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불교문화연구원이 11월 8일 오후 1시 서울 관문사 4층
옥불보전에서 ‘한국 전통불탑의 양식과 신앙적 계승’이란 주제아래 ‘관문사 10층 옥불대보탑’ 조성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이에 앞서 발표자들의
논문을 요약, 지면에 소개한다. 총 6편의 논문 중 홍윤식 동국대 명예교수의 ‘경천사 10층석탑의 불교사적 의의’와 권기현 위덕대 교수의
‘불탑신앙의 성립과 전개’ 등 2편은 원고가 늦어 지면에 싣지 못했다. 편집자
|

| |
▲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경천사10층석탑. |
개 회 사 "옥불대보탑 조성 정신 되새기는 자리"-
이봉춘 천태불교문화연구원장
<한국 전통불탑의 양식과 신앙적 계승>을 주제로 하는 오늘의 학술대회에서는
수도권의 천태종 중심도량 관문사에 조성·건립 중인 10층옥불대보탑의 학문적·문화적·신앙적 의의를 조명하고자 합니다.
이미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옥불대보탑 건립은 옛 고려시대 경천사10층석탑을 오늘에 복원·재현하는 뜻 깊은 불사입니다. 국보 제86호로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로비에 우뚝하게 서 있는 이 탑은 여전히 경건하고 장려한 위용으로 6백여 년 전 옛 신앙심의 자취를 그대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다시 천태불자들이 이 시대의 간절한 발원과 신앙정신을 모아, 이를 본 모습대로 복원하고 창조적으로 재현하려는 것이 곧 관문사
10층옥불대보탑입니다.
우리는 이 옥불대보탑을 세워 모시면서 분단된 조국의 통일과 영구한 평화·번영을 기원하고, 나아가 세계 인류
모두가 자유와 평등 속에서 아름답게 공존할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이는 애국불교·생활불교·대중불교를 지표로 삼고 있는 천태종의 교화정신을 오늘에
구현하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염원이며 노력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옥불대보탑 조성의 참 정신과 의미가 되새겨지고
우리 모두의 삶이 대탑의 위용처럼 의연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경천사탑 세밀한 실측 통해 완형
찾아야” 경천사10층석탑과 원각사10층석탑의 비교연구- 정영호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원각사10층석탑과
경천사10층석탑을 비교 고찰해 보면 우선 건조 재료에 있어서 대리석이라는 희귀한 석재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같으며 기단부부터 탑신부 3층까지의
평면, 4층 이상의 평면 등이 모두 같다. 그리고 기단부부터 탑신부에 이르기까지와 각 면의 조각까지도 흡사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원각사탑 건립을 경천사탑과 거의 같은 때로 추측한 억설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경천사탑은 고려 제29대
충목왕4년(1348)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원각사탑은 조선 제7대 세조13년(1467)에 낙성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건립연대의
관계에서 본다면 양 석탑의 건립연대의 차이는 119년이라 하겠다.
그런데 경천사탑은 고려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형태의
석탑으로 조선시대에 이르러 원각사탑이 유일하게 경천사탑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의 불교는 국초부터 배불숭유라는 국시로 인하여 위축 일로에
있었다. 그러나 세조대에 이르러 불교를 옹호하여 국왕부터 불전(佛前)에 나아가고 있었으니 이때가 조선시대 불교의 재흥시(再興時)로 원각사를
창건하였던 것이다. 경천사의 위치는 경기도 개풍군으로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리하여 원각사를 창건함에 있어 기교의 극치를 보이고 있는
경천사탑을 모범으로 하여 원각사10층석탑을 건립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1992년 12월 당시 문화체육부 문화재관리국의 위촉을 받아
‘원각사지10층석탑 정밀실측조사 현장’을 여러 차례 답사하며 이러한 세부의 정밀실측조사는 하루 속히 경천사10층석탑도 실시해야 될 것이라는
생각이 간절했다.
경천사10층석탑은 1907년 일본으로 불법 반출할 당시의 상황이나 각 부재의 검토 내용이 전혀 알려지지 않아 검토
사실 여부조차 알 길이 없다. 그 후 반환되어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해체된 체 흩어져 있던 것을 1959년 복원에 착수하여 다음해인 1960년에
완공하였는데 이때의 실측 도면이나 검토 내용 등도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경천사탑을 관찰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복원할 때의
각 부재가 제자리에 놓였을까 하는 점이다. 그것은 10층 옥개석을 볼 때 7, 8, 9층 옥개석보다 큰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경천사탑도
하루라도 빨리 원각사탑과 같이 세밀한 실측을 진행하여 전문가들의 세세한 관찰과 진단으로 앞으로의 영구적인 보존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오랜 수난 속에서 각 부재에 많은 손상을 입었는바 1960년도 복원 당시 부분적인 손질로 다소의 보강은 되었으나 미흡한 점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4층 4면 모두 불회도, 16불회도로
봐야” 경천사10층석탑 16불회도(佛會圖) 부조 도상의 연구- 문명대 / 동국대 대학원 교수
원각사지10층석탑과 마찬가지로 1~3층 탑신 각 면 상단부에 12불회도, 4층 탑신
각면에 4불회도 등 모두 16불회도가 부조되어 있다. 각 불회의 명칭은 탑신 위의 옥개부분에 새겨져 있는데 서로 분리되기 때문에 이동 때나 수리
때 명문과 탑신면이 서로 바뀔 수 있다. 따라서 몇 번의 이동이 있었으므로 잘못 조합된 경우도 있을 것이며, 뿐만 아니라 도상내용과 다른
명칭[銘文上名稱]이 사용된 경우도 있을 것 같다.
