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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시는 보건복지부의 노인요양 정책에 따른 90병상의 “노인전문요양병원”을 유치 확보해 놓고 있었다.
따라서 영주시는 수탁업자 선정과정을 위한 공고를 2005년 9월경 내고
약 3주간 서류 준비기간을 가지도록 했다.
서울시와 경기도, 충북에 이와 유사한 서류를 준비해본 경험이 있기에
서류준비를 육하원칙에 의해 구체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 내용으로 구성했다.
또한 2500여평의 땅 기부와 함께 자부담을 전체건축비의 23%를 부담하여 30병상을 추가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만한 땅 규모와 액수를 자부담하고 수탁 받으려는 것은 바보짓이라고들 말했다.
하지만 내 고향의 노인복지를 요양병원을 통해서도 이루어보고 싶어서였다.
무리해서라도 거액의 30병상 추가비용을 마련하여 임상연구기관으로도 사용될 수 있도록 하기위해 그렇게 한 것이었다.
또한 영주에서 아옹다옹 경쟁할 것이 아니라 어떡하든
난 중앙정부의 국가노인복지의 장기 정책과
영주시의 현재 노인의료환경을 동시에 생각하면서 통 큰 수탁자가 되고 싶었다.
내가 안되어도 좋다.
내 고향 영주의 의료 환경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의료의 질을 높일 누군가가 있으면 된다는 심정으로 임하기로 했다.
차별화란 시립이라는 공공기관을 공공성 있게 경영할 조직과 프로그램 등에 대한 내용을 충실하게 담는 것이었다.
서울, 대전 등 5개 병원 네트웍과 인력배치와 향후 운영계획을 그 동안의 경영 노하우와 연계하여 작성했다.
건물위치는 인애가의료복지타운 내로 하고 내줄 교차로 200m 거리에 있는 가장 좋은 땅을 기부하기로 했다.
최고 용이한 접근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검토하였고 일단 일맥의료법인 이름으로 제출했다.
최종 심사일이 다가왔다.
10월 12일 오후 1시부터 오후 8시까지 그야말로 불꽃 튀기는 심사였다.
우선 우리 인애가는 향후 5년, 10년 앞의 국가노인복지의 내용일부를 인용하고
전국에서 가장 경쟁력 있고 모범적인 노인전문요양병원을 만들어갈 구체적인 안까지
심사위원들 앞에서 확신에 찬 의지로 설명해 나갔다.
땀이 바작바작 났다.
여름이 아닌데도 마치 여름 어느 날처럼 땀이 났다.
특히 회계사인 심사위원은 서울에서 유사한 심사를 해보았는지 재무회계에 대한 예리한 질문을 날렸다.
난 숙지했던 대로 대답을 잘 마무리했다.
저녁 9시쯤에 마침 우리 인애가한방병원이 시민들을 위해
시민회관에서 주최하는 음악회를 거의 마쳐갈 때 전갈이 왔다.
밖에 시장님이 잠깐 들러서 인사를 나누자는 것이었다.
“축하합니다. 수탁자로 선정되셨습니다.”라는 축하 인사에
난 “감사합니다. 시립병원을 최선을 다해 운영하겠습니다.”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했다. 그리고 시민들을 위해 음악회를 개최 해주어 고맙다는 인사도 아울러 받았다.
행사를 마치고 인애가 영주병원 관리자들과 조촐한 저녁을 들면서 노고에 치하했다.
참으로 하나님은 심중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다.
그동안 우리 가문에 베풀어준 시민들의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좀 더 공익성 있는 기관을 운영해보고 싶었던 것을 기쁘게 받아주신 것 같았다.
“주님, 주님의 뜻인 줄 알고 최선을 다해 경영해 나가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감사의 표현과 함께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졌다.
보건복지부는 급속한 노령화에 대비하여 노인요양의료기관과 복지시설을
수요와 공급을 맞추고 국가 예산과 연계하여 합리적인 백년대계를 수립해야할 국가주무 부처이다.
그런데 정권마다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치우쳐 세우다 보니 현 수탁 운영자도
예비 운영자에게도 불만이 고조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각 시‧군마다 수요를 맞춘 예산과 인구 비율을 철저히 감안하여 균형 있게 중앙정부가 조절해 주어야 함은 물론이다.
