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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뜻밖의 만남 2
MBC―TV의 “이젠 말할 수 있다” 7
어린 시절 10
28년간의 침묵 12
김방일 그는 누구인가? 17
아버지… 21
철의 삼각지 734고지 김화 전투 23
734 고지의 혈투 감상 29
2426 정보 전대 35
복파공작 훈련장소를 물색하라! 37
실미도의 봄 40
연좌제로 낙심한 안성찬 43
두 번 군대 간 안성찬 46
1부. 실미도 가는 길
꿈속에서 입영통지서를 가지고 서있던 그 사람은 분명 군복을 입은 군인이었다.
각진 얼굴에 우람한 체격을 한 징병관이 누런 종이 한 장을 들고 무어라 중얼거리며 내 앞에 다가와 섰다.
말없이 부동자세를 취하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주시하면서 징병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귀관! 내말이 안 들리나? 귀관은 4월4일 오늘 부로 군에 입대하라” 징병관은 다시 한번 나를 향해 명령 투로 말했다.
아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너무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서있는 내가 오히려 어이가 없게 느꼈던지 징병관은 누런 백노지 한 장을 영수하듯 점선을 잘라 군 입영 통지 확인서를 손에 쥐어주고 돌아선다.
“나도 모른다. 이렇게 영장이 나와 있으니 난 전달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미 내 이름에 붉은 도장까지 찍혀 있는 영장을 받아들고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내가 갈 길은 오직 한 가지 길밖에 없었다.
나는 또다시 18년 전의 모습 그대로 청주 역에서 논산행 입영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 안에서 노란색 계급장이 빛나 보이는 기간병이 입대장정들을 향해 매우 숙련된 언행으로 앉은 좌석에서 행하는 “열중쉬어”와 “차려”의 동작을 설명한다.
“열중쉬어 하면 혀리에 힘을 빼고 가슴을 내리듯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차려하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목에 힘을 줘서 빳빳하게 자세를 취한다. 알았나?”
처음 입영 때나 마찬가지로 3년이라는 숫자만이 뇌리를 반복해서 스치며 지나간다.
긴 기적 음을 울라며 달리는 열차는 쉴 사이 없이 논산을 향해 빠져들고 있 었다.
가위가 눌린 듯 이건 아니라며 두 팔을 허우적 거리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꿈이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
오늘은 난생 처음으로 골프 필드에 나가기로 약속을 한 날이었다.
공군부대 펴블릭 골프 체력 단련장에서 이 공군부대 장기 복무출신 주선으로 친구 두 명과 함께 조인되어 있었다.
처음으로 골프필드에 나가기로 한날이라 어제저녁 꼼꼼히 챙긴 장비와 옷 그리고 기초 골프 책자를 뒤적거렸던 흔적이 방안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골프는 네 명이 한 조가 돼서 쳐야 흥미가 있다하여 소위 말하는 땜 빵 형태로 오늘 부킹을 하게 된 것이다.
새벽 여섯 시. 설레는 가슴을 안고 집에서 15분 거리인 공군부대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잎사귀에선 영롱한 물줄기가 작은 구슬처럼 흘러내리고 돌멩이 사이에도 마르지 않은 물기들이 촉촉하게 젖 어 있어 풋풋한 느낌이 들었다.
첫 번째 홀 티업 장소에는 이미 여러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스트레칭 하는 사람, 골프백을 카트에 매는 사람, 삼삼오오 모여서 조소하는 사람. 그 틈에 친구와 이 공군부대 출신인 듯한 사람이 연습스윙을 하고 있었다.
친구 소개로 오늘 골프를 부킹해준 전직 이 공군부대에 근무했던 분과 인사를 나눴다.
간단한 인사를 악수로 나눈 뒤, 처음 해보는 골프운동이라 조금은 긴장이 되어 한쪽구석으로 가서 스윙을 몇 번 하고 허리를 돌리며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한 개에서 네 개까지, 그것이 첫 홀에서 플레이 하는 순서였다, 3번이 걸렸다.
첫 번째 티샷은 충북 제1의 자동차 공업사를 운영하고 있는 김환기 사장이 다.
내게 매우 성의껏 골프를 가르쳐 주고 안내해 준 자상한 친구다.
나이에 비해 체력이 워낙 좋아 힘이 항우장사 같고 이 친구 역시 공군부대 보안대 출신이다.
두 번째 티샷은 이 공군부대 준위로 퇴역하고 오늘 골프를 부킹해준 김방일 사장이다.
첫 만남이었지만 체격이 건장하고 자상한 듯한 인상이면서도 웬지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스타일 이었다.
큰 망설임이 없이 연습스윙을 한번하고 바로 드라이브 샷을 했다.
나지막이 정중앙 그린으로 날개 짓한 공이 안개 속에 숨었다.
캐디와 동반자 3명 그리고 후발주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첫 샷을 하려는 나는 매우 긴장이 되었다.
잠깐 정신이 멍한 듯 했으나 워낙 성격이 급하고 용단이 빠른 성격 인지라 바로 내려쳤다.
제대로 맞은 듯 느꼈는지, 주워에서는 나이스 샷을 외쳤다.
높이, 그런데 슬라이스가 나면서 오비지역 숲 속으로 숨어버렸다.
다시 한번의 기회(몰 간)가 주어져 더 잘 치려고 긴장을 했다.
이래서 연습장을 밥 먹듯 드나드는구나 생각하니 쉽게 생각한 작은 공의 골프운동이 만만치 않음을 알았다.
네 번째 샷 주자는 국내유수의 금강보험회사 지접장인 정상근이었다.
방위 출신임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외유내강에 걸 맞는 친구다.
골프경력도 5-6년 되고 몸매 좋고 샷 폼이 뭔가 짜임새가 있었다.
스치는 듯한 금속성의 경쾌한 소리가 쪽빛하늘을 하얗게 갈랐다.
푹신폭신한 느낌이 배인 자연융단 카펫 같은 잔디밭을 걸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두 번째 샷을 날릴 무렵 새벽아침이 지워지며 안개가 걷히고 햇살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니 골프장의 초록 잔디밭이 물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묻어났다.
그 속에 서있던 나는 불현듯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 한, 착각에 빠진 듯 했다.
이런 감정이 생겨나고 보니 사람들이 왜 골프를 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무릎관절에 특별한 충격도 없고 과격한 동작이 필요치 않으면서 공기 좋은 곳에서 8-9킬로미터의 거리를 즐겁게 걷는 운동이다 보니 이 골프에 매료되지 않을 수 가 없겠구나 싶었다.
특별한 비즈니스를 위한 골프모임도 아니고 이해 관계없는 편한사람끼리 하는 골프이다 보니 마음의 부담도 없이 매우 편안한 운동이 되었다.
첫날이라 그런지 너 댓 시간이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18홀을 다 마치고 샤워를 하면서 이 멤버대로 자주 회동을 하자며 이 공군부대 출신의 김방일 씨가 제의해왔다.
골프를 치고 나서 발걸음도 경쾌하고 혈액순환도 좋아지니 컨디션이 극도로 향상되었다.
수면제를 먹은 것처럼 밀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잠을 청하려고 TV를 끄려는 순간 MBC ―TV 에서 “이젠 말할 수 있다”라는 프로에 실미도가 방송된다는 자막이 흘렀다.
“실미도 난동 사건이라 !” 언제였던가? 이 사건의 내용을 들은 기억이 있다.
1983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첫 직장으로 제약회사에 잠깐 근무한 적이 있었다.
