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형태의 공세도 허용하지 않는다! 냉각수와 탄약만 넉넉히 있다면 거의 무한연사에 가까운 놀라운 지속 사격 능력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에서 맹활약 반자이 어택과 인해전술을 저지해낸 공포의 기관총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1203275%2Fimg_1203275_1382564_0%3F1238377760.jpg) 정렬한 한국군의 K-1 전차대 오늘날 자동화기와 강력한 전차 전력을 보유한 한국군이지만 1950년 당시만 해도 미군과 더불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애를 먹었고, 특히 이런 와중에서라면 묵직한 M2HB 중기관총이 투입되어도 총열 교환 문제 등으로 종종 방어선이 돌파되는 일이 빈번했다. 하지만 브라우닝 M1917이 투입된다면 완전히 저지는 못하더라도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겨주거나 인해전술 자체를 저지해내는 경우가 빈번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대의 M1917A1](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1203275%2Fimg_1203275_1382564_2%3F1238377760.jpg)
한국전쟁 당시 M1917A1을 사격하는 미 해병대 기관총팀 M1917은 본체 무게가 15kg으로 오늘날 보병용 기관총 기준으로 보자면 상당히 무거운 수준이지만 이 정도는 양반 냉각수까지 포함하면 무게가 40kg을 넘어가는 바람에 휴대성은 일찌감치 물건너갔고 순수하게 삼각대에 거치해 방어전에나 유리한 중기관총으로 운용되었지만 이것이 그만큼 이 총을 전장으로 불러들인 원인이기도 하다. 냉각수와 탄약만 충분하게 있으면 M1917은 어느 방향으로 적이 몰려오더라도 무한정 사격을 퍼부어줄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인해전술의 달인 중공군조차 수시로 공세가 격퇴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거운 것 싫어하는 병사들의 심리라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 결국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주력은 M1919A4에게 넘겨줘야 했다. 존 브라우닝( 1855~1926 ) 총기에 대해 조예가 깊으신 퍼싱의 전쟁영화 이야기 방문자 분들은 그 이름을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미국의 천재 총기설계자
![M1919A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1203275%2Fimg_1203275_1382564_10%3F1238377760.jpg) ◀ M2 삼각대에 거치된 M1919A4 브라우닝이 너무 무거워 불편한 M1917을 공랭식으로 재설계한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주력 기관총으로 운용되었다. 물론 독일군의 MG 34/42 콤비에 비하면 휴대성이 불편하고 삼각대에 거치해야 하는 단점이 있었지만 우수한 신뢰성으로 종전 시까지 운용되었고 한국전쟁에서도 맹활약했다. 하이람 맥심과 더불어 기관총 분야에 있어 역사에 길이남을 걸작을 설계한 양대산맥인 그는 .30구경 기관총계에서 혁명을 불러 일으킨 것으로 모자라 비록 미 육군 현역에서는 퇴역한 지 오래지만 상당 기간을 활약한 걸작 M1911 콜트.45를 설계하는 등 기관총 외에도 소총과 권총 분야에까지 진출한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물론 그의 시작이 결코 성공적이지만은 않았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가 최초로 기관총 설계를 시작한 것은 1800년대말로 최초의 기관총이 완성된 것은 1895년이었다. 비록 하이람 맥심에 비하면 등장은 늦었지만 초창기 기관총들이 그러하듯 잦은 고장과 충분치 못한 내구성 등으로 군으로부터 퇴짜를 맞고 있을 때 브라우닝의 기관총만큼은 비교적 잔고장없이 잘 작동되어 군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당시 하이람 맥심의 "맥심"을 제외한 제대로 작동되는 기관총이라고는 프랑스의 호치키스( 이 또한 설계는 미국인이 했지만 )와 브라우닝의 막 완성된 기관총 정도로 적었으니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초창기 기관총들이 아직 제대로된 가동 체계를 갖추지 못한 시절, 브라우닝이라고 해서 예사는 아니었다.
