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그는 테라스로 나와 다시 고독에 잠겼다. 물가로 밀려온 고래의 잔해, 사람의 발자국, 조분
석(鳥糞石) 으로 이루어진 섬들이 하늘과 흰빛을 다투고 있는 먼바다에 고깃배 같은 것들이
이따금 새롭게 눈에 띌 뿐, 모래언덕, 바다, 모래 위에 죽어 있는 수많은 새들, 배 한 척, 녹슨
그물은 언제나 똑같았다. 카페는 모래언덕 한가운데 말뚝을 박고 세워져 있었다. 도로는 그곳
으로부터 백 미터 남짓 떨어져 있었으므로, 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층계형 트랩이 해변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리마 감옥에서 탈출한 두 명의 강도에게 자다가 병으로 얻어맞은 날
이후 그는 저녁이면 트랩을 끌어올려 놓곤 했다. 아침에 보니 그 강도들은 바에서 만취해 있
지 않았던가. 그는 난간에 팔꿈치를 괴고 그날의 첫 담배를 피우면서 모래 위에 떨어져 있는
새들을 바라보았다. 개중엔 아직 살아서 파득거리는 것들도 있었다. 새들이 왜 먼바다의 섬들
을 떠나 리마에서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죽는지 아무도 그에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새들은 더 남쪽도 북쪽도 아닌, 길이 삼 킬로미터의 바로 이곳 좁은 모래
사장 위에 떨어졌다. 새들에게는 이곳이 믿는 이들이 영혼을 반환하러 간다는 인도의 성지 바
라나시 같은 곳일 수도 있었다. 새들은 진짜 비상을 위해 이곳으로 와서 자신들의 몸뚱이를
던져버리는 것일까. 피가 식기 시작해 이곳까지 날아올 힘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되면, 차갑고
헐벗은 바위뿐인 조분석 섬을 떠나 부드럽고 따뜻한 모래가 있는 이곳을 향해 곧장 날아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 설명들로 만족해야 하리라. 모든 것에는 항상 과학적인 설명이 있게
마련이다. 시에서 설명을 구할 수도 있고, 바다와 우정을 맺어 바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자연의 신비를 줄곧 믿을 수도 있다. 조금 시적이고 조금 몽상적이지만...... 스페인 내
전에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서, 쿠바에서 전투를 치른 다음, 모든 것이 종말을 고하는 안
데스 산맥 발치의 페루 해변으로 몸을 피한다. 마흔일곱이란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알아버린
나이, 고매한 명분이든 여자든 더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나이니까. 자연은 사람을 배신
하는 일이 거의 없으므로, 다만 아름다운 자연에서 위안을 구할 뿐. 조금 시적이고 조금 몽상
적이지만...... 하지만 시도 언젠가는 과학적으로 설명되고, 단순한 생리적 분비 현상으로 연
구되리라. 과학은 모든 면에서 인간을 제압하고 있다. 오직 바다만을 친구로 삼고, 페루 해변
의 모래언덕 위에 있는 카페의 주인이 되는 데에도 설명이 있을 수 있다. 바다란 영생의 이미
지, 궁극적인 위안과 내세의 약속이 아니던가? 조금 시적이긴 하지만...... 영혼이 존재하지 않
기를 바라야 할 터, 그것이야말로 영혼이 과학에 당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머
잖아 학자들은 영혼의 정확한 부피와 밀도와 비상 속도를 계산해낼 것이다. 유사 이래 하늘로
올라간 수많은 영혼들을 생각하면 울어 마땅하다. 얼마나 막대한 에너지원이 낭비된 것일까.