졸업을 하고도 직장을 구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동료들을 보면서 학생이라는 신분을 벗어나 사회인으로 막 발을 내딛는 그 기분은 아마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합격통지서와 함께. 3개월간의 제품교육 및 디테일교육 그리고 필드교육과정을 마치고 대구지점 병원과에 발령을 받아 동대구역에 도착하였다.
영업팀이라는 부서가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상당히 긴장감을 가지고 근무를 해야 하는 직장이었다.
다음날 첫 출근을 해서 40여명의 직원이 올망졸망 앉아 있는데서 간단한 소개와 함께 업무배치를 받았다.
제약회사지만 병원과 약국을 담당하는 영업부서였기 때문에 아침조회 시간은 언제나 전투적인 자세로 임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실적에 고전하는 사원은 과장에게 끊임없이 쪼임을 당하고 전날 밤 술과 고스톱에 잠을 설쳐 조회 때 졸던 사원은 지점장에게 혼쭐이 나고 있었다.
“야! 너 월급 얼마 받아? 너 받는 월급 값은 해야 할 것 아니야? 여기가 뭐 자선 사업하는 곳 인줄 알아?”
하긴 저렇게 안 생긴 외모에 직원들 쪼는 재미라도 있어야지.
그 후 난 매일아침 그를 볼 때 마다 스스로 위안을 가지며 조회에 임했었다.
그러나 매일 반복되는 무시무시한 공포분위기는 공부만 하던 학생의 신분에서 받아들이기엔 너무 갑작스런 변화였다.
아침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처럼 긴장하며 사무실을 나가는 직원들을 보며 너나 나나 참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듣는 황당한 이야기였기에 마음속으로 참으로 실없고 노가리 푸는 실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씩 웃고 말았다.
그런데 16년이 지난 이즈음에 MBC― TV “이젠 말할 수 있다”는 프로에서 그 선배주임이 들려주던 노가리라고 생각했던 그 이야기가 공식적으로 방영 되는 것이 아닌가?
거짓으로 단정했던 영화 같은 이야기가 실제라면서 이젠 밝혀야 된다며 방송되니 말이다.
그것보다 더한 놀라움은 실제 생존자들의 방송모습에 오늘 골프장에서 같이 운동한 이 공군부대 출신이었다는 김방일 사장이 출연해서 울부짖는 게 아닌가?
다음골프 회동 때는 분명하게 확인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런 우연한 인연이 어디 있단 말인가?
방송에서 울던 김방일 사장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며 인간적인 고뇌가 내 가슴을 짓눌렀다.
뭔가 커다란 호기심과 궁금증들이 일시에 파도처럼 일었다.
어쩐지 예사롭지 않은 눈매와 건장한 체격과 야무진 모습이 클로즈업되었 었다.
TV의 실미도 부대 생존자 증언과 함께 비쳐준 당시의 사진첩에서 김방일 씨의 베레모와 얼룩무늬 제복의 날카롭고 다부진 모습이 매우 사나이다워 보였다.
문득 초등학교 시절 장래희망을 적어 내라면 꼭 특공대원, 특파원, 비밀첩보원으로 써서 담임선생님에게 제출했던 기억이 난다.
어린 나이에 왜 그렇게 위험하고 힘든 특수 요원이 되겠다는 희망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 장래희망은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도 얼마간 유효했던 것 같다.
내가 자랄 때만 해도 요즘과는 달리 게임기나 컴퓨터 놀이기구 등 어린나이에 흥미롭게 즐길만한 놀이기구들이 없던 시절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오면 동네 어귀에 나가 아이들과 딱지치기를 하거나 말 타기 그리고 여자아이들이 하는 공기놀이나 고무줄 놀이에 끼어들어 훼방을 놓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 돈이 조금이라도 있는 날은 유일하게 만화가게에 들러 만화를 보던 것이 유일한 재미였었다.
큼직한 무와 파를 썰어 넣고 퉁퉁 불은 어묵이 대나무 꼬챙이에 꽂혀있던 훈훈한 만화방…….
어묵하나 먹으면서 어묵국물을 서너 컵도 더 떠다 먹느라고 주인 눈치 보기 바빠 어떤 날은 뜨거운 오뎅 국물을 쏟아버려 주인한테 혼나는 일도 많았다.
아마도 그 만화 속 주인공들의 영향으로 나의 꿈은 항상 특수요원이라 말해 왔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니 방과 후 클럽활동시간에 한 부서씩 선택을 하게 되어 있어서 나는 망설일 것 없이 태권도부에 입회했다.
또한 이 소룡의 영화는 나의 무도지침서가 되어 새로운 발차기 형태가 나오면 산에 올라가 무수히 연습을 했다.
지금도 그 시절에 대한 회상으로 쌍절곤을 가끔 휘두르곤 한다.
대학에 진학하여 그런 특수요원의 꿈도 접고 다른 길로 갔지만 사나이라면 어릴 때 누구나 한번쯤은 특수요원이 되고픈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탓으로 요즘 젊은이들의 해병대 지원율이 매우 높아져 있다고 들었다.
그런 특수요원의 모습이 바로 김방일 씨에게 있었던 것이다.
몇 개월 전 예약 해둔 일본 벳부 행 여행 수케줄로 집사람 그리고 딸아이와 함께 인천영종도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휴가철이라 밀리는 여행객들 속에서 어렵사리 여행수속을 마치고 일본 오이타행 비행기에 탑승을 했다.
기내에는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 여행객과 벳부행 여행길에 오른 한국인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같은 동양인이라 그런지 얼핏 보기에 키도 작고 피부도 닮아있어 말하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잠깐 동안 승무원의 좌석 체크와 주의사항을 돋고 나니 바람을 일으키는 굉 음 소리와 함께 드디어 비행기는 이륙하기 시작했다.
아주 짧은 순간에 이륙하기 시작한 것 같은데 벌써 비행기 창문으로 보이는 물체들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내심 영종도에서 가까이 접해있다는 실미도를 눈여겨 바라보았다.
영종도 서쪽 편에 용의도가 누워있고 그 남쪽으로 무의도가 자리해 있다.
그 무의도 북쪽 편으로 약 300미터 떨어져 있는 작은 섬,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위치에 자리한 아주 예쁜 섬이 실미도였다.
저곳이 28년 동안 묻혀 있어야 될 사건의 진원지였단 말인가?
얼핏 스쳐가며 보이는 무의도는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사이로 그렇게 실미도를 끌어안고 있었다.
같이 골프를 첬고 방송에서 본 사람이 내 주변에 있는 실존인물이란 생각을 해서인지 비행기가 영종도를 벗어나면서도 내 머리 속엔 온통 실미도 생각뿐이었다.
3박4일간의 여행일정을 마치고 청주로 돌아와 일상에 다시 젖어든 토요일 오후 휴대폰소리가 울렸다.
“오전 12시 티업이니, 11시30분까지 부대 체력 단련 장으로 와라”
김환기 사장과 약속을 하고 나니 내심 내일이 기다려졌다.
퇴근 후 야산으로 그레이하운드 영롱이를 훈련시키러 나왔다.
그레이하운드는 경마처럼 경주를 할 수 있는 경주견이다.
진도개나 일반 개들과는 달리 다리가 길고 행동이 아주 민첩해서 외국에서는 벌써부터 경마처럼 경견이 법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영롱이는 조그마한 반 평 공간의 견사에 갇혀 있다가 넓은 야산으로 나오니 무섭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갇혀 있던 동안의 스트레스를 달리면서 풀 요량인지 앞만 보고 달렸다.
