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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강 - 行由品- 5
復兩日에 有一童子- 於碓坊過라가 唱誦其偈어늘 能이 一聞에 便知, 此偈가 未見本性하니 雖未蒙敎授나 早識大意일새니라 遂問童子曰, 誦者何偈오
童子曰, 爾這猲獠는 不知아 大師言, 世人이 生死事大하니 欲得傳付衣法이로다하시고 令門人으로 作偈來看하라 若悟大意면 卽付衣法하야 爲第六祖하리라하시니 神秀上座가 於南廊壁上에 書無相偈한지라 大師- 令人으로 皆誦此偈하라 依此偈修하면 免墮惡道라하시니라하거늘
慧能이 曰, 上人아 我此踏碓- 八個餘月이로되 未曾行到堂前하니 望, 上人은 引至偈前, 禮拜케하라 童子- 引至偈前하야 作禮하고 慧能曰, 慧能이 不識字하니 請上人은 爲讀하라하니 時에 有江州別駕하니 姓은 張이요 名은 日用이라 便高聲讀이어늘 能이 聞已하고 遂言하되 亦有一偈하니 望別駕는 爲書하라
別駕- 言汝亦作偈라하니 其事希有로다 慧能이 向別駕言, 欲學無上菩提인덴 不可輕於初學이니 下下人도 有上上智하고 上上人도 有沒意智라 若輕人인덴 卽有無量無邊罪니라 別駕- 言하되 汝但誦偈하라 吾爲汝書하리니 汝若得法커든 先須度吾어다 勿忘此言하라 慧能이 偈曰
菩提- 本無樹요 明鏡이 亦非臺라
本來 無一物이어니 何處에 惹塵埃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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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을 공부하는 것을 순서로 굳이 따지자면, 사실은 경전을 몇 권을 보고 經(경) 律(율) 論(논) 三藏(삼장)에 대한 대체적인 것을 이해를 하고,
한국불교나 동양불교의 어떤 특색인 대승불교에 관한 경전을 몇 가지를 봐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그 다음 대승불교가 최후에 禪(선)불교로 꽃을 피우게 된 과정을 생각 하면, 선불교에 대한 여러 가지 이해들. 그 가운데 한 분인 부처님이나, 그 시대로 봐서는 부처님이나 다를 바 없는 육조스님 같은 이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이, 꼭 절차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대강 절차가 되겠습니다.
사실은 불교의 근본정신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 당시의 말씀 속에 근본정신은 다 있지만, 그것이 차츰차츰 그 시대에 맞게 再(재)정리 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각색을 하고 발전을 거듭해 오게 되지요.
그런 것들이 근본불교. 또는 원시불교. 소승불교. 부파불교. 이런 것들로 佛滅(불멸) 300년까지 이야기를 하고, 그 다음에 부파불교시대가 지나고, 대승불교시대로 접어드는데 대승불교도, 초기대승불교. 중기대승불교. 후기대승불교. 이렇게 시기를 조금 더 많이 치지요.
여러 가지로 잡고 그리고 또 여러 나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또 티베트 같은 데는 密敎(밀교)로 발전하고, 중국 쪽으로는 禪佛敎(선불교)로 발전을 하고, 그렇게 되지요. 그러면서 우리나라나 일본, 역시 중국까지도 밀교도 포함되어 있고, 그 역사 속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불교의 교리들이 다 뒤 섞여 있지요.
소승불교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고, 대승불교도 포함되어 있고, 뭐 밀교. 그러면서 또 거기서 새로운 불교의 꽃을 피운 것이 “선불교다.” 이렇게 말 할 수가 있지요.
그런데 이 육조단경은 선불교의 역사에서 “육조”라고 하는 말이, 달마스님을 初祖(초조)라고 보고, 여섯 번째 代位(대위)에 오르는 스님이 혜능스님인데, 그 분의 가르침이 되겠지요.
달마스님 당시 때 보다는 좀 더 다듬어진 禪思想(선사상)이 좀 구체화 된, 그런 단계에 왔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육조스님 이 후에,
五家七宗(오가칠종)이 벌어지면서, 중국으로 치면 당나라. 송나라로 내려오고, 우리나라도 신라. 고려로 오면서 그야말로 선이 한껏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좋은 어록들이 많이 생겼어요.
