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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유인의 길
발 없는 발로
1. 광나루에서 겨울을 나신 스님께서는 봄 기운이 감돌자 바로 그 곳을 떠나셨다.
스님의 육신은 모래톱 고행으로 아예 걸어다니는 미아처럼 변해 있었다.
그전에도 이미 동상에 거릴 만한 살 한 점도 없는 몸이셨지만 모래톱의 겨울은 그나마 스님의 혈과 육을 완전히 메말려 놓았다.
오로지 형형한 눈빛만이 살아 있음을 보여줄 뿐이었다.
스님의 안광은 강변의 겨울 밤에 유독히도 빛나는 별빛처럼 그렇게 보였다.
2. 스님께서 그때를 회고하셨다. "그냥 묵묵히 걷다 보면 날씨가 굿을 때라도 상관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산등성이 골짜기 어디를 가도, 길이 있건 없건 상관하지 않았다. 길을 잃어도 그만이라, 정처가 없으니 길이다,
아니다를 생각하지 않았다. 기껏 가보아야 항아리 안인 것을 이리 가면 어떻고 저리 가면 어떻겠는가 할 뿐이었다.
그렇게 겆다 보면 주위의 모든 것이 나를 주시하고 지켜 주는지라 구태여 내가 나를 돕는다 할 것도 없었다."
3. 스님께서는 어느 때 생풀을 씹어 연명해야 하는 경험을 하게 되셨다.
무심 중에 동쪽으로 나아가는 산길을 완전한 산 사람의 생활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서낭당에 꽂아둔
마른 명태가 성찬이 되기도 했고 이름 모를 열매와 뿌리가 주식이 되어 목숨을 이어 주었다.
그러나 마침내 풀 뿌리조차 구할 수 없는 순간이 왔을 때 스님께서는 마치 초식 동물이 그러하듯 생풀을 씹어 자셨다.
스님께서 죽지 않을 만큼의 먹거리를 제공해 주던 섭리가 어느 순간 시험을 걸어온 셈이었다.
4. 스님께서는 그것이 먹을 수 있는 독초인지 약초인지를 알 수 없는 처지에서 무심코 풀을 뜯어 입에 넣으셨다.
스님께서는 거기서 오히려 향긋한 풍미를 느껴셨다. 그리고 아무런 뒤탈이 없었다.
초식 동물의 주식이 어느 날 스님의 주식이나 진배없이 되어 버린 것이다.
스님께서는 이 일을 두고 나중에 제자들에게 "세상의 모든 것이 나의 법반이요 법유임을 절실히 알게 되었다."고 술회하셨다.
한 생명을 이유 없이 버리지 않는 법리는 이처럼 명중했던 것이다.
5. 어느 때 스님께서 마을을 피해 들판을 가로지르시다가 기력이 쇠잔하여 논두렁에 쓰러져 혼절하신 일이 있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농삿일을 나왔다가 스님을 보고는 시신인 줄 알고 거적을 덮어 놓았다.
스님께서 얼마 후 깨어나셨는데 거적 무게를 이기지 못해 오랜 시간 애를 쓰야 했다.
스님께서 회고하셨다. "그때 손발을 꼼짝할 수도 없어 너댓 시간을 그대로 누워 있었는데 홀연히 한생각이 나기를,
이 거적대기 한 장으로 삼천 대천 세계를 다 덮고도 남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 이렇게 돌아다녔던가 싶어졌었다.
그리고는 일어서는데 '백련사로 가리라, 백련사로 가리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백련사가 어디쯤인지도 모르는데 그냥 '백련사'이란 말이 생각난 것이다. 그리고는 그냥 걸었다."
6. 스님께서 회고하셨다. "산중으로 다닐 때 하늘을 쳐다 보며 '하늘이시어,
그 마음을 한마음으로 몰아서 볼 때에 이 못난 것이 이렇게 걷는데 이토록 어려운 줄은 미쳐 몰랐습니다.'고
호소할 적이 많았다. 그것은 그 옛날 구도자들이 목숨을 던져 가며 한국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인도로 걷던 일을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라 내 스스로 그 길을 따르고 걸었으니 실은 원망할 것도, 어렵다 할 것도, 즐겁다 할 것도 없었지만
자기 몸들을 초개같이 버리며 묵묵히 걸어온 그 마음을, 그 뜻을 새겨볼 때에
역대 조사님들과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던 것이다."
7. 백련사로 향하는 도중에 스님께서는 두 번이나 경찰에 연행되는 쓰라린 고초를 당하셨다.
당시는 깊은 산중을 근거로 가끔 공비 잔당이 출몰하던 때였으므로 아무런 증명서 한 장 없는 스님의 경우는
공비로 오해받기가 십상이었다. 한번은 도민증 제시를 요구하는 경찰관에게 잡혀 가죽 혁대로 얻어맞는 문초를 당하셨는데
사흘 째 접어든 날 취조 형사들이 잠든 것을 보시고는 그대로 걸어나오셨다.
8. 또 한번은 공비들이 지서를 습격해서 방화하는 바람에 인근 산속을 뒤지는 수색 작전에 걸려 심한 고문을 당하시다가
나흘 만에 풀려나오신 일도 있었다. 스님께서 회고하셨다. "손가락 사이에 대나무를 끼워 넣어 비트는 고문을 당해 보았는데
그래도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취조 형사가 나를 다지는 자성 부처로 보여 오히려 감사한 생각에 웃어넘겼다."
