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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 ]
경상남도 서쪽에 자리한 山淸郡은 백두대간의 정기가 마무리되는 지리산 자락에 깃들어 있는 고을이다.
동쪽으로는 합천, 의령군, 북쪽으로는 거창군, 남으로는 진주시, 하동군, 서쪽에 함양군에 접한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북쪽의 중봉, 하봉으로 뻗은 지맥과 영신봉에서 뻗어내린 낙남정맥이 함양-하동군과
서쪽 경계를 이루고, 동쪽은 백두대간의 남덕유산에서 이어진 '거창지맥'의 황매산이 합천군과
분수령을 이루어 분지를 형성한다.
산청의 가장큰 젓줄은 군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류하는 鏡湖江이다.
동쪽은 황매산에서 발원해 차황, 신등, 신안,생비량면을 적시고 흐르는 양천강이 단성에서 경호강에
합류하고, 또 서쪽은 지리산의 여러 계곡의 물을 받아들인 덕천강이 진양호에서 남강에 몸을 섞는다.
이렇듯 3개강 유역은 지세가 비교적 평탄하고 관개가 편리하며 토양이 비옥해 농경이 적합하나
넓은 평야는 적은편이다.
산청은 삼한시대 변한의 일부였고, 생초면의 가야고분군과 금서면의 전구형왕릉 등의 유적에서
보듯 가야 계열의 왕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삼국시대에는 '지품천현' 이었으나 757년(신라경덕왕10)에 산음현으로 개칭됐다.
1018년(고려현종9) 산음현과 단계현이 합천에 복소됐고, 1390년(공양왕2) 산음현에 감무를 두고
단계를 합천에서 강성에 이속시켰다.
1599년(선조32) 산음현에 통합됐다가 1613년(광해군5) 단성현이 분리됐다.
1767년(영조43) 산음현이 산청현으로 개칭되면서 비로소 산청이란 지명이 나타난다.
1895년 23부제 실시에 따라 진주부 산청군으로 바뀌었다가 1906년(광무10) 진주의 삼장, 시천,금만,
백곡, 사원, 파지의 6개면이 산청군에 속했고, 1914년 단성군이 산청군에 통합됐다.
산청읍과 차황, 오부, 생초, 금서, 삼장, 시천, 단성, 신안, 생비량, 신등면의 1읍 10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청에는 조선시대때 부터 교육기관이 많기로 이름난 곳이다.
고려 인종때 창건되어 1752년(조선영조28) 중건된 단성향교와 1440년(세종22) 창건된 산청향교가 있고,
1561년(명종16)건립한 덕천서원과 1626년(인조4)에 창건된 서계서원이 있다.
그밖에도 청곡서원, 문산서원, 평천서원등의 서원과 크고작은 서당과 사숙이 있다.
또 남사 전통마을, 신등전통마을 등 영남의 양반과 중류층 가옥 구조를 살펴볼수 있는 전통마을이다.
산청에 탯줄을 묻었거나 인연을 맺은 인물중에 이름을 날린 사람은 고려말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삼우당 문익점' 퇴계 이황과 견줄만큼 독특한 학풍을 이룩한 '남명 조식' 그리고 최근엔 '성철스님'이
우뚝서있다.
*낙남정맥
낙동강 남쪽 울타리 역할을 하는 전통산줄기, 지리산 영신봉(1651m)에서 시작한 낙남정맥은 영남
남부지방을 동남쪽으로 관통하다 옥산(614m)에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곡산(543m), 여항산(744m),
무학산(763m), 구룡산(434m), 대암산(655m) 을 거쳐 낙동강 하구를 지키는 동신어산(460m) 까지
약 226km에 달한다.
이산줄기는 대체로 하동, 사천, 삼천포, 고성, 마산, 창원, 김해등 영남 해안지방에 위치한다.
이산줄기를 기준으로 영남 남부의 해안, 내륙의 문화를 구분하기도 한다.
*전 구형왕릉
산청군 금서면 왕산 기슭에 있는 傳 구형왕릉(사적제214호)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오고 있다.
