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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목회사역의 공적 임무
1장 설교의 제정과 그 중요성
(후커 Hooker)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부족이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죄의 원인이기 때문에, 이와 반대로 모든 우리 행복의 근거는 하나님의 것들과 관계가 있는 바른 생각이다. 이런 종류의 지식을 첫 번째의 것으로 그리고 가장 주요한 것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 지식을 자기 백성들에게 분여하신다. 그리고 여러 직무 중 첫 번째가 되는 것(설교)을 위해, 그분의 자비로운 손에서 이것을 받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을 가지고 우리는 이 땅에서 공적으로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한다. 그러므로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가르쳐 영생에 이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진리가 공개적으로 그들에게 선포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하늘나라의 비밀을 공개적으로 공표하는 것이 설교라고 한 고위 목사는 말한 적이 있다.
에녹과 노아를 잠시 살펴보면, 이 설교의 제정을 대홍수 이전 시대와 연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출14:15; 벧후2:5). 족장 시대에는 공적인 가르침이 아마도 가장에게 부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창14:14; 18:19).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사명을 받았다. 역사가 흐름에 따라 선지가 학교가 있었는데, 선지서는 그 땅을 위한 공적인 가르침의 기록이다(삼상10:5-6). 포로 시대 이후에는 그 의식이 단순하면서 강해와 해석의 정해진 순서를 따른 것 같기도 하다(느8:4-8; 행13:14-15).
위대한 의의 설교자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이 직분의 수행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았다(사61:1-2; 눅4:16, 21, 43). 그리고 항상 그 일을 하셨다(눅19:47). 그는 자신의 사도들을 이 직분의 후임자들로 삼으셨고(막3:14), 자기 자신의 영을 선물로 주심으로 사도들의 사명에 인치셨다(마28:18-20; 막16:15). 이 권위를 받은 그들은 공적으로 그리고 사적으로 자신의 노력을 최대한 펼쳐, 복음을 설교했다(행5:20-21, 42; 20:20-21; 롬15:19; 골1:23).
비록 수세기 동안 설교 직분이 로마 가톨릭에서 보류되기는 하였고, 그리스 정교회의 몇 교파에서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설교는 세상 사람들의 회심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에 일차적인 도구라고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우리 시대의 한 능력 있는 저자는 이 위대한 제도가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종교를 퍼뜨리는 모든 방법들 중에 설교가 가장 효과적이다. 기독교가 그 탄생과 그 진행, 그리고 그 진보를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설교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교도로부터 초대 기독교까지 로마 제국의 회심을 불러온 것은 순회 설교 덕택이다. 종교 개혁이 성공함으로 교황의 속박으로부터 우리가 자유롭게 된 것도, 그리고 현대에 만연된 불신과 무관심 때문에 교회가 겪었던 쇠퇴기로부터 기독교의 부흥이 일어난 것도 설교 때문이다.
설교는 언제나 높은 존경을 받아왔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Nazianzen)는, 설교가 “복음의 사역자들인 우리들에게 속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설교를 감독 고유의 임무로 보았다. 손다이크(Thorndike, 목회사역에 관한 권위자)는 말하기를, “설교는 감독과 장로가 하나님을 섬길 때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탁월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2장 설교 준비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전12:9). 그의 온 영혼은 가르침의 가장 좋은 내용뿐만 아니라 가장 좋은 양식도 발견해 내었고, 하나님이 저자이신 그의 위대한 주제에 대한 생각들은 언어로 옷 입혀지게 되었다. 그는 육신의 피곤보다 더 가치 있는 ‘공부’의 유익함을 생각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사람들 중에 가장 지혜로운 이 사람의 말들 즉 수고와 공부의 열매는 나태한 자들을 자극하는 회초리 역할을 하였다. 사람들의 귀를 얻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뿐만 아니라, “잘 박힌 못과 같이”(전12:11) 기억과 양심 그리고 판단력에 고정되었던 것이다.
