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안의 포성을 듣고서
결혼 전 화창한 어느 주말 오후였다.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선배와 함께 쇼 프로를 시청하고 있는데 “속보”라는 예상치 않았던 자막이 흘러 나왔다. “이 상황은 실제 상황입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동요됨이 없이 차분하게 방송을 청취하면서 상황에 대처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북한 비행기가 남하하고 있습니다.” 나는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이 긴급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통장에서 돈을 찾아야 하는지, 식량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갈팡질팡했었다. 잠시 후 허겁지겁 아버지께서 들어오셨지만 동생들이 오지 않아 이러다가 이산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직업 의식 때문일까, 경찰서에 근무하는 선배는 사무실로 복귀해야 한다면서 서둘러 직장으로 돌아갔었다. 삽시간에 동네 슈퍼의 라면이 동이 나고 이튿날은 은행에서 돈을 찾는 사람들 때문에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우리는 해마다 유월을 보훈의 달로 정해놓고 6. 25를 상기한다. 하지만 조국을 위한 숭고한 희생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닌지 부끄러울 때 가 적지 않다. 전력 면에서 절대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침략 집단에 끓는 젊음과 조국애로 맞서 싸우다 수많은 청춘들이 고혼이 되었다. 수십 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지울 수 없는 분노처럼 파편 조각을 몸 속에 간직한 채 어려운 삶을 영위해 가는 이름 없는 영웅들이 있었음에도 우리는 그들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이제는 그들의 피 흘린 젊음에 대한 보답의 길을 진지하게 모색하여야할 것이다. 일전 서해안 연평도 해역에서 있었던 북한경비정과의 교전은 전쟁에 대한 가능성과 두려움을 다시 한번 사무치게 했다. 주부로 아이들의 엄마로 살던 나에게 통일, 전쟁, 평화 등의 단어는 일견 너무 무거워보였지만 서해안의 총성에 대한 보도를 보면서 우리 민족의 통일에 대한 염원과, 민족의 평화에 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그 동안 북한의 굶주린 동포들을 위해 식량을 보내고 소를 보내고 요즘은 그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비료를 포함한 많은 지원을 하고있다. 그러나 북한은 호시탐탐 평화를 깨뜨리려고 교란작전을 펴고 있다. 이번 북한 경비정 편대와 꽃게잡이 어선의 남방 한계선 월선은 외면적으로는 꽃게라도 잡아서 외화벌이와 식량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하려는 것으로 불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문제의 해역을 분쟁지역화하고 남방한계선을 무력화해 우리 내부를 교란시키고 미국과의 직접 협상을 노리는 등 다목적 책략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는 옛날이야기의 호랑이가 생각난다. 앞으로도 북한의 야비한 책략은 계속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풍요를 누리며 편안하게 살면서 방심할 때 제2의 6.25라도 일어난다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려야 할 지 상상할 수 없다. 우리 조상이 겪은 아픔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정신으로 맡은 바 소명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북의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나 혼자 살겠다고 사재기를 하기보다는 함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통일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이루는 과정이다. 더욱이 우리 민족은 단일 민족이 아니던가? 이의 실현을 위하여 더 이상 피 흘리는 불행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정전상태에서 북의 위협은 계속되고 있고 저들이 보유한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소식은 우리를 더욱더 긴장시킨다. 