9. 스님께서 회고하셨다. "무작정 걸어가면서 심심하면 시도 읊어 보고 새들하고 노래도 불러 보고
이름 모를 초목들과 대화도 나누고, 또 어떤 때는 그냥 창공을 훨훨 날아도 보고 참으로 평화로웠다.
출창 반야바라밀다심경을 외고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물레방아 돌듯이 돌고 도니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없이 지냈던 것이다."
10. 백련사를 향하던 길에 눈보라가 몹시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스님께서는 해어질 때로 해어져 발가락이 빠져 나온
신발 한 짝을 얼음 구렁이에 빠뜨리셨다. 스님께서는 신우대 잎을 역어 발을 감싸고 그대로 걸어셨다.
십 리 쯤 걸어갔을 때 산중에서 불을 피우고 몸을 녹이던 나뭇꾼 일행과 마주치셨다.
그들은 스님의 딱한 몰골을 보고는 신발 한 컬레를 내어주었다. 스님께서는 그 손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셨다.
11, 사 년이었다. 스님께서는 남한산성을 지나 경기도 이천을 거쳐서 강원도 영월 쪽을 다 밟고서는
마침내 인연 따라 충북 제천의 백련사에 당도하기까지 무려 사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나 그 사년은 지나온 세월 보다 더 혹독한 고행의 길이되었다.
스님의 내면은 선정 삼매에서 오는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색신으로 겪는 일들은
이루 필설로 다 언급하기 어려운 향극의 길이었다. 나중에 스님의 수행담을 엮고자 했던 어떤 분은 이때를
설산 고행에 비견할 만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첫 원력
12. 백련사를 향해 나아가는 스님의 무연한 발걸음이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 근처에 이르렀을 때
스님께서는 노상에서 간질병으로 쓰러진 한 체장수를 만나게 되셨다.
눈에 흰자위를 들어낸 채 거품을 물고 온몸을 떠는 그 여인을 보시고는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조용히 다가가셨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그만 괜찮아질 테니 염려하지 마시오." 그러자 그 체장수는 언제 그랬더냐고 하리만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스님께서는 거처를 알려 달하고 매달리는 체장수에게 백련사로 가는 길을 묻고는 그대로 돌아서셨다.
스님께서 세상일에 첫 원력을 보이신 예이다. 백련사를 향해 산을 오르는 길목에서 스님께서 또다시 비슷한 인연에 부딪히셨다.
한번은 쇠뿔에 받친 허벅지 상처가 곪아서 살이 썩어 들어가는 한 노인을 치유해 주셨고,
또 한번은 볏짚에 눈에 찔려 출혈이 심한 한 젊은 농부를 낫게 해 주셨다.
마을 사람들은 스님께서 보여 주는 원력에 놀라 묵어가시기를 원했으나 스님께서는 아무 말씀 없이 마을을 떠나셨다.
13. 어느 해 시월 하순, 늦가을 비가 퍼붓는 석양 무렵에 스님께서 백련사에 도착하셨다.
하지만 그 절의 주지 스님은 거지나 다름없는 스님의 몰골을 보고는 '웬 거지가 청정한 경내를 더럽히느냐.'면서
욕설을 퍼부어며 사정없이 내쫓았다. 문전축객을 당하신 스님께서는 산기슭 우묵한 바위 밑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14. 그때 마침 스님의 은공을 입었던 구학리 농부가 바지게에 공양물을 한 짐 지고 백련사로 찾아왔다.
그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 듣자 백련사 스님들은 '도인을 몰라뵈어 죄송하다.'며
자신의 실수를 사과하고는 부랴부랴 스님을 모셔 들였다. 스님께서 혼자말처럼 조용히 말씀하셨다.
"겉눈으로 보면 한 치 밖에 못 보지만 속눈으로 바라보면 우주 끝까지 볼 수 있는 법이다."
15. 스님께서 백련사에 머무시는 동안 인근에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백련사 마당은 어느 날 갑자기 흰 옷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차 백련사라는 이름 그대로 마치 흰 연꽃이 만발한 듯이 보였다.
스님께서는 인연 따라 그들의 딱한 사정에 응해 주셨다. 당시 스님께서는 화식을 못하시고 여전히 초식,
생식을 하셨는데 산중 처사 한 분이 그 일을 도맡아 도라지, 칡 뿌리, 머루, 다래 등을 구해다가 스님께 공양을 올리곤 했었다.
16. 그러던 즈음에 백련사 여신도 회장을 맡고 있던 한 보살이 세 차례나 기이한 현몽을 체험했다.
스님을 치악산 상원사로 모셔다 드리라는 내용이었다.
17. 스님께서는 그 보살의 요청을 묵묵히 받아들이시어 다시 길을 떠나셨다. 그때 인근의 아자의 한 노스님이 말했다.
"그리로 가면 돌아가는 길이라 고개를 넘기 어려울 것이니 백련사에 있는 게 더 나을 것이다."
그 말을 전해 들어신 스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법을 배우는 몸으로 돌아가면 어떠하리,
힘든 고개 넘어야 광명이 한층 빛날 것이오." 스님께서는 일행 대여섯 명과 함께 상원사로 가셨다.
18. 스님께서는 이때 처음 누더기를 벗고, 어느 여신도가 준비해 온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으셨다.
