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자신의 소개부터 해 주시겠습니까?'
라는 말을 들으면 아마도 당신의 머릿속은 영화의 엔딩화면
처럼 바뀔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처럼 까만 화면에 흰색
의 글씨이던지, 아니면 당신이 평소에 머릿속의 바탕화면
으로 정해놓은 색다른 배경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건,
그렇게 바뀐 화면에는 영화 창작의 작업에 기여했던 사람들
의 이름이 죽 올라가는 식으로 다음의 항목들이 개인에게
맞는 답변을 달고 아래에서 위로 흘러갈 것이다. 이름, 생
년월일, 주소, 전화번호, 직업...... 자기소개의 필수 항
목들은 언제나 비슷하다.
그녀 또한 흔한 항목들로 자신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그
렇게 하는 것이 자신을 상대방에게 알리는 방법 중 가장 효
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그녀의 자기소개를 듣
는 상대방은 그녀가 이지은이라고 불리며, 30살 미혼으로
서울의 강북에 있는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고 있고, 영화
에 관계된 글을 쓰는 것을 직업으로 갖고 있다는 것을 알
게 된다. 만약 첫인사 뒤에도 이런저런 일로 그녀를 만나
는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날 저녁, 그녀와 함께 그녀
의 단골 포장마차 한 쪽에 구겨져 앉아 그녀에 관계된 좀
더 자세한 것들을 알게 될 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녀는 조
금쯤 술에 취해 대학 졸업 즈음해서 지방 신문의 신춘문예
에 당선될 당시의 자신의 꿈에 대해 열변을 토할 지도 모른
다.
월요일 아침, 일주일을 시작하는 아침 햇살은 초봄의 찬
기운을 막기 위해 꼭꼭 닫혀 있는 유리창의 반지르르한 유
리 알갱이 속을 헤집고 들어와 온 집안을 가득 채운다. 새
벽이 되어서야 잠을 청했던, 피곤에 절은 얼굴을 빛이 툭
툭 건드리는 것을 느끼고 눈을 뜨는 것은 오전 10시. 그녀
의 직업은 특별한 출퇴근 시간을 요구하지 않아 마냥 여유
롭다. 요란스럽게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아, 태선이야? 백수라 그런지 시두때두 없
이 전화질이구나. 보나마나 심심해서 전화한거지? 일해
야 하는 사람 꼬실려구 전화하는게 눈에 선하다, 선해"
그녀는 눈만 뜨고 손을 뻗어 전화를 받다가 벌떡 일어나
앉는다. 우아아 하품 한 번 하고 기지개를 켠다.
"근데 무슨 놈의 백수가 아침부터 전화질이야. 너 원래
이 시간이면 한밤중이잖아. 너네 엄마는 너 구박하는
거 포기하셨대든? 하하. 요즘은 시집이나 가라고 하신
단말이지? 하긴 사람들이 그러더라. 여자나이 30넘으
면 똥값이라나...... 슬프지...... 여자가 시집 안
가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기나 하구. 야, 나 한창때 장
래 희망이 우아한 싱글이었잖냐......무슨 얼어죽을 놈
의...... 싱글은 무슨 싱글이야. 주변에서 자꾸 애
인 없냐구 보채는게 지겹다, 야. 일이라구 같잖은거 붙잡
구 아직두 용돈타 쓰는 신세두 서글프구. 글 쓴답시
구 혼자 산다구 폼잡구 있는 것두 힘 빠지구. 에구구
참, 진짜 뭔 일 있는거야? 이 시간에......뭐, 동생이 깨
웠어? 뭐? 무슨 책? 아하, 우리 1학년 때 현대 시 강
독 교재로 썼던 책 말이지? 제목이...... 아, 우
리 시의 이해였지, 아마. 그걸 왜? 니 동생이 참고 도서랍
시고 찾아야 한다고 깨웠다 이 말이군...... 교재두
아니구 참고도서인데 그렇게 기를 쓰고 찾다니. 근데
니 동생이...... 국문학과? 나 참, 솔직히 거기 명문두
아니잖어....... 거 졸업하구 뭐 하냐? 배 곪는 과로
유명한데 아냐?...... 하긴 니가 그 증인이라고? 후후훗"
그녀는 오른쪽 어깨와 턱 사이에 무선전화기를 끼우고 책
상 앞으로 가서 익숙한 동작으로 다리를 꼬고 앉았다. 길
고 말라 툭툭 튀어나온 뼈마디가 안쓰러운 다섯 손가락들
을 쭉 펴서 노트북을 열고 스위치를 켠다. 띠띠
디....... 띠...... 뚜...... 익숙한 컴퓨터 부팅소리
가 들린 후, 한글 프로그램을 열고 어제 쓰다만 글을 눈으
로 훑는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태선의 목소리에 응응
대꾸는 하지만 머릿속은 상관없는 생각들로 가득하다.
