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 2일 청림회(1)
날씨가 매우 덥습니다. 개학을 해서 그런가, 여기도 개학을 한 것 같이 아주 출석률이 좋습니다. (웃음) 오늘 <법화경> <방편품>, 중송(重頌) 부분, 59쪽이 되겠습니다. 59쪽, 105번부터 할 차례죠. <법화경>을 둘로 이제 나눠서, 상하(上下)로 이제 나누면, 전 14품(前 14品), 후14품(後 14品), 이렇게 이제 나누죠. 전 14품(前 14品)은 이 <방편품(方便品)>을 제일 요품(要品)이라 그래요. <법화경>은 요품(要品)이라는 말을 써요. 아주 요긴한 품이다. 또 후14품(後 14品) 중에서는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을 요품(要品)이라고, 이제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고 많이 읽히는 품은 사실은 <방편품(方便品)>도 아니고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도 아니고 <보문품(普門品)>이죠. <보문품(普門品)>은 뭐, 그 인기가 아주 대단합니다. 변립(辨立)해서 <관음경>이라, 이런 말을 하지요, <관음경>.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따로 이제 <관음경>이라고, 독립해서 하나의 경전으로 그렇게 숭상하기도 합니다. 한국 불자들은 뭐 중국이나 일본도 거의 같습니다마는, 다 가슴·가슴에 관세음보살 한분씩 다~ 모시고 있죠. 그만치 관음 신앙(觀音 信仰)이 아주 대단합니다.
관음 신앙(觀音 信仰)은 어떻게 보며는 아주 얕은 것 같으면서도 아주~ 깊고, 깊으면서도 아주 얕고 그래요. 그건 이제 무슨 뜻인고 하며는 불교의 아주 높은 경지, 깨달은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가장~ 높은 그 경지도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그 가운데 충~분히 표현되고, 그 다음 아주 기복적이라고나 할까, 또는 다른 종교에서 그저 신(神)을 찬양하는,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는, 그런 차원의 어떤 신앙도 그 관음 신앙 속에 또 포함돼요. 가장 낮은 신앙 형태에서부터 가장 높은, 지극히 철학적이고 또 불교의 최고의 깨달음의 경지까지도 그 속에 포함되기 때문에 그래서 모든 근기를 다 포섭하는 것이 역시 관음 신앙이다, 이렇게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제 다같이 관세음보살을 불러도, 부르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 그 차원이 다른 거예요. 같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물을 대하는 일이나 또 우리가 <법화경> 전체를 이렇게 대하는 일이나 각자 자기의 관심과 또 그 사람의 어떤 수준에 따라서 그 취하는 것이 다르죠. 바라는 바가 다르고 취하는 것이 다르고. 또 거기에 뭔가 마음에 눈을 뜨는 대목도 다~ 달라요. 이제 사람들의 취향과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방편품>, 105번.
105. 舍利弗當知(사리불당지)하라 我以佛眼觀(아이불안관)호니
사리불당지(舍利弗當知)하라. 사리불아, 마땅히 알아라. 내가 불안관(佛眼觀), 이불안관(以佛眼觀), 불안(佛眼)으로, 부처의 눈으로써 관찰해 보니. 부처의 안목이라는 거죠. 우리는 보통 이제 안목을 가졌다~, 이렇게 이제 말할 수가 있고, 또 5안으로 말할 때, 육안(肉眼)은 이제 우리가 다 가지고 있죠. 육안(肉眼).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육안(肉眼)만 가진 게 아니라 각자 자기가 살아 온 경험, 또 공부한 것,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 환경, 이런 것들이 하나의 또 눈이 되요, 사실은. 그 눈이 하나의 자기 안목이 되어서 그 안목에 근거를 두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그런다구요. 여기는 이제 부처의 눈으로서 관찰해 보니,
見六道衆生(견육도중생)이 貧窮無福慧(빈궁무복혜)하야
육도중생(六道衆生)이 빈궁무복혜하야. 육도(六道)에 있는 중생. 뭐 지옥, 아귀, 축생도 전부 우리들 주변, 사람과 사람의 주변에 살고 있는 모든 중생들이 대개 빈궁(貧窮)하고, 복과 지혜가 없더라, 그래요. 그래서
入生死險道(입생사험도)하야 相續苦不斷(상속고부단)하며
생사의 험도(險道)에 들어가서 상속고부단(相續苦不斷)하며. 상속(相續)해서, 계~속적으로 그 고통이 끊어지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요. 불안(佛眼)으로서 보니까 거의...또 이제 부처님의 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보통 고통 받을 때 아주~ 아우성을 치다가 그 고통이 또 끝나버리면 언제 내가 뭐 괴로웠더냐는 듯이 잊어버리고 그렇게 사는 미련한 중생들하고는 달라서, 부처님은 사바세계의 고통을 상당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상처를 많이 입는, 그런 성격이라고 할까, 그런 안목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그런 데 대한 감각이 남달랐습니다. 물론 뭐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하기는 했습니다마는 그보다도 사실은 타고난 어떤 감성이 남다른 데가 있었다, 이렇게 이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천적으로 아주 종교적 천재로 그렇게 태어나신 그런 분이죠.
