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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天 無比 큰스님 염화실 인터넷 법문]
[如天 無比 큰스님]
반갑습니다.
2월 7일 화요일 염화실 방송 법회를 시작하겠습니다.
莫逐有緣 (막축유연) 勿住空忍 (물주공인)
여기서부터 할 차례입니다.
막축유연-유연을 쫓지 말라.
물주공인-공인에 머물지 말라.
여기서 有緣(유연)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있는 것은 인연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연자를 이렇게 붙인 것이고요, 공한 것은 드러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참을 忍자, 숨어있다는 의미에서 空忍(공인)으로 표시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도 쫓지 말고 공에도 머물지 말라. 말은 그런 뜻이죠.
그런데 이렇게 넉자로 나타내니까 함축이 아주 심합니다.
왜 유는 연이냐, 왜 공은 인이냐 쉽게 분석할 것이 아니죠.
간단히 말하면 모든 우리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모두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근거로 살지만 너무 그 있다는 것을 쫓아가지 말라. 또 불교적인 안목에서는 전부 공을 이야기 하고 있죠. 반야심경이 전부 공을 이야기한 것이고 반야사상이 공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 차원 달리 하는 것을 공의 사상, 공의 안목이다 그래요.
모든 있다는 것에서 한 차원 달리하면 공으로 되는데 그렇다고 공에도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흔히 조사스님의 법문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고 이야기를 하죠.
처음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것은 유입니다.
그 다음은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그건 공이죠.
아니라고 부정을 했으니까. 아닌 면도 있어요.
아닌 것은 깨달으신 분의 안목으로 보신 것이고, 깨달으신 안목을 우리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설명을 하고 있어서 그나마 우리는 짐작을 하고 있는데 모든 존재가 공인 입장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유에서 한 차원 올라가면 공의 입장에 다다르죠.
공의 입장이라고 해서 끝은 아니죠. 거기서 아까 선구를 소개해 드렸듯이 다시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를 넘어서면 산은 다만 산이고, 물은 다만 물이다. 이런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산봉우리가 있다고 한다면 바닥에 있다가 정상에 올라갔다가 다시 바닥으로 내려온 것.
긍정에서 대 부정을 거쳐 긍정으로 내려온 그런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유자에 연을 붙였느냐 하면은, 모든 있는 것은 인연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 뜻입니다. 무엇이든 인연에 의지하고 있고, 연기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란 거죠. 공성이 있다는 거죠.
있는 것을 불교에서 부정하는 이유가, 있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연기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건 물론 세월이 가서 우리가 알게 되죠. 사람도 세월이 가면 병들어 죽게 되고 ,모든 것이 오랜 세월을 거치게 되면 공무한 데로 돌아간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에 의해 압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세월에 의한 것이 아니고 현재 눈에 보이는 그대로 전부 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연과 공인이 둘이 아니고 하나예요. 연기로 인해, 있는 것이지만 공하고 공하면서도 연기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有緣이라고 했구요.
공인이라는 것은 참을 인자를 진리라고 표현을 많이 합니다.
왜 공을 참을 인자를 써서 표현하고 진리를 이렇게 표현 하는가 어릴 때 이해가 안 되었는데 유마경 어떤 소를 보다가 인자를 설명 했더라고요.
참는다는 것은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이죠. 좋은 감정이나 싫은 감정을 참으면 나타내지 않는 것이죠. 몸이 아파도 참고 나타내지 않으면 안보이죠. 그래서 참을 인자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이니 진리니 법이니 말을 하면서도 눈으로 확인하거나 귀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없는 것도 아니죠.
공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게 모든 존재에 스며있죠. 스며있다고 하니까 공이 아니고 유인 것처럼 설명이 되지만, 말을 하다보면 한계가 있어 자가당착에 빠지고 모순에 걸리게 되는데, 공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空忍이라고 그래요.
유연과 공인이라는 말은 의미심장하고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는 모든 것이 연기에 의해 유한 것이고 공은 숨어 있는 것이고 나타나지 않는 것이고 ,찾을 수 없지만, 공이라고 하는 것, 공의 이치가 분명히 존재하기에 공인, 인자를 쓰는 것입니다.
