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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향은 제사(祭祀)를 지낸다는 뜻으로예로부터 충절(忠節)과학행(學行)이뛰어난 덕인(德人)을 기리기 위하여 서원(書院)이나 사당(祠堂)을 짓고 위패(位牌:神位)를 봉안(奉安)하고 원근(遠近)의 사림(士林:儒林:선비들)이 향사(享祀:제사를지냄) 하였고 지금도 그 전례(典禮)가 이어져 가고있다. 韓 脩(한 수)公의 호(號)는 유항(柳巷)으로 고려(高麗) 좌정승(左政丞)을 지내고 시호(諡號)가 문경(文敬)으로 학행(學行)이 뛰어나 공公을 흠모(欽慕)하는 사림(士林)이 송경(松京), 풍양(豊壞), 송산(松山), 장단(長瑞), 봉산서원(鳳山書院)에 公의 위패(位牌 : 神位)를 모시고 향사(享祝)하여 왔으나 오랜 歲月을 거치는 사이 병화(兵火)로 훼멸(毁減)되고 현재는 한 곳도 남은 곳이 없다. 韓 忠(한 충) 동영상 公의 (호) 號는 송재(松齋)이다.조선 조에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고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으로 충절(忠節)과 학행(學行)이 뛰어나 충남 연기(忠南 燕岐)의 봉암서원(鳳岩書院)과 청주의 신암서원(莘岩書院)에 배향(配享)하고 인근 선비(儒林)들이 향사(享祝)하고 있다. 韓 蘊(한 온) 동영상 공(公)의 諱는 온(蘊)이요, 자(字)는 군수(君粹)니,서평군(西平君) 숙창(寂昌)의 아들이요, 서성군(西城君) 익(翊)의 손자이다.공의 기품(氣品)이 장엄(莊嚴)하고 언행(言行)이 신중(愼中)하며,글을 읽되 깊이를 이해하고 공리(功利)를 쫓지 않았으며,효행(孝行)이 투철하여 어버이 병환에는 단지(斷指) 주혈(注血)하며 연명(延命)케 하고 친상(喪)을 당하여는 3年을 묘막(墓幕)에서 채식(菜食),소찬(素饌)으로 집상(執喪) 하였다.장흥부사(長興府使) 재임 중에는 왜적을 맞아병사(兵使) 원적(元績)과 더불어 싸웠으나 세(勢)가 미치지 못하여 장렬(壯烈)히 순절(殉節)하니 후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충의(忠毅)의 시호(諡號)가 내려졌고, 公의 충절(忠節)을 기리기 위해 서원(書院)을 세워 향사(享祝)하고 있다. 久庵公(韓 百 謙)(구암공 한 백 겸 명종7년(1552)~광해군 7년(1615) 19세 공은 조선 중기(中期)의 문신이다.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 유음공(柳陰公) 효윤(孝胤)의 아들이고.군수공 여필(郡守公 汝弼)의 손자이며,정선공 승원(旌善公 承元)의 증손(曾孫)이다.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평산신씨(平山申氏) 로 예빈시정 건(禮賓侍正 健)의 따님이다.공은 명종 7년(1552) 4월11일에 태어났다. 선조 12년(1579) 생원시에 합격하고 동왕18년(1585) 교정청(校正廳)이 신설되자 정구등과 함께 교정낭청에 임명되어,경서훈해(經書訓解)의 교정을 맡아보았다. 이듬해 천거로 중부참봉(中部參奉)이되었으며,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 선릉참봉(宜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재직중 병으로 사퇴하였다.1589년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 때 모반에 실패 하여 자살한 정여립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스레 염한 사실이 뒤늦게 발각되고, 또한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연좌되어 장형을 받고 귀향 갔다가, 임진왜란 때대사면령으로 석방 되었다. 석방 될 때 적소에서 적군에게 아부 하여 반란을 선동 한자드르을 참살한 공로로 관직에 재임용,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에 기용되고,1595년 호조좌랑(戶曹佐郞)을 거쳐 1601년 형조정랑, 청주목사, 1607년 판결사(判決事),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서용 되었다, 이듬해 선조가 죽자 빈전도감당상(殯殿都監堂上)이 되어 상례를 주관 하었으며,1610년(광해군 2) 강원도 안무사(江原道按撫使,1611년 파주목사에 기용 되었다가 사암 하고.양주의 물이촌 에 퇴거 하여 있다가, 역학(易學)에해박 하다 하여 선조 때부터 편찬 하기 시작 하였던 주역전의(周易傳義)의 교정을 맡아보았다,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저술하여 실학의연구자로서 싫증적이며 고증학적 방법으로 조선의 역사,지리를 연구 하고, 종래의역사가들의 학설을 비판, 수정하여 이 방면에 새로운 관심을 교양 하였으며, 그 결과로 기정고에 실려 잇는 기자도. 기전설 등의 저술을 남겼다.광해군 7년(1615) 3월 7일 졸하니 향년 64세였다. 배위 증 정경 부인 능성구씨는 판서 사중의 따님이고, 증 정경부인 함창 김씨는 교위 정준의 따님 이며 아들은 우의정을 지낸 정온공 흥일 이다. 원주(原州)의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공의 배위 증 정경 부인 능성구씨 는 인조 8년(1630) 6월24일 졸하였고 증 정경부인 함창 김씨는 인조9년(1631) 10월29일 졸함에 부평리 가마도 계좌 에 삼합조 로 안장 되었다 우복 정경세 가 묘갈을 찬 하였다.신도비명 은 우복 정경세가 찬 과 죽남 오 준 이 써서 인조 4년 (1626)수립 하였는데 비가 16척이다. 鰲川公(韓 百 愈)(오천공 한 백 유) 숙종1년(1675)~영조18년(1742) 21세 공(公)은 조선 중기(中期)의 학자(學者)이다. 휘(諱)는 백유(伯愈)요 자(字)는 퇴여(退汝)이고,호(號)는 오천(鰲川)이다. 준(濬)의 아들이고 준걸(俊傑)의 손자이며,절제공 중손(節制公 仲孫)의 7대 손이다.어머니는 진주 최씨로 서벽(瑞碧)의 따님이다.공은 숙종 1년(1675) 태인(泰仁)에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업과 효행이 두드러졌다.