산중 고행의 끝이었다. 모처름 목욕도 하셨다.
자재한 권능
19. 스님께서는 상원사를 향해 길을 떠나시자 일행 중에 내심으로 상원사의 태도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상원사에 들지 않고 그 밑에 있는 토굴에 머물겠노라."
20. 상원사는 강원도 원주군 신림면 치악산 정상 해발 일천오십 미터 고지에 소재한 고찰로
신라 시대 무착 대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워낙 고지에 위치한 관계로 폐허기 되다시피 한 절이었는데
그 정상 바로 아래쪽에 자그마한 토굴이 한 채 있었다. 그때까지 많은 학인들이 그 토굴에서 공부하기를 원했지만
한결같이 사흘을 못 넘기고 사색이 되어 철수하곤 했다. 토굴의 이름은 견성암이었다.
21. 스님께서 상원사에 도착하신 날은 마침 그 곳 주지 스님의 백일 기도 회향날이었다.
주지 스님은 폐허가 되다시피한 상원사의 중창 불사를 기원했는데 마지막 꿈에 응답이 있기를,
'오늘 오는 사람을 붙잡지 않으면 절을 짓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한다.
주지 스님은 스님의 도착을 예사롭지 않은 일로 여겨 스님을 대하는 태도가 극진하였다.
22. 토굴은 비어 있었다. 상원사 주지 스님은 '스님의 요청을 받아 주기는 하겠지만
아무도 그 곳에서 오래 견딘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스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실 뿐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토굴이 들어서 있는 곳은 넓이가 십여 평에 불과했고 그나마 오른쪽은 깎아지른 벼랑 넘어로
높은 봉우리가 굽어보는 곳이었다. 사방 여섯 자 크기에 방 하나 부엌 하나로 구성되어 있었다.
23. 스님께서 토굴에 드셨을 때 방문 앞에 날감자 하나가 딩굴고 있었다.
스님께서는 그것을 들고 들어가셔서 삼 일 동안 조금씩 나누어 잡수 셨다.
백련사에서 따라온 사람들이 한동안 땔나무며 생식 거리를 준비해 드렸다.
스님께서는 토굴에 드신 뒤 거의 문밖 출입을 하지 않으셨다.
낮에는 두문불출이셨고 밤에만 가끔 산으로 산책을 나가셨다.
24. 상원사 견성암에 드신 지 얼마 안 있어 원주 인근 마을에는 스님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갔다.
백련사 쪽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그로부터 상원사 신도 분들은 물론 원근 수십 리 마을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25. 스님께서는 토굴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시고 내다보시는 일조차 없으셨지만 날이 갈수록 찾는 사람들은 늘어 갔다.
처음에는 하루 이삼백 명이더니 나중에는 오륙백 명으로 늘어 났다.
치악산 상원사로 오르는 길목은 흰 옷으로 띠를 늘어 놓은 듯이 보였다.
26. 사람들은 스님께서 계시건 안 계시건 토굴 문 앞으로 몰려와 합장 정례하고 하소연을 했는데
스님께서는 간혹 "알았으니 가봐요." 하실 뿐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원하던 일이 잘 풀린다며 계속 몰려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먼발치에서 토굴을 향해 절만 해도 병이 낫는 효험을 보았다고 했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많은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병이 낫는데 왜 부처님을 못 믿느냐?
자기 마음이 부처니라." 하셨다.
27. 토굴 문 밖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가져다 놓은 향촉, 공양미가 가득했고 시주금으로 내놓은 지전, 동전이 수북히 싸이곤 했다.
저녁이면 상원사 스님들이 내려와 그것들을 죄다 거두어 갔다. 스님께서 회고하셨다.
"저녁나절에 토굴 밖으로 나서면 앞뜰에 온갖 공양물이 그득했다. 돈도 수북히 쌓여 있곤 했는데
나는 그 돈을 주워 죄다 흩뿌렸다. '이것이 무엇인데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울고 웃고 서로 죽이거 찢기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했다. 그것을 알고는 절에서 질색을 하며 다음부터는 매일 저녁마다 내려와 모두 거두어 가곤 했다."
28. 그 당시 스님을 찾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가난하고 고달픈 이들이었다.
그들이 스님께 간청하는 내용도 거의 질병에 관한 것이 많았다.
스님께서는 그들의 순박한 심성을 기쁘게 생각하시는 듯이 보였다.
또 병원에서 불치병으로 선고 받은 경우라도 스님께서 "알았으니 가보세요." 하시는
나즈막한 대답을 듣고 나면 반드시 낫지 않는 법이 없었다.
사람들은 감사를 드리기 위해 다시 찾아왔고 그럴 때마다 새로 찾아뵙는 발길은 더욱 늘어났다.
29. 스님께서 회고하셨다. "그때 사람들이 토굴에 찾아와서 동전 석 냥씩을 놓고 가면 일이 되곤 했는데
일이 그렇게 되었던 것은, 예를 들어 내가 한 폭의 그림이라면 내 몸을 형성시킨 이 그림 속에서
수만 명의 군사가 나갈 수도 있고, 수만 명의 장군이 나갈 수도 있고 수많 명의 부처가 나갈 수도 있기에 그런 것이다.
그 당시 드러난 일이야 상원사를 지은 것뿐이지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감응하는 이 일이 내게는 제일 감명 깊었던 일이었다."
