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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송한 부분입니다. 바로잡아주심이 필요합니다.
11page 첫째줄입니다.
又不變은 是體요 隨緣은 是用이라
마음의 변치않는 不變은 바로 마음의 본체가 되고 隨緣은 그러면서 인연을 딸른다 인연을 딸른다는 것은 변한다는 의미죠? 변하는 것은 바로 작용이라. 變치 않으면서도 변하거든 變하면서도 또 변치않고
진여를 그렇게 두가지로 설명을 하지요? 眞如의 마음을, 한가지는 그 본체는 不變이고 그 작용은 隨緣이다. 불변 수련, 이건 體가 되고 이건 用이 되고 體用관계죠? 마음을 진여라고도 하지요.
又荷澤의 所宗空寂知者는
또 荷澤의 宗을 삼는 바, 하택이 가장 주장하는 공적영지라고 하는 것은 寂知는
空寂이 即是無相이니
空寂은 바로 無相이라 말요. 형체가 없는, 相이 없는 불변이죠? 불변인데
以神解之性이 雖無形相이나
그 신비롭게 아는 그 성능이 비록 形相은 없으나, 마음이라는 것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없으나
而靈知不昧새
그러나 靈知하여 昧하지 않을새, 신령스럽게 알아서 어둡지 않고 분명하고 밝기 때문에
故云寂知며
그러므로 寂知라고 말하며
亦云寂照며
寂知를 다른말로는 또한 寂照라고도 하죠. 寂이 바로 불변이고 수련이 바로 照가 되죠?
亦云無相之智며 亦云無知之知라
또한 모냥이 없는 智라고도 하며 형상이 없는 그 영지, 또한 아는 것이 없이 안다라고 한다 말요. 아는 것이 없단 말은, 分別로 아는 것이 없다 그말요. 분별심이 아니다 말이요. 분별지가 아니다 그말요. 분별이 없다해서 지적능력이 없는 건 아네요. 아는 것 없이 아는 안다고 말함이라.
如肇論에 云
如肇論에 말하기를, 승조법사가 쓰신 [반야무지론]에 나온거요. 세 번째 [반야무지론] 제 삼에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승조법사 [조론]이 여기에 가끔 나오는데, [조론] 글이 참 잘된거요.
放光般若에 云 般若는 無所有相이며 無生滅相이라하시며
般若의 종류에 금강반야도 있지만은 放光般若란 반야의 명칭이요. 放光 팔부 팔부반야가 있죠? 그 中에 방광반야 문수반야 뭐 금강반야 무슨 대품반야 소품반야 반야의 종류가 여러가진데 [방광반야경]에서 말씀하시기를, 般若는 있는 바 相이 없어 모든 상이 없다 그말요. 상만 없는게 아니라 生滅相이 없다라고 했다 그말요. 생기고 사라지는 生滅相이 없으니까 정말 반야죠?
不生不滅이, 그래서 [반야심경]에도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諸法空相이라고 했죠? 시제법공상이 여기서 말하는 無所有相이고 不生不滅이 여기서 말하는 無生滅相이라는 말과 같은거죠.
道行般若에 云
또 道行般若經에서 말하기를, 반야경의 종류가 道行이라고 하는 반야경이 또 있어요. 방광반야는 부처님께서 광명을 놓으시면서 반야의 설법을 했다해서 放光이고 도행반야는 보살이 도를 수행하는 그러한 것이 도를 수행하는데 반야가 가장 으뜸이죠. 결국에 반야를 수행하는거요. 그런 의미에서 道行이라고 했죠. 도행반야경에서는 말씀하시기를
般若는 無所知無所見이라하시니
아는 바도 없고 보는 바도 없어 分別知가 없다 그말이죠. 여기서 아는 바란 말은 분별지같은게 없단 말이요. 知字는 분별지로도 말하고 분별지가 아닌 것을 말하기도 하고 하는데, 여기 知字는 靈知의 知字가 아니라 분별지의 知字요.
此辯智照之用하야 而曰無相無知者는 何耶아
옆에다가 이언정 토를 해놓고 지운다는 뜻으로, 그때는 지우개를 가지고 사용하지 않다 보니까 지워놓고 그냥 없앤다는 뜻으로 이렇게 동그래미 친거요. (탕탕탕) 이언정 토는 안달아도 되아요. 無相無知라고 말한 것은 무엇때문이냐 어째서 그러냐.