무생법인 할 때도 이 인자를 쓰고요, 참을 인자를 쓰는 불교용어가 꽤 있습니다. 이 인자의 의미는 숨어서 나타나지 아니하나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것, 항상 아프지만 아프다 아프다 하지 아니하면 모르지 않습니까? 미워하고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구요.
공성도 숨어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유의 속성은 연기고 공의 속성은 숨어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유연도 쫓지 말고, 공에도 머물지 말라.
불교에서 유에서 한 단계 눈을 높이면 공을 이야기하게 되는 데 그렇다고 공에 머물러서는 안 되죠.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도리가 아주 뛰어나고 우수한 안목이라고 해서 공에 집착하는 것도 큰 병이다. 마치 소금이 음식의 맛을 낸다고 해서 그냥 소금을 한 숟가락 푹 떠먹으면 맛이 나겠습니까? 공에 대한 인식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죠. 공에 빠져버리고 머물러 버리면 소금이 음식 맛을 낸다고 한 숟가락 덥석 먹는 것과 같다는 표현이 있어요.
이렇게 치우치지 아니하면 유와 공이 하나가 되죠. 유도 쫓지 않고 공에도 머물지 않는다면 유도 수용하고 공도 수용하는 경우가 됩니다.
내가 유를 쓰려면 유를 쓰고 공을 쓰려면 공을 쓰는, 유와 공에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가 됩니다. 있고 없음에 자유자재가 됩니다.
이것은 꼭 불교적인 교리뿐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많이 적용될 수가 있죠.
이것이 자유자재하게 같이 수용되어 버리면 그것을 일러 유도 공도 한가지라고 할 수밖에 없죠. 두 가지가 아니죠. 어디에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중도적인 입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종을 바르게 지닌다. 일종평회하면- 품을 회자입니다.
일종으로 바르게 활용한다는 이야기죠.
항상 유 아니면 공이죠, 항상 여기서 걸려있죠. 간택, 증애, 순역, 위순, 취사니 , 여기서는 공과 유의 관계죠.
어디에도 우리가 머물지 아니하고 자유자재로 수용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일종인데, 공과 유를 한가지로 바르게 가진다면, 유라고 하는데 따르는 문제도, 공이라고 하는데 따르는 문제도 다 사라져버려서 저절로 없어진다는 이야깁니다.
민연자진 - 사라져서 저절로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일상생활에 이끌어 생각한다면, 뭐든지 있는데 대한 고집 아니면 병, 없는데 대한 고집 아니면 병입니다. 거기에 걸리지 아니하고 잘 수용해야 합니다. 그것을 쌍차쌍조, 차조 동시 이런 표현을 해요. 그건 더 어려운 말이고 일상생활에 무상하다 영원하다는 말을 하는데, 무상하다는 공하다 영원하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있다,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듯이 그렇게 있는 게 아니예요. 공하다 하더라도 텅 비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있으면서 공하고 공하면서 있는 것, 모든 것이 그런 원칙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존재 원리이고 중도라고 하는데, 중도 원리에 의해 존재한다.
우리 마음, 감정, 육신, 명예, 부, 재산, 사람도 일체가 그렇게 존재합니다. 명예도 인연에 의해서 있는데 명예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 있는 것에 너무 집착을 하면 쫓게 되고 또 명예에 따른 책임이 있으면서도 공하다 해서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그것도 잘못된 것이죠. 이것을 백방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제대로 원융무애하게 된 것을 일종이라고 하죠. 한가지가 되었다.
止動歸止 (지동귀지) 止更彌動 ( 지갱미동) :공한 것을 그쳐서 그친 데로 돌아가려 하면, 그치고 있는 것이 다시 더 동하느니라.
어제도 도로염정을 설명하면서 ,우리 마음은 움직이게 되어있고 흐르게 되어있고 변화 무상 한 것입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도 말씀 드렸는데 우리 마음이 한군데 가만히 있지 않고 동하는 거예요.
동하는 것을 그치게 하는거죠. 그야말로 도로염정이죠.