획일적인 공고가 있다 보니 기초 지자체마다 선출직의
이기적이고 즉흥적인 결정에 따라 좌지우지되어 온 면도 있다.
아무리 많이 건축을 하더라도 시설 용도와 규모에 따른 운영 예산의 문제가 더욱 커지므로
주무부서의 전문성과 신중성이 한층 더 요구된다 하겠다.
정권의 분배정책 욕심에 따라 많이 세워졌지만 운영에 대한
충분한 대비책 없이 진행하다보니 심각한 문제가 발생되어 건강보험공단에 공을 던져준 꼴이 되었다.
사명을 갖고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동원하여 더 나은 진료와 프로그램을 적용하고 싶어도
그림의 떡이 되어버리고 그저 기본적인 것만 제공 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 수탁운영 자들은 그들대로, 공무원은 공무원대로,
입소어르신 또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실정이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이 영주 시립 노인 전문요양병원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2005년 의료환경이나 복지환경은 그래도 괜찮았으나
2006년부터 급속히 환경의 악화와 더불어 전국적으로 운영난이 발생하게 되었다.
농어촌 지역인 지방에서는 운영난이 더욱 심각한 실정이다. 그러니 반환하게 되고 부도가 나고 부실이 나타났다.
영주시립병원도 2005년 수탁결정시 환경보다 몇년이 지난 환경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중도에 반환하느냐 추진하느냐 심사숙고를 거듭거듭해야 했다.
관리자 연석회의, 견학, 주무부서와의 의견교환 등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운영불투명이었고
심각한 적자 예상으로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신우회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었다.
주위 기도 팀에 부탁했다.
과연 하나님의 뜻이 반환에 있는 건지 무조건 진행하는데 있는 건지 선택을 위해서였다.
준비기간이 길어졌다.
의료 환경이 더욱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이미 운영하던 타 지역의 노인병원들의 부도와 경영악화에 대한 정보들이 속속 입수되었다.
언론도 국가의 노인복지운영이 지나친 분배중심이기만 하다 보니
국가예산 세우기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음을 보도했다.
수탁업체들의 자질과 경영능력을 문제 삼기도 했다.
머리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라고 뾰족한 수가 없었다.
건축이야 설계대로 투명하게 하면 되는 것이고 운영문제가 코앞의 문제로 대두되었다.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보건복지부로부터 운영에 도움이 되는 보호대책이 곧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이미 단추를 잘못 낀 노인요양의료기관을 다른 용도로 바꾸기도 어려운 것이다.
시 보건소는 빨리 개원해 달라고 성화였지만 자칫 운영에 어려움이 크면
영주시나 나나 시민들이나 모두가 피해자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치밀한 전략과 계획을 세우지 않고서는 부실과 부도가 생길 것이기에 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2006~2007년 까지 타 기관 견학도 해보고 정보도 듣고 외국의 예도 살펴보고
소도시 영주인구 대비 운영 가능성에 대한 검토를 재차 할 수밖에 없었다.
청구비용이 급성기 또는 일반병원보다 낮은 것도 문제이었다.
상식선의 의료숫가 가이드라인이 무너지고 기본 서비스도
제공될 수 없을 만큼 가격파괴 현상이 나타났다.
의료 서비스는 일반 생필품이나 물건 같이 유통기간이 임박했거나
유행이 지나 가격 파괴나 덤핑을 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의료서비스의 목표는 존엄한 사람의 생명을 건강하게 유지하도록 하되
질병으로부터의 회복과 발병 전 건강관리를 통한 질병예방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운영자가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의료인이라면 생명을 경시하면서까지
가격 파괴를 할 수 없을 것이고 있다면 애초에 영리 목적을 우선시하여
운영하게된 의료인거나 아니면 장사꾼일 것임에 틀림없었다.
운영주체인 나나 인애가 재단의 이메이지상 양·한방 전문의, 간호사 채용 숫자에 따라
점수가 메겨지는 고급등급의 의료기관으로 운영하려면 그만큼 지출부담이 커지게 마련이다.