그러니까 그 위에는 此辯智照之用이어늘, 옆에다 다른 토를 더 위주로 봐야되요. 이것은 지혜로 비추는 마음의 작용을 분변하여 그걸 밝혀서, 그래서 相이 없다 無所有相 또는 無所知 그런 말, 상이 없다라고 말하고 아는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때문이냐? 큼.
[도행반야경]과 또한 [방광반야경]에 있는 말을 승조법사가 [조론]에서 이끌어서서 말을 하시면서 또 그 밑에다가 비판을 하는겁니다.
果有無相之知와 不知之照가 明矣라
과연 틀림없이 진실로 그말요. 無相의 知와, 상이 없는 아는 것과 상이 없이 아는 것이 바로 寂知 공적영지하는 靈知의 知字죠? 아는 것이 없이 비추는 것, 그것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분명하다 밝다 그말이요. 그러니까 우리 마음에는 無相知가 있고 不知照가 있다 그말이요.
何者오
왜냐하면은
夫有所知면, 내나 반야무지론을 말을 하다보니까 이런 말씀을 하신거요. [조론] 가운데 [조론] 속에 반야무지론이라는 그런 論을 써가지고 논문을 써서 밝힌거요 般若無知論. 般若는 아는게 없다 그게 제 삼권이죠.
物不遷論하고 그 다음에 인자 반야 뭐여 不眞空論 般若無知論 그런것 말했었죠? 涅槃無名論 그 中에 반야는 아는게 없다라고 하는 것을 논리를 전개하시면서 [조론]에서 그걸 어.. 밝힌겁니다. 논문을 쓰신거죠 그렇게
夫有所知면 則有所不知니
대저 아는 바가 있으면 곧 모르는 바도 있다 그말요. 다 아는것은 아니잖아요? 아는 것보다 모르는게 더 많죠? 아는 것은 한 10프로라면은 모르는 것은 100프로 1000프로쯤 더 많지요? 모르는 영역이 더 많찮아요? 그러니까 아는 바가 있으면 모르는 바가 있어.
우리 눈 앞에는 밖에 볼 수 있지만은, 뒤통수 저 등 뒤에는 어두워서 못 보는 데가 또 있지요 잉? 등 뒤에는 안보이죠? 그와같이 아는 바가 있으면 모르는 바도 있다 그말요.
以聖心은 無知새 故無所不知니
성인의 마음은 거룩한 道를 사무친 聖人의 마음은 아는 게 없어. 분별지가 없다 그말요. 분별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알지 못한 바도 없어. 모두 다 알지 전지전능으로, 성인은 아는 것이 없어 분별심으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모르는 거 없이 또 다 안다 그말요. 그래야 되는거죠.
결혼하기 전에는 다 나의 배우자가 될 수 있어 남자든 여자든 그렇잖아요? 누구든지 다 선택할 수 있으니까 그와같이 일단 결혼해서 배우자를 정해뿌리면은 거기는 그때는 판에 박혔어. 에? 그와같이 여기도 아는 바가 없어야 정말 크게 아는 바 있어요.
不知之知라야 乃曰一切知니라
아는 것 없이 아는 것이라야 이에 一切知라고 말할 수가 있다. 부처님은 一切種知라고 하죠? 一切知者 一切覺者 [아함경]에 부처님이 외치시기를 이런 말씀 하셨죠. 석가모니께서 我是一切知者 모르니까 부처님도 당신 소개를 하시는거요. 자기 PR을 해요. 또 我是一切覺者라 나야말로 일체것을 다 아는거요. 나야말로 일체것을 다 깨달으신 분이라고,「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고 하신 것만 아니라 [아함경]에서는 저런 말씀까지 하셨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일체종지 모든 것을 다 사무쳐 아시죠.
그러나 부처님이 아신다고 해도 십팔 불공법에는 이 말 나오죠. 부처님만이 특수하신 열여덟가지 불공법에는 이 말도 나와있어요. 부처님은 모르는게 없어! 無不知라. 그러면서 이 사람 이미 버렸다. 부처님은 모르는 거 없이 모두를 다 알고 계시지만 그러나 아는 相을 벌써 떠나 버렸어. 안다는 것을 떠나서 이미 버렸다.
예수가 티벳트에서 3년간 잠적해서 잠적해가지고 티벳트에서 불교를 배웠잖아요. 그 때 계받은 계명이 이사요 이사 헛 예수가, 그러니까 예수는 불교에 비하면은 서자되지요 사실은, 정식 정식 불교도 못되고 불교는 그네들한테 비하면 그래도 종가집이고 그거 작은집이나 서자집에서 종가를 헐뜯고 욕하고 안 좋게 보니 말이요. 잘못하면 벌 받지 허허. 이사라고 불명을 받았다라고 하는 기록이 나와있어요 예수가.