확고한 힘의 우위를 견지하지 않고는 평화통일의 보장이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의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먹는 문제를 만족 못하는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이쯤해서 우리는 북한을 무조건 불신하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의 미래를 막연히 기다리기보다는 북한을 돕는 우방으로서의 21세기를 정진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보다 나은 내일을 약속 받고 북한의 환경과 여건이 조성되어 한겨레의 일체감이 느껴졌을 때 통일도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이제 각자의 위치에서 아무리 작은 일이지만 맡은 바 일을 충실하게 해야 할 것이다. 현 생활이 힘들고 어렵지만 포기하지 말고 차근차근 생활해 나갈 때 분단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통일의 길은 멀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이 름
진실한 기쁨으로 편안한 사람. 부모님께서는 다른 의미로 지어 주셨겠지만 나는 내 이름을 이렇게 풀이한다. 누구나 부모님께서 신중하게 지어준 이름일진데 여자의 이름이 불려지기는 결혼 전까지인 것이 대부분이다. 결혼 후에는 누구의 아내에서 새댁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아무개 엄마로 불려지기 일쑤다. 이름과 함께 모든 생활이 시댁과 남편 그리고 아이들에게 묻히고 마는 것이다. 대문 앞에 문패, 주민등록상 호주나 세대주 이름, 집 등기, 하물며 어떤 행사를 축하 할 때도 남편 이름을 사용 하게 된다. 전업주부는 더욱 그러하다. 밥하고 빨래하고 남편과 아이들의 치닥거리로 집안의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니 어쩔 수 없다. 아이가 점차 자라면서 사회활동에 눈을 뜨게 되지만 주부의 이름이 공개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혹 불려진다 하더라도 본인이 더 어색할 뿐이다. 어린 시절 고향에 똥돌이라는 아명을 가진 아이가 있었다. 동네에서 손꼽히는 부잣집 삼대독자였다. 귀한 자식일수록 천하게 이름 붙여 질병 없이 건강하게 자라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어릴 때는 그런 대로 부를 만 했지만 아이가 성장할수?? 왠지 그 이름을 부르면 놀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는 커가면서 바른 생활을 하지 못했다. 물론 여러 가지 상황에 따른 이유가 있었겠지만 어쨌든 똥돌이라는 아명과 일치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을 보보면서, 아명 때문만은 아닐텐데 함부로 지어 부르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별명 하나 없이 성장한 나는 내 이름에 자부심을 갖기 위해 이렇게 풀이를 해본다. 편안한 安(안), 성씨 풀이해보면 여자(女)가 갓( )을 썼으니 사회활동을 하면 벼슬을 할 것이고. 다르게 표현하면 여자가 갓을 썼으니 건방질 것도 같고, 전업주부로 있다면 여자(女)가 집안( )에 있으니 참으로 편안한 모습을 상상한다. 진실한 允(윤) 기쁨 喜(희)로 편안한 사람이 누구든지 나를 생각하면 좋은 느낌으로 떠돌렸으면 하는 바램이다. 바로 내 이름인 것이다. 때론 흐트러진 모습으로 푸념도 하고 주부 사표를 내고 싶을 때가 있지만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 모습으로 더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잠시도 그 자리를 포기 하지 못하고 내 스스로가 그 생활에 안주하는지 모르겠다. 이름처럼 가족과 이웃에게 진실로 편안한 기쁨을 주기 위해 말이다. 어쩌면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안윤희라는 이름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우리 부부는 큰딸을 낳기 한달 전부터 국어사전을 찾아가며 이름을 지었었고, 둘째딸은 당연히 아들을 낳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딸아이의 이름을 생각하지도 않고 있다가 아이가 태어나서야 부랴부랴 이름을 지었다. 막내아들이 태어나자 남편은 돌림자를 써야 한다면서 시댁과 친정어른들에게 작명을 부탁했다. 어른은 평상시에 잘 알고 지내는 작명가에게 부탁하여 일주일만에 이름을 지어 주셨다. 집안에 아이가 태어나면 온 가족이 머리를 맞대고 이름짓기에 신경을 쓴다. 단순한 호칭의 수단이 아니라 명예와 인격성을 포함해 신중하게 말이다. 어떤 이들은 생명의 탄생과 함께 사주에 따라 짓기도 하고, 어떤 아이로 자라줄 것을 희망하는 부모의 바램을 담아 이름을 짓기도 한다. 요즘은 곱고 아름다운 글자를 사용하는 순 한글 이름을 지어 부르는 사람도 꽤 많다. 좋은 이름이란 부르기 쉽고 듣기 좋은 것이면 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름을 짓는 상황은 여러가지겠지만 근본적인 바람은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 제자리 찾기를 염원하는 것일 게다.