영혼이 승천하는 순간 그 에너지를 잡아둘 수도 있었으리라. 머잖아 인간은 송두리째 활용되
리라.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꿈들이 전쟁과 감옥을 만드는데 이미 쓰이지 않았던가. 어떤 새
들은 아직 모래 위에 앉아 있었다. 새로 도착한 새들이었다. 그들은 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바다의 섬들은 조분석으로 덮여 있었다. 가마우지 한 마리가 평생 만들어내는 조분석으로
같은 기간 동안 사람의 일가 전체를 먹여살릴 수 있으니 수지맞는 사업이다. 그렇게 지상에서
의 임무를 마치고 새들은 이곳에 와서 죽는다. 생각해보면 그 역시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고
할 수 있었다. 마지막 임무는 시에라 마드레 산에서 카스트로(쿠바의 수상 - 옮긴이) 와 함께
였다. 고상한 영혼 하나가 이상주의에 헌신함으로써 같은 기간 동안 한 나라의 경찰을 먹여살
릴 수 있는 법. 조금 시적으로 해석한 것뿐이다. 인간은 곧 달에 갈 테고, 그러면 달도 끝장이
나겠지. 그는 피우던 담배를 모래 위로 던졌다. 물론 이 모든 걸 위대한 사랑이 해결할 수 있
을 테지, 하고 그는 냉소적으로 생각하며 죽고 싶다는 만만찮은 욕구를 느꼈다. 때때로 고독
이, 고약한 고독이 아침이면 그렇게 그를 엄습하곤 했다. 사람을 숨쉬게 해주기보다는 짓눌러
버리는 고독이. 그는 도르래를 향해 몸을 기울여 밧줄을 잡아 트랩을 내려놓은 다음, 돌아와
면도를 했다, 아침이면 언제나 그렇듯이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놀란 눈길로 바라보면서. "이
런 얼굴이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는 희극적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주름들이 그 얼굴의 일이 년 후의 모습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다. 품위 있게 처신하는 것 외
에 다른 방법이 없을 터였다. 길고 여윈 얼굴에 피로한 눈빛과 애써 지은 냉소적인 미소가 어
려 있었다. 그는 이제 아무에게도 편지를 쓰지 않았고, 누구에게서도 편지가 오지 않았으며,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그 불가능한 일을 하려 할 때
사람들이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던 것이다.
바닷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물고기떼가 해변을 지나가는 모양이었다. 하늘은 온통 하
얫고, 먼바다의 섬들은 햇빛에 노래지기 시작했고, 바다는 다양한 농담의 젖빛으로부터 모습
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모래언덕 뒤 무너진 낡은 방파제 근처에서는 바다표범들이 울고 있었
다.
그는 커피를 데우기 위해 불에 올려놓고 테라스로 다시 나왔다. 모래언덕 오른쪽 발치에 모
로 누워 얼굴을 모래에 묻고 손에는 병을 든 채 잠들어 있는 해골 같은 사내와, 그 옆에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푸른색과 붉은색과 노란색을 칠하고서 팬티만 입고 웅크리고 있는 사람의
몸뚱이와, 루이 15세 시대풍의 하얀 가발, 푸른색 궁정 의상, 하얀 실크 바지에 맨발인 채 반
듯이 누워 있는 거구인 흑인 사내의 모습이 처음으로 눈에 띄었다. 사육제의 마지막 물결이
이곳 모래 위까지 밀려온 모양이었다. 배우들이군, 하고 그는 결론지었다. 시 당국에서 그들
에게 의상을 제공하고 수고비로 하룻밤에 50솔을 지불했겠지. 가마우지들이 흰 색과 회색의
연기 기둥처럼 물고기떼 위를 선회하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여자를 발견했다. 여자는
에메랄드빛 원피스에 초록색 스카프를 끌며 암초를 향해 걷고 있었다. 물은 그녀의 허리까지
찼다. 물살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비틀거렸다. 채 이십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으므로, 그 장난은 위험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 더 지켜보았다.
하지만 여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바다는 고양이처럼 묵직하면서도
유연한 동작으로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파도가 한 번 솟구쳐오르면 끝장이리라. 그
는 계단을 내려가 그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따금 발밑으로 새의 몸뚱이들이 느껴졌지
만 대부분 이미 죽은 것들이었다. 새들은 언제나 밤에 죽어갔다.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
다. 더 센 파도가 일고 나면 귀찮은 일이 시작될 터였다.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야 하고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마침내 그는 여자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가 여자의 팔을 잡자 그녀가 그
를 향해 몸을 돌렸다. 물결이 한순간 두 사람을 덮쳤다. 그는 여자의 팔을 단단히 쥐고 해변
쪽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모래 위를 걷던
그는 이윽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때때로 다
른 사람의 얼굴에서 기습적인 불쾌감이 느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배반당하지
않았다. 극도로 창백한 얼굴은 섬세했고 아주 진지하고 커다란 두 눈이 그 눈과 잘 어울리는
물방울들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는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귀고리와 반지와 팔찌를 하
고 있었고, 손에는 줄곧 스카프가 쥐여져 있었다. 새벽 여섯 시, 죽은 새들로 뒤덮인 이 후미
진 해변에서 금과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로 치장한 이 여자는 무엇을 하고 잇는 것일까, 어디
서 온 것일까.