부처님은 모르는 것이 없지만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지만은 아는 相을 떠나서 이미 다 놓아버렸어. 放下着했다 말이요. 버릴 사자 버려버렸다. 이미 이자요. 발음을
성인은 모르는 게 없기 때문에, 아는 것 없이 알기 때문에 一切知라고 말한다.
故로 經에 云
故로 經에 말씀하시기를
聖心은 無知며 無所不知라하시니
성인의 말씀은 아니 성인의 마음은 아는 것도 없으며 또 알지 못하는 것도 없다 하시니, 그 經은 사익범천소문경에 나오는 말인데 조법사께서 [조론]에다 갖다놓고 그냥 經이라고만 했지. 사입번천소문경에 나온 말이라요.
信矣로다
信矣란 말은 그것 사실이다 있는 말이다 틀림없는 진실하다 그말요 진실을 말한 말이요. 거까지가 [조론]이 끝난거요. 그래서 옆에다가 나한이라고 한 것은 [조론]이 거까지 끝났다라는 것을 표시한거요. [조론]데로 토를 달라면 信矣로다 해가지고 그 밑에 말이 또 나가는데 그래서 신의로다 달았다가 신의라 하니라 하고 옆에다 또 단거요. [조론]말은 거기까지 끝났어요.
空寂이 即是無相이며
空寂이 바로 이 無相이며, 공적영지하는 공적 그 자체가 바로 모든 相이 없는 것이며
即是無知라
곧 이 知가 없는거라. 그건 연수대사가 비판한거요. [조론]에는 이 말이 안나와요. [조론]을 내가 보았기 때문에 여기다 내가 토를 단거요. 그 다음에 또 論에 云한것은 [조론]말을 이끌었어요. 연수대사가
論에 云 無所不知라하며
나와있죠 그 論은 [조론]이라요. 아까말한 반야무지론, 반야는 아는 것이 없다라고 보통은 반야는 아는 게 있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겠지만은, 조법사는 반야는 아는 게 없다 무지론을 쓰신거요. 무지만이 아니요 또 무소불지라, 알지 못하는 바 없어 다 알지 전지전능처럼. 주제를 반야무지론이라고 했지만은 보통은 반야는 안다고 집착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title을 반야는 아는 게 없다라고 이렇게 전제를 하면서 말 속에는 아는게 없는 것 뿐만 아니라 알지 못하는 것도 없다라고 이렇게 이론을 전개 하신거요.
又云
또 말하기를 반야무지론 [조론]에서 또 말하기를
乃曰一切知者는 此知가 即是真知니
이에 말하기를 인자 乃曰은 [조론]에서 말한거죠. 又云는 인자 연수대사가 [조론]을 이끌어서 말한거고 乃曰 거부터는 [조론]의 말이요. 一切知者라고 一切것을 안다라고 이에 말 한것은, 이 아는거야 아는것은 바로 곧 이 참으로 아는거라 말이요. 此知는 一切知라고 하는 지자를 가르키는 말이죠.
為一切眾生自心之體라
一切中生自心의 본체가 된다 그말요. 그게 바로 空寂靈知 자리죠.
真性靈知가 湛然恒照새
眞性이 신령스럽게 아는 것이 湛然이 항상 비출새, 발음을 잠이라고도 하죠? 맑을 잠 맑을 잠인데 보통은 또 담연 담자로도 발음을 해요. 운허스님은 꼭 잠연이라고 읽어야 된다라고 하는데, 보통 잠연이라고 이름져놓고 우리 스님들가운데도 담연이라고 요자 발음을 담연이라고 하는 분도 많잖아요? 담연이라는 말은 청정하다는 뜻이요. 맑은 물보다 더 맑아서 청정해서 깨끗한 것도 청정이고 텅 빈것도 청정이요. 청 텅 빈것이 바로 여기서 담연이요. 청정해서 항상 비추기 때문에
亦云無念之知니
또한 생각 없는 아는 거라고 無念의 知라고도 말을 하나니
若有念而知하면 凡夫境界라
만약 생각이 있이 알면은 범부의 경계라. 범부들은 뭐 생각을 가지고 생각을 일으켜서 생각해야 알죠? 그것은 범부들의 세계요. 범부들은 뭐 생각가지고 아는거지. 생각없으면 모르잖아요? 생각해봐야 연구해서 아는것도 有念의 知라 凡夫들은
故로 云 知覺은 乃眾生이라하니라
그러므로 그 말씀은 [능엄경] 말씀이죠. 문수보살 게송에. 知覺을 일으키는 지각을 가지고 있는, 그런 것 생각있이 아는 거 知覺은 이에 衆生이라고 했다. 중생이나 범부나 뭐 비슷한 말이죠.