움직이는 것을 그쳐서 그치는 데로 돌아가면, 생각이 고요한 것이 공부의 좋은 경지라고 생각해서 자꾸 그것을 향해서 나아가면, 그 노력이 오히려 그치고 있는 것을 더욱 움직이게 된다는 이야깁니다.
이 마음의 이치를 알고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가 물론 이런 이치를 알기 위해 참선도 하고 기도도 하고 경도 보고 합니다만, 전에 봉암사 선방에 같이 살던 스님이 한 분 있었는데 아주 열심히 사시고 보살심이 아주 강했습니다.
송광사 출신 스님인데, 그럴 수 없는 보살심으로 살고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남은 음식이 있으면 변한 음식을 버려야하는데 혼자 몇날 며칠을 끓여서 먹고, 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때도 열심히 정진을 하고 살아요. 송광사 문수전에도 함께 살았는데 , 이 스님은 워낙 정진에 열중한 나머지 그쳐야 되는 줄로만 알고 열심히 참선을 하는데도 그쳐지지 않으니까 얼마나 답답하고 울화통이 터지는 지, 어느날 관음전에서 -관음전 부전을 보면서 눈을 좀 떴던 그런 곳이기도 한데- 이 스님이 법당에 앉아 법당 마루에 머리를 쾅쾅 박고 있어요. 피가 터져 흥건한데도 모르고 머리를 부딪치고 있어요.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화두가 안 된다고 도저히 망상이 끓어서 어떻게 할 길이 없다고 그러면서 법당 바닥에 머리를 박아서 피가 철철 나는 애절하고 처절한 그런 모습을 봤습니다. 열심히 정진하고 있을때 한 수좌가 그렇게 몸부림 치는 모습을 볼때 아주 마음이 안타깝고, 그때는 내가 어떻게 해줄 수도 없고, 마음을 움직이게 할 정도로 말은 못했지만 평생 잊지를 못합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라서 안됐지만 그렇게 몇 년을 지난 후에 이상하게 돌아가서 지금도 간혹 나에게 찾아옵니다. 잘 아는 사이인데 우리 마음이 그렇게 가만히 있게 되어 있지 않아요.
움직이는 것이 마음의 본령입니다. 누가 붙잡아 매려고 해도 붙잡아 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붙잡아 매려고 하고 그치게 하려니까, 그치고 있던 것도 움직이는 것으로 돌아간다는 것, 확철히 깨달은 분 아니면 이렇게 말 못합니다.
움직이고 그치는 것, 이것도 유와 공의 입장이죠.우리 마음의 이러한 문제도 우리가 심신명을 통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죠.
唯滯兩邊 (유체양변) 寧知一種 (영지일종)
우리 마음이 움직이는 면과 그치고 있는 면, 이것은 움직이는 것은 그 나름대로 훌륭한 면이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목석이 되고,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화두 드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가 되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보살님이 화두 참선을 하는데 남편이 퇴근을 해도 나가서 맞이할 줄 모르고 자기 방에 앉아서 참선만 하고 있었답니다. 이게 마음이 안 움직여서 그런지, 몸이 안 움직여서 그런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쳐서 고요하게 되면 그건 그대로 좋은 거고 어디에도 걸리면 안 됩니다. 그치면 그친 대로, 움직이면 움직이는 대로 좋은 것입니다.
양변에 취하지 않아야 하는데, 우리는 기어이 움직이는 것을 그쳐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움직이는 마음의 공능도 모르고 그치는 것의 마음의 뛰어남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치고 움직이는 마음의 좋은 점을 모르고 체해있게 된다.
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과 그치는 것이 한가지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다.
세속적인 논리 기준으로 불교를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되죠. 불교는 불교만의 논리가 있습니다.
세속의 언어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모순이 많죠.
깨달은 분들의 가르침을 세속적인 언어로 이야기하려도 보니 우리가 못듣던 이야기가 되는거죠. 그치는 것이 공한 것이고 공한 것이 그치는 것이다. 이것이 양변에 체하지 않는거죠.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알 때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되는 것이죠.
유와공이 한가지다. 그런 공능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찌 한가지라는 것을 알겠는가.
한가지 라는 사실을 통하지 못하면 一種不通 (일종불통)하면 兩處失功 (양처실공) 이라 ,그 두 곳에서 모두 어떤 공능을 잃어버린다.