"날 내버려뒀어야 했어요." 그녀가 영어로 말했다.
그녀의 목은 놀랄 만큼 갸냘프고 청순해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돌처럼 무거워 보이게 하고
그 빞을 퇴색시켰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내 말 알아들으시겠어요? 난 스페인어를 할 줄 몰라요."
"몇 미터만 더 갔으면 물결에 휩쓸려갔을 거요. 이곳 파도는 몹시 사납소."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두 눈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녀의 얼굴은 어린 아이를 연상
시켰다. 사랑의 슬픔이군, 하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언제나 문제는 실연의 아픔이지.
" 이 새들은 모두 어디서 오는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먼바다에 섬들이 있소.조분석 섬들이오. 새들은 그곳에서 살다가 이곳에 와서 죽소."
"왜요?"
"모르겠소. 갖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럼 당신은요? 당신은 왜 여기로 왔죠?"
"저 카페를 운영하고 있소. 여기 살아요."
그녀는 자기 발치께에 죽어 있는 새들을 바라보았다.
울고 있는지, 아니면 그녀의 뺨에 흘러내리는 것이 물방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모래 위의 새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쨌든 한 가지 설명은 있을 거요. 언제나 한 가지 이유는 있는 법이니까."
그녀는 해골 사내와 몸에 울긋불긋 색칠을 한 사내와 가발에 궁중복을 입은 흑인이 모래 속
에서 자고 있는 모래언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육제라오." 그가 말했다.
"알아요."
"신발은 어디다 뒀소?"
그녀는 시선을 떨구었다.
"생각이 나질 않아...... 생각하고 싶지 않아 ...... 왜 날 구했어요?"
"당연한 일이잖소. 이리 와요."
그는 그녀를 잠시 테라스에 혼자 남겨두었다가, 뜨거운 커피 한 잔과 코냑을 들고 이내 돌아
왔다. 그녀는 맞은편에 앉아 매우 주의깊게 그의 이목구비를 오랫동안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그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어쨌든 한 가지 설명은 있을 거요."
"날 내버려뒀어야 했어요."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는 자신이 기운을 차리기 위해서였다.
"잘될 거요. 두고 보시오."
"때때로 지겹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겹다구요. 더이상 이렇게 살 순 없어......"
"춥지 않소? 옷을 갈아입고 싶지 않소?"
"고맙지만 괜찮아요."
바다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조수는 없었지만 이 시간쯤이면 파도는 더욱 집요해지곤
했다. 그녀는 시선을 들었다.
"혼자 사시나요?"
"그렇소."
"이곳에 있어도 될까요?"
"원하는 만큼 있어도 좋소."
"더 이상 힘이 없어요.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그녀는 흐느꼈다. 그가 대책 없는 어리석음이라고 스스로 이름붙인 그 무엇에 다시 점령당
하고 만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손안에서 모든 것이 부서
지는 걸 목격하는 일에 습관이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이런 식이었으므로 속수무책이
었다. 그의 내부에 있는 무언가가 체념을 거부하고 줄곧 희망이라는 미끼를 물고 싶어했다.
그는 삶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황혼의 순간 문득 다가와 모든 것을 환하게 밝혀줄 그런 행
복의 가능성을 은근히 믿고 있었다. 어떤 실패로도, 어떤 뻔뻔스러움으로도 없앨 수 없는 무
구함이, 스페인 전장에서 베르코르드의 지하운동으로, 쿠바의 시에라 마드레 산으로,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잃은 듯한 결정적인 체념의 순간에 다가와 또다시 사람을 부추기는 두세 명
의 여자들에게로 그를 밀어붙인 환상의 힘이. 다른 사람들이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들어가
거나 히말라야의 동굴에서 생을 마치듯이, 그는 이곳 페루의 해변까지 도망쳐오지 않았던가.