若無念無知하면 二乘境界요
만약에 생각도 없고 아는 것도 없으면 그건 二乘의 境界요. 성문연각 나한이나 벽지불의 경계는 무념무상이고 아는 것도 없다 그말요. 그렇게 되기도 어렵죠? 無念無知가 되기가 그렇게 쉬운게 아네요.
若無念而知하면 諸佛境界니라
無念에만 그쳐있는게 아니라 거기서 자리를 잡는게 아니라 無念으로 또 알아야 되요. 공적에만 자리잡을 것이 아니라 공적에서 영지로 그야말로 발전해야되죠. 그러니까 眞空만이 능사가 아니라 妙有로 제대로 회향해야 되는거죠. 진공묘유를 다 겸해서 정혜쌍수한 것처럼, 진공묘유 두 가지를 걸림없이 막힘없이 그렇게 통달해야 그게 바로 부처님의 경계죠. 생각없이 아는 것은 바로 여러 부처님의 경계라.
삼등급으로 말했죠? 범부하고 소승성자들하고 또 부처님의 경계까지 부처님까지
空寂이 即是無念이요
空寂한것은 바로 이 생각이 없음이요.
亦云無住之知라
또한 생각이 없는 知라고 말을 한다. [조론]은 저기서「又云 乃曰一切知者는 此知가 即是真知니」거까지가 [조론]인데 에.. 그다음에는 [조론]말이 아닌데, 연수대사가 그냥 서술체로 서술해버렸죠. [조론]을 이끌어놓고
[종경록]에 보면은 어떤 경론을 이끌어놓고 자기가 또 말을 했는데 불분명하게 떨어진게 많아요. 경의 말이 어디까지 떨어지고 논의 말이 어디까지 떨어진것인지 분명하게 표시도 안해놓고 그냥 자기말로 막 섞어가지고 그렇게 [종경록] 100권에는 그런식으로 많이 했기 때문에 헷갈릴때가 많죠. 乃曰 一切知者는 거까지가 원칙은 [조론]의 말이죠. 그 다음에는 연수대사가 다 서술한거요.
그래서 無念이 가장 최고죠? 사택이나 선방에서도 이런 말씀을 이런 말을 많이 써붙이죠.「유이무념으로 위종이라」 오직 무념으로써 종을 삼는다. 무념이 되면 바로 성불한거요. 공적이 바로 무념이요 또한 머무름이 없는 知라고 無住의 知라고 말함이라.
만약에 머무른 바가 있으면 머문단 말은 집착한다는 말이요. 집착한 바가 있으면
如人이 入闇에 則無所見이요 若無所住하면 如日月光明이 照見種種色이니라
이 말은 [금강경]에 있는 말을 따 온거죠? [금강경] 말씀이죠. 만약에 머무른 바 집착한 바가 있으면, 비유컨덴 마치 어떤 사람이 어두운 암흑에 들어갈 때 캄캄해서 곧 보는 바가 없는 것과 같고, 만약에 머무른 바가 없으면 집착한 바 없으면 해와 달의 光明이 밝은 일광이 [금강경]에는 달 月字는 없지요. 日光만 나오죠. 가지가지 물색을 가지가지 빛깔을 비추어 보는것과 같다라고 인자 [금강경] 말을 이끌어서 그와 같으니라라고 했죠.
華嚴錦冠에 云
華嚴錦冠에 이르되, [화엄금관] 책을 내가 못 구했어요. 이게 참 굉장히 좋은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저저 보조국사가 어.. [법집별행록]사기에도 화엄금관 말이 나오잖아요. 화엄금관은 [화엄경]에 관한 저선데, 錦冠 비단으로 된 관이라고 한 거지. 이 저자는 누구냐면은 규봉의 제자 구오대사(?)요 구오대사가 지었다라고 나오죠. 금관 말이 참 멋들어지드라구요. [대방광불화엄경] 그 해석한것도 [법집별행록] 사기에도 보조국사 이끌어 놨죠.
