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입학하던 1970년 3월 당시의 피얼스 영아원 고아들의 모습>
어린 마음이지만 유치원에 가게 된다는 설레임 때문에 입학날이 얼마나 기다려 졌는지 모른다. 당시 초등학교 6학
년이던 큰형과 함께 유치원 가방을 사러 시내에 나갔던 기억도 잊을수 없다. 대각선으로 어깨에 둘러 매는 다니는
유치원 가방을 사기 위해 형과 함께 몇 시간을 헤매고 다녔다. 성남동 <평화시장>에서 부터 삼성동의 깡시장(삼
성시장)을 돌아 역전통의 <중앙시장>에서야 겨우 가방을 구입할 수 있었다. 유치원 입학 전날 가방을 꼭 껴안고
잠자리에 들었던 기억조차 새롭다. 그렇게 나의 유치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구요.
우리들은 피얼스에 모여 살아요.
우리 피얼스, 우리 피얼스.
착하고 귀여운 아이들의 꽃동산
미끄럼 그네뛰기 재미 있고요.
선생님의 풍금 맞쳐 노래 잘하죠.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과 매일 매일 부르던 그 노래가 지금도 아스라히 귓가에 맴돈다. <피얼스 영아원>의 규모는
꽤나 크고 넓었다. 웬만한 초등학교 부지의 절반 정도는 넘어 보였다. 창고를 포함해 7~8동의 건물이 있었고 넓
은 놀이터는 물론 천 여평이 넘는 밭이 있었고, 밭 한가운데로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엇다. 놀이터 옆으로 도
르레가 매달린 우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피얼스 영아원>에는 우리 유치원생 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또래 아이들
과 어린 영아들이 보육되고 있었다. 그 고아들과 우리 40 여 명의 유치원 원아들이 한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게 된
것이다. 물론 우리 유치원생들은 독립된 교실에서 따로이 교육을 받았다. <피얼스 영아원>의 당시 원장님은 여
자분 이셨고, 남자 원감님이 계셨다. 유치원 수업은 한 분의 여선생님과 보조 여교사님이 담당 하셨다. 비록 수업
은 따로 받지만 놀이터에서 놀때나 점심 식사 때에는 유치원생과 고아들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100 여명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식당 안에서 우리들은 서로 섞여서 똑같은 양의 똑같은 음식을 함께 나누었다. 물론 유치원 선생님
도 영아원 보모들도 자연스레 함께 어울린다. <피얼스 유치원>에서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중 하나이다.
<1960년 피얼스 영아원의 2층 짜리 본관 건물이 한창 공사중이다.>
우리집에서 <피얼스 유치원>까지의 거리는 800 m 남짓. 입학후 한동안은 엄마의 손을 잡고, 때로는 아빠의 등에
업혀 유치원에 등교했고 하교 때에는 나 혼자 걸어왔다. 그나마 일주일 정도 지나고 부터는 나 혼자 등하교를
해결하였다. 오후에 유치원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 오는 길. <피얼스 유치원> 은 <대전상고>와 우마차가 지날수
있는 좁은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 길에는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5월이면
향긋한 <아카시아> 꽃내음에 취한채 혼자서 그 길을 걸었다. <피얼스 유치원>의 울타리가 끝나는 지점에 <오씨
아저씨>네 집이 자리하고 있다. <오씨 아저씨>는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으로 왼쪽 다리를 잃으신 <상이
용사> 출신 이신데 우리 아빠 하고도 각별히 친했다. 그러고 보니 <오씨 아저씨>의 딸인 <미애>도 나와 같은
시기에 <피얼스 유치원>을 다녔다. <미애>네 엄마는 <대전상고> 학생들을 상대로 <풀빵장사>를 하셨는데 오다
가다 공짜로 얻어먹은 그 <풀빵>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미애>네 집 맞은 편으로 <경수>네 집이 자리하고 있
다. 제법 오래된 기와집이며 마당도 꽤 넓다. 집 뒷편으로 5~6 기 정도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었지. <경수>네
집을 기준으로 왼편으로 80 m 거리에 <홍철>,<선희>,<창호>네 집이 있고, 오른편으로 110 m 쯤 거리에 <성호>
네 집이 자리하고 있다. <성호>네 집 뒷편으로 다섯 그루의 큰 소나무와 함께 약 15기 정도의 무덤들이 곳곳해
산재해 있었고 포도밭이 이어졌다. <경수>네 집앞의 비탈진 신작로를 따라 300 m 거리에 위치한 하얀 슬레이트
집이 바로 우리집이다. 우리집에서 더퍼리 방향으로 80m 쯤 거리에 높은 고갯마루가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에게