다른 이들이 하늘가에서 살듯, 그는 바닥가에서 살고 있었다. 바다란 소란스러우면서도 고요
한 살아있는 형이상학, 바라볼 때마다 자신을 잊게 해주고 가라앉혀주는 광막함, 다가와 상처
를 핥아주고 체념을 부추기는 닿을 수 있는 무한이었다. 여자는 너무나도 젊었고 너무나도 막
막해 믿음에 찬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많은 새들이 그 모래언덕으로 와서
숨을 거두는 것을 지켜봐오지 않았던가. 그중 가장 아름다운 새 한 마리를 구하고 보호해 여
기 세상의 끝에 자신과 더불어 머물게 함으로써, 종착점에 이른 자신의 삶을 성공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한순간 그의 얼굴에 맑은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냉소적인 웃음
과 환멸에 찬 태도는 여전히 그것을 애써 감추려 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이렇게 되고 말다
니. 그녀는 그를 향해 눈을 들고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남은 눈물로 더욱 맑
아진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이곳에 머물게 해주세요."
하지만 그는 습관이 되어 있었다. 사람을 쓰러뜨리고 뒤엎고 바닥으로 내던졌다가, 두 팔을
들어올리고 물 위로 다시 올라가, 지푸라기가 눈에 띄는 순간 매달릴 시간만 남겨놓고 놓아버
리는, 먼바다에서 다가오는 강렬하기 짝이 없는 고독의 아홉 번째 파도에. 그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의 유혹일 것이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젊음의
그런 유별난 집요함에 얼떨떨해진 채 고개를 내저었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런 자신이
정말이지 절망적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하시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는 처음으로 그녀가 원피스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음을 알
았다. 그녀가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인지,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째서 죽으려고 했
는지, 왜 야회복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목에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고 두 손에는 금붙
이와 에메랄드를 주렁주렁 달고 슬프게 웃고 있는지 묻기 위해 그는 입을 열었다. 그녀야말로
왜 이곳 모래언덕까지 와서 죽으려는 것인지 그에게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새일 터였다. 한
가지 설명은 있어야 하고 언제나 있을 테지만 모른들 무슨 상관이랴. 과학은 우주를 설명하
고, 심리학은 살아 있는 존재를 설명한다. 하지만 스스로를 방어하고, 되어가는 대로 몸을 맡
기지 않고, 마지막 남은 환상의 조각들을 빼앗기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약동하는 바다와
땅의 색조만을 가늠하게 해줄 뿐인 보이지 않는 태양과 주위로 번진 빛을 받아, 해변과 바다
와 하늘이 순간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젖은 원피스 아래로 그녀의 젖가슴이 고스란히 드러
나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어떤 연약함이 느껴졌다. 조금 터진 채 고정된 맑은 눈과, 주위의 세
상이 갑자기 한결 가벼워지고 한결 짊어지기 편한 것처럼럼 느껴지게 하는, 마침내 세상을 품
에 안아 더 나은 운명으로 이끌어갈 수 있게 해주는 부드러운 어깻짓에는 어떤 무구함이 서려
있었다. 자크 레니에, 넌 결코 달라지지 않을 거야, 하는 냉소적인 생각으로 그는, 자신의 팔
과 어깨와 손에 매달려 있는 여자를 보호해주고 싶은 욕구에 애써 저항했다.
"아, 추워서 죽을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이리 오시오."
바 뒤에 있는 방의 창 역시 모래언덕과 바다를 향해 나 있었다. 그녀는 유리문 앞에서 한순
간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오른쪽으로 힐끗 시선을 던지는 것을 보고 그도 같은 쪽으로 고
개를 돌렸다. 해골 가면을 쓴 사내는 모래언덕 발치에 웅크리고 앉아 병나발을 불고 있었고,
궁중복을 입은 흑인은 두 눈 위로 흘러내린 하얀 가발을 쓴 채 여전히 자고 있었으며,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을 여기저기 칠한 사내는 주저앉아 들고 있던 여자의 하이힐 한 켤레를 골똘히
바라보더니, 무어라 말하고는 웃기 시작했다. 해골이 마시기를 멈추고 손을 내밀더니 모래 속
에서 브래지어 하나를 꺼내 입술에 댔다가는 바닷속으로 내던졌다. 이제 그는 한 손을 가슴에
올려놓고 무어라 떠들어댔다.