어쩌면 사육 당해온 억눌림에 대한 원망의 질주일지도 모른다.
속도를 재어보니 시속 약 55킬로미터 정도의 속력이었다.
시원스럽게 달리는 영롱이의 모습을 보며 문득 실미도 북파공작원들의 질주 모습을 보는 듯 했다.
여섯시가 넘어선 시간이지만 아직도 오후의 햇살은 서쪽 하늘에 걸려 햇살을 골고루 뿌려주고 있었다:
마침 야산 옆으로 골프연습장이 눈에 띄어 내일 필드예약도 되어있고 해서 한 박스 정도 칠 요량으로 연습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제일구석에 한자리가 비어있어 골프클럽을 내려놓고 간단히 몸을 풀었다.
제일먼저 피칭, 9번, 7번, 5번 아이언 연습을 하고 마지막으로 5번 스픈, 3번 우드와 드라이버 연습을 했다.
지난번 처음으로 필드에 나가서 망신을 당했으니 내일은 오비만이라드 줄여보자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다행히 골프장이 멀지도 않고 비싼 그린피도 아니어서 골프를 배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번 골푸 플레이를 경험해서 인지 첫날처럼 그렇게 떨리지는 않았다.
1번 홀에서 드라이버가 잘 맞진 않았지만 오비 없이 잔디중앙에 잘 떨어졌다.
온 그린은 포대그린이라는 이 골프장의 특성상 어프로치가 많은 난조를 보였다.
퍼브릭 나인 홀 골프장은 9홀을 돌고 또 한번 같은 홀을 돌아서 18홀을 마치는 시스템이다.
마지막 홀에서 그린중앙에 위치한 10미터 높이의 미루나무 두 그루가 2미터 간격으로 서 있는 장애물이 있었다.
1번 드라이버를 치기 전 김환기 사장에게 내기를 걸었다.
친한 친구 사이지만 우린 만나면 아직도 동심으로 돌아가 누가 더 체력이 강한가, 아니면 정확한가? 내기를 곧잘 하곤 했다.
골프공이 저 미루나무 사이를 통과하면 세 사람이 술을 사기로 했다.
마치 성난 매 떼들이 먹이를 채어 가지고 휘돌아 날듯이…
순간 미루나무 우측 쪽으로 휘면서 날아가던 까치의 날개에 흰공이 스쳤다.
서로 농담을 주고받던 중 백발백중이라는 말에 며칠 전 MBC―TV 방송에서 뵨 “실미도” 사건이 생각났다.
오늘 김방일 씨를 만나면서도 계속 마음속에는 방송에서 울부짖던 모습으로 꽉 차 있었는데 막상 방송에 나온 것을 봤다고 말을 하기가 참 어려웠다.
“아참! 형님, MBC―TV에서 봤습니다. MBC―TV ‘이젠 말할 수 있다’ 에 출연하신 분이 형님 맞죠?”
형님은 그저 긍정도 부정도 아닌 표정으로 녹색의 잎사귀들이 수런거리는 나무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호기심에 이것저것 묻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도저히 그 상황에서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요즈음 군대 생활한 평범한 스토리들도 아니고 해서 다음기회에 물어보기로 하고 골프를 마쳤다.
마침 내일이 일요일이고 해서 여유로운 마음으로 골프장을 빠져나와 군산 복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술을 잘 못하는 나 역시 적당한 운동에 기분 좋게 알코올이 들어가니 취기가 올랐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술기운을 빌미로 김방일 사장에게 슬쩍 실미도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낮에만 해도 전혀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던 김방일 사장도 술기운이 어느 정도 오르니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풀었다.
684군부대는 1968년 4월에 부대가 창설되었다 하여 1.21사태 때 남파된 124군부대에 대칭으로 684군부대로 명하였다 한다.
처음으로 어렵게 입을 열었고 많은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만화나 영화에서 제작될 법한 줄거리가 사실임이 확증된 셈이다.
2차로 호프집에서 맥주로 입가심을 하면서도 실미도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호기심이 많아 끝까지 이 실미도 이야기를 파헤치려는 듯한 적극적인 자세에 김방일 사장은 진지한 모습으로 대해주었다.
그는 1945년 3월 13일 해방되기 5개월 전에 충북 충주시 교현동에서 쌀집을 하던 평범한 가정의 4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로 그의 집도 유독 장남에게만 쏟아지는 부모님들의 애정에 차남인 그는 항상 형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서성거려야 했다.
형 때문에 중학교에 입학할 형편이 안 되자 낮에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구두를 닦고 야간에는 청신학교에서 야학으로 중학교 과정을 수업하게 된다.
한번은 새벽에 모충동의 주택가에 신문을 돌리고 나오는데 도둑과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또한 깊은 겨울 어느 날 눈이 내려 새벽 골목길은 미끄러지기 안성맞춤이 었다.
김방일 학생은 신문을 움켜쥔 채로 내동댕이쳐지면서 고꾸라져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다리 깁스를 하고 누워있는 바람에 형님의 결혼식에도 참석을 못했다.
오직 공부를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그렇게 힘든 생활을 했지만 이때 체력이 증진되고 강해지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후 그는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야구의 명문 세광고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태권도 2단을 획득하고 옛 청주경찰서 체육관인 상무관에서 또 유도초단에 입단한 뒤 학생간부 대대장 역할을 맡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남달리 뛰어난 리더십과 교우관계등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고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가정 형편이 풀리지 않아 대학진학을 포기하였으나 공부에 대한 열정만은 식지 않았다.
단지 공부를 시켜준다는 말에 매료되어 지원한 군대가 어릴 때부터 파란만장한 고난을 겪고 살아온 그에게 꿈에도 생각 못할 정신적 희생양이 되는 길을 걷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1965년 7월 1일 대전 대덕구에 위치한 공군 교육사령부에 공군하사관 27기로 입대하여 정보특기를 부여받게 된다.
2개월간 공군 기초 훈련을 받고 하사관으로 임관을 하게 된다.
임관 후 오류동 2426 전대에 배속, 정보지원대에서 공군생활이 시작된다.˙
그러던 어느 날 상관으로부터 낙하산 교육명령이 하달된다.
그리고 그것이 곧 실미도의 역사에 한 주인공으로 획을 긋게 되는 전초전이 될 줄을 그는 몰랐다.
공군이라면 위험부담이 없는 군인으로 생각했는데 낙하산 교육이라니… 하지만 남자라면 누구나 해보고 싶은 훈련이 아니겠는가?
1966년 4월부터 두 달간 자체 교육대에서 서울 한강 상공에서 한강 모래사장으로 낙하하는 훈련을 감행하게 된다.
낙하산은 항공기에 끌 끈을 걸어 자동적으로 작용하게 하는 자동식과 낙하 후에 손으로 끌 끈을 당기는 수동식이 있다.
이러한 낙하산을 바람에 이기기 위해서는 끌어당기는 근력을 키워야 된다.
낙하산이 땅에 착지 될 때 바람이 불면 그 끌려가는 속도가 빨라 매우 위험해진다.
바람이 심하면 논두렁이나 둑에 부딪혀 목뼈가 부러지는 사고도 종종 일어난다.
또한 오키나와 미군기지 정보 교육, 필리핀 정글 생환교육도 마치게 되었다.
끊임 없는 교육훈련과 창설요원으로 숨 가쁜 군 생활이 이어지던 어느 날 상관으로부터 심각하고 침통한 명령이 그에게 하달된다.
