 기념물 94호 / 광전리 산성-해발 381.8m 을지문덕 장군이 쌓았다는 전설.
※ 봉수 : 대이산 봉수(진접 장현)/포천 잉읍점 봉수/대이산 봉수/아차산 봉수
※ 원 : 원지(원터)-화도읍 묵현리
※ 역 : 평구역
(7) 유교문화유적
향교, 서원, 사우, 누정(樓亭), 동각(洞閣), 정려(旌閭), 금석문
※ 서원
석실서원지(터) - 1656년 세움, 김상용⋅김상헌⋅김수항⋅민정중⋅이단상 배향.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림.
※ 사우
와부읍 : 대산재-청백리 이맹현의 재각, 세덕사⋅도산재-중종반정 1등 공신 박원종의 사당
화도읍 : 기계유씨 사당-유강을 비롯한 기계유씨 조상 사당
진건읍 : 모송재-고려 말 충신 최청 사당, 해평사-해주정씨 정미수⋅정효준 사당, 효간사-정인지 후손 정세호 사당, 충목사-사육신 유응부 사당
호평동 : 의안대군 이화 사당
수석동 : 영모재-조말생을 비롯한 선조들의 조씨 문중의 재각
※ 누정
와부읍 : 도산정사지-김상헌, 박원종 정자지
진접읍 : 태극정- 이단상의 정자
화도읍 : 백월정지(터)-최명길의 정자(화도 금남)
오남읍 : 망세정지(터)-심선 정자, 단종이 찬탈당하자 이곳에 은거 / 발현재-조선 초 문신 하자종 사당으로 근래에 조성
별내면 : 덕흥사-덕흥대원군, 창빈 안씨, 하원군 사당
조안면 : 관가정지(터)
대아당지(터)-이덕형의 별서(이노정, 읍수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음)
수석동 : 윤선도 별서지-독포정지, 명월정지, 혜민료지가 있었음.(미음나루) / 삼주삼산각-농암 김창협의 별서(수석동)
※ 정려
향토에서 이름을 드러냈거나 선행을 한 인물들의 향현사(鄕賢祠), 충신(忠臣)⋅효자(孝子)⋅열녀비(烈女碑)⋅선정비(善政碑) 등
와부읍 : 김상용 충효정문, 이인교 효자정문, 고 배순동 충혼비-한국전쟁
화도읍 : 구현문 충신정문-병자호란 당시 김화전투에서 순절, 윤급 효자정문지, 기계유씨 효녀정문-박효현의 부인 기계유씨 부인
진건읍 : 연안이씨 팔홍문-충신 이돈오, 열녀 광주 김씨, 효자 이기직⋅이기설⋅이지남, 정부 동래 정씨, 광릉 안씨, 효자처자 연안 이씨의 8정문, 현재 김포로 옮겨짐 / 충목사-사육신 유응부의 사당(진건읍 진관리)
오남읍 : 남양 홍씨 4효정문-홍서구⋅홍주구⋅홍우구⋅홍응구 4형제
별내면 : 열녀 박씨 정문지-남홍복의 처 의령박씨
일패동 : 이선영 효자정문
이패동 : 삼정각-박영신의 충효정문, 부인 광주이씨 정문, 아들 박지병의 효자정문
도농동 : 홍문- 풍천 임시의 정문
※ 신도비
와부읍 : 김극효, 김상용, 김광찬, 이맹현, 박원종, 박중선, 이세백, 김상준, 홍재룡(洪在龍), 이계남(李季南), 김원효(金元孝)
진접읍 : 인빈김씨, 의창군, 이단상, 이후(李珝)
화도읍 : 이춘원, 능원대군, 유강, 유성증, 유황, 유철, 유수, 이순지, 흥선대원군(이재면/이준용/이우/영선군 이준
진건읍 : 최청, 조상우, 정미수, 정효준, 조맹, 이극균(李克均)
오남읍 : 심빈(沈濱), 심광언(沈光彦), 신전(愼詮), 이엄(李儼)
별내면 : 남선, 남병철, 남효의, 남용익, 이홍술, 보성군 이용, 덕흥대원군 이초, 하원군 이정, 남재, 윤천뢰, 한효원(韓效元), 견성군 이돈(李惇), 김효원(金孝元), 이영부(李英符), 권두기(權斗紀)
수동면 : 송회영(宋會英)
조안면 : 유량, 한확, 변협(邊協)
평내동 : 목첨, 목장흠, 신용개(申用漑)
호평동 : 최상익(崔商翼)
금곡동 : 구사맹, 구굉, 구인기
양정동 : 민제인, 민광훈, 김식, 김육, 김좌명, 김성응, 김권, 김시묵, 김덕무(金德懋), 전성군 이변(李忭)
수석동 : 조태동
(8) 두레
