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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구름따라 흘러흘러 천년고찰 송광사에
스님의 앞에는 다시 정처없이 떠나가는 행운유수(行雲流水)의 길이 남쪽으로 열려 있었다. 금강산을 떠나 남쪽으로 방향을 잡으니 마땅히 정한 곳은 없으나 자연히 동해안을 따라서 설악산에 발길이 머물렀다.
그후 오대산에서 한암(漢岩)스님을 뵈옵고 덕숭산(정혜사)에서는 만공선사로부터 선옹(船翁)이라는 호(號)를 받았다.
송광사 전경
만공선사와 이별하고 호봉스님은 남으로 남으로 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발길이 닿은 곳이 천년사찰 송광사.
보조국사의 품안에서
송광사는 우리 나라 삼보(三寶)사찰 중 승보사찰로 유명하다.
삼보란 무엇인가. ‘세 가지 보물’이란 뜻이다. 산스크리트어로 라트나트라야(Rama-traya) 또는 트리라트나(Tri-ratna)라 한다. 그것은 첫째가 진리를 깨달은 붓다(Buddha), 둘째가 붓다가 깨달은 진리, 곧 다르마(Dharma), 그리고 그 가르침을 신봉하며 수행하는 사람들의 집단인 상가(Sangha)를 말한다. 붓다를 불(佛), 다르마를 법(法), 상가를 승(層)이라 번역하여 불 · 법 · 승 셋을 합하여 삼보라 한다. 우리 나라는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신 통도사를 불보사찰, 불설대장경이 간직된 해인사를 법보사찰,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를 승보사찰이라 하여 보물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이 세 절을 삼보사찰이라 부른다.
송광사는 전남 승주군 조계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으면서 일찌기 여기서 선풍(禪風)이 일어나 오늘날 한국불교 조계종 종지(宗旨)의 발상지가 되었다. 고려 말 원(元)의 침략으로 퇴폐한 시대를 맞아 불교는 기복제액(祈福除厄)으로 흘러서 본지를 벗어나고 있을 때 보조지눌국사가정혜결사(定慧結社)운동을 벌여서 기복불교를 버리고 불교를 중흥하는 역사적인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정혜결사의 요체인 정과 혜는 계와 더불어 삼학으로 불도 수행의 근본 이념이 아니던가. 그때 보조국사가 정혜결사를 결성하게 되는 고고한 외침에 잠깐 귀를 기울여보자.
마땅히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깃들어 항상 정(定)을 익히고 혜(慧)를 고름으로써 업무를 삼으며, 부처님께 예배하고 경전을 읽으며, 맡은 업무에 이르러서도 각각 그 소임을 따라 경영하여, 이같이 연(緣)을 따라 심성을 수양하면서 평생을 진인달사(眞人達土)의 고행(苦行)을 쫓아가면 어찌 유쾌하지 않으랴.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후 열여섯 명의 국사를 배출했으나 가히 승보사찰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다. 효봉스님이 또한 송광사에서 l0년 동안 머물며 이 나라 불교의 중흥에 몸바쳤으니 송보사찰이라는 이름이 다시 그 빛을 더한다. 그러면 어찌하여 운수행각을 방편으로 삼는 스님이 10년씩이나 한곳에 머물게 되었던가. 여기에는 예사로이 보아 넘기지 못할 숙연과도 같은 한 토막 이야기가 있다.
꿈속의 고봉화상으로부터 ‘효봉’법호 받아
효봉스님은 예산 덕숭산 만공선사의 선풍에 흠뻑 취한 채 구름처럼 바람결에 실려 발길을 조계산으로 향했다. 조계산 어구에 다다랐을 때 효봉스님의 업에서는 누구 듣는 이도 없는데 이런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것 참 이상한 일도 다 있구나. 내 일찌기 이곳에 한번도 와본 일이 없건만 어찌하여 산모퉁이 길이며 돌뿌리 하나하나가 마치 고향집같이 느껴지는 걸까.”
스님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낯익은 듯한 주위를 휘휘 둘러보고는 다시 걸음을 떼어놓았다. 스님이 태어난 곳은 평안도 지방이므로 성장하여 일본유학을 마칠 때까지 고향을 떠나 본 적이 없었고 판사를 그만두고 엿장수 행각을 벌일 때도 산천을 두루 돌아다녔으나 이곳까지는 와보지 않았었다. 분명히 처음 오는 곳인데도 낯설지 않다면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단 말이던가. 어쩌면 이절에서 전생에 오래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울 하며 송광사의 경내로 들어섰다.