그때는 아마 [화엄금관]이라는 책이 있었겠지. 지금은 내가 못 봐서 아쉽다고 여러분께서 이거 [화엄금관] 책을 구하시면 보여주시면 고맙겠어요. 나는 저거 속장경이나 다른 내가 가지고 있는 책 같은데는, 선문 무슨 총서같은거 봐도 [화엄금관] 책이 안 나와. 규봉스님의 제자 구오대사가 쓰신건데 내용이 굉장히 좋더라구요. 말 한마디썩 한마디썩 한 것 보면은 핵심 요점을 딱딱 찍어서 말씀이 명쾌하게 잘 하셨다구요. 여기도 지금 금관에 있는 말을 여기다 이끌어 논 거죠.
화엄금관에서 말씀하시기를,
含眾妙而有餘者는
衆妙를 아까 能含 衆妙라고 한 것처럼, 온갖 妙를 포함하고도 여유가 있는 것은 남음이 있다는 것은 뭐냐면은
謂一切事가 皆不改本相하고
말하자면은 一切 모든 사법이, 모든 일이 그 본래의 모습을 고치지 않고 본래 모습 그대로 또 본자리를 본위치를 떠나지 않아서
法法이 皆能為大為小하며 為一為多하며
우주만법 두두물물 온갖 法이 모두가 다 能히, 클 수도 있고 크게도 되고 작 게도 되며 하나도 되기도 하고 많은 것도 되기도 하며
為主為伴하며
또 설법하시는 主가 되기도 하고 主는 교주죠? 설법을 듣는 보살같은 대중들 벗 伴字 벗이 되기도 하며
即此即彼며
이에 卽하고 저에 卽하며, 此와 彼에 卽한다 말이요. 彼此 또
即隱即顯이며
은밀함에도 卽하고 나타나는 것에도 卽한다. 隱은 비밀로 잘 안보이는 것이 은이죠? 그믐달은 안 보이죠? 그믐달은 숨어서 隱이죠. 보름달은 잘 보이죠? 보름달은 나타난거죠. 그러니까 은과 현은 서로 상반되는 것인데, 은은 숨어서 잠재해서 안 보이는거고 또 현은 드러나서 잘 보이는건데 隱에도 卽하고 숨어있는데 숨어있는 그대로 안 떠나고 안 떠나는 것을 卽했다 그래요. 나타난 顯에도 卽했으며, 어느 어느 물체가 보일때는 顯이고 안 보일때는 隱이죠?
即延即促이라
또 시간적으로는 연착 延에도 卽하고 促에도 卽한다. 연은 많은 시간이 장시간이 延이고 촉잔가 착잔가? 촉 재촉한다 응 促은 빠른 시간이요.
그러니까 예를 들면은 一刹那는 促이고 일초는, 장시간 몇 년 몇만년은 延이죠? 연은 장시간이고 또 촉은 빠른 시간 그러니까 뻗지르기도하고 또 가장 축소된 축소된것이 착이죠? 연장되고 축소되는 것에도 卽한다. 연장함에도 卽하고 축소된 것에도 卽한다. 축소된 것은 굉장히 짧은 시간을 促이라 그래요.
촉박하다 그렇죠? 시간이 바쁘면 시간이 없으면 그 촉자요.
첫댓글 고맙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_()()()_ 고맙습니다.
그저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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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화풍정 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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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성인은 분별심으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모르는 거 없이 또 다 안다. 공적에서 영지로 발전해야한다. 眞空에서 妙有로 회향해야 한다. 화풍정님,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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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고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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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如란 本體는 不變이고 그 作用은 隨緣,,, 마음이 변치 않는 不變은 바로 마음의 本體가 되고 隨緣은 인연을 따른다는 것인데, 인연을 따른 다는 것은 變化함을 의미함,,, 無念이란 머무름이 없는 知로서 '無住의 知'라 칭함.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법집별행록] 사기 가 아니라 이어서 법집별행록사기(法集別行錄私記)입니다.
그리고 규봉종밀 스님의 제자는 구오대사가 아니라 전오(傳奧입니다.
그믐달은 숨어서 은(隱)이죠. 이 부분에서 은을 은월(隱月)으로 보아야 이해가 쉬울 거에요.
주심부를 강론하신 각성스님과 속기를 하신 화풍정님께 감사드립니다.
김해 정암사 법상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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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스님, 고맙습니다
화풍정님, 고맙습니다
염화실 운영 무비스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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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스님 ..감사드립니다.,
허풍정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