1층의 불회도 장면은 원각사탑과 동일한 4불회도[東: 미타회, 南: 삼세불회,
西: 영산회, 北: 용화회]이고, 2층은 서(西) 원각회, 동(東) 다보회 외에, 북(北) 화엄회, 남(南) 법화회가 서로 방위가 바뀌었으며,
3층은 원각사탑과 동일한 4불회도[東: 약사회, 南: 소재회, 西: 전단서상회, 北: 능엄회]이고, 4층은 원각사탑의 석가회와 지장회가
경천사탑에서는 방위만 서로 바뀌어 있다. 어느 탑이 원래의 모습인지 단정할 수 없지만 둘 다 약간의 착오는 있는 것 같다.
이상을
요약하면 첫째, 방위가 원각사탑에 비해서 바뀐 경우[2층과 4층], 명칭이 바뀐 경우[2층 다보회], 불회 내용과 명칭이 다른 경우[경천사탑,
원각사탑 1층 남] 등이다. 첫째, 2층 동(東) 다보회는 법화회이며, 남(南) 화엄회는 다보회이고, 북(北) 법화회는 화엄회로 추정되므로 서로
명칭부분을 바꾸어야[移動]할 것이다. 둘째, 4층의 동(東) 석가회와 서(西) 지장회는 원각사탑과는 반대되는데 경천사탑의 방위가 맞을 것 같다.
셋째, 내용과 명칭이 다른 경우인데 1층 남(南) 삼세불회는 본존불이 비로자나불이고 좌우는 미륵과 아미타불로 추정되므로 중앙은 삼신불(三身佛)의
본존불이며 좌우는 삼세불의 좌우불이어서 삼신불과 삼세불의 혼합된 형식으로 추정된다. 이런 삼신불과 삼세불의 결합형식은 조선시대에 보편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 불회도들에 대해서 1층에서부터 3층까지 모두 12회라고 〈동국여지승람〉에는 말하고 있으나 명칭이 새겨진 불회는 4층의
1회까지 모두 13회이므로 원각사탑이나 경천사탑이 모두 13회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명칭이 새겨져 있지 않은 4층의 3면도 명칭이 새겨진
1면[南:원통회]과 동일한 도상 내용이므로 4층 4면을 모두 불회도로 보고 16불회도로 판단한다.
석탑의 형식이나 양식은 원의
장인들에 의하여 조성되었다는 〈동국여지승람〉의 설은 모두 사실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설계단계 등에 관여했음을 시사한다고
생각된다.
이는 4면두출식 아(亞)자형 석탑이고, 석탑의 부조들, 특히 1-4층에 새겨진 16불회도의 조각양식에서 새로운 특징이
나타나고 있는 점 등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불상에는 티베트계의 이른바 라마양식의 특징은 거의 나타나지 않아서 티베트 양식의 수용문제는
재검토를 요하게 하고 있는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관문사 보탑, 원형 고증 바탕 현대적 추정
복원” 개성 경천사지 10층석탑 복원에 대한 연구- 신은정 / 엔가드 문화재연구소 연구지원팀장
경천사탑 원형
복원의 근거는 다섯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10층 옥개석 마루부분에 나타나는 각이 꺾여 들어간 부분을 볼 때 10층 옥개석
위에 연결되는 부재는 합각면이 있는 팔작지붕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둘째, 10층 옥개석 끝에 남아있는 용발톱 조각을 보았을 때는 10층 옥개
위에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마찬가지로 팔작지붕이 교차된 십자형 지붕부재가 놓이고, 합각지붕 내림마루 끝에는 용 조각이 표현되었으나 현재는 본 탑의
합각지붕 부분이 소실됐고 10층 옥개석에는 용 발톱 조각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셋째, 동형식(同形式)의 원각사지 십층석탑에 비쳐볼 때
10층 옥개석은 십자형 지붕구조이다. 넷째, 본 석탑에서 합각지붕의 상륜부 조성 예(例)는 이후에 조성된 보현사, 묘적사, 수종사 등에 영향을
미쳤고 표현은 보다 간략화 되어 나타났다. 다섯째, 3층 옥개석<上>과의 유사성을 감안할 때 10층 옥개석 역시 탑신부가 같은
마감형태를 차용했을 것이고, 제2탑신부가 마감되는 10층 옥개도 팔작지붕이 교차된 십자형 지붕과 같은 형식으로 마감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경천사탑의 조성당시 원형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경천사탑은 1902년, 1960년의 조형이 모두 다르게 나타나는
등 오랜 수난의 역사를 가지는데, 현존하는 용발톱 조각, 10층 옥개석 마루의 꺾인 각, 동일 형식의 원각사지 십층석탑의 10층 옥개석,
현존하는 경천사탑의 유사부분들을 통해 완형(完形)의 10층 옥개석을 찾아낼 수 있다.