25년 전후
초등학교 동창회를 한다는 전갈이 왔다. 재빠르게 초등학교 졸업 사진첩을 펼쳐 보았다. 흑백사진첩에는 모두들 얌전한 모습을 하고 있다. 쑥스럽게 앉아있는 내 모습은 단발머리에 핑크빛 구슬이 달린 옷을 입고 있다. 그 시절에는 아주머니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당시의 내 어머니 나이가 되어 그 시절을 돌아보고 있다. 다들 어떻게 변해 있을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졌을 텐데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했느냐에 따라 친구들의 인생은 달라져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촌음을 아끼며 열심히 생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적당히 시간을 즐기며 생활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지만 자신의 능력이나 생활여건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시간은 흘러 육십 년대 후반의 개구쟁이들을 중년으로 만들었다. 옛것이 그리운 것은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일까. 어린 시절의 친구들이 몹시 보고싶다. 코 흘리며 내외했던 시절,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날 포크댄스를 배울 때면 의례히 조그마한 나무로 남학생의 손을 잡는 것을 대신했었고, 한낮 고무줄놀이에 목숨걸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이십오년, 자녀들이 웬만큼 성장하고 여유로운 시간이 생겨서인지 연어의 본능처럼 꿈틀거리는 향수는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모르고 망향가를 부르는 실향민처럼 그리움이 쌓였었다. 같은 추억을 안고 살았기에 똑같은 향수를 느꼈는지 이심전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대전에서 여덟 시간을 달려온 친구, 늦둥이를 출산하고 산후 조리 중인데도 와준 친구, 모두가 한곳에 모이니 자리가 왁자지껄하다. 그 중에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친구도 있고, 대덕연구단지에서 이름 값을 톡톡히 하는 박사친구도 있다. 옛 모습 그대로 성장한 친구들이 훌쩍 커 버린 자신의 덩치는 생각하지 않은 체 선생님 앞에서 재롱을 피고 있다. 이 모두가 허물없이 어린 시절을 함께 했기에 가능한 일이아닌가 생각된다. 공주병의 중증현상을 보이는 사촌자매가 있었다. 그들은 아래윗집에 살면서 쌍둥이처럼 똑같이 머리를 길게 땋아 깔끔하게 했고 늘 붙어 다녔다. 얼굴도 예뻤고 애교가 많았던 그 친구들은 학교에 손님이 오면 어린이 대사로 활약 했었다. 한 친구는 코흘리개 유치원생들을 돌보다 자모의 중매로 지금은 중령의 아내가 되어 현재는 방송리포터활동을 한다고 했다. 아무리 봐도 이십대 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깔끔한 외모는 여전하고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안경을 걸쳤다는 것이다. 또 다른 친구는 미인대회 출전해 입선하는 명예를 안은 탓으로 일찍 결혼을 해 지금은 사업가의 아내로 변신해 있었다. 사업에 관한 성공여부는 물을 수가 없었다. 둘은 아직도 궁에서 잠이 덜깬 듯 콧소리를 내며 친구들을 즐겁게 했다. 너무 심해서 밥을 못 먹겠다는 친구가 남 앞에서 저러는 애들이 집에 가면 두 얼굴을 가진다고 했지만, 집에서도 한결같지만 지금은 교양을 찾느라고 억제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구김 없는 친구의 모습이 좋아 보였다. 사촌자매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우리들은 배꼽을 움켜주며 나이를 잊는다. 그 동안 시간의 흐름이 이십오년인데 결코 세월을 느낄 수가 ?愎?. 코 흘리던 어린 시절과 성장한 모습을 연결해 보는 줄거움은 참으로 묘했다. 그 동안 잊고 지냈던 친구가 불쑥 손을 내밀 때 나의 존재를 새삼 의식하고 어린 시절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써본다. 초등학교시절 우리는 이십 여 년 후를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우리가 결혼할 쯤이면 밥하고 빨래하는 기계가 생길 것이고 로봇트라는 것이 모든 일을 처리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만을 했었다. 