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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끼내와 감나무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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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주골 역사 더듬기 스크랩 동구리 성터
자운영 추천 0 조회 16 10.02.25 14: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상조도의 동구리 성터

所在地:鳥島面 洞九里 성재산


○沿革 및 事蹟

上鳥島 洞口里 後山인 성재산에 있는 테뫼형의 山城이다.

洞口里城址는 朝鮮 肅宗34年(1708)에 鳥島와 주면 5개 島嶼地域에 設鎭形便이 보고되는 것으로 미루어 이 때 築城된 것으로

추정된다. 鳥島 및 孟城(現 上鳥島)關防에 대해서는 <沃州誌>古蹟條에 "鳥島關防廢址 在鳥島 孟城關防廢址 在孟城島

蓋灣島主鄭芝龍 父祖以上 竊據海島 或稱海浪賦者 威脅劫掠侵 及中國我國 沿邊海島 古爲之設備或嚴者 今則廢矣"라 기사되어

그 設置時期와 理由를 설명하고 있다. 이 記錄에 등장하는 鄭芝龍이나 海浪賦은 明의 부활을 기도한 反淸勢力이 海洋을 무대로

海賊化한 것을 가르킨다. 그러나 실제 官撰記錄중에서 鳥島設鎭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肅宗代의 일이다. 즉 肅宗 32年(1706)

前 全羅監司 閔鎭遠의 狀啓에 "海島中 可合設鎭處……右水使邊是泰 以爲右道之露兒島 鳥島 長山島安昌島 岩泰島 臨淄島 臨淄島

等六處"라는 내용이 보이고 있다. 이것은 肅宗 10年91684) 全羅監司 李師命의 設鎭建議 이후 현지 확인과정의 논란이었는데,

이 건의의 결과 2년 뒤인 肅宗 34年(1708)에는 全羅右水使 崔弼鐘이 設鎭의 상황을 보고하는 것으로 미루어 1708年어간에

關防으로 완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鳥島關防址로 추정되는 下鳥島의 경우 新陸里 읍구마을이 옛 鎭터가 있었다고

傳言하나 現在로선 確認不能이며, 孟城關防址로 추정되는 上鳥島 孟城里 당도마을에는 마을 東方 500m지점에 「萬戶洞」

東軒터」「倉터라고 전하는 遺址 및 주변의 밭둑에 城築의 일부가 보이나 확실한 遺構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洞口里

城址에 대한 그간의 調査는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구릉상에 있는 石壘로 周圍가 약 150間인데 태반이 頹落하였다"고

보고 있다. <文化遺蹟總攬>은 "朝鮮 肅宗 33年(1707)에 土城을 쌓고 일부는 石壘로 270m정도를 쌓은 城으로 현재의 상태는

土城의 일부가 잔존하고 있고 西海守備의 요충지였으나 朝鮮末에 廢墟되었다"고 조사·보고되어 있다.


·遺蹟現況:洞口里는 左·右와 後面은 山들로 둘러쌓여 있고 前面은 바다와 臨해 있다. S字로 內灣된 前方의 海岸은 천연의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바다쪽에서는 洞口里쪽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현재 마을 앞에는 堤防이 축조되어 있어 염田과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城은 이 洞口里에서 율목으로 넘어가는 속칭 「성재」에서 산길을 따라 北便에 있는 「성재산」에 위치하고 있다.

 즉 城이 소재한 성재산은 동구마을 後山과 율목의 後山인 도리산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전체적인 산의 형세는 南急北緩으로

 北便으로 저평한 경사를 이루다가 城築이 끝나는 부분(北壁)에서 급격한 斷崖를 이룬다. 이 성재산에서는 주변의 섬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城築은 山의 7∼8부 능선을 따라 테뫼형으로 축조하였는데 西·北壁의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城壁은 도괴내지 흔적

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원래 성재산이 岩山인 까닭에도 일부 원인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일부 잔존하는 城築으로

보아 成은 內托法에 의해 구축하였고 일부는 岩壁이나 바위 위에 보완, 축성한 곳도 있다. 城壁은 판석형의 자연석으로 基底部를

 造築한 다음 그 위에 작은 石材로 쌓아 올렸다. 現在가장 양호한 城壁의 경우는 現高 1.5∼2m, 幅 1∼1.5m이다. 그 외 東·南壁은

 도괴된 상태다. 城의 총 연장길이는 400∼500m이다. 아울러 南壁에 해당하는 성재는 이 외에도 西便의 도리산과 東便의 윗모실

 後山인 大鵬山에 烽台가 있었다고 傳言하나 현재는 모두 인멸되어 現傳하지 않는다.

 


<參考文獻> 1) 李海濬, <鳥島地域의 歷史的 背景> 「島嶼文化」제2집, 木浦大學島嶼大文

 

 

 

(이하 장호암 선생님의 자료)

 

조도에도 산성(山城)이 있었다.

 

위치: 조도면 동구부락 뒷산.