보건소도 이런 운영주체의 어려운 사정을 심증적으로 이해하지만 행정적 기한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몇 번이고 협상해 왔지만 열악한 환경에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2006년에서 2007년 봄까지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논의하고 또 협의했다.
생각하고 또 고민했다.
몇백여평 증축에 해당하는 엄청나게 큰 자부담액을 국가에 기부하는 것은
곧 인애가 법인 소유가 아닌 곳에 헌납하는 셈이다.
설령 건축이 다 되더라도 수익은 고사하고 손익이 제로 상태로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고
또한 수익이 발생된다 하더라도 나나 재단이 가져갈 수 없도록 되어 있으며
시립병원에만 재투자해야 하는 것이었다.
공공의료기관이기도하고 평소 투명성과 윤리성을 유달리 강조해왔던 나의 운영 방침이기도 했다.
이렇게 생각할 때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미칠 지경이었다.
시민과의 약속 명분을 지킬까 실리를 찾을까 고민에 고민, 갈등에 갈등을 늘 지고 다녔다.
혈압이 올라갔다.
남성갱년기 유사 중후가 생겼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진퇴양난, 뼈저리게 느껴왔다.
2007년 이른 봄 관계 관리자 소집을 하고 최종 논의 했다.
“여러분이 책임지고 시립병원을 운영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침묵이 흘렸다. “단지 박사님 뜻에 따를 뿐입니다.”
하기야 긴 시간동안 나도 빨리 결정을 못하고 고민해오던 터라 질문이 어쩌면 우승꽝스러울 뿐이었을 것이다.
나는 항상 경영 방침상 책임과 권한을 동시에 주는 스타일이었다.
이 문제도 그걸 전제하고 물은 것이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라는 답은 기우일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어쩌면 예상했던 답이었다.
몇칠 뒤에 다시 기도도 해보고 생각한 뒤에 회합 시간을 갖기로 했다.
하나님께 더욱 매달렸다.
여전히 확신도 없었지만 그냥 하나님께 맡겨버렸다.
인간적으로는 어차피 아닌 것이고 숫자적으로는 답이 나오질 않았다.
마냥 늦출 수는 없어 다각도로 분석한 운영계획에 따라 2007년~2008년에 건축하여
2009년 이른 봄에 개원하기로 결심하고 최종적으로 합의했다.
시 보건소 박주사님의 공로가 컸다.
내가 겪어봐도 그는 공무원으로서 자질도 갖추었고 일단 대화 능력도 좋았고
관의 실무 공직자로서 민과의 가교 역할을 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돋보였다.
어쩌면 그의 협상능력 때문에 그래도 빨리 깔끔하게 개원되었다고 생각한다.
준공이 났다.
상수도 등 부대시설이 갖추어지고 경상북도로부터 병원 허가와
국세청 등록이 완료되자마자 병원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2009년 3월 6일이었다.
홍보에도 걸림돌이 있었다.
안 그래도 소도시 특히, 영주시의 의료 환경이 안 좋은데 우리 병원이 영주에서 환자유치에
열을 올리다 보면 본의 아니게 과열 경쟁의 소지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영주 외 타 지역 중 대도시 쪽으로의 네트웍을 이용하기로 했다.
영주지역은 입소문으로 하고. 적중했다.
시내 타 병원들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고 우리는 떳떳한 전략을 세운 셈이다.
50명 이상이 입원한 상태에서 3월 26일 공식 개원식을 가졌다.
개원식을 위해 준비를 많이 했다.
날짜조정, 참석범위, 귀빈대접, 선물 등에 대한 세밀한 준비를 했다.
절약도 하고 빛도 내야하고 이중적 효과도 끌어내야 했다.
초대장을 발송하고 한번 쓰고 말 축하 꽃 보다는 어르신들의 식사를 위한 쌀을 후원받기로 했다.
개원 당일이 되자 아침부터 구름이 꽉 끼더니 오후 행사에 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미 이른 아침부터 개원 축하객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더라도 천막을 설치하고 비옷을 마련했다.
일기와 상관없이 진행은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정치인들과 유지들은 모두 참석했다.
경찰에 의하면 3000여명이 모였다. 뷔페, 다과를 정성껏 준비하였다.
하객 어르신들로 병원 공간과 천막이 빈틈이 없었다.
