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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수필작가
김인기
1962년 경북 영천 출생․1990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졸업․1991년 월간 『에세이』 등단․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대구지회, 에세이문학회, 대구수필문학회 회원․작품집 『함께 가는 우리들』(1999)
│대표 작품│
봉정사 무당벌레 외5편
이미 많은 비가 내려 흠뻑 젖은 땅을 밟으며 우리들은 산문(山門)에 들었다. 천등산 봉정사. 얼마나 많은 중생들이 이 주위를 맴돌았을까? 만세루(萬歲樓) 기둥은 바로 경문(經文)이었다. 거기엔 작은 구멍들이 가득 나 있었는데, 아마도 날개 가진 무리들이 운판(雲版) 소리를 들었나 보다. 그 소리에 이끌려 작은 나방들이 지친 날개를 파닥이며 마침내 이곳으로 와 잠시 머물렀으리라.
봉정사에는 극락전(極樂殿)도 있고, 고금당(古金堂)도 있고, 화엄강당(華嚴講堂)도 있고, 무량회해(無量會海)도 있다. 물론 대웅보전(大雄寶殿)도 있다. 당연히 석탑도 있고, 불상도 있다. 신라 문무왕 시절에 의상 스님이 세웠다는 오랜 내력도 있다. 그러나 그 분위기는 고즈넉했다. 그래서 누가 내게 봉정사가 어떻더냐고 묻는다면, 나는 다만 이렇게만 응답할 것이다.
‘봉정사는 절이야.’
그러나 봉정사가 절인 줄 모르고 묻는 이는 없다. 그렇더라도 나는 다시 생각해 봐도 달리 뭐라 설명할 재간이 없다. ‘거기 봉정사는 참말로 절이라. 이래 봐도 절이고 저래 봐도 절인 거라.’ 내 감각이 밋밋하니, 내 표현도 시시하다. 나도 그걸 잘 안다. 그래서 젖은 목소리로 나는 이렇게 가만히 고백하고 만다.
‘나는 속인(俗人)이므로, 내가 보고 느끼는 바도 지극히 비속(卑俗)하다.’
나는 이런 인물이다. 그래도 내게는 복이 많구나. 내가 봉정사를 다녀온 날에도 설법은 펼쳐졌다. 그 여운이 내 마음에 마치 노을인 양 물들었다. 누군지 알고자 한다면 쉬이 알 수 있는 여인, 그 여인이 그날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밭에서 호박도 따고 고추도 따서 자랑스런 동창생 아무개에게 주기로 홀로 다짐했다. ‘나야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여자지만, 그래도 내 아는 아무개는 도시로 나가 잘난 사람이 되었다. 이런 사람과 친구인 게 나는 우선 자랑스럽다.’ 그 여인은 산골로 시집을 가서 내내 순박하게만 살았다.
그런데, 바로 그 ‘잘났다’는 게 화근이었다. 자랑스런 동창생 아무개가 너무나 잘나서 그만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모임에 간들 밥이 생기나 떡이 생기나. 무식하고 가난한 녀석들과 어울리는 게 다만 귀찮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내가 추측하기로 아마도 그 인간이 그런 모양이다. 그 여인은 그래도 아무개가 잘난 친구라고 자식들한테 자랑도 하였는데, 그 여인은 그래서 호박이랑 고추도 울며 도로 가져 왔다는데.
봉정사는 나를 편하게 한다. 내 몸의 거처는 산문에서 멀어도 내 마음의 거처는 여기와 가까운 듯, 마치 울며 집으로 갔던 그 여인이 자랐던 내 고향과 같다. 그래서 그럴까? 내가 출가를 한다고 해도 여기선 어쩐지 나를 윽박질러 득도하라 하지도 않을 것만 같다. 도반(道伴)들마저 그저 나를 가만히 지켜만 보리라. 이런 세월 조금 지나면 문득 게으른 자신이 부끄러워지리라.
어쩌면 숱한 고승(高僧)들이 이곳에 머물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분들보다 그분들이 만난 속인들에게 관심이 더 많다. 그들이 이곳과 얽힌 그 사연들이 무척 궁금하다. 어쩐지 이곳에 계셨던 분들은 다소 모자라는 위인들의 고충도 잘 헤아렸을 것만 같다. 그래서 여기에선 내내 삼독(三毒)에 찌든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소리도 문득 바람이 되어 흩어졌을 것이다.
하기야 고승들이라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속가에서 온 인물들이다. 따라서 그분들도 당연히 세속의 우여곡절을 잘 안다. 겨우 여덟 살 어린 나이에 불문에 든 지눌 스님이라면 모를까. 이분은 어릴 적에 병치레도 잦았는데, 그 아버지는 그게 큰 걱정이었다. 스님은 이런 인연이 출가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시절에 멀쩡한 녀석이 사서 고생하겠다며 아비와도 인연을 끊고 산으로 가겠다니.