외종조부인 관곡 최서림(寬谷 崔瑞林)에게서 수학(受學)하며 사회적 병폐인 사화당쟁을 비탄하고 사림(士林)으로 머물러 후학(後學)들과 수도(修道)에 힘썼다.공을 비롯하여 아우(仲愈, 季愈)들의 모부인(母夫人)에 대한 성효(誠孝)는효행록에 전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공은 만년에 향리인 태인(泰仁)에서 오직 저술(著述)에 전념(專念)하여 저작(著作)으로(천도인도지원해(天道人道之原解)),(팔괘지의해(八封之義解)),(하도낙서지의회(河圖洛書之義解)),(훈몽편(訓豪篇)),(언해삼략(諺解三略)),(주해판당음십권(註解板唐音十卷)),(주해칠언이백(註解七言李白)),(훈해소학대학대의(訓解小學大學大義))등 많은 훈화서(訓話書)가 있었으나 재화로 산질(散秩)되었다. 또한 공은 영조(英祖) 18년(1742)에 여역(濾疫 : 돌림열병)을 피하여 담양(潭陽)으로 옮겨 살다 이 해 12월 20일에68세로 졸하였다.공의 도덕(道德)은 몰후(沒後)에 더욱 빛나니 영조(英祖) 33년(1757)에 사림(士林)들이 태인(泰仁),현 井色市 七寶面)의 용계서원(龍溪書院)에 배향(配享)하였고 순천(順天)에는 중년(中年)에 이곳에서의 홍학(興學)의 공덕(功德)을 기리기 위해 양사재비(養士齋碑)를 세웠다.생가유지(生家遺址)는 칠보면 시산리 행단(七寶面 詩山里 杏壇)이다.배위 광산 김씨(光山 金氏)는 중하(重夏)의 따님이고,아들은 수신재 종묵(守愼齋 宗默)과 종눌(宗訥)이다. 別坐公(韓 日 休)(별좌공 한 일 휴)중종37년~광해6년(1614) 21세 공(公)의 휘는 일휴(日休)이고,자(字)는 경일(景逸)이며,호(號)는 월포정(月浦亭)이다.부사공 기(府使公 琦)의 아들이고,장사랑공 영년(將使郞公 永年)의 손자이다. 중종 37년(1542) 2월 4일생으로 명종(明宗) 22년(1567)에 진사(進士)하고 선조 임진왜란 때 거가(車駕)가 서행(西行)하고 백성이 연도(沿道)를 덮으니,공이 분변(奮辯)하여 왈(日),황실(王室)이 위태롭다.내 비록 포의(布衣)나 어찌 나라를 돌보지 아니하리요.즉일로 밀행하여 용만(龍灣)에 가서 선조의 기거(起居)를 문후(問候 : 웃어른에게 편지로 安否를 물음)하니 사기(士氣)가 늠름한 지라 보는 이가 감탄하여 장원서별좌(掌苑暑別坐)를 제수(除授)하였다.공은 계속 왜적의 침입을 막았다.다음해 왜적들이 퇴거하거늘 공이 퇴귀회덕(退歸懷德)하여 학당(學堂)을 짓고 향인들을 교훈(敎訓)시켰다.향인들이 추대하여 산장선생(山長先生)이 되고 정자(亭子)를 지어 월포정(月浦亭)이라 하였다.광해(光海) 6년(1614) 7월 21일 졸하니 수(壽) 71이다.증 사헌부 집의(贈 司憲府 執義)이며,청주 가덕 검암서원(淸州 加德 險岩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묘지명에 이르기를,“위대하시다 공이여,늠름한 충의(忠義)로 왜적을 축출코자 하니 사욕(私欲)에만 급급한 자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위명자(委命者)는 현혹하고 자신자(自信者)는 의아(疑訝語)치 아니하나니.공이여,현명(賢明)한 기개(氣槪)로다."배위 숙인 파평 윤씨(淑人 被平尹氏)는 윤(輪)의 따님이고,아들은 학정 준(學正 峻)이다.공이 졸 함에 청주시 수곡동(淸州市 秀谷洞) 산12번지 화청봉하 장록임좌(華淸峯下 長麓 壬坐)에 배위 숙인 파평 윤씨와 합조이다.한참 후에 우암 송시렬(尤菴 宋時烈) 선생이 갈명(碣銘)을 찬(撰)하여11대손 용현(容鉉)이 묘비를 개수(改堅)하고 1990년 5월 17일 청원군 남일면 송암리(淸原那 南一面 松岩里) 산 18-1로 이장하였다.歲享日(세향일)은 陰 10月 10 日. 贈 軍資監正(韓 必 聖)(증 군자감 한 필 성)인조3년(1625)~숙종17년(1691) 21세 조선조 숙종때의 학자.자는 자인(子仁)이요, 호는 만회당(晩晦堂)이다.금당공 경장(琴堂公慶長)의 아들로 동지공 진(同知中樞府事 진)의 손자이며,어머니는 진주 강씨(晋州 姜氏)이니 직장 문국(直長 文國)의 따님이다. 공은 천자(天資 : 타고난 자질)가 온후하고, 수미(粹美: 청순하고 아름다움)하며,영오(潁悟 : 뛰어나게 총명함)하였다.유년부터 학문에 열중하여 당세에 명성 널리 퍼져 높은 이름을 떨쳤다.특히 도의(道義도덕과의리)를 강명(講明 : 해석하여 밝힘)함에 있어서는 공을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청량(淸凉 : 맑고 시원함)하니 후덕군자(厚德君子 : 덕이 두텁고 점잖은 사람)라 일컬었다.그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증직되었고,정조 12년(1788)에 사림(士林 : 유도를 닦는 선비들)의결의(決議)에 따라 신안서원(新安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배위는 증 숙부인 진주 강씨이니,종례(終禮)의 따님이다.슬하에 아들은 만유(晩愈) 한 분 뿐이다. 松月堂(韓 山 斗)(송월당 한 산 두)명종11년(1556)~인조5년(1627)22세 공은 임진왜란 때의 의인(義人)이다.휘는 산두(山斗)이고, 자(字)는 사첨(士瞻)이고,호(號)는 송월당(松月堂)이다.청암공 일취(淸嚴公 日就)의 아들이고,부사공 기(府使公 琦)의 손자이며,이랑공 서봉(吏郞公 瑞鳳)의 9대손이다.공은 명종 11년(1556)에 남계 부월동(南溪 浮月洞)에서 태어났다.7세에 이르러 장자(長者)들이 운자(韻字)를 부르니 즉홍시로 사람을 놀랍게 하였다.임란 때 왜적이 창궐하더니 정묘재란이 재발(再發)하여 국가가 위태한 지라 나라의 국록을 먹던 이도 오직 피난만 하는데 공은 초야(草野)에서 성장하여 국가를 위하여 멀리 홍의장군 곽재우(紅衣將軍 郭再佑) 막하에 들어가 좌우로 협력하여 방비(防備)를 튼튼히 하였다.난리가 끝이 나지 아니하여 조정(朝廷)에서는 강화(講和)하자는 의논이 분분함에 공이 분개한 마음으로 만여언(萬餘言)의 상소를 올리니서산(西山)과 동해(東海)에 의설(義舌)이 날카롭도다.44세에 비로소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그 후 진취의 뜻을 버리고 소재(小齋)를 지어 송월당(松月堂)이라 하고 경사(經史)에 찬심하니 명인달사(名人達士)가 이 문하(門下)에서 다출(多出)하였다.공은 인조(仁祖) 5년(1627) 3월 8일 72세로 졸하니 향인(鄕人)들이 후대(厚待)하여노계서원(魯溪書院)에 배향(配享)하고 명(銘)하여 왈(日),우주(宇富)에 감정(感情)을 빛내고 왕패(王覇)에 명분(名分)을 밝히도다.