30. 스님께 간청하여 병을 고친 사람들은 한결같이 스님을 의왕(醫王)처럼 생각했다.
그들이 치유를 본 병명만 해도 결핵, 소아마비, 뇌염, 관질, 정신병, 중풍, 백혈병, 간암, 위암, 문둥병 등
이루 다 헤아릴수 없을 정도였다. 개중에는 수많은 치병 이적을 보고도 스님께서 안 보이는 법으로 하시니까
그것을 믿지 못해 낫지 않은 사람들도 백이면 한둘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마음을 바꾸어 진심으로 합장 배례하면
곧 치유된곤 했다.
31. 스님께서 회고하셨다. "나에게 수없이 청을 해왔을 때 생각하기를, 앞에 닥친 일 이것을 헤치지 못하고서야
무엇을 넘는다 할 것인가. 닥치는 대로 해 보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래서 부처님 뜻을 더욱 알게 되었으니,
사생이 다 하나라, 내 자식이라도 내 자식이 아님을 알았고 미물이라도 내 자식 아닌 게 없다는 것을 알았고
자비 사랑이 뭔지도 알았다. 부처님께서 그렇게 거름이 되어 주셨는데도 불제자로서 머리를 깎았거나 안 깎았거나간에
그 뜻을 몰라서야 말이 되겠는가."
32. 스님께서 회고하셨다. "처음에는 나를 굴려서 나를 알고 들어갔지만 그 후 토굴에 있으면서
수많은 사람의 아픔을 말없이 받아들여 체험을 통해 포착하다 보니가 세속에 눈을 뜨게 돼
우리 나라, 나아가서는 세계적인 사연들, 우주적인 법칙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느꼈던 한 가지 문제가 일본이 우리를 침탈한 일이었다. 아! 그 당시 이렇게 저렇게 할 수만 있었더라면
우리 민족이 그토록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일본도 악을 저지러지 않았을 것인데--- 하면서
풀잎 하나, 곤충 한 마리까지도 다 포용하는 문제를 생각했었다. 그러니 국가나 지구적인 문제가 생긴다 할 때
전부가 나 아닌 게 없이 한마음으로 꿰어 들 수 있어야 어느 국가,
어느 혹성이라도 저항을 느끼지 않고 같이 돌아가는 여건이 된다."
33. 스님께서 회고하셨다. "무한량의 진공 에너지를 자재할 수 없었더라면 내가 어떻게 그걸 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때 내가 한 가지 일로 사흘을 운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백 사람이 오면 아흔 일곱, 여덟은 되는데
두셋은 꼭 처지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난하고 고달픈 사람들이니 하나라도 빼놓아서는 안되는데
왜 빠지는 사람이 생기는가 하는 애처로운 생각에 의증이 들면서도 눈물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석양에 해 지는 것을 보고 울음을 그치게 되었다. 해가 뜨는 것도 지는 것도 다 만물 만생을 위하는 것이거늘,
왜 값싼 눈물을 흘리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눈물 한 방울이 전체 모든 생명의 피일 것이고
진정 내가 없다면 헛되이 떨어질 것이니 왜 우는가 해서 눈물을 거두었다."
34. 스님을 찾는 행렬이 한두 달도 아니고 해를 넘기며 계속되자 마침내 원주 제천 일대의 약국들이 단체로
진정서를 내기에 이르렀고 치악산을 오르는 길목마다엔 건장한 청년들이 지켜 서서 산으로 오르는 사람들을 제지하고 나섰다.
사람들이 먼 길을 돌아서 스님을 뵈려 오자 급기야는 방범대원 20여 명을 앞세워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다.
스님께서 그들을 맞아 조목조목 법적인 권리를 말씀하시자 그들도 속수무책으로 혀를 내두르며 철수하고 말았다.
35. 토굴에 드신 이후로 스님께서는 생식을 계속하셨다. 그 때문인지 당시 스님의 몸매는 산중 고행 시절과 별다를 바 없었다.
가려린 허리에 야윈 모습이란 정상인과는 판이했다. 이를 안타까이 여겨 신도들이 여러 차례 화식을 권하였는데
하루는 한 신도가 마른 세우와 보리쌀, 찹쌀, 콩을 섞어 이를 쪄서는 가루로 빻아서 드렸다.
스님께서는 가루 죽을 조금씩 드시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화식으로 돌아오셨다.
중창 불사
36. 스님께서 토굴에 드신 이후부터 상원사의 살림살이도 갑자기 달라졌고 매일 찾아오는 신도들의 공양 수발이
큰 일과로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 상원사로 오르는 하루 인파는 사월 초파일을 능가했으니
상원사는 나날이 초파일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폐허처럼 내버려져 손쓸 방법이 없었던 상원사에도
중창 불사의 꿈이 무르익게 되었다.
37. 스님께서 회고하셨다. "상원사 불사가 시작되기 전에 여러 번의 권유가 있었으나 애초엔 단호히 거절했다.
부처님의 몸이 내 몸이고 부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니 자기가 법당인데 또 법당을 지을 것은 무엇이며
자기 살림살이 그대로 탑돌이 인데 탑을 또 세울 까닭이 없노라고 했다.
그러다가 내가 그렇게 말해 놓고 거기서 내가 배우게 되었는데
불법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공부할 도량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38. 중창 불사는 1962년 봄에 시작되어 이듬해 8월에 끝이 났다.