세상을 떠들썩 하게 했던 684군 주석궁 폭파부대 교관으로 파견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목적달성이 이루어지면 장교진급을 약속 받고 1968년 7월1일 실미도 109파견대로 배속받아 684군 주석궁 폭파부대가 자리한 실미도로 향했다.
하인천 부두에서 공작선을 타고 저녁 노을이 붉게 타오르는 듯한 바닷가 끝자락 실미도로…
실미도의 목적은 과연 이루어질 것인가? 되뇌이고 또 되뇌이면서 악몽 같은 그 처참한 상황이 연출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그는 아름다운 무인도 실미도를 맞이한다.
1968년 1월 21일 북에서 급파된 무장공비 31명 의 청와대습격사건이 일어난 지 3 개월 후 향토예비군이 창설되고 고등학교와 대학에 교련이 신설되었다.
이때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 집안은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아버지는 1927년 충북 괴산 장연 생으로 일제식 민지시대에 청주사범학교를 19세에 졸업하고 장연초등학교 교사로 초임 발령을 받아 재직 중 한국전쟁을 맞게 된다.
경찰가족 및 공무원 교사 가족은 북한군들의 표적으로 인민재판의 대상이 된다하여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던 어머니와 남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조령과 문경새재를 넘어 피난민들의 끝없는 행렬이 남으로 이어졌다.
아버지는 피난 중에도 지고 가던 곡식을 나누어 주는 등 다른 피난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다.
대구 영천 땅에 도착하여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예천 농고생 120명이 학도 의용군 입대를 자청하는 모습을 보고 운명이 바뀌는 일이 벌어진다.
아버지는 타지에서 생사를 예상키 어려운 전시입대로 그때 막 신혼이었던 어머니와 피난길에 생 이별을 하게 된다.
소위 총알받이라는 최전방의 소대장으로 편성되어 북진을 감행하였으나,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에서 지금의 휴전선 부근, 철의 삼각지 김화 김일성고지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철의 3각지를 회상시킨다. 본 고지는 해발 734미터이며 원시림의 울창한 초목이 무성하였고 ‘집 바위’ 라는 암석이 중앙에 솟아있다.
일명 ‘김일성고지’ 라고 적으로 하여금 지칭되었으며 적 수뇌의 이름으로 불릴 만큼 군사적으로나 전술상 중요하였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즉 734고지는 피아간의 보급로를 등진 지점으로 더욱 가치가 컸고 북쪽에서는 3.8선 이북 지역을 빼앗길 수 없어 안간힘을 썼다.
신문지상이나 군보도집 발표에 의하면 734고지는 733고지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1개월간 주인공이 주야로 바뀌어 피아의 육골로 산의 표면을 이루었다.
지상 1m가 피아의 포탄으로 말미암아 초토화 되었고 일목일초도 없이 커다란 암석까지도 송두리째 사라졌으며 전투의 치열함은 이로써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면 왜 적은 말할 것도 없고 아군도 출혈을 하였는가? 적은 보급로를 사수하여야 했고 아군은 본 고지를 확보함으로써 진격이 용이하였기 때문이었다.
때는 4284(1951)년 8월 24일 황혼이 짙어질 무렵이었다.
중대장 유범수 대위는 엄숙한 어조로 “우리중대의 임무는 드디어 결정되었다. 황 소위 부탁하네”하며 명령을 내렸다.
어젯밤엔 없던 박격 야포탄이 집중적으로 폭격되고 남침의 유리한 지점을 획득하고자 야간공격은 언제나 그칠 줄 몰랐다.
중대장은 중대사기를 앙양시키기 위하여 서울에서 양주와 하계과실을 출하 받아 산중달밤에 일대회식을 베풀어줬다.
비록 산중 숲 속이고 여성(기생)없는 향연이었지만 노래와 춤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것이 마지막이 될 줄 알았지만 역시 오락 군기를 최고도로 발휘하였다.
술을 마시니 세상이 돌고 만고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없던 용기도 났다.
모든 고민을 깨끗이 털어버리고 하루살이 목숨을 재촉하니 25일 새벽이 밝아왔다.
먼동이 트기 전, 조식을 마치고 734고지에 배치됐던 우군과 교대하게 되 었다.
나는 적과 가장 가까운 630곤지에 주저항선을 구축하였고 600고지 방면으로 약 50미터 전초를 담당해 적과 60미터이내의 거리에 접하여 있게 되었다.
하오 3시를 기하여 완전히 교대가 끝나고 7시쯤에 석식이 도착되었다. 동고지엔 적의 시찰소가 특파된 탓으로 집중포탄은 주진지에 연속해서 떨어졌다.
머리는 도저히 들지 못하고 교통호 없이는 다니질 못한다.
그때에 7중대에서 군기 위반자 6명이 왔다. 대대장은 수류탄을 2발씩 분배시켜서 전초지대에 배치하려하니 정말 가엾은 난사였다.
나는 젊은이들을 동일한 입장으로 알고 우리소대의 1분대와함께 인솔하여 전초를 담당하고 있었다.
소대장에게 보고하는 경계요원의 떨리고 격분에 찬 목소리에 응답하니 전초 30미터 전방에 적 1개 분대공격 중이라 한다.
밥이 무슨 소용이랴! 우리는 수류탄을 일인당 2발을 던지니 중국군 1개 분대가 전멸하였다.
적 출현을 상부에 보고 하려하니 유선은 적 포탄에 의해 끊어졌고 예비선도 끊어졌다.
전면에 일개 소대가량 인해 전술을 쓰고 있었다. 우리의 용사들은 자기가 투척한 수류탄에 부상을 입고도 자신의 고통을 잊고 항전하고 있었다.
포탄에 연기는 으숙한 달밤에 마치 안개처럼 형성 되고 소총은 자동이 되지 않으니 정말로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적의 지원포는 155미리, 105미리, 82미리, 50미리, 수류탄 등 총집중사격 이 었으니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 었다.
그러나 자기의 초소 내에는 한명의 오랑캐도 들어오지 않게 한다는 각오로 안개 속에 샛별 같은 눈동자만을 번뜩였다.
소리를 쳐도 들리지 않고 수신호와 흉내를 내야만 의사소통과 명령을 하달할 수 있었다.
거뭇거뭇한 적의 사체, 소대원의 항전, 어느덧 조용하니 적 선발대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무기도 없이 괭가리만 들고 물밀 듯이 밀어 닥치는 중공군은 성난 파도와 같았다.
적의 체코제 자동화기는 벌써 우리 교통호까지 들어왔다.
저 용감하고 가장 진실하였던 이명용 소대원의 두부가 관통되니 적진으로 머리를 두고 “나의 원수”들 하며 한마디 부르짖으며 쓰러지니 그 누가 격분의 눈물을 훔치지 아니할까?
주 저항선에 도착하여보니 소대원은 간 곳 없고 소대방어선이 포탄에 날아가고 화기소대에서 지원된 경화기의 다리만이 남아있었다.
한참 후 흙 속에 파묻혀있는 병사들이 머리를 들고 나오기 시작하였다.
소대 선임하사는 소대원의 사기를 앙양시키기 위하여 일신을 돌보지 않고 “우리는 살아서 적의 포로가 되지 말고 차라리.죽어서 이 나라의 방파정이 되자” 하고 외쳤다.
“용감무쌍한 제2소대원이여! 우리의 실력을 발휘 할 때는 바로 이때다. 노도부대의 전훈을 생각하라!” 하면서 열광적으루 사투를 벌였다.