성(城)을 등지고 의지(意志)를 뽑내고 의리(義理)를 듣고 몸을 날리도다.백운(白雲)은 어찌하여 빨리 가는고.추월(秋月)은 영원히 빛나리로다." 하였다.배위 합천 이씨(俠川 李氏)는 충순위 윤복(忠順衛 潤福)의 따님이로 돌아 가신 후에 노좌리 면풍동 고 묘하(魯佐里 面風洞 考 墓下)에 합조되었다.승지 두암 김약련(承旨 斗岩 金若鍊)이 묘갈(墓碣)을 찬(撰)하고 정조(正祖) 10년(1786) 사림(士林)에 의해 풍기 노계서원(豊基 魯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묘소는 慶尙北道 豊基 魯佐里 面風洞에 있다. 毅壯公(韓 楯)(의장공 한 순)명종 10년 (1555)~ 선조 25년(1592) 19세 조선 중기의 무신. 字는 사한(士閑),도사공 극심(都事公 克諶)의 아들로,승지공 옥(承旨公 沃)의 손자이며,어머니 숙인 양천 허씨(陽川 許氏)는 흥효(興孝)의 따님이다. 선조 16년(1583)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평양판관 등을 거쳐 동왕 23년 남평 현감에 부임하여 풍속(風俗 : 옛적부터 행하여 온 의,식,주 등의 생활습관)을 바로 잡고 가난에 허덕이는 많은 백성을 구제하며 제반 행정에 충실하고 선정을 베푸니 다른 고을에 거주하는 백성들까지도 칭송과 존경하기를 어버이와 같이 하였다.동왕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거느리고 금산으로 가서 전라도 의병대장 고경명(高敬命) 등과 합류하여 왜적을 격멸코자 하였으나 금산에 도착하기 전에 고경명의 의병군은 이미 패전하여 전세가 불리한 가운데 들어가 힘써 싸웠으나 500여명의 군사와 함께 전사하였다.숙종 38년(1712)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증직되고 서성군에 봉하였으며 시호를 의장(毅壯)이라 내렸다. 지금도 평양에 평양판관 당시의 선정비가 있고 공의 충절과 충혼(忠魂: 충의를 위하여 죽은 사람의 혼)을 기리고 위로하기 위하여 금산 종용사(鎬山 從容祠)에 배향(配享)하였으며 예산 덕산(禮山 德山)에 정각(旌閣)을 세웠다. 배위는 증 정부인 장수 황씨(長水 黃氏)니 진사 연길(進士 延吉)의 따님이다.슬하에 다섯 아들을 낳으니,장남은 첨지중추부사 진영(僉知中樞府事 震英)이요, 다음은 인영(仁英)이고 다음은 의사 상영(義士 尙英)이며,다음은 첨지중추부사 도제(道濟)는 부사 겸(府使 謙議)에게 계후 입양되었고 다음은 언강(彦江)이다. 文節公(韓 宗 愈)(문절공 한 종 유)충렬왕13년(1287)~공민왕3년(1354) 9세 공의 휘는 종유(宗愈)요, 字는 師古(사고)이며, 호는 復齋(복재)이다.은청 광록대부 밀직시 부사 상호군 하고 치사 한 영 (英)의 아들이요 검교태자 첨사하고 참지정사에 추봉 된 원서 의 증손이다.15세에 태학에 들어가서 탁월한 능력으로 진사를 거쳐 대과에 급제 하여 예문관춘추관의 검열이되고 충숙왕을 따라서 원나라에 가서 행궁의 일력을 기록 하였고 본국으로 와서는 춘추관편수관에 진급 되었다.,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 하였으니 추성보절 찬화공신, 삼중대광 도첨의 좌정승 산호군 예문관 우문관 대제학 하고 한양 부원군에 봉군 되어 수 68세에 병세 하니, 나라에서 문절이란 시호를 내렸다.*묘소는 배위 경주이씨와 같이 경기도 장단군 대덕산 선적사 남쪽 언덕으로 전해오는 바 출입이 불가능 하다. 공은 정사를 펴 나갈 때 왕의 그릇된 판단을 간하다가 듯지 아니하면 병을 핑계로 며칠씩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공의 비문은 초은 이인복이 썻다 공은 벼슬길에 들어서 검열로부터 재상에 이르렀으며 항상 관리의 전형과 선발을 관장하여 친척과친구들이 공의 힘에 힘입어 출세한자가 많았다. 성품이 관후하고 무거워 일을 처리하고 사람 들을 접 할 때는 모두 여유가 있었고 문장을 함에도 세속의 속기를 버리려고 힘썻으며 더욱 시에 힘을 기울였다. 또 담소를 잘하여 술마시는 자리 같은데 앉으면 유영히 화기가 흘러서 친애 하는 마음이 나게 하였는데 복재는 스스로 지은 별호였다. 처음에 이 문정공 이 태학에서 한번 보고는 드디어 그의 아들 가락군 휘 관 의 딸로 배필을 삼았다. 아들 셋을 낳았으나 백순,중명,계상이요,딸은 여섯이다. 공은 조선조 초기의 문신으로 유명한 양촌 권근의 외 조부이기도 하다. 釣隱公(韓 夢 參)(조은공 한 몽 삼)선조 22년(1589)~현종 4년(1662)19世 公의 諱는 몽삼(夢參)이니 초휘(初諱)는 몽인(夢寅)이요,字는 자변(子變)이고,號는 조은(釣隱) 또는 적암은인(適巖隱人)이다.선조(宣祖) 23년 2월 21일 생으로 부친은 종묘봉사(宗廟奉事)를 지낸 계(誡)요,조부(祖父)는호당(湖堂) 여철(汝哲)이다. 公은 박제인(朴齊仁), 장현광(張顯光) 등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였다.일찍 부모를 여의고 형(兄) 몽룡(夢龍) 밑에서 학업에 정진(精進)하여 광해(光海) 5년(1613)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고,인조(仁祖) 17년(1639)에 학행(學行)으로 천거(薦學)되어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3개월만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그 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병자호란 때에는 의병(義兵)을 일으켜 활약하였으나 화의(和議)가 성립되자 관직을 멀리하고 산수(山水)가 수려한 파릉군(巴陸郡)의 서계(西溪)가에 은거(隱居)하였다. 公이 선조 기축(宣祖 己丑年 1589)에 출생하여 현종 임인년(顯宗 壬寅 1662) 11월 25일에 壽 74세로 별세(別世)하였다. 公의 배위는 창녕장씨(昌寧 張氏)로 참봉 익기(參奉 益棋)의 따님으로 묘소는 경남 의령(宜寧) 유곡(楡谷) 선영(先瑩)이다.公의 묘비문은 광성군(廣成君) 안정복(安鼎福)이 찬했다. 公의 몰후(死後) 숙종 28년(1702)에 임천서원(臨川書院)에 배향(配享)하여 公의 학행(學行)을 기렸고 그후 영조 5년(1729)에는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에 증직되었다.