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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분은 다른 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하시는 걸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특히 음악가들을 후원하는 일이 그러했습니다. 어딜 가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우리나라의 인물이 딱 둘인데 그 하나가 젊은 여성 골퍼이고, 또 다른 하나가 젊은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라며, 이제 이들을 길러 각각 미국인과 유대인을 이기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며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답니다. 그러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그 일을 조용히 실천하셨습니다. 수십억원대의 고악기를 직접 사서 아무 대가도 없이 재능 있는 음악도들에게 빌려주셨고, 세계적인 교향악단을 찾아가 직접 그들과의 협연 무대를 주선하셨고, 이들을 변변히 내세울 무대조차 없다는 안타까움을 토로하며 직접 ‘금호 영재 콘서트’라는 무대를 마련해 매주 음악회를 여셨습니다. 저 역시 이 무대에서 회장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가까이서 뵌 고 박성용 명예회장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퍼 주시고도 더 줄 게 없어 늘 애를 태우는 분이셨습니다. 2003년 세계적인 지휘자 로린 마젤이 공연차 내한했을 때는 저를 포함한 몇 명의 음악 영재들의 음악회를 만드시고 그 자리에 그를 초청하셨습니다. 후원자의 주선으로 세계적 거장과 유망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인 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보는 특별한 무대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세계적인 음악가를 만나자 어린아이처럼 주눅 들어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저를 보고 회장님은 끝내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위해 만든 자린데… 네가 더 즐겨야지….”
그토록 음악과 음악가에 대한 큰 사랑을 지닌 만큼 본의 아닌 상처도 많이 입으셨습니다. 직접 조직하고 열과 성을 다해 후원하던 현악 사중주단의 해체를 스스로 선언하셨을 때, 언론과 음악계는 ‘대기업 회장의 취미생활이 이렇게 끝을 맺는다’는 식으로 호도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우연히 회장님과 한 음악회에 같이 참석하게 된 저는 그분의 심경을 누구보다 잘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회장님, 사중주단이 이제 없어진다면서요?”라고 조심스레 질문하던 제게 회장님께서 조용히 답하셨습니다. “그래…이제 더는 못 할 것 같구나…” 그날 회장님의 얼굴은 제가 본 그분의 얼굴 중 가장 슬픈 얼굴이었습니다.
지금 현재 제가 독일에서 사용하고 있는 뵈젠도르퍼 피아노는 원래 ‘광화문 회장님’의 집무실에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 가치를 모르고 모 기업의 창고에 방치돼 있던 것을 손수 가져오셔서 20년 동안 자식처럼 기르신 악기였습니다. ‘회장님께서 유일하게 부하 직원에게 화를 내실 때가 이 악기 관리가 제대로 안 됐을 때’라는 소문이 그룹 전체에 파다했을 정도로 애지중지하셨답니다. 이 악기를 저에게 주시던 날 “새 거, 더 좋은 거 못 사 줘서 어쩌지…”하며 그것을 보내는 아쉬움보다 미안함을 더 참지 못하시곤 제가 마지막으로 연주해 드린 리스트의 ‘위안’ 제3번에 결국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회장님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제법 한참이 지난 얼마 전 수국을 보면서 저는 비로소 회장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많고 많은 아름다움이 있지만 사람을 울릴 수도 있는 아름다움은 많지 않다는 것. 그중 하나가 음악이라면 또 다른 하나는 자연이라는 것, 회장님께서는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혼자 알고 있는 것이 미안하고 서운해서 견딜 수 없어 하시던 분,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아름다움을 전해 주고 싶어하셨던 분, 사람들이 받아주든 말든 평생을 바쳐 그 아름다움을 사랑으로 전하신 분, 고 박성용 명예회장님이 매우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