스님께서는 상원사 주지 스님의 간청을 받아드리시어 나중에 이 일에 열의를 내보이셨다.
당시의 상원사는 말이 사찰일 뿐이지 지붕은 비가 새고 법당 마루는 헐어서 앉을 자리조차 마땅치 않은,
다 쓰러져 가는 폐사나 다름없었다. 유서 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입지 조건이 나빠 중창 불사는 커녕
일상의 절 운영조차도 어려운 형편에 놓여있었다.
39. 중창 불사는 참으로 난공사였다. 신림면에서 상원사까지는 웬만한 장정이라도 삼십 킬로그램의 등짐을 지면
하룻길이나 되었다. 따라서 어느 절의 중창과는 달리 자재 운반에만 거금을 쏟아 부어졌다.
스님께서는 이때 처음으로 몇 차례 시주금을 권유하시기도 했다.
40. 스님께서 상원사 중창 불사에 전념하고 계실 때에 가끔 가환을 호소하는 신도에게 많은 시주금을 명하시는 예가 있었다.
그 일로 인해 일부 신도들은 '스님께서 대가를 요구하신다.'고 불평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 스님께서 그때의 일을 회고하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쓰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게라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세상 사는 도리를 정녕 모르고 말 것이라 방편을 쓴 것이다.
사람들이 제 것 아까운 줄만 알고 남의 것을 그냥 빼앗으려 하는데 가령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 한 달 내내 일 안 하고
월급 달라 하면 누가 주겠는가. 뿐만 아니라 남에게 제 집 쓰레기 치워 달라고 자뜩 맡겨 놓고
쓰레기 치우는 사람에게 밥 한끼 안 끊여 먹일 심산이라면 말이 되겠는가. 그 도리를 알라고 그렇게 한 것 뿐이다."
41. 그때 한 신도가 시주금이 아까워서 '형편이 어렵다'는 말로 모면해 보려고 했다. 그러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안방 장롱 속에, 버선목에 넣어둔 통장은 무엇에 쓰려는고?" 그러자 이 신도는 크게 놀라며
'그것을 어찌 아시느냐.'며 머리를 조아렸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 나는 모른다. 네가 하도 딱하니까 그런 것이지 내가 알아서 한 말은 아니다."
42. 불사가 한창 진행될 즈음에 화폐 개혁이 단행되어 불사가 중단될 위기에 놓이자
스님께서는 만부득이 팔을 걷고 앞장을 서셨다. 우여곡절 끝에 63년 8월 공사를 끝내고
그해 10월 15일 봉불식을 겸한 회향식이 거행되었다. 청담, 경산, 탄허 스님께서 참석하시어 원력을 칭송해 주셨다.
43. 상원사를 중창할 때 스님께서는 산신각 대신에 선방을 짓도록 하셨다.
주지 스님은 물론 모든 스님들이 반대하셨으나 스님께서는 이를 강행하셨다.
"칠성이다, 산신이다, 독성이다, 그렇게 산란하게 해 놓으면 오히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가 어려워진다."고 하셨다.
44. 중창 불사가 성공리에 마무리되면서 법당 근처 바위에 사적비도 함께 세우게 되었는데 탄허 스님이 그 비문을 지어셨다.
탄허 스님께서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 모든 물자가 하늘로부터 오는 것 같고 공(功)이 귀신 부리는 것과 같았다.
여섯 칸의 법당과 세 칸의 신설당과 열 칸의 요사체를 임인년 봄에 시작하여 다름해 가을에 이르러 낙성을 보았으니
아! 천지가 있음으로부터 곧 산이 있었지만 수백 년의 기왕에나, 수백 년의 미래에도 오늘과 같은 성대한 일은 있지 않았다---."
45.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때에 스님의 구도적 삶을 기록한 탑비가 신도들의 손으로 치악산 상원사 토굴에 세워졌다.
신도들은 스님의 가르침을 기리고자 뜻을 모아 그곳에 이렇게 썼다.
"대행 큰스님께서는 일찍이 아홉 살 어린 나이에 나는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가 하는 의증을 드시더니
결단코 본연의 소식을 알아내겠노라 하시며 산을 베개 삼고 하늘을 이불 삼고 달과 별로 등촉을 밝히시어
철야로 정진을 거듭하시었다. 그러던 중 불기 이천사백구사 년 스물셋 되시던 해에 한 대선사 앞으로 나아가시어
향 사르고 계를 받아 불문에 드시니 스님께서는 그 대선사의 법맥을 잇는 마지막 법제자가 되시었다.
그로부터 스님께서는 물 한 모금, 열매 한 알로 연명 하시며 설산 고행에 비견할 두타행으로
이름 모를 산야를 편력하시기 사 년여에 마침내 물바퀴 불바퀴를 넘어 생멸 진여의 문을 뚫으시니
천지가 숨을 죽이고 일월이 빛을 잃는 대각을 이루셨도다.
이후 스님께서는 역대의 선사들이 선지식을 찾아가 법거량을 해오심과는 달리 산천 초목 일월 성신을 상대하셨는바,
해와 달을 석장에 꿰고 이산 저산 한 산 푸른 산을 한테 모아 상투 틀고 주장자를 동곳 삼아
땅 길, 하는 길, 길 없는 길을 발 없는 발로 다니시었다.
