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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敞郡立美術館 解設資料
박인성
[建立經緯]
高敞 地域은 일찍이 先史 時代 靈魂의 祭壇이자 集團 造形物인 고인돌을 築成하여 現在에 傳하고 있으며, 高麗 時代부터는 燦爛하게 佛敎 文化를 꽃피워 國寶級 寺刹과 堂宇, 多數의 佛敎 美術品이 朝鮮時代를 거쳐 現在에 傳한다. 燦爛한 佛敎文化 뒤에는 뛰어난 高僧들이 있었으며, 그중 白坡大師의 至高한 道의 境地는 當代 金石學의 大家인 秋史 金正喜가 ‘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의 글과 글씨를 씀으로서 至高한 藝術的 境地로 疏通 昇華되었다.
大略 이 時期 以後와 近代에 들어 高敞 地域에 念齋 宋泰會 [1872 ~ 1941], 普正 金正會[1903~1970], 石田 黃旭 [1898 ~ 1993], 西洋畫家 진환(陳瓛)[1913~1951] 등 傑出한 作家들이 出現하였다. 高敞郡立美術館은 이 같은 高敞의 造形 美術 情神을 紀念하고 共有하기 위하여 設立되었다.
한편, 美術 愛好家이자 蒐集家인 無初 陳錤豊 翁은 自身이 平生에 걸쳐 蒐集한 普正, 石田, 念齋, 陳瓛 등 故鄕 作家들의 作品을 2001년 高敞판소리博物館 設立과 함께 寄贈하였는데, 이것이 高敞郡立美術館 設立의 直接的인 契機가 되었다. 그 뒤를 이어 高敞 地域의 이름난 現代 作家들이 作品을 내놓았으며, 高敞郡에서 이를 寄贈받아 高敞郡立美術館을 설립 開館하게 되었다.
[變遷]
2001년 6월 25일 高敞판소리博物館 建立 開館에 즈음하여, 無初 陳錤豊 翁이 寄贈한 美術品을 本館 2層 蕪草懷鄕美術室을 열어 展示하였다. 그리고 2006年 3月 15日 隣接한 農特産品展示販賣場을 리모델링하여 無初懷鄕美術館으로 美術品을 移轉하여 展示하였다가, 2009년 9월 2일 高敞郡立美術館이 設立되면서 統合 開館하였다.
[構成]
高敞郡立美術館은 연면적 592.2㎡(180여 坪)에 제1전시관 206.76㎡, 제2전시관 190㎡, 수장고 18.36㎡, 자료실 10.8㎡, 연구실 17.28㎡, 향토자료실 26㎡, 방풍실 32.4㎡, 현관 43.2㎡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現況]
無初懷鄕館에서는 無初 陳錤豊이 寄贈한 143 점의 美術品을 常設 展示하고 있으며, 第1展示館에서는 高敞 出身 作家나 高敞의 風光을 描寫한 作品을 每年 1~2回에 걸쳐 展示하고 있다.
※ 懷鄕 : 故鄕을 懇切히 그리며 생각함.
2. 所藏品 寄贈者 蕪草 陳錤豊先生의 紹介
◎ 無初 陳錤豊 컬렉션 소개
본 無初懷鄕美術館은 陳錤豊(1925 ~ 2017. 향년 93세) 先生과 婦人 朴修渶 女史가 기증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無初’는 선생의 호이며, ‘無初懷讓’은 선생이 고향을 품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초 진기풍 컬렉션’은 선생께서 평생 수집하여 2001년을 시작으로 2011년까지 기증한 작품 140여 점을 말합니다. 컬렉션의 분야는 서양와, 한국화, 서예, 도자기, 현판 등 70여 점에 달하며 小癡 許鍊, 米山 許瀅, 南農 許楗, 蒼巖 李三晩, 海剛 金奎鎭, 翠雲 陳學鐘, 특히 서양화가 陳瓛 등 서예·미술사적으로 매우 가치있는 명품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전시의 序에 해당하는 翠雲 陳學鐘의 懸板 ‘無初軒’에는 초서체로 “진씨 가문은 본래 大姓이었다. ‘陳門本大姓’라고 쓰여 있습니다. 진기풍 선생의 본관은 驪陽인데, 驪陽陳氏는 고려 명문가로 그 일파가 고창으로 남하하여 세거해 오고 있습니다. 陳錤豊선생은 高敞 禪雲寺 兜率庵 長沙松의 수려한 盤松으로서의 가치를 알아보고 널리 알렸습니다. 이 장사송은 나중에 천연기념물 제354호로 지정되고 선운사의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이 되었습니다.
진씨 집안의 이름난 서양화가였던 陳瓛(1913~1951)의 작품 ‘雨記8’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을 계기로 호남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격조 있는 선구안으로 많은 명작들을 수집했고, 노년에 이르러서 이를 고향에 기중하여 현재 고창판소리박물관 별관 군립미술관에서 소장 전시하게 된 것입니다.
현재 진기풍 선생은 강암 송성용의 뜻을 받들어 서예를 학술적으로 진흥하고 서예의 창작 의욕을 고취하기 위해 설립된 剛菴書藝學術財團을 맡고 있다가 2017년 11월 26일 작고 하셨습니다.
◎ 상설전시실 전시작품 기증자
별관 군립미술관 상설전시실에 전시된 작품들은 2007년 별관으로 미술관을 설립할 당시 고창출신의 많은 작가들이 기증해주신 작품을 매년 교체 전시하고 있습니다. 기증해 주신 분들은 김치현, 김용귀, 김삼순, 김수현, 김숙, 김재삼, 김용백, 김종한, 박병준, 김문철, 방정순, 서제섭, 서주선, 송익규, 이종렬, 임병남, 조상현, 조병완, 최만규, 최덕호, 하관수, 홍순무 등 많은 작가분들께서 기증해 주셨습니다.
'전북의 어른' 진기풍 전 전북일보 사장 영면
66년 박정희 군사정권에 정부 편향 경제정책 비판 / 전북애향본부 설립 주도 / 내일 발인 고창 선영으로
전북의 어른이자 도내 언론사에 큰 족적을 남긴 무초(無初) 진기풍 씨가 2017년 11월 26일 낮 12시 서울에서 별세했다. 향년 93세.
1925년 고창군 무장면에서 태어난 고인은 전북일보 편집국장과 사장을 역임했으며, 서해방송 부사장, (주)백양 감사, 대한 적십자사 전북지사 회장, 전북생명보험, 바르게살기운동 협의회 전북애향운동 본부 부총재 등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 전북발전에 열정을 기울였다.
특히 전북일보 재직 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는 도민들의 전폭적인 호응 속에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그 내용은 “우리 도민들이 40만8556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표시한 제3공화국 대통령 선거일이 엊그제 같다”고 들고 “국내의 곳곳에서 전례 없이 ‘함마’소리가 드높아 가고 있는데, 곡창이라고 일컫는 전북에는 비료공장 하나 서지 못하고 농기구 공장 하나 마련한 일이 없다는 사실들은 항용마 라는 입지적 여건의 말만은 아닐 것”이라면서 “우리는 결코 타 지방에 세워지는 ‘맘모스’를 시새워서가 아니라 낙후되어가는 내 고장 사람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단장의 슬픔”이라고 피력했다.
이 밖에도 고인은 반세기동안 언론계에 종사하면서 지역 발전을 위한 정책과 대안을 제시해 왔으며, 전북애향운동본부 창립과 전북애향장학재단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가람 이병기 선생 시비 건립과 전북 출신 독립운동가 추념탑 건립을 비롯해 평생을 모으고 아껴온 귀중한 서화작품 143점을 고향인 고창에 기증해 무초회향미술관을 건립하는 등 문화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강암 송성용 선생을 기리는 강암서예학술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현재 이사와 고문을 맡고 있기도 하다.