그런 분들의 안목에는 인생사가 사실은 크게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근데 이제 단순한 사람들은 좋을 때 막~ 히히덕거리고 좋아하다가 또 안 좋을 때는 죽을 맛을 이제 하고, 그러다가 또 어느새 잊어버리고... 이제 그러죠. 그래서 뭐 그런대로 잘 살아 가기도 합니다마는 부처의 안목으로 본다, 할 때는 그렇습니다, 고통으로 보는 것입니다. 거의가. 그래서 고해(苦海)니 화택(火宅)이니 이런 표현을 서슴없이 쓰죠. 그리고는
深著於五欲(심착어오욕)호대 如犛牛愛尾(여모우애미)하야
심착어오욕(深著於五欲). 깊이 오욕(五欲)에 집착해 있다. 오욕(五欲)은 이제 오근(五根)의 욕망입니다. 보통 우리가 중국이나 한국권에서 말하는 재색식명수(財色食名壽), 이 오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이까지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까지의 그런 오근(五根)의 욕망, 오근(五根)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 가는 거죠. 거기에 이제 집착해 있다. 마치 모우(犛牛)가 꼬리를 사랑하는 것과 같다. 모우(犛牛)라고 하는 검정 소, 그런 소가 있는 가 봐요. 근데 이제 꼬리가 길고 아름다운 가봐. 그래서 자기 꼬리를 아주~ 애착을 하는데, 마치 그와 같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을 오욕에 탐착해서 그와 같이 이제 애착을 한다.
以貪愛自蔽(이탐애자폐)하야
이탐애자패(以貪愛自蔽)로서. 탐욕과 애착, 이것으로서, 탐욕과 애착, 이것으로서, 스스로를 이제 막아 버리고
盲冥無所見(맹명무소견)이라.
아주 맹인과 같고, 캄캄한 데 있는 거와 같이 아무 것도 보는 바가 없다. 그러니까 탐애(貪愛), 탐욕과 애착에 우리가 눈이 어두워지면, 자폐(自蔽)라는 거는 그런 뜻이죠. 탐욕과 애착에 눈이 어두워지면 뭐 별별일 다 하잖아요? 금방 쇠고랑이 눈앞에 다가 오고 있는 데도 그거 못 보잖습니까? 그 어떤 자리를 이렇게 얻어 가지고, 그 자리를 행세해서 이익을 취할 수 있으면 금방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바~로 감옥행이고, 패가망신할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안 보이는 거예요. 그게 탐애자폐(貪愛自蔽)라, 돈이나 뭐 이런...그래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일수록 부정을 많이 저지르잖습니까? 기회만 되면 그만 부정을 저지르는 거야. 그게 이제 안 보이는 거죠.
그래서 맹명무소견(盲冥無所見)이라 했잖습니까? 맹명(盲冥). 맹인, 맹인의 어두움처럼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다. 보는 바가 없다. 맹인이 따로 없다는 겁니다. 어디에 집착을 해 버리면 그만 맹인이 되는 거예요. 집착해 버리면 그 때부터 맹인이 되는 거라. 그런 말 잘 쓰죠. “나중에 정신 차리고 보니까, 아이구, 나도 눈이 삐었지. 어떻게 ...” 그 다음 말은 내가 생략하겠습니다. (웃음·웃음) “나도 눈이 삐었지. 어떻게 ...” 그런 소리 우리가 잘 쓰죠. 그 눈이 삔 거예요. 맹명무소견(盲冥無所見)이 되는 거라. 왜냐? 탐애자폐(貪愛自蔽) 때문에. (웃음)
그 참 우리는 깨달은 분들로부터 이런 말씀을 자주 들어야 돼요. 그래 가지고 스스로 한 번 살펴보고·또 살펴보고...그래서 어두워질 때 어두워지더라도 또 이렇게 부처님의 밝은 가르침을 통해서 이렇~게 자신을 한 번 비춰 보고, 그래 성인(聖人)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고, 또 이 불교 공부가 그래서 좋다는 것입니다. 뭐 이런 소리 한 번 듣는다고 금방 사람 달라지지는 않죠. 참 사람 잘 안 달라집니다. 그러나, 자꾸 이렇게 훈습(薰習)함으로 해서, 이런 성인의 말씀을 훈습(薰習)함으로 해서 명훈가피력(冥薰加被力). 자기도 모르게 차츰차츰 조금씩 젖어 드는 거예요, 젖어 들어. 자신도 몰라, 그 젖어 드는 것은. 그게 효과죠. 그야말로 이슬에 옷이...물에 담근 것처럼 젖지는 않지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축축~이 젖어 들듯이. 옛날 조사 스님들이 그런 표현을 참~ 많이 했어요. 참 답답한가봐, 그러니까. 공부를 한다고 막 애를 써서 하는데 하루아침에 천지개벽되듯이 확 달라지는 게 아니거든요. 그 모든 거 다 희생하고 머리를 싸매고 이 일에 매진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뚜렷한 효과가 없다, 이 말이야. 그런데 이제 세월이 가면서 차츰차츰 달라지니까, 그래서 우리 예불문(禮佛文)에도 있듯이 명훈가피력(冥薰加被力)이라. 자기도 모르게, 모르는 사이에 훈습(薰習)이 되어 가지고 젖어 들고 있다. 그런 기대를 우리가 해야 되는 거죠.
