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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얇다
수아는 또 갈증이 일었다. 슬그머니 가방 안으로 손을 들이밀어 생수병을 꺼냈다. 뚜껑을 비틀었을 때 마침 종이 울렸다. 강사가 나가고 학생들이 수런수런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줄기가 목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리자 온몸에 수분이 퍼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시원해. 물이 달고 맛있어.’
창가에 앉은 여학생이 블라인드 틈에 손가락을 질러 넣고 아래로 내렸다. 벌린 틈 사이로 옆 건물의 간판이 보였다. 커피 잔 모양과 그 옆에 영어로 쓰인 coffee. 수아는 ‘coffee’를 보면서 ‘따뜻한 커피가 좋아’라는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리구가 한 말이다.
이리구는 밤에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원 샷으로 마신다고 했다. 하루 다섯 시간의 금쪽같은 수면 시간을 지키기에 투 샷은 카페인 함량이 너무 많다고 했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지 않는 것도 카페인 함량의 미묘한 차이 때문이다. 아이스아메리카노는 보통 투 샷인데 카페인 때문에 원 샷으로 마시게 되면 얼음이 녹으면서 맹탕이 되어 커피 맛이 안 난다는 것이다.
마지막 타임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special – 10시 도착.
이리구의 문자였다. 거의 한 달 만에 온 이리구의 문자다. 여름방학 동안 한 번도 연락이 없어서 공부 때문에 바쁜가 보다 했다. 수능이 가까워지기도 하고, 곧 9월 모의평가도 있으니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았을 거다. 그래도 방학 중에 한번은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결국 방학 막바지에 왔다. 하여튼 오늘 온다니 잘 된 거다. 마침 이리구에게 꼭 할 말이 있었다. 수아는 남은 물을 마저 마시고, 책상 위에 있던 것들을 가방 속에 쓸어 넣었다.
“왜?”
진이가 네가 웬일이야,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집안일.”
떠오른 대로 뱉은 말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엄마 와서 좋겠다.”
진이가 부러운 듯 중얼거렸다.
기껏 뛰어나갔는데 승강기가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10층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려면 한참 기다려야 한다. 수아는 비상구 쪽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더운 공기가 훅 끼쳐 왔다. 이래서 계단은 이용하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었다.
‘이리구가 시간을 좀 넉넉히 두고 연락하면 계단을 뛰어 내려가지 않아도 될 텐데.’
수아는 1층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했다. 계산하기 전에 잠시 한 잔만 주문할까, 하고 갈등했다. 어차피 수아는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순전히 이리구가 혼자 마시는 걸 어색해 할까봐 마시는 시늉만 하는 거였다. 요즘은 커피 대신 물 마시는 게 더 좋았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캐리어에 담아 카페에서 나왔다. 카페에서 막 나왔을 때 스마트폰에 진동이 울렸다.
%%김진이 – 니네 집에서 일박 언제 시켜줄 거야? 울 엄마는 너라면 오케이.
%%김진이 – 벌써 다음 주에 개학인데... ㅠㅠ
혹시 이리구가 온다고 할지 몰라 진이랑 약속을 잡지 못했다. 수아는 진이에게 간단히 ‘나중에 봐서’라고 답문을 보내고 걸음을 재촉했다. 원룸까지 300미터쯤. 달린 덕에 5분쯤 절약했다. 원룸에 들이닥치는 대로 청소할 생각이었지만 딱히 손댈 것은 없었다. 침대 위 이불은 네 귀퉁이가 팽팽히 당겨진 채였고, 현관 왼쪽 자그마한 싱크대 위에는 컵 하나 나와 있지 않았다. 창문 아래 놓인 책상 위도 언제든지 책을 펼칠 수 있도록 깨끗해야 한다는 수아의 철칙이 잘 지켜지고 있었다. 책과 노트 따위를 꽂아두는 책꽂이도 질서정연해서 손 댈 구석이 없었다.
수아는 들고 있던 커피 캐리어를 싱크대 위에 놓았다.