그 좋은 어록들이 왜 생겼는가? 하니, 아주 훌륭한 聖者(성자)들.
훌륭한 道人(도인)들이 엄청 많이 나왔기 때문에 그 도인들의 가르침에 의해서 좋은 禪語錄(선어록)들이 많이 있게 되었는데, 그 선어록들을 우리가 三藏(삼장)에서 하나 더 보태가지고 四藏(사장). 그렇게 해요. 禪藏(선장)까지 합해서 사장...
본래는 불교의 삼장 하면, 불교의 모든 典籍(전적)들을 한꺼번에 일컫는 말인데, 그것은 선장이 생기기 이전 이야기이고, 선장이 또 상당한 量(량)이 되기 때문에, 선장까지 합해서 사장이라고 할 정도로...
사장이라는 말은 사전에도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엄연히 선에 대한 전적들이 상당한 량이 되고, 또 근래에 와서는 선불교를 어떤 불교. 대승불교보다도, 밀교보다도 더 선호하는 그런 경향이다 보니까, 선에 대한 전적들을 우리가 무시를 못 하지요.
그 가운데 이 육조단경은 상당이 두드러진 가르침이고, 특히 우리 한국불교는, “대한불교 조계종” 이라고 할 때는, 육조스님이 사셨던 조계산 이름을 따서, “우리도 육조스님의 정신을 계승한다.” 하는 그런 뜻에서, 한국불교도 禪宗(선종)을 표방 하면서, 조계종이라는 그런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요. 그래서 이것은 사실 조계종의 교과서라고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읽는 그런 경입니다.
사실은 어록이라고 해야 되는데, 경이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만치 격이 높기 때문에요. 또 육조스님, 혜능이라고 하는 인물이 부처님이나 다를 바 없는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에, 經(경)자를 붙이게 된 것이지요.
지금 行由品(행유품). 이 품이라고 하는 것은 요즘 우리말로 하면 章(장). 장에 해당되지요. 이 행유품 이라고 하는 것은, 육조 혜능대사가 걸어온 길. 어떻게 출가를 했고, 어떤 행자생활을 했고, 오조스님에게 어떤 법을 받게 되고, 그 법을 받게 된 과정들. 이런 이야기들, 行蹟(행적). 緣由(연유). 行狀(행장)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육조 혜능대사의 행장이다. 履歷(이력)이다. 자세한 행적을 적은 것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 行由(행유)라는 말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육조 혜능대사가 청년 시절에, 나무 팔러 갔다가 나무를 팔고 돌아오는 시간에,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거기서 마음이 열려 가지고, 그 금강경을 읽던 스님의 안내로 해서, 오조스님에게 가게 되지요. 그것이 출가입니다.
그것이 육조대사의 출가인데...
오조스님한테 가서 문답 끝에, 상당한 재능을 가진. 상당한 道(도)에 대한 안목을 가진 그런 인물이라고 하는 것을 오조스님이 알아보고는, 방앗간에 내려 보내서 대중들을 위해서 방아 찧는 일을 시켰지요.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오조대사가 “나는 늙었고, 이제 법을 전하고 열반에 들 때가 왔다. 그러니 여러분은 각자 깨달은 점이 있으면 그 깨달은 소감. 또는 오도송을 하나씩 지어오너라. 그래서 그것을 내가 감정 해보고, 법을 제대로 깨달았으면, 그 사람에게 이 대중들을 가르치는 제 육대조를 삼아서 법을 물려주고, 나는 이제 그만 열반에 들리라.” 하는 그런 말씀을 남겼어요.
그런데 그 때는 그 회상에 육조 혜능이 간지는 기껏해야 8개월 밖에 안 됐지요. 그런데 거기에 [교수사]라고 해서 다른 대중들을 가르치는 교수 일을 하는, 아주 뛰어난 [신수대사]라는 이가 있었어요.