공의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하여 고을 유림(儒林)이 뜻을 모아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평촌리에 사적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방손 문학박사 한갑수(傍孫 韓甲洙 : 文學博士)가 지었다.公의 장자는 左承旨 時晦(좌승지 시회)요,차는 司馬試(사마시)에 合格한 時龜(시구), 武科(무과)에 급제한 時挺(시정), 萬戶(만호)를 지낸 時相(시상), 樂官(약관)을 지낸 時立(시립)인데,二子 時憲(시헌)은 伯父 夢龍(백부 몽룡)에 系后(계후)하였다.공의 저서로는 <釣隱集(조은집)> 4권이 있으며,文閑(문한) 烈士(열사)들의 記文(기문)과 文輯序(문집서), 行狀(행장)과 진주 남강 촉석루에 걸려 있는 縣板(현판)과,扁額(편액) 등의 많은 遺墨(유묵), 遺作(유작)이 있다.조은공(釣隱公) 外 17인이 세강계(世講契)를 만들어 학문(學問)을 펴고 사회순화(社會醇化)를 도모(圖謀)하였고,그 후손들이 서로 친목을 이어오고 있으니 지금도 매년 음 3월 26일에 위 18현(十八賢)의 추모행사를 하고 있는 바 그와 같은 미행(美行)을 유적비(遺橫碑)에 담아 경남 하동군 하동읍 쌍계사(雙溪寺) 경내에 비석을 세웠다. 臨川書院(임천서원)은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 관방마을에 있는데 서원에는 조은공 외에도 효익공 이준민(李俊民 孝翼公),강응태(姜應台, 弼善), 성여신(成汝信, 進士),하 등(河 燈) 오현(五賢)을 배향(配享)하였는데 숙종 28년(1702)에 건립(建立)되어 숙종이 사액(賜額 : 이름을 지어 하사하다)하였다.그 후 고종(高宗) 때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철(毁撤)되었다가 다시 중건(重建)하고 유림(儒林)이 추모행사를 이어오고 있다.공(公)이 별세(別世))하니 사영동(沙寧洞) 선영하(先瑩下) 자좌(子坐)에 안장(安葬)하였다가 숙종 병술년(丙戌 1706)에 현재의 하동읍 흥룡리 산 171-1로 이장하고 묘하(墓下)에 재실(齋室)을 건립(建立)하여 모도재(慕道齋)라 하였다. 新齋公(韓 好 謙)(신재공 한 호 겸)중종30년(1535)~선조12년(1579) 18세 조선조 중기의 학자.자는 명보(明甫), 호는 신재(新齋),증 참의공 전(贈 參議公 傳)의 아들로,승지공 세신(承旨公 世信)의 손자이며,어머니는 증 숙부인 여산 송씨이니 주부공 세장(主簿公 世長)의 따님이다.공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였고 범인(凡人)들과는 달리 영오 할 뿐만 아니라 한시도 헛되이 보내지 아니하고 면학에 열중하니 이를 아는 사람마다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칭찬(稱瓚)이 자자(藉藉)하였다.그러나 벼슬에는 관심(關心)이 없고 후진양성(後進養成)에만 전력하여 서원(書院)을 창립(創立)하고 많은 인재(人材)를 배출(輩出)하였다.선조 21년(1588)에 공의 문인 제자들이 스승의 학덕(學德 : 학식과 덕행)을 흠모하여 전북 임실군 임실읍 신안리 금동에 사당(祠堂; 신주를 모시는 집)을 건립(建立)하고 신안서원(新安書院)이라 하였다.선조 30년(1597) 정유재란(丁西再亂) 때 왜적에 의하여 소실되어 오랫동안 유지(遺址)만 남아있다가 현종 10년(1669)에 재건(再建)하였다.당초에는 문간공 이 서(文簡公 李 舒)와 公 두 분만을 봉안(奉安)하였다가 그 후 사림(士林 :선비)의 결의(決議)에 따라 송경원(宋慶元), 한필성(韓必聖), 한명유(韓嗚愈),송시태(宋時態), 김수근(金洙根), 강백진(康伯珍) 선생 등도 추배(追配)되었다.배위는 증 정부인 완산 이씨니참봉공 사정(參奉公 士貞)의 따님이다.슬하에 3남2녀를 생육하니장남은 충의위공 기(忠義衛公 琪)이고 차남은 봉사공 위(奉事公 瑋)이며,3남은 동지공 진(同知中樞府事 진)이다.세향일 음 10월1일. 忠毅公(韓 浩 運)(충의공 한 호 운)(1761~1812) 공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字)는 문익(文翼)이니,순빈(順彬)의 아들이다.한효자(韓孝子)라고 일컬어진 효자(孝子)이기도 하다.정조(正祖) 24년 정시(庭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及第)하여 성균관(成均館) 학유(學諭) 전적(典籍) 등을 지냈다. 당시 이조(吏曹)에서 公의 청직(淸直)한 성품을 알고 사헌부(司憲府)나 사간원(司諫院)의 관직에 임용(任用)하고자 하였을 때 “이름있는 관직을 얻게 되면 잇속(利)을 불러오게 되고, 잇속(利)을 가까이 하면, 의(義)를 모두 잃게 되는 것”이라 하여 이를 거절하였다.순조(純祖) 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홀로 적진에 나아가 난군(亂軍)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다가 살해(殺害)되었다. 백경한(白慶翰), 임지환(林之煥)과 더불어 청북삼렬(淸北三烈)이라 일컬어졌으며,예조판서(禮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향리(鄕里)에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다.시호(諡號)는 충의(忠毅)이다. 文純公(韓元震)(문순공 한 원 진) 숙종 8년 ~ 영조 27년(1682~1751)23世 동영상 공(公)은 조선 후기(後期)의 학자(學者)이다. 휘(諱)는 원진(元震)이고, 자(字)는 덕소(德昭)이며,호(號)는 남당(南塘)이다.통덕랑공 유기(通德郞公 有箕)의 아들이고,현감공 여익(縣監公 如益)의 손자이며,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9대손이다.어머니는 함양 박씨(咸陽 朴氏)로 도정 숭부(都正 宗阜)의 따님이다.공은 숙종 8년(1682) 9월 13일생이다. 송시열(宋時烈)의 고제(高弟)인 권상하(權尙夏)의 제자들인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서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호론(湖論)인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8세에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문장 파악이 매우 느렸으나 수년을 지나자 한번 본 문장을 곧바로 암기할 정도로 뛰어났다. 12세에 할아버지 상을 당하여 성인처럼 상례를 지켰다. 