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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씨, 깼어요?”
‘초아님’이 아닌 ‘초아씨’라, 생소하기 이를데 없었다.
“처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아니, 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요?”
걱정 반, 분노 반. 커피 반, 아이스크림 반이면 커피 아이스크림, 그러나 내가 아는 누군가와는 달리 조금 씁쓸한 맛이 가시지 않
는 목소리가 다그친다. 아직 눈도 제대로 못 떴는데 조금만 조용히 해줘요, 귀가 다 터널처럼 울리네요.
“많이 다쳤는 줄 알고, 내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그러다가 정말 죽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생각이 있어요, 없어요?”
무슨 의사가 환자에게 저렇게 소리를 질러댄담. 더군다나 자기 담당도 아닌데 내 침대 옆에 저러고 떡하니 버티고 앉아있다니, 공
적인 관계는 이미 끝나고도 한참 왔음을 새삼 깨달아야했다.
“초아씨! 깼으면 대답을 좀 해봐요! 피바다라서 손목을 자르기라도 한 줄 알았잖아요! 아니, 어떻게 그 상처로 그렇게 많은 피를 냅
니까?”
의사가 소리친다. 슬며시 뜬 실눈으로 그의 명패에 써있는 이름 네 자가 스물스물 눈으로 기어들어온다. 남궁공유. 그래, 그러고보
니 그는 이름이 특이했었지.
“미쳤어요, 자기 손목보다 몇 배는 큰 칼로 자르게..아, 정말.”
그가 잘 배열되어있던 흑색 머리를 미치겠다는 듯 마구 흐뜨러뜨리더니, 내 눈치를 살금살금 보면서 내가 잘랐던 손목으로 손
을 뻗는다. 초희를 다른 환자들보다 훨씬 자주 방문하면서 커피를 뽑아주던 바로 그 손으로, 뻗고, 또 뻗고. 몸을 돌아눕는 척, 무
안하지 않을 정도로 천천한 움직임으로 빠져나가려 애썼지만, 있는지도 몰랐던 링겔들이 행동을 제어했다. 혹시 내가 머뭇거리
는 시간에 내 손을 잡을까봐, 미안하지만 조금 지나치게 빠르다 싶을 정도로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당연히 그렇겠죠. 아, 그러니까 제가 초희씨랑 통화하다가 아무래도 안되겠어서 앰뷸런스를 제 멋대로 불렀는데.. 가보니까 초희
씨가 멀리서 봐도 아주 딱 피바다다 싶을 정도로 큰 웅덩이에 누워있더라구요, 피에 옷까지 흠뻑 젖어가지곤. 그래서..후.. 벌써 죽
었는줄 알고 놀라서 달려갔는데, 글쎄 거의 멀쩡한거예요. 전 손목이라도 잘랐는 줄 알고, 제가 너무 늦었는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도 조금 화난듯한 모양새의 그에게서 무의식적으로 눈을 돌려 왼쪽 손목을 바라봤지만, 보일듯 말듯 아주 얇은 붉은 선
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의학을 알지 않는 나라도, 저 따위로는 지금 그가 말하는 양은 제외하고 소주잔에 담을 피
도 나오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상처가..”
“다들 그래서 놀랐어요. 상처는 정말 작았는데, 도저히 그 피가 나올 상태가 아니거든요. 혹시나해서 초희씨를 일단 병원으로 옮기
고나서 확인까지 해봤는데, 초희씨 피가 맞더라구요.”
“어떻게 아셨어요? 그런거 검사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나요?”
의사, 아니, 벌써 두달 전부터 자신을 공유라고 불러주길 원했던 그가 피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보니 흰 가운은 내
가 기억하는 그의 평소 모습 그대로였지만, 단정하게 비지니스룩을 풍기던 그의 이지적인 모습은 스르륵 사라져버리고, 다크서클
이 놀랍도록 진한데다, 아직 수염이 난 것은 아니지만 이미 꽤나 색이 침착되어 거뭇거뭇해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잠 들
지 못하고 내가 일어날때까지 기다린것일까? 그런 우습고도 미안한 모습을 한 채, 그는 마치 내가 더 불쌍해보인다는 듯 나를 안
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피를 하도 많이 잃어서 초희씨가 기절했으니까요. 딱 보면 척이죠. 아무리 제가 다른 분야라도 기본 의학 지식이 아주 조금이라
도 있는 사람, 아니 전혀 없는 사람이라도 알았을 겁니다. 뭐 혹시 몰라서 의뢰해놓긴 했지만 확실해요. 대체 어떻게..”