고창군애향대상과 국민포장 적십자 금상 등을 받았으며, 지난 2004년 KBS전주방송총국과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이 공동 주최하는 전북의 어른상을 수상했다.
28일 오전 7시 서울 여의도성모병원 장례식장을 떠나는 영구차는 이날 오전 10시 전북애향운동본부가 전주종합경기장(야구장 쪽)에 마련한 분향소에서 30분 동안 그리운 전북의 조객들을 맞고, 곧바로 고창군 무장면 신촌 고향으로 떠나 먼저 간 부인 곁에 안장된다.
유족으로는 아들 진홍 전 전북도 정무부지사와 석(석 치과원장), 딸 해경, 원경 씨가 있다.
전북의 어른' 진기풍 회장님 가시는 길에
[조시]소외전북 걱정하던 순수 언론인
▲ 김남곤 시인·전 전북일보 사장
無初 진(陳)기풍 회장님!
한 평생 언론인임을 자처하시면서 뉴스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썩어 문드러지는 속성을 지녔다고 우리들 뇌리 깊이 칼침을 박아주시던 말씀이 오늘 따라 더욱 전율케 합니다.
서울에서 전화하실 때마다 전주 사람들 안녕히 잘 있느냐고 걱정스레 물으시더니 따뜻한 날 한번 내려오시지 못하고 어찌하여 노랑 은행잎이 다 떨어져가는 삭막한 추운 날을 잡아 고향땅에 눈을 감고 오셨나이까.
무초 회장님은 못사는 우리 전북뿐만 아니라 갈등 불화로 찌들어버린 나라 걱정을 참 많이도 하셨습니다. 언제 우리 국민들이 ‘정직’이란 말을 졸업했기에 학교마다 급훈, 교훈에 보석처럼 박혀있던 그 단어가 사라졌느냐고 폭탄을 던지셨어도 눈 하나 까딱 않는 나라를 보고 진정 가슴 쥐어짜며 아파하셨습니다. 거짓투성이의 나라꼴 이래서야 쓰겠느냐고.
언젠가 전북의 소외에 대해 나라님에게 보낸 탄원서는 또 어떠했습니까. “정부는 경제부흥의 도약대를 마련코자 피나는 노력을 해오고 있음은 국민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또한 국내의 곳곳에서 전례 없이 함마 소리가 드높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곡창이라고 일컫는 이 고장이 비료공장 하나 서지 못하고 농기구 공장 하나 마련할 일이 없다는 사실들은 항용 말하는 입지적 여건의 말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타지방에 세워지는 맘모스를 시새워서가 아니요, 낙후되어 가는 내 고장이 안타까워서만 아닙니다. 이 고장 사람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단장의 슬픔이었습니다.”라는 그 글발은 무초님의 토혈을 내뿜는 절규 아니고 무엇이었습니까.
그 끝머리쯤 “서울의 거리에 들끓고 있는 많은 소년소녀 가운데 구두닦이로 혹은 심부름꾼으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고 사는 이들의 거의가 전라도 출신이라면” 나라님은 놀라지 않겠느냐고도 하신 회장님의 분통 터진 그날의 눈물은 긴 강물이 되어 지금도 어디론가 한의 노래를 부르며 흘러가고 있을 것입니다.
인자하신 무초 회장님은 어쩌면 한생을 걱정, 걱정, 걱정 속에 묶여 살다 가셨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시작이 없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이 시공에 무엇인가가 존재했기 때문에 소멸이라는 것 또한 있음의 가치로 존재한 그 아호 무초님.
당초 물욕이 없는 것, 순수무구하게 살다 갈 사람, 그래서 윤재술 선생이 지어주셨다는 아호 무초님! 아호 따라 그러셨는지 부인 박수영 여사님이 평소 그렇게도 애지중지 하시던 서화 도자기를 고창 고향땅에 마련한 ‘무초회향미술관’이라는 이름 아래 몽땅 기증해놓고도 무엇이 부족해선지 빈자리를 가끔 눈여기시며 아쉬움을 토로하시던 무초님.
남아 있는 우리들, 회장님의 사심과 탐욕 없는 그리고 애향과 우국 정신 이어받아 눈 번쩍 뜨고 내일을 밝게 투시하며 살겠습니다. 지지부진한 새만금은 어떻게 되어가는 지, 하늘 길 막힌 공항은 어떻게 되어가는 지, 숨 떨어진 군산 조선소는 어떻게 되어가는 지, 평창의 눈씨름 판은 어떻게 되어가는 지, 시끌시끌한 나라 형편은 또 어떻게 되어가는 지, 잘나고 잘난 사람들이 하도 많아 잘 되어갈 것이니 그리 믿고 그냥 편히 가소서. 모든 걱정 다 접으시고 부디 천국 별나라의 별천지 같은 세상에서 고이고이 극락왕생 누리소서.
가시는 길에 우리들 그 동안 사랑받던 은혜, 그 보상의 꽃불 하나씩을 밝혀드리겠습니다. 회장님의 자애로운 큰 손길이 아니었더라면 단칼에 목숨을 날릴 뻔했다는 선운사 도솔암 길섶의 아름다운 장사송도 솔잎바람 눈물바람 날리면서 가시는 길의 평안을 기원하겠지요.
앞서가신 사모님도 고운 옷 차려입고 문 앞에 나오셔서 따뜻한 화톳불로 맞으시겠지요.
수고하신 임 어서 오시라고!
무초회장님, 명복을 빕니다.
<김남곤 시인·전 전북일보 사장
[조사]선생님 영전에 바칩니다
▲ 장명수 전 전북대 총장
끝내 가시다니 억장이 무너집니다. 선생님은 이 고장의 마지막까지 언론인이었으며 어른이셨습니다. 8·15 해방 후 언론인으로, 출입기자로 출발하시어 전북일보의 편집국장과 사장을 지내신 언론인이셨습니다. 격동기 마디, 마디마다 언론 최일 선에서 몸소 겪으시고 기사를 쓰고 편집을 하고 경영을 하신 최후의 언론인이셨습니다.
언론관은 무조건 애향이었습니다. 6·25 전쟁 직후 피난민이 전주에 많이 왔습니다. 전북의 민심을 고양하는 운동을 신문사에서 제창했습니다. 주택에 여유 있는 사람은 무료로 방을 내 주고 식사 대접도 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주먹밥을 만들어 피난민 대접을 했고 시민들의 많은 호응이 있었습니다. 후에 두고두고 피난 때 신세를 졌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또한 개발연대 전북은 낙후지역이었습니다. 영남에 비하여 전북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농촌은 피폐하고 지역 발전은 소외됐었습니다. 모두 안타까워 한탄만 하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께 드립니다’라는 탄원서를 신문 1면에 톱으로 실었습니다. 대통령 선거에서도 전북도민은 많은 지지 투표(408,556표)를 했고 정부 시책에 호응했는데 곡창지대에 비료공장, 농기구 공장이 없고 공업단지에는 공장이 안 들어오느냐고 엄중한 항의를 했습니다.
언론인이 가져야 할 자세와 지역 신문이 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제시한 언론인이었습니다. 신문은 미담 기사가 많을수록 유익한 것이며 잘못됐을 때 정정기사를 쓸 줄 알아야 올바른 신문이라는 말씀을 후배 기자들에게 간단없이 들려주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선후배와 친구를 도와야 한다고 노상 말씀하시고 주변을 챙기고 돕고 나누는 바른 언론인이셨습니다.
문화·예술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문인 화가와 음악인들과 교류가 빈번했습니다. 그들과의 대화 외에도 문화 비평란에 초대석을 마련하여 평가·평론 기사를 끊임없이 연재하여 문화·예술인들을 고무 찬양 했습니다.