나의 임무는 공산군을 격멸하고 세계 각국이 공인한 우리민족의 단하나인 나라 대한민국을 방어함에 있다.
나는 전투 간 다음 다섯 가지 조항을 반드시 지키며 이 조항에 위반할 시는 국군의 명예와 국가가 기대 한 바에 어그러짐을 사죄하기 위하여 엄한 처벌을 받겠다.
1. 나는 전투 간 자세를 낮추고 위장을 하고 호를 파서 쓸데없는 손해를 피하겠다.
2. 나는 전투 간 명령대로 전진하며 후퇴하는 전우와 부하를 보았을 때는 참다운 애국심과 전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자는 총살하겠다.
3. 나는 전투 간 총기를 직극히 사랑하고 탄약을 아끼며 적을 유효 사거리 내에서 찾아내지 못하면 절대로 사격을 하지 않겠다.
4. 나는 전투 간 경계심을 왕성히 높이고 수색을 철저히 하여 적의 기습으로 손해를 피하는 동시에 적의 사정을 확실히 파악 보고하여 상사의 전투 지도를 쉽게 하겠다.
5. 나는 전투 간 부모형제와 국민이 기대하는 바를 명심하고 만일 적의 포로가 되면 포로라는 더러운 이름을 자손만대에 남기지 않을 것을 굳게 맹세하겠다.
요컨데 나는 자손만대에 길이길이 발전하는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는 국군의 일원으로 편입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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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포탄투하로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적은 주저항선에 파도와 같이 몰려왔다.
전사자가 생긴 곳이 뚫리니 그쪽으로 적이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차후의 승리를 위하고 고결한 생명과 각 가정의 소중한 자식임을 자각하고 내가 전사케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정말 괴로웠다.
나는 결심하였다 100미터 만 철수시키고 다시 호기를 노리는 것이 나을 듯싶어 철수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일제히 눈물을 머금고 철수하였다.
차제에는 일보도 양보가 없을 것이고 적에게 큰 타격을 줄 수가 있었다.
유 중대장은 새벽 3시를 기하여 남은 인원으로 재공격을 개시하라고 명령한다.
나는 가차없이 수락하였다. 새벽3시를 기하여 공격을 시작하였다.
나는 우리의 피해와 행동을 적으로부터 교란시키기 위하역 3명의 특공대를 조직하였다. 박광모, 엄시봉, 이병문이였다.
적과 50미터시이로 근접하였을 때였다. 또 일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3명의 특공대는 30미터까지 근접했다. 적은 방망이수류탄으로 지뢰를 장치하였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박광모 대원은 측방으로 우회하여 갔고 3명의 대원이 동시에 수류탄을 던졌다
우리는 엄호사격을 했다. 잠시 후 3명의 특공대원은 진지에서 만세를 부른다.
적은 전부 도주하였다: 우리는 역습을 하기 위하여 적의 방망이 수류탄을 수집하였다.
시각은 새벽 4시였다, 원한에 사무치는 고지는 탈환하였으나 우리의 고귀한 희생자는 어찌하오리까?
최전방 위치의 분대원은 전원 전사하였다. 약 15명에 달하는 전우가 부상 또는 전사하였다.
그는 경북구미출신으로 중학교(현 고고)를 졸업했고 두뇌가 좋았으며 복종심 이 강하였고 괴뢰군에 대한 적개심이 특히 강하였다.
당시 소대장은 분대의 후미로 철수할 것을 명하였으나 계중사가 철수하려 할 때는 전부 중공군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계 중사는 자살용으로 수류탄을 일발 소지하고 불타는 적개심으로 적 중대장과 1인 육박전을 노렸으니 아니 죽고 어이 하리까?
계 중사는 그놈을 끼어 않고 같이 죽었으니 25세를 일기로 국군에 빛나는 공적과 노도부대의 명성을 떨치고 대한민국전사에 일획을 그었으며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이것은 육군화보에 게재된 것이고 대구 부산극장에서는 계 중사의 공적을 기리는 선전이 있었다.
나는 당시 제1육군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으니 침대 위에서 눈물로 영혼의 안위를 빌었다.
아! 장하다 계 충근 이름그대로 충성의 근원이 되었도다.
나의 부하와 나는 생명을 아끼지 않았고 이 만큼 싸웠다면 군인으로서 할 바는 다 하였다고 본다.
또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가장 확실한 일을 하였다고 본다.
나도 죽었으면, 가신 전우들과 같이 생사를 같이 할 것이나, 중상이나마 산 것이 한없이 죄스럽고 유가족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미안함이 계속 나를 울린다.
나는 앞서간 전우들의 마지막 외침을 잠시라도 잊을 수가 없다. 평화가 오는 날 호국지신인 전우들은 나를 원망하지나 않을까?
아버지는 대구 통합병원에서 2번의 수술로 생명을 건졌으나 생사를 같이하던 존우루들을 뒤로 하고 명예제대를 하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고 반 토막 난 조국을 탄식하며 초등학교 교사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하복부 관통상으로 아기를 가질 수 없는 게 아닌가 싶어 할머니는 고향집 맞은편 칠봉 산(일곱 개의 봉으로 이루어짐)산신령에게 빌고 또 빌었다.
그런 할머니의 정성 때문이지 어머니는 아들을 출생하게 된다.
이때 아버지는 고등학교 교련교사 임용지침이 발표되자 응시하여 충북도 교련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하여 지금의 청주고교에 재직을 하게 된다.
땔감과 식량윅 부족으로 고급 책상을 부수어 땔감으로 사용하고 고구마나 감 하로 끼니를 연명할 때였는데 그렇게 힘겹게 살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 기쁜 소식이 날아든다.
앞서 말하였던 1.21사태 여파로 향토예비군이 창설되고 고교에 교련과목이 신졀되면서 충북도내에서는 교련과목신설 시범 학교가 된 청주고교에 복직 명 령을 받게 된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쌀밥을 먹게 되었고 소풍 때에 김밥을 싸가지고 갈수 있었다.
그로부터 아버지는 평생을 늘 말해오던 조국과 민족을 위해 그리고 소위 말하는 반공교육에 여생을 바치게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5년이 지났지만 이제야 아버지의 긴 불면의 밤들과 고통의 시간들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아버님의 생전의 삶도 김방일교관의 생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어 더욱 애착이 가는 것 같다.
김방일 소대장은 2426 정보전대로 전출되면서 교관으로서의 자질향상이 배 가된다.
24전대는 첩보를 담당하고 26전대는 공작을 담당한다.
‘관물 백’을 둘러메고 위병소에서 내무반까지 2킬로미터의 거리를 오리 걸음으로 가야했고
오리걸음 도중에는 공군가를 수도 없이 반복해서 불렀다.
그것도 중간 중간에 선착순으로 끊어서 다시 되돌아 위병소까치 관물 백을 메고 뛰어 갔다와야했다.
이러기를 수십 번 반복하다 보니 기진맥진 하게 되고 시간은 한나절도 더 걸려 내무반 앞에 도착한다.
한여름의 용광로 같은 불빛아래 땀이 범벅이 되고 오기가 난다.
생각 같아선 얼음을 잔뜩 넣은 시원한 물이라도 마시면 좋으련만 뜨거운 보리차를 한 컵씩 줘서 목을 축이게 한 뒤 고향집 쪽을 향해 서게 한 뒤 어머님 은혜를 부르게 한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거의 울먹이며 노래를 부른다. 그것도 악을 쓰며 큰소리로…
이어서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라는 고향노래를 부르게 하면 열이면 열 모두가 한없이 운다.