공적인 가르침을 위한 헌신적인 준비의 이러한 예는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교인들이 구체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들을 늘 머리 속에 떠올리는 것, 성경의 가르침과 권면과 위로의 적당한 과정을 결정하는 것,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가장 적합한 방법을 선택하는 것, 이러한 것들은 수고롭고 끈기 있게 성실함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감이 준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기도 한다. 몇 개의 설교 노트 혹은 그 순간의 충동, 유창한 언변의 재능, 성경과 성경사전, 이것들만 있으면 위대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강단에 설 충분한 보장이 될 것이라고 이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성실한 것만이 영원하다. 상상력, 타고난 언변, 혹은 격렬한 흥분 등은 실질적 내용이 부실한 것을 보상해줄 수 없다. 쓸 것에 비례해서 모아 놓지 않는다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한 “지식과 명철”의 비축이란 있을 수 없다.
이런 종류의 설교자들은 일반적으로 다양성이 부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용적으로 보아도 동일한 가르침일 뿐만 아니라, 설교 자체도 거의 동일한 설교이다. 새로운 본문에서도, 내용은 같은 생각의 반복일 뿐이다. 늘 그렇듯 똑같은 말로 지루하게 길게 늘여놓을 뿐이다. 그들은 집을 소유하고 있는 자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 보물이 없다. 그리고 모든 주제들 중 가장 고상한 것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할지라도 단조롭게 전달하면 힘이 없어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 무미건조한 똑같은 이야기는 회중들을 무감각에 빠지게 하거나, 또는 생각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불만을 토로하게 만든다.
서재에서나 강단에서 빈둥거리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물을 소홀히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게으름이 아닌, 우리 노력에 복을 주실 것이다. 우리 주님과 우리 교인들은 우리 최고의 시간과 달란트를, 우리의 가장 숙성된 생각들을, 그리고 가장 꼼꼼한 연구를 요구할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보잘 것 없는 알맹이를 가지고 감히 이 대단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높은 임무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그것은 잘못이다. 재능 있는 몇몇의 목사들은 연구없이 설교를 해도 효과적인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렇지만 우리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것과 강단의 위엄과 숭고한 사역을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이 거룩한 일을 성급하게 그리고 충분히 이해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것을 억제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 교인들의 양심과 다양한 상황들에 적용시킬 가장 강력한 방법을 저울질해보지도 않고서,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요약을 따오고, 서로 연결되지 않는 진리들을 긁어모으는 것은 이 절박한 경우에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일인가? 또한 독창성이 없이 어떤 인기 있는 패턴을 따르면, 커다란 해를 입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형제 목사들 속에 있는 다양한 재능들을 관찰해보는 것은 유익하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의 주요 임무는 우리 자신의 은사들을 분별하고 계발하는 것이며, 모든 목회 은사들을 완전한 정도로 획득하기 위해 공들여 노력하는 것, 적어도 그 어느 부분에서도 전적으로 부족하지는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설교의 준비는 우리의 근면보다는 우리의 영성에 더 많이 달려 있다. 영성은 더 나아지려는, 근면한 습관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영혼의 귀함, 시간의 촉박함, 그리고 영원에 대한 지대한 관심에 대한 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에서 흘러나온다. 그래서 이러한 습관이 성경의 내용에 제대로 고정되었을 때, 성경의 진리에 대한 분명한 생각이 아름답게 열리며, 또 명쾌하고도 자연스럽게 흐르게 된다. 그 생각은 공적 가르침에도 도움이 되지만 개인의 영적인 함양에도 도움이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진행 원칙이 있으면 주된 목적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하게 되며, 마음의 모든 힘을 그 인식에 집중시키게 된다. 이 습관이 없으며, 가장 근면한 목사라 할지라도 자신의 막중한 사역에서 단지 시간을 낭비하게 될 뿐이다.