서화 작품수집에 일가견이 있어 많은 작품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말년에 전부를 고창군에 기증하여 무초미술관을 조성하여 후학과 애호가를 기쁘게 했습니다. 작품 중에는 고귀한 작가와 희귀한 작품이 많아서 값으로 따지면 어마어마한 금액이라는 것이 전문가와 사계의 견해입니다. 그럼에도 143점이라는 소장품 전부를 쾌척하여 미술관을 만들어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후학에게 전통문화를 남겨주어 학습하고 이어 받는 좋은 본보기를 남겨 주었습니다.
선생님은 약골이었습니다. 젊었을 때 산골에 들어가 외로운 병 치료를 하기도 했습니다. 몇 백 년 된 소나무 한 그루를 수호목으로 삼고 어루만지며 보호해 달라고 기도했고 이 때 새로운 인생관을 가지게 됐다고 합니다. 건강을 회복 후 활동하며 가끔 그 나무를 회상하고 찾아 가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술을 한 모금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주당들과도 밤늦게 까지 담소하고 어울리며 살아온 선배였습니다.
선생님은 장년 후에는 건강을 뽐내며 후배들의 본보기가 됐으며 지역 발전에 앞장서는 지도자로 추앙 받았습니다. 후배를 아끼고 키워주는 선비였으며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한량이었습니다. 전북을 사랑하는 영원한 어른이셨습니다. 모두가 애통해 하며 추모하고 있습니다. 가시는 길 전북과 전주와 모든 후배들이 아쉬워하며 떠나보냅니다. 부디 안녕히 가십시오.
<장명수 전 전북대 총장>
진환(陳瓛 : 1913-1951)
일제 강점기와 현대 무장 출신의 서양화가
본관은 어양이고 본명은 진기용이다. 1913년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무장리에서 진우곤의 1남 5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진환은 무장공립보통학교와 고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1년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으나 곧 중퇴한 뒤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미술학교 3학년 때인 1936년 동경에서 열린 제1신자연합(협?)회전에 「설창」외 1점을 출품하여 장려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서독 베를린에서 열린 제11회 국제올림픽 예술경기전에서 「군상」을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이후 일본 도교에서 독립미술전․조선신미술가협회전․재동경미술협회전 등에 참가하고 1940년 동경미술공예학원 수료와 동시에 강사로 발탁되었다. 1941년에는 동경에서 서양화를 공부하는 조선 유학생들 중 김학준․이중섭․최재덕 등 유망한 학우들과 함께 조선신미술협회를 결성하고 창립전을 가져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1943년 후반에 귀국한 뒤 1945년 8․15 광복 후 조선미술건설본부 회원이 되고, 아버지가 설립한 무장중학교(현 영선중고)교장을 역임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서울의 홍익대학교 양화과 교수로 활동하였다. 1951년 1․4후퇴 때 고향 마을에서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 이중섭 등 당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소를 즐겨 그렸으며, 황색 계열의 색채를 많이 사용, 화면에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직선적이고 날카로운 윤곽선으로 화면에 긴장감을 불러일으켰으나, 중간 색조로 그것을 부드럽게 완화시켜 준 것이 또한 그의 그림이 지닌 특징이기도 하다.
진의종(陳懿鍾 : 1921-1995)
호는 백민(白民).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정거리에서 출생. 1943년 경성대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해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1948년 상공부 전정과장을 거쳐, 1952년 상공부 광무국장 등의 공직을 역임한 뒤 1954년에는 변호사로 등록하였다.
이듬해 주택영단 이사가 되고, 1958년에는 호남비료 전무이사가 되었으며, 1960년에는 상공부 사무차관을 거쳐, 이듬해 대한교육보험 부사장을 역임하였다.
그 뒤 1962년에는 울산비료 전무이사가 되고, 1964년 한전부사장 등 관·경제계에서 활동하다가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공천으로 고창에서 당선되어 정계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1973년 제 9대 국회의원(고창·부안, 신민당)에 당선되고, 1979년에는 보사부장관을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입법회의의원이 되었다.
이후 1981년에는 제11대 국회의원(정읍·고창, 민주정의당)에 당선된 뒤 이듬해 민주정의당 정책위의장이 되고, 1983년에는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이 되었다. 1983년에서 1985년까지는 국무총리로 국가 행정을 총책임졌으며, 1985년에 국무총리에서 물러나면서 민주정의당 상임고문을 맡았다.
이 해 제12대 국회의원(전국구, 민주정의당)이 되었고, 1988년에는 다시 민주정의당 고문을 맡는 등 화려한 공직생활을 보냈다. 상훈으로 청조근정훈장(靑條勤政勳章)을 받았다. 저서로는 『백민논집(白民論集)』이 있다.
3. 翠雲 陳學鐘
생몰년도 : 1924년 ~ 2010년
가.
취운(翠雲) 진학종(陳學鐘) 선생은 1924년 전북 고창군 무장면에서 출생하였고, 陳懿鍾(1921년~1995년 제17대 국무총리)의 4촌 동생이다.
그는 60여 년 동안 고집스럽게 초서에 몰두해왔으며 병풍과 전각 액자 등 1백 여 점을 모아 대형작품집 '취운 초서 병풍첩'을 발간하기도 했다.
수십 차례에 걸쳐 국내 개인전을 가진 것을 포함, 중국 상하이 한중 합동전, 일본 신문협회 초대전, 홍콩 초청작가전 등 해외작품전(개인전 등)에 참가하기도 했다. 범태평양 미술대전 초대작가상과 싱가포르 공익부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취운 선생은 제3회 세계 서예 전북 비엔날레(2001년)에 초대된 바 있으며, 서울미술제, 대한민국미술대상전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고, 현재 국전 초대작가, 예술의 전당 초대작가, 세계서법예술연합 고문, 대한민국 초서심추회 회장을 맡고 있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취운 선생은 올해 84세로 60여년 동안 소멸해가는 초서 문화를 재현시키기 위해 힘써 왔으며, 어려운 악필(握筆) 솜씨로 천의무봉한 초서의 진수를 구현하여 사계에 명성이 자자, '동양 3국 최후의 초서 대가"란 말을 듣고 있다.
취운선생은 평소 “초서는 선과 여백이 어우러진, 글씨이자 예술입니다. 2백여 년 전에 절멸 되다시피한 초서를 재현하는데 몰두, 개발한 취운체는 말뚝을 땅에 힘껏 박을 때 쥐는 방식인 악필로, 특유의 리듬감이 살아 있는 글씨입니다. 해서가 앉아 있는 글씨라면, 초서는 달음질치는 글씨지요. 초서의 묘미는 沒我之境에서 단숨에 一筆揮之로 써 내려가는데 있습니다.” 라고 말해왔다.
취운선생은 “초서를 쓰기 위해선 붓을 한 번 먹에 적시면 한 번에 써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모든 내용이 머리 속에 훤히 암기돼 있어야 하는 것은 필수”라며 “수만 번 연습한 결과, 2백10자나 되는 굴언의 ‘어부사’를 단 25분 만에 써내려갈 수 있다.”고 한다.
나.
취운 진학종(翠雲 陳學鍾, 88세 1923년~1910년)
ㆍ1923年生
ㆍ전라북도 고창(高敞) 出生
ㆍ 現. 서울오페라단 고문, 대한민국초서심추회(大韓民國草書深追會) 회장,
ㆍ 現. 대한민국 국전 초대작가, 예술의 전당 초대작가, 세계서예비엔날레 초대작가,
ㆍ 現. 국제서법예술연합(國際書法藝術聯合) 고문, 국제미술교류협회(國際美術交流協會) 고문.