%%special – 문 열어.
아직 교복도 갈아입지 못했는데. 수아는 자기 차림새가 한심해 한숨이 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현관문을 여니 역시나 교복 차림인 이리구가 서 있었다. 이리구는 뒤꿈치를 비비적거리며 운동화를 반쯤 벗은 채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수아는 이리구가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가방을 한갓지게 책상 옆에 세워 두었다.
“커피?”
이리구가 침대로 가 풀썩 걸터앉으며 물었다.
“방금 테이크아웃 해왔어요. 따뜻해요.”
이리구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더니 수아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잠깐만요.”
수아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한 병 꺼내 들고 책상 앞 의자를 빼 앉았다.
“설마 아직도 내가 어렵니?”
이리구가 귀엽다는 듯 수아를 바라보았다. 수아는 이리구의 얼굴에 슬쩍 어리는 웃음기에 마음이 편해졌다. 언제쯤 이리구가 편해지려나, 수아는 붙임성 좋은 진이가 부러웠다. 이리구가 몸을 일으키더니 침대 끝으로 와 앉았다. 수아와 한 팔 길이로 가까워졌다. 수아의 오른쪽 어깨를 이리구의 왼쪽 손아귀가 감쌌다.
“확실히 여자는 얇구나.”
“네?”
느닷없이 던져진 말이지만 수아는 어쩐지 칭찬처럼 들렸다. 빙글 미소를 머금은 채 다음 말을 기대하고 있는데, 이리구의 오른손이 수아의 팔을 타고 내려와 손목에서 멈췄다. 이리구의 손아귀 안에 수아의 손목이 가뿐히 들어갔다. 이리구가 손가락을 펴더니 두께를 가늠하듯 검지부터 차례대로 오므렸다.
“예쁘다는 소리야.”
수아는 한층 기분이 좋아져 자기도 모르게 힉 웃었다. 그러고 나서 곧 자기 웃음소리가 바보 같다는 느낌이 들어 후회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리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에도 들어갈까?”
이리구가 커피 컵에서 홀더를 빼냈다.
“손 줘 봐.”
수아가 한 손을 내밀자 이리구가 컵홀더를 수아의 손에 끼웠다. 컵홀더 안은 수아의 손목을 담고도 헐렁했다. 이리구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수아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커피 컵을 바닥에 내려놓고 수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수아는 침대까지 끌려왔으나 이리구 옆에 가까이 가는 것은 망설여졌다. 어쩌다 보니 무릎 꿇는 자세가 되어 버렸다. 이리구가 어, 하는 표정을 지을 때 수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리구가 하자는 대로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8월에도 있어야 할 생리가 없었다. 워낙 불순이라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8월에도 생리가 없는 건 불길했다. 6월엔 생리 예정일이 모의평가랑 겹쳐서 안 하는 줄도 모르고 지나갔고, 7월엔 학기말고사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 안 하는 줄 알았다. 중학교 때도 시험이 있는 달에는 거르곤 했으니까. 그런데 8월은 방학 중이라 생리를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실은 이것 때문에 이리구를 기다린 것이다. 수아가 임신 됐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려는데 이리구가 팔로 이불을 툭툭 쳤다.
“나 시간 별로 없어.”
수아는 이리구가 금방 간다고 할까봐 마음이 조급해졌다.
“난 네가 원하는 걸 해주려고 해.”
“뭘요?”
“오늘 공부하다가 ‘얇다’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그 말에 꽂히는 거야.”
낯설게도 그동안 나눠보지 않은 스타일의 대화다. 수아는 이 분위기에 다른 말을 끼워 넣기가 조심스러워 일단 하려던 말을 접었다.
“너 문학파니 비문학파니?”
“전 그냥 다 비슷해요.”
“그래. 학기말고사 1등 했다고 했지? 중간고산가?”
“둘 다요.”
“그러면 국어는 백 점이겠다.”
“네.”
“너 시 좋아하니? 내가 시 공부하다가 그 단어에 꽂힌 거거든.”