스님께서는 그렇게 사 년여를 묵연히 대장부 살림을 사시던 중에 발걸음이 이 치악산 상원에 이르매
비로소 걸망을 내리시고 중생 제도의 길에 드시었다. 스님께서는 한동안 토굴에 머무르시며
인천의 도리를 살피시어 행주좌와 중에 자재로이 유생 무생을 두루 건지셨는바 이때 스님의 은택을 입은 자,
제도 받은 자가 인산 인해를 이루고도 남음이 있었다.
스님께서는 당시에 불연을 따라 상원사 중창 불사에도 힘을 기울이시었으니 역사하심에 모든 물자는
마치 하늘에서 오는 것 같고 그 공용은 신장을 부리는 것 같아 사람의 지혜로는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스님께서는 마흔 되시던 해에 이제 부처님의 은혜를 갚겠노라 하시며 자비의 그물을 들고 하산하시어
사바의 고기를 건져 올리시더니 몇 해 지나지 아니하여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에 한마음선원을 이르키시었다.
이로부터 스님께서는 한량없는 진리의 곳간을 여시어 유무생을 고루 먹이시었고,
맑고 맑은 구슬 굴리시어 오가는 확인들을 남김 없이 제접하시었다.
스님께서는 또한 천리 만리 멀다 않고 다니시어 감로의 법을 펴시니 국내외로 수십여 지원이 절로 열리고
스님의 회상엔 불자들이 연일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아! 일찍이 어느 분이 계시어 미거한 중생들을 건지실까 하였더니
홀연히 대행 큰스님 나투심에 부처님의 대자 대비가 이러한 줄을 비로소 아노라.
대행 큰스님께서 잠시의 영일도 마다하심에 무한량 법반에 늘 배부르고 자비의 법우에 늘 감읍하는 제자들이 모여
여기 치악산 상원에 한 비석을 세워 그 홍은을 기리고자 하나 비를 세움이 어찌 큰스님의 하해 같은
자비에 상대할 수 있으리오. 다만 엎드려 대행 큰스님의 법력에 귀명할 따름이다."
스님께서는 그 일에 대해 특별한 의견을 내보이지 않으셨다. 탑비로 전해짐이 어찌 마음으로 전해짐을 따르겠는가.
다만 신도들은 스님께서 주시는 가르침에 대한 고마움을 그렇게라도 표시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또 죽기가 어려워라
46. 스님께서 상원사를 중창 하시던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 스님께서 신도 몇 분과 산길을 가시던 중에
웬 나무꾼 한 사람과 마주치셨는데 그 나무꾼은 무슨 영문인지 스님께 마구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럼에도 스님께서 무심히 지나치시자 그 나무꾼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폭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는 육두 문자까지 섞어 가던 긑에 '네가 정말로 그렇게 도력이 높은 인간이라면 내가 당장 목숨이라도 내놓겠다."고
떠들어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 나무꾼이 마을로 들어서면서 그대로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를 못한 것이다.
스님께서 그 일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 사건은 오히려 나를 크게 배우게 했다. 나는 사실 무심코 있었던 것 뿐이었다.
그러나 그냥 무심해서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진실한 마음은 진실한 공덕으로 회향시켜 주는 게 옳겠지만
스스로 악행을 짓는다고 그것까지 금방 과보를 받도록 방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뒤로부터는 조심스럽지가 않았던 것이다. 참으로 업의 법칙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므로 중생의 원을 무조건 다 들어주는 것만이 부처가 아닐 것이다.
악업도 가려야 하듯 선업도 즉각적으로 보상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 그래야만 좋은 것도 아니다.
문제는 선과나 악과가 아니고 마음의 본분을 밝히는 일이다."
47. 스님께서는 그 당시 누구를 보든지 '너도 이생(利生), 나도 이생이니 전부가 다 이생이다.' 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로부터 대중들은 스님을 '이생님' 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름은 나중에 스님께서 '대행' 이라는 법명을 쓰시게 될 때까지
스님의 법명 아닌 법명이 되어 버렸다.
48. 스님께서 회고하셨다. "나는 스스로 내가 나한테 주고 내가 받았지만 함부로 쓰지 않겠다고 맹서했다.
누구를 해롭게 한다든가, 한 치라도 어긋남이 있어서는 안되고 오로지 모든 이에게 이익이 되고
남을 보호하면서 돌아가리라고 다짐했다. 실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니 나를 보하고 남을 보하며
그렇게 돌아감으로써 그대로 이익중생이 될 일이었다."
49. 큰스님께서 상원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그 절에 시주를 많이 한 한 신도가 그 곳에 와서 3일 전에
죽은 자식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때마침 상원사 신축 기공이 있어 큰스님들이 다 모여 있었다.
그 신도는 통곡을 하고 울면서도 '스님들이 다 계시니 우연이라 해도 이런 복이 어디 있느냐'며 감사해 했다.
그날 큰스님께서는 바깥 일에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기거하시는 방에 계셨는데 그 신도가 스님을 부르며
"잠깐이라도 좋으니 나오셔서 앉았다 들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나와 보시기를 간청했다.
스님께서 '알았다'고 말씀하시고 잠시 생각에 잠겼는데 그 신도의 자식은 자기네 집에서 맴돌다가
이미 자기 집 돼지 소굴에 들어가 있음을 아셨다. 곧 이어 스님께서는 '여기서 천도를 시킨들 무슨 송요이 있겠는가.