“말뚝을 땅에 힘껏 박을 때 쥐는 방식인 악필(握筆)로 독창적인 취운체(翠雲?)를 개발해 동양 3국(東洋 3國) 최후의 초서(草書)”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취운 진학종(翠雲 陳學鍾, 82세) 선생의 병풍전이 오는 3월 23일(수)부터 28일(월)까지 대백프라자갤러리 전관(053-420-8013)에서 마련된다.
“초서(草書)는 한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글씨입니다. 그래서 초서를 서예의「끝」이라고들 하지요. 갈수록 초서를 쓰는 사람이 줄어들어 이런 예술적인 글씨를 만든 선인들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라고 말문을 열기 시작한 원로 서예가 翠雲 陳學鐘 선생은 초서를 서예의 종합예술인 동시에 마지막 도달할 수 있는 필체라고 강조하고 있다. 한평생 초서에 몰두해 일가를 이루고 이룬 취운은 이번 전시에서 초서로 쓴 병풍 10여점과 현판, 족자 등 30여 점을 선보일 예정이다.
한자의 전서(篆書)와 예서(隸書) 등의 자획을 생략하여 흘림글씨로 쓴 서체인「초서(草書)」의 초(草)는 초고(草稿)의 뜻이며, 신속히 쓰는 필기체로서, 중국 한대(漢代)에 비롯되었다. 취운은 송·원대의 황산곡(黃山谷), 명의 왕총(王寵)등 대가들의 초서를 바탕으로「취운체(翠雲體)」를 개발하고 이를 병풍으로 남겨왔다.
취운은 “초서는 도연명과 소동파 같은 학자들이 쓴 원문 속에 그 원형을 둔 족보 있는 글씨인데, 후학들이 쓰기 어려운 글씨라고 ‘초서’ 쓰기를 꺼리는 것이 아쉽다.” 는 말과 함께 “해서가 앉아 있는 글씨라면, 초서는 달음질치는 글씨지요. 초서의 묘미는 沒我之境에서 단숨에 一筆揮之로 써내려 가는 데 있지요.”라는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취운이 즐겨 쓰는 글은 시문학의 보고인 『고문진보(古文眞寶)』등에 실린 한시. 소동파(蘇東坡)가 삼국지에 나오는 적벽싸움의 내용을 노래한 「전적벽부(前赤壁賦)」, 도연명(陶淵明)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기 전에 쓴 「귀거래사(歸去來辭)」등이 십곡 병풍 위에 일필휘지로 살아 숨쉰다. 이 작품들을 완성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2~3시간 정도로 내용을 모두 암기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월담 권영도(月潭 權寧燾)는 이러한 취운의 글씨를 두고 “동양 3국을 통틀어 최후의 초서”라고 극찬하며 아름다운 선율을 대하는 듯한 감흥을 일으킨다고 평가하고 있다.
취운 선생은 후학들에게 서예를 위해 거듭 한학 공부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다.
“요즘 전시회에 나온 글씨는 보고 쓰는 것이 대부분이다. 글씨를 쓰려면 먼저 그 뜻을 익혀야 하지요.“라고 충고하는 것은, 어려서 익힌 한학 실력과 예술적 안목을 바탕으로 해 평생 초서에 몰입해 온 그가 요즘도 한학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모두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래서 요즘도 새벽에 일어나 2시간씩 글씨를 쓰고 저녁에는 한문공부를 쉬지 않고 있다.
이번 취운의 초서 병풍전에는 굴원(屈原)의「어부사」와 제갈공명(諸葛孔明)의「출사표」, 소동파(蘇東坡)의「前 적벽부」등 「고문진보」에 실린 명문을 발췌해 쓴 초서병풍 10여점과 함께 현판 액자와 족자 등 30여점의 작품들이 출품된다.
전북(全北) 고창(高敞)출신으로 공화국 당시 17대 국무총리(1983.10~1985.2)를 지냈던 진의종(陳懿鍾)의 친동생이기도 한 그는 그동안 수 차례의 국내 개인전과 초대전을 비롯하여 중국 상하이(上海)의 한·중 합동전과 일본 신문협회 초대전, 한·일 의원 연맹 초대 도쿄(東京)초대전, 홍콩초청 작가전 등 해외에서도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범태평양미술대전 초대작가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병풍작품은 김대중(金大中) 前대통령, 박태준(朴泰俊) 포스코 명예회장, 이한동(李漢東) 前국무총리, 권노갑(權魯甲) 前새천년민주당최고위원, 김수한(金守漢) 前국회의장, 이회창(李會昌) 前신한국당대표, 조순(趙淳) 前서울시장, 최원석(崔元碩) 前동아그룹회장을 비롯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前일본총리 등 국내외 저명인사들이 소장하고 있다.
自我作古
옛일에 구애(拘碍)됨이 없이 모범(模範)이 될 만한 일을 자기(自己)부터 처음으로 만들어 냄을 이르는 말
[字解]
自:부터 자
我:나 아
作:지을 작
古:예 고
[意義]
'나로부터 옛 것을 삼는다'라는 뜻으로, 옛 것에 구애됨이 없이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古는 故라고도 쓴다.
[出典]
구당서(舊唐書) 고종본기하(高宗本紀下).
[解義]
중국 당(唐)나라 고종(高宗)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당나라 고종은 황손인 중조(重照)를 황태손으로 세우고, 황태손을 위한 부(府)를 두고 관원을 배치하려고 하였다.
이에 이부낭중(吏部郎中) 왕방경(王方慶)은 이전 왕조의 예를 차례로 거론하면서 황태자가 있는 상태에서 황태손을 세우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간언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나로부터 옛 것을 삼으면 되지 않겠는가[自我作古, 可乎]"라고 말하였다.
고종은 전례가 없음을 들어 반대하는 왕방경의 의견에 자신이 최초의 전례가 되겠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옛 것을 받들어 그에 어긋나면 불가하다고 말하지만, 그 옛 것도 처음에 시작될 때에는 새로운 것이었다.
창신(創新)함이 없으면 전고(前古)도 없는 것이니, 이를 조화롭게 하는 것이 이른바 법고창신(法古創新: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함)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자아작고는 옛 일에 구애됨이 없이 새로운 모범이 될 만한 일을 자기로부터 처음 만들어 내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翠雲 陳學鐘 先生>
취운(翠雲) 진학종(陳學鐘) 선생은 1924년 전북 고창군 무장면에서 출생하였고, 陳懿鍾 전 국무총리의 친동생이다.
그는 60여년 동안 고집스럽게 초서에 몰두해왔으며 병풍과 전각 액자 등 1백 여 점을 모아 대형작품집 '翠雲 草書 屛風帖 '을 발간하기도 했다.
수십 차례에 걸쳐 국내 개인전을 가진 것을 포함, 중국 상하이 한중 합동전, 일본 신문협회 초대전, 홍콩 초청작가전 등 해외작품전(개인전 등)에 참가하기도 했다. 범태평양 미술대전 초대작가상과 싱가포르 공익부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취운 선생은 제3회 세계 서예 전북 비엔날레(2001년)에 초대된 바 있으며, 서울미술제, 대한민국미술대상전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고, 현재 국전 초대작가, 예술의 전당 초대작가, 세계서법예술연합 고문, 대한민국 초서심추회 회장을 맡고 있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취운 선생은 올해 84세로 60여년 동안 소멸해가는 초서 문화를 재현시키기 위해 힘써 왔으며, 어려운 악필(握筆) 솜씨로 천의무봉한 초서의 진수를 구현하여 사계에 명성이 자자, '동양 3국 최후의 초서 대가"란 말을 듣고 있다.