“무슨? 아, 얇다라는 말이요?”
“얇다는 이미지가 들어간 시 아는 것 있으면 읊어 봐.”
수아는 바로 떠오른 시를 읊조렸다.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우리가 ‘풀잎’ 하고 그를 부를 때는, 우리들의 입속에서는 푸른 휘파람 소리가 나거든요.”
“박성룡. 풀잎이 얇긴 얇지, 또.”
이리구는 뭐든 생각나는 것을 읊어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수아가 한 연 더 읊으려는데 이리구가 막았다.
“껍데기. 그건 좀 두껍고 딱딱하게 들리네. 마지막 연에 이런 말이 있어.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기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쇠붙이. 지난 모의평가에 나온 시다.”
수아는 시를 잘못 선택했구나, 싶었다. 그래도 나름 선택한 이유를 말하고 싶었다.
“껍데기는 얇은 느낌이 들어요. 얇아서 힘이 없고 잘 부서질 것 같아요. 진실의 힘이 몰아치면 도망갈지도 모르겠어요. 지금 오빠가 그런 얇음을 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당연히 아니지. 얇은 이미지를 떠올리다 네가 생각났다니까. 설마 내가 너를 생각하면서 껍데기, 쇠붙이, 이런 것을 연상했겠니?”
“저를요?”
수아는 무슨 말인지 몰라 이리구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넌 얇은 것 하면 떠오르는 게 뭐야?”
이리구가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는 듯 물었다.
“글쎄요.”
“시는 툭툭 잘도 읊어 대면서…….”
이리구가 재미없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수아는 내가 왜 이 정도 대답도 못하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게 그렇게 중요한 질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 웃겼지만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바삐 움직였다. 다행스럽게도 떠오른 단어가 하나 있었다.
“채송화 꽃잎이요.”
“그래?”
“꽃잎이 너무나 얇아요. 살짝 건드려 보았을 뿐인데 손자국이 났어요. 정말 미안했어요.”
“누구에게 미안해?”
“채송화에게요.”
“미안할 것도 많다.”
“저 때문에 상처가 났으니까요. 되돌려 놓을 수 없으니까 미안하죠.”
“야, 됐다.”
이리구는 말끝에 누가 반성문 쓰랬나,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수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리구의 얼굴이 수아의 얼굴과 거의 맞닿을 듯 가까웠다. 이리구의 엷은 갈색 눈동자 안에 수아의 얼굴이 보였다. 수아는 눈길을 흰자위 쪽으로 조금 비껴 보았다. 여전히 왼쪽 흰자위에 누르스름한 얼룩이 있었다. 없어지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만족하지?”
이리구가 말했다.
“뭐가요?”
“네가 그랬잖아. 대화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싶다고. 곧 수능이라 데이트 같은 건 못하지만, 나 오늘 너를 위해 노력한 거야. 안 하던 거 아니까 힘드네.”
이리구가 말 끝에 큭큭 웃었다.
지금까지 이리구랑 단둘이 만난 것은 오늘을 포함하여 여섯 번이다. 만날 때마다 만나는 장소가 수아의 원룸이고, 그것도 늘 밤 10시, 11시로 한밤중이었다. 첫날만 빼고. 첫날엔 원룸 앞 편의점에서 만났다. 그날 이리구는 학교생활이나 입시에 대하여 이것저것 일러주었다. 수아는 만약 자기에게 오빠가 있다면 이리구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흘 후에 두 번째 만났는데, 그때는 수아의 원룸에서 만났다. 수아는 원룸이 초라해 보여서 쩔쩔맸고, 이리구는 그 마음을 읽은 듯 컵라면 없냐고 물었다. 컵라면을 먹으면서 이리구는 수아의 책을 들춰보며 이런저런 말을 했다. 이 참고서는 내용이 충실하다는 둥, 이 문제집은 작년 거랑 똑같다는 둥. 또 어떤 문제집은 선생님들이 시험 출제할 때 많이 보는 것 같다는 둥. 컵라면은 생각보다 빨리 바닥이 드러났다. 이리구는 다음에 또 와도 되냐고 물었고, 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구가 마치 주문하듯 다음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면 된다고 했다. 엷게 샷은 하나만. 두 번째로 원룸에 들렀을 때는 수아가 테이크아웃 해온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인가 마신 후, 이리구가 침대머리에 비스듬히 앉았다. 가까이 오라는 이리구의 눈짓에 수아는 당황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움직였다. 이리구는 너무 멋있었고, 좀 더 친해져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룸에 오기 전에 배란기를 계산해 보라던 이리구의 문자가 생각났지만 설마 거기까지는 아니겠지, 했던 예상은 한참 빗나갔다.