신수대사는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고, 당연히 이 신수대사가 오조스님의 법을 받으리라고 하는, 거의 예정되다 시피 한 입장이었는데, ‘자기 깨달은 소감을 지어오라.’ 하니까 딴 사람들은 ‘신수대사가 있어서 우리는 지을 필요가 없다.’ 이렇게 된 것이지요. 대중들의 생각도 그렇고 해서 신수대사는 게송을 하나 지어서 바치게 되지요. 그것이: (5강)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요.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라.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하야,
勿使惹塵埃(물사야진애)로다.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나무고, 깨닫게 되는 나무가 되고, 마음은 밝은 거울을 받히는 받침대가 된다.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때때로 밝은 거울에 때가 끼지 않도록 열심히 닦고, 닦아서 때가 끼지 않도록 하라. 시시근불식하야, 물사야진애하라. 이렇게 게송을 하나 지어 올렸어요. 오도송 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불교에 대한 자기 견해입니다, 불교에 대한 자기 견해를 이렇게 짧은 글로 지어 올려도 그 속에, 다 그 사람의 깨달음의 세계. 또는 불교에 대한 안목이 다 나타나니까, 그래서 이렇게 지어 올렸는데, 이 게송을 보고는 오조스님이 크게 흡족해 하지를 않지요.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게송이다.” 그랬어요. 그래서 “다시 게송을 지어 바치라.”라고 내려 보냈습니다.
그래도 대중의 선망을 받는 신수대사는, 제대로 게송을 지어 올리지 못하고, 예배를 하고 나서 밖으로 나와서, 又經數日(우경수일)이라.(6강)→ 수일이 또 지났다. 여러 날 지났다. 새로운 게송을 지으려고 했는데, 게송을 짓지를 못하고,
心中이 恍惚(심중황홀)하야→ 마음속이 그냥...
황홀 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기분이 좋아서 황홀한 것이 아니고, 정신이 없어서, 어떻게 할 바를 몰라서, 황홀해하는 그런 기분이 돼가지고서,
神思不安(신사불안)이예요.→ 정신과 생각이 영 불안 해서, 꿈속을 헤매는 것 같이
行坐(행좌)가 不安(불안)이라.→ 앉으나 서나 도대체가 불락이에요.
편치가 않아요. 그런 시간을 며칠을 보내게 된 그런 상황에 이르렀어요.
復兩日(부양일)에→ 그리고 또 이틀이 지난 뒤에,
有一童子(유일동자)→ 한 동자가 있어서,
於碓坊過(어대방과)라→ 대방을 지나다가, 대방은 방앗간 이예요. 방앗간을 지나가는데,
唱誦其偈(창송기게)라→ 그 게송. 신수대사가 맨 처음 지은 신시보리수요. 심여명경대라고 하는 그 게송을 외우면서 기분 좋게 지나가고 있더라. 이겁니다.
그런데 8개월 동안 행자노릇을 하던 그 떠꺼머리총각 행자인 盧(노)행자. 혜능대사가 방앗간에서 대중을 위해서 방아를 찧고 있다가 그 게송을 듣고, 能(능)이 一聞(일문)에→ 한번 들음에
便知(갱지)라.→ 곧 알았다. 무엇을 알았는가 하니.
此偈(차게)가 未見本性(미견본성)하니→ 이 게송은 본성을 아직 못 봤다. 자기 자신의 본래의 성품을 아직 못 본 도리다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雖未蒙敎授(수미몽교수)나→ 이 혜능대사는 비록 교수를 입지는 못했으나, 오조스님. 그중에 제일 선지식이지요? 몇 백 명을 거느리고 있는 그 회중의 지도자인 오조스님의 교수를 입지는 못했으나, 한 번도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으나
早識大意(조식대의)니라→ 비록 한 번도 오조스님의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으나 벌써 대의는 파악하고 있었다.
대의라고 하는 것은 佛法大意(불법대의). 또는 本心(본심)의 내용을. 깊은 道理(도리)를 파악하고 있었어요.
본래 나무 팔러 갔다가, 거기서 어떤 스님이 금강경 읽는 道理(도리)를 듣고. 그 때 벌써 마음이 어느 정도 열렸으니까요. 그러니까 오조스님에게 크게 배운 바는 없지만 벌써 대의를 깨닫고 있었더라.
遂問童子曰(수문동자왈),→ 드디어 동자에게 묻기를,
誦者何偈(송자하게)오→ 외우는 것이 무슨 게송이냐?
童子曰(동자왈),→ 동자가 말하기를
爾這猲獠(이저갈료)는 不知(부지)아→ 그대 이 갈료. 촌놈은 모르는가? 아직도... 大師言(대사언),→ 우리 오조대사가 말하기를,
世人(세인)이→ 세상 사람이
生死事大(생사사대)하니→ 생사의 일이 크다. 불교에서는 무슨 일. 무슨 일이 크다고 해도, 크다는 말을 잘 안 쓰고 생사사대라.