취운선생은 평소 “초서는 선과 여백이 어우러진, 글씨이자 예술입니다. 2백여 년 전에 절멸되다시피한 초서를 재현하는데 몰두,개발한 취운체는 말뚝을 땅에 힘껏 박을 때 쥐는 방식인 악필로, 특유의 리듬감이 살아 있는 글씨입니다. 해서가 앉아 있는 글씨라면, 초서는 달음질 치는 글씨지요. 초서의 묘미는 沒我之境에서 단숨에 一筆揮之로 써내려가는데 있습니다.” 라고 말해왔다.
취운선생은 “초서를 쓰기 위해선 붓을 한 번 먹에 적시면 한 번에 써내려 가야 하기 때문에 모든 내용이 머리 속에 훤히 암기돼 있어야 하는 것은 필수”라며 “수만 번 연습한 결과, 2백10자나 되는 굴언의 ‘어부사’를 단 25분 만에 써내려갈 수 있다.”고 한다.
라.
山行時-杜牧
遠上寒山石徑斜 멀리 한산에 오르는데 돌길이 가파르고
白雲心處有人家 흰구름 깊은 곳에 절간이 있더라
停車坐愛楓林晩 수레를 멈추고 단풍을 감상하는데
霜葉紅於二月花 그 붉기가 이월 매화보다도 더 하구나.
4. 剛菴 宋成鏞
◎ 가
강암 송성용(宋成鏞 1913∼1999. 2. 8. 향년 87세)은 한국서예의 독자적 경지를 이룬 호남을 대표하는 서예가이자 유학자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호는 강암으로 간재 전우의 제자인 유재 송기면의 3남 1녀중 셋째로 1913년 7월9일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요교 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전, 예, 해, 행, 초 5체는 물론이고 대나무, 난초, 매화, 국화, 소나무, 파초, 괴석 등 다양한 소재의 文人畵에 일가를 이루었으나, 1956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외부의 권고에 못 이겨 대한민국서예대전에 출품해 행서와 화죽 2점을 출품해 입선하면서 유명해졌다.
서예 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이 강한 유학자로 일제강점기 창씨 계명을 하지 않고 죽기 직전까지 보발과 한복을 지키며 살았는데, 사람들이 "시대가 달라졌는데 왜 불편하게 사느냐”고 하는 질문에 늘 "나를 평생 지켜준 게 갓과 상투요”라고 대답하며 한평생 선비로서의 강직함을 지키면서 보냈다고 한다.
강암 선생의 작품은 호남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비문 현판 등 수천여 점이 산재해 있다. 그 중에서도 호남제일문, 내장산내장사, 토함산석굴암, 두륜산대둔사, 불국사자하문, 불국사불국선원, 원각성존소태산대종사비명, 연지문, 금산사보제루, 백양사화엄전, 화엄사적멸당, 금오산향일암, 동춘송선생유허비, 신도비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강암 선생은 서예에 대한 무한 애정으로 평생 모았던 작품들과 함께 6억 원을 기부하며, 서예를 체계적으로 진흥 보존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한 강암서예관과 '강암서예학술재단'을 설립했다.
가족관계
1남 송하철 : 전주시장
2남 송하경 : 성균관대 유학대학장
3남 송하춘 : 고려대 문과대학장
4남 송하진 : 전라북도지사
나. 書藝의 大家 剛菴 宋成鏞
당대의 최고의 한학자이자 서예가
강암 송성용 선생이 지난 1999 년 2월 8일 전주시 완산구 교동 자택에서 타계 했을 때 그 향년 86세였다. 기호삼남을 둘러봐도 참된 선비를 찾기 어려운 세태에 강암 선생은 기가 우뚝한 드문 선비요 한학자요 서예가였다.
가문의 맥을 이어 일찍부터 선비의 타계는 우리 예술사의 한 획을 긋는 일이었다.
백산면 상정리에서 출생
강암은 한국 서단의 최고봉으로 평생을 유학·한문학·서예에 정진했고, 사군자 등 문인화를 이루었다. 특히 그는 舊體信用思想을 펼쳐 고법의 전통을 현대적 조형화시킨 「剛菴體」를 일궈냈다. 1992년에는 강암 서예학술재단을 창립했으며 1995 년 「剛菴書藝官」을 개관했다.
그후 이를 바탕으로 선생 나름의 독특한 정재를 개척한 이른바 강암체를 일궈냈다. 평생 상투를 틀고 갓과 흰 한복을 놓지 않았던 선생은 또 명리와 감투를 멀리해 일생 재야 학자로 사셨다. 호학들의 강권으로 한 때 국전 심사위원직을 맡았지만 끝내 상경하지 않고 향리에서 심사한 고집은 유명한 일화다.
그러나 강암의 진면목은 바로 강암 서예관 건립 기증에서 나타난다. 소싯적 어렵게 성장한 그는 평생의 가보라 할 우암 송시열, 단원 김홍도, 만해 한용운, 운미 민영익, 백범 김구 선생의 서화 등과 선생의 작품 등 100여 점의 값진 소장품들을 선뜻 전주시에 기증했다. 학문의 집안이 대저 그렇듯이 선생의 가문도 향이 배어 있다.
1913 년 백산면 상정리에서 裕齋 宋基冕(송기면)선생의 3남으로 태어난 강암은 호남의 서예 대가였던 운재 유제술 선생과 동향이자 처남매부간이다. 선친 裕齋 宋基冕 선생은 조선말 성리학의 대가 艮齋 田愚선생의 제자로 학문이 깊었다.
-先親 宋基冕 先生이 스승 -
선친인 유재는 艮齋 田愚의 문하에서 공부한 유학자이다. 유재는 특히 문장과 시문에 익숙하여 훗날 강암 서예의 전범을 이루는 바탕이 되었다. 유재는 後에 고향인 김제에 돌아가 은거해 요교정사라는 강하소를 차리고 제자들을 불러 모아 가르쳤다. 유재는 한편으로 마을에 살았던 석정 이정직의 사상과 학문도 익혔다. 석정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양의 철학자인 칸트의 사상을 받아들였다고 전하는 빼어난 학자이다.
어렸을 적부터 몸이 약했던 강암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이곳 요교정사에서 어린 학동들과 함게 천자문을 읽기 시작해 한학을 깨쳤다.
열여섯 살 되던 해에는 결혼을 해 분가하여 살림을 차렸다 강암의 아내 이도남은 역시 선대와 함께 간재의 문하에서 공부했던 완주 출신의 유학자 고재 이병은의 셋째 딸이었다.
결혼 후 강암은 장인 고재로부터 학문과 서예를 사사했다. 그는 선친과 장인으로부터 받은 한문학을 바탕으로 그 위에서 격조 높은 서예의 경지를 세웠던 것이다.
사군자에 눈을 뜨다-
스물다섯 살 때부터는 사군자에 눈을 떴다. 당시 매화와 죽을 잘 그려 당대의 문인화가로 이름난 김용진으로부터 사군자의 필법을 받았으며 김진우를 찾아가 書竹法 강론을 듣기를 좋아했다. 그의 학문과 서예 연마를 향한 열정을 중단되지 않았다. 정읍과 부안 개암사 장성 등 명문 도량은 그가 당시 찾아다녔던 곳이다. 6·25 직후부터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6년 그는 주위의 권유로 대한민국 제5회 미술전람회에 행서와 묵죽을 출품해 입선했고, 당시의 심사위원들은 그의 솜씨가 단순한 서학도의 솜씨가 아니라 어떤 파벌과도 연줄이 없는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1966년에는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으며 1970년에는 성균관 사성에 당선되었으며 이후 유도회 전북본부 위원장과 성균관 전학을 차례로 거쳤고 간재학회 회장 직을 맡아 유학의 전통과 학맥을 이어가는 일에도 열정을 쏟았다.