1) 설교 원고 작성
우리의 설교 전달에는 얼마나 많은 책임감이 달려있는가? 회중이 지식과 명철로 마음껏 배부르게 먹게 될지, 아니면 적절하지 못하게 설익은 양식을 먹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강단은 늘 생명의 양식을 나눠주는 곳이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딤후2:15) 하도록 정말로 많은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 각자는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15:23) 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설교 주제를 선정할 때, 성경은 거의 무한대의 영역을 펼쳐 보인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우며 유익한 것”과 “무익한 것과 헛된 것”(딛3:8-9)을 분명하게 규정함으로써 우리에게 설교주제 선택에 관한 몇 가지 현명한 경계 규정을 주고 있다. 그는 인간의 부패와 회복의 교리가 실질적 경건의 유일한 효과적 원천임을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확인하게 만들곤 하였으며, 그 자신의 본을 따라(고전2:2) 모든 주제들을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향하게 만들고, 그 내용들을 모두 그분의 십자가를 충분히 보여주는 일에 집중시킨다.
이 체계적인 가르침을 위한 자료들은 매일의 독서 과정에서, 하나님과의 은밀한 시간에서, 일상적인 가족 간의 교제에서, 기대하지 않았거나 심지어 평범한 섭리 속에서 생겨나, 우리 앞에 드러난다. 현재 우리 교인들의 부족한 상황과 어려운 처지에 어떻게 적용시킬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이러한 자료들은 항상 눈에 띄는 법이다. 교구 사역가운데서 교제하는 가운데 알게 된 문제들은 우리의 주일 사역을 위한 최고의 자료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한 본문의 의미와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하게 결정된다. 그래서 단지 본문을 강단 설교의 첫머리에 인용문으로 삼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설교를 본문에서 만드는 대신, 본문이 설교에서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구성 요소들이나 문맥과 그 본문과의 연결 등을 손도 대지 않고 남겨두는 것은 강해자의 임무를 상실했다는 것 외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당한 존중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커튼 메이더(Cotton Mather)가 세운 본문 다루기 규칙 중 일부이다.
가능하면 본문을 원어로 읽고, 설교문을 작성하기 전에 주석가들의 말을 들어보라. 자기 설교문에 들어있는 성경 구절들의 스타일을 공부하고, 성경의 증거나 성경적 예증이 있는 대지 몇 개를 확인하라. 성령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안다면, 모든 자신의 설교에 그리스도가 많이 있게 하라. 그리고 이 규칙을 따랐다면, 자신의 사역수행에서 능력을 많이 베푸시는 성령의 은혜가 있기를 소망하라. 각 설교를 가능한 한 모호하게 다루지 말고, 대신 관심 있는 문제들로 가득 채우라.
이러한 규칙들 중 몇 가지에 대해서 좀 더 말을 해야겠다. 설교문을 작성하기 전에 주석을 사용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설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고 설교 구성을 짜기 전에 주석을 사용하는 것은 좋지 않다. 다음은 세실 목사의 준비 방법이다.
주석 사용이 자기 자신의 생각을 앞지르지 않게 하라. 자기 마음에 스쳐가는 것들은 모두 적어가면서, 그 주제에 대해 자기 자신에게 먼저 이야기해 보라. 그리고 자기가 써놓은 것들을 배열하고, 자기 계획을 확정짓고, 자기 자신의 자료들을 모두 사용한 후, 도움이 되는 외부 자료들을 모두 이용하라. 자기 자신의 것은 등한시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자료를 많이 사용하는 것보다 견실한 배움에 더 방해가 되는 것은 없다.
설교 원고를 내용으로 채우기 위해 “내 속에는 말이 가득하니”(욥32:18)라는 엘리후의 말과 같이 되어야 함이 좋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교인들의 능력과 그들의 이해력의 제한된 성격을 기억해야 하며, 그들의 타고난 능력 그 이상으로 그들을 잡아당기면 심각한 부상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의 원칙은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말씀을 가르치는 것”(막4:33)이었다. 혹,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말씀하셨다면, 그의 가르침의 원대한 목적은 잃어버리게 되었을 것이다. 너무 넓은 표면을 다룸으로 뚜렷한 감동을 약화시키지 않게 가장 적합한 가르침을 선정하는 것은 상당한 신중을 필요로 한다. “한 설교에 무엇을 넣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려면 상당한 숙고가 필요하다”고 세실 목사는 말했다.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가장 잘 말해야 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 주제의 각 대지마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집어넣은 것을 목표로 삼지 말자. 구성의 통일성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우리 생각이 말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도록 하자.