![M1895를 사격하는 존.M.브라우닝](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1203275%2Fimg_1203275_1382564_3%3F1238377760.jpg)
자신의 첫 기관총인 M1895를 사격하는 존. M. 브라우닝 미국은 세계적인 걸작 기관총 설계자를 3명이나 배출( 하이람 맥심, 존. M. 브라우닝, 호치키스 )한 국가였지만 정작 자신의 군대는 이들 기관총의 채용 시기를 너무나도 늦춰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당시 기관총이 없어 영국과 프랑스군의 총들을 빌려쓰는 촌극을 연출했다. 미군은 맥심의 경량화형인 빅커즈와 프랑스군의 호치키스를 운용하며 감탄사를 연발했지만 정작 브라우닝이 설계한 국산 기관총 M1917은 너무 채용이 늦어 제대로 운용되기도 전에 전쟁이 종전되고 말았다. 최초로 설계한 M1895는 가스 피스톤 작동 방식이 아닌 총열 하단의 가스 발생구에서 배출된 가스를 노리쇠에 연결된 송탄 지렛대를 구동시키는 독특한 방식이었지만 그 덕분에 총의 거치 자세가 너무 높아졌고 작동 방식이 너무 특이한 덕분에 미군에서는 소수만 채용되었을뿐 결과적으로 퇴짜를 맞고 말았다. 하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듯 브라우닝은 M1895의 실패를 교훈 삼아 이를 악물고 걸작 M1917을 탄생시켰다. 그의 작품들 중 현재도 미군에서 여전히 현역으로 운용 중인 M2HB는 물론 비록 현역에서 퇴역했지만 1,000만정 이상 생산되어 미국과 관련된 곳에서는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M1911 콜트.45 등 기관총과 소총, 엽총, 권총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만능 엔터테이너다. 천재성 등으로 따지자면 페터 파울 마우저, 세르게이 가프릴로비치 시모노프, 바실리 데그챠레프, 미하일 칼라시니코프, 유진 스토너 등도 유명하지만 적어도 이들이 총기를 설계할 당시에는 참고할 만한 우수한 교보재라도 있었다. 그러나 브라우닝은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해군을 창설하듯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적을 일으켰고 적어도 작동 방식이 미군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해 소수 채용에는 성공했어도 전체적으로 정식 채용에서는 탈락했다는 점에서 다른 실패작들과 견주는 것 자체가 그에게 수치였다. 여하튼 이 M1895 채용 실패는 브라우닝에게 있어 이 설계방식이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우쳐준 계기가 되었고 그는 20년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 하이람 맥심에게 뒤지지 않는 기관총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M1911 콜트.45](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1203275%2Fimg_1203275_1382564_5%3F1238377760.jpg) ◀ M1895의 채용 실패 이후 공백기간 동안 브라우닝이 잠시 다른 분야에도 진출해 탄생시킨 걸작 M1911 콜트.45 비록 퇴역하기는 했지만 9mm 파라블럼보다 강력한 .45 ACP를 사용하는데다 1,000만정 이상이 생산된 베스트 셀러인만큼 지금도 미국의 총포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권총 중 하나다. 필자는 USP나 글록 등 오스트리아와 독일제 권총을 더 좋아하는 편이라 콜트.45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는 않지만 분명 우수한 신뢰성과 위력 등으로 요즘의 군용권총에 뒤지지 않는 명작임에는 틀림없다. 국내에는 현재 토이스타에서 에어건으로 발매 중이니 관심있는 이들은 토이스타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된다. 물론 그도 설계자인만큼 밥벌이는 해야할 필요가 있었기에 그 와중에 기관총에 비하면 부담이 덜가는 엽총이나 소총, 권총의 설계도 병행해 1911년, 유명한 걸작 M1911 콜트.45를 탄생시켰고 이 때문에 어느 정도 그의 호주머니가 텅텅 비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그의 천재성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소총이나 권총 개발에만 전념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캉브레 전투에서 격파된 마크 전차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1203275%2Fimg_1203275_1382564_6%3F1238377760.jpg) ◀ 세계 최초로 전차와 항공기가 본격적으로 투입된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 하지만 이 전쟁에서 가장 많은 병사를 죽인 무기는 누가 뭐래도 바로 기관총이었다.