이름 그래도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산자락에 새둥지처럼 송광사는 아늑해 보인다. 지금은 이름이 조계산이지만 신라 말 혜린선사가 처음 절을 짓고 길상사라 할 때는 이 산의 이름이 소나무가 많다하여 송광산(松廣山)이라 했다. 그러니 절이름을 산에서 빌리고 산이름을 이 절의 종지에서 빌려간 셈이다. 절과 산이 서로 이름을 주고 받으며 바꾸어 달고 있는 것도 깊은 인연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 산에서 열여덟 분의 국사가 배출되어 세상을 널리 제도할 지세라서 십팔공(十八公)의 파자(破字)인 송(松)자와 넓을 광(廣)자를 따서 송광사라 불렀다는 전설도
있다.
밤이 되자 송광사는 저녁연기가 자욱이 깔려서 한폭의 동양화같이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저녁예불 드리는 염불소리가 청아하게 하늘로 닿았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건물이 가장 많고 도인이 가장 많이 배출되고 성보(聖寶) 문화재를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다 해서 삼다사(三多寺)라 자랑했던 승보사찰 송광사 비가와도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다닐 수 있다던 장엄한 도량의 모습이었으나 공부하는 스님들이 많지 않았으니 황량하기만 했다.
일본 불교의 영향이 이곳 승보의 도량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효봉스님이 처음 송광사에 당도한 서기 1937년 송광사에는 사판(事判)스님들은 많았으나 여법(如法)하게 수행하는 수행스님들은 많지 않았다.
“내 이 절을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 나를 여기에 오게 한 것은 전생부터의 인연인지도 모르지.”
그러나 떠돌아 온 객승의 입장에서 당장 이러니 저러니 남의 앞장을 서서 주장을 내세울 형편도 못되어서 1년 남짓 묵묵히 참선수행에만 전념했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 효봉스님이 결가부좌하고 참선삼매에 빠져 있는데 노스님 한 분이 빙그레 웃으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래, 정진(精進)은 여일(如一)한가?”
“이제까지 한번도보지 못한 노장스님이었다. 효봉스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스님께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흑시 산내 조그만 암자에 기거하고 계시는 스님이라면 여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으니 모를 수도 있었다.
“스님께선 누구시옵니까? 한번도 봐온 적이 없사온데 어느 암자에 기거하고 계시온지요?”
“나는 보조국사의 16세 법손(法孫) 고봉(高峰)이라네.”
“네? 고려의 마지막 법손이신 고봉화상이시라고요?”
“그러하다네. 내 이제 그대에게 효봉(曉峰)이라는 법호를 내리고 게송을 전할 것이니 잘 지녀가지고 이 도량을 더욱 빛나게 해주게, 알겠는가?” “예, 스님 ! 명심하여 듣고
지니겠습니다.”
효봉스님은 두 손을 합장하고 엎드려서 고봉화상에게 절을 하였다. 절을 마치고 두 무릎을 꿇고 앉으니 고봉화상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주었다.
번뇌가 다할 때 생사가 끊어지고
미세히 흐르는 망상 영원히 없어지네.
원각의 큰 지혜 항상‘ 뚜렷이 드러나니
그것은 곧 백억의 화신불 나타남이네.
(煩惱盡時生死絶
微細流注永斷滅
圓覺大智常獨存
卽現百憶化身佛)
게송을 듣고 일어나 다시 절을 올리고 나서 보니 고봉화상은 어느 순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눈앞에는 오직 동잔불만이 숨죽인 듯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꿈이었다. 꿈속에 고봉화상이 나타나서 게송을 준 것이었다. 효봉스님은 정신을 가다듬고 꿈속의 일을 돌이켜 보았으나 아직도 생생하게 고봉화상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그것은 꿈이면서 꿈이 아니었다. 효봉화상은 지필묵을 펴서 방금 고봉화상이 준 게송을 그대로 옮겨적었다.
인재 양성과 사찰 보수에 쏟은 정성
효봉이라는 이름은 이때부터 나왔고 효봉스님도 다른 이름보다 이 이름을 즐겨 썼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은 효봉스님이 이제까지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송광사의 일에 관심을 덜 가졌던 태도를 일변하여 적극적으로 송광사의 중흥에 힘을 쏟은 일이다. 그뿐 아니라 승적을 금강산 신계사에서 이곳 조계산 송광사로 옮겨 본사(本寺)로 삼은 일이며 뒷날 후학들에게 제2정혜결사운동올 발원하고 중창불사를 하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효봉스님이 이 절에서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머문 것도 한 절에서 가장 오래 머문 기간이며, 절을 중창하고 많은 후손을 길러낸 것은 바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뒤의 일이었다. 그래서 우선 절을 일으키기 위해서 대중을 불러모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계정혜(歲定慧) 삼학(三學)으로 무장한 절의 법도를 가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효봉스님은 스스로 수행에 한치의 어그러짐이 없도록 수범을 보였다.