그가 아니, 이제 됐다는 식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도 다른 어른들과 매우 비슷했다. 어쩌다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
기면 그저 ‘어쩌다 그랬겠지’라는, 가장 비상식한 의견을 변명삼아 숨어놓고는, 초인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믿지 않았으니 상식적
인 행동이었다는 어이없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계속 굵은 실정도밖에 되지 않는 굵기의, 웃음이 나올 정도의 자잘한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그렇게 피를 많이 냈다고? 아니
아니, 흐릿하긴 하지만 분명히 손목이 너덜거리는 걸 내 눈으로 목격했는데..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분할 수 없다. 생사를 넘나들면서 이것을 끊으면 저승으로 갈 수 있는 생명줄이라도 되는마냥 할퀴
어 찾아내던, 울컥울컥 핏덩이라 불려도 좋을만큼 많은 양의 붉음을 쏟던 혈관. 분명히 진실이라 믿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멀쩡할
까.
“저기..몇일이나 지났죠?”
“이틀이요. 다시 피를 채워넣고 안정시키느라 시간이 걸린 것 뿐이지, 다른 문제는 전혀 없어요. 어떻게 그렇게 피를 흘리고도 죽
지 않았는지 놀랍다니까요? 어느 정도 피까지 멈춰져 있었는데 지혈한 흔적도 없고..”
손목에 느껴지던 따뜻한 온기, 부드러운 무언가의 움직임, 맹수의 포효, 앰뷸런스의 시끄러운 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존재의 스
스로와의 싸움..장면이라기보다는 분위기, 느낌, 어렴풋한 기억들이 오래된 영화의 세그먼트처럼 흘러간다. 그러나 그것이 정
말 영화의 한 장면인지 내 기억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분명 상식에 어긋나는 존재였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배척하
고, 자신이 보기 싫은 것은 스쳐지나가버린다..
낯이 익은 말. 누가 말했더라? 편안한 안정감을 주는 그 어떤 누군가, 당황스러운 설레임을 안겨주던 누군가. 누굴까. 이상하게 기
억이 잘 나지 않는다. 누군가 억지로 머리 속에 들어가 지우개로 그 부분을 밀어버린 것처럼 이름도 그 무엇도 기억나지 않는다.
“퇴원하고 싶어요.”
“하지만 아직은 안정을..”
“아니요, 이 정도밖에 안 다친게 신기하다고 하셨잖아요. 퇴원할래요. 그리고 이제 의사선생님도 바쁘실텐데 들어가보세요. 환자
가 많잖아요.”
그 환자들 중에 이제 초희는 섞여있지 않지만요, 하고 말이 울컥 쏟아져 흘러나왔다. 분명히 목 안에 억눌러 놓았다고 생각했는
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온건지, 아니면 그저 갑자기 울기 시작하는 내가 안쓰러워서였는지, 그가 다가와 약간은 어색한 포
즈로 나를 안는다.
“정말 퇴원하고 싶어요?”
그가 묻는다. 부드럽지만 뭔가 불충분한 목소리. 바람결에 날리듯 흩날리는 흑색 머리카락이지만 뭔가 너무 어둡고, 너무 답답하
다. 틀에 박힌 사회에 맞춰 자란 왕자님. 당신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왕자님이예요, 나도 모르게 생각한다. 초희가 할 말이었을
까? 입에 맞지 않는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캐비어를 들며 정말 괜찮긴 하지만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
한 느낌이다.
“네.”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는 내 귓가에 그가 웃는 소리가 흘러들어온다. 안도감일까, 장난기 어린 미소일까.
“그럼, 가봐요. 퇴원절차는 내가 밟아줄게요.”
병원복은 하늘과 같은 색이어서 오히려 슬펐다. 어디서 가져온건지, 자기 여동생의 옷이니 부담갖지 말라며 내민 옷들 중 하나
가, 급하게 뜯어낸 상표의 잔여물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보고서 거절할까하다 병원복을 입고 밖에 나가면 더 슬퍼질 것만 같아
서 그저 고맙다고 받았다. 그 옷을 입고 그가 함께 구해온 특이한 디자인의 팔찌를 왼쪽 손목 위에 편히 끼워넣자 그는 환히 웃었
다. 미안한 사람, 당신의 공주님은 어디에 있나요?
집까지 바래다준다는 것을, 환자들이 많으니 들어가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한참 실랑이를 하고나서 그는 반 완력으로 나를 질
질 끌어 자신의 차에 태웠다. 사실 얇은 줄 하나밖에 없는데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있는 환자는 나이므로 현재만은 최선을 다한다
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내뱉었다. 드라이브는 그의 웃음들 사이에 낑겨넣어진, 아니면 처음부터 잠재되어 있었을지도 모르는 어색
한 침묵들의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현관문 앞에서 우리는 침묵보다도 더욱 어색한 미소와 몇초라고 하기에도 무안하도록 짧은 형식적인 포옹을 나누었다. 빠져나가
려 하자 잠시 등에 있는 그의 손에서 아주 작은 압력이 생겼지만, 그는 눈치채기도 힘들 정도로 작은 한숨을 쉬며 곧 놓아주었다.
