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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로완 윌리엄스, 국제제자훈련원
1. 십자가의 의미 - 상징
오늘날과는 달리, 기독교가 시작될 때 예배장소에서 십자가를 보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는 마치 전기의자나 단두대 같은 이미지가 큰 그림으로 교회에 걸려있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십자가는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여겼던 막강한 제국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고통과 굴욕, 수치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 변두리나 길가에서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더라도 예배 장소에는 그런 것이 있으면 안된다고 여겼다. 예수께서 소년이었을 때 갈릴리에서 폭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진압한 로마 군인들은 그들을 매단 십자가 수 천 개를 길가에 세워두었다고 한다. 따라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그저 상황이 조금 나빠지는 정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씀이 아니다.
십자가, 달라진 세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자기 세계가 달라졌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새 창조와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사실을 강조하였다. 물론 처음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선생이자 순회 예언자로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이 먼저였으나, 결국 십자가를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상세히 보여주고자 하였다. 당시 주변 세계의 불신자들도 믿는 자들이 십자가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황무지로 유명한 시인 T. S. 엘리엇은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이 성금요일을 좋은 날로 부른다”고 하였다. 이 고통과 죽음의 도구가 어떻게 ‘좋은 것’의 상징이 될 수 있는가? 통상 노예와 반역자를 처형하는데 동원된 방식으로 죽임을 당한 이 일로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차라리 그분이 자기 나라와 믿음을 지키려다가 순교를 했다면 오히려 나았을 것이다. 당시 그들은 율법과 나라를 위해 순교한다면 하나님께서도 그 영혼을 고귀한 제사로 여겨 기뻐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실질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던 종교 지도자들이 이방의 압제자와 한통속이 되었기 때문에 죽으셨다. 전국가적으로 정죄를 받고 거룩하고 경건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거부당한 자의 죽음, 이것을 짊어져야 한다면 도대체 그것은 무엇을 드러내는 상징일까?
하나님 사랑과 자유의 증거 :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고 입증하신다는 구절을 종종 보게 된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특히 그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입증하셨다. 요한은 더 나아가 예수의 죽음을 그분의 ‘영광’이라고까지 말한다. 예수가 죽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밝히 드러났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낸다. 예수님은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12:32)고 말씀하셨다. 그 문맥을 살펴보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듣는 이들이 당혹해 하며 충격을 받았음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드러나게 되었는가? 과연 십자가 처형은 그런 상징이 될 수 있는가? 누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아버지에게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욕을 당하실 때에 보복하시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여기에 폭력에 굴하지 않는 신적인 사랑이 있다. 우리가 최악으로 치달을지라도,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을 말과 사역으로 전하는 자들을 배척하고 죽일지라도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떼어내지 못한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 우리가 줄곧 따랐던 사랑의 주님과 완벽하게 일치하며, 이러한 일관성은 삶과 죽음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을 우리로 외면할 수 없게 한다. 빌라도와 종교 지도자들이 모든 사람을 대표해 예수 안에 계신 하나님을 위험한 경지로 내몰 때에, 그분 안에 계신 하나님은 부드럽지만 의연히 되밀면서 늘 하시던 대로 사랑과 용서와 치유를 베푸셨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초월적인 자유를 드러내는 표지이다. 우리에 대한 그분의 반응(하나님의 사랑의 행동)은 우리가 하는 일에 좌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기 성품에 반하는 행동을 하도록 함정에 빠뜨리거나 속임수를 쓰거나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욕심이나 죄악된 본성을 따라 아무리 그러한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뜻을 따라 사랑과 용서를 베푸신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자유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것이다.
우리의 삶은 감정의 경제학(emotional economics) 같은 것에 지배당하기 일쑤여서 받은 만큼 돌려주고자 한다. 우정에는 우정으로, 폭력에는 폭력으로... 그리하여 보복 행동의 악순환에 말려들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겠다고 하시면 그대로 행하신다. 이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전능하지만 연약한 하나님의 사랑 : 사실 우리가 무기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며 무척이나 잘된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비와 생명을 베푸는 일에만 초점을 맞추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와 실패를 항상 이겨내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가 거듭 깨뜨리는 관계를 회복시키시는데, 이것이 십자가의 표지이자 자유의 표지이다.
기독교 역사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본이 된다‘는 일종의 모범주의 전통이 있다. 예수님은 보복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셨다. 따라서 우리도 그럴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당하신 능욕에 대하여 보복하거나 되갚지 않으셨다. 사도행전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거리낌 없는 용서로 말미암아 제자들의 반응이 달라지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은 죽음을 앞두고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유사한 고백을 하였다.