도인스님으로의 명 망 높아져
이 무렵 서른을 갓 넘을까 말까한 청년이 찾아왔다.
“어디서 무슨 일로 이 중을 찾아오셨는가?”
“예, 저는 전라도 남원에서 온 소봉호라고 합니다. 송광사에 도인스님이 게시다기에
효봉스님이 송광사 삼일암 조실에 머무는 동안 수좌들은 물론 신도들 사이에서 어느덧 도인스님으로 통하고 있었다. 효봉스님은 젊은이의 이 대답에 얼굴 표정이 굳어지며 두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도인이 되겠다고? 더구나 생사를 벗어난 도인이?”
“예,그러하옵니다. 스님, 허락하여 주십시오.”
효봉스님은 젊은이의 말을 듣자 옛날 금강산으로 도인을 찾아서 엿판을 지고간 자신의 모습이 언뜻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효봉스님은 지그시 눈을 감고 엿판을 진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그래, 무슨 까닭으로 중이 되려하는가?”
“소생은 남원에서 이발관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신병(폐결핵)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주에 산다는 하처사(河處士)라는 분이 병 나을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었습니다.
’하늘에 해는 언제나 밝게 비추련만 구름이 끼어서 햇빛을 가리니 비바람이 부는 이치를 아시오? 이처럼 본래 사람마다 갖춘 자성자리는청정한법이니 잃어버린 자성자리를 찾으면 병이 나을 것이오. 구름으로 말하면 전생의 업이요, 전생의 업을 소멸시켜야 병이 나을 것이오. 천수관음(千手觀音)기도를 하시오. 100일 기도를 마치면 병이 나을 것이오.’ 이렇게 일러주어서 남원 영원사를 찾아가 100일 동안 천수관음 기도를 마쳐 소생은 관세음보살 은덕으로 목숨을 건졌기에 그 은덕을 갚고자 중이 되려 합니다.
이 말을 듣고 효봉스님의 표정은 일순간 굳어지며 언성이 높아졌다.
“그런 일이라면 잘못 오셨네. 이 늙은중에게는 그런 신통력이 없으니 그만 돌아가게.”
“스님! 제발 소생을 바른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스님!”
“어허, 안된대도 그러는구먼. 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닐세. 더구나자네는 불교를 고행을 해야하는 종교인 즉 젊은이의 생각은 천리만리 멀리 떨어져있는 게야. 그러니 어서 돌아가서 농사나 열심히 짓게. 일심으로 농사를 짓는 것도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며 관세음보살의 은덕을 갚는 일이 될걸세.”
“저는 집에 돌아가야 농사지을 땅도 없습니다. 다시 이발소에서 이발가위를 들기는 더욱 싫습니다. 제가 폐병에 걸린 것은 이발관에서 일한 때문입니다.”
젊은이가 이발사였다는 사실에서 효봉스님의 머리 속을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이름이 떠올랐다.
우바리 존자.
“이발사라? 그대가 정녕 이발사를 했단 말이지?” 효봉스님은 젊은이가 이발사였다는 사실에 정색을 하고 되물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우바리 존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우바리 존자는 부처님의 10대제자 가운데 계행을 가장 잘 지킨 제자다. 우바리 존자 역시 이발사 출신이었으므로 남원 청년이 이발사였다는 말을 듣고 이상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인도는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범신(楚神)의 후예를 자처하는 브라만(승려), 그들의 하수인 크샤트리아(무사 · 왕족) 바이샤(평민 · 농공상인)가 있고 그 아래에 슈드라라는 노예계급이 있었는데 이발사는 노예계급이었다. 브라만은 이찰 사성(四姓)계급의 조상이 신분에 따라 태어나는 방법도 다르다고 주장했다. 브라만은 범신의 입으로 낳고, 크샤트리아는 범신의 옆구리로 낳고, 바이샤는 배로, 슈드라는 발뒤꿈치로 각각 태어났다는 설화를 지어서 믿게 했다. 그러므로 브라만계급은 소, 말, 양, 사람을 희생하여 신에게 제사하고 도덕적 교훈과 계율적 규칙을 가지고 다른 계급을 지배했다. 만일 슈드라가 경전을 펴보거나 찬가를 부르면 눈을 빼고 귀를 막는 엄격한 벌을 가하였다.
인간과 천상에 큰 복밭을 갈고자 해인사로
이러한 사실을 떠올린 효봉스님은 다시 한번 젊은이이게 물었다.
“자네가 정말 이발사였단 말인가?”
“예, 그러하옵니다만 이발사는 출가를 할 수 없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고 중이 되면 고향도 버리고, 부모처자도 버리고, 나처렴 먹물 누더기를 걸치고, 거친 밥에 잠을 참으면서 고행을 해야하나니 아무나하는 것이 아닐세. 세상에서 하는 일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중노릇하는 것보다는 쉬울 것이요. 중노릇하는 만큼만 세상에서 고생을 하면 남부럽지 않게 부자로 잘 살 수 있을 것이야.”