“사실은, 이 옷 다 새로 산 거 알고 있어요.”
장난스럽게 혀를 뾰족 내밀며 인사대신 그 말을 건네고 현관문을 닫았다. 사실 형식적인 인사를 해야했던게 아닌가싶어 잠시 긴장
했던 근육들은 그가 곧바로 마주치는 농담 아닌 농담에 어이가 없어 스스륵 풀렸다.
“사실은, 저도 초아씨가 정신 잃었을때 초아씨 핸드폰에 제 번호 찍어놨어요.”
그가 현관문에 기대선 듯 상당히 가깝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현관문을 통해 그의 모습이 보일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그럼, 푹 쉬세요. 다음번에 제가 전화하면 데이트해요.”
상당히 느끼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은 듯 뱉어놓고 그의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집 안을 살폈다. 공유가 말했
던 그 피바다와 식칼은 이미 누군가 치운건지 말끔히 사라져있었지만, 한 가지는 변한 것이 없었다.
탁자 위에 놓여져있는 흰 원피스.
나는 그것을 보고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내가 챙긴 기억도 없는데 신기하게 나를 따라 병원까지 갔다 함께 돌아온, 조용
히 쇼핑백에 덩그러니 들어있는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껐다. 나만큼 멍한 핸드폰의 눈이 나를 새까맣게 마주보았다.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멍하니 그 새하얀 원피스만을 보다 흐른 시간이 몇일. 처음엔 차마 손도 대지 못하
고, 울지도 못한채 쳐다보기만 하다, 그 다음엔 그 새하얀 원피스가 눈물로 적셔져 하늘하늘한 원피스가 아닌 커텐만큼 무거워질
때까지 붙들고 울었다.
내가 마침내 외출한 것은 초희가 사라져버린지 일주일째 되는 날, 내 눈물로 한껏 더럽혀진 원피스를 세탁해, 조금도 달라지지 않
은 초희의 방 옷장 안에 고이고이 넣어둔 후였다.
뭐에 홀린건지 길거리를 무조건 방황하다 눈을 떠보니 나는 안주도 없이, 초희가 태어나고부터는 몇번 입에 대어보지도 못한 알콜
을 막무가내로 혼자 들이켜대고 있었고, 포장마차 아주머니는 내가 안되어보였는지 깡소주를 내 손에서 뺏기 위해 안간힘을 쓰
고 계셨다.
“내 딸래미도 대학 떨어지고 나서 이렇게 깡소주를 마셨는데..”
그늘진 얼굴로 중얼거리며 매상을 포기하고 소주병을 내게서 빼앗으려는 아주머니의 얼굴을 바라보고나서야 정신을 조금 차렸
다. 나는 조용히 병을 탁자에 내려놓고 돈을 치른 후 비틀거리는 몸으로 얼떨떨하게 고개를 숙인 후 포장마차를 나왔다.
비틀, 비틀. 별인지, 가로등인지, 사람의 눈인지, 지나가는 도둑고양이의 눈인지, 구분도 되지 않고, 아주머니가 적당한 선에서 병
을 뺏어 주신건지, 또 그 몰골을 하고서 어찌어찌 집은 찾아왔다.
직접 작곡 작사해 초희에게 밤마다 불러주던 자장가를 흥얼거렸다. 이렇게 부르고 있으면 어느새 천사처럼 눈을 살포시 감은 초희
가 눈앞에 나타날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고, 귀여운 분홍색 이불을 턱 아래까지 잘 올려
줄텐데.
열쇠를 돌리면서, 문득 몇일 동안 불조차 끄지 않고 멍하니 살았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아, 전기세 많이 나오겠구나. 온 집의 불
이 다 켜져있는것 같은데.
그러나 정작 문을 열었을때 보인 광경은, 놀랄 정도로 너무 어두워, 어두움의 정도가 지나친 나머지, 오히려 빛보다도 더 눈을 멀
게 할 암흑뿐이었다.
요새 들어 이 집구석은 대낮에도 왠지 거무칙칙한 색을 자랑하는 그런 기괴한 장소들 중 하나였지만, 오늘의 암흑은 절대적으
로 달랐다. 인공적인 암흑인 것이 확 티나는 부자연스럽고 오싹한 그런 암흑이었다.