숙종 43년(1717)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영릉참봉이 되었고 경종(景宗) 1년(1721)에 부수(副率)에 임명되었으나 신,임사화(辛, 壬士禍)로 노론이 실각하자 사직하였다.영조(英祖) 1년(1725) 경연관(經進官)으로 뽑혀 학문(學問)을 진강, 영조(英祖)의 총애를 받았으나 《맹자》의 ‘신시군여구수(臣視君如仇讐雙)’의 구절을 인용하여 소론을 배척하다가 탕평책에 어긋난다 하여 삭직되었다. 1741년 김재로(金在魯)의 구명운동으로 복직, 그 뒤 장령,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재지(才知)가 뛰어나 사리에 명철하였으며, 주역, 시경, 서경 및 사서, 태극도설, 통서, 계몽 및 여러 경세서(經世書) 등을 정독하여 성리학설에 정통하였다.그밖에 율려(律呂), 천문, 지리, 병가, 산수 등의 서적까지도 깊이 연구하였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당시 성리학의 중심과제에 두루 미치고 있었으며, 17, 18세기 성리학에 대한 반성으로 등장한 실학이 남인들의 학자층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여 이 이(李 珥), 송시열, 권상하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여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심성론논쟁(心性論論爭)에서 낙론(洛論)인 이 간(李 柬)을 중심으로 하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주장에 반대하여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인물성이론의 주장을 대표하였다. 그의 심성설의 구조는 우주만물의 생성구조에 토대를 두고 있다. 우주에는 양건(陽健)한 기(氣)로서 남성적인 것이 되며, 음순(陰順)한 기로서 여성적인 것이 되는 기화(氣化)의 단계, 음양의 기가 모여서 만물의 형체를 이루는 형화(形化)의 단계가 존재하며, 형화를 통하여 형성된 형체의 내부에도 기화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처럼 만물의 생성의 기화. 형화, 형화 속의기화 등과 같은 삼층의 구조로서 파악하며, 이 삼층구조를 심성설에 적용하여 성(性)을 삼층구조로 파악한 것이 성삼층설(性三層說)이다. 그는 이 성삼층설에 입각하여 성을 인간과 사물이 같은 초형기(超刑氣)의 성,인간과 사물이 다른 인기질(因氣質)의 성,인간과 인간이 서로 다른 잡기질(雜氣質)의 성 등으로 구분하여 파악하였다. 또한 성은 이(理)가 기질 속에 내재된 뒤에 운위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이 이의 생각을 계승하여, 인성과 물성은 기질을 관련시키게 되는 인기질의 차원에서 비교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사고를 근간으로 그는 인성과 물성은 다르다는 주장을 전개한 것이다. 미발심체(未發心遞)의 문제에 관한 논쟁에서도 그는 미발(未發)의 심체(心體)는 본래부터 선하다고 주장하는 이 간과는 달리 미발한 심체에도 선악의 가능성이 공재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미발심체유선악설(未發心體有善惡說)을 주장하였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주역을 중심으로 하는 역학에도 미치고 있었으며, 그와 관련된 저술로서《역학답문(易學答問)》《역학계몽(易學啓蒙)》《거관록(居觀錄)》《문왕역석의(文王易釋義)》등이 있다.이들 저술을 통하여 볼 때 역(易)에 관하여 자연지역(自然之易), 괘획지역(封劃之易)과 문자지역(文字之易) 등이 있다고 하는 독특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의미를 윤리도덕적으로 파악하는 성리학적인 역학관의 입장에 섰다. 그의 많은 저술 가운데 1741년에 저술한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는 송시열이 착수한 것을 그의 스승인 권상하를 거쳐 50년만에 완성한 한국성리학사상의 거작이었다. 저서로는 《남당집》 38권(二集)이 있고, 편저로 《임시취고(臨時取考)》《퇴계집소석(退溪集疏釋》《의례경전통해보(儀禮經傳通解補)》《장자변해(莊子辦解)》《선학통변(禪學通辯)》《왕양명집변(王陽明集辦)》《거관록(居觀錄)》《심경부주차기(心經附註箚記)》《춘추별전(春秋別傳)》《근사록주설(近思錄註說)》《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가례소의의록(家禮疏擬疑錄)》《가례원류의록(家禮源流疑錄)》《고사편람(古事便覽)》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저술 가운데에서 《경의기문록》과《주자언론동이고》를 제외한 나머지 문집의 대부분은 그 판본이 김천 직지사에 수장되어 있었으나 이 황(李 滉)의 학설과 위배되는 설을 제기하였다는 이유로 어사 김정희(金正喜)의 방화로 타버려 희귀본이 되었다. 공은 영조(英祖) 27년(1751) 2월 8일 70세로 졸하였다. 공은 삼교 무진 족보간행(三校 戊辰 族譜刊行)에 힘썼고 서문(序文)을 썼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성주 무계서원(星州 武溪書院), 홍성 양곡사(洪城 暘谷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위(配位) 증 정부인 창녕 성씨(贈 貞夫人 昌寧 成氏)는 중광(重光)의 따님이고, 증 정부인 여홍 민씨(贈 貞夫人 驢興 閔氏)는 진화(鎭華)의 따님이다.아들은 후은(後殷), 후종(後宗), 현감 후현(縣監 後賢)과 후준(後準, 無后)이다. 공과 배위 증 정부인 창녕 성씨,증 정부인 여흥 민씨와 삼합조이다. 