이처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방식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따라야할 본보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처럼 폭력을 쓰지 않고 앙갚음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예수님의 신적인 사랑을 보이는 표지가 되는 셈이다. 우리는 삶에서 우리의 화해 의지로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 폭력과 앙갚음이라는 악순환에서 자유하신 분‘이심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는 ’우리에게‘, 또한 ’우리를 위한‘ 본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와 같음을 보여주는, 하나님 사랑의 견본(sample)이다. 그 사랑은 자유롭다. 그렇기 때문에 전능하면서도 연약하기 이를 데 없다. 언제나 자유롭게 극복할 수 있으므로 전능하지만, 세속적인 성공을 보장할 수 없기에 연약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힘과 조작, 출세가 작동하는 세속적인 방식과는 다른 질서를 따른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힘없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그런 사랑이다. 오직 자신의 온전함에만 호소할 뿐, 강요하거나 폭력적으로 다루려고 하지 않는 그런 사랑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진면목이 드러나는데, 자기 모습 그대로 존재함으로써 살아있고 살아남으며 승리한다. 비록 그 순간에는 실패와 공포, 죽음을 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사랑이 세상을 바꾸며 땅의 기초를 흔들어 놓는다. 방어력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 즉 의지할 데라고는 자신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전능한 사랑,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언제나 거대하고 강력한 개념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의 강함보다 강하다고 한다. 우리를 위협할 수 없는 그런 사랑이기에 우리를 예수님께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자신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게 될 때 비로소 그 죽음이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을 예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고통이 결합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 한 장면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 둘은 언제나 접촉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퀴나스는 말하기를 ”십자가는 우리에게 사랑을 촉구한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용서를 받는다.“고 하였다. 십자가는 우리 안에 하나님과의 사귐을 만들어낸다. 치욕과 따돌림, 실패의 상징이었던 십자가가 완전히 뒤집어져 독특한 자유의 상징, 곧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계시겠다는 자유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위험성과 연약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나님 용서의 상징 : 만약 십자가가 경이로운 인간 행동의 본보기로만 비친다면, 그리고 자신이 확신하는 바를 위해 당당히 고난받을 각오를 하라거나 비폭력, 비보복 원칙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물론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 고무적이고 도전적일 수 있겠지만 그것이 어떻게 해서 죄용서와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에 대해 성경은 더 많은 것을 알려주고자 하는데,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대속물은 죄수나 노예 등을 그들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지불금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다름 아닌 자신의 목숨을 팔 물건으로 내놓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는데, 이것은 단순히 하나의 본보기일 뿐 아니라 우리 행동이나 인식 이전에 이미 어떤 덫을 벗겨내는 일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우리의 노력이나 생각과 무관하게 어떤 변화를 가져온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획기적으로 바뀔 가능성을 의미하는데,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결정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십자가가 작용하는 방식을 언급할 때마다 우리는 양극단 사이에 놓인 무언가를 말한다. 한쪽에는 뚜렷하고 객관적인 생각으로,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쪽에는 주관적인 생각으로, 우리 각자가 십자가 사건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과 기독교의 전통에서 이 양극단은 서로 만나게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십자가에 대해 숙고하는 방식은 어느 한 쪽을 지향한다. 이상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은 주관적인 측면에 더 가까운 것으로,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뭔가를 느끼고 하나님과 우리 자신 그리고 세상에 관해 우리들이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이 찬송가에서는 ’나의 영혼, 나의 삶, 나의 전부를 요구할 만큼 놀랍고 거룩한 사랑‘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십자가를 노래한다. 물론 십자가가 상징하는 것이 진정으로 인류가 거부할 수 없을 정도이고 또한 온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세상 역사를 살펴볼 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상징으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홀로 절망 속에서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서로 소통하고 삶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상징이다. 예수가 못 박혀 있는 십자가를 접하며 이를 무시하거나 지나칠 수 없었던 사례들은 참으로 많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를 둘러싸고서 지적인 의구심과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쉽게 포기해서는 안된다.
한 프랑스 신학자는 ”예수께서 스스로 상징 체계의 일부가 되셨다“고 말하였다. 그분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하고 전하는 수단이 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펴보았던 것처럼, 십자가라고 하는 실패와 황량함에 나타난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유로 눈길을 돌린다면 여러 가지 다양한 이미지와 개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때 십자가를 자유, 곧 하나님의 자유와 이에 따른 우리의 자유를 표현하는 상징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적어도 신약성경에서 신비와 관련된 몇몇 이미지나 풍성한 비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만한 기반이 닦이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다운받지 않으면 볼 수 없어 요약한 내용을 올렸는데, 문제는 각주가 표시가 되지 않네요. 그래서 한글파일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각주까지 보시려면 한글파일을 다운받아서 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