강암의 서예는 1956년 전주시 완산구 교동으로 이주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 수상이 이어졌던 67년에는 문하생들을 중심을 연묵회를 조직, 전북 서예 모임을 만들어 냈다. 연묵회는 오늘의 한국서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수많은 서예가들이 활동하는 단체가 되었다.
강암의 서예는 서예의 오체(예, 전, 해, 행, 초서)가 두루 고전에 의거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초년에 구양순첩에서 楷書를 읽혔으며 동기창에서는 행서를, 한석탁분으로는 예서를 배웠다. 중년 이후에는 안진경을 비롯한 청대 대가를 두루 거쳤다. 운필법 또한 섭렵했다. 서죽법으로는 정판교와 오창순의 죽법을 깨쳤다.
고전의 현대화 이뤄 -
오늘에 이른 강암의 서예는 고전의 현대화로 대변된다. 그의 서예는 졸박한 멋과 극히 참스러운 이미지, 칼날 같은 강기가 아니라 바위를 닳게 하는 유수와 같은 리듬의 필력, 어떤 경우나 자기류의 개성미에 매인 것도 아니고 정법에 머물면서도, 또한 정법에서 벗어나서도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게 한다는 평을 받는다.
강암 송성용 선생은 전북의 예술적 전통을 오늘에 까지 탄탄히 뿌리내리게 한 예술가이다. 빛낸 서예가로서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로서 그에 붙여지는 찬사는 각별하다.
슬하의 4남2녀도 각계에서 활동이 대단하다.
장남 하철씨( 전 전주시장, 전 부지사),
차남 하경(서예가, 성균관대 교수),
셋째인 하춘씨(고려대학교의 교수),
4남 하진씨(행자부 민간협력, 전북도지사)등이 각계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2녀 현숙 씨도 서예가로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 이 글은 전북일보의 ‘ 전북인의 50인’과 ‘ 고향의 인물’(1989)을 참고 하였음.
◎ 剛菴 宋成鏞 先生의 作品 “風竹 八幅 屛風”感想
剛菴 宋成鏞은 김제군 백산면 상정리에서 裕齋 宋基冕 의 3남 1년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 및 서예의 기본과 일제강점기 墨竹의 대가였던 일주 김진우에게 대나무를 익혀 風竹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이 작품은 風竹의 하나로서 濃墨과 淡墨으로 陽竹과 陰竹이 대비를 이루고 있으며 온화한 바람에 대나무가 날리는 모습이 풍경처럼 묘사되어 있다.
◎ 剛菴 宋成鏞 風竹의 題跋 解說
花姸兒女姿 화연아녀자 : 꽃처럼 어여뿐 아녀자의 자태
零落一何速 영락일하속 : 어쩌면 그리도 속히 시드는 지,
竹比君子德 죽비군자덕 : 대나무는 군자의 덕에 비견되니,
猗猗寒更綠 의의한경록 : 추울수록 더욱 무성하고 푸르네.
京師多名園 경사다명원 : 서울에는 이름난 원림이 많아,
車馬分馳道 거마분치도 : 수레와 말은 치도를 왕래하네
春風紅紫時 춘풍홍자시 : 봄바람에 붉은 꽃 필 때,
見此養翠玉 견차양취옥 : 이 대를 보니 비취 빛 옥을 기르네.
◎ 艮齋 田愚
자명(子明), 구산(臼山), 추담(秋潭), 간재(艮齋)
생몰년대 : 1841년 ~ 1922년
분야 : 종교·철학/유학
본관 : 담양(潭陽) 요약 1841(헌종 7)∼1922. 조선 말기의 학자.
목차
⓵ 개설
⓶ 생애와 활동사항
⓷ 학문세계와 저서
⓸ 평가와 의의
⓹ 상훈과 추모
⓵ 개설
전라북도 전주 출신. 본관은 담양(潭陽). 초명은 경륜(慶倫)·경길(慶佶).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추담(秋潭)·간재(艮齋). 아버지는 전재성(田在聖)이다. 임헌회(任憲晦)의 문인이다.
⓶ 생애와 활동사항
1882년(고종 19)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선공감감역·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강원도도사, 1894년 사헌부장령, 이듬해 순흥부사·중추원찬의(中樞院贊議)를 제수 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1895년 박영효(朴泳孝) 등이 수구(守舊) 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하여 개화를 실현시키려면 그를 죽여야 한다고 여러 번 청했으나 고종의 승낙을 얻지 못하였다.
1908년(순종 2)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왕등도(暀嶝島)·군산도(群山島) 등으로 들어가 나라는 망하더라도 도학(道學)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결심하였으며, 부안·군산 등의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을 옮겨 다니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2년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하여 계화도(繼華島: 중화를 잇는다는 뜻)라 부르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술과 제자 양성에 힘썼다.
⓷ 학문세계와 저서
전우의 학문은 스승인 임헌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임헌회는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으로서, 홍직필이 이재(李縡)의 문인에게서 학문을 닦았으므로, 자연히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는 견해를 가졌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른바 낙론(洛論) 계열의 학자라 불린다. 그는 이와 같은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한원진(韓元震)과는 의견을 달리하였다.
전우는 의리정신을 숭상하고자 조선조의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을 동방의 오현(五賢)이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문집 가운데서 좋은 말을 뽑아 『근사록(近思錄)』의 체재를 모방하여 『오현수언(五賢粹言)』 편찬에 참여하였다.
전우는 자신의 생각과 조금이라도 의견을 달리하는 점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그 잘못을 지적하며 자기의 성리학설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김창협(金昌協)에게서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농암사칠의의(農巖四七疑義)』를 지어서 그 불합리함을 지적했고, 기정진(奇正鎭)의 「외필(猥筆)」을 반박하는 「외필변(猥筆辨)」을 썼다. 또한 이항로(李恒老)에게는 「화서아언의의(華西雅言疑義)」로 반박하였고, 이진상(李震相)에게는 「이씨심설조변(李氏心說條辨)」으로 반박하였다.
전우는 오직 이이와 송시열의 사상을 계승하는 데 힘썼으며, 나름대로 성리학적 경지를 창안하여 심본성설(心本性說)을 주제로 성존심비(性尊心卑) 또는 성사심제(性師心弟)의 설을 주장하였다. 이는 주희(朱熹)가 인간의 도덕적 의지와 작용을 설명하면서 성을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착안한 것이며, 그는 이러한 창안이 주희의 학설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주희는 모든 도덕적 의지는 성(性)에 근본하고 성은 천리(天理)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천리인 성은 당연히 높고 마음은 낮은 것이라 하였다. 전우는 “주자가 말하기를 성은 태극이라 하였고 심(心)은 음양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늘과 태극은 마땅히 높은 것이고 심과 음양은 마땅히 낮은 것이다.”라 했고, 또 “이를 미루어 보면 성은 스승이고 심은 제자라는 것은 주희의 설에 바탕을 두기는 했으나 내가 새로 창시한 것이니 의리가 지극히 정미한 것이며 절실한 공부이며 이것이 스스로 만든 심제(心弟) 두 글자다.”라고 하였다.