미래 시대, 음울한 화면, 컴퓨터 그래픽으로 감쪽같이 표
현한 건조한 질감, 컴퓨터로 연결된 게임 속에서 살아가
는 사람들, 게임 속 숨겨진 스테이지로 나가자 주인공이
마주치는 가상현실은 총천연색으로 가득한 실제의 미국 거
리, 그곳을 헤매는 주인공의 이야기......
일본의 유명한 애니메이션 감독이 만든 영화를 보고 그녀
는 열심히 대학 도서관에 들어가 철학책들을 뒤졌다. 가
상 현실과 실제의 현실, 그곳을 오가며 자신을 확인하는
주인공, 무엇이 실제이고, 가상인가...... 그녀는 영화에
서 감독이 뿌려놓은 자아의 발견과 완성, 우리네 삶의 실
체에 대해 묻는 속삭임을 보고는 철학 이론을 끌어내어 연
결시켰다. 그녀가 신춘문예 영화평론에서 좋은 평가를 받
았던 것처럼, 그녀는 영화 속에 숨에 있던 철학적 질문을
낚시 바늘로 꾀어내고, 철학과 영화를 촘촘하게 연결시켜
그물을 짜서는, 유능한 어부가 그물을 바다의 어획량 많
은 곳에 뿌리듯 글의 처음 중간 끝을 매끈하게 배치시켜 평
론을 완성했다.
그리고 그것을 써 오라 했던 잡지사의 기자와 마주앉았
다. 태선이 언제인가 자신의 후배라고 말하던, 30이 채 안
된 남자는 에에, 에, 에헴 이라는 세 단어를 번갈아가며
말 앞에 붙인후에 혀를 내밀어 아래 입술을 축인 후 말을
시작하곤 했다. 에에 선생님의 글을 좀 어렵네요, 에- 사
람들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에-헴, 우리는 늘 사람들이 이해하기 좋도록, 먹기좋은 당
근을 준다 말입니다. 에-, 선생님의 평론같은 글은 평론가
들이 좋아할 테지만, 또, 뭐, 그게 영화를 제대로 보는 거
겠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그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이 영화의 여주인공이랑 무슨 일이 있
었대더라, 하는 이야기를 쓰면 돼요. 에--- 에! 명색이 영
화잡지 아니냐고요? 뭐, 영화전문 잡지가 듣기 좋지 않습
니까? 그럼 영화 가십 전문 잡지라 쓸까요? 사람들은 이
잡지가 영화의 심심풀이 땅콩 같은 잡다한 이야기들로 채워
진 것을 알지만, 이래라 저래라 항의하는 것 없이 영화전
문잡지 '위크씨네'를 주세요 하는 걸요. 에헴, 선생님처
럼 이 잡지를 정말로 영화 전문 잡지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다 붙잡고 일일이 가르쳐 주다간 끝도 없다구요......
그녀는 노트북 모니터로 떠오른 글을 지긋이 노려본다.
자신이 지난 일주일 간 새벽까지 써 내려간 영화 평론이
다. 입 앞의 무선 전화기 끝부분을 잠시 손바닥으로 꽉 막
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해본다. 무지막지하게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 이 썩을 놈의 세상아-!" 글
쎄, 사람들은 어쩌면 다 이렇게 생각하는 주제에 입다물
고 가만히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계속 대꾸 없는 그녀에
게 태선이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다 듣구 있었어. 되게 뭐라 하네. 영화 보러 가재며?