<장고개>라고 불렸다. 지금의 <대주 아파트 4거리>가 바로 당시의 <장고개>였는데 지금보다도 40~50m나 더
높았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한아름 안고 기뻐하는 피얼스 영아원의 친구들>
이 고개가 <장고개>라 불리운 이유는 장보러 오고가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넘어야 할 고개였기 때문이다. <더퍼리>
지역 사람들이야 말할것도 없고 멀리 대덕군의 <동면>,<추동면>지역 사람들도 새벽에 일어나 대전의 장을 보기
위해 산을 두개나 넘고 이 <장고개>를 넘어야만 <소제동>과 <신안동>을 거쳐 시내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 <장고개> 길이야말로 시골 양반들의 유일한 <실크로드> 였던 셈이다. 그래서 이 길에는 늘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특히 장이 서는 날이면 등짐을 맨 사람들, 봇짐을 머리에 인 아주머니들, 황소 등에 짐을 바리바리 실
은 노인장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행렬들이 이어진다. 이 <장고개>가 너무 높았기에 누구든지 이 고갯마루 정상에서
쉬어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잠시 땀을 닦고,담배 쌈지에 불을 붙이며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운다. 아무개네
막내딸이 다음달에 시집 간다는 이야기, 이번 달 열 이렛날이 <안골>사는 정 영감의 칠순 날이라는 이야기들 이 고
갯마루 위에서 살갑게 이어진다. 그 정감어린 <장고개>는 어느새 간곳이 없고 <대주 아파트 4거리> 만이 남았다.
<장고개>를 넘나들던 소박했던 인정의 발길은 끊어진지 오래고 무심한 차량들의 경적만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1968년의 어느 날 영아 보육실을 찾은 따뜻한 이웃들>
앞에서 언급했듯 그 당시 주변에는 유난히 묘지들이 많았다. 당시의 우리들에게 묘지는 결코 이질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친근함으로 다가서는 자연 경관의 하나였다.
실제로 우리집에서 불과 60 m의 거리에 60 기가 넘는 묘소가 있는 <공동묘지>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밤이나 낮이나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특히 밤이면 환한 달빛 아래 묘지 한 가운데 모여 <숨박꼭질>,<도둑놈 잡기>,<말뚝박기>,<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 <귀신놀이>등에 몰두하며 시간 가는줄 몰랐다.
21 세기의 어린이들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엽기적인 놀이터였다.
<공동묘지>가 아이들만의 천국은 아니었다. 묘지 사이로 수많은 <반딪불이>들이 날아들며 빛의 축제가 이어
지고 <여치>와 <쓰르라미>의 노래소리가 밤이 깊도록 이어졌다.
맑디 맑은 밤하늘위로 손만 뻗으면 금방이라도 닿을것 같은 수 천개의 영롱한 별빛들이 반짝이고,은하수 물결들이
넘실대던 그 아름다운 놀이터가 너무나 그리워진다.
말이 나왔으니 이 지역 최대의 <공동묘지>가 위치한 곳은 지금의 <흥룡초등학교> 옆이었다.
<현대자동차 써비스> 자리도 100% <공동묘지> 였다. 그곳을 시작으로 <반도 정형외과>,<대전 텔레콤>,<일양
양품>,<흥룡 파출소> 맞은편의 <GS 주유소>까지 묘지 350 여 개에 이르는 매머드 <공동묘지>가 이어졌다.
이 지역의 <터줏대감>을 자처하는 분들중에 <흥룡초등학교>도 <공동묘지>였다고 우기는 분들이 있는데 그건
아니다.
당시 이 지역의 유일한 예배당(교회)이 지금의 <구세군 대전 중앙영>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아주 어릴때 누나
따라 그곳에 한 두 번 갔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예배당이 지금의 <가양제일 장로교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피얼스 유치원> 다음 이야기..
첫댓글 헐~누구네 집이 어딘지 까지 다 기억하시고... 대단하시네요!! 그만큼 그리워 하시는 건가요?^^ 흥룡초등학교도 묘지 인줄 알았는데 다행히 아니네요... 원장님 글을 읽고 있으면 참 재미있고 시간가는줄 모르겠어요. 어렵지 않고 쉬운 문장으로 쭉쭉 써내려가는....다음 이야기가 더 궁금해 지내요! 가양제일교회.... 아주 오래된거같지요? 제가 흥룡초등학교 다닐때는 비래동 에서 다녔었는데 그때도 있었던걸로 알고 있거든요...암튼 오래 이곳에 머무르다 보니 관심이 가긴하네요 다음 이야기 기다릴께요^^
자랑이 아니라 기억 능력이 유달리 뛰어 나다는 주변의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됩니다.