그리고 명심해야 할 요지는, 성경을 펼쳐서 하나님의 마음을 해설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를 추상적으로 다루지 말라. 성경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잘 빻아서 교인들 앞에 펼쳐 보이라. 주제는 설교를 구성하기 전에 이미 분명하게 이해되어 있어야 한다. 서론은 다루고 있는 상황이나 주제를 간략하게 설명함으로 본문을 자연스럽게 소개하는 공간인 것이다. 대지들은 서로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이어야 하며, 동시에 모두 하나의 주제에 집중되도록 하여야 한다.
유창한 언변, 예증의 풍부함과 다양함 등, 질서있는 배분을 하지 못하면, 주목을 받는데도 실패하며 꾸준한 감동도 주지 못한다. 너무 인위적으로 만든 방법도 위험하며, 또 부자연스럽게 연결시키면 매우 좋은 내용이라도 그 흥미를 상실한다. 그러나 우리 본문에서 멀리 도망치는 습관은 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윌킨스(Wilkins) 감독은 설교의 세 가지 구성 요소로서 방법, 내용 그리고 표현을 꼽고 있다. 방법은 구조를 놓을 때 보여진다. 내용은 그 구조를 채울 때 보여지며, 표현은 그것에 적당한 옷을 입혔을 때 보여진다. 설교 내용의 일차적인 자료들은, 본문에 있는 모든 중요한 말을 면밀히 분석하고, 본문 전체의 구조를 세밀히 분석할 때 발견된다. 또 평행 구절들을 조사하여 예증으로 삼고, 문맥을 반추하면서 면밀히 살펴볼 때 자료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본문과 연관된 어떤 역사적 상황을 찾아내어, 그 의미를 분명하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또 성경 저자의 의도와, 저자가 자기 요점에 도달한 연속적인 단계들과 연속적인 논리 등은 모두 주목해야 할 것들이다. 본문에서의 화자와 시간적 배경, 그리고 본문의 청중 또한 고려하여야 하며, 본문에서 전개된 원칙들을 그 결과에까지 추적하고, 그 원래의 원칙에 다시 언급된 결과들을 추적해 보아야 한다.
결국, 한 노인이 스위스의 개혁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무스쿨루스(Musculus)에게 말하였듯이, “당신이 훌륭한 설교자가 되길 원하신다면, 훌륭한 성경 연구자가 되려고 노력하십시오.” 성경은 우리의 가장 귀중한 자료들이 들어 있는 무궁무진한 창고이다. 그러므로 우리 설교가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매번 똑같다는 불평은, 우리가 조사를 부지런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설교자의 지혜는 성경을 얼마나 부지런히 그리고 지혜롭게 찾아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라고 어거스틴은 옳게 주장하고 있다.
세실 목사는 심사숙고하는 설교 준비에 대해서 언급한다. “늦게 시작해서 설교를 급히 작성하려하는데,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 사고가 발생하면 그 주제에 대해 온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만일 주말에 다른 할 일이 생기면, 그래서 마음이 한 쪽 구석으로 쏠려 있다면, 대개 설교가 거칠고 소화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거절할 것을 거절하고 해야 할 것만을 함으로써, 시간을 만들라.
목사의 생활은 끝까지 거룩한 묵상과 연구의 삶이 되어야 한다. “읽는 것에 착념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고를 무시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현명한 회중에게 유익한 설교자로 오래 남을 수 없을 것이다. 아주 능력 있는 사람들의 타고난 자원들이라 할지라도 계속 채워야 할 필요가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단지 과거에만 독서의 사람이어서는 아니 된다. 현재에도 여전히 독서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설교는 진부해지고 생각이 메말라 버릴 것이다.”