생사 일. 죽는 일. 죽음의 문제. 이것을 제일 크다고 그래요. 그 외에는 뭐 “큰일 났다.” 소리를 아니 하지요. “큰일 났다.” 소리는 죽음이 앞에 닥쳐왔을 때, 그 때 딱 한 번 하는 거예요. 크다고...
다른 건 다 시시한 일로 그렇게 여깁니다. 시시한 일... 정말 시시한 일. 사소한 일로 그렇게 여기는데, 죽음의 문제만은 제일 큰 일로 여기지요.
부처님도 바로 이 죽음의 문제에 걸려 가지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를 하셨으니까요.
불교의 제1과제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세상 사람이 생사사가 크니,
欲得傳付衣法(욕득전부의법)→ 의법을 전해 받고자 하면, “전해 주고자한다.” 이런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건 무슨 말인가 하니, “세상 사람도 생사사가 크지만, 나도 곧 이제 열반에 들 처지다.” 그런 말이지요.
“그래서 내가 衣法(의법)을 전해 주려고 한다.” 옷은 법의 信標(신표). 믿음의 표시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옷이 딸려온 것이지요. 옷하고 발우하고요.
衣法(의법)이라고 이렇게 합해서 씁니다.
“의법을 전해 주려고 한다.”라고 하시고,
令門人(령문인)으로→ 문인들에게 명해 가로되,
作偈來看(작게내간)하라→ 게송을 지어 오너라. 게송을 지어 와서 나에게 보여라.
若悟大意(약오대의)면→ 만약에 대의를 깨달았을 것 같으면,
卽付衣法(즉부의법)하야→ 의법을 곧 전해 주겠다. 옷과 법을 전해 주겠다. 이건 뭐 옷은 전해줘도 법은 전해 주는 것이 아니지요. 본인이 깨닫고, 그 깨달은 것을 점검을 해서 제대로 깨달았으면, “그래 너는 법을 제대로 깨달았다.” 라고 認可(인가) 해주는 것이지요.
인가 해주는 것이지 전해 주는 건. 뭐 사물 전해 주듯이, 옷이나 발우떼 전해 주듯이 그렇게 전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爲第六祖(위제육조)→ “제육조를 삼는다.” 라고 했는데,
神秀上座(신수상좌)가 於南廊壁上(어남랑벽상)에→ 신수가, 회중에 교수사로 있던 제일가는 제자지요. 그 신수상좌가 어남랑벽상에. 남랑집 벽상에다가,
書無相偈(서무상게)라→ 그 게송 이름을 무상게. “모양 없는 게 다.”그랬어요. 무상게를 쓴지라,
大師-令人(대사-영인)으로→ 대사가. 오조대사지요. 사람들로 하여금 皆誦此偈(개송차게)하라→ “다 이 게송을 외우라.”
依此偈修(의차게수)하면→ 이 게송을 의지해서 수행할 것 같으면,
免墮惡道(면타악도)라→ “악도에 떨어질 것을 면한다.” 라고 했다 이겁니다. 그렇게 지금 절 전체가 요즘 이 사건이 벌어져서, 아주 떠들썩하고 굉장히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데, 이 오랑케. 저기 남쪽에서 온 갈료. 촌놈은 모르고 있느냐?
동자가 아주 신이 나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慧能(혜능)이 曰(왈),→ 혜능이 말하기를,
上人(상인)아→ 상인이시여, 상인은 동료나, 또는 밑의 사람을 약간 높여서 부를 때, 상인이라는 말을 잘 써요.
예를 들어서 동자는 어리잖아요? 어리지만 자기를 인도 해줘야할 사람이니까 상인이라고 그렇게 합니다.
제자도 상인이라고 그래요. 자기 제자를 그냥 제자라고 해서 무조건 제자라는 말 보다는 누구누구 상인. 이렇게 하면, 제자이면서 제자를 조금 존경해주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지요.