두레는 전통사회에서 농민들이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하여 조직한 부락이나 마을 단위로 만든 조직으로 한국민족 고유의 공동노동 작업공동체이다. 두레는 조선후기 이앙법이 전개되면서 답작지대(畓作地帶)의 농촌사회에서는 보편적인 농민생활풍습으로 정착되었으며 농민문화의 풍물을 발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많이 변질되고 소멸되었지만 중부 이남의 농촌사회에서는 해방직전까지 널리 볼 수 있는 노동조직이었고, 해방 후에도 지방에 따라서는 그 잔영을 찾아볼 수 있는 민속이었다. 두레는 마을의 모든 성인남자들이 공동노동을 수행하면서 ‘상부상조’ 하에 마을 성원들의 공동체적 연대를 형성⋅발전시켰던 조직이었다. 두레는 이 과정에서 ‘농악’ 을 발생시켜 ‘노동’ 과 ‘농악’ 을 융합시킴으로써 독특한 ‘농민문화’ 를 창조하였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두레’ 로 노동을 하면 개별적으로 노동을 하는 것보다 노동능률이 훨씬 더 높았을 뿐 아니라, 고통스러운 노동이 ‘즐거운 노동’ 으로 바뀌는 놀라운 효과가 있었다. 두레는 이 점만으로도 한국민족과 한국농민이 역사적으로 창조해낸 슬기로운 제도와 문화였다고 말할 수 있다. 두레는 지방에 따라서 공굴⋅궁굴이⋅제리⋅자리⋅조리⋅돌게⋅돌개김⋅동네논매기⋅향두품어리 등의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모심기 할 때 먹는 밥을 ‘두레밥’ 이라 한다던가, 공동우물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두레박’ 이라 하는 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두레 공동작업의 옛날 풍속이다.
(9) 기우제(祈雨祭)⋅기자신앙(祈子信仰)
고대인에게 있어 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한발홍수(早魃洪水)였다. 기우제는 한발이 있을 때이거나 계절로 보아서 하절인 4, 5, 6월로 되어 있다. 늦가을에서 겨울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도 큰 지장이 없지만, 여름에는 곡식을 파종하고 그 성장을 기대할 때이므로 이 계절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작물이 자라지 않아서 흉년이 들고, 그렇게 되면 생존의 위협을 받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 절대자인 하늘에 호소해서 강우를 기대한 것이다.
기우제에 관한 기록은 문헌에 수없이 많다. 무당과 박수들이 참여하고 크게는 국왕이 직접 거행했고, 작게는 동리에서 집단으로 기우제를 지내왔다. 도읍에는 몇 군데씩 기우제단(祈雨祭壇)이 있고, 지역마다 대개 독자적인 기우제의 의식과 전설이 있으니, 읍지와 대조하여 현지를 확인하고 거기 얽힌 민담을 수집할 필요가 있다.
이와 더불어 아들을 얻기 위한 기자신앙도 전국 도처에 산재해 있으니 이에 대해서도 조사를 병행해야 한다.
※ 기우제
고려시대 : 종묘⋅사직⋅구월산(九月山)⋅신사(神祠)⋅북교(北郊)⋅남교(南郊)⋅임해원(臨海院:典德) 등에서 기우제를 올렸는데 대개는 무당이 의식을 거행. 가뭄이 심할 때는 왕이 직접 백관을 거느리고 남교에 나와 기우제를 올렸고, 일반에서는 시장을 옮기고, 부채질을 하거나 양산을 받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양반도 관을 쓰지 않았다.