그 후로 6월에 두 번 7월에 한번 만났는데 세 번 다 그런 식이었다. 발가벗겨진 수아가 이불 속에서 마치 애벌레처럼 웅크리고 있으면 이리구는 자기 옷을 주워 입고 나갔다. 그럴 때마다 수아는 이성교제가 이런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혹시 그런 표현을 하면 뭘 모른다는 말을 들을 것 같아 내색은 안 했지만 어쩐지 좀 죄 짓는 것 같고 께름칙했다. 고3인 이리구의 형편을 생각하면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데이트도 하고 싶고, 대화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번 말해 본 건데 한 달 만에 온 이리구가 수아의 요구를 들어 준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됐지?”
“뭐가요?”
“이 정도면 네가 원하는 대화는 충분하잖아.”
이리구가 시간이 별로 없다면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리구의 손끝이 닿을 듯 말 듯 수아의 턱선을 훑고 지나갔다. 수아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으나 이리구는 개의치 않았다. 어깨로 갔던 이리구의 손이 턱 밑으로 와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잠깐. 안 돼요.”
“왜?”
이리구의 눈썹이 안쪽으로 곤두박질치듯 꿈틀거렸다.
“나 좀 이상해요. 임신한 것도 같고.”
“설마. 배란기가 아닌 날만 골라 왔는데?”
“그래도…….”
“좋았는데 김샜다.”
이리구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만약 임신이면 저 어떻게 하죠?”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정말로.”
이리구는 가방을 둘러메더니 나가버렸다.
쿵.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불안이 엄습해 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이리구를 보고나니, 정말 자기가 임신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저 느낌만 말했을 뿐인데 어쩌면 저렇게 딱 자르고 가버릴까. 몸이 떨리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수아는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듯 양손으로 팔뚝을 부여잡고, 수십 번도 더 본 탁상 달력을 다시금 들여다보았다.
“8월 셋째 주도 끝나가는데 아직이야. 더 기다려봐야 하나…….”
두 번째 만난 날, 이리구는 원룸에 오기 전에 배란일이 아니어야 오겠다고 했다. 그땐 정말 농담인줄 알았다. 지난번에 컵라면 먹고 간 것처럼 이번에도 커피 마시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갈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계산도 안 해 보고 오케이라고 해 버렸다. 이리구의 계획이 어떤 것인지는 짐작도 못하고. 그날 콘돔 같은 건 준비도 안 되어 있었고, 그걸 말할 여유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리구는 셋째 주에만 방문했다. 배란일이 아니라고 했던 그 주를 골라서 온 눈치였다.
“임신이 그렇게 쉽게 되지는 않겠지.”
수아는 불길한 예감에 이끌리듯 배란일 계산기를 검색했다. 최근 생리 시작일인 5월 3일을 넣었더니 배란일이 19일이고 가임기가 14일에서 22일로 나왔다. 문제의 그 날은 21일이었다. 혹시 몰라 수기로도 계산해 보았다. 다음 생리 예정일인 6월 3일로부터 14일 전인 20일이 배란일. 가임기는 20일 전후로 4일을 계산하면 16일부터 24일이다. 두 계산법에 약간의 오차가 있지만 5월 21일은 확실히 가임기에 속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