금관가야 제 10대왕 (재위 521-532)인 仇衡王 은 532년(신라 법흥왕19) 신라에 항복하여 上等 의
벼슬과 가락국을 食邑으로 받았다.
협곡의 경사진 언덕에 잡석으로 층단을 이루고 있는 이무덤은 가야뿐만 아니고, 한반도에서 볼수
있는 일반적인 묘제와는 다르다.
층단은 모두 7개, 총높이 7.15m 이며 꼭대기에 타원형의 봉분이 마련되었으나 일반 봉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외형으로만 본다면 고구려 초기 적석총에 가깝다고 볼수 있다.
특이한 점은 앞면 넷째단에 작은 감실(폭40cm,높이40cm, 길이68cm,) 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용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 독특함 때문에 왕릉이 아니라 석탑 또는 제단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무덤 앞의 비석, 돌짐승 등 석물들은 모두 후대에 김해김씨 후손들이 만들어 세운 것이다.
*류의태 약수터
구형왕릉 바로 앞 갈림길에서 임도를 따라 2km쯤 오른 뒤 오솔길을 200m쯤 걸어 올라가면
너덜지대에서 솟아나는 시원한 샘물을 만날수 있다.
수량은 제법 많은 편인데 날씨가 가물거나 비가 와도 항상 일정하다.
산음현, 즉 산청 금서면 화계리는 류의태가 의술활동을 펴던 곳으로서 그는 약재를 달일때 반드시
이 약수를 썼다고 전한다.
병명을 알수 없던 병도, 이물을 이용하면 치료가 되었다고 한다.
최근에도 이 약수는 잘 낫지 않는 위장병, 피부병 등에 특효가 있다고 알려져 왕산을 찾은 등산객은
물론이고, 멀리서도 물을 받아가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
이 약수는 약효가 뛰어난 물로 꼽히는 냉천이다.
*지리산 성모상
오래 전부터 지리산 천왕봉에 모셔온 성모상은 높이가 1.2m 너비 50cm의 아담한 체구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 성모를 신선으로 모신것이라 하고,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도선국사에게 자신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지리산
산신으로 모신것이라 한다.
또 성모상이 석가모니의 생모인 마야 부인이라고도 하며, 무속에선 불로장수와 만사형통을 관장
한다는 마고 여신 이라고 한다.
이렇듯 건국신화와 불교와 무속신앙이 뒤섞여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낳은 성모상이다.
현재 중산리 천왕사라는 절에 세워져 있다.
음력 3월 7일 성모상을 위한 천왕제를 지내고 있다.
*내원사
삼장면 대포리 장당계곡과 내원계곡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한 內院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
신라말 無染(801-888) 이 덕산사로 창건했지만, 이후 언제 폐사 되었는지 자세히 전하지 않고,
1959년 홍원경 주지가 중건한뒤 꾸준히 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른다.
경내엔 석조여래좌상(보물제 1021호) 과 내원사 삼층석탑(보물제 1113호) 두점의 보물이 있다.
비로전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은 내원사에서 30리쯤 떨어진 보선암 폐사지에서 발굴된 것이다.
석불대좌 중대석에서 발굴된 사리함 표면에 적히 銘文에 따르면 776년(신라 혜공왕2)에 한 화랑이
요절하자 그의 부모가 불상을 제작하였다는 내용등 불상 조성 연대와 동기 등이 적혀있다.
제작기법, 사리함 뚜껑 처리 방식등 미술사적 측면과 불교사적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사리함은1986년 '영태이년명납석제호'라는 명칭으로 국보 제 233호로 지정되어 현재 부산
시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내원사 삼층석탑은 신라 시대에 건립한 일반형 삼층석탑이다.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었는데, 상, 하층 기석단에는 양 우주와 1탱주가 모각됐다.
탑신부는 신, 개 각 1석씩 조성하였는데 각층 탑신에는 우주가 모각되고 옥개받침은 4단씩이다.