不求大勢佛(불구대세불)과 及與斷苦法(급여단고법)하고
큰 힘 갖추신 부처님과 그리고 고(苦)를 끊는 그런 법을 구하지를 않고. 그러니까 성인(聖人)도, 이 세상에 부처님 같은 그런 성인, 조사 스님 같은 그런 훌륭한 성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관심 없다 이거야. 그리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게 단고법(斷苦法)이거든요, 단고(斷苦). 고통을 끊는 법.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이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구하지 않는다, 이거예요. 왜냐. 어떤 세속적인 가치에 그만 집착해 있으니까. 세속적인 가치에 그만 일찍~이 그렇게 집착해 있으니까 더 이상, 부처님 말씀·부처님 말씀 공부하자, 이런 거 관심 없어요. 너~무 그게 업이 돼 버려 놓으니까, 간혹 한번씩 이렇게 기웃거릴 줄도 알아야 되는데, 부처님 말씀 들으면 자기들의 삶에 큰~ 브레이크라도 걸리는 것처럼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죠. 그런 대세불(大勢佛), 큰~ 힘을 갖추신 부처님과 단고법(斷苦法), 모든 문제를 끊어 버리는 그런 이치. 그런 이치를 구하지 아니하고.
深入諸邪見(심입제사견)하여
깊이 여~러 가지 삿된 소견에 들어가 가지고서
以苦欲捨苦(이고욕사고)할새
문제로서 문제를 버릴려고 할 새, 그 말이죠. 고(苦), 고통으로서 문제로서 문제 해결을 해 봐야 그게 언제 해결이 됩니까? 고통으로서 고통을 버릴려고 한다. 크게 고통을 받는 분이 이 자리에 지금은 없으니까..., 그전에는 받았다 하더라도. 그런 고통과 아픔과 쓰라림과...온갖 정신적인 것·육체적인 것·대사회적인 것...이런 것들을 한마디로 저는 문제다, 이렇게 이제 표현을 합니다. 근데 경전에서는 고통이라고 하는 것, 이 ‘苦’자(字)를 잘 써요. ‘괴로울 고[苦]’자(字). ‘괴로울 고[苦]’자(字)도 맞죠, 뭐. 마음이 괴로우나 육신이 괴로우나...아니면 인간관계 때문에 괴로운 게 있거나...하여튼 괴롭다는 말도 맞는데, 나는 문제라고 잘 표현을 합니다. 문제로서 문제를 버릴려고 한다. 그거는 안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 단고법(斷苦法)이라고 하는 것, 고통을 끊는 법, 또 문제를 해결하는 법, 이게 뭐냐 하는 것은 불교를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해야 되지요. 또 간단하게 라며는 <반야심경> 한 편으로도 충~분히 대신할 수가 있습니다. 또 <법화경>에서는 여~러 대목에서 단고법(斷苦法), 문제 해결하는 법이 다~ 나왔구요. 한마디만 소개를 한다면 사실은 모~든 문제, 그리고 모~든 사물...뭐 일체 것은 전~부 연기(緣起)로 되었다, 고 보는 것이 부처님의 안목입니다. 부처님도 처음에는 몰랐죠. 깨닫고 나서 그걸 이제 아셨는데 ‘아!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가 있고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다~.’ 이게 이제 단고법(斷苦法)이예요, 사실은. 문제 해결의 열쇠라. 뭐 다른 것도 있겠지마는. 뭐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부름으로 해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도 있겠지마는 사실 부처님께서 많은 제자들에게 가~장 많이 말씀하신 그런 것은 모든 존재의 원리를 알고 그 원리대로 사는 것, 이게 이제 문제 해결의 열쇠다, 그렇게 보는 것이죠.
爲是衆生苦(위시중생고)로
이러한 중생을 위한 까닭으로
而起大悲心(이기대비심)호라
큰 자비의 마음을 일으켰다. 이제 사람들이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문제가 많고 또 깨달은 입장에서 보니까 너무 답답하죠. 보통 우리가 봐도 답답한 경우가 너무 많은데 부처님같이 그렇게 아주 훤~출하게 깨달으신 그런 입장에서 중생들이 살아가는 그런 모습을 볼 때 너~무 답답하죠. 이치를 모르고 사니까. 이치만 알고 제대로 살며는 그렇게 안 맹해질텐데 이치를 모르고 사니까 그렇게 답답하다는 거죠.