공이 돌아가신지 177년 후인 1927년 9월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묘소와 양곡사(暘谷祠)는 忠南 洪城那 西部面 新里(충남 홍성군 서부면 신리)에 있고,양곡사는 1985년 준공하였고,세향일 陰 2월 10일과 8월 10일에 제향한다. 韓 謙(한 겸)公의 先系(선계)를 살필 수 없어 단지 부사(府使)의 행직(行職)만을 유록(遺錄)에서 볼 수가 있고 의렬사(義烈視)에 배향(配享)된 사실로 보면 충렬(忠烈)의 자취가 있음을 알 수가 있으므로 후일 사료(史料)가 찾아지는 대로 보완해야 할 것이다. 正郞公(韓 禹 臣)(정랑공 한 우 신)명종11년(1556)~?公의 휘(諱)는 우신(禹臣)이요,字는 하경(夏卿), 號는 정안당(靜安堂)이니,부친은 중해(中海)이며,어머니는 김 순(金 純)의 따님이다. 1573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관직은 한림, 직제학, 사인, 현감을 거쳐 호군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정랑으로서 군량(軍糧)의 운반을 담당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였으나 현달(願達)하지 못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집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독서하며 수신하였다.1647년(인조 25년)에 순안에 건립된 성산서원(星山書院)에 배향되었다. 韓 養 吾(한 양 오) 호는 반환정, 향사는 남원 고암서원.公의 號는 반환정 (盤桓亭)으로 남원 고암서원(南原 高岩書院)에 배향되었음을 유록(遺錄)에서 볼 수 있고 또한 선계(先系)를 살필 수 없으므로,후일 사료(史料)를 찾아 보완(補完)한다. 夢溪公(韓 哲 沖)(몽계공 한 철 충) 13세충숙왕8년(1321)~? 동영상 고려말의 문신으로자는 홍도요 호는 몽계 이니 판서공 희적의 아들이고 참의공 연의 손자이다. 諱(휘)는 哲沖(철충)이니 本貫은 淸州요. 陜天(합천)에 居하셨다. 선생은 고려 말엽에 출생 하시어 經學(경학)에 밝고 言行(언행)을 바르게 닦았으며 知德(지덕)을 兼備(겸비)하여 學文(학문)이 純美(순미)하고 藝技(예기)가 高明(고명)하였다. 少年 시절에 과거에 급제하여 덕망이 뛰어 났으며 좋은 벼슬 자리를 역임하면서 많은 업적을 쌓아 지위가 典法判書(전법판서)에 까지 이르렀더니 高麗의 國運(국운)이 終末(종말)을 告(고)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절개를 굳게 지켜 종적을 감추고 이 세상을 마치셨다. 일찍이 掌令(장령)으로서 楊廣道按廉使(양광도안염사)에 特拜(특배)되어 부임 길에 오르는데 興安君 文忠公 樵隱李(흥안군 문충공 초은이) 先生이 贈別詩 한 폭을 주었는데 여기에 이르기를 "經傳(경전)에 關9관)한 儒學界(유학계)에 있어 귀중한 보배요, 청렴한 治績(치적)은 세상이 모두 賢人(현인)으로 받드는 터이요,判詞(판사)에 기재된 文辭(문사)는 國論(국론)에 간여되는 바 많고 特命(특명)으로 받은簡策(간책)은 朝庭 官僚界(조정 관료계)를 숙연케 하오. 결백한 善治(선치)에 의지가 더욱 견고하도다. 名聲(명성)과 威光(위광)이 形罰(형벌)보다 앞서 갔고 到任(도임)하는 행차 모습은 바람결에 나부끼는 깃발에 빛나도다. 王室(왕실)의 모든 일이 급하다 한들 백성들의 일이 또한 可憐(가련)하지 않은가 과도하게 거두는 租稅(조세)가 그칠 날이 없고 兵亂(병란)을 알리는 烽火(봉화)가 아직도 계속되네. 바다가 다 말라 凶年(흉년)이라도 밥은 지어 먹어야 하고 山이 헐벗어 빈 동산이라도 사다리 만들 나무는 남아 있으리. 방랑의 유랑민도 즐거운 살 곳을 찾을 것이요 과부나 홀애비들도 豊年(풍년) 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요 이왕부터 지니고 있는 재산이 없음을 각오하였지만 장차 처지가 바뀌면 그 때의 괴로움을 뉘라서 해결하여 줄 것인가. 어려운 백성을 구휼할 때는 시간을 지체하지 말 것이며 訟事(송사)를 재판할 때는 편중되게 사정을 써서는 아니되오 들이 시원하게 터였으니 전답도 널찍하고 봄 일기가 쾌청하니 온갖 物色(물색)이 美麗(미려)하도다. 君의 廳舍(청사)는 江流(강류)가 명주 띠 같이 둘러있고 本官의 도임 길에는 버들 꽃이 날리네. 詩를 써서 珠玉(주옥) 같은 글을 주고 받고 하며 노래를 부르니 管絃奏樂(관현주악)이 갗추었도다. 우두커니 바람 앞에 섰다가 달빛을 따라 자리를 옮기노라. 돌아 보건데 난는 이제 늙었도다 이별하는 마당에 홀로 암담할 뿐 일세 원컨데 그대는 노력하시어 우리의 儒道(유도)를 흥케 해주오.公의 諱(휘)는 哲沖(철충)이니 淸州人이다. 先考의 諱는 希迪(희적)이시니 禮儀判書(예의판서)요, 高麗開國功臣 太尉 韓蘭(고려개국공신 태위 한란)은 즉 鼻祖(비조)가 되신다. 公은 3娶(취)(妻처를 세명 두시다)를 하셨는데 初娶는 李氏요. 再娶(재추)는 安東 權氏(안동김씨)니 代言 確의 따님이요, 다음 再娶는 永嘉 張氏(영가장씨)니 判衛尉 之順(판위위 지순)의 따님이다. 4男 2女를 두시니 아들 중 珍(진)하시는 분은 郡守였고 廉(염)하는 분은 文科에 及第한 尙州牧使(상주목사)였고 兼(겸)하는 분은 代言公이요, 讓(양)하는 분은 麗節校尉(려절교위)였다. 따님 중 한 분은 平海郡守 柳伯通(평해군수 류백통)에게 출가하고 또 한 분은 大司憲 李垠(대사헌 이은)에게 출가하였다. 公은 少年時節에 文科에 及第하여 名望이 높았고 여러 官職을 歷任하여 典法判書(전법판서)에 拜任(배임)되시었더니 高麗(고려)가 亡(망)하자 李朝(이조)에는 臣下(싱하)가 될 수 없다고 하여 行跡9행적)을 陜川 釣洞(합천 조동)에 감추고 隱居(은거)하시다가 一生(일생)을 마치셨으며, 號(호)를 夢溪(몽계)라 하였다. 陜川郡(합천군)의 西便 粉土洞 子坐(서편 분토동 자좌)에 자리한 山麓(산록)에 禮葬(예장)되었고 天啓 甲子年(천계 갑자년) 仁祖 2년, 서기 1624년)에 許函(허함)이 陜川 郡守로 來任하였는데 公의 外叔 後裔(외숙의 후예)가 되어서 郡內에 사는 子孫(자손)들과 相議(상의)하여 碑石(비석)을 세우고 自己(자기)가 직접 그 事蹟(사적)을 敍述(서술)하였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러서 碑面(비면)이 흙 속에 매몰되고 墓道(묘도)가 거의 荒廢(황폐)해져 景宗 甲辰(경종 갑진 서기1724)년에 10世孫 翼舜(익순)이 그 碑石을 파내어 다시 墓 앞에 세웠으나 碑石面(비석면)이 부숴지고 字劃(자획)이 마모되어 後人(후인)에게 보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 해 가을에 郡內에 居住하는 子孫들이 誠力을 다하여 앞서 禮儀公(예의공) 墓所에 墓碣(묘갈)을 세우고 또 公의 墓碑(묘비)도 새 돌로 바꾸어서 永久(연구)히 전하도록 도모하였다. 