上人(상인)아 我此踏碓-八個餘月(아차답대-팔개여월)이로되→ 나는 여기에 방앗간에 있은지 8개월이다. 아직도 이 절의 구조가 어떻게 되었고, 또 남랑벽상이 어딘지, 또 조실스님은 어디 쯤에 계시는지 전혀 내가 알바가 없다. 그러니까 아직도 그 쪽에 가 본적도 없다. 수 백 명이 사는 절이니까 사실 그래요. 지금도 중국에는 절. 안내하는 사람을 잘 따라 다니지 않으면 길 잃어버려요. 그 사람들은 또 전부 건물을 다닥다닥 붙여서 지어놨어요. 그리고 공간이 그렇게 많지가 않아요. 그래서 빨리 들어갔다 나오려면 길을 잃어버리기가 일쑤예요. 몇 백 명씩 사는 이런 데서는 안내를 받아서 가야 되지요.
未曾行到堂前(미증행도당전)하니→ 당전에 일찍이 가 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望(망),→ 바라노니,
上人(상인)은 引至偈前(인지게전), 禮拜(예배)케하라→ 나를 이끌어 가지고, 그 게송이 붙여있는 그 앞에다가 예배할 수 있도록 그렇게 안내해줄 수 없소? 이렇게 한 것이지요. 그러니
童子-引至偈前(동자-인지게전)하야→ 동자가 신이 나서, 혜능 이라고 하는 행자를 인도를 해서, 그 게송이 붙여있는 그 곳에 인도해 이르러서 예배를 올리게 하고...
좋은 게송 앞에서는 예배를 올리거든요. 게송은 일종의 가르침. 법에 해당되니까요.
佛法僧(불법승) 三寶(삼보)할 때, 누구의 가르침이든지 간에 가르침도 하나의 귀의의 대상으로써 法寶(법보)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오조스님이 그 게송을 보고, 그림그릴 필요 없다. 여기다 變相圖(변상도):(제5강)를 그리려고 했었는데“변상도 그릴 필요 없다. 이 게송이 있으면 변상도 못지않은 훌륭한 예배의 대상이 된다.” 이런 말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글을 써 놓고도 예배하는 예들이 있습니다.
作禮(작례)하고 慧能曰(혜능왈),
慧能(혜능)이 不識字(불식자)하니→ 나는 글을 배우지 못했으니
請上人(청상인)은→ 청컨대 상인은
爲讀(위독)하라→ 나를 위해서 한 번 읽어주시오. 그랬다고요. 위독하라. 그러니까 동자가 읽지를 않고,
時(시)에 有江州別駕(유강주별가)하니→ 그 때 동자가 읽지를 않고, 강주땅에 있는 별가라고 하는 시원찮은 벼슬인가 봐요. 별가라고 하는 벼슬살이를 하는 사람이 마침 그 절에 있었는데, 그 사람은 姓(성)이 張(장)이고
名(명)은→ 이름은 日用(일용)이라.→ 장일용이라고 별가 벼슬을 하는 사람이 있다가, 안 그래도 읽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 하던 차에 한 번 읽어달라니까, 기분이 좋아서,
便高聲讀(편고성독)이어늘→ 곧 고성으로. 큰 소리로 읽거늘,
能(능)이 聞已(문기)하고 遂言(수언)하되→ 혜능이 딱 듣고 나서는 드디어 말하되,
亦有一偈(역유일게)하니→ 나도 게송이 하나있다. 이겁니다. 나도 게송 하나 써 붙일 수 있는데,
望別駕(망별가)는 爲書(위서)하라→ 바라건대 별가는 나를 위해서 좀 써 달라 이겁니다.
나는 글을 모르니까 못 쓴다.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 좀 써라. 그러니까
別駕-言汝亦作偈(별가-언여역작게)라→ 그 참, 그대가, 이 무식하고 글자도 모르고, 그리고 아주 촌놈. 나무나 팔다가 온 촌놈이 게송을 짓는다 하니, 그것참, 기가 막힌 일이다.
其事希有(기사희유)로다→ 그 일이 참 희유하다. 야, 그 희한한 일이다 이것이지요. 그러니까 형편없이 얕보는 것이지요.
慧能(혜능)이 向別駕言(향별가언)호대,→ 별가를 향해서 말하기를,
欲學無上菩提(욕학무상보리)인댄→ 보리를. 무상보리를 최상의 깨달음을 배우고자 할 진댄,
不可輕於初學(불가경어초학)이니→ 초학자를 가벼이 여기지 말라.