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자국 상선들이 격침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미국은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하지만 1910년, 브라우닝의 시제품 테스트조차 거부했던 그들이 자랑하던 기관총들은 개틀링과 같은 구식을 제외하고 나니 겨우 1,100정도 채 안되는 매우 적은 수에 불과했고 이는 브라우닝의 기관총을 부활시키는 신호탄이 되었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브라우닝은 기관총의 설계를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러는 와중에 서서히 기관총 설계의 노하우들이 축적된 걸작이 탄생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브라우닝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주요 노하우들을 모조리 특허를 걸어버렸는데 이는 선배인 하이람 맥심이 써먹었던 수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역시 핏줄이 같으면 뭐든 통하는 것인가? )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마크 전차](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1203275%2Fimg_1203275_1382564_7%3F1238377760.jpg) 마침내 1910년, 그는 M1895의 문제점을 보완한 시제 기관총을 완성시켜 미 육군에 테스트를 의뢰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정말 가관이었다. "우리 미 합중국 육군은 귀하의 기관총을 검토할 정도로 기관총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아쉽지만 그냥 돌아가주셔야 겠습니다." 브라우닝은 낙담했고 다시 4년의 세월을 그대로 엽총이나 소총, 권총의 설계로 보내야했다. 하지만 신은 그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1914년,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본격적인 대량 살상무기들이 등장하기 전이었지만 마른 강 전투, 솜므 전투 등을 통해 기관총의 위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준 이 전쟁은 참호전이라는 지루한 장기전으로 이어졌고 양측의 소모전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베르됭 전투](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1203275%2Fimg_1203275_1382564_8%3F1238377760.jpg) ◀ 독일과 프랑스 양군에 참혹한 피해를 안겨준 베르됭 전투 당시 독일군 MG 08/15 기관총팀 독가스 투발에 대비해 방독면을 완벽하게 착용한채 부사수가 수류탄 투척 준비 중인 모습으로 베르됭 전투는 포병 화력 못지 않게 기관총의 위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준 전투다. 결국 독일군은 독가스까지 동원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맞서 연합군도 독가스를 사용하면서 화학전의 양상까지 띄게 되었는데( 이 전쟁에서 독가스로 부상을 당한 히틀러 총통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에서 단 한번도 연합군이나 소련군을 향해 독가스를 사용하지 않을 정도였다. 대신 유태인들에게는 닥치는대로 투과했지만 ) 이 지리한 대치전을 깨기 위해 영국은 유명한 전차( 당시 전차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지만 엄중한 군기로 훈련된 고참 부사관들까지 경악하게 만들 정도로 충격은 컸다 )를 투입했고 독일은 이에 대응해 대전차 소총을 설계했다.
![노획한 T-게베어](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1203275%2Fimg_1203275_1382564_9%3F1238377760.jpg) ◀ 연합군이 전차를 투입하자 독일은 마우저사에 설계를 의뢰해 유명한 대전차 소총인 T-게베어( T-Gewehr, 아직 Panzer라는 개념이 정착되지 않은 시기였으므로 영국의 철자를 그대로 따랐다 )를 설계해 영국군 전차들에게 피해를 입혔고 이에 맞서 영국군 역시 전차의 무장과 장갑을 강화하는 등 제1차 세계대전은 오늘날까지 각국 군대의 주력으로 운용되는 무기들의 기초가 등장해 현대전의 개념을 닦아놓은 전쟁이었다. 물론 초기의 대전차 소총은 사진과 같이 길이가 너무 길고 무거웠지만 눈앞에 등장한 거대한 쇳덩어리에 경악한 독일군 병사들에게는 이 총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미국은 옥신각신 지옥도를 연출하는 유럽의 참상을 목격했지만 어차피 본토에 포탄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이를 수수방관하고 있었고 대신 영국과 프랑스에 막대한 양의 무기를 판매해 재미를 보고 있었다.
![M1917의 시험 사격을 실시하는 브라우닝](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1203275%2Fimg_1203275_1382564_11%3F1238377760.jpg) 물론 독일은 이를 용인할 수 없었고 급기야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펼쳐 미국 상선을 격침시키는 초강수를 두고 말았다. 미국은 크게 분노했고 결국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해 존 퍼싱 장군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막상 참전하려고 하다보니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써먹을 수 있는 수준의 기관총은 국내의 모든 무기고를 다 털어봤어도 겨우 1,100정이 채 안되는 매우 적은 수였다. ◀ 오랫동안 기다린 보람 마침내 자신의 기관총이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 된 것이다. 참으로 오랜 세월을 참고 견뎌낸 결과였다. 그나마 이 수치가 개틀링과 같은 수동식 기관총을 제외한 수치니 얼마나 망신스러운 일인지 알 수 있는 부분 결국 유럽 현지에 도착한 미군은 부랴부랴 인근의 영국군과 프랑스군에게 사정해 기관총은 물론 야포와 전차, 항공기까지 대여하는 촌극을 벌여야 했다.