조선시대 : 종묘⋅사직과 흥인(興仁)⋅돈의(敦義)⋅숭례(崇禮)⋅숙정(肅靖)의 4대문, 동⋅서⋅남⋅북의 4교와 중앙인 종각 앞, 또는 모화관⋅경회루⋅춘당대(春塘臺)⋅선농단(先農壇)⋅한강변 등에서 지냈으며, 심할 때는 나라에서 12차까지 3품 이상의 관원을 파견하여 기우제를 올렸다.
※ 기자신앙
아들바위, 남근석, 선바위 등으로 부르는 기자석은 서울 인왕산의 선바위, 서울 자하문 밖의 기자암, 전라도 지리산의 선바위, 북제주 용담냇가의 석불 등
(10) 세시풍속
세시풍속은 세시(歲時)⋅세사(歲事)⋅월령(月令)⋅시령(時令) 등으로도 불리고, 연중행사라고도 한다.
한국의 세시풍속은 상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삼국지』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 등이 그것이다. 『삼국사기』의 추석⋅수리(단오)⋅유두,『삼국유사』의 대보름 기록 등은 삼국시대에 세시풍속의 원형들이 존재했음을 잘 보여주며, 고려의 연등회와 팔관회와 같은 전국적인 세시행사가 시행되었다.
우리의 생활에 매년 주기적으로 일정시기마다 반복되는 전승적 생활행위로 사회성원의 철저한 협동이 바탕이 되고 있으나, 역으로 세시행사가 협동의 동기가 되기도 하며 생업의 형태, 자연환경, 생활집단의 성격과도 관련되어 있다. 이 세시행사들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들도 많으나 대개의 풍속들은 이미 사라졌거나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시대변화에 따라 세시의 변화도 필연적이므로 오늘날 현대생활에 알맞게 축소⋅변형된 것이다.
각 달마다 행하는 세시풍속과 24절기는 다음과 같다.
정월 : 대보름
2월:2월 1일 머슴날(奴婢日), 영등신(靈登神)맞이
3월:3월 3일 (삼짇날), 한식날
4월:4월 8일 초파일
5월:5월 5일 단오절
6월:6월 6일 유두(맑은 개울물을 찾아가서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으며 하루를 즐긴다.)
7월
7월 7일 칠석(七夕)-견우성과 직녀성이 1년에 한번 만난 다고 하는 전설에 따라 별을 제사지내는 행사.
15일 백중(百中)-남녀가 모여 온갖 음식을 갖추어 놓고 노래하고 춤추며 즐겁게 놀았다. 지방에 따라서는 씨름대회⋅장치기[手傳] 등의 놀이로 내기도 한다. 승려들은 이날 각 사찰에서 재(齋)를 올린다.
8월:8월 15일 추석
9월:9월 9일 중양(重陽)-신라 시대부터 이날 안압지의 임해전(臨海殿)이나 월상루(月上樓)에서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시가를 즐긴 듯하며, 고려 시대에는 이러한 향연이 정례화 되어 내외 신하들과 송나라⋅탐라⋅흑수(黑水) 등의 타 지역 손님들까지 축하연에 참석하였다고 함. 조선 시대에는 중구를 명절로 지정하여 성종 때에는 추석에 지내던 기로연을 지냈다.
10월:상달에는 상달고사
11월:동지
12월:납일(臘日)-민간이나 조정에서 조상이나 종묘 또는 사직에 제사 지내던 날
※ 24절기
입춘(立春) / 우수(雨水) / 경칩(驚蟄) / 춘분(春分) /청명(淸明) /곡우(穀雨) / 입하(立夏) / 소만(小滿) / 망종(芒種) / 하지(夏至) / 소서(小暑) / 대서(大暑) / 입추(立秋) / 처서(處暑) / 백로(白露) / 추분(秋分) / 한로(寒露) / 상강(霜降) / 입동(立冬) / 소설(小雪) / 대설(大雪) / 동지(冬至) / 소한(小寒) / 대한(大寒)
(11) 유물⋅유적의 보호
일반인 및 학생들에게 유물⋅유적의 가치를 인식시켜 유물의 훼손⋅유실⋅도굴을 방지하는 작업도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기능 못지않게 중요하다.
