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포종택(蘭圃宗宅)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 청도로 가는 919번 도로변 부용화(芙蓉花)명당터에 자리잡은 고택이 하나 있다. 1546년(명종1년)에 난포(蘭圃) 최철견(崔鐵堅)이 최초로 지어 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는 이 고택은 영천 최씨의 종택으로 이름하여 난포종택(蘭圃宗宅)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된 고택으로 최철견(崔鐵堅)의 자(字)가 당호(堂號)로 굳어져 난포종택이라 하며 곡란리(谷蘭里)의 지명에서 보듯 이 마을에는 옛날부터 난초가 많았다고 하는데 난포의 자도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최철견 선생의 15대 후손인 최해근씨의 이름을 따서 최해근 가옥이라 칭하고 있다.
1929년 조선총독부의 촉탁에 의해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조사한 전국의 풍수적 길지에 자리한 대표적인 주택 36개 중 하나로 선정된 집이기도 하다. 무라야마 지준은 그의 저서<朝鮮의 風水>에서 이 집에 대해 “경상북도 경산군 용성면 곡란동 최한구(崔澣久)의 주택지는 그 지형이 부용화(芙蓉花)같아 거주지로서 가장 좋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구한 말 정부에서는 이 땅이 길지이므로 특사를 보내어 택지를 시찰케 한 적이 있다.
높다란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의 끝에 ‘역 기역자’ 모양의 사랑채가 있다. 전면으로 6칸과 측면 4칸을 직각으로 이어 놓았다. 축대를 쌓아 올린 사랑채의 모습이 시원스레 열린다.
사랑채의 맞은편에는 수오당(守吾堂)이란 건물이 있는데 오래전 용산 기슭에서 이곳으로 이건한 재실(齋室)이라고 한다. 지금은 경산시에서 문화재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라 볼수가 없음이 안타깝다.
사랑채 마당을 지나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마당이다. 안채부터는 수오당의 보수공사로 인하여 개방을 하지 않고 있어서 자세한 모습은 볼 수가 없다. 먼 곳에서 작정하고 보러 왔던 필자에게는 아쉽기 그지없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공사도 중단된 탓에 사람이 아무도 없어 속수무책이다. 그러나 그냥 갈수가 없기에 낮은 담장 밖을 돌며 눈에 보이는 대로 집 안을 살펴보았다. 안채의 뒤쪽으로 돌아가니 사당이 보인다.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안채의 좌측에 사당(祠堂)을 모셨다. 꽤나 오래되어 보이는 것이 원형대로 보존이 된듯하다. 사당의 입구에는 큼직한 돌이 이끼에 덮여 놓여 있는데 자료에서 보았던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이다. 고인돌의 옆에는 배롱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겨울이라 꽃은 볼 수 없지만 돌과 나무의 조화로움이 석부작의 아름다움으로 느껴져 온다.
난포고택은 원래 대문채, 사랑채, 중사랑채, 안채, 아래채, 고방채, 방아실채, 사당 등을 고루 갖춘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상류 주택으로, ㅁ자형인 사랑채와 역시 口자형인 안채가 종으로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日자형이었다고 한다. 세월의 흔적따라 지금은 대문채, 사랑채, 중사랑채, 고방채, 방아실채 등은 모두 없어지고 2004년 사랑채와 대문채를 복원하기 전까지는 오랫동안 안채와 아래채, 사당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담장을 따라 집의 뒤켠으로 가자 주산에서 내려온 용맥 하나가 뚜렷하게 보인다. 고추밭을 지나 안채로 이어진 내룡의 끝자락에 담장을 끼고 불룩하게 솟은 잉의 모습이 보인다. 혈이 맺히는 증거이다.
잉의 바로 아래 고택의 주 건물인 안채가 자리잡았다. 주산을 뒤로하고 산의 끝자락 평지에 자리 잡았는데 집 앞으로는 명당수(明堂水)인 금성수(金星水)가 흐른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정혈이다.
난포종택의 주산은 부드러운 수성체이다. 낙동정맥의 사룡산(四龍山)에서 갈라져 나온 한 지맥이 구룡산(九龍山:674.8m), 발백산(髮白山:675m) 등을 거쳐 수많은 크고 작은 봉우리를 기봉시키며 행룡하다 마을 뒤에 수려하게 일으켜 놓은 봉우리(약330m)이다.