어떤 사람은 귀한 아들 빼앗아 간 부처가 밉다고 날이면 날마다 강으로 가서 버들치고 피라미고 닥치는 대로 가만히 두지를 않았다. 불가에서는 살생을 하지 말라고 하니, 그것부터 심사가 뒤틀려, 그는 일부러 살생을 하였다. 그러면 이렇게 부모형제와도 인연을 끊고 산으로 간 인간들은 다 부처님의 법을 받아 다소곳하게 되었을까? 이런 게 궁금한 내게 이런 대화가 풍문으로 들린다.
“그래도 모두 수행을 하시는 분들이니, 주지 스님께서야 젊은 스님들한테 굳이 이러쿵저러쿵하실 일이 없겠습니다. 그분들이 다 알아서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고, 거사님요. 그런 말씀 아예 하지 마이소. 저들이 바로 즈그 아부지 말도 안 듣고, 중 되겠다며, 기어이 여기로 온 놈들인데, 주지 말이라고 듣겠는기요?”
내 거처는 산문에서 멀다. 그런데도 나는 산중 소식을 더러 듣는다. 그리고는 나도 때때로 승보(僧寶)를 비방하는 죄를 너울너울 짓는다. ‘맞아, 맞아. 중 세 명을 데리고 가느니 벼룩 서 말을 몰고 가는 게 더 쉽다고 하더라.’ 내 하는 짓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아무래도 이승에서 문수보살을 만나기는 어렵겠다. 행여 저승에서라도 지장보살을 만나면 그나마 다행이겠지.
마귀의 권속이 따로 없다. 이러니 내가 산문에 들지 않기를 참 잘했다. 거듭 생각해도 그렇다. 만약에 내가 출가를 했더라면, 아마도 나는 해탈은 둘째고 당장 스님들한테 새로운 업장(業障)이 되지나 않았을까 싶다. 그러니 나와 같은 부류는 그저 법당 주변을 잠시 배회하다가 사라지는 무당벌레나 풍뎅이로 족하다. 그러나, 기실 세상엔 날벌레만도 못한 인생도 많으니까, 정작 벌레들은 인간들을 기껏 덩치만 큰 들짐승으로나 여길지도 모른다.
어엇따, 훌룽타
사람마다 타고난 자질이란 게 다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연습을 달인(達人)의 어머니라고는 하지만, 그 연습이란 것도 조금은 재미가 있어야 오래 지속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 양반은 서예에 그다지 소질이 없다. 그 역시 그런 취미라도 하나쯤 가지면 좋지 않겠는가 여겨 서실에 다니는 터이다.
별로 재미도 없는 일을 절실한 필요도 없이 배우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그는 결석도 많이 했다. 서실 출입보다 바쁜 일이 아주 없지도 않았으나, 그보다 붓을 잡는 게 번거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러니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래도 모처럼 한 결심인데 싶어 그는 다시 마음을 고쳐 먹고 서실에 갔다.
원장이나 문하생들이나 다 연만하다. 이 서예학원엔 대체로 정년 퇴직한 분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래도 이렇게 서실에서 글을 쓸 여력이 된다는 게 그리 사나운 팔자는 아니라고나 할까? 이런 분들이 그저 소일 삼아 글씨를 배우는 터이다.
그는 그분들과 어울리기엔 장벽이 많다. 그 이력은 아예 말하지 말자. 당장 세대차가 상당하다. 여기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사정을 헤아리면, 뭐라 할 바도 없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다고 공감대가 형성된 것도 아니다. 원장 이하 문하생들도 나이를 아주 잊은 건 아닌가 보다. 서실에 모처럼 나타난 그가 쓰는 글씨를 모두 빙 둘러서서 구경한다.
그가 쓰는 글씨가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원래 필재도 시원찮은 터에 연습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서 구경을 하니 그게 부담이 되어 글씨가 더 되지 않는다. 그래도 그 자리에서 붓을 던질 수도 없어서,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겨우겨우 글씨를 썼다.
“어엇따, 훌룽타! 붓만 놓지 않으면 대성하겠구나.”
갑자기 원장 선생이 커다란 목소리로 칭찬했다. 선생이 ‘훌륭하다’도 아니고 ‘훌륭타’도 아닌 ‘훌룽타’를 연발하니, 주위에 있던 모든 분들도 다 이구동성으로 ‘훌룽타, 훌룽타!’ 했다. 정말 붓만 놓지 않으면 누구나 다 대성할까? 그러나 나한테는 그런 것보다 ‘훌룽타!’는 그 말이 더 가슴을 친다.
그 솜씨야 시원찮아도 요즘 세상에 서예를 배우겠다는 젊은이가 우선 기특하기만 하다. 그래서 아쉬운 구석이야 많아도 그분이 호방하게 ‘어엇따, 훌룽타!’ 한다. 애정이 지나쳐서 마구 말했다가 이 젊은이가 아주 붓을 놓으면 어떻게 하나? 이런 염려가 숨은 찬탄이다. 그러다 보니, ‘훌룽타, 훌룽타!’ 하는 감탄과 칭찬 사이로 이런 말들이 툭툭 던져진다.