왜 그럴까, 취한 머리는 생각을 하려 애썼으나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암흑이면 어떻고, 빛이면 어떻고. 관심이 없다.
한마디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언제나 너무 진부한 주제일 뿐이라며 식상하다고 비웃던 드라마들에서나 나오던 백혈병 따위로 초
희가 시들어 죽어버린 이후엔, 세상은 모두 흐린 하나의 거대한 점쯤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 시선을 끌수 있는 것은 그 아무것
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초희가 죽고난 요 일주일간은 내가 아니라 그저 똑같은 한초아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여자가 숨쉬고 살
고, 나는 그저 그 눈을 통해, 졸면서 보는 영화같이 관람 따위를 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생기넘치던 사실이 금방 거짓이 될 수 있다면 어차피 세상은 아주 얇은 유리 위에 위태롭게 놓여있을 뿐인 것이다. 언제 죽
을지도 모르고, 어떻게 죽을 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삶이란 부질없다.
하아. 습관이 되어버린 한숨을 거칠게 내뱉자 술에 잔뜩 쩔은 공기가 전투 준비라도 하듯 코를 자극해왔다. 지옥처럼 어둡든 말
든 코트를 바닥에 툭 떨구고, 스물여섯 평생을 살아와서 눈을 감고서도 돌아다닐수 있는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킥킥킥.”
문득, 영화에서 연쇄살인마들이나 귀신들이 짓는 그런 기분나쁜 종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둘러보았지만, 누가 웃었는지
는 볼 수 없었다. 집 안은 한치 앞조차 볼수 없는 암흑을 소중한 음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머금고 있었기에.
“킥킥.”
본능이 뇌 저편에서 경계하고 도망가야한다고 외쳤지만, 그저 멍하니 계속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 정말 앞에 있는게 연쇄살인마
나 설령 귀신이 된다해도 관심을 둘 힘조차 나지 않는데다 취기가 동반하는 쓸데없는 오기까지 겹쳐 악순환이었다.
그저 손으로 더듬어 탁자를 찾은 다음에,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턱을 괴었다. 머릿속에서는 맞은편 의자에 초희가 아직 바닥에 닿
지 않는 다리를 흔들어가며 아이스크림을 할짝할짝 핥고 있었지만, 현실은 아니라는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 환상이라도 붙
들고 늘어지고 싶어 흐리게 흔들리는 초희에게 말을 걸었다.
“초희야.”
“응?”
귀엽게 웃는 볼에 젖살이 포동포동하다. 발그레한 볼의 오른쪽엔 유치원때 함께 갔던 축제에서 처음으로 초희가 받아보았던 페이
스페인팅의 짙은 장밋빛 하트가 앙증맞게 자리하고 있다.
“돌아와..”
애절히 빌어보지만, 초희는 그저 해맑게 웃기만 한다. 그런 그녀의 머리에서, 식물 다큐멘터리를 되감은 것처럼 윤기나는 초콜릿
빛 머리카락이 점점 두피로 빨려들어가고, 페이스페인팅이 흐려지나 싶더니 곧 홍조마저 사라진다. 점점 창백해지는 민둥머리 초
희의 옷이 항암치료때마다 나마저 울게했던, 초희의 비명을 생각나게 하는 그 악몽의 병원복으로 바뀌지만, 미소는 변하지 않는
다.
초희가 다시 암흑으로 녹아나며 입모양으로 내게 속삭인다. 내가 마지막으로 정말 확신할 수 있는 기억과 똑같은 말로.
“언니, 안녕. 다시 봐.”
그리고, 내 꿈에서조차 무의식을 두들겨 항복시키고 일어나있을때도 나를 괴롭히던 그 마지막 한마디. 체셔 캣처럼 변하지 않
은 단 하나의 모습, 미소를 간직하고 초희가 말한다. 창백한 얼굴의 초희, 안쓰러워도 한없이 귀여운 내 초희의 마지막 말.
“꿈을 꿨어.”
언제나 새하얬던 초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곧 어둠에 녹아나버린다.
“흑..흐읍..”
술도 도와주지 않는 슬픔에 결국은 숨 죽여 울기 시작하는데, 이번엔 귓가 바로 옆에서 말하는듯, 소름끼치도록 가까운 거리에
서 예의 그 목소리가 불렀다.
“야.”
조금 약이 오른듯, 성가셔하는 숨소리에 목덜미가 여과없이 노출됐다. 온 몸에 단계적으로 쫘악 소름이 돋는다.