(12) 전통생활용품의 보존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급속히 사라져 가는 장시 등 생활문화와 농경기구⋅신앙기구 등의 생활용품을 보존하여야 한다.
※ 시장
마석장, 덕소우시장, 장현장, 광릉내 우시장
이 외에도 향토사에서 다루어야 할 대상이 많이 있으나 현대사회에서 사라져 가는 과거의 모습들을 우선적으로 찾아서 수집⋅보존하는 일이 필요하다.
2) 연구방법 및 문제점
(1) 역사민속학의 활용
향토사연구는 서민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서민들은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서민들이 사는 마을의 자치규약은 관습법⋅불문율로 내려와 기록으로 남겨진 경우가 드물다. 이런 경우 문헌이 없다고 사실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니 세시풍속이라든가 두레 등 민속을 통하여 그 당시의 사회상에 접근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행위전승의 조사에 유효한 민속학과 문헌을 통하여 그 역사적 의미를 추출해 내는 역사학이 융합된 역사민속학 속에서 서민의 역사를 새로 구성해야 한다.
(2) 문자를 가지지 못한 지역 조사
농어민은 생활을 기록할 문자를 갖지 못하였거나 문자가 있어도 기록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므로 문자를 가지지 못한 지역 역사를 연구할 경우, 고노(古老)들의 구술을 통하여 접근하되, 구술의 객관성, 엄밀한 검증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3) 폭넓은 자료 수집
자기 고장에서 구할 수 있는 사료만을 가지고는 향토역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선입견을 갖게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정사(正史)⋅고문서⋅문집⋅읍지 등의 필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풍부한 자료 수집을 하여야 한다.
※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실시하는 지역사료조사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남양주시 16개 읍면동을 2007년, 2010년도에 걸쳐 지역 조사.
(4) 향토지 간행
향토지 간행은 철저하고 정확하고 폭넓게 자료를 해석하는 기본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보고서를 작성하는 기술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하고, 내용을 잘못 파악하여 다른 연구자가 또다시 조사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너무나 성급하게 업적을 내는 데에 급급하여 졸속주의에 빠져 무미건조한 내용, 재미없는 서술, 자료의 나열에 그치면 안 된다.
※ 다산문화시리즈 01 『남양주 문화재』(2006)
※ 다산문화시리즈 02 『남양주 땅이름』(2006)
※ 다산문화시리즈 03 『남양주 독립운동가』(2007)
※ 다산문화시리즈 04 『남양주 불화』(2007)
※ 다산문화시리즈 05 『운악산 봉선사』(2008)
※ 다산문화시리즈 06 『남양주역사기행』(2008)
※ 다산문화시리즈 07 『열수와 마현』(2009)
※ 다산문화시리즈 08 『남양주 서화가』(2009)
(5) 전문학자와의 교류
향토사가는 연구방법⋅기술의 교육기회가 없다는 사실과 함께, 전문 학자와의 교류 폭이 너무 미흡한 실정이다. 대다수의 전문 학자들은 향토사연구에는 적극적이지 않고 그 임무를 향토사가를 비롯한 일반연구자에게 돌리고 있는 현실이다.
향토사가들의 연구방향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문헌자료의 수집
금석문의 탁본, 고문서 수집 정리, 한적(漢籍)의 번역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자료에 대해 아마추어 향토사가 대다수는 고문서에 나오는 초서(草書)나 이두(吏讀) 등의 해독을 할 수 없어, 중요한 자료는 빠뜨리고 별 의미 없는 자료들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이러한 예로 중원고구려비를 발견한 분들은 충주 예성동호회 소속 향토사학자들이었으나 이를 판독한 이는 한국교원대학교의 정영호 교수이다.