이 불교공부는 처음 들어왔다고 늦게 아는 것도 아니고, 먼저 들어왔다고 빨리 아는 것도 아니예요.
人有古今(인유고금)이언정. 사람에게 고금이 있을지언정,
不佛法遠近(불불법원근). 법에는 멀고 가까운 것이 없다. 그런 말이 수두룩 해요. 그래서 초심자라고 해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불법 도리입니다. 이 불법은 어떤 지식의 축적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러면서
下下人(하하인)도→ 아주 무지렁이. 형편없는 그런 賤人(천인)도
有上上智(유상상지)하고→ 상상지하고, 최상의 지혜가 있을 수 있고,
上上人(상상인)도→ 뭐 사회적으로 저 높은데 있는 그런 사람도,
有沒意智(유몰의지)라→ 몰의지라고 하는 것은 아무 뜻 없는 지혜. 그러니까 형편없는 그런 어리석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요.
그렇지요 사람이야 어떤 신분이든 간에 그 사람 속에 들어있는 지혜에 대해서는, 소견과 지혜에 대해서는 그 누가 신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若輕人(약경인)인댄→ 만약 사람을 가벼이 여긴다면,
卽有無量無邊罪(즉유무량무변죄)니라→ 무량무변한 죄가 있다. “사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곧 부처님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라.” 불교에서는 그렇게 보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은 한량없는 죄가 있다.
別駕-言(별가-언)하되→ 그러니까 별가가 말하되, 머쓱해졌겠지요? “아 뭐, 내가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汝但誦偈(여단송게)하라→ “그대는 다만 게송만 외우라. 내가 써 주께.” 이렇게 된 것이지요.
吾爲汝書(오위여서)하리라→ 내가 그대를 위해서 써 주겠다. 그리고 붙이는 말이,
汝若得法(여약득법)커든→ “그대가 만약에 법을 얻거든, 오조스님한테 법을 전해 받거든, 먼저 나부터 좀 제도 해달라.” 그렇게 한 겁니다.
先須度吾(선수도오)→ 먼저 모름지기 나를 제도할 지어다.
勿忘此言(물망차언)하라→ 그리고 “내말 잊어버리면 안돼.” 이렇게 다짐까지 받아 놓는 겁니다.
慧能(혜능)이 偈曰(게왈)→ 혜능이 게송을 지었는데, 이것이 앞에 게송하고 크게 다른 점이지요.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요→ 그 게송에 빗대어서 하는 것이지요.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요. 했는데, 보리 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뭐 나무다 뭐다 할 것이 없다. 이겁니다. 보리는, 깨달음은 무슨 뭐 그것이 흔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무에 비유를 했지만, 나무에 비유할 것도 물론 아닙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명경)이 亦非臺(역비대)라→ 밝은 거울도 본래 받침대가 있는 것이 아니다. 받침대하고 명경하고는 상관없다 이겁니다.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라 그랬잖아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다 그랬으면, 마음을 받히고 있는 어떤 제3의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밝은 거울 그 자체일 뿐이지. 오로지 이 세상은 마음 하나뿐이지. 그러니까 마음과 마음을 받히는 제3의 의식의 세계로 이것을 나누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명경역비대라. 명경도 또한 무슨 받침대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明鏡.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하다 이겁니다. 明鏡도 또한 臺가 아니다.
本來 無一物(본래 무일물)이어니→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우리 마음의 세계에서, 본심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
何處(하처)에 惹塵埃(야진애)랴→ 하처에 야. 낄 야자 지요. 진애. 먼지나 때가 끼겠는가?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하야, 勿使惹塵埃(물사야진애) “부지런. 부지런히 닦아가지고 때가 끼지 않도록 하라.” 라고 이렇게 말을 했는데,
이 분은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때가 낀단 말이냐? “때도 없고 낄 자리도 없다.”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마음의 실체를 제대로 본 그런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가 얼핏 보기에는, 우리의 상식으로선 저 앞의 말이 오히려 가까워요. 마음에 때가 낀다.