신이 저에게 내려준 유일한 축복이 아닐까 싶네요.
암만 그래도 너무도 오래전 기억이라 이글을 쓰기전 걱정이 많이
앞서더군요. 지금의<세광이>는 물론 <세아>보다도 더 젊었을적
일이잖아요. 기억의 가장 밑바닥을 헤집어 가며 어렵게
<추억의 퍼즐>들을 맞추어 가고 있어요.
변함없는 관심에 늘 감사드려요.
신이 주신 축복이 기억력 말고도 다른것들도 많이 있을것 같은데요!^^ 변함없이 맑고 순수한 마음!또 불의를 참지 못하는마음도.... 신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공평하시다는걸 느낀 답니다. 완벽이란 없으니까요 보기에는 다 갖추어진것 같을 지라도 본인 들이 느끼는 만족감은 다 다르니까요!! 우리 원장님도 좀 늦은감은 없지않아 있지만 좋은 친구라고도생기셨으면 정말 좋을텐데...^^
맞아요. 눈에 보이는게 전부는 아니잖아요.
이미 많은걸 가졌슴에도 더 많이 가지지 못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모습들
을 자주 보게 됩니다. 마치 닿을수 없는 <무지개>를 잡기위해 평생을
고통속에 방황하다가 허무하게 늙어버린 어느 소년의 모습처럼....
제 곁에 사랑하는 반려자가 없슴을 항상 안타까워 하시는 <하얀겨울>님
의 따뜻한 마음 잊지 않을게요.
정말 무시무시한 기억력일세 그랴... 그 성호가 벌써 휜머리칼이 늘고있으니... 세월유수가 맞네..
그사이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뀐셈이지.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그
시절 똘망똘망하고 귀여웠던 꼬마 아이 <성호>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네.
앞으로 또 4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거야.
그 때에도 지금처럼 마주 앉아 삼겹살 구워가며 <두꺼비> 마시면서
옛이야기 나누겠지..
ㅋㅋ... 원장님도 친구들이랑 있으면 .... 철학적인 이야기를 밤새 나누시고 계신건아니신지?.... 현실을 비판하고 이상적인 국가를 스케치 하시면서?
저 역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소시민의 한 사람..
그러니 소시민적인 소박한 이야기가 좋아요. 의외로 스포츠 관련 이야기
가 많고요. 영화에 관한 얘기도 적지 않아요. 특히 일본 영화를 많이 좋
아 합니다. <하얀겨울>님께선 친구들 만나면 어떤 이야기 많이
하시나요?
헐~ 다양하지요...때론 신랑이야기, 때론 아이들 이야기, 때론 학창시절이야기 등이요... 이제 영화는 볼기회가 많이 줄어서 영화보다는 드라마 이야기가 더 많아지고요... 또 저한텐 가장 중요한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것같죠? 지금은 거의 친구들 보다도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의 엄마들과 친해지고 대부분의 이야기들도 그 관점에서 보아지는것 같아요....
대충 이해가 가네요. 그러니까 신랑 흉보는 이야기, 시어머니에게 찜빠
먹은 이야기등이 오고 가는군요. 국민 드라마라는 <제빵왕 김탁구>에
대한 화제도 빼놓을수 없구요. 저도 종교에 관한 얘기는 자주 하는
편입니다. 왜 <아담>과 <이브>는 세상의 모든걸 가졌슴에도 <선악과>
에 대한 약속 하나를 지키지 못해 낙원을 잃어야 했는지, 왜 <카인>은
가만히만 있어도 세상의 절반을 가질수 있었슴에도 질투에 못이겨
동생인 <아벨>을 죽여 <원죄>를 업으채 추방되어야 했는지..
여전히 답을 얻을수 없네요.
ㅋㅋ... 원장님 숨어서 보셨나요? 정답입니당!!! ..... 사람이 욕심만 버릴수 있다면 하나님이 만들었던 세상도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 해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리라는 성경말씀이 있어요 ... 늘 욕심도 버리길 바라지만 그러지 못할때가 너무 많답니다....간간히 사단의 꼬심도 있겠지만 그것도 결국은 욕심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중요한게 뭐라 생각하세요?
세상을 몇 번 구원하고도 남을 위대한 종교를 가지고도, 심오한
철학과 이성을 가지고서도, 인류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사랑이 있는한 세상은 결코 불행하지도 메마르지도 않습니다.
설령 종교가 없더라도, 철학과 이성과 논리가 사라지더라도,
사랑만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옳은 세상이요, 행복한 세상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