1950년경 도굴꾼에 의하여 파괴된 것을 1961년 주지 홍진식 스님이 복원했으나 맨 위쪽 옥개석이
많이 부서지고 상륜부는 없다.
*대원사
지리산 동쪽 삼장면 유평리에 있는 大源寺는 조계종 제 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다.
548년(진흥왕9)에 '연기'조사가 창건해 '평원사'라 했는데, 그후 언제 폐사가 됐는지는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1천여 년 동안 폐사 됐던것을 1685년에 운권 선사가 옛 터에 사찰을 건립해 대원암 이라 했다.
1890년(고종27)에 무너진 암자를 중건하면서 대원사 라 했고, 큰스님을 초대해 불교를 공부하니
전국의 수행승들이 소문을 듣고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등으로 폐허 되어 방치되다가 1955년 중창하면서 비구니 선원을 개설했다.
건물로는 대웅전, 원통보전, 응향각, 산왕각, 봉익루 등이 있고, 절 뒤쪽의 '사리전'은 비구니라면
한번쯤 거쳐 가는 곳이다.
그 앞에 자리한 '대원사 다층석탑(보물 제 1112호)은 조선시대 작품이다.
*단속사지
단성면 운리 웅석봉 남쪽 계곡에 자리했던 斷俗寺는 통일신라 이후 고승을 많이 배출해 1,000 여년의
법통을 이어왔는데, 1568년(선조1) 유생들이 불상과 경판 등을 파괴하고, 이어 정유재란때 불타버린
후 재건했으나 현재는 폐사 됐다.
보물로 지정된 단속사지 동삼층석탑(보물 제 72호)과 서삼층석탑(보물 제73호)이 있고, 幢竿支柱가
남아있다.
동, 서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으로 비례미와 균형미가 잘 조화되어 안정감이 있고, 또한 치석의
수법이 정연하여 우아 하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이 같은 쌍탑 가람형식이 지방의 깊은 산골에 까지 전파 됐음을 알수 있다.
이밖에도 절터 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와당을 비롯한 석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주변 민가의
담장이나 집안에 많은 석물들이 흩어져 있다.
단속사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두가지 설이 전한다.
748년(경덕왕7)왕의 총애를 받던 '이준'이 槽淵小寺를 개창하여 단속사라 하였다는 설과,
763년(경덕왕22)에 '신충'이 벼슬에서 떠나 지리산에 들어가 삭발하고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창건했다는 설이다.
'김일손'이 '정여창'과 함께 천왕봉을 등반하고 쓴 <두류기행>에서 단속사를 '절이 황폐하여 중이
거처하지 않는 곳이 수백칸이나 되고 동쪽 행랑에 석불 500구가 있는데 하나 하나가 각기 형상이
달라 기이하기만 했다' 고 적혀있다.
*도전리 마래불상군
생비량면 도전리 어은마을 입구 20번 국도변에 있는 마애불상군(경남 유형문화재 제209호)은 29구나
되는 대량의 불상군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희귀한 예로 꼽힌다.
이 불상들은 바위절벽에 4단으로 줄을 지어 새겨져 있는데, 맨 아래 1층 14구, 2층 9구, 3층 3구,
4층 3구 가 배치되어 있으며, 크기는 대부분 30cm 안팎이다.
여러 가지 형식으로 새겨졌지만 대개 비슷해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으며,
소발의 머리칼에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고, 머리는 둥글고 단아하지만 이목구비가 마멸이 심한 편이다.
몸은 사각형이면서도 단정하며 통견의 옷주름이 불상의 크기에 비해 다소 많은 편인데,
'나말여초' 특히 고려시대의 불상 특징이 강하게 엿보이고 있다.
단정한 형태의 불상군은 불상의 옷 입음새나 수인등 세부 표현에서 다소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수인의 경우 선정인, 시무외인, 보주를 든 손 모양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다.
*남명 조식 유적지
1501년(연산군7) 지금의 합천군에서 출생한 南冥 曺植(1501-1572)은 이황과 함께 당시 영남유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대학자로 실천적인 성리학을 중시 하였다.