"날 죽게 내버려뒀어야 했어요. 정말 끔찍해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흐느끼고 있었다. 그는 알고 싶고 묻고 싶은 욕구를 다시 한
번 억제했다.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거리의 사육제 인파 속에 있었는데, 그
들이 날 차에 태워 이곳으로 데려왔어요. 그리고는 ...... 그리고는...... "
그렇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언제나 설명이 뒤따른다. 새들조차 이유없이 하늘에서 떨어지
지는 않는 법. 됐다. 그녀가 옷을 벗는 동안 그는 목욕가운을 가지러 갔다. 그는 유리문을 통
해 모래언덕 발치의 세 사내를 바라보았다. 침대 머리맡 탁자 서랍에 권총이 있었지만 그는
즉각 그런 생각을 털어버렸다. 그들은 결국 혼자서 죽어갈 것이고, 잘하면 그 편이 더욱 고통
스러울 터였다. 몸에 색칠을 한 사내는 아직도 하이힐을 손에 든 채, 다른 이들에게 무어라 이
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해골이 웃었다. 궁중복을 입은 흑인은 하얀 가발을 쓴 채 자고 있었
다. 그들은 모래언덕 발치로, 수많은 죽은 새들 가운데로 내려와 바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녀는 울부짖고 몸부림치고 애원하고 도움을 청했을 텐데, 그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하
지만 지붕 위에서 제비갈매기가 날개를 푸드득대는 소리에도 깰 정도로, 그는 잠귀가 밝지 않
은가. 파도 소리가 그녀의 목소리를 덮어버린 모양이었다. 가마우지들이 둔탁한 소리를 내지
르며 새벽 하늘을 날아가다가 물고기떼를 향해 돌멩이처럼 물 속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먼바
다의 섬들이 백묵처럼 하얗게 수평선 위에 수직으로 솟아올라 있었다. 그녀의 다이아몬드 목
걸이도, 반지들도 그냥 두다니, 정말이지 물욕 없는 치들이었다. 어쨌거나 그들이 빼앗은 그
무엇을 조금이라도 되찾기 위해서는 그들을 죽여야 할지도 몰랐다. 그녀는 몇 살이까, 스물
한 살, 스물 두 살? 리마에 혼자 오지는 않았을 텐데, 아버지나 남편이 있을까? 세 사내는 서
둘러 그곳을 뜨려 하지 않았고, 경찰을 두려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들은 바닷가에서 자
신들의 느낌을, 흡족했던 사육제의 마지막 편린들을 조용히 음미하는 중이었다. 그가 돌아왔
을 때, 그녀는 방 한가운데 서서 젖은 원피스를 벗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녀를 도와 옷을 벗겨
주고 가운을 입혀준 그는 한순간 자신의 품 속에서 파들거리며 떨고 있는 그녀의 몸을 느꼈
다. 알몸 위로 보석들이 빛을 발했다.
"호텔을 나가지 말았어야 했어요. 방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는데."
"그들이 당신 보석을 빼앗진 않았군."
그는 하마터면 "운이 좋았다" 덧붙일 뻔했지만 이렇게만 물었다.
"연락을 취하고 싶은 사람이 있소?"
그녀는 그의 말을 못 들은 것 같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의사
를 만나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죠."
"잘될 거요. 누워요. 이불을 덮고. 떨고 있잖소."
"춥지 않아요. 여기 있게 해주세요."
그녀는 침대 위에 누워 이불을 턱까지 끌어당겼다. 그녀는 그를 주의깊게 살폈다.
"날 원망하시는 건 아니죠?"
그는 미소를 짓고 침대에 앉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것 봐요"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자신의 뺨에, 이어 입술에 갖다 댔다. 그녀의 두 눈이 더 커졌다. 에
메랄드빛이 감도는, 바다 같은, 약간 멍하고 맑고 깊은 눈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제 그 생각은 하지 마시오."
그녀는 두 눈을 감고 그의 손에 볼을 묻었다.
"끝내고 싶었어요. 끝내야 해요. 더이상 살 수 없어요. 살고 싶지 않아요. 내 몸이 혐오스러
워요."
그녀는 줄곧 눈을 감고 있었다.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그렇게 순수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이윽고 그녀는 눈을 뜨고 적선이라도 구하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역겹지 않으세요?"