公의 名聲과 業蹟은 이미 樵隱(초은)의 詩와 后溪(후계)의 文詞(문사)로 서술되어 있는지라 나는 감히 조그만 기교로써 公의 참 모습을 꾸미는 분수 밖의 碑文을 지었다는 책망을 스스로 취할 수가 없어서 다만 公의 不二臣節(불이신절)의 志操(지조)만을 여러번 되풀이하여 기술하였으니 後日에 역사가들이 麗末의 遺民錄(유민록)을 쓸 기회가 온다면 반드시 여기서 자료를 채택할 것이로다. 韓 碩 弼(한 석 필)1672~1732 公의 字는 석보(碩甫)요,號는 조암(釣巖)이다.公이 일찍부터 선문호학(善文好學)하고 명유석현(名儒碩賢)과 교유(交遊)하며 학문(學問)에 정진(精進)하여 높은 경지(境地)에 이르니 사림(士林)의 존경(尊敬)을 받는 석학(碩學)으로 남긴 문집(文集)이 많아 公의 五代孫 준교(俊敎)가 성심(誠心)으로 간행(刊行)하니세상에 추앙되는 바 되었다.또한 公의 행장(行狀)은 外孫 최우동(崔材東)이 찬(撰)하고 묘지명은 송준필(宋浚弼)이,그리고 문집(文集)의 서문(序文)은 判書 豊山 柳台佐(판서 풍산 유태좌)가 찬(撰)했다.公은 夢溪公(몽계공)의 후손으로 배위는 성산 이씨와,일선 김씨 두 분이고 아들은 복유(復/*--愈), 성유(聖愈)이고, 고을 유림(儒林)이 합천에 회산서원(會山書院)을 지어 公을 배향(配享)하고 향사(享祝)한다. 韓 好 誠(한 호 성)?∼1597(선조 30). 조선 선조 때의 의병.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보(敬甫), 호는 계촌(桂村). 확(確)의 후손이다.정유재란 때 이정익(李廷翼) 등 5인과 더불어 의병을 이끌고 석주(石柱)에서 왜적과 맞서 수십명을 죽였는데 그 피가 강을 물들여 이를 혈천(血川)이라 불렀다 한다. 뒤에 적이 다시 이르니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순조 때 지평에 증직되고 승지(承旨)로서 전남구례의 남전사(藍田祠)에 배향(配享)되었다. 韓 鳴 愈(한 명 유)공의호는 홍운정, 향사는 임실 신안서원.公의 관작(官爵)을 알 길이 없고 다만 전북 임실(任實)의 신안서원(新安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는 유록(遺錄)에 의해 상재(上特)하였다. 韓 亨 吉(한 형 길)1582(선조 15)∼1644(인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태이(泰而), 호는 유촌(柳村). 상(常)의 증손으로, 담(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민세주(閔世舟)의 딸이다. 의(儀)에게 입양되었다.1606년(선조 39)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0년(광해군 12) 호조좌랑으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그뒤 의성현령을 거쳐 장령을 지냈으며,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수령을 지내면서 형률을 과다하게 집행하여 바르고 깨끗한 인망이 없다는 이유로 직을 내놓았다.그러나 1637년(인조 15) 다시 우승지에 임명되고, 행좌승지·병조참의를 거쳐 도승지에까지 이르렀다.1642년에는 세자를 배종하여 심양(瀋陽)에 다녀오기도 하였으나, 심양에 있으면서 세자를 잘 보필하지 못하고 심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조정에 상세히 보고하지 않았다는 탄핵을 받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韓 重 熙(한 중 희)1661(현종 2)∼1723(경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희보(熙甫). 첨지중추부사 빈(彬)의 아들이다.1691년(숙종 17) 사마시를 거쳐, 1702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1704년 정언이 되었다.1705년 정월 궁방하인들의 작폐(作弊)에 대하여 상소하고, 그해 2월 사서를 거쳐 문학·지평이 되었다. 같은해 8월 과거의 폐단에 대하여 다시 상소하고, 1707년에는 대신접대에 있어 임금의 예모부족(禮貌不足)에 대하여 상소하였다.1710년 장령이 되었고, 1712년 오수원사건(吳遂元事件)을 소론(疏論)하였으며 1713년에는 유혁연사건(柳赫然事件)을 임금에게 자세히 아뢰었다. 같은해 7월 헌납(獻納)이 되었고, 사은사의 정사 임창군 혼(臨昌君 혼), 부사 권상유(權尙游)의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온 뒤 논사소(論事疏)를 올려 북막평사(北幕評事)의 임명을 신중히 할 것을 간하였다.1715년 보덕이 되었고, 1716년 동래부사로 있으면서 대마도에서 요구한 인삼무역을 임금님에게 아뢰어 이를 처리하도록 하였다.이듬해 경상어사 이명언(李明彦)의 복명에 따라 행정실책으로 문책을 당하여 파출되었다. 같은해 일본통신사에게 주어 보내는 문서의 문자표시문제를 해결하였고, 1718년에는 승지가 되었다.이듬해 승지로 동궁에 입대(入對)하여 세자의 감정통제에 대하여 진달하였고, 1720년 숙종국상에 정재륜(鄭載崙)이 숙직을 하면서도 성기(省記)가 없는 것을 문책하도록 세자(뒤의 경종)에게 상소하였다.1721년(경종 1)11월 강원감사를 지냈고, 이듬해 김동필(金東弼)의 상소에 김일경(金一鏡)의 일로 논란이 있다가 1723년 11월 간원(諫院)의 탄핵을 받았다. 곧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한 뒤 고향에 돌아가 죽었다. 韓 纘 男(한 찬 남)1560(명종 15)∼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서(景緖). 