![미군의 루이스 기관총 사수](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1203275%2Fimg_1203275_1382564_12%3F1238377760.jpg) ◀ 영국군에 배속된 미군의 루이스 기관총 사수 오죽 총이 없었으면 영국과 프랑스군에게서 빌려야했을까? 할 정도로 당시 미군의 사정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프랑스군에 배속된 미군은 범죄적 저성능 기관총인 쇼샤 Mle 1915에 분노했지만 영국군에 배속된 병력은 루이스와 빅커즈를 대여받아 잘 써먹었고 나름대로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렸다. 프랑스로부터는 호치키스와 쇼샤 Mle1915를 대여했고, 영국군에 배속된 미군은 루이스와 빅커즈를 대여하는 우스꽝스러운 자태를 연출했으니 미군 입장에서는 정말 X팔릴 일이었지만 당장 투입할 기관총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겠는가?
![미군 기관총 사수](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1203275%2Fimg_1203275_1382564_13%3F1238377760.jpg) ◀ 브라우닝의 M1917을 들고 포즈를 취한 미군 기관총 사수 총 본체 무게만 15kg, 냉각수를 가득 채우면 40kg 이상으로 늘어나 사실상 들고 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수냉식 중기관총의 단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지만 일단 냉각수와 탄띠만 넉넉하게 있으면 어떠한 적이 몰려와도 두려울 것이 없는 M1917이라 병사들에게는 복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미군은 부랴부랴 신형 기관총 채용 경합을 공고했고 때를 기다린 브라우닝은 자신의 시제 기관총을 들고 당당하게 입장할 준비를 갖췄다. 1910년의 실패 이후 다시금 다듬고 또 다듬은 브라우닝의 기관총은 1916년에 이르면 사실상 대량 생산과 배치가 가능한 외형과 구조를 갖출 정도로 완벽한 수준을 자랑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1917년 02월, 브라우닝은 이 총을 보다 개량한 다음 3개월 후인 05월, 마침내 육군에서 정식 시험 사격을 갖게 되었다. 1910년에는 자신들은 기관총이 충분하다며 그의 총을 무시했던 육군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요량이었던 브라우닝은 이 시험 사격에서 경이로운 묘기를 선보였다. 시험 사격 결과 브라우닝의 기관총은 약 40,000발에 이르는 실탄을, 단 한 차례도 쉬지 않고 연발로 발사하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여기에 그 엄청난 양의 탄을 무차별로 사격했음에도 기관총은 탄걸림을 비롯한 단 1차례의 잔고장도 발생하지 않았으니 관계자들이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도 못할 수준이었다. 워낙 결과가 황당할 정도니 시간이 지나면서 브라우닝의 기관총에 대한 온갖 루머가 퍼져나갔다. "브라우닝이 사기를 치고 있다! 틀림없이 시험 사격용으로 설계한 특수 기관총일 것이다!! 저런 총은 절대 대량 생산이 불가능해!!" 물론 이에 대한 브라우닝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다. "호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건 어떻게 답변하실런지?" 브라우닝은 자기 기관총의 성능을 불신하는 관계자들을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불러모은 다음 그들 앞에서 직접 기관총 한 정을 결합한 다음 그대로 사격장으로 들고가 탄띠를 장전한 후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타~! 타타타타타탕! 타타타타타타타타타탕~!!!"