향토사자료의 발굴과 수집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리고 여러 형태와 채널로 시도되어야 하며, 자료의 대상도 고고⋅미술사자료, 문헌에만 집착하지 말고 그 폭과 범위를 확대하여야 한다. 예컨대 민중생활사자료⋅근현대사자료⋅구전자료⋅자연사자료⋅지명이나 지리에 관한 자료 등이다.
② 현장답사
수많은 단체가 사적, 사찰 등을 답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보고되고 있으나 그 기술 방법이나 내용의 수준이 많은 차이가 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향토사단체가 독자적으로 발굴을 해서는 안 되며, 전문학자와의 교류가 필수적이다. 향토사가가 자신이 발굴한 자료들을 적절히 정리⋅분석하여 발표할 수 있는 능력의 부족으로 애써 발굴한 자료, 즉 자신이 많은 시간, 비용, 노력을 들인 것을 인정받지도 못하고, 전문학자에게 빼앗기는 듯한 피해의식을 가짐으로써 위화감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향토사가는 자신의 연구 능력 향상을 위해 꾸준한 노력을 하여야 하며, 아울러 전문학자는 향토사가에 대한 예우를 하고 서로 보완적⋅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
(6) 전문인력의 양성
각 급 학교, 지역의 문화관련 단체들은 지역민들에게 향토사에 관심을 갖게 하고, 향토사연구에 필요한 전문 인력을 양성하여야 한다.
※ 현재 남양주 소재 다산문화연구소는 전임자 3명과 비전임 연구원 3명 정도를 확보하고 있음.
(7) 원활한 정보교환
타 지역의 향토사 연구단체와 향토사가와도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각자 발굴한 자료의 신속한 정보교환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타 지역과의 지역적 특성을 비교하여 봄으로써 내용상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인식할 때 자기 고장만의 특성을 강조하는 아집에서 탈피하여 향토사를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4. 향토사 교육의 실제 (남양주시 테마별 학습)
1) 이성계와 남양주
(1) 대궐 터와 함흥차사
태조 이성계가 두 번의 왕자의 난에 울분하여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함흥으로 가버린 뒤, 태종이 그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고자 함흥으로 여러 번 사신을 보냈으나 이성계는 그 사신들을 죽이거나 잡아 가두고 보내지 않았으므로, 한번 가면 깜깜무소식이라는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2) 동구릉
태조의 능인 건원릉(健元陵) / 5대 문종과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의 능인 현릉(顯陵) / 14대 선조와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의 능인 목릉(穆陵) / 18대 현종과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능인 숭릉(崇陵) /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趙氏)의 능인 휘릉(徽陵) /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沈氏)의 능인 혜릉(惠陵) /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의 능인 원릉(元陵) / 24대 헌종과 비 효현왕후(孝顯王后) 김씨,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 홍씨의 능인 경릉(景陵) / 그리고 순조의 세자 익종과 비 신정황후(神貞皇后) 조씨(趙氏)의 능으로 조성된 수릉.
(3) 기타
내촌면 말구리, 내촌면 여덟배미와 팔야리, 퇴계원, 조의.
2) 세조와 남양주
(1) 사릉
조선 제6대 왕 단종(端宗 1441~1457, 재위 1452∼1455)의 부인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의 무덤.
(2) 유응부
사육신, 단종 복위운동
(3) 수종사
1458년(세조 4) 세조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금강산에 다녀오다가, 양수리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어 깊은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난데없는 종소리가 들려 잠을 깬 왕이 부근을 조사하게 하자, 뜻밖에도 바위굴이 있고, 그 굴속에는 18나한이 있었는데, 굴속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울려나왔으므로, 이곳에 절을 짓고 수종사라고 하였다.