기(箕)의 아들이다.1605년(선조 38) 진사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607년 성균관박사가 되고, 사서·정언·헌납 및 예조정랑, 지평·장령을 역임하였다.1613년(광해군 5) 부응교가 되어 교리 이창준(李昌俊)과 함께 여러 차례 소를 올려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의 처벌을 적극 주장하였고, 이어 응교가 되어 춘추관편수관으로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1615년 호조참의·사예·좌우부승지·대사간을 거쳐 이듬해 재차 좌승지가 되어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아 해주옥사를 일으켰다. 이에 앞서 부응교로 있을 때에 훈련도감의 일을 천단하고 거기에 소속되어 있던 공장(工匠)들을 사사로이 부렸다고 하여 언관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1617년 도승지로 승진하고, 1620년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주살(誅殺)되었다. 韓 彦 沈(한 언 침)1551(명종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부(仲孚), 호는 성은(城隱). 업(업)의 아들이다.1579년(선조 1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0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1593년 형조좌랑이 되었으나 사헌부로부터 어리석고 망령되며 재직시에 비루하고 근실하지 못하였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1599년 평양서윤이 되었으며, 1604년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이르렀으나 이듬해 신경희(申景禧)역모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아 삭탈관직되어 문회송출(門外送黜)되었다.그뒤 직첩을 다시 받았으나 사헌부의 탄핵으로 환수되었다. 韓 詠(한 영)1580(선조 13)∼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영언(永言). 희록(希祿)의 아들이다.1606년(선조 3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지평·헌납, 홍문관부수찬·장악원첨정, 집의·부응교 등 주로 삼사(三司)에서 활동하였다. 붕당정치가 전개되면서 삼사는 왕을 위한 간쟁이나 백관에 대한 탄핵보다는 집권당의 전위기구화하여 자당을 위하여 타당을 공격하는 교두보 구실을 하게 되었다.광해군 때는 북인들이 정권을 잡아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삼사는 북인정권을 위한 권력기구가 되었다. 삼사에서 주로 활동한 그도 북인정권의 우두머리인 이이첨(李爾瞻)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따라서, 이이첨이 주동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살해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에도 적극 동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심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1623년 인조반정 때 이이첨의 당파로 몰려 정의(旌義)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韓 玉(한 옥)1571(선조 4)∼1629(인조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옥여(玉汝). 아버지는 광윤(匡胤)이며, 어머니는 허붕(許鵬)의 딸이다.1610년(광해군 2)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정언·박사·응교·이조좌랑·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에게 정인홍(鄭仁弘)을 적극 천거하였고, 이이첨(李爾瞻)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비하자는 폐모론을 제기하였을 때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여 북인의 정권유지에 공헌하였다.인조반정 이후 이이첨의 무리로 몰려 하동에 유배되었다. 유배중에 경원인(慶源人)인 양경홍(梁景鴻)이 양계현(梁繼賢)으로 하여금 오랑캐와 통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길을 인도하도록 하였다는 진명생(陳命生)의 고변(告變)과 오랑캐에게 보내는 흉서(兇書)를 가도사(假都事)가 조정에 보냈는데, 이 흉서를 정운백(鄭雲白)과 그가 같이 작성한 것으로 밝혀져 죽음을 당하였다
韓 重 爀(한 중 혁) ? ∼1697(숙종 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승지 구(構)의 아들이다.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민비(閔妃)가 폐위되고 희빈 장씨(禧嬪張氏)가 왕비가 되어 남인이 득세하자, 서인 김춘택(金春澤) 등과 함께 폐비민씨의 복위를 도모하고, 자금을 모아 요로의 인물들을 매수하려다가 1694년 함이완(咸以完)의 고발로 발각되었다.남인의 영수(領袖)인 우의정 민암(閔암)이 이 사실을 숙종에게 알리고 옥사(獄事)를 일으켜 김춘택 등 수십명과 함께 투옥되었다. 이 사건을 갑술옥사라 한다.그러나 왕이 민비의 폐위를 후회하고 있던 터라 민암을 사사(賜死)한 뒤 그의 일당을 숙청하고, 소론 남구만(南九萬)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였다.그러나 그해 10월 남구만이 “그들은 대담하게도 환국(換局)을 꾀한 자들이니 용서하지 못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드디어 장살(杖殺)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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