2) 묵상의 습관
반추하는 습관이 없는 연구와 설교 원고 작성의 결과는 위 속에 들어 있는 소화되지 않은 음식처럼 행동의 능력을 막아 약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묵상이 없는 설교는 ‘잡다한 아이디어들’만을 제공할 뿐이다. 묵상은 지적인 활력에 필수적이다. 이것 없이도, 우리는 외부로부터 온 지식을 획득하고 저장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묵상 없이는 결코 그것을 우리 것으로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또한 우리 자신의 사역의 성향 때문에라도, 이 습관을 배양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설교 준비의 그 어떤 부분도 단지 지적인 작업으로 끝나서는 아니 된다. 묵상의 습관은 영적인 목적을 위한 영적인 대상에 대한 마음의 훈련이어서, 진리에 대한 분명하고 변치 않는 감동을 마음에 고정시켜준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습관을 우리의 공적인 사역을 위한 즉각적인 준비로 제시하신다(겔3:1-2). 이 습관의 배양은 우리의 전반적인 효과와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다(딤전4:15; 딤후2:7). 왜냐하면 그 습관은 “하나님의 사람”을 믿음과 건전한 교리의 말씀으로 양육된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의 인격으로 형성해주기 때문이다(딤전4:6). 왜냐하면 퀘스넬이 말한 바와 같다.
말씀으로 자신을 양육하지 않는 자가 어찌 다른 사람들을 말씀으로 양육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이 자신의 이해력을 계발하고 자신의 상상력을 채우고 자신의 기억력에 더 많은 것을 채우는 것과, 자신의 마음을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만일 말씀을 먹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다.
우리 설교본문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다져져 나오게 하고, 그 다음에 묵상과 기도로 소화되게 하자. 그리고 우리가 가진 자료들에 우리의 수고를 통하여 배열의 명료함과 힘과 영혼을 불어넣자. 이 거룩한 실천은 우리 믿음의 능력과 활동성, 지성과 기쁨을 확장시켜서 풍성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3) 특별 기도
설교 준비에서 이 부분의 중요성은 아무리 깊이 생각해도 부족하다. 많이 공부하고 묵상하고 그리고 조금 기도하는 것은 모든 것을 마비시킨다. 반면에, “기도를 잘하면 잘할수록, 공부도 더 잘할 수 있다.” 묵상하며 연구하는 습관이 가져올 가장 귀중한 결과들도, 기도가 없으면 반드시 결함이 있다. 그것들은 가슴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머리에서 나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갑고 활기가 없으며, 죽어 있다. 설교자의 머리가 좋은 것으로 많이 채워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가슴이 깊이 감동을 받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설교자는 자신의 뜨거운 기도 속에서, 자신의 성도들에게 충분히, 단순하게, 그리고 사랑으로 꺼내 줄 수 있는 자양분을 자신의 주제로부터 도출해내야 한다. 설교 원고 작성의 성공 여부는 주로 자기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달려 있다는 것은 진실이다. 자기 가슴에 감동이 없을 때, 설교자는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설교를 만들 수 없다. 하나님 외에, 아무도 교인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설교자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서재에서 하는 하나님과의 대화는 설교를 준비할 때, 거룩함과 능력의 보증이 될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 재능이나 말솜씨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감수성의 습관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하는 바로 이 일은 그러므로 경건한 심령으로 우리의 설교를 준비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위로부터 우리 성도들에게 나누어줄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우리 메시지는 생명과 흥미가 있어야 적용된다. 인간의 말의 능력으로 할 때에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성과 기쁨이 하나님과 갖는 진정한 교제의 분위기를 나타낼 때, 성도들은 그 메시지를 자신들의 삶에 적용한다.