모든 벼슬을 물리치고 현재의 산청군 시천면인 덕산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다가 1572년(선조5)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덕산 부근에 '덕천서원' 산천제' 남명묘소 등의 유적지가있다.
덕천서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 1576년(선조9) 남명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그가 강학했던
자리에 건립한 서원이다.
1609년(광해군1)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30년대에 다시 복원되었다.
'경의당'은 서원의 각종 행사와 유생들의 회합및 토론장소로 사용되던 곳으로 '덕천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서원의 중심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중앙에 대청이 있고
그 양쪽에 툇마루와 난간이 달려있는 2개의 작은 방이 있다.
덕천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첫 丁日에 제사를 지내고 매년 음력 8월18일에는 남명의
탄생을 기념하는 남명제가 열린다.
덕천서원 앞에 있는 洗心亭은 1582년(선조15) 에 세웠다.
산천제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1561년(명종16)에 세웠고, 1818년(순조18)에 고쳐졌다.
규모는 앞면 2칸, 옆면2칸 이다.
산천제 맞은편 언덕으로 50M쯤 오른곳에 남명 묘소가 있다.
*성철 스님생가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 옆에 성철스님 생가와 劫外寺가 있다.
스님의 생가터에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과 동상, 그리고 겁외사 라는 사찰을 창건해 2001년
문을 열었다.
성철 스님 생가는 겁외사 입구인 '벽해루'를 거쳐 들어가게 되어 있다.
벽해루 지나면 정면에 스님의 동상(사리탑)이 서 있고,동상 좌측으로 대웅전이 있다.
스님 동상 뒤쪽에 '혜근문'을 통해 스님의 생가와 기념관으로 들어갈수 있다.
'혜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스님의 생가를 복원해 놓은 '율은고거' 이고 우측 건물은
사랑채, 좌측 건물은 스님의 기념관인 '포영당'이다.
포영당에는 스님이 입으셨던 누더기 두루마기와 덧버선 등의 유품과 유필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남사 고가마을
지리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은 단성면 남사 마을은 분위기가 정겹고 고풍스런 맛이 넘치는 마을이다.
마을 앞을 흐르는 남사천과 어우러진 모습은 풍수 지리상 반달모양. 그래서 달이 차지 않도록 동네
가운데는 농지로 두었고, 동네 양끝에 굽이쳐 흐르는 냇가와 마을이 잘 어울린다.
남사 마을은 500여년 전 진양하씨의 이주로 마을이 시작됐다.
대개 오래된 마을이 한 성씨로 되어 있는것과는 달리 이곳은 성주이씨, 밀양박씨, 진양하씨, 전주최씨,
연일정씨, 재령이씨 등 여러 성씨가 이주해 와서 살고 있다.
비롯 많은 집들이 세월에 따라 개조되어 원래 제 모습을 잃어가고, 인적을 찾기 어려운 집도 있긴
하지만 18~20 세기 초 사이에 지어진 한옥 80여채가 남아 있다.
화적의 칼을 자기 몸으로 막아 아버지를 구한 영모당 이윤현의 효성을 기린 사효제가 있고,
마을의 길흉을 예견한다는 하씨 가옥의 감나무도 있다.
*황매산 영화 주제공원
황매산 철쭉밭 아래에 있는 영화주제공원은 영화 '단적비연수'의 촬영장으로 산속에 작은 원시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3000여평의 공간에 31채의 가옥과 풍차, 영화에 쓰였던 은행나무와 주인공의 캐릭터 등 1000여점의
소품이 전시되어 있다.
*황매산 철쭉제
산청 동쪽의 황매산(1103m)은 바위산의 모양이 매화가 피어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월이면 수십만평의 고원에 선홍빛 철쭉이 군락을 지어 피어난다.
산청군에서는 풍년을 기원하며 황매산 철쭉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5월 초순에 황매산 철쭉제를 연다.
*산청별미
- 경호강 어탕국수
- 지리산 산채비빔밥
- 산청 흑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