(4) 왕숙천
태조 이성계가 상왕(上王)으로 있을 때 팔야리(八夜里)에서 8일을 머물렀다고 해서 ‘왕숙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밖에 세조를 광릉에 안장한 후 “선왕이 길이 잠들다”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5) 한확
누이가 명나라 성조(成祖)의 여비(麗妃)가 되자 명나라에 가서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이라는 벼슬을 하사받았다.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 1등에 책록, 서성부원군에 봉해지고, 우의정에 올랐다.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양위(讓位)라고 설득시켰다.
(6) 권절
생육신
(7) 기타
광릉과 봉선사
3) 실학과 남양주
김육(金堉) 1580년(선조 13)~1658년(효종 9)
김좌명(金左明) 1616년(광해군 8)~1671년(현종 12)
홍만선(洪萬選) 1643년(인조 21)~1715년(숙종 41)
김윤겸(金允謙) 1711년(숙종 37)~1775년(영조 51)
정약전(丁若銓) 1758년(영조 34)~1816년(순조 16)
정약종(丁若鍾) 1760년(영조 36)~1801(순조 1)
신작(申綽) 1761년(영조 36)~1828(순조 28)
정약용(丁若鏞) 1762년(영조 38)~1836년(헌종 2)
서유구(徐有榘) 1764년(영조 40)~1845년(헌종 11) 조선후기 실학자로 농업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농업기술과 방법 등을 연구하여 농업 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를 저술.
김매순(金邁淳) 1776(영조 52)~1840(헌종 6)
남병철(南秉哲) 1817년(순조 17)~1863년(철종 14)
남병길(南秉吉) 1820년(순조 20)~1869(고종 6)
김윤식(金允植) 1835년(헌종 1)~1922
박영효(朴泳孝) 1861년(철종 12)~1939
4) 광해군과 남양주
광해군 묘
김권, 김상준, 김상용, 김상헌, 구굉, 구인기
5) 병자호란과 남양주
(1) 김상용 묘/신도비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족을 시종하고 강화로 피난하였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
(2) 김상헌 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척화를 주장하여 이듬해 강화가 이루어지자 파직되고, 1639년(인조 17) 명을 공격하기 위한 청의 출병 요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이듬해 청나라에 압송되었다가 6년 후에 귀국.
(3) 구굉 묘/신도비
이서, 이귀 등과 인조반정을 계획⋅참여하였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을 지켜 공을 세움.
6) 구국운동과 남양주
(1) 이재윤 묘
한말 의병장
(2) 하상태 묘
한말 의병장, 진건읍 팔현리 출생, 1907년 장단에서 의병을 일으킴. 연기우 의병장과 함께 고랑포, 동두천 등에서 3년간 의병 지휘. 1909년 4월 9일 장단군 분견소 습격을 받아 자결.
7) 흥선대원군과 남양주
(1) 흥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묘.
(2) 석실서원
서원철폐령
8) 제물포조약과 남양주
(1) 귤산 이유원
1882년 전권대신(全權大臣)으로 일본의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와 제물포조약에 조인. 백사 이항복의 후손/6형제
(2) 이재윤
1905년 일본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매국도배들을 처단할 것을 상소하였고, 다음해 의병 300여 명을 모집, 의병장이 되어 경기도 양주⋅광주(廣州)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 1907년 3월 항일구국운동을 목적으로 베이징[北京]을 방문,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 그 후 고종이 퇴위하자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관헌과 일본을 몰아낼 것을 협의하는 등 항일투쟁을 계속.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다음해 목을 매어 자결.
9) 을미사변과 남양주
홍릉(명성황후)
명성황후는 1895년(고종 32)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을미사변 당시 시해 당함.
10) 한글과 남양주
세조의 한글장려 : 간경도감 설치 불경 번역, 농서와 병서 등 한글로.
신숙주, 주시경, 이광수, 운허
봉선사의 역경사업
11) 국학연구와 남양주
(1) 주시경
개화기의 국어학자로, 우리말과 한글의 전문적 이론 연구와 후진 양성으로 한글의 대중화와 근대화에 개척자 역할
(2) 최현배
조선어학회 창립,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에 참여,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복역. 저서는 『우리말본』, 『한글갈』, 『글자의 혁명』등.
