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향사(調香士)는 말 그대로 ‘향기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서양에 비해 향수 문화가 크게 발달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생소한 직업. 하지만 젊은 층을 중심으로 맞춤 향수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고, 아울러 이 직업을 선택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지면서 최근 조향사가 인기 직종으로 떠오르고 있다. 강남구 역삼동에 자리 잡고 있는 갈리마드 퍼퓸 스쿨은 국내 유일의 조향사 교육기관이자 향과 관련된 비즈니스를 하는 곳. 우리나라에 처음 조향사라는 직업을 도입한 정미순(44세) 원장이 프랑스의 유명한 향료회사인 갈리마드 퍼퓸과 제휴해 운영하는 곳으로 지난 2002년 설립 이후 지금까지 300여 명의 전문 인력을 배출했다. 정 원장이 조향사라는 직업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화장품 회사의 창업자인 에스티 로더 여사의 전기를 읽은 것이 계기였다. 조향사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를 만든 에스티 로더의 삶에 큰 감명을 받은 그는 자신의 진로를 일찌감치 조향사로 정했다. 하지만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조향사라는 직업에 대한 개념조차 희미하던 시기였다. 막연히 화학을 공부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연세대 화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 화장품 회사에 가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일반 기업체에 취직했다. 해외 마케팅을 담당한 그는 잦은 해외 출장 덕분에 향수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운명이었는지, 좋은 향을 맡으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고, 가슴이 설다. 끝내 조향사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3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같은 동양인 일본도 향수시장이 그렇게 크지 않아요. 그래도 우리나라보다는 10년쯤 앞서 있었지요. 특히 아로마테라피 같은 분야가 많이 발전한 상태였어요. 향수와 아로마테라피는 모두 향과 관련이 있지만 조금 차이가 있어요. 향수가 화장품이나 패션의 개념이라면 아로마테라피는 치유 혹은 건강과 가깝죠. 워낙 관심이 많은 분야였기 때문에 저는 두 가지 다 참 재미있게 공부했어요.” 3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수입 화장품 회사에서 일했다. 아로마테라피를 화장품에 접목한 제품을 국내에 들여오는 업무를 맡았던 그는 1년 후 아예 독립해 아로마테라피 센터를 차렸다.
“원래는 맞춤 향수를 함께 할 계획이었는데 그 때만 해도 수요가 거의 없어 아로마테라피에 초점을 맞추었죠. 맞춤 향수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건 2002년에 갈리마드 퍼퓸과 제휴하면서였어요. 향수를 즐기는 젊은 세대들이 자신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색다른 향수를 만들어 달라고 저를 찾아오기 시작했고, 이 일을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 교육까지 겸하게 됐어요.” 개인이 주문제작을 의뢰하는 경우 맞춤 향수 제작에 걸리는 기간은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 달. 먼저 상담을 통해 사람의 심리유형과 좋아하는 향수 등을 꼼꼼히 체크한 후 127가지의 향 중에서 몇 가지를 조합해 가장 어울릴 만한 향을 뽑아 낸다. 3~5개의 샘플을 만든 뒤 고객과의 협의 과정을 거친다. 이 중 고객이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향으로 제품을 만든다. “고객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게 아닌 이상 그 사람이 원하는 느낌을 완벽하게 구현해 내기는 어렵죠. 그래도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만들어 내야 하는 게 조향사의 임무이자 가장 어려운 부분이에요. 그래서 상담 시간이 길어요. 그 사람에 대해서 많이 알수록 원하는 향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으니까요. 조향사들이 심리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이죠.”
첫사랑의 향기도 찾아 줘
10여 년 동안 조향사 일을 하면서 심리 전문가가 다 된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고객으로 첫사랑과 헤어진 직후 자신을 찾아온 한 청년을 꼽았다. 그가 주문한 내용은 헤어진 여자친구를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도록, 그 체취에 가까운 향수를 만들어 달라는 것.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여인의 이미지를 유추(?)하며 향을 조합하느라 무척 힘들었다”는 그는 “다행히 최종 만든 향수를 고객이 마음에 들어해 흐뭇했다”며 웃는다. 이처럼 개인 고객도 많지만 요즘은 향기 마케팅이 부각되면서 그의 활동 영역은 더욱 넓어졌다. 기업이나 특정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잘 표현해 줄 향기 의뢰에서부터 미용실, 카페 같은 공간 특성에 맞는 향기 제작 문의도 많다. 대상만 다를 뿐 그에 맞는 향을 만들기 위한 상담과 분석 작업은 똑같이 진행된다. “요즘 들어 일이 많아지니까 저보고 혜안을 가졌다고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솔직히 저는 그런 생각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앞으로 전망이 있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도,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심으로 벌인 일도 아니거든요.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요. 그리고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기 때문에 공부를 계속하면서 꾸준히 이 분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할 생각입니다.” 이미 <심리유형에 따른 향기 선호도와 적합성 연구>로 대구 한의대에서 보건학 석사를 받은 그는 다시 박사과정에 등록, 체질에 따라 좋아하는 향이 다른 근거를 규명하기 위해 복잡하고 까다로운 연구를 진행 중이다.
그동안 황무지나 다름없는 길을 걸어온 그로서는 요즘 조향사라는 직업에 쏠리는 관심이 내심 반갑다. 자신이 길러 낸 후학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도 큰 기쁨이다.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올해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데 주력할 것이라는 정미순 원장.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조향사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 이런 조언을 남겼다. “향기산업은 국민의 소득 수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아마 조향사의 수요가 점점 많아질 거예요. 하지만 결코 화려한 직업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며 많은 인내심을 필요로 하지요. 조향사가 되기 위해서는 10년 이상 필요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한 10년쯤 해보니 알 것 같아요. 향에 대한 감각은 시간, 노력, 경험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지, 책에 있는 내용을 달달 외워서 되는 일이 아니거든요. 선천적으로 후각 기능이 발달한 사람이면 좋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향을 좋아하고, 그 관심을 끝까지 가지고 가는 끈기와 노력입니다.” 사진 : 신규철
▣ 알아 두면 좋은 생활 속 향수의 용도 ① 편지지의 모서리나 손수건, 모자, 핸드백에도 몇 방울의 향수가 큰 효과를 낸다. ② 방의 전구나 스탠드에 자신이 평소 사용하는 향수를 한두 방울 뿌리면 불을 켤 때마다 전구의 열이 향을 방 안 가득 퍼지게 해 실내 방향제 역할을 한다. ③ 샴푸할 때나 목욕할 때 마지막 헹구는 물에 향수 몇 방울을 떨어뜨리면 하루 종일 상쾌한 향기 속에서 생활할 수 있다. ④ 옷장이나 서랍에 향수를 뿌리거나 향수를 묻힌 거즈를 넣어 두면 옷에 적당한 향기가 밸 뿐 아니라 향수 자체가 방충제, 방부제 역할도 하므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⑤ 사용하고 남은 향수병은 뚜껑을 열어 신발장, 욕실 등에 놓고 이용하면 훌륭한 방향제가 된다. 자료제공 | 갈리마드 퍼퓸 스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