탐심도 생기고. 분노나 어리석음이나, 이런 것이 자꾸 우리 마음에, 마음에 장소도 없고 형상도 없지만, 거울에 때가 끼듯이 그렇게 자꾸 끼지 않느냐? 그러면 그것을 자꾸 갈고 닦고, 참회하고 염불하고 뭣 하고, 경 읽고 뭣 하고 해가지고, 자꾸 그것을 제거 해내고, 또 예를 들어서 딴 데로 들어가려고 하면, 그것을 이끌어 오고, 그래서 자꾸 우리 마음에 탐. 진. 치를 닦여내는 것. 이것이 바람직하다. 라고 저 앞에서 그랬는데...
우리가 보통 생각할 때 그런 점도 있어요.
맞는 말이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의 본성에서 보면 그런 말이 안 맞다 는 것이지요.
마음의 본성에는 마음 그 자체도 공적한 자리예요.
그렇다고 없는 것은 아니고요. 그래서
본래 무일물이지요. 마음의 세계에서 보면 때가 낄 자리도 없고 때도 없지요.
그러니까 그런 마음의 세계와 또 앞에서 신수대사가 말한 “마음에 때가 낀다. 그러니까 때때로 부지런히 갈고 닦아야 된다.” 사실 우리는 그 양면을 동시에 이해해야 됩니다. 너무 이렇게만 이해하면,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또 너무 현실에만 치우쳐 있으면, 우리 본성의 그 아주 뛰어난 共能(공능)을 또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불교공부를 하면서, 우리 마음에다 이렇게 비추어 가지고, 생각을 해볼 때, 이런 문제가 제일 어려운 문제지요. 마음은 본래 없는 것이다. 마음도 없는데 그 외에 뭐 탐 진 치 삼독이 쌓이고, 끼고 한다는데 그것이 있을 까닭이 있겠나? 이것이 맞는 말 이지요. 궁극적으로는 맞는 말인데, 그렇다고 그러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 어떻게 되느냐 이겁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조심할 것은 조심하면서 그러면서도 또 본래 때도, 때가 낄 자리도 없다고 하는 그런 이치도 동시에 알고 있어야 되는 것이지요. 결국은 그것이 中道(중도)입니다. 결국 중도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데, 중도이야기를 아니 하면 풀리지가 않게 되어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다 그렇고, 불교이치도... 불교이치는 더욱 더 그래요. 중도이야기를 아니 하면 풀리지가 않아요. 우리 상식에서 보면, 신수대사의 말은 너무 지당한 말이지요. 그리고 육조스님 말씀도 가만히 보면 맞거든요. 가만히 찾아보면 마음이 어디 없잖아요?
우리가 분노를, 뭐 그냥 온 세상을 다 태울 듯이 화를 냈다가도, 도대체 무엇이 화를 냈고, 어디에서 화가 났는가? 그렇게 분명하던. 분노라고 하는 그 실체가 찾아보면 없거든요. 전혀 없다고요. 그 분노의 실체가 먼지 하나 안 보인다고요. 분노가 일어났을 때는 그냥 온 세상을 뒤덮을 것 같았다가, 그러나 그 실체를 찾아보면 또 없어요. 분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탐 진 치. 팔만사천 번뇌가 전부 다 그래요. 전부 다 그렇다고요. 없다고요.
그러니 그 없는 면도 우리가 이해를 안 하면, 안 되는 것이지요.
궁극적으로는 그 없는 면을 더 제대로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은 이렇게... 뭐 달리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신수대사의 말에 빗대어 가지고, 표현 하다보니까 이렇게 단순하게 표현이 됐는데...
본래 무일물 하처야진애. 참, 이런 소리 들으면 어쨌든 속에는 탐 진 치 삼독이 부글부글 끓고 있어도, 어쨌든 시원해요. 좌우지간에 本來 無一物 인데 어디에 탐 진 치가 있겠나?
何處惹塵埃. 탐 진 치 삼독은 본래 없다. 일단은 들을 때는 아주 기분 좋잖아요? 사실은 이것이 이치는 맞는 이치예요. 저것도 맞고 이것도 맞아요. 그래서 中道(중도)라고 하는 말이 등장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그 양면을 다 가지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탐욕 부리기 시작하면 자꾸 탐욕이 일어나지요. 번뇌 일으키기 시작하면 자꾸 번뇌가 일어나지요.
없다고 하면서도 분명히 그건 또 거부할 수 없는 문제가 탐 진 치 삼독이고, 온각 번뇌 망상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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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