그래서 방편을 베풀게 됐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방편을 베풀게 된 까닭을 주~욱 이제 말씀하고 계십니다.
106. 我始坐道場(아시좌도량)하여
내가 처음 도량에 앉아서. 그러니까, 부다가야 보리수에 앉아서, 이 말이죠. 앉아서
觀樹亦經行(관수역경행)하며
뭐 계속 앉아있었겠습니까? 나무도 이렇~게 관찰하기도 하고 또한 경행(經行)도 했다, 그래요. 그러니까 나무 밑을 이렇게 거닐기도 한 거죠. 이걸 보며는 그냥 앉아 있기만 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於三七日中(어삼칠일)중에.
3·7일, 21일 동안.
思惟如是事(사유여시사)하되.
이와 같은 일을 사유하되. 이거 이제 21일 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인고 하면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21일 동안, 여기 이제 좌도량(坐道場)이라고 하는 말은, 깨달았다, 이 말이야. 처음 성도(成道)를 하고, 이런 뜻이 돼요, 사실은. 깨닫기 전 이야기가 아니라 깨닫고 나서! 나무도 바라보기도 하고·또 거닐기도 하고·앉아 있기도 하고 이러면서 21일 동안에 이 문제에 대해서, 당신의 깨달음과 중생들과의 그 갭(gap)에 대해서, 도대체 이제 내 깨달은 것을 이야기해 주고 싶은데 중생들의 근기는 그게 안 되니까~ 이야기해 줘봐야 비난만 듣고 괜히 가만히 있는 중생들, 성인의 말씀을 비난하고 성인까지 비난하게 해서 괜히 허물만 더 짓게 만드는 수가 생기겠다, 이거여. 잘못하면.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서 사유여시사(思惟如是事)라. 이와 같은 일들을 사유했다. 깊이 21일 동안 생각했다, 이거죠.
요런 말 때문에 <화엄경>을 결집한 이는, 21일 동안 <화엄경>을 이제 결집하는데, 편찬하는데, 요 21일에다 초점을 맞춰서 이제 결집을 해요. 그래서 21일 동안 부처님께서 깨달음~, 이라고 하는 그런 아주 큰~체험과 거기에 또 충격과 감동과 환희와 이런 것들을 <화엄경>에 이제 포함시키고, 그리고 또 당신의 깨달음이 진실인가, 아니면 가짠가 이것을 이제 점검하는 시간으로도 이제 21일 동안 그 속에 포함되기도 하고, 이제 그래요.
我所得智慧(아소득지혜)는
내가 얻은 바, 지혜라고 하는 것은
微妙最第一(미묘최제일)이건마는
미묘해서 가장~, 제일가는 것인데.
衆生諸根鈍(중생제근둔)하야
중생들은 여러 근기가 둔해가지고서는
著樂癡所盲(착락치소맹)이라
어리석어서 어두운 바에 착락(著樂)했다. 그러니까 이제 착락(著樂), 즐거움에 집착해 가지고 어두워서 이제, 눈이 어두워졌다, 이렇게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속적인, 우리가 살아온 어떤 삶의 가치관에 그만 집착해서 모든 존재의 실상(實相)을 볼 줄 아는 눈이 없다, 이거여. 그래 어두워졌다.
如斯之等類(여사지등류)를
이와 같은 등의 일들을. 사람들을.
云何而可度(운하이가도)하랴
어떻게 가히 제도하겠는가? 이걸 이제 상당히 고민을 했다는 것입니다. 21일 동안. 그런데 여기 이제 표현은 부처님은 범천(梵天)과... 자기의 어떤 마음의 소리를 이렇게 이제 범천(梵天)이라고 표현해요. 다른 경우도 이제 범천(梵天)이 뭐 이야기를 했다, 그런 <아함부> 경전 같은 데서도 있습니다. 이게 이제 과연 범천(梵天)이 했는지 아니면 혼자 이런 걱정을 하고 있는데 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이러한 소리가 들려 왔다, 이렇게 표현해도 좋죠.