그는 심성론(心性論)에 있어서도 성은 천리이며 심은 기(氣)라고 주장함으로써 ‘심즉이(心卽理)’에 반대하였다. 이와 같은 견해는 송시열의 학설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기(理氣)에 대해서는 「이기유위무위변(理氣有爲無爲辨)」에서 태극은 이만 있고 동정(動靜)의 능력은 없으며 음양이 동정한다고 하였다. 또한 이를 무위(無爲), 기를 유위(有爲)한 것이라 했고, 인간에게 있어서도 성은 무위한 것이며 심은 유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심성(心性)에 대해서는 성은 천리로서 무형·무위이며 심은 유위의 기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은 순선(純善)이므로 대본(大本)이며 심은 작용이니 성명(性命)의 도덕성에 근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전우의 학문적 성격과는 달리 처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김평묵(金平默)은 “간재는 죽기가 무서워 의병을 일으키지 못했고, 화가 미칠까 두려워 외세를 배척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전우 자신은 정통 왕권(王權)의 계승만이 국권의 회복이라 생각했고, 파리장서에 가담하지 않은 것도 이적(夷狄)을 끌어들이는 일이라고 하여, “이는 척화를 하기 위해 또 다른 외세의 간섭을 자초하는 일이니 열강의 세력을 빌려 이들에게 호소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라고 거절하였다.
전우의 이와 같은 견해를 따로 모은 책이 『추담별집(秋潭別集)』이다. 여기에서는 “국권을 회복한다고 하면서 외세와 손잡게 되면 이는 나라를 회복하기 이전에 내 몸이 먼저 이적이 되는 것이니 이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500년 종사도 중요하지만 3,000년의 도통(道統)을 잇는 것이 더 소중하니 무가치하게 목숨을 버리지 말고, 학문을 일으켜 도(道)로써 나라를 찾아야 한다.”, “을사년의 수치에도 통곡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의 모든 선비는 마땅히 피를 토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살 수밖에 없으나, 눈앞의 위태함만을 알고 나라의 참된 힘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총칼 앞에 헛되이 목숨을 버리는 일일 뿐이니, 차라리 몸과 마음을 올바로 가다듬어 신명을 얻어 학문을 열심히 닦아 뜻을 편다면 1년, 2년, 10년, 20년 어느 때인가는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전우의 견해는 도학 정신에 더욱 투철하려는 것이었다. 어떤 이는 이에 대해 “수천 년의 도학이 간재 한 몸에 달렸으니 가벼이 죽기보다 학문을 북돋우는 것이 더 큰일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스스로 일제의 탄압에 대해 조선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전혀 일본인을 상대하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았으며, 제자 가운데 개화하는 사람은 이름을 지웠다.
이와 같은 학문적 업적에 대해 곽종석(郭鍾錫)은 그의 저서 『면우집(俛宇集)』 권111의 「홍성길(洪成吉)에게 답하는 글」에서 “나 스스로는 간옹(艮翁)에게서 평소에 그 청절(淸節)을 흠앙(欽仰)했던 것이요, 성존심비(性尊心卑)의 뜻은 모든 사람들이 미치지 못했던 바이니 간옹이야말로 나의 의혹된 바를 풀어줄 수 있는 분이다”라고 하였다.
제자로는 오진영(吳震泳)·최병심(崔秉心)·이병은(李炳殷)·송기면(宋基冕)·권순명(權純命)·유영선(柳永善, 호 현곡)·김병준(金炳駿)·김택술(金澤述) 등을 비롯하여 3,000여 명이 있다. 저서로는 『안자편(顔子篇)』·『연원정종(淵源正宗)』·『간재집』·『간재사고(艮齋私稿)』 등이 있다.
⓸ 평가와 의의
전우의 성리학 연구 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그대로 실현시키려 한 점에서 조선조 최후의 정통 유학자로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에 있어서는 나라가 망해도 의병을 일으키려 하지 않고 도학군자만을 자부하고 있었고, 또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도 참여하지 않았다며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전우는 전통적 도학의 중흥만이 국권 회복의 길이라 여겼기에 이 정신에 투철했던 것이고, 그의 처신이 어떠했던 지간에 조선조 최후를 장식했던 성리학적 공헌은 높이 평가될 수 있다.
⓹ 상훈과 추모
전우의 묘소는 전라북도 익산에 있다. 계화도의 계양사(繼陽祠), 의령의 의산사(宜山祠), 고창의 용암사(龍巖祠), 정읍의 태산사(台山祠) 등에 제향되었다.
4. 小癡 許鍊
생몰년도 : 1809(순조 9) ~ 1892(고종 29)
<요약>
김정희 화파의 한사람으로, 조선 말기 화단에 남종화풍을 토착화하는 데 기여했다. 허균의 후예 가운데 진도에 정착한 허대의 후손이며 어려서부터 전통화풍을 익혔다. 1839년 김정희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수업을 받았다. 허련은 산수·모란·사군자·괴석·연꽃·노송·파초 등 다방면의 소재를 능숙하고도 대담한 농묵을 구사하여 표현했는데,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다. 그의 산수화는 김정희로부터 배운 중국 북송의 미불, 원말의 황공망과 예찬, 청나라 석도 등의 화풍과 남종문인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회화세계를 이룩했다. 김정희가 죽은 1856년 고향 진도에 운림산방을 짓고 은거하면서 그림에 몰두했다.
<생애와 활동 상황>
김정희 화파의 한 사람으로 조선 말기의 화단에 남종화풍을 토착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그의 화풍은 가전되어 오늘날 호남화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본관은 양천. 자는 마힐, 호는 소치·노치·석치. 허균(許筠)의 후예 가운데 진도에 정착한 허대(許垈)의 후손으로 어려서 해남의 윤선도 고택에서 윤두서(尹斗緖)의 작품을 방작하면서 전통화풍을 익혔다.
1839년 대흥사 초의선사의 소개로 김정희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수업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서권기와 문기의 높은 화격을 터득하게 되었으며, 김정희로부터 "소치 그림이 나보다 낫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가 지향했던 회화세계가 사의의 표출에 중점을 둔 남종문인화였음은 원말4대가 중의 한 사람인 황공망(黃公望)의 호인 대치를 따라 자신의 호를 '소치'라 한 것과, 중국 남종화의 시조인 왕유(王維)의 자를 본떠 이름을 '유'라고 고친 것에서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는 산수·모란·사군자·괴석·연꽃·노송·파초 등 다방면의 소재를 능숙하고도 대담한 농묵을 구사하여 표현했는데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다. 그의 산수화는 김정희로부터 배운 중국 북송의 미불(米芾), 원말의 황공망과 예찬(倪瓚), 청나라 석도(石濤) 등의 화풍과 남종문인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회화세계를 이룩했다. 특히 시·서·화가 조화된 화면 구성이라든지 피마준(披麻皴 산수화 준법의 하나, 위에서 아래로 길게 긋는 방식으로, 마치 베의 올을 풀어 놓은 듯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을 사용하면서도 중간 중간에 가한 거칠면서도 짧은 터치는 그의 개성을 보여준다. 김정희는 이러한 그의 그림에 대해 "화법이 심히 아름다우며, 우리 고유의 습성을 타파하여 압록강 이동에 그를 따를 자가 없다"라고 칭찬했다.
그는 신관호·정학연·민승호·김흥근(金興根)·정원용·이하응·민영익 등과 같은 명사들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으며, 1846년 권돈인의 집에 머물면서 헌종에게 그림을 바친 것이 계기가 되어 궁궐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1848년 헌종의 배려로 고부監試(조선시대 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를 거쳐 친임회시 무과에 급제해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김정희가 죽은 1856년 고향 진도에 운림산방을 짓고 은거하면서 그림에 몰두했으며, 1867년에는 〈소치실록 小癡實錄〉을 저술했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미산 허형(許瀅)과 손자인 남농 허건(許楗), 방계인 의재 허백련(許百鍊) 등으로 계승되어 호남지방의 서화전통을 이루었다.
그의 유작으로는 〈산수도첩 山水圖帖〉·〈방예찬죽수계정도 倣倪瓚竹樹溪亭圖〉·〈방석도산수도 倣石濤山水圖〉·〈선면산수도 扇面山水圖〉·〈누각산수도 樓閣山水圖〉·〈김정희초상〉 등이 전한다.