어서 만나? 응응...... 지하철...... 그래, 먹골역이라
구? 먹골이라...... 첨 들어봐. 그나저나 역 이름은 누
가 짓는거야? 가끔 보면 이상한 역 이름 많던데......"
태선의 말에는 잰 발이 달려서 맨 마지막 말의 마침점을
향해 다다다다 달려 나간다. 태선의 빠른 말들을 부지런
히 주워 들으면서, '거 참 재밌다' 라고 그녀는 생각한
다. 역 이름이 얼마나 비싼건 줄 아느냐...... 역 이름
하나 바꿀려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든다더라. 얼만지는 기
억이 안 나는데...... 듣고 나니 대충 숙녀 정장을 10벌
넘게 제대루 장만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다. 뭐에 그리
많이 드는고 하니, 역 이름 바뀐 것을 사람들한테 알려줘
야 하니까 표지판이랑 뭐 그런거 바꾸는데 그렇데 든다더
라. 그러니까 이상하다고 궁시렁 대지말고 역 이름이나
잘 알아둬라. 태선의 말은 타박으로 시작하여 잔소리로 끝
났다.
전화를 끊고 그녀는 태선이 말한 먹골역으로 가기전에,
책상에서 일어나 커피를 한 잔 타 마신다. 창가로 이동해
서 아직도 켜져 있는 노트북 화면을 멀리서 계속 바라보다
곧 지쳐서는 시선을 돌려본다. 커텐이 젖혀진 창문으로 오
피스텔 아래의 사거리 건널목이 보인다. 개미떼처럼 오글
오글 횡단보도 끝과 끝에 있는 인도에 몰려있는 머리통들
이 신호가 바뀌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녀는 정지화
면이 갑자기 움직이면 놀라는 것처럼 멍하니 있다 신호등
이 파란불로 빛나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는
신호등을 멍청히 바라보다 머리를 갸웃거린다. '아무리 봐
도 초록색인데 파란불이라 한단 말이지' 그녀는 다 식은
커피가 든 커피잔을 들고 몇 번 더 머리를 갸웃거리다 곧
그것도 그만둔다.
'나만 초록색이라는 걸 아는 걸 아닐테지. 다 알면서도
조용히 하는 건데 떠들 필요는 없지 않겠어? 뭐, 모르지.
어쩌면 나라에서 사람들의 생각없는 행동들을 바로잡기 위
해 온 나라안의 신호등에 -파란불이 아니라, 초록불입니
다.- 하는 안내문을 붙이면 나아질까? 그렇게 되면 위크씨
네의 그 놈한테 서점에다 -이 잡지는 영화 가십 잡지입니
다.- 라고 써 붙이라 해 볼까? 그러면....... 그 말더듬
이는 분명히 지하철 역 이름 바꾸는데 얼마나 드는 지 아느
냐? 그런 식의 낭비를 할 수는 없다! 고 제법 똑똑한 말투
로 이야기할지도 몰라.......'
그녀는 시계를 흘끗 보고 서둘러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다. 태선의 잔소리는 무섭다. 다 마신 커피잔을 씽크대에
올려놓고 대충 침대를 정리한 후 옷을 입고서 어깨에 닿는
머리채를 틀어올려 핀으로 고정시키고 나서야, 노트북 앞
으로 간다. 허리를 약간 굽히고 키보드를 치기 시작한다.
"신호등은 초록색인데, 왜 파란불이라 할까? 잘 모르지
만, 난 초록불이라고 박박 우길테다. 사실 내가 맞는 거니
까."
그녀는 길고 마른 손가락으로 가볍게 마우스를 조작해서
자신이 쓴 평론을 C드라이브에 저장시켜 놓는다. 다음에
는 좀더 제대로 된 자리가 나오겠지. 그녀는 태선과 약속
한 장소로 가기 위해 서두른다. 책상 위에 놓인 탁상 달력
에 써 있는 1시간 뒤의 위크씨네 기자와의 약속은 애써 무
시하고 발걸음도 가볍게 집을 나서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