그는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가슴 아래 두 마리의 새가 살아서 파닥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문득 조바심에 사로잡혔다. 수치심과 분노가 뒤엉킨 감정.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피에
맞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이들이 모래 위를 걸으며 아직 파드득거리는 새들을 찾아
내서는 신발 뒤축으로 숨을 끊어놓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아이들 몇몇을 그는 두들겨패
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자신이 이 연약하고 상처입은 존재의 호소에 이끌려 그것을 끝장내
고 있지 않은가. 그녀의 젖가슴 위로 몸을 기울이고, 그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부드럽
게 올려놓고 있지 않은가. 그녀의 팔이 그의 어깨를 감싸안는 것이 느껴졌다.
"날 역겨워하시지 않는군요." 그녀가 엄숙하게 말했다.
그는 저항하려 애썼다. 그를 무너뜨리려고 고독의 아홉 번째 파도가 다가온 것뿐이었다. 그
는 그것에 휩쓸리기를 거부했다. 다만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고 몇 초만 더 그 젊음을 들이마
시고 싶을 뿐이었다.
"제발" 하고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 일을 잊게 해주세요. 도와 주세요."
그녀는 더이상 그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사람이 거의 오지 않는 세상 끝에 있는 이 카페에,
이 오두막에 머물기를 원했다. 그녀의 중얼거림은 너무나도 절박했고, 그녀의 눈빛에는 애원
이, 그의 어깨에 매달린 그녀의 연약한 두 손에는 약속이 깃들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삶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에 성공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를 가슴에 꼭 안고
그는 이따금 자신의 두 손 안에 묻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살포시 들어올렸다. 불현듯 수십 년
간의 고독이 한꺼번에 몰려와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아홉 번째 물결이 그를 쓰러뜨리고는 그
녀와 함께 먼바다로 그를 휩쓸어갔다.
"원해요." 그녀가 중얼거렸다. "간절히 원해요."
물결이 물러가고 기슭으로 돌아온 그는 그녀가 울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이마를 그녀의 뺨
에 댄 채 눈도 뜨지 않고 그녀가 흐느끼도록 내버려두었다.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과, 자신
의 가슴에 닿은 채 뛰고 있는 그녀의 심장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테라스에서 말소리와 발소
리가 들려왔다. 모래언덕의 세 사내를 떠올린 그는 퉁겨지듯 일어나 권총을 찾으러 갔다. 누
군가 테라스 위를 걷고 있었고, 멀리서 바다 표범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늘과 물 사이
에서 바닷새들이 울어댔고, 해변 위로 거대한 파도가 부서져 말소리를 모두 덮었다가 물러갔
다. 짤막하고 서글픈 웃음소리와 영어로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만을 남긴 채.
"지옥과 저주라네. 이보게, 지옥과 저주란 말이야. 이 일이 지겨워지기 시작하는군. 그녀와
함께 세계일주를 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세. 세상엔 정말이지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는 살짝 문을 열어보았다. 지팡이를 짚은 턱시도 차림의 오십대 남자가 탁자 옆에 서 있었
다. 그는 여자가 커피잔 옆에 놓아둔 초록색 스카프를 만지작거렸다. 짧은 잿빛 콧수염, 어깨
위에 떨어져 있는 색종이 조각들, 떨리는 두 손, 젖어 있는 푸른 눈, 술을 마신 듯한 안색, 품
위가 느껴지기도 하고 퇴폐적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애매한 태도, 피로 때문에 더욱 부조화스
럽게 보이는 작고 밋밋한 이목구비, 가발을 연상시키는 염색한 머리카락의 남자였다. 조금 열
린 문틈으로 레니에를 발견한 듯 그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스카프에 눈길을 주었다가는
레니에를 향해 다시 시선을 들었다. 조롱과 원한에 찬듯한 서글픈 그의 미소가 뚜렷해졌다.
그의 곁에는 투우사 복장에 매끄러운 흑발의 잘생긴 청년이 손에 담배를 들고 도르래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조금 떨어져 있는 나무 층계위에는 잿빛 유니폼에 모자를 쓰고 팔에는 여
자용 외투를 걸친 운전수가 난간에 한 손을 짚고 서 있었다. 레니에는 권총을 의자 위에 내려
놓고 테라스로 나왔다.
"스카치 한 병 주시오. 페르 파보르 (괜찮다면)......" 담배를 입에 문 남자가 스카프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말했다.
"바는 아직 열지 않았습니다." 레니에가 영어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커피를 주시오.숙녀께서 옷을 입으실 동안 커피를."