남편은 남편의 장점이 있고 아내는 아내의 장점이 있고, 오른팔과 왼팔도 각가 그 나름의 장점이 있습니다. 오른팔이 활동을 많이 한다고 오른팔만 장하다고 하면 맞지도 않는 이야기죠. 다 그 나름의 공능이 있습니다.
유도 무도 그 나름의 공능이 있습니다. 첫 시간에 이야기 했죠.
쌀과 겨 모두가 그 나름대로 중요합니다. 그 중 하나를 부정하면 아예 쌀이 생기지 않습니다.
쌀이나 겨, 모두 둘이면서 하나인 이치, 현지죠. 현묘한 뜻을 잘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통달하지 못하면 두 가지가 갖고 있는 공능을 다 잃어버린다.
남편만 돈 벌어온다고 큰소리치고 아내는 살림 산다고 큰소리 못 치게 하고 윽박지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각자의 공능이 있죠, 서로가 살려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양쪽의 공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양처실공이 되는 거죠. 혼자 잘해봐라, 하고 사람을 무시하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 와도 공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사실은 부부가 하나, 남녀가 하나, 좌우가 하나, 있고 없고가 하나라는 사실을 통달해야 된다는 이야기죠.
대단한 가르침이죠. 어떻게 이 짧은 글 속에 그렇게 함축 시켜서 담고 있는지, 이 신심명은 보면 볼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그 속에 담고 있는 뜻이 대단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스님은 성우 스님은 숨어서 살지만, 평생 신심명으로 수행을 하셨고, 신심명으로 도를 통했어요.
늘 사경을 했습니다. 당신이 읽어 녹음을 해서 녹음 테잎을 들으면서 자기가 쓰고 외우고, 수백만 번을 쓰고 외우는 그런 스님을 내가 알아요. 그렇게 도를 이루신 스님이 있는데, 보면 볼수록 그렇게 할만해요.
말이 난 김에 백번씩 쓸 각오를 하라고 했는데 잘 쓰시고 있습니까?
일종불통하면 양처실공이라, 양쪽다 뛰어난 장점이 있고 공능이 있는데, 어떻습니까?
살림 좀 잘 산다고 살림 사는 걸로 유세를 하면 그 빛이 나겠습니까?
자기를 내세운다는 것은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일종이라면, 두사람이 한가지라면, 어느 한쪽만 내세울 수도 없는 것이고 무시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양쪽이 다 살아나는 것입니다.
누구의 역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연들이 전부 빛나는 존재들이고 그 빛나는 공능들을 우리가 유심히 살펴서 찾지를 못해서 그렇지 사실 다 장점을 가지고 있죠.
결국 그래서 한가지라는 사실, 그게 바로 중도죠.
그걸 모르면, 아무리 어느 한쪽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그 공능을 잃어버리게 된다.
일종불통이면 양처실공이라, 여기까지 하고 다시 정리해서 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강원에서는 이렇게 읽으면서 해석을 마음껏 하고 물론 예습을 많이 해오는 경우고, 아니면 글자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해야겠죠.
막축 유연하고 물주 공인하라. 유도 쫓지 말고 공에도 머물지 말라.
일종평회하면 민연 자진이라. 유와 공을 한가지로 바르게 지니면 사라져서 유의 문제 공의 문제가 다 사라지리라.
지동 귀지면 지갱 미동 이라. 움직이는 것을 그쳐서 그친 데로 돌아가면 그치고 있던 것이 다시 동하게 된다.
유체양변 영지일종 오직 양변에 체한 것이라 어찌 한가지라고 하는 사실을 알리요.
한가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양처에서 그 공능을 잃어버린다는 말입니다.
오늘 강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정리:행욱심)
莫逐有緣 (막축유연) 勿住空忍 (물주공인).. 유도 쫓지 말고 공에도 머물지 말라...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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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들었읍니다 감사합니다_()()()_
감사 감사합니다.
진실로 감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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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고맙습니다. _()()()_
나무아미타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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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좋은 법문 고맙습니다. 스님, 늘 건강하십시요! _ () () () _
고맙습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_()()()_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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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