나가 봐야 또 꼬투리 잡혀 기합 받고 군기 잡힐 것이 뻔하기 때문에 배가 고파도 내무반에 가만히 있는 게 낫다 싶다.
그러다가 두 끼씩이나 굶고 나니 하늘이 노래져서 식판을 들고 하나 둘 식당으로 나서니 그날 메뉴는 특식이었다.
오류동 2426전대 부지는 가운데로 신작로 길이 나있고 그 길을 중심으로 한쪽은 24정보대이고 또 한쪽은 26공작대이다,
그 가운데 경계에는 군견 세퍼트를 사육 훈련시키고 있었는데 고참들은 짬 밥을 군견 짬 밥과 바꾸어 먹을 정도로 세퍼트 짬 밥이 더 좋았다.
그리고 2426전대에 배속된 공군 군기단속병은 전군에서 가장 불행한 사병 이었다.
2426전대는 모두 특수요원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사병들이 보이기만하면 두들겨 패고 기합을 줘서 사병 바가지가 땅바닥에 날이면 날마다 패당거 리 쳐졌다.
그러니 이 부대로 배치되는 그 순간 가장 불행한 사병이 되었고 하루빨리 제대하고 싶을 뿐이었다.
훈련과정 으로 고참들이 돼지서리, 복숭아 서리를 시켰다.
소사 부근은 복숭아의 원산지였기에 복숭아 과수원이 널려있었다.
이 부대 간부들은 거의가 6.25 역전의 용사들로 구성 되어있다.
켈로부대 구월산 출신들로 공작 작전에 달인들만 있었다.
1.21사태의 여파로 전국적으로 반공 궐기대회가 쉴 사이 없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향토 예비군 발대식이 각 지역 공설운동장에서 일제히 거행되었다.
인천 공군 정보부대 파견대 선박 대장으로 근무하던 김방일 소대장의 특수훈련 교관이었던 김창훈 씨가 정보기관 공작 과장의 전화를 받았다.
3월 15일 오전 10시 하인천 선박 관리대에 도착 하겠는 전화였다.
공작선을 정비하여 대기 시켜 놓고 출동준비를 갖추어 놓으라는 명령이었다.
오전 9시 30분경 중정 공작 과장과 조정관이 도착하고 김창훈 선박대장에게 동승을 요청하였다.
선장이 시동을 걸고 군사지도와 소련제 쌍안경을 지참하고 PCB공작선에 올랐다.
“684 주석궁 폭파부대 훈련 장소를 물색해야 된다.”
가장먼저 북쪽으로 위치한 대 연평도와 소 연평도 그리고 우도는 제외되었다.
사격과 폭파 훈련을 하게 되면 북한 측과 신경전이 일어날 것 같아 조건이 맞지 않았다.
인천에서 남쪽으로 위치한 덕적도, 자윌도, 영흥도, 대초지도, 소초지도를 모두 둘러봤으나 유격장소가 마땅치 않았고 어민들이 많이 상주해 있어 적합하지 않았다.
다시 북쪽으로 더 올라와 영종도와 용유도, 잠진도를 둘러 보았다.
북쪽으로 돌아서보니 기암절벽이 어우러져 있고 그 옆으로 자그마한 해수욕장이 인천 쪽을 등지고 자리해 있었다.
그 위쪽에 내무반을 앉히고 바다가 갈라지는 시간을 이용해 무의도 산악에서 산악 훈련을 한다면 안성맞춤 일 것 같았다.
곧 바로 공작선을 정박해두고 이 자그마한 무인도 섬에 올랐다.
하루 낮 중 6시간 정도 바닷길이 열리면 무의도를 왕래 할 수 있다.
무의도와 실미도 사이는 약 300M 폭의 울돌목 형태로 밀물과 썰물의 간만의 차로 무의도 주민 한사람이 창 그물을 이용해 조상대대로 어획을 하고 있었다.
해발 234M의 호룡곡 산과 아래쪽 국사봉 그리고 당산을 넘어가면 무의 1리 우측으로 산등성이를 감아 돌아가면 무의 2리가 자리 잡고 있다.
또 그만큼 등성이를 돌아보면 남쪽을 향해 조그마한 어항을 이루고 있는 무의 3리가 있다.
어항 좌측 앞 쪽에는 샘꾸미 섬이 있고 우측에는 수줍은 듯이 놓여 있는 처녀섬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무의 1리는 어업을, 무의 2리는 농업을, 무의 3리는 농업과 어업이 어우러져 있는 것이 눈에도 확연히 드러나 보인다.
무의 2리에는 아주 작은 무의분교와 보건소, 행정출장소, 파출소, 농협분소 등 관청이 있었다.
이쯤에 내무반 역할과 을돌목 현상으로 조류의 물살이 세기 때문에 탈출이 용이하지 않아 경계경비근무에도 만점인이 실미도로 결정하자고 의견이 일치했다.
실미도를 점찍어 놓고 나서 중정 공작 과장과 조정관과 김창훈 선박대장이 곧바로 식수를 찾아야한다고 생각했다.
김창훈 선박대장은 무의 2리 이장 집에 들러 식수에 관한 조언을 듣고 실미도에는 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면에서 적격지인 이 섬에 단한가지 샘물을 판다 하여도 짠물이 나온다니 절망스러웠다.
훈련장소로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나 사람이 기거하려면 당장 물이 있어야 하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참을 헤매고 돌아다니며 실미도를 오르내리는데 아주 미세한 계곡 중간쯤에 물기가 젖어 있어 혹시나 하고 야전삽으로 파보니 물이 고였다.
고인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물맛을 보니 짠맛이 아니었다.
이곳을 식수 샘으로 정하기로 하고 커다란 돌멩이 대 여섯 개로 표시해 두었다.
북파공작원 훈련장소로 결정을 하고 공작선에 올라 물끄러미 섬 전체를 보니 참으로 기가 막히게 예쁘고 아름다운 섬이라는 것을 느꼈다.
좌측에는 유격훈련장 모래사장, 중간에는 내무반과 연병장, 우측으로는 사격장, 산 너머 모래사장 숲 속으로는 폭파 장소로 최적이었다.
그리고 바닷길이 열리면 무의도 호룡곡산을 산악훈련과 독도법, 생활훈련장을 만든다면 최고의 공작 훈련장소가 아닐까 싶었다.
저만큼 뒤뚱거리며 몰려오는 석양이 실미도를 한 폭의 그림 처럼 아름답게 감싸고 있었다.
이른 새벽부터 내리던 비는 인천앞바다의 봄을 재촉했다.
억세게 몰아치던 바닷바람이 어느새 봄기운을 동반하고 휘몰아치는 1968년 4월 4일 새벽 M60군 트럭의 엔진소리가 굉음을 울리며 하인천 부둣가에 다다른다.
헤드라이트 불에 칠흑 같은 밤바다가 잠을 깨고 대원들이 속속 차에서 하차 대열을 정비한다.
부둣가 공터에 684특공부대 북파공작원의 훈련을 담당할 교육대장과 특수공작교육이수자인 소대장 4인, 통신병 그리고 경비병 등 총31명의 기간부대원이 집결했다.
1개월 전부터 기간요원들은 실미도에 이동시킬 모든 장비와 화기 등에 새겨진 공군마크며 부대번호를 지우느라 갖은 고생을 했다.