여기서 중출맥한 주룡은 마을로 내려가고 옆으로 개장한 내청룡, 내백호가 마을을 감싸니 모두 하나의 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본신(本身)의 용호다. 또한 외청룡과 외백호, 안산도 하나의 줄기에서 나와 다시 마을을 더 크게 감싸는데 마을에서는 보이지 않는 주산을 일으킨 祖山봉우리(351m)에서 개장하여 한 줄기는 주산으로 뻗고 다른 두 줄기가 외청룡과 외백호를 이룬다. 이 중 외청룡이 마을 앞까지 감싸고돌아 일으킨 산이 안산(案山)이다.
높고 길게 뻗은 청룡으로 좌측은 장풍이 잘 되었으나 상대적으로 낮고 짧은 백호쪽은 장풍이 완벽하지 못하다. 따라서 마을의 지세는 전체적으로 청룡 쪽인 남쪽이 높고 백호 쪽인 북쪽으로 완만하게 낮아지는 경사를 가진 형태이다.
때문에 동남쪽 골짜기의 외청룡자락인 용산지(龍山池)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마을 앞개울을 지나 외백호 끝자락에서 수구를 이루는데 수구가 많이 벌어져 있다. 그래서 외백호의 끝자락에는 수구막이로 많은 나무를 심어 비보 숲으로 지금도 보호하고 있다.
그런데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대부분의 산들이 정확한 제 이름을 갖지 못하였으나 안산만은 용산(龍山:434.7m)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용성면(龍城面)이라는 지명이 바로 이 용산에서 연유되었다하여 이 고장의 진산(鎭山)으로 신성시하는 산이다. 용산에는 ‘용산’이란 지명과 ‘용성면’의 지명을 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면의 진산으로 신성시하게 만든 ‘용산성(龍山城)과 무지개 샘’이라는 좀 황당하지만 재미있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설에는 용산이 있는 이 일대는 원래 광활한 평야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지금의 용산이 자리한 마을에 살고 있는 한 아낙이 마을 앞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가 짙은 안개로 뒤덮이더니 불과 2~3리 안팎에서 시커먼 이상한 물체가 조용조용 움직이고 있어, 이를 자세히 살펴보니 그 속의 형체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큰 산 같은 물체가 걸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순간 아낙은 자신도 모르게 “어머나! 산이 걸어온다!”란 외마디 비명을 질렀는데 안개 속에 싸여 조용히 걸어가고 있던 산이 아낙의 비명에 놀라 그만 덥석 주저앉고 만 것이 그대로 머물게 되었다는 것이다. 산이 머물고 난 후 이 산의 중턱에는 샘이 생겨나고, 그 샘 속에는 하늘의 비를 제압하면서 이 지방을 다스리는 큰 용이 살았는데, 용산이란 지명이 바로 용이 살고 있는 산이라 하여 붙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용산의 샘에 사는 용이 이 지방을 다스릴 때 이 산의 산정에 산성을 쌓기 위해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작은 장수들이 모여들었는데, 샘의 용이 이 소식을 듣고 몹시 화가 나 산 전체에 안개를 피워 산이 보이지 않도록 하자 작은 장수들은 큰 바위를 안고 날랐지만 미처 산에 당도하기도 전에 들판 가운데에 바위를 떨어뜨리고 말았다고 한다. 그들은 아무리 바윗돌을 날라도 성을 쌓을 수 없게 되자, 그것이 곧 샘의 용주(龍主)짓임을 알고 찾아가 ‘이 성을 쌓음으로 이 고장을 침범하려는 적을 막고, 이 지방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니 용서 해 달라. 산정의 산성을 우리 인간에게 넘겨주는 대신, 샘에서 굽어보는 모든 산천을 용주님께서 영도해 달라’고 간곡히 빌며 간청하자 용은 자신의 영토가 넓어진 것으로 알고 기꺼이 이를 승낙하고 성을 쌓게 하였다고 한다.