우리는 또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살아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어려웠던 우리의 어린 추억은 더욱더 그리움으로 남을 것이다. 만남을 위한 축배를 들었다. 나름대로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옛 모습 그대로 인 것이 마음을 편하게 했다. 몸은 중년인데 우리의 행동은 초등학생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남자의 아내로 지켜야할 품위도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의 교양도 없다. 중년의 나이에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것이 가슴 벅차다. 다들 한껏 멋을 부렸을 진데 한잔들 하고나니 더욱 진솔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세상이 다 변한다 해도 우리들의 어린 시절의 추억은 변할 수 없다. 그 시절 신혼 이였던 담임선생님께서는 사위를 얻은 노신사가 되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다. 체육시간에 급우들이 다투는 바람에 단체 벌을 받았었다. 교사 뒷동의 그늘진 얼음판 위에 주먹 쥐고 업드려 벌을 받았다. 벌을 받는 동안 주먹이 얼음 속으로 반이나 들어가는데도 힘든 것보다는 계단에 남겨진 옷 생각 뿐 이였다. 운동하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더러워 질까봐 벗어 둔 윗도리가 걱정이 되어서였다. 졸업 사진속의 핑크빛 구슬 달린 옷이 바로 그 옷이다. 벌을 다 받고 꽁꽁 얼어서 펴지지 않는 손을 물건 들 듯이 들고 뒤뚱대며 뛰어갔으나 그 옷은 보이지 않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지만 선생님이 무서워서 감히 말씀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간이 한 참 흐른 후 어머니는 그 옷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서랍장을 뒤지셨다. 한참을 찾아도 없자 세탁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 빨래 줄에 널어놓은 것을 누가 가져갔나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나는 고백할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 모처럼 장만해주신 옷을 잃어 버렸다는 죄책감보다 가장 아끼는 옷을 타인 때문에 잃어 버렸다는 분노 때문이였다. 군기에 가까운 단체 벌을 주기로 유명했던 담임 선생님, 무섭고 미웠지만 가장 많이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과는 이웃에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어머니의 안부를 묻는다. 그 엄했던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마음씨 좋은 노년으로 장성한 제자들이 앞에 있다는 것이 흐뭇한 듯 뿌듯한 눈길을 주고 계신다. 선생님께서는 자네들을 엄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이 자리가 서먹하지 않은 것이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하신다. 열정을 가지고 교육에 임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고 하시면서, 지금 그때처럼 아이들을 지도했다가는 큰일 난다고 쓴웃음을 지신다. 어린 시절 우리가 어떻게 성장할는지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앞으로 우리의 미래도 알 수 없다. 사는 형편이나 사회적 지위는 다를지라도 시간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문명의 발달로 모든 것이 빠르게 이루어져 여유의 시간이 많을 것 같지만 우리는 항상 시간에 쫓 기며살고 있다. 어린 코흘리개들이 중년이 되었다. 앞으로 이십 오년 후의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질까 환갑을 지난 나이, 돋보기를 쓰고 손주와 뒹구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난다. 가는 세월이야 어쩌겠는가, 먼 훗날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음을 기대해 볼 수 밖에……
주전골의 가을