그 부처님... <아함부> 경전 말씀 중에 아주 참 좋은 말이....하루는 부처님도 탁발하러 나가셨다가 밥을 못 얻고 오신 날이 있었어요. 그 참 우리가 지금 생각하며는, 특히 대승 불교권에서 부처님을 생각할 때, 그~ 만행만덕(萬行萬德)을 갖추신 위대하신 그런 어른이신데 어째서 밥을 못 얻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지마는, 사실은 우리가 경전을 통해서 이해하는 석가모니와 그 당시 석가모니의 삶은 상당히 거리가 있을 거예요, 틀림없이. 우리가 뭐 정확하게 안다 하더라도 얼마나 정확하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루는 밥을 전혀 못 얻고, 혼자, 시자(侍者)도 없이 혼자 터덕터덕 돌아오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이생각~저생각 하다가 ‘내가 이 밥을 못 얻은 것도 나라에서 정치를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어요. 그럴 수도 있죠, 뭐. 밥이 없어서 못 준 사람들도 많았을 테니까. 그래서 ‘정치를 어떻게 하기에 국민들이 이렇게 참~ 헐벗고 거지한테 밥 한 숟갈 줄 수 없는 그런 입장인가?’ 이런 망상을 부처님 나름대로 이제 하고 있는데 범천(梵天)이 ‘그러면 네가 한 번, 당신이 한 번 정치를 하시오.’ 이런 소리가 문득 들려오는 거야. 그게 이제 학자들은 범천(梵天)이라고 이제 되어 있지마는 사실은 마음의 소리다. 그 이제 ‘당신이 정치를 한 번 하면 어떻겠는가?’ 그러니까 또 대답이야. 자문자답(自問自答) 형식이지. ‘내가 무슨 힘으로 정치를 한단 말이냐?’ 그러니까 ‘아, 당신이야 신통도 있고 복도 있고 지혜도 있고 뭐 누구보다도 능력을 갖추신 그런 인격자 아니냐?’ 이렇게 이제 범천(梵天)이 그렇게 소리를 해요. 그러니까 ‘글쎄 그거 내 힘 가지고 한 인간의 욕심을 내가 채울 수 있을까? 한 인간의 욕심을 채우는 데는 저~ 설산(雪山)을 황금으로 변화시키고, 그것을 두 배로 늘려서 한 인간의 욕심을 채운다 하더라도 그거는 될 수가 없는 일인데, 어찌 그 많은 사람들의 욕심을 내가 다 채워줄 수가 있단 말인가?’
결국은 세속적인 정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인데 그 외에 뭐 다른 거냐?, 이거죠. 그래서 옛날부터 요순(堯舜)의 정치, 성인의 정치를 그렇게 이제...물론 이제 경전 상에서만 이야기하고 있지마는 그렇게 참 꿈에도 그리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정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이지 다른 거 아~무 것도 없거든요. 뭐 사람 되게 하고·사람 가르치는 그런 정치가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이제 그런 입장에서, 한 인간의 욕심을 채우는데도 저 설산(雪山)을 황금으로 변화시키고 그걸 배(倍)로 늘린다 하더라도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그것을 감당할 수가 있겠는가, 이런 그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그런 <아함부> 경전도 있어요.
여기에도 이제 부처님이 자신의 깨달음과 깨달음의 경계와, 그 깨달음을 일러줄 중생들의 근기와의 그 차이가 너무 벌어지기 때문에 이걸 어떻게 내가 제도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만 열반에 들어 버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여기도 이제 그렇게 나와요. 맨 끝에 줄에 보며는. 그런 생각까지 했는데 그 때
107. 爾時諸梵王(이시제범왕)과 及諸天帝釋(급제천제석)과
범천왕(梵天王)과 그리고, 제천(諸天), 제석(帝釋)과 그리고
호세사천왕(護世四天王)과
세상을 보호하는 사천왕과
급대자재천(及大自在天)과
그리고 대자재천과
병여제천중(幷餘諸天衆)의 권속백천만(眷屬百千萬)이
그리고 나머지 다른 하늘의 대중들, 백천만이나 되는 권속(眷屬)들이
공경합장례(恭敬合掌禮)하고 청아전법륜(請我轉法輪)커늘
공경해서 합장예배하고서 나에게 청하더라, 이 말이여. 무엇을? 법륜 굴리기를. 그럴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그런 얻기 어려운 법을 얻어 놓고 어떻게 그렇게 열반에 들려고 합니까? 어떻게 하더라도 법을 설해서 사람들을 좀 깨우치도록 그렇게 하십시오. 뭐 당장에, 당신이 깨달으신 경지를 다~ 설할 까닭이야 없지 않습니까? 차원을 아~주 낮춰서 저~ 유치원생들 가르치는 그런 마음으로 하나하나 그렇게 가르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이제 이야기를 했다는 거여.
108. 我卽自思惟(아즉자사유)하되
나는 스스로, 그런 청을 듣고 나는 스스로 사유하되.