행사는 대성공이었다.
시 보건소도 우리도 서로 위로하고 격려했다.
성공은 대개 우선 하객숫자로 판단한다.
일기가 안 좋은데 3000여명이 시내도 아닌 외곽에 운집한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라고,
대성공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마침 겨울과 봄 가뭄이 심하였기 때문에 행사 중 비가 오는 것을
오히려 희망적이고 좋은 징조라는 것으로 바꾸어 전달했다.
인사말에서 “때맞춰 내리는 축복의 비요, 가뭄 끝에 비를 맞으며
씨를 뿌리는 농부의 심정을 갖고 진료와 경영에 임하라고 하는 하늘의 명령” 이라고 강조했다.
“잘 치료하는 병원” “ 내집 같은 병원” “섬기고 나누는 병원”으로 가꾸어 나갈 것이라고
의지에 찬 연설에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박수소리에 빗소리가 쑥 들어가 버릴 정도로 힘찬 발걸음을
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격려와 관심 속에 내 디뎠다.
내가 악조건의 환경을 이기고 오히려 바꾸어 나가게 된 것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이 주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시 말하면 까다롭고 엄정한 심사에서 수탁자로 결정된 후
의료환경의 악화와 지역적 한계의 악조건속에서도 오직 영주시민과의 약속이라는 명분을 지키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한 것은 내게 하늘로부터 주어진 내면의 힘 때문이다.
영주시내 법인병원인 인애가 한방병원이 손해를 보고 축소된다 하더라도
시립병원이 잘 되기를 원하는 “사회기업으로서의 책임감”, 열악한 환경 조건과 위기에 대한
“대처능력”과 성공적인 경영을 위해 평소 익히고 닦아온 “준비성”이 성공적인 개원을 이끌어 낸 것이다.
영주라는 소도시의 노인전문요양병원이니까 되가는 대로
적당히 운영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준비과정 중에 흔히들 얘기하곤 했다.
나는 생각이 전혀 달랐다.
첫째로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싶었다.
규모와 대상, 위치와 환경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 병원에 오신
환자분들이 우리 부모님이라 여기고 모시자는 것이였다.
양과 질적인 서비스로는 우선 병원 등급을 최고급으로 유지하기로 했다.
병원 등급은 전문의와 간호사 숫자에 의해 결정되는데 지출 비용이 크더라도
내 고향 영주의 공공병원 만큼은 타도시의 많은 동종병원 어디와 비교하더라도
시민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친절, 섬김, 나눔을 “효심”이라는 기초위에 세워 튼튼하고 아름다운 집을 지어가 듯 실천하고자 했다.
환자분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늘의 명령을 실천하는 병원으로 운영하고 싶었다.
둘째로, 내실 있고 실력있는 병원을 만들고 싶었다.
공부하는 병원, 연구하는 의료진들로 구성하여 환자분들에게는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제공하고 병원으로서는 연구논문, 보고서, 출판 등으로 이미지를 드높이고
국가 노인의료복지정책에 기초자료제공 의료기관으로서 자리메김 시키고 싶었다.
셋째로, 전인치료 병원으로 경영하고 싶었다.
약물, 침술, 뜸, 물리치료, 재활치료는 물론 원예·음악·그림·운동·회상·온천욕·피톤치드욕·일광욕치료,
상담, 복지, 종교 활동, 건강·문화 강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신체, 정신, 영혼의 전인 회복을 위해 다각적으로 적용하고 싶었다.
넷째로, 영주적인 특성과 특징을 연계 접목시키고 싶었다.
소백산의 청정 환경과 정신내면 선비문화의 체험을 연계하고 인삼, 홍삼, 마, 하수오 등
한약 특산물과 한우, 사과, 포도 등 먹거리 특산물을 접목시켜 치료의 차별화를 꽤하자는 것이었다.
내 고향 농촌지역의 발전과 함께 가는 복지를 위해 적어도
내 분야인 의료와 복지분야 만큼은 내실을 기하고 확장시켜 인구를 영주로 유입시키며
유출을 막고 고용을 창출하며 차별화 브랜드를 통해
영주에서 머무르지 않고 글로벌 의료복지공동체를 세워 나가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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