간단한 인원 보고가 있고, 이어서 그레이마린 공작선에 싣고 갈 장비 등을 싣기 시작했다. 소총 수류탄 탄약 TNT 군량미 부식 연료 침구 천막 등 전쟁 물자를 모두 배에 실었다.
이때 기간병 1명이 수류탄 한 상자를 메고 옮기던 중 실수로 바다에 빠뜨렸다.
그냥 바라보기만 하고 서로의 눈치만 볼뿐 전 대원 모두가 묵묵부답이었다.
얼마 후 선적이 끝나고 모든 대원들이 선실로 입실하자 공작선은 하인천을 뒤로하고 밤바다 항해를 시작했다.
별 하나 없이 까만 밤하늘에서 내려 쏟는 밤비가 애꿎은 갑판 위를 마구 때려댔다.
적막하기 그지없는 밤바다에 그레이마린 공작선 엔진소리만이 적막을 뚫고 퍼져나갔다.
무엇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두들 만감이 교차하는 듯 말이 없었다.
실미도 이동 작전이 곧 북파 공작 작전을 방불케 했다.
북파공작원 교육을 담당할 기간원들이 미리 실미도 북파 공작 작전을 예행하는 것 같았다.
목적지는 보이지 않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를 헤쳐 나가니 말이다.
파카를 뒤집어쓰고 눈을 부친 대원, 갑판에서서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간부들, 군 생활 파견 중 가장 힘든 파견생활이 될 것 같았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자 실미도의 형체가 조심스럽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라 그런지 실미도 섬의 봄은 산수유 꽃, 매화, 진달래, 벚꽃 등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자연 그대로의 아름답고 고요한 섬이었다.
남쪽으로부터 훈풍을 달고 날아온 봄기운이 이곳 실미도에도 예외 없이 불어와 봄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무의도로부터 썰뮬이 열리면 갯벌로 연결되는 예쁜 무인도와 실미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었다.
날이 밝아오자 배에 싣고 온 모든 장비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 편성을 하여 1조는 텐트를 세우고 밥을 지었고 2조는 식수를 찾아 나섰다.
건너 무의도에는 샘물을 파면 짠물이 나온다 하여 식수를 찾는 일이 매우 난감했다.
이곳저곳 다섯 군데를 팍다가 마지막 시작하여 한곳에 물기가 젖어있어 T NT로 바위를 폭파시키고 2미터 가량 야전삽으로 파내려가니 제법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짠물이 아니었다. 기간 병들이 흘린 구슬 땀 만큼이나 반비례해서 달고 맛있는 물이었다.
자갈을 깔고 클로르 포름으로 소독한 후 지붕을 씌워 마을공동우물 샘터처럼 만들었다.
후에 수질검사를 하였더니 안전한 식수로 호평을 받았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있고 해발 80m, 2㎢ 넓이의 섬에 오아시스 같았다.
기간병과 나중에 합류한 공작원들이 매일 마시고 세탁하고 샤워를 해도 물은 부족하지 않았다.
감찰 나왔던 한 장군은 이 물을 마셔보고 “물맛이 좋아 작전에 성공할 것 같다.” 라고 흡족하게 말할 정도로 물맛은 좋았다.
그 다음날 모든 기간대원들은 실미도의 첫 밤을 어설프게 새웠고 아침 작업조회에 집합을 했다.
곡괭이나 삽을 가지고 비스듬한 산을 3m가량 수직으로 끊어냈다.
손에 굳은살이 배기도록 흙을 파고 운반하였는데 나중에는 미제 곡괭이가 양쪽날이 다 닳아서 자루구멍 부분만 남았다.
또한 사격장 유격장이 만들어졌고 특수공작훈련장이 형성되었다.
이즈음 수도권 및 경기 충청 일원에서는 서서히 하나 둘씩 공작원들이 중정 기관원들에 의해 포섭, 설득되어가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햇볕아래서 졸고 있는 닭처럼 살프시 졸음이 밀려오는 춘삼월. 안성찬은 해병대를 제대하고 일거리를 찾기 위해 거리를 배회하여 보았지만 마땅히 반겨줄 직장이 없었다.
판문점을 지척에 두고 있는 파주 땅은 미군부대가 진을 치고 눌러 앉아 있는 양키부대의 온상이다.
아직은 경제의 활성기도 아니고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의 시초인지라 먹고살기가 막연하였기에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부대찌게나 군용품으로 연명하던 시기였다.
안성찬은 차라리 군대에서 옷 걱정, 끼니 걱정, 집 걱정 없던 부대생활이 그 리웠다.
세상이 혼란하고 교통사정이 거의 완행열차와 버스에만 의존하던 시절이라 소매치기들이 많았다.
그날도 안성찬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역전에 있는 세븐당구장으로 가기 위해 시내버스에 올랐다.
바로 앞에 서있던 하이힐을 신은 늘씬한 아가씨의 뒤로 맨 핸드백이 흔들렸다.
어느 틈에 왔는지 바람잡이 한 명이 앞을 가로막고 날렵하게 생긴 한 청년이 핸드백 밑으로 손을 념었다.
그렇게 두 명의 소매치기범은 잽싼 동작으로 지갑을 가로채 곧바로 시내버스에서 하차할 준비를 했다.
보초 시 수하하던 목청으로 “운전사! 버스, 파출소 앞에 세워”
이때 차는 이미 승강장에 막 서고 있어 다시 출발하기 전 소매치기 2명은 안내양을 잡아 제치면서 버스 문을 열고 뛰었다.
그 모습을 목격한 안성찬이 날렵한 몸을 획 날리며 버스에서 내려 총알같이 뛰어가는 두 명을 잡아 내동댕이쳤다.
그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보이고 핸드백이 뜯긴 아가씨는 지갑을 도로 찾게 되어 안성찬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시골출신이었지만 키 174센티미터에 체중 70킬로그램의 준수한 체격을 가졌고 날렵하기가 황호 같았다.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 안성찬은 무엇인가 일을 해야만 하는데 하며 깊은 한숨만 내 쉬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공장에 다니는 여동섕을 학교에 보내고 어머니의 떡 장사를 그만두게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직장을 얻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일단 원서접수를 위해 시내 중심부 소방서 네거리에 있는 무지개 사진관에 들러 원서에 붙일 명함판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며칠 후 사진을 찾아 원서를 교부받아 원서를 작성하고 접수했다.
그 다음날부터 안성찬은 아침에 기상을 하면 체력검정을 대비해 향교 말 쪽에 있는 황룡사절까지 새벽 공기를 가르며 하루도 빠점없이 뛰었다.
공설운동장에 모여 간단한 체력 테스트를 마치고 오후에는 필기시험을 보았다.
그럭저럭 시험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안성찬은 시혐에 합격, 경찰어 되어서 어머니에게 효도하리라 다짐했다.
일주일후 합격자 발표가 되어 경찰서 앞 게시판으로 다가갔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합격하였다고 말씀 드리니 어머니 또한 기뻐하셨다.
본적지에 가서 일체의 서류를 발급받았고 도립의료원에 가서 공무원 채용 신검을 받기위해 정밀 신체검사를 받았다.
제출서류를 완벽히 구비하여 경찰서 민원실에 제출하였다.
일주일후 다시 최종합격자발표를 보러 경찰서 게시판으로 향했다.
대부분 모든 시험은 2차 시험까치 통과하면 3차는 사실상 합격이었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보아도 안성찬 이름 석자는 없었다.
뭔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한 안성찬은 경찰서 민원실로 들어갔다.