若但讚佛乘(약단찬불승)이면
만약에 다만 불승(佛乘), 이거 부처의 경지거든요. 부처의 경지만을 가지고 찬탄을 한다며는 “나는 말이야, 이러이러한 경계를 깨달았어, 그래서 뭐 처음부터 색즉시공(色卽是空)·공즉시색(空卽是色)이야,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야...그 저~저~ 눈도·코도·귀도 뻔~히 있는데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없다, 눈도·코도·귀도 없다, 말이야...”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는 그거는 사실은 <법화경>이나 <화엄경>의 경지는 사실 아니거든요. 중간 경지 정도 된다고요, <반야부> 경전은. 그럼에도 그런 이야기도 못 알아들을 판인데, 부처의 경지를 다만 찬탄하기로만 한다면
衆生沒在苦(중생몰재고)하야
중생들은 고통에 빠져 있어서
不能信是法(불능신시법)일새
능히 이 법을 믿지 아니할 새. 당장에 뭐 배가 고파서 굶주리고 다른 어떤 문제들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데, 그런 아~주 고차원적인 까마득~한 그런 소리나 하고 있으며는 그것, 뭐 그게 법문(法門)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거여. 불능신시법(不能信是法)이죠. 이 법을 믿지를 아니할 새.
破法不信故(파법불신고)로
그러면서 오히려 법을 깨트리고 믿지를 않게 된다, 이거여. 저거 뭐 저런 소리를 하는가, 이렇겠죠. 나라도 당장 그런 소리 하죠. 그전에 무슨 무차선회(無遮禪會)에서 어떤 이가 꼭 외국, 외계인이 와서 노는 것 같더라, 이런 표현을 했거든요. 어느 무차선회(無遮禪會)에서 스님들이 법담(法談)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는 외계인들이 와서 노는 것 같더라, 그 외계인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노는 것같이 그렇게 이제 보이더라, 이런 표현을 했듯이, 그렇게 될 거라 말이죠. 파법불신고(破法不信故)로. 법을 오히려 깨트리고. 그렇게 표현을 해 버린다 이거지. 그리고 이제 믿지 아니하는 고로
墜於三惡道(추어삼악도)리니
삼악도에 떨어질 것이다. 더 이제, 현재보다도 더 못한 곳으로 떨어질 것이다.
我寧不說法(아녕불설법)하고
나는 차라리 설법하지 아니하고
疾入於涅槃(질입어열반)이라 하다가
빨리 열반에 들어, 팍 죽어 버릴까 보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했다, 이거여. 그 이제 자신의 깨달음은 너무 고귀한데 누구에게 가르칠래야 가르칠 길은 없고, 그러니 차라리 마, 죽는 게 낫다, 이렇게 이제 드러낸 거죠. 점잖은 표현으로 뭐 열반으로 표현했지마는 사실은 제대로, 분위기에 맞춰서 설법하면 뭐 내가 말한 식으로 안 하겠습니까? 그래
尋念過去佛(심념과거불)의 所行方便力(소행방편력)하고
마침내 이제 생각하게 됐죠. 그러면은 과거에 깨달은 사람들은 어떻게 했겠는가? 이걸 이제 생각을 하게 됐다는 거예요. 당신 혼자만의 일이 아닐 테니까, 이거는. 과거에도 얼마든지 그런 예들이 있었을 테니까. 그래서 곧 생각하기를 과거부처님의 소행방편력(所行方便力)하고 행하신 바, 방편의 힘을 곧 생각하고.
我今所得道(아금소득도)도
내가 지금 얻은 바 도(道)도.
亦應說三乘(역응설삼승)이로다
또한 맞추어서, 응(應)하야. 그러니까 근기에 응하여, 이런 뜻입니다. 아~주 저급한 중생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삼승(三乘)을 설하겠다. 저~ 밑에 유치원의 수준부터 이야기할 수 있지 참으로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며는, 아~주아주 실력이 없는 교설도 얼마든지 만들어 내어서 그 사람들 수준에 맞게 할 수 있어야 된다. 또 과거 깨달으신 분들이 그렇게 했고 그렇게 할 것이다, 하고는
109. 作是思惟時(작시사유시)에
이러한 생각을 할 때
十方佛皆現(시방불개현)하사
그 때 시방의 부처님이 다~ 나타나사. 이건 뭐 실지로 나타났다고도 할 수가 있고, 당신의 마음속에 과거 깨달으신 분들이 다~ 확연히! 떠오르면서 자신을 이제 격려하고, 찬탄하고 또 힘을 주고, 이렇게 했다고도 할 수가 있죠.
이 불교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성인의 문제나 아니면 사물이거나간에, 내가 마음으로 생각함으로 해서 있다고 보는 것이고, 또 이렇게 나타났다~손 치더라도 내 마음에 그러한 존재가 있지 아니 하면은 그것은 없는 걸로 보거든요. 그러니까 삼라만상도 그렇고, 뭐 부처님도 그렇고, 어떤 이치도 그렇고 그렇습니다. 전~부 내 마음속에 이미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밖의 부처님이 됐든 아니면 뭐 세계가 됐든·세상이 됐든 간에 그것이 말하자면 인정을 받게 되는 그런 입장입니다. 그래서 뭐 “밖에 있는 부처님이 먼저냐, 아니면 내 마음의 부처가 먼저냐?” 그거는 꼭 이제 나눌 수는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들이 어떻게 보며는 애매모~호 하지마는, 사실은 어떤 마음의 이치에 좀 통달해 있다며는 이렇게 밖에 말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시방불개현(十方佛皆現)이라. 다 나타났다, 이거여.