![스웨덴군 제식으로 채용된 Ksp36을 운용 중인 스웨덴군 기관총팀](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1203275%2Fimg_1203275_1382564_14%3F1238377760.jpg) 이번 시험 사격은 5월의 그것보다도 더 경이적인 수준으로 끝이 났는데 무려 48분 12초의 시간 동안 브라우닝의 기관총은 끝도 없이 연결된 수만발 이상의 탄띠를 잔고장 하나 없이 끌어당기고 배출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모조리 소모시켰고 기관총의 작동이 정지된 것은 준비한 탄띠가 모두 바닥난 다음이었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군 관계자들 앞에서 존 브라우닝은 당당하게 말했다. "자, 여러분. 이래도 못 믿으시겠다면 어디 다시 탄띠를 가져와서 쏴볼까요?" 더 이상의 핀잔은 필요가 없었다. 미 육군 관계자들은 그 길로 브라우닝의 신형 기관총을 제식명 M1917로 채용했다. 브라우닝의 M1917은 동시대의 맥심이나 빅커즈에 비해 간단한 구조와 견고한 설계, 그리고 영국군의 7.7mm나 프랑스의 8mm탄보다 강력한 7.62mm×63으로 인해 사거리와 명중률에 있어 결코 맥심에 뒤지지 않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M1917 사격](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1203275%2Fimg_1203275_1382564_15%3F1238377760.jpg) ◀ 유럽 전선에 도착한 M1917은 총 42,750정에 달했지만 이 중 독일군을 향해 불을 뿜은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기관총 사수들 역시 그 수가 적었다. 더욱이 분해조작이 쉽지 않은 맥심에 비해 M1917은 간편했고( 물론 MG 42나 M60, FN/MAG 58, PKM에 비하면 복잡했지만 ) 야전에서의 유지관리도 효율적이었다. 다만 M1917의 단점은 하필이면 1917년이라는 시기가 말해주듯 제1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날 무렵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미 육군 제80 보병사단의 M1917 사수](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1203275%2Fimg_1203275_1382564_16%3F1238377760.jpg) 아무리 생산이 용이하고 구조가 간단하다지만 기관총이라는 무기는 소총이나 권총처럼 쉽게 뽑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대량 생산체제가 갖춰진 것은 1917년 끝무렵이었다. 결국 실전배치는 1918년 늦봄에야 간신히 이뤄졌으니 유럽 전선에 참전한 미군 중 독일군을 향해 이 총을 쏴본 이들은 극히 드물 지경이었다. 여하튼 제1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유럽 전선에 도착한 M1917은 겨우 3만정! 완전히 종전이 된 1918년 11월 11일 기준으로 미군의 손에는 약 42,750정의 M1917이 쥐어져 있었다. 단 1년만에 이 정도 수량을 뽑아냈으니 미국의 공업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보여주는 대목이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미군은 20만명 이하로 줄어들었고 자연히 기관총을 추가로 생산할 일이 없다보니 최종적으로 납품된 M1917은 총 68,000정에 불과했다.
![M1917A1](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1203275%2Fimg_1203275_1382564_17%3F1238377760.jpg) 물론 최초 1,100정도 안되는 기관총을 보유했던 때보다는 나았지만 곧이어 불어닥친 경제공황은 군에게 적지 않은 압력을 가했고 결국 상당수의 M1917은 모조리 윤활유로 '떡칠'을 한 다음 기름종이에 곱게 싸서 무기고에 보관되었다. ◀ 1935년에 채용된 개량형 M1917A1 보다 강력한 M1 7.62mm×63탄에 맞춰 총몸 하부를 강화하고 가늠자 등을 교체하는 등 근대화가 이뤄진 총이다. 이 총은 태평양 전쟁과 한국전쟁에서 일본군과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저지해내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이 총들은 수시로 꺼내져 개량이 되었고 마침내 1935년에는 M1917A1이 등장했다. 이 총은 보다 위력이 강화된 신형 M1 소총탄을 운용할 수 있도록 총몸 하부의 내구성이 강화되는 등 적지 않게 형태가 바뀌었고 무게는 냉각수를 제외한 상태에서 삼각대까지 포함해 38.9kg이라는 상당한 수준이었지만 어찌되었든 강력한 신형 소총탄을 무한정으로 발사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M1917과 M1917A1의 비교](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1203275%2Fimg_1203275_1382564_18%3F1238377760.jpg) ◀ M1917과 M1917A1의 비교 M1917에 비해 상당한 개량이 실시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전까지 국방예산에 허덕이던 미 육군은 이 기회를 이용해 보관 중이던 M1917을 모두 M1917A1으로 개량하는데 성공했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2년부터는 아예 신규 생산을 시작했다. 이는 전쟁초반의 무기 부족 탓이었지만 이렇게 새롭게 생산된 M1917A1은 곧 전장에서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가장 위력을 떨친 곳은 바로 진지전!! 특히 반자이 어택으로 대표되는 인해전술로 몰려오는 일본군을 막는데 있어 M1917A1의 위력은 절대적이었다. 이는 지독하게 당연한 것으로 냉각수와 탄환만 넉넉하면 총열이 닳아 못쓰게 되거나, 냉각수통에 균열이 가지 않는 이상 무한정 사격이 가능한 수냉식 기관총의 장점이 극대화된 부분이다.