12) 과학기술과 남양주
(1) 이순지
혼천의, 해시계, 물시계, 칠정산의 주인공
(2) 김육
수차, 시헌력, 상평통보 주조와 유통, 서적의 간행, 종두법 소개
(3) 정약용
거중기(수원 화성), 한강에 주교 설치, 조선, 총포, 병차 연구
13) 세계문화유산 왕릉과 남양주
광릉(세조/정희왕후), 사릉(정순왕후), 홍릉(고종/명성황후), 유릉(순종/순명효황후/순정효황후)
14) 사대부의 발자취
평내동 궁집, 이순지 묘, 유량 묘, 수종사, 정약용 묘, 한확 신도비, 김상용 신도비, 김상헌 묘, 박원종 묘, 이맹현 묘, 석실서원터, 조말생 묘비, 삼주삼산각, 윤선도 별서지
15) 왕가의 발자취
흥원, 홍유릉, 영원, 덕혜옹주묘, 사릉, 광해군묘, 성묘, 임해군묘, 안빈묘, 광릉, 봉선사, 휘경원, 영빈묘, 순강원, 대궐터, 봉영사, 덕흥대원군 묘, 흥국사
16) 선사유적과 민속문화의 발자취
풍양고성, 내곡리 성지, 여경구 가옥, 양지리 향나무, 태조와 세조 관련 고사와 지명, 수석리토성, 가운동 고인돌, 도농동 선돌, 지금동 고인돌, 삼패동 고인돌, 궁집, 금남리 고인돌
5. 맺음말
우리의 문화수준은 향토사를 언급할 단계에 와있고, 교통과 통신의 눈부신 발전은 전국을 일일생활권으로 되어 각 지역이 지녔던 독자적인 모습은 대부분 사라지고, 어디를 가든 서울과 비슷한 획일화현상이 일어나고 있고, 한편으로는 각 지역의 전통과 개성을 존중 유지하자는 좋은 의미의 향토색(鄕土色)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민족적 생명력은 민족적 전통 속에 있듯이 오랜 생활의 역사의 결실인 전통은 애호되어야 할 것이며, 향토사에 대한 관심도 그러한 전통을 사랑하는 것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다음으로는 왜 향토문화가 아니고 향토사냐 하는 문제이다. 광의의 문화란 다양한 문화가 섞인 잡다한 현상을 망라한다. 역사란 역사와 동의이며, 역사란 ‘E.H.카아’가 말했듯이 역사가에 의하여 가치가 있다고 선택된 사실의 기술인만큼, 역사가가 사실을 보는 입장・선택기준・해석원리・가치관 이것들을 종합한 것이며, 어떤 사건, 어느 인물을 평가하는 경우 그것이 역사적 흐름 속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느냐를 판가름하는 척도인 것이다. 따라서 각자의 자로 잰 결론을 문제 삼기에 앞서, 먼저 그 척도자체의 타당성 여부가 문제되어야 하며 바로 그러기에 역사의식에 대한 부단한 도야가 필요한 것이다.
향토사가의 역사의식은 민주적 시민의식에 바탕을 둔 애향심과 내 고장 제일주의가 아닌 분별력 있는 애국심과 연계되는 것, 그러한 역사의식 위에서 선택된 사실의 체계적 서술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향토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하며 향토출신의 인물, 각 분야의 명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면 역사와 국민생활의 유대가 강화될 것이며, 생생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아는 교훈뿐 아니라 국민적 단합의 기반으로서의 지역주민의 진한 일체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옛것은 모두 청산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전통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마땅히 극복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것은 정당한 긍지와 지속적 발전을 위해 과거에 대한 현명한 성찰을 해야 한다. 향토사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성찰은 올바른 민족사의 내일과 연결되는 것이다.
변해가는 강산, 모든 것이 급속하게 변모해 가는 이 전자혁명시대에 있어서 사라져가는 옛 것을 재음미하여 좋은 것은 살리고, 전통 속에서 값있는 것을 찾아 서로 의지하며 지내던 인정과 의리를, 정감을 현대에 소생시키고, 뿌리를 찾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