벌써 돼지가 돼지를 잉태해 버렸으니---' 하고 나직하게 말씀하시고 앉은 채로 천도를 시작했다.
그러자 스님의 온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다음 날 그 신도 집에선 새끼를 밴 암돼지가 죽었다고 야단이었다.
스님께서 그 소식을 듣고 '천도가 잘 됐구나.' 하실 뿐 더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스님께서 나중에 이 일을 두고 말씀하셨다.
"죽어서 식은 있으나 분간을 못하니 소 우리로 들어가 소가 되기도 하고 사람으로 들어가 사람이 되기도 하고 천차만별이다.
오관을 가진 송장이 무엇을 가지고 분별하겠는가. 선천적인 식만 남아 암흙 속을 이리저리 떠도는 것이니
한 발짝 제대로 떼어 놓기도 어렵다."
50. 하루는 스님께서 마을에 내려 가셨다가 중창 불사에 써 달라는 시주금을 받아 가지고 오시던 길에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된 일가족을 만나셨다. 그들은 빚에 쪼들려 방금 거리로 내쫓긴 신세였는데 당장 끼니가 걱정이라고 했다.
스님께서는 "어디 가서 잠잘 곳이라도 마련하라." 하시며 시주금을 모두 털어 주셨다.
그러자 상원사 스님들이 들고 일어나며 "당장 인건비 지불할 돈도 없는데 삼보 재산을 마음대로 쎴느냐?"고 항의하였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이 계시면 공사가 지속될 것이며 안 계시면 못할 것이니 무슨 걱정이냐." 하셨다.
다음날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시주금을 놓고 갔다.
51. 한번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머느 날 초저녁에 스님께서는 불현듯 뱀의 울부짓는 소리가 들린다 하기며
한 수좌승을 데리고 계곡 아래로 내려가셨다. 한 곡에 이르러 수풀을 헤쳐 보니 큰 나무 상자 속에 팔뚝 굵기의 구렁이
한 마리가 갇혀 있었다. 스님께서 그를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제 자유의 몸이니 네 갈 곳으로 가라. 그러나 네 모양이
그러하여 갇혔거늘, 네 탓이니 누구를 원망하지 말고 다음일랑 허물을 벗고 인간으로 태어나도록 하라." 하셨다.
52. 하루는 스님이 작대기를 들고 버섯을 따려 길을 나서셨다. 스님께서 어느 곳에 이르러 수북히 쌓인 가랑잎을 헤치려고
작대기를 드는 순간 느껴져 오는 것이 있어 멈추고 돌아서려는데 무엇인가 스님을 붙드는 게 있었다.
그리고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그것은 마음을 통해 전해져 오는 소리였다.
"만나기 어려운 당신을 만났는데 어찌 그냥 가시렵니까? 내 말 한 마디 듣고 가십시오."
스님께서 뒤돌아 보니 한 마리의 뱀이 가랑잎 사이로 목을 삐죽이 내밀고 있었다. 뱀이 스님께 전하는 내용이 이러했다.
그 뱀은 한 때 상원사의 주지였는데 시주 돈이 웬만큼 모아졌는데도 돈이 아직 모자란다는 이유로 낡아 빠진
상원사 보수공사를 미루다가 그만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죽고 나서 자신이 뱀으로 화해 있는지도 모르는 그 주지는
이리저리 절 근처를 맴돌다가 어느 돌기둥 사이에 들어가 생전에 못다한 공부를 다 해볼 요량으로 지내고 있었는데
문득 스님을 만나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시주 돈을 어느 다락 어는 벽에 넣어 놓고
벽지를 발라 놓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고 묻고는 지금의 흉직한 모습을 벗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그러자 스님께서 이르시기를 "전자의 중도 없었는데 그 돈은 어디 있으며 지금 그 모습은 어디 있겠느냐.
다만 지금 말하고 있는 그 자체가 붉게 핀 꽃과 같은 것이다." 라고 하셨다. 순간 그 뱀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이제야 몸을 벗게 됐다." 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수풀로 돌아갔다.
스님께서 나중에 이 일을 대중에게 들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런 일을 한두 번 경험한 것이 아니다.
절 근처에서, 가축사 근처에서, 사람이 사는 집 근처에서, 가는 곳마다 여기저기서 말을 걸어왔다.
학(學)으로써 배우고 염불이나 외우면서, 우주 전체가 나와 더불어 같이 있다는 이 도리를 모르고
애석하게도 이 옷을 벗는다면 '식(識)' 만 있지 '분별' 이 없어 사물을 분간 하지 못하게 된다.
오관을 가렸으니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부딪힘도 업고 아무것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눈 아닌 눈과 귀 아닌 귀가 있어야 한다. 식만 남아 가지고는 사람인지 짐승인지,
굴 속인지 큰 집인지 그것도 알 수가 없다. 욕심에 꽉찬 그 '식' 만 남아서 돌 틈을 도량으로 보고 공부를 하겠다고 들어간
주지승을 생각해 보라. 죽는다고 해도 내가 없으니 뭐 붙을 게 있느냐고 값싸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무서운 도리는 누가 처리해야 하겠는가."
53. 하루는 스님께서 산책을 나가셨다가 고양이 한 마리가 새끼를 여러 마리 낳아 놓고는 기력이 다하여 사경에 놓인 것을 보셨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 만생이 이렇게 새끼를 낳고 어미는 껍데기가 되어 돌고 도는구나.