덕분에 간신히 떠올리고 있던 초희의 환상이 그 목소리에 의해 깨어지고, 나는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지금의 내가 초희와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방해한 녀석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화가 났다.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어차
피 일주일 전부터 나는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소식이 아니었다.
“왜.”
내 답에, 목덜미에 숨결을 불어넣을듯 가깝던 그 숨이 순간 헉, 하고 들이켜졌다. 정말 연쇄살인마같은 녀석이라면 매우 초짜같다.
“너 나 누군지 알아?”
작은 쇳조각이 칠판을 직직 긁어대는, 성별조차 구분하기 힘든 그런 목소리가 물었다. 가젤의 뼈가 목에 걸린 정글의 맹수가 사람
말을 하려 애쓴다면 그런 목소리일까?
“아니.”
당연한걸 왜 물어보냐는 말투로 맞받아쳐줬다.
“그런데 왜 안 놀라? 너 이거 집 어두운거 안 보여? 불 키려는 노력도 안해?”
“안 놀라. 보여. 안해.”
차분히 대답해준 후 다시 턱을 괴고 초희를 상상하려 애썼다. 이 놈이 누군지는 몰라도 참 귀찮게 군다고 생각했다. 연쇄살인마
면 빨리 죽이고, 귀신이면 빨리 날 놀래든지 꺼지든지 둘 중에 하날 하란 말이야. 하여간 요새 인간들은 모두 우유부단하다.
내 바로 뒤에서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화가 난듯, 씩씩거리고 있었다. 문득 이 놈 참 단순하다는 생각에, 만화를 못 보게 하자 발
을 구르며 씩씩거리던 초희가 생각나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야!”
목소리가 외쳤다. 그런데 이번엔 목소리변조기로 걸걸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꽤나 섞인, 나름 인간다운 목
소리였다.
딱.
손가락으로 스냅하는 소리와 함께, 집 안의 어둠이 싹 사라지고, 심지어는 불까지 저절로 켜졌다.
그리고, 나는 그 놈을 보았다.
첫댓글 마지막부분은 정말 집중해서 숨죽여 보았습니다. 긴장이 되네요. 다음화도 기대하겠습니다. 건필하세요^^
항상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은안님 :) 요새 카페온에 많이 보이시네요. 반가워요!
헉.. 그 존재가 뭔가요?? 궁금~~!!!ㅎㅎ~
안녕하세요, 사악한 702님. 그는 오늘 편에 나온답니다 :) 기대해주세요!
초희의 죽음은 정말 가슴 아프군요. 온새미로YS님의 글은 비 오는 날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사빈님. I'll Land도 꼬박꼬박 즐겁게 보고있어요. 7편이나 올리시느라 수고하셨고,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할게요. 건필하세요 :D
그 놈을 보았다~! 드디어 등장하는군요. 꽤 오래 기다렸어요? ㅎㅎ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또 뵈요?!
원래 라인업때만 해도 초희의 얘기는 플래시백으로만 나오고, 이번 편의 끝 부분이 1편이었지요. 예정에 없이 초희의 비중이 좀 커졌지만요 :) 아진유씨님도 수고하고 계십니다. 건필하세요!
고생문이 훤한 악마의 등장이로군요. 어떤 식으로 초아가 삶에 애착을 느끼도록 할 지 기대가 됩니다. 초아의 캐릭터가 강해서 끌려갈까 걱정하는 온새미로님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이대로 계속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만... 계속해서 막강 필력 기대하겠습니다. ^^
푼수같아서 초아에게 어떻게 당해낼까 걱정입니다 :) 저도 이미 질질 끌려가고 있는데 말이죠. ㅋㅋ 오늘도 용량을 초아에게 컨트롤당하고 오는 길이예요. super21s님 글 완결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몰아서 안봤으면 큰일날뻔 했네;; ㅎㅎ 이젠 코믹까지 끌고 가시다니ㅎㅎ
아, 호래이타고님 안녕하세요 :) 요새 바쁘신가봐요. 무리하지 마시고 건강 챙기세요 :D
초아의 힘겨워 하는 모습에 눈물이 핑돌다가 암흑으로 뒤덮인 집에선 슬슬 오싹함에.. 마지막엔 시니컬한 초아의 모습과 황당해하는 정체모를 존재의 모습에 쿡하고 웃게 되네요.^^ 마지막까지 건필하세요^^
그 '정체모를 존재'로 인해 앞으로 완결까지의 글이 풀려나가게 된답니다! :D 힘이 되는 댓글 감사합니다, SINJI님 :)
돌아와.. 에서 쨘 했네요ㅠㅠ
초희와 초아와의 사랑이 깊지요? :)
아우... 슬퍼ㅠㅜ... 초희가 언니말 듣고 돌아올것같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