남자는 레니에에게 슬프고 우울한 눈길을 던지고는, 희미한 빛에 비친 납빛 얼굴과 무력한
원한의 표정 속에 굳어버린 이목구비로 지팡이를 짚은 채 몸을 조금 일으켰다. 밀려온 파도
때문에 말뚝 위에 세워진 오두막이 흔들렸다.
"큰 파도, 대양, 자연의 힘이라...... 당신은 프랑스인 같소만? 그렇다면 그녀는 길을 되돌아
온 셈이군. 그녀와 나는 프랑스에서 일 년 정도 머물렀는데, 실속 없는 명성뿐 아무 효과도 없
었소. 이탈리아로 말하자면...... 저기 있는 내 비서는 이탈리아인이오만...... 역시 아무 소용이
없었소."
투우사는 우울한 눈빛으로 그의 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국인은 모래언덕 쪽을 고개를 돌
렸다. 해골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누워 있었고,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을 몸에 칠한 알
몸의 사내는 모래 위에 앉아 병 주둥이를 입에 문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었으며, 하얀 가발
에 궁중복을 입은 흑인은 하얀 실크 바지의 단추를 열어놓고 발을 물에 담그고 서서 바다에
오줌을 누고 있었다.
"저자들 역시 분명 아무 효과도 거두지 못했을 거요." 영국인은 지팡이로 모래언덕을 가리키
며 말했다. "이 세상에는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놀라운 일이 있지. 저 세 사내들이......
그녀의 보석을 빼앗지 않았어야 할 텐데. 한 재산 되는데다 보혐회사에서도 물어주지 않을 테
니까. 사람들은 그녀의 부주의를 물고 늘어질 거요. 언젠가는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목을 비
특고 말겠지. 그건 그렇고, 죽어 있는 저 새들은 모두 어디에서 온 것인지 말해줄 수 있소? 수
천 마리는 될 것 같은데. 코끼리들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새들의 무덤이
라니...... 혹시 전염병이오? 어쨌든 설명할 수 있는 게 있을 거 아니오."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 당신 거기 있었군!" 영국인이 가볍게 몸을 굽히며 말했다. "걱정하던 참이었어, 여보. 그
일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차 안에서 네 시간 동안 마음을 졸였지. 어쨌든 이곳은 세상의 끝
이니...... 불행은 순식간에 닥치는 법이니까."
"날 내버려둬요. 가버려요. 입 다물어요. 제발 날 내버려둬요. 여긴 왜 왔죠?"
"여보,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당신을 증오해요." 여자가 말했다. "구역질난다구요. 왜 날 따라다니는 거죠. 그러지 않겠다
고......"
"다음 번엔, 여보, 보석일랑 호텔에 두고 나가구려. 그 편이 나을 거요."
"어째서 당신은 늘 날 모욕하는 거죠?"
"모욕당한 건 내가 먼저요, 여보. 적어도 현행 관습에 의하면 말이오. 물론 우리는 그런 것을
초월해 있지만. '행복한 소수' 랄까...... 하지만 이번엔 정말 좀 지나쳤소. 내 입장을 말하는 게
아니란 말이오! 알다시피 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소. 난 당신을 사랑하고. 그걸 당신에게 충
분히 증명했소. 요컨대 당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내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건
그저 조금만 더...... 분별력을 가져달라는 것뿐이오."
"당신은 취했어요. 또 취했다구요."
"절망감 때문에 마신 것 뿐이오, 여보 차 안에서 네 시간이나 기다리는 동안 온갖 생각이 다
떠올라서......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못 된다는 건 당신도 인정해야 할 거요."
"입 다물어요. 오! 맙소사, 입 다물라구요!"
그녀는 흐느꼈다. 레니에는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지만, 그녀가 두 주먹으로 눈을 문지르고
있다고 확신했다. 어린아이의 흐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는 생각하지 않으려, 이해하지 않으려
애썼다. 바다표범들이 내는 소리, 바닷새들의 울음소리, 바다가 포효하는 소리만을 듣고 싶었
다. 레니에는 눈을 내리깐 채 그들 사이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아니 소름이 돋았을 뿐인지도
몰랐다.
"어째서 날 구해줬어요?" 날 내버려뒀어야 했어요. 파도가 한 차례 밀려오면 그걸로 끝났을
텐데. 지긋지긋해요. 더이상 이렇게 살 순 없어요. 날 내버려뒀어야 했어요." 그녀가 소리쳤
다.