따라서 2005년 최종 복원 시에는 조성당시의
원형이라고 연구된 팔작지붕이 십자로 교차하며, 내림마루 끝에 용이 조각되는 조형으로 복원하였다. 십자형의 중앙에는 별도의 상륜 장식이 안치되었을
것이나, 상륜 장식은 근거자료가 부족하여 추정할 수 없었다. 다만 경천사탑의 화려하고 섬세한 조각기법으로 미루어 상륜 장식 또한 화려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경천사탑은 역사적 문화유산으로써 원형 고증에 입각하여 소실부분의 추정복원은 생략되었으나, 관문사 옥불대보탑은 원형
고증을 바탕으로 현대적 해석의 추정복원이 이루어 졌다. 근거자료 부족으로 정확한 원형을 복원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현대적 해석과 창작이라는
점에서 관문사 10층옥불대보탑의 복원은 과거 속에서 현재를 이어가는 새로운 계기가 될 것이다.
경천사탑의 원형복원은 보존을 위한
주변환경 조절이나 현상 유지와 같은 소극적인 복원이 아니라, 근거자료를 통해 소실된 원형을 복원하는 적극적 개념의 복원이었다. 따라서 원형의
진정성에 대해 이견(異見)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화재의 원형을 복원하는데 있어, 특히 소실된 부분의 복원은 많은 역사적
책임감이 동반된다. 연구의 오류로 인해 때로는 왜곡된 형태로 복원되기도 하였기에, 복원은 주로 가역적인 방법들로 이루어졌으며, 복원 후에도
소실부분의 복원 연구는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래 요소와 전통 균형 이룬 독창적 석탑” 경천사
10층석탑 기단부 도상 연구- 신소연 /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1348년에 건립된 국보 86호 경천사(敬天寺) 십층석탑은 각
층마다 다양한 도상을 갖춘 대리석 석탑으로 형식이나 도상면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경천사 석탑 기단부 평면은 소위
‘아(亞)’자 형태로 하대중석, 중대중석, 상대중석 부재의 노출된 각 면에 부조가 남아 있어 20여 장면씩 총 60면에 부조가 되어 있다.
그러나 기단부는 사람의 손이 닿기 쉽고, 여러 차례에 걸쳐 이전과 복원을 거듭하면서 크게 손상돼 온전히 남아 있는 부재가 많지
않다.
기단부 하대중석에는 용·사자·연꽃이, 중대중석에는 서유기 장면이, 그리고 상대중석에는 나한상이 조각되어 있다. 불공을 드리러
온 사람들은 불교를 수호하는 용과 사자를 지나, 온갖 고난을 극복한 현장의 구법행을 통해 나한을 만나게 된다. 상대중석의 나한상은 크게 기암괴석
속의 나한상과 바다 위의 나한상을 표현하였다. 이들 나한상들은 동시대 나한상을 그렸으며, 이후 조선시대 나한도에 등장하는 나한 모습의 원형이
되었다.
서유기 부조는 이제까지 실체가 분명치 않았던 원대 〈서유기〉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점에서 미술사적·문학사적으로 모두
중요하다. 여러 장면에 걸친 내용 전개는 명대 유행한 통속문학의 삽화를 연상시킨다. 통속문학의 삽화가 불교 건축물의 초안으로 사용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서유기 부조를 통해 서유기 판화의 시작이 원대부터였음을 알려준다. 이는 명대 판화의 원형을 보여주는 매우 소중한 유산이기도
하다.
경천사 석탑이 건립된 지 약 120년 후 원각사 석탑 건립 당시 유사 재질의 동일한 도상을 지닌 석탑이 건립되었다는 것은
초본과 같은 매뉴얼의 존재를 의미한다. 이러한 매뉴얼 형태는 서유기 부조의 도안이 소설 〈서유기〉를 도해했던 회화 작품, 특히 판화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증명한다. 경천사 석탑은 양감을 풍부히 살려 입체감을 강조하고 내용 전개에 필요한 세부를 꼼꼼히 표현하여 이야기 전개에 충실한 반면
원각사 석탑 부조는 경천사 석탑과 같은 입체감은 표현하지 못했으며 매우 평면적일 뿐만 아니라 세부 묘사에 있어서 생략한 표현들이 많다. 원각사
석탑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서유기의 내용을 인식하고 부조한 것이 아니라, 전체 도상초의 일부로서 인식하고 도상을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경천사 석탑의 기단부는 원대 티베트-몽골 불교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으로 거론되어 왔다. 특히 기단부의
아(亞)자형 평면 형태는 라마교 불탑과 관련이 깊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러나 기단부 도상의 경우 서유기 도상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도상과
나한상과 같이 불교회화에서 볼 수 있는 기존의 도상이 모두 남아있다. 경천사 석탑은 고려 말 원대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석탑이자 외래적 요소와
전통적 요소가 균형을 이룬 새로운 형태의 독창적인 석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