![발지 전투 당시 M1917A1](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1203275%2Fimg_1203275_1382564_19%3F1238377760.jpg)
1944년 12월 16일, 독일군의 아르덴느 대공세 당시 미군의 M1917A1 기관총 수냉식인데다 계절이 겨울이라는 기막힌 조건을 만난 M1917A1은 몰려오는 독일군 보병을 향해 탄막의 비를 쏟아부어 공세 기도를 무산시켰다. 좌측 사진은 초창기 M1917을 어떻게든 효과적으로 운용해보기 위한 대책으로 등장한 M1 손수레로 사수와 부사수가 신속히 전장으로 굴려가며 이동하는 방식이다. 물론 저 상태로는 과연 내구성이 얼마나 지속될지 염려스럽지만.... 만약 미군과 미 해병대가 M1917A1이 아닌 M1919A4와 M2HB로만 싸웠다면 일본군의 반자이 어택에 적잖은 피해를 입었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38식과 99식 소총의 착검길이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부분이고 특히 일본군의 대검이나 일본도는 꽤 골치 아픈 단병접전용 무기였으니 ) 그렇지만 태평양 전쟁은 M1917A1의 서전에 불과했다.
![유럽 전선에서 M1917의 조작법을 교육받고 있는 미군](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1203275%2Fimg_1203275_1382564_22%3F1238377760.jpg)
유럽 전선에서 M1917의 조작법을 교육받고 있는 미군 병사들 총이 없어 영국과 프랑스군의 총을 대여해 운용해야 했던 미군 병사들에게 있어 M1917은 드디어 자신들도 국산 기관총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환영을 받았다. 바로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이 총의 위력이 더욱 빛을 발한 것!
![중공군의 인해전술](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1203275%2Fimg_1203275_1382564_23%3F1238377760.jpg) 상대는 엄청난 인구수를 바탕으로 한 인해전술로 몰려오는 중공군이었다. ◀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큰 충격이었지만 M1917A1은 제 아무리 인원을 앞세운다 하더라도 상대가 충분한 중화기를 갖출 경우 저지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실제 소련군 역시 인해전술로 몰려들었다가 MG 42의 탄막에 몰살당하는 일이 빈번했으니... 꽹과리와 징을 울려대며 몰려오는 중공군의 대군 앞에 한국군과 미군, 미 해병대는 M1917A1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 진지에 배치한 후 문자 그대로 갈겨대었고 탄약과 냉각수만 충분하면 수십분 동안 연사가 가능한 M1917A1의 탄막은 진지 전면을 중공군의 시체로 가득 메우는데 충분했다. 중공군은 비록 돌파에는 성공했더라도 M1917A1의 탄막으로 적잖은 인명피해를 입어야 했고 이 때문에 돌파한 후 개시된 UN군의 반격으로 무너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M1917A1은 비록 무겁고 휴대가 불편한 단점이 있었지만 일단 배치되면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기관총으로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저지한 기관총으로 맹활약했고 비록 퇴역하기는 했지만 역사의 한 단면을 장식한 총이라 하겠다.
참고 문헌 :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1203275%2Fimg_1203275_1382564_25%3F1238377760.jpg) M1917A1 관련 영화 :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1203275%2Fimg_1203275_1382564_24%3F1238377760.jpg) 두밀령 전투씬에서 이진태 소좌가 동생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들을 향해 이 기관총을 사격하다 데그챠레프 기관총에 사살되는 장면은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