"주인장." 영국인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 내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 표해야 좋을지 모르겠
소. 우리의 감사의 마음이라고 해야겠군. 우리 두 사람이 이름으로 말해도 괜찮다면...... 우리
둘 다 영원히 잊지 못할 거요. 당신 은혜를...... 자, 여보 이리 오구려. 분명히 말하는데 난 이
젠 괜찮소. 나머지 문젠...... 우리 몬테비데오로 귀즈망 교수를 만나러 갑시다. 그는 기적적인
결과를 얻어낸 모양이오. 안 그런가, 마리오?"
투우사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마리오, 그렇잖느냐고? 그는 정말 위대한 인물, 진정한 치유자지...... 과학은 죽지 않았어.
그는 그 모든 것을 자기 책에 적어두었지. 안 그런가, 마리오?"
"오, 됐어요." 투우사가 말했다.
"생각해보게, 몸무게가 정확히 오십이 킬로그램인 기수들과 일을 벌여야만 기쁨을 느끼는
사교계의 숙녀를...... 그 짓을 하는 동안 세 번은 짧게, 한 번은 길게 밖에서 노크를 해달라고
번번이 요구하는 숙녀를 말야. 인간의 마음은 헤아릴 길이 없지. 또 금고의 경보음이 울려야
만 욕구를 느끼는 은행가의 아내를 생각해보게. 그 소리에 남편이 잠에서 깨어나는 바람에 어
이없는 상황게 처하게 되는 여자를......"
"오, 됐어요, 로저." 투우사가 말했다. "하나도 재미있지 않아요. 당신은 취했어요."
"또 관자놀이에 권총을 위협적으로 갖다 대야만 만족에 이를 수 있는 여자는 어떤가? 귀즈
망 교수는 그런 여자들을 모두 치료했다네. 그는 자신이 책에 그런 이야기를 모두 써놓았지.
그들은 모두 훌륭한 주부가 되어 있다오, 여보. 낙심할 필요 없소."
그녀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이 곁을 지나쳤다. 운전수가 그녀의 어깨에 정중하게
외투를 걸쳐주었다.
"그리고, 누구더라, 메살리나도 그랬지. 그녀는 로마의 황후였어."
"로저, 그만해요." 투우사가 말했다.
"사실 당시에는 심리치료란 게 아직 없었지. 귀즈망 교수라면 틀림없이 그녀를 낫게 했을 텐
데. 자, 내 사랑스런 왕비마마, 그런 식으로 날 바라볼 거 없소. 마리오, 우리에 갇힌 사자가
옆에서 포효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토라져 있던 그 젊은 여자 기억나나? 남편에게
언제나 한쪽 손으로 <목신의 오후> 를 연주해달라는 여자는 어떤가? 난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소, 여보. 내 사랑은 무한하니까. 방돔 광장의 기둥을 때맞춰 바라보기 위해 언제나 리
츠 호텔에 묵는 여자는? 인간의 마음은 헤아릴 길 없고 신비스럽지! 마라케슈에서 밀월을 보
낸 다음부턴 이슬람 성직자의 독경 소리 없인 못 배기는 여자는? 또 블리츠 폭격 당시 런던에
서 신혼을 보낸 후 남편에게 줄곧 폭탄 떨어지는 소리를 내라고 요구하는 여자는? 그들 모두
가 나무랄 데 없는 주부가 되어 있다오, 여보."
투우사 복장의 청년이 영국인에게 다가가 뺨을 때렸다. 영국인은 울고 있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살 순 없어." 영국인이 말했다.
그녀는 층계를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가 맨발로 모래 위를, 죽은 새들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것을 그는 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스카프가 들려 있었다. 그는 인간의 손으로도, 신의 손으로
도 덧붙일 것이 없는 순수한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자, 로저, 진정해요." 비서가 말했다.
영국인은 여자가 탁자 위에 놓아둔 코냑 잔을 집어들어 단숨에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받침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모래언덕을 뚫어져라
응시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새들이 모두 이렇게 죽어 있는 데에는"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이유가 있을 거요."
그들은 떠나갔다.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여자는 모래언덕 꼭대기에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주저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곳에 없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
다. 카페는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