“저는 이미 마음에 결심한 바가 있습니다. 스님께서 머리를 깎아 주지 않으신다 해도 저는 이 절에서 떠나지 않겠습니다.”
“젊은이는 집으로 가서 다시 한번 생각하시게. 더구나 천수관음기도를 했다 하니 천수관음기도를 부르는 놈이 누군가 참구하고 그놈을 알겠거든 다시 오게.”
남원청년 소봉호는 효봉스님과 대화를 통해서 일단 집으로 가서 관옴기도를 하면서 출가를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판단되어서 집으로가서 관음기도를 계속했다. 그러나 이끌어주는 사람 없이하는 기도에는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그럴수록 머리 속에서는 효봉스님의 인자한 얼굴이 떠나지를 않았다. 소봉호는 집안일을 정리하고 다시 송광사로 떠났다.
“스님, 문안 올립니다.”
“누구시던가?”
“석달 전에 찾아뵈었던 이발사이옵니다.”
“옳지! 그랬구만. 그동안 기도를 잘하고 있는가?”
“집에 가서 100날 동안 기도를 했으나 아무래도 기도가 진전이 없어서 스님의 인도를 받고자 왔습니다. 저를 이끌어주십시오, 스님!”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난 이듬해 초파일날 효봉스님은 삼일암에서 소봉호의 머리를 깎아주고 수련(秀蓮)이라는 법명을 내렸다.
“내가 오늘 부처님 오신 날에 그대에게 사미계를 줄 것이니 열 가지 계율을 잘 지켜서 수행에 한치의 차질이 있어서는 아니될 것이니라. 그 첫째는 살생하지 말 것이며, 둘째는 도둑질하지 말 것이며, 셋째는 음행하지 말 것이며, 넷째는 거짓말하지 말 것이며, 다섯째는 술 마시지 말 것이며, 여섯째는 때가 아닐 때 먹지 말 것이며, 일곱째는 춤과 노래를 보거나 듣지 말 것이며, 여덟째는 향수를 바르고 몸단장을 하지 말 것이며, 아홉째는 높고 큰 자리에 앉지 말 것이며, 열째는 금은 보물을 지니지 말 것이니라. 이 열 가지 계율을 잘 지키고 마음 공부에 힘쓰면 반드시 깨달음이 있어서 번뇌망상을 벗어날 것이니라.”
효봉스님으로부터 머리를 깎고 십계를 받은 남원청년 이발사 소봉호는 수련 사미(沙彌)가 되어서 효봉스님의 계행을 본받아 뒷날 또한 효봉문하의 제일 제자가 되었으니 바로 유명한 구산(九山)스님이다. 효봉스님이 예견한 대로 구산스님은 우바리 존자가 된 셈이다.
그러는 가운데 8 ·15광복을 맞이하게 되었고 불교계도 자성의 소리가 높아져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그래서 가야산해인사에 가야총림을 열고 인재 양성을 위한 구체적인 일들이 진행되었다. 총림이란 선(禪)이나 교(敎)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염불에 이르기까지를 가르치는 학림(學林)을 말함이니 그야말로 불교의 중흥을 위한
총체적인 종합수도원이다.
불교계에서는 가야산 해인사에 가야총림을 열고 그 총림을 맡아서 지도할 최고의 지도자를 찾은 결과 중론이 효봉스님으로 모아졌다. 당시의 고승으로는 덕숭산에 만공선사, 오대산에 한암선사, 영취산에 용성선사 등 큰스님이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 분들은 고령(高齡)이라서 활기찬 총림의 기틀을 마련하려면 추진력이 있는 다음 세대가 맡아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효봉스님은 가야총림의 방장화상으로 추대되었으나 극구 사양하고 조계산을 떠날 뜻이 없음을 알렸다. 그러나 불교 중흥을 위해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교계의 뜻이 소중함을 알고 막무가내로 우겨댈 수만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서기 1946년 가을, 스님은 10년간 머물었던 송광사를 떠나야 했다.
가야총림은 삼보사찰 가운데에서도 8만4천 법문의 장경각이 있어서 법보사찰로 유명하다. 해인사를 품고 있는 가야산은 산이 깊을수록 삼림은 울창하고 물이 맑아 골짜기마다 절경이요, 물굽이마다 선경을 이룬다. 가야산 동구에서 무릉교를 건너 해인사에 이르는 산길 십리 길은 길옆에 늘어선 기암괴석 속살처럼 흰 반석 위로 흐르는 옥같은 물결, 물소리 솔바람소리 새소리 어느 것 하나 가야산의 아름다움을 위해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