◎ 小癡 許鍊
※ 小癡許鍊畢墨蓮題跋解說
翠盖佳人臨水立 취개가인임수립
가인이 우산을 받치고 물가에 서 있는 듯
檀粉不勻香汗濕 단분불균향한습
단향가루를 안 뿌려도 향기가 땀에 젖네.
요약 1809(순조 9)∼1892(고종 29). 조선 말기의 선비 화가.
<개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마힐(摩詰), 호는 소치(小痴)·노치(老痴)·석치(石痴). 이명은 허유(許維). 조희룡(趙熙龍)·전기(田琦) 등과 함께 김정희 일파(金正喜一派)에 속한다.
중국당나라 남종화와 수묵 산수화(水墨山水畫)의 효시인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라서 ‘허유(許維)’라고 개명(改名)하였고, 마힐은 왕유의 자를 따른 것이다.
허균(許筠)의 후예 가운데 진도에 정착한 허대(許垈)의 후손이다. 그림으로 유명해진 이후 헌종의 배려로 1848 년 고부감시(古阜監試)를 거쳐 친임회시 무과에 급제하고, 관직은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활동사항>
초년에는 해남의 윤선도(尹善道)고택에서 윤두서(尹斗緖)의 작품을 통하여 전통 화풍을 익혔다. 대흥사 초의(草衣)의 소개로 1839년 상경하여 김정희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서화를 수업하였다.
김정희로부터 중국 북송의 미불(米芾), 원나라 말의 황공망(黃公望)과 예찬(倪瓚), 청나라의 석도(石濤) 등을 배웠다. 그리고 그의 서풍(書風)도 전수받으면서 남종 문인화의 필법과 정신을 익혔다.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회화 세계를 구축하여 김정희 일파 가운데 남종화풍을 토착화시킨 화가로 지목된다. 김정희를 통하여 명사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1846년에는 권돈인(權敦仁)의 집에 머무르며 헌종에게 그림을 바쳐 궁중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왕과 여러 차례의 접촉을 가졌다. 명류(名流)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회화 세계를 풍부하게 하였으며, 남종화의 문기(文氣)와 화경(畫境)을 깊게 하였다.
그와 교우 관계를 가진 인사들로는 해남의 우수사 신관호(申觀浩), 정약용(丁若鏞)의 아들 학연(學淵), 민승호(閔升鎬)·김흥근(金興根)·정원용(鄭元容)·흥선 대원군 이하응(李昰應)·민영익(閔泳翊) 등이 있다. 만년인 1856년에는 진도에 귀향하여 화실인 운림산방(雲林山房)을 마련하고 제작 활동에 몰두하였다.
1866년에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 등을 남겼다. 그리고 1867년에는 「몽연록(夢緣錄)」 등 『소치실록(小痴實錄)』을 저술하였다. 다방면의 화재에 능통하였지만 산수화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산수화는 황공망·예찬의 구도와 필법을 바탕으로 하였으면서도 붓끝이 갈라진 거친 독필(禿筆)의 자유분방한 필치와 담채(淡彩: 엷은 채색)의 색감에서 독특하고 개성이 두드러진 화풍을 엿볼 수 있다. 그러한 산수화 외에 진한 먹을 대담하고 능란하게 구사한 사군자·모란·파초·괴석·노송·연화 그림도 특징적인 개성미를 지녔다.
스승 김정희도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든지, “소치 그림이 내 것보다 낫다.”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토착화된 화풍은 아들 형(灐)에게 전수되고, 손자 건(楗), 방계인 허백련(許百鍊) 등으로 계승되어 현대 호남 화단의 주축을 이루었다.
유작으로는 「산수도첩(山水圖帖)」·「오백장군암도(五百將軍巖圖)」·「방예찬죽수계정도(倣倪瓚竹樹溪亭圖)」·「방석도산수도(倣石濤山水圖)」·「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김정희초상(金正喜肖像)」 등이 있다. 이밖에 모란·괴석·사군자 등 많은 양의 작품이 전한다.
◎ 米山 許灐
※ 米山許瀅畢墨蓮題跋解說
水外天然質 수외천연질
물 위에 보이는 천연의 자질이요,
花中君子容 화중군자용
꽃 가운데 군자의 용모로다.
본관은 陽川, 本名은 潔(개끗할 결, 맑을 결), 전주 출신이다. 호남 남종화의 실질적 宗祖라 일컬어지는 小癡 許鍊 의 넷째 아들로 진도, 강진, 목포에서 활동하였고 근현대 호남 화단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아들 南農 許楗과 족손 毅劑 許白鍊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小癡 → 米山 → 南農 → 林田 등 4대에 걸친 전통 남종화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이 그림은 한 포기의 연꽃을 그린 것으로, 넓은 잎사귀에서 꽃봉오리가 신비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미산(米山), 허준
생몰연대 : 1862년 ~ 1938년
목차
⓵ 개설
⓶ 생애와 활동사항
⓷ 상훈과 추모
⓵ 개설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결(潔), 전주 출신이다. 호남 남종화의 실질적 종조(宗祖)라 일컬어지는 소치(小癡)허련(許鍊)의 넷째 아들로 가업(家業)인 화가의 길을 걸었다. 진도, 강진, 목포에서 활동하였고 근현대 호남화단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아들 허건(許楗)과 족손 허백련(許百鍊)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⓶ 생애와 활동사항
‘호남화단의 종조(宗祖)’라 일컬어지는 소치(小癡)허련(許鍊)의 넷째 아들로 1862년에 전주에서 태어난 후 1867년 진도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허련은 뛰어난 그림 재주를 가진 큰아들 허은(許溵)이 화업(畵業)을 이을 것으로 여겨 북송의 서화가 미불(米芾)의 성을 따서 미산(米山)이라 호를 지어 주는 등 기대하였으나 1867년 5월에 34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낙담하여 다른 자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지 않았다. 허형의 나이 16세 경 우연한 기회에 허형의 그림 재주를 알게 된 허련은 허형에게 본격적으로 그림을 가르쳐 가업을 잇게 하였고 미산이라는 호도 허형이 쓰게 하였기 때문에, 허은을 큰 미산(大米, 伯米), 허형을 작은 미산(小米, 季米)이라 부르기도 한다.
노년의 허련에게 간헐적으로 그림지도를 받은 허형은 그림으로 생계를 이어갔는데 그의 생애는 거주지의 이동에 따라 대략 3기로 구분된다. 즉 진도에 살다 1912년에 강진 병영(兵營)으로 이사하였다가 1921년에 목포로 다시 이사하여 생활하였다. 허형이 진도에서 강진 병영으로 이사한 것과 강진 병영에서 다시 목포로 이사한 것은 모두 생활난을 이겨내기 위한 시도로서 전남지방의 상업과 교역지의 이동에 따른 이사라 볼 수 있다. 허형은 1923년에 개최된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에 허준(許準)이라는 이름으로 「하경산수(夏景山水)」를 출품하여 입선하였고, 1928년 6월광주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허형은 80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허련의 화법을 본받은 산수화·사군자·괴석 등을 수묵 또는 수묵담채로 그렸다.
허형의 작품세계는 진도에서의 활동시기를 전기로 강진 병영시기와 목포시기를 후기로 나누어 보기도 하지만 전후기의 구분은 뚜렷치 않으며 작품의 질적 차이가 크다. 허형의 회화사적인 면에서의 역할은 그의 작품이나 활동보다는 아들 남농(南農)허건(許楗), 허림(許林)과 족손(族孫) 의재(毅齋)허백련(許百鍊)에게 그림을 가르쳐 호남화단과 근현대 한국화단에 큰 족적을 남기게 해준 데에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여겨진다.
⓷ 상훈과 추모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1923년)
개인전(1928년, 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