梵音慰喩我(범음위유아)라
범음(梵音), 아주 깨끗한 음성으로 나를 위유(慰喩)했다. 위로하고 깨우쳐 주시기를.
善哉釋迦文(선재석가문)
선재(善哉)라, 석가모니여,
第一之導師(제일지도사)여
제일의 도사(導師)여.
得是無上法(득시무상법)하고
이 무상법(無上法), 최상의 법을 얻고
隨諸一切佛(수제일체불)하여
여러~ 일체 깨달은 이들을 따라서
而用方便力(이용방편력)이로다.
방편력을 씀이로다. 이제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아 그대도 참 이제 방편을 써서 수준을 팍~ 낮춰 가지고서 아주 캄캄한 중생들을 하나하나 처음부터 깨우쳐 갈려고 하는구나. 참~ 훌륭하고 훌륭하다, 하는 그런 의미죠.
110. 我等亦皆得(아등역개득) 最妙第一法(최묘제일법)이언만은
우리들도. 이건 부처님들의 말씀이죠. 과거 부처님들의 말씀이라. 우리들도 또한 가장 아름답고 제일가는 법을 다 얻었었어. 석가모니 당신만 그런 것을 얻은 것이 아니라 우리들도 다 그렇게 얻었건마는
爲諸衆生類(위제중생류)하야
여러 중생들을 위해서
分別說三乘(분별설삼승)호라
분별해서, 나누어 가지고서 삼승(三乘)을 설했다. 뭐 그대만 그렇게 그런 어려움을 겪은 것이 아니라 우리들도 다~ 그렇게 가장 큰, 그 법을 얻고, 가장 미묘하고 제일가는 법을 얻었지마는 거기에서 나누고·나누고·나누어서 아주 수준낮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삼승(三乘)을 설했다, 이런 말이야.
111. 小智樂小法(소지락소법)하야
지혜가 작은 사람, 작은 지혜는~ 작은 법을 좋아해서
不自信作佛(불자신작불)일새
스스로 부처 지을 것을 믿지 아니할새
是故以方便(시고이방편)으로
이러한 까닭에 방편으로서 분별하야
分別說諸果(분별설제과)하니
제과(諸果)를 설하니. 제과(諸果)라고 하는 것은 이제 여러 ~가지 결과인데, 이제 우리 마음 가운데 바라는 바·구하는 바, 이것이 이제 우리 불교 안에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마다 바라는 바·구하는 바가 다~ 다르죠. 또 뭐 오늘은 이거를 또 부처님한테 부탁하고, 내일은 또 다른 거 가져와 가지고 또 부탁하고, 또 해마다·해마다 이제 부탁하는 것도 또 다르고...늘 그렇잖습니까? 그런 것을 이제, 구하는 거예요. 이거 어쩔 수 없는 거죠. 아프면 얼른 병 낫게 해야 되고 무슨 뭐 땅 팔 일 있으면 잘, 높은 값 받고 팔리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거고...이게 이제 당면한 문제 아닙니까, 사실은.
정말 이제 대승 경전(大乘 經典)이라든지, 선문(禪問)이라든지 아주 참 높은 가르침이 들을 때는 참~ 좋아요. 좋고, 거의 뭐 팔구십 프로 부처가 된 거 같은 그런 느낌이 들지마는, 또 정작 현실로 돌아오면 현실은 현실대로 그대~로 있다고. 그 현실을 딱! 봉착하게 되면 역시 이제 괴롭고, 문제가 안 풀려서 거기에 또 이리저리 끄달리게 되고...그래서 부처님도 방편으로서 여러 가지 과보를, 여러 가지 결과를 설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뭐든지 심중소구소망(心中所求所望)을 전부다 들어 준다~. 그래서
雖復說三乘(수부설삼승)이나
비록 다시 삼승(三乘)을 설하나
但爲敎菩薩(단위교보살)이니라
그렇지마는 사실은 그 목적은 보살을 교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건 이제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그 다음에 나아갈 길은 말하자면, 부처의 경지거든요. 그러니까 최고 수준, 최고의 어떤 깨달음의 경지를 이야기할려면 바로 그 깨달음 직전!에 있는 사람, 그 경지 바로 밑에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해야 그게 먹혀들어가거든요. 그러니까 뭐 대학 수준을 이야기할려며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 들어 온 사람에게 이야기해야 그게 맞는 일이지, 초등학교 학생 데려다 놓고 대학교 수준을 이야기 하며는 그건 안 되죠. 그래서 이제 단위교보살(但爲敎菩薩)이라고 하는 말이 이제 그런 말입니다. <법화경>에는 이 표현이 아주 많~죠. 그래 이제 이런 말을 하게 된 연유는 그렇게 된 것입니다.