분단 상황에서 찾아온 이데올로기라는 묘한 올가미 사슬이었다.
“내가 북한에 올라가 삼촌을 데려오면 합격시켜 주시겠습니까?”
안성찬은 그렇게 직업 잡기 일보직전에 생존구명의 밧줄은 끊어졌다.
경찰 시험에서 연좌제에 걸려 낙방한 뒤 며칠을 집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다가 상한 마음이 누그러지자 어느 날과 마찬가지로 세븐당구장에 들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친구 김수회가 다른 패거리 4명에게 얻어맞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속이 끓어 죽을 판인데 안성찬은 손에 잡히는 큐대로 주먹을 날리는 한 녀석 어깨 위를 내려쳤다.
주먹을 날리던 놈은 당구대 아래로 고꾸라졌고 나머지 세 명이 안성찬에게 한꺼번에 덤벼들었다
맨 앞에서 설치는 녀석을 어퍼컷으로 날리고 다음 녀석을 이단 옆차기로 턱 수바리를 날렸다.
당구 다이에 비스듬히 눕혀진 상태에서 당구공 하나가 손에 잡혔다.
퍽 하는 소리와 동시에 목을 조르던 팔에 힘이 빠져들었다.
그러는 사이 김수회가 나머지 세 명을 큐대로 작살내고 있었다.
이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깨지고 턱수바리가 돌아가고 배를 움켜지고 엎어져 있었다.
생각보다 부상정도가 심각한 걸 알고 나니, 안성찬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친구를 구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저지른 일이었지만 눈앞에 벌어진 사태는 심각했다.
소위 말하는 뺑기통을 옆에 두고 하루 밤을 유치장에서 보냈다.
잠시 후 가죽잠바 차림의 짧은 머리에 멋으로 위엄있게 보이려 유행하던 까만 선글라스를 낀 두 명의 정보요원이 들어왔다.
“아! 당구장에서 네 명을 박살 낸 선수들이야, 콩밥 한참 먹어야지”
이 개 같은 세상에 나 같은 놈이 멋지게 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삼촌이 월북했다는 이유 때문에 내 인생도 내 맘대로 못사는 세상이 아닙니까?
안성찬은 연좌제에 걸려 경찰시험에 낙방했던 기억으로 껄끄럽게 대답했다.
“자네 말이야, 해병대를 제대했던데 군대 한번 더 가지?”
“예? 뭐라고요? 갔다 온 군대를 또 갔다 오란 말입니까?”
아니 한번 가서 3년 썩는 것도 죽을 맛인데 또 3년을 군에서 썩으란 말입니까?
“특수목적이 있는데 달성만 하면 평생을 보장해주지….”
안성찬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입을 다물고 허공만 응시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그 군대 갔다 오면 연좌제가 풀어집니까?”
“물론이다. 아까, 서류에서 연좌제에 걸려있는 내용을 보았다.”
그리곤 정부기관 정보요원증을 잠시 열어 보이고 배지를 보여줬다.
“대신에 모든 것은 비밀에 붙이고 가족에게도 타지로 돈벌이 가는 것으로 얘기해라, 그리고 3일후 서울역 앞 대홍빌딩 2층으로 와라”
“정리하려면 돈이 필요할 테니 써라! 어머님꼐도 맛있는 것 사드리고.”
정보요원으로부터 예기치 않았던 제시를 받은 안성찬은 처음처럼 그렇게 갈등이 일진 않았다.
정부기관 정보요원에 약속이고 무엇보다도 어려운 시기이고 연좌제로 인해 취직도 안 되는 상황에 경제적으로 안착되는 보장이 충분하다고 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미지의 세계로 향한 행보이다 보니 조금은 불안감이 앞섰지만 이내 안정을 찾았다.
“어머니! 조금만 더 고생하시면 됩니다. 제가 돈 많이 벌어와 집도 한 채 사들이겠습니다.”
아들이 객지로 돈벌러 떠난다고 하니 어머니는 가슴이 무너지 듯 아팠다.“
“이놈아! 군대 갔다 온지 얼매나 되었다고 또 객지로 간단 말이여?”
울며 아쉬워하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아버지와 동생들에게도 간단하게 작별 인사를 하고 동네어귀로 걸어 나왔다.
집을 등지고 나오는 우울한 마음은 아랑곳없이 햇살은 무섭게 내리쏟고 있었다.
서울 행 버스에 올라서도 집 생각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왜 이러지?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해병대의 그 모진 군대생활도 다 견디어 냈는데….”
잠깐씩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이 또다시 가슴을 울컥하게 했다.
개나리며 진달래가 환하게 피어있는 산과 강이 봄에 향연을 이루고 있었다.
서울 역에서 하차하여 지하도를 통해 대흥빌딩 2층에 있는 간판 없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3명의 다부지고 깡이 있어 보이는 젊은이들이 있었고 창쪽 구석 책상에 다리를 올려놓은 사흘 전에 본 정보요원들이 앉아있었다.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기울어질 무렵 어디에선가 차출된 3명의 모집인과 정보요원을 따라 소공동에 있는 중화요리전문점으로 갔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쯤 건물 뒤편의 골목에 대기해있던 코로나, 피아트 고급 승용차 두 대에 몸을 실었다.
양쪽에 하급 기관원이 자리하고 안성찬은 가운데로 앉았다.
서울 도심을 빠져나와 고속도로인 듯 속력이 나기 시작했다. 약 한 시간 정도 흘렀을까? 중국의 도심같이 느껴지는 거리였다.
인천의 차이나 타운이었다. 언덕 위쪽으로 자유공원에 오르는 계단이 놓여있었고 우측으로 돌아 200여 미터 아래쪽으로 여인숙이 보였다.
이 민간 여인숙이 접선 장소였다. 여인숙에 들어가니 이미 다른 지역 모집인들이 3명 더 있었다.
“오늘밤은 이곳에서 머물고 내일 새벽4시에 이동한다.” 중앙정보요원의 간단한 설명만 있을 뿐 더 이상의 얘기는 없었다.
모집인 7명은 서로 분방해서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고 묵묵부답 이유를 묻지 않았다.
새벽 4시가 되었는지 정보요원들의 오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우리 7명의 모집인은 바깥으로 모였다.
또 어 디론가 가기 위해 코로나와 피아트승용차에 분승했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정적감이 감도는 새벽바다였다.
그레이 마린 공작선이 너울너울 춤추고 있었고 베레모를 쓴 얼룩무늬 정글 복을 입은 교관이 배에서 내렸다.
“조용히 해라 너희들은 지금 이 순간부터 민간인 신분이 아니다. 특수목적을 띤 군인들이다.”
무거운 정적감이 도는 가운데 한시간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모래사장을 조금 지나 비스듬한 언덕을 오르니 천막이 보이고 망루초소에 경비병이 삼엄히 경계를 하고 있었다.
지휘봉을 손에 맞닥뜨리며, 부대장막사로 들어가자마자 인솔했던 교관이 지시를 내렸다. ˙
“귀관들은 지금 이 순간 명예로운 대한민국 군인이다.”
“모든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군법에 관계없이 특별 조치의 가혹한 처리를 하겠다.”
듣는 둥 마는 둥 오늘 도착한 7명은 곧 천막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이미 우리 7명을 포함 31명의 삭발군인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그들은 청춘을 향유하고 기본적인 인권을 지닌 순진한 젊은이들이었다.
두 번 군대간 안성찬은 꿈 많고 패기만만한 청춘을 이렇게 이 무인도에 묻고 또 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