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헌 이경균(1850-1922)선생의 발자취
계헌(稽軒) 이선생(諱 璟均)은 연안인(延安人)이며 자(字)는 성오(星五)이다. 좌리공신 충간공(佐理功臣 忠簡公 諱 崇元, 1428-1491)의 14대손이며, 초당공(草堂公 諱 長源, 1560-1649)의 9대손으로 1850년 음력 7월 2일 부친 학계공(鶴溪公 諱 圭性, 1814-1886)과 모친 야성송씨(1812-1872, 冶城 宋應度 女)사이의 외아들로 경북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金泉市 龜城面 上佐院里)에서 태어났다.
학문에 정진하여 고헌 정래석(顧軒 鄭來錫, 1808-1893)선생과 사미헌 장복추(四未軒 張福樞, 1815-1900)선생에게 사사(師事)하였고, 대성(大成)하여 당대 영남의 유학자로 명성이 높았다. 향산 이만도(響山 李晩燾, 1842-1910), 회당 장석영(晦堂 張錫英, 1851-1926), 공산 송준필(恭山 宋浚弼, 1869-1944) 등과 일찍부터 학문으로 교의(交誼)가 돈독하였다. 저서에는 윤강도, 존성존현록, 성학전수, 상치양로례고증, 연성문헌(倫綱圖, 尊聖尊賢錄, 聖學傳數, 尙齒養老禮考證, 延城文獻) 등과 문집이 있다.
성품(性品)이 강명(剛明)하고 인화(仁和)하며 행의(行義)가 정대(正大)하였고, 선조를 받들고 부모를 모심에 성심을 다하였다. 또 기우(氣宇)가 호방(豪放)하여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뢰헌 정종호(磊軒 鄭宗鎬, 1875-1954)선생은 '계헌선생께서는 유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항상 박식함과 정연(整然)한 논리로 좌중을 주도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선생이 이십여 세에 부친의 병환을 수년간 극진히 간병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위독해지자 놀랍고 두려운 나머지 왼손 약지(藥指)를 잘라 그 피를 드시게 하였다. 그 후 부친께서는 원기(元氣)를 회복하여 약 10년간 젊은이처럼 건강하게 지내셨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다시 위독하게 되니 이번에는 선생의 오른손 약지를 잘라 피를 드시게 하였다. 이에 선생의 부친은 크게 화를 내시며 선생을 호되게 나무라셨다. 이 후 선생의 부친께서는 약 삼 년을 더 사시다가 일흔 셋에 세상을 뜨셨다.
일본이 침입하여 단발령(1895년) 등을 강행하자 선생은 '오랑캐 령을 따를 수 없다'고 거부하였고, 을사늑약(1905년)을 반대하면서 '간신(을사오적)들을 처단할 것'을 대계 이승희(大溪 李承熙, 1847-1916), 장석영 등과 함께 상소하였다. 강제합병 이후 총독부의 '분적지령' (墳籍之令-문집, 족보, 경사(經史) 등 서적의 보유와 발간을 통제하는 령)에도 단호히 반대하였다. '무오국애'(戊午國哀 1919년 고종 독살 소식)에는 마을 앞 천변에 천막을 쳐 놓고, 자손들과 주변 사람들을 인솔하고는 비분을 감추지 못하고 통곡하였다.
1919년 파리국제평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에 유림 대표의 한 분으로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 1846-1919), 지산 김복한(志山 金福漢, 1860-1924), 재종제(再從弟) 소암 이석균(小庵 李鉐均, 1855-1927) 등과 함께 서명하고 (유림단 파리장서 독립운동) '글공부한 사람이 이러한 때 나서지 않으면 공부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고 하면서 여러 유림들이 동참하도록 독려하였다. 이 운동이 발각되어 왜경(倭警)이 조사할 때, 동지(同志)들이 일의 수습과 재기를 도모하기 위하여 '선생을 발설(發說)하지 않기로 하였다'고 하여 선생도 조심하였지만, 왜경은 혐의를 두고 조사와 감시를 계속하므로 안동 예안(安東 禮安)의 향산선생 문중에 문상을 가서 오래 머물기도 하였다.
선생은 평생토록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였으나 끝내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22년 음력 10월 9일 73세를 일기로 작고하였다. 장례는 그 해 음력 12월 15일 사림장(士林葬)으로 치러졌으며, 송준필선생은 제문(祭文)에서 '탁한 것을 치고 맑은 데로 돌아가 찌꺼기가 없으며, 문장의 사리가 다 지극한 데까지 나아갔다'라고 애도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수도곡 오좌(修道谷 午坐)에 첫째 부인 진양하씨(晋陽河氏)와 함께 합분(合墳)으로 모셔졌다가, 둘째 부인 남평문씨(南平文氏)와도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4묘역(4-273)으로 옮겨 모셔졌다. 수도곡의 묘표(墓表)는 장석영선생이 찬(撰)했고, 묘문(墓文)은 진성인 이원하(眞城人 李源河)선생이 썼으며, 제서 이정기(濟西 李貞基, 1872-1946)선생이 묘지(墓誌)를 짓고, 송준필선생이 행장(行狀)을, 장남 학산공(鶴山公 鉉璣, 1874-1942)이 가장(家狀)을, 정종호선생이 묘갈문(墓碣文)을 지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 삼일절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2010. 7. 稽軒李先生景慕會 謹識)
계헌이선생 경모회
고문 장지윤 (사미헌선생 주손)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이철우 (국회의원)
박보생 (김천시장)
송영호 (김천문화원장)
이정화 (증손)
위원장 김병식 (점필재선생 주손)
부위원장 이하영 (손자)
위원 권숙월 (시인, 김천신문사)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교수)
이병규 (국포선생 주손, 고령읍 관동)
강희대 (유림, 성주군 금수면)
장세완 (영남유학연구회)
송만수 (야계선생 주손, 성주군 고산정)
장세민 (회당선생 주손, 칠곡군 각산리)
이부 (향산선생 주손, 안동시 안막동)
박승렬 (변호사)
이운영 (연리 부사공파 대종회장)
이건춘 (연리 대구화수회장)
이주원 (연리 김천화수회장)
이을영 (김천 구성면 원터)
이상덕 (김천 구성면 상좌원리)
이인화 (증손)
이응봉 (주손)
간사 이석화 (010-8571-9945)
이상훈 (011-806-8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