112. 舍利弗當知(사리불당지)하라
사리불아, 마땅히 알아라.
我聞聖師子(아문성사자)의
내가 들으니 성사자(聖師子)의
深淨微妙音(심정미묘음)하사옵고
깊고 깨끗한 미묘음(微妙音)을 듣사옵고
稱南無諸佛(칭나무제불)하며
나무제불(南無諸佛)·나무제불(南無諸佛), 이렇게 일컫는다, 이 말이야. 그렇게 하며
復作如是念(부작여시념)하되
다시 또 이와 같은 생각을 하되
我出濁惡世(아출탁악세)하니
나는 탁악세(濁惡世)에서 나왔으니
如諸佛所說(여제불소설)하야
모든 부처님의 설하신 바와 같이
我亦隨順行(아역수순행)하리라
나도 또한 수순행(隨順行)을 하리라. 어쩔 수 없이 이런 세상에, 나도 이제 여기에 태어났다, 이거야. 여기 나왔다, 출현했다, 이 말이여. 아출탁악세 (我出濁惡世)라고 하는 것은. 나도 이 세상에, 저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동시대에 같이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해? 다른 부처님들도, 다른 깨달은 분들도 그렇게 살았듯이 나도 역시 수순(隨順)해서, “성인(聖人)도 시속(時俗)을 따른다”고, 나도 수순(隨順)해서 그렇게 실천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야기죠.
113. 思惟是事已(사유시사이)하고
이 이야기를 이제, 이런 일을 다 이제 생각해 마치고는.
卽趣波羅奈(즉취바라나)라
이래서 내가 깨닫고 나서, 부다가야 보리수에서 깨닫고 나서 3·7일, 21일 동안 그런 생각을 이제 했죠. 그리고는 여기에 이제 금방 이야기한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여러 천왕들이 청법(請法)을 했고 그 청법(請法)에 의해서 마음이 이제 좀 돌아섰고, 마음이 돌아섬과 동시에 모든 부처님이 나타나서 찬탄을 하고, 그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들도 과거에 그런 깨달음을 얻고 나서 그런 고민에 빠졌었고, 결국은 이제 방편을 써서 중생들을 교화하게 되었다, 이제 그 말을 듣고 스스로, 마음을 이제 고쳐먹게 됐죠. 그리고는 바로 바라나시(Varanasi). 베라나시죠. 녹야원(鹿野苑)에 이제 가서 5비구를 만나서, 비로소 이제 아주~ 기본적인, 아주 기초적인 그런 그 가르침을 펴게 됐다, 하는 그런 이야기죠. 그 이제 우리 뭐 보통 불자님들이 다~ 잘 알고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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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尋念過去佛(심념과거불)의 所行方便力(소행방편력)하고 : 곧 생각하기를 과거부처님의 행하신 바 방편의 힘을 곧 생각하고 我今所得道(아금소득도)도 : 내가 지금 얻은 바 도(道)도 亦應說三乘(역응설삼승)이로다 : 중생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삼승(三乘)을 설하겠다. 作是思惟時(작시사유시)에 : 이러한 생각을 할 때 十方佛皆現(시방불개현)하사 : 그 때 시방의 부처님이 다 나타나사 梵音慰喩我(범음위유아)라 : 범음(梵音), 아주 깨끗한 음성으로 나를 위로하고 깨우쳐 주시기를 ....
○我等亦皆得(아등역개득) 最妙第一法(최묘제일법)이언만은 : 우리들도 또한 가장 아름답고 제일가는 법을 다 얻었건만 ..... 不自信作佛(불자신작불)일새 스스로 부처 지을 것을 믿지 아니할새 ○是故以方便(시고이방편)으로 이러한 까닭에 방편으로서 분별하야 分別說諸果(분별설제과)하니 : 여러 가지 결과를 설하니 ○雖復說三乘(수부설삼승)이나 : 비록 다시 삼승(三乘)을 설하나 但爲敎菩薩(단위교보살)이니라 : 그렇지마는 사실은 그 목적은 보살을 교화하기 위한 것이다. .....
○我出濁惡世(아출탁악세)하니 나는 탁악세(濁惡世)에서 나왔으니 如諸佛所說(여제불소설)하야 모든 부처님의 설하신 바와 같이 我亦隨順行(아역수순행)하리라 나도 또한 수순행(隨順行)을 하리라.... 감사드립니다! 큰스님! _()()()_ 감사드립니다! 가을 햇살님!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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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햇살님! 고맙습니다... _()()()_
斷苦法;일체는 연기 현상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반야 심경
--이러한 존재 원리를 알고 존재 원리대로 사는 것이 문제 해결의 열쇠
小智樂小法 不自信作佛
바라나=베르나시=녹야원
;초전법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