주전골의 붉은 가을이 고개를 내밀었다. 한계령 넘어 첫 마을인 남설악 오색리에 자리잡은 주전골은 엷은 노랑으로 주황으로 때로는 수줍은 새악시처럼 붉게 물들어 도시의 시름을 안고 나타난 이들을 반기고 있다. 일상의 탈출만도 내겐 큰 기쁨일진데 주전골의 환영은 팡파르를 동반한 거대한 색깔 축제의 한마당이다. 맑게 흐르는 계곡은 투명함을 자랑이라도 하듯 산과 하늘을 담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낙엽은 산행하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들뜨게 한다. 인간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훼손하지만 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그렇게 우리를 반기고 있다. 인간들이 흘린 흔적들을 말없이 삼키면서 말이다. 도시의 규율 속에 자란 아이가 저만치 앞서 달리다 어미를 확인하고는 하지 말아라 안 된다의 부정을 떨쳐 버리듯 달리고 또 달린다. 거대한 바위 위에 쌓였던 세월이 우르르 떨어진다. 지난 세월을 보상이라도 받듯 마음껏 하늘을 감상했다. 하늘이 유독 파랗고. 햇빛도 거름종이에 걸러낸 듯 하얗게 내리쬔다. 주전골의 하늘은 한 폭의 수채화다. 맑은 계곡 물을 한줌 입안에 넣의 달콤한 임의 입술이 거기 있었다. 떨어지는 낙엽이 땅에 닿기 전에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말이 생각나 두 손을 펼쳐들고 낙엽 잡기에 몰두해 본다. 빛깔 고운 낙엽 몇 장을 덤으로 호주머니에 넣었다. 떨어진 낙엽들도 밑거름으로 내년 봄에 새싹을 틔우는데 일조할진데 또 죄를 짖는다. 만병통치약으로 불리는 오색약수터에 갈증을 채우기 위한 행렬이 길게 늘어져 있다. 오색약수는 이 주변에 다섯 가지 색깔의 꽃이 피는 나무가 있어 오색이라는 설과 다섯 가지 약수 맛이 난다고 해서 오색약수라고 불렀다고 한다. 탄산이 풍부해 사이다처럼 톡 쏘고 짜릿한 특이한 맛은 상상만 해도 기분이 아찔하리 만큼 좋다. 주전골은 모든 것이 투명하다. 언어공해도 산업공해도 피로도 없다. 눈부신 하늘을 가슴에 담고 낙엽을 모아 고운 옷을 기워 입어본다. 휴식 없이 흐르는 계곡에 가을이 걸렸다. 떨어지는 낙엽들은 먼저 떠난 임의 옷자락이라도 잡을 량으로 거침없이 따라 흐른다. 키보드 하나로 모든 지식을 얻는 정보사회에 익숙치 못한 무지의 부끄러움들이 낙엽 따라 계곡 속으로 사라진다. 버튼이나 센서가 없어도 사계절을 감지하는 자연이 내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산업사회 만년 조연인 내가 자연 속에서는 주연이 된다. 바람이 살짝 건드린 볼이 간지러워 두 손을 모으자 후루룩 사욕이 날아간다. 아무 욕심 없이 바람 부는 대로 낙엽 지는 대로 이곳에 안주하고 싶은 충동은, 흙을 바탕으로 한 자연에서 온 인간의 본능이라기보다는, 산업사회의 찌든 생활에 탈출을 꿈꾸는 망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청량한 바람소리, 산행하는 이들에게 밟히는 낙엽의 작은 비명 소리, 바위에 부딛치며 흐르는 계곡의 맑은 물소리에 귀 기울인다. 코끝에 묻어나는 가을 내음을 음미하려다가 치솟는 식욕을 느끼며 허기진 배에 가을의 풍요를 꾸역꾸역 채워 넣는다. 갑자기 포만감을 느끼자 회색도시에 남겨진 아이들이 그리워진다. 이른 아침 서둘러 나오는 바람에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이 이내 마음에 걸린다. 학교는 늦지 않았고 문단속은 정확하게 했는지 애써 떨쳐 버리려고 해도 꽁무니를 따라 다닌다.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기 위한 여행인데 빨리빨리를 재촉하며 일상의 때를 벗지 못하고 자신을 채찍질한다. 정화된 마음을 확인이라도 하듯 소리를 질러본다. 대답 없는 메아리에 귀기울이며 옆 사람을 의식하고 입안에서 맴돈 작은 볼륨들을 발견한다. 여행은 생활의 활력을 위하여 필요하다. 옛말에도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예쁜 자식 여행시키라는 말이 있다. 물론 많은 체험으로 지식과 견문을 넓히라는 이야기이겠지만 요즘과 같은 생활문화에서는 자연을 찾아 정서를 순화시키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경험과 지식을 위한 여행이 삶의 질을 높인다면 자연을 찾는 여행은 삶의 정서를 키우고 마음을 건강하게 할 것이다. 짜여진 규율에 매여서 흠집내기 쉬운 언어를 순화시키고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전체를 볼 수 있는 아량을 내게 준 주전골의 가을은 내 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살 찌울 것이다.