작은 장수들은 용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젠 되었다하고, 먼 곳에서 돌을 날라 오지 않고 용이 살고 있는 샘 주위의 돌을 마구 나르자 이를 괘씸히 여긴 용은 그로부터 석 달간이나 비를 내리지 않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장수들이 사는 평지는 물론 그 일대 모두가 더위와 갈수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들은 참다못해 용을 찾아가서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며 3일 동안이나 엎드려 빌고 있으니, 3일째인 대낮에 억수 같은 소나기가 내렸다고 한다. 그때 샘에서는 일곱 색의 무지개가 하늘높이 피어올랐다는데, 그로부터 이 샘을 ‘무지개 샘’이라 하였고, 가뭄이 계속될 때는 이 지방민들의 유일한 기우처가 되어 왔다고 한다.
지금도 용산의 정상에 오르면 넓고 평평한 곳에 사방에 성벽을 쌓은 석축들이 무너진 채 남아있고, 사방에는 성곽의 입구가 있다고 한다. 이 성을 이 지방민들은 삼한시대에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이곳의 양민들이 의병을 모아 쌓은 성이라 하지만, 이를 고증할 만한 기록은 없다. 후대에 와서 이 성을 용성(龍城)이라 하고, 이 곳 면의 지명이 되었다. 이 산에는 어떠한 경우라도 무지개 샘 위로는 묘를 쓸 수 없다고 하는데, 만약 묘를 쓰면 강철이가 나타나 이 일대에 가뭄이 들게 하여 농사를 망치게 한다는 구전이 이 지방에 민간신앙처럼 전하여 오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경산시청 홈페이지 ‘경산의 전설’ 참조)
좌향을 살펴보니 을좌신향(乙坐辛向)이다. 특이한 점은 집의 바로 앞에 나지막한 높이의 좋은 앞산이 있음에도 그곳을 안대로 잡지 않고 그 뒤에 있는 용산을 향하여 좌향을 놓았다. 아마도 용산을 신성시하여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앞산에 올라 집터를 관찰하던 중 의외의 형국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맹호출림형이다. 용맹스런 호랑이가 먹이를 향해 숲에서 나오는 듯한 형상처럼 힘차게 땅을 박차고 솟구쳐 올라 벼락같이 먹이를 덮치는 기상이 용맹하기 그지없다. 호구 앞에 놓인 둥그런 먹이까지 놓여 있어 완벽한 맹호출림형이다.
이러한 형국에서는 입에 해당하는 부분이 진혈이 되는데 사진에서처럼 이미 누군가 무덤을 써 놓았다. 그 옆으로 배에 해당하는 부분에도 무덤이 보이는데 이것은 차길(次吉)로 보인다. 왜냐하면 호랑이의 배에는 젖꼭지가 있고 호랑이의 젖꼭지가 진혈이 되는 형국은 맹호수유형이다.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어미호랑이의 형상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 때에는 입 보다 젖이 있는 부분이 진혈이 된다. 더구나 맹호수유형에서는 젖꼭지를 물고 있는 새끼호랑이의 모습이 나타나 있어야 되는데 여기서는 그것이 없다. 따라서 이 형국은 맹호수유형이 아니고 맹호출림형이다. 호랑이가 먹이를 사냥할 때에는 입에 가장 큰 기가 모이게 되므로 따라서 호구에 해당하는 자리가 진혈이 되는 것이다.
500년 가까운 세월속에 아직도 후손이 대를 이어 살고 있는 난포종택은 그 역사만 보아도 명당덕을 보고 있음이 증명된다. 현재는 최철견 선생의 17세손이 살고 있다.
그의 선조 최철견(崔鐵堅, 1548-1618)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응구(應久) 또는 난포(蘭圃), 호는 몽은(夢隱)이다. 1576년(선조9)에 사마시에 합격, 1585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감찰·형조좌랑·사간원 정언을 역임 하였다. 1590년에는 병조정랑이 되어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전라도 도사가 되었는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찰사 이광(李洸)이 패주하자, 죽기를 맹세하고 전주 사민(士民)에 포고하여 힘껏 싸워 전주를 수호하였다. 1597년 수원부사로 임명되고, 1599년 내자시정(內資寺正), 1601년에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호조참의로 전임되었으며, 1604년에 춘천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저서로는 <몽은집(夢隱集)>이 있다.
(國朝人物志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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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무 멋집니다. 정말 많은 것을 배우게 합니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