 

 島嶼文化 (제2집 목포대학 도서문화연구소 1984.11 발행) 鳥島의 遺蹟 遺物 5, 기타 유적에

「한편 城址(성지)는 여미리 동구부락 뒷산에 있는데 조선 肅宗(숙종)32년(1707)에 土城을 쌓고 일부는 石壘(석루)로 270㎝ 정도 쌓은 성으로 西海守備

(서해수비) 要衝(요충)이었으나 조선말에 廢墟(폐허)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조도에 鎭(진)을 설치했다는 근거가 된다. (조도관방, 맹성관방)  현 상태는 石築이 일부 남아 上部幅(상부폭)이 60㎝ 높이가 80~95㎝로 산 주변

 300m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현 주민은 지금도 이 산을 “성(城)재” 혹은 “성고개“라 부르고 있으며 이 ”성재“에서 동남쪽 아래는 동구 부락이고, 서남쪽아래는 율목 부락이며 북쪽으로는

해안이 있는데 ”防直기미“라 부르니 兵船(병선)이 정박한곳이 아닌지?

 또 동구에서 여미로 가다가 돈되봉(통신공사)으로 올라다 보면 빈대기(가파른 언덕)가 있는데 이를”성안 빈대기“ 라 한다.  여기에도 성을 쌓은 흔적이 있고,

통신공사가 있는 돈되봉에는 봉수대가 있었으니 이곳에 진을 설치한 흔적들로 보인다.

 

  동구리 사는 박철주씨(76세)의 증언에 의하면 자기 어렸을 때는 성의 높이가 자기 키보다 높았는데 해방 후 소(牛) 보는 목동들이 올라가서 돌을 허물어 버려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한다.

 

  이분이 옛날 어르신들에게서 듣는바에 의하면 해적이 들어오면 산에서 돌을 구르고 방직기미의 모래를 가져다가 고춧가루와 석어서 동풍을 이용하여 날리면

 눈을 못 뜨고 도망 갔다한다. 또 방직기미 장불(풍치림)에서 人骨이 많이 나왔다는데(동구 박철주, 박신옥, 김장주 證言) 이는 외침이 많았던 것이 아닌지 앞으

로 연구할 자료이다 그리고 서거차 이장의 면지 자료에 의하면 서거차도도 이런 산성이 있는데 외침이 오면 산성으로 도망쳤다 하니 .옛날에는 섬섬마다 이러한

생활을 하지 않았는지 우리 조상들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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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07년 조도에 맹성관방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곳인지 의문(이곳과 아떠한 관계가 있는 지)이다.

  2003. 2. 17. 조도면 사무소 총무계장 박종득씨와 대한노인회 조도분회장 박종휴씨와 나 새사람이 동구부락 경로당회장 박철주씨(1928년생)를 모시고 이 城을

 확인 차 동구리 뒷산을 올랐다.

 

  현재는 산에 나무가 많이 자라서 그 전체는 보이지 않았으나 城 일부만 보였다. 박철주씨의 증언에 의하면 자기 어렸을 때는 성의 높이가 자기 키보다 높았는데

 해방 후 소(牛) 보는 목동들이 올라가서 돌을 허무러 버려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한다.

  이분이 옛날 어르신들에게서 듣는바에 의하면 해적이 들어오면 산에서 돌을 구르고 방직기미의 모래를 가져다가 고춧가루와 석어서 동풍을 이용하여 날이면

눈을 못 뜨고 도망 갔다한다.

  여기에서 네 사람은 그때 성을 쌓을 당시 상도주민은 얼마나 되었을까 생각하고 전 면민이 동원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산을 내려왔다.

 

  또 동구주민의 말을 들어보면 (2004. 7. 20. 제주 관광 여행 중 뻐스 내에서) 방죽기미 (방직기미) 모래사장에서 人骨(사람의 뼈)가 많이 나왔다는 이야기다.

지금은 모래가 어떤 영문인지 바다로 나가고 없으나 옛날에는 위 풀밭까지도 덮어 있었는데 여기에서 사람의 뼈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인골과 산성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어떤 싸움이 많이 있어서?

 또는 해적 혹은 倭寇가 침범하여 주민을 虐殺 하였던가? 등 의문이 많이 생긴다.

제보자 김 장 주(71세) 허 안 당 (80세) 박 신 옥(71세)

 

  2004. 7. 27. 화요일. 11;30 조도면사무소 앞에서 동구 박철주씨를 만나서 위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 人骨이 나온 곳을 불등이라 하는데 자기가 어렸을 적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 인데 옛날에 왜구가 처 들어오면 왜놈은 총 칼로 싸우고 조선사람은

활과 돌을 구르고 고춧가루를 모래를 섞어 뿌리고 싸?는데 왜놈이 고춧가루에 눈을 못 뜨고 도망을 첬다 한다,

 이 人骨은 그때 죽은 왜구의 屍體와 조선사람의 屍體라 한다. 지금 동구부락 여자들도 들어서 알고 있다.

 

 고려말 왜구의 창궐로 진도가 40년간 관아를 영암 시종면으로 옮길정도라면 우리조도는 어떠했겠는가.

 이런 연유로 산성까지 샀지 않았는지?

 

 

 요즘 듣는 바에 의하면 돈대봉에 주차장을 만들고 돈대봉 오르는 길을 확장한다 하니 이산성도 잘 보일 수 있도록하고 산성을 복원하였으면 한다.

조사자   장 호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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