커튼 메이더는 매 문단의 끝에서 멈추어 기도하고 자기검증을 하며 자기 마음에 그 주제의 거룩한 감동을 고정시키려 했다. 그래서 그가 보통 설교 한 편에 쓴 일곱 시간은 결국 자기 영혼의 경건 생활이요 자기 설교 원고에 활기와 따뜻함과 영성을 불어넣는 가장 효과적인 방편이 되었다. 이 규칙에 의하면, 앞서 우리 자신의 영혼에 복이 되지 아니하였던 설교라면, 우리는 우리의 성도들에게 절대로 그것을 설교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강단에서의 우리 자신의 마음가짐은 우리가 또 따로 간구해야 할 기도 제목이다. 하나님의 말을 하는 것처럼 말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말씀의 문이 열리도록, 우리의 성도들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주시도록, 우리의 마음이 그들의 상태를 사랑의 마음으로 느끼도록, 우리의 설교가 사랑으로부터 나와 그들에게 도달하도록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우리 주님의 영광을 위한 뜨거운 열심이 흘러나오도록, 적합한 형식으로 우리의 설교를 전달하게 도움을 주시도록, 우리는 특별히 기도해야 한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보호해주시도록, 그리고 단순히 하나님의 축복만을 진정으로 의지하도록, 서재에서 그리고 설교를 전달하는 그 순간에도 주께서 우리 마음에 우리의 설교를 선포하시도록, 우리는 간구하여야 한다.
우리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들의 주의가 집중되도록,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열려 우리 설교를 받아들이도록, 선입견이나 무지, 무관심, 세속적인 생각과 불신 등의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해 주시도록, 겸손과 성실함과 거룩함과 믿음의 영이 그들에게 보장되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많은 기도를 드린 후에 설교를 전할 때 주시는 능력같이, 우리 설교에 그런 능력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기도로써 설교에 물을 주지 아니하면, 아무리 좋은 설교라 할지라도 듣지 않는다. 백스터 목사는 말하였다.
만일 그 때 마음이 냉랭하다면, 어떻게 듣는 이들의 마음을 뜨겁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서 특별히 활기를 구하라
기도 속에서 진리에 대한 생각이 환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자기 마음속에 떠오르는 일이 자주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지정된 방편의 사용 안에서만 실현되는 것이므로, 허술하게 준비하는 것을 장려하는 것은 아니다. 기도는, 현재 도움을 받기 위해, 믿음의 행사를 하도록 격려하고, 우리 사역에 더 활기를 불어 넣어주고, 설교 전달 시에 우리 설교의 생생한 내용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게 한다.
또한 우리는 설교 준비를 위한 기도뿐만 아니라, 많은 무리들을 가르치고 나서 그들을 보내시고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셨던 우리 주님처럼(막6:34-46), 설교가 끝난 후의 기도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해산되어 집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우리의 일은 끝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설교에 대해 깊이 관심을 갖기를 원한다. 그 말씀들이 우리의 설교를 들은 성도들에게 얼마나 유익하고 도움이 되어졌는지를 생각해보라.
비록 말씀의 전달 다음에 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기도의 실천은 진실로 설교 준비의 일부분이다. 마음을 기도의 분위기로 유지하라. 그리고 다음 설교의 때에 행동할 준비를 하라.
이제 설교 준비라는 주제를 맺고자 한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아주 정확하게 연구할 때 우리는 그 진리가 주는 거룩한 감동을 받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전할 메시지 속에서 하늘나라의 단맛을 맛볼 때, 우리의 공적 사역은 얼마나 즐거운 일이 되겠는가! 이 즐거움의 힘으로, 우리는 거의 엘리후의 말을 하게 된다. “내 속에는 말이 가득하니 내 영이 나를 압박함이니라 보라 내 배는 봉한 포도주통 같고 터지게 된 새 가죽 부대 같구나 내가 말을 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욥32:18-20). 이것은 연구를 해서 얻을 수 있는 것 그 이상의 무엇이다. 이것은 믿음의 행사이며, 오래 지속되는 뜨거운 기도의 열매로서, 우리 사역에 강력한 에너지를 불어넣어 우리의 말로 많은 사람이 믿게 된다(행14:1). 그러한 설교는 “우리 구주의 피가 뿌려진 것이요 그의 영이 그 속에 숨 쉬고 있는 그런 설교이다.” 그러므로 어느 모로 보나, 설교 준비는 우리 자신과 우리 성도들 양쪽 모두를 위한 위대한 의식이다. 그런 설교는 영광스런 우리 주님을 설교 주제의 중심점으로 끌어안는다. 마치 우리의 성공 전체가 설교 준비에 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설교 준비를 위해 힘써 수고하라. 기도하고, 그분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존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