그러나 저것이 고양이기 이전에 새끼를 낳아 놓은 어미인데 죽어서야 되겠느냐. 어미가 살아야 새끼도 살지."
그 고양이는 바로 기력을 차리더니 이튼날부터는 펄펄 뛰어다녔다.
54. 스님께서는 가끔 치악산 비로봉 정상에 오르셨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질 때인 석양 무렵을 택하시는 일이 많았는데
그럴 때면 으례 한 쌍의 황소만한 범이 길잡이 노릇을 했다. 눈이 많이 쌓인 날에는 외길 발자국을 남겨 길을 안내했고
밤이면 토굴 주위를 맴돌며 마치 파수를 보는 듯했다. 상원사 스님들이나 몇몇 신도들 가운데는 이 범과 맞닥뜨려
혼비백산한 경험을 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55. 스님께서 상원사 토굴로 드신 지 몇 년쯤 지났을 때 인편에 어머님의 부고를 받게 되었다.
헌인릉에서 헤어진 뒤 처음으로 접하게 된 어머님에 관한 소식이었다.
스님께서는 하산 하시어 모친의 영전 앞에 당도하셨는데 눈물을 보이시지 않자 주변에서 말하기를
"당신 때문에 피를 쏟고 몸져누우셨다가 돌아가셨는데 왜 눈물 한 방울을 흘리지 않느냐." 고 했다.
스님께서 조용히 말씀 하셨다. "새새생생을 오가며 뻔질나게 출입할 텐데 갔다고 해서 영원히 간 것이 아니다."
스님께서는 어머님의 사진을 묵연히 응시하셨다. 천도를 하신 것이다.
56. 상원사 불사의 중공식을 하던 날, 한 노스님이 노고를 치하하면서 스님께 표장장과 함께 국역 팔만 대장경 첫 권을 주셨다.
그것이 스님으로서는 경전을 처음 대하신 일이었다. 스님께서 앞뒤로 서너 쪽을 넘겨 보시고는 그대로 넣어 버리셨다.
스님께서 회고하셨다. "그때 애썼다고 표장장을 주고 경전 한 권을 주었는데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니
표장장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자리를 비우니까 누굴 시켜서 내려온 것을
보는 앞에서 찢어버리고 말았다. 또 경전을 보니까 편집이 잘못된 탓인지 타력에 기대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아
잃어 보지 않았다. 그때는 젊었을 때라 내가 너무 빳빳했던 탓이었다."
57. 회향식이 있던 날에 스님께서는 봉축하려 오신 노스님들의 공양 좌석에 합석 하신일이 있었다.
그때 스님께서 생선을 구워 상에 올리게 하시고는 노스님께 권하셨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생선을 못 드신다면 부처를 어떻게 드시겠습니까?" 하셨다.
그러자 어느 노스님께서 아무 말씀 없이 공양을 끝내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걸음 떼어놓을 줄 알아야 생선이 초식이요 초식이 생선이지
떼어놓지도 못하면서 거침이 없다 하면 그것이 도(道)일 수 있겠느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기 위해서 그리했습니다." 나중에 스님께서 그 일을 두고 말씀하시기를 "아무 말이 없어도 될 것을." 하셨다.
58. 상원사 중창 불사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을 보시고는 한 노승께서 사람을 놓아 스님께 여쭈었다.
"나도 중창 불사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빨리 할 수 있겠는가." 스님께서 대답하셨다.
"스님네들이 머리를 3년만 깎지 않는다면 절을 빨리 지을 수 있다." 그 스님이 다시 여쭈었다.
"몸이 아픈 스님이 있는데 낫게 해줄 수 없는가." 스님께서 대답하셨다.
"절의 중들이 송진을 먹지 않는다면 병도 빨리 낮고 절도 빨리 지을 수 있을 것이다."
59. 스님께서는 불사가 끝난 지 얼마 안 있어 오대산 월정사 스님들의 초청을 받고 그 곳에 가신 일이 있었다.
그때 스님께서는 돼지고기를 굽고 계란을 삶아서 술과 함께 가지고 가셔서는 상에 차려 놓고 말씀하시기를,
"이걸 먹을 수 있는 이는 이 도량을 다 먹을 수 있을 것이나 먹을 줄 모르면 이 도량도 먹을 수 없다."고 하셨다.
대중 스님들이 모두 놀라는 가운데 두 스님만이 장삼을 걷어붙이고 그것을 먹으며 '맛있다.'고 하였다.
다른 스님들은 '청개구리 같은 분' 이라며 스님의 처사를 언찮아 했다. 이 일을 보고 수행했던 한 신도가 여쭈었다.
"먹은 것이 옳습니까, 안 먹은 것이 옳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먹는 이도 틀렸고 안 먹은 이도 틀렸다."
어느 때 스님께서 회고하셨다. "내가 노스님께 들이댔던 것이나 대중 스님께 그렇게 했던 것은
내가 배우고자 하는 의도였을 뿐이었다. 한마디 던져 놓고 거기서 배우게 되니 스승 아닌 게 없고 부처 아닌 게 없다.."
60. 스님께서 이런저런 일을 두고 말씀하셨다. "자기가 죽었다고 말할 것도 없으니,
세상 사람들 하고 이렇게 같이 더불어 합해서 또 죽기가 쉽지 않구나, 상당히 어려운 줄 미쳐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