팔불출 & 팔불출
비가 그친 뒤의 새벽은 싱그럽다.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까지 상쾌하다. 새벽 여섯 시면 어김없이 깨어나는 난 남편이 깰까 살며시 현관문을 나선다. 그리고 아파트 앞의 농장을 사열한다. 농장이라고 해봤자 서너 평 남짓한 자투리 땅이 고작이다. 바람에 실려와 뿌리를 내린 치커리, 쑥갓, 고들빼기와 이름모를 풀들이 정겹게 인사를 한다. 한쪽 끝에 멀쑥하게 커버린 해바라기도 빗방울을 또르르 굴리며 관심을 끈다. 비가 온 후 촉촉히 젖은 대지와 풀잎마다 송알송알 맺혀있는 빗방울이 내 영혼을 비집고 자리를 튼다. 아침 햇살에 부딪히는 방울들이 찬란한 보석이 된다. 밤새도록 버금은 물기로 싱그럽게 다가오는 풀잎은 나의 희망이다. 이런 날 오후에 내리쬐는 햇빛은 나를 투명하게 만든다. 이렇듯 아름다운 전경을 남편은 모르는 체하고 잠만 잔다. 내게 소중한 이 모든 것들이 남편에겐 한갖 들풀 취급이다. 매사가 그렇다. 내가 최고의 가치를 두는 곳에는 관심이 없는 듯 하다. 물론 업무상 바쁜것이 이유겠지만 세 아이의 행사에 한 번도 참석한 적 없다. 사생대회, 운동회, 소풍, 학예회, 합창단 정기발표회, 걸스카웃 입단식 등에 막내녀석을 단속하면서 사진촬영을 하고 비디오를 찍다보면 은근히 화가 난다. 지친몸으로 돌아와 부랴부랴 편집해 보여줘도 제대로된 칭찬 한마디가 인색하다. 모처럼 갖은 애교로 아이들 행사장에 데려와도 “나 차에 가 있을께.”가 고작이다. 이런 남편은 내가 없으면 양말도 찾아 신지 못하는 와이프 보이다. 넥타이를 고르는 것이나, 양복 코디하는 것, 어느 한가지도 알아서 하는 것이 없다.지벵서 대우를 받아야 밖에 나가서 기를 편다는 친정어머니의 신조에 물든 내가 그렇게 길들였는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어느 신문에 실린 팔불출이 생각난다. 평생 직장으로 착각하고 장기근속하는 사람, 회사가 잘 되어야 나도 잘 된다는 믿음 속에 가정보다 회사에 충실한 사람, 마누라 맞벌이 시키지 않는 사람, 부업 없이 월급으로만 근근히 사는 사람, 달린 식구 많은 월급쟁이 꼭 내 남편을 두고 하는 말 같다. 10년 전 일이다. 둘째 아이를 낳고 산후 조리 중에 김치가 떨어졌었다. 산후 조리중에는 힘을 쓰는 일을 하면 안된다기에 마늘을 다듬어서 빻아 줄 것을 부탁했더니, “나 안 해봐서 못해.”하는 것이다. 화가 치밀었다. “누군 애를 낳아봐서 둘씩이나 낳는 줄 알아요.” 사는 것이 코미디의 연속이다. 하지만 난 이런 팔불출을 사랑한다. 항상 과묵하고, 책임이 강한 사람이다. 나의 살 비빔에 행복해 하고 뚝뚝한 성격으로 다정다감하지는 못하지만, 나의 작은 속삭임에 세상을 다 품은 줄 아는 사람이다. 조금만 아파도 갓난아이가 되어 버리고, 기분을 살피면서 준비한 깜짝 술상에 세상 고충 다 털어놓는 남편을 사랑한다. 때론 내 감정대로 살고 싶은 유혹도 느끼지만 남편에게 누가 될 일을 할 수 없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침이 늦었다. “양말 여기 있구요, 와이셔츠는 이것으로, 여보! 넥타이는 이게 어울리겠어요.” 표정 없는 남편 앞에 나는 너무도 부산하다. “엄마 나 머리 빗겨주세요. 학교 늦어요.” 두 딸이 성화다.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이 아침을 행복해 하는 나 또한 어쩔수 없는 구제불능의 팔불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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