“글씨가 그렇게 한 쪽으로 치우치면 너무 옹색해 보이지 않을까?”
“그냥 시원스레 써야지 자획을 꾸미면 도리어 졸렬해지지 않을까?”
그러니까 열 마디의 찬탄 끝에 아주 가볍게 나온다는 한마디의 지적이 이렇다. 사십대의 젊은이가 가만히 듣고 보니, 그게 결코 가벼운 훈수가 아니다. 아마 훌룽타 선생도 궁여지책이었을 것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아주 꼿꼿하게만 보이는 그 성품으로 그런 소리를 하며 서도(書道)를 권장하기까지 그분도 얼마나 많이 고심하였을까?
‘아! 훌룽타! 절필만 않으면 대문호가 되겠구나!’
내가 만약에 문단에서 그 선생의 어법으로 말을 한다면, 이야기가 그렇게 될 것이다. 과연 절필만 않으면 누가 대문호가 될지 어찌 알겠느냐. 그렇지만, 내가 그 누구한테 그럴 수 있을까? 적어도 나보다 스무 살은 어린 녀석이 나타나서 뭘 한다고 끙끙거려야 그럴 조건이 된다. 그러면 나도 무게 비슷한 것이라도 잡으면서 ‘훌룽타, 훌룽타!’ 하겠는데, 그럴 만한 녀석이 도통 보이지 않는다.
아니, 아니야, 지금부터 이십 년 전의 내 모습을 상기하면, 내가 지금 그럴 형편이 아니야. 모든 개구리들이 한때는 다 올챙이였다. 당시에 나는 군복무 중이었다. 내가 그 시절에도 책이야 좋아했지만, 수필에 관해서는 무지했다. 그러니, 내가 소리 높여 ‘어엇따, 훌룽타!’ 하자면 아직은 세월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지독한 시어머니 노릇을 하더라도 무리가 없지.
하기야, 나도 훌룽타 선생과는 많이 다르니까, 내가 언제라도 남들한테 선생과 같은 감흥을 줄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그분이 내 나이 적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몰라도, 그 모습이 지금의 나와는 많이 달랐을 것만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거수일투족이 저렇게 꼬장꼬장할 수가 없다. 내가 보기에는 그 필적마저 깐깐하기 짝이 없다.
훌룽타 선생의 언행에 비추어 보면 지금 내 꿍꿍이란 것이 얼마나 망측할까? 나는 누가 ‘셰익스피어(Shakespeare)’가 어떻다 하면, 혹시 그게 ‘섹스어피어(sex appear)’를 잘못 발음한 게 아닌가 싶다. 요즘 들어 유전자를 조작하여 어쩐다는 ‘바이오테크(biotech)’만 하더라도, 나는 그게 ‘바이오 태클(bio tackle)’이거나 ‘바이오 테러(bio terror)’가 아닐까 수상하다. 내 머리에는 이런 것들로 가득하다.
이러니, 이러니, 내가 도대체 누구한테 ‘어엇따, 훌룽타!’ 하랴. 그러기는커녕 내가 어디서 그런 말을 안 들으면 그나마 다행이지. 근래에 나는 ‘잠수(潛水)’라는 말이 별스럽게도 쓰이는 줄 알았다. 주로 건달들이 죄를 짓고는 숨어 버릴 때 그런 표현을 하는가 보다. 그렇다면 나도 일단은 잠수를 해야겠다. 내가 잉어나 붕어는 아니지만 한동안 그러다가 나중에 문득 나타나서 커다란 소리로 ‘어엇따, 훌룽타!’ 해야겠다. 그런다고 내가 훌룽타 선생이 될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아나? 나도 조금은 깐깐해질지.
행자(行者)
벌써 나이가 마흔일곱이나 된 녀석이 행자(行者)가 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산골 암자에서 스님이 행자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누누이 설명을 해도 이 사내는 막무가내다. 놈이 그렇게 고집을 부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사내는 어느 재벌회사에서 일하던 인물이었다. 세속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는 아쉬울 것 하나 없이 꽤나 잘 나가던 친구였는데, 그게 어느 순간 무너지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이혼도 하고 퇴직도 하였다. 급기야 그는 돈이고 나발이고 다 싫어졌다.
‘나는 잘 산다고 그랬는데, 이제 보니 다 헛산 꼴이구나.’
그는 그만 세상사에 넌더리가 났다. 주지 스님이 들으니 사정이 딱하기도 하다. 그 표정을 보니 행자 노릇을 제대로 할 작자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리고 녀석이 저런 마음으로 얼마나 버티랴 싶었지만, 그래도 스님은 속는 셈치고 그의 고집에 부응했다. 그가 도무지 미덥지 않았지만, 이 사내가 워낙 간절히 원하니, 스님은 이 또한 인연인가 보다 여겼다.
“정히 그렇다면 니가 한번 해 봐라.”
이래서 그는 졸지에 행자가 되었다. 그러나 행자 노릇이 만만할 수는 없다. 더구나 이 녀석이 행자가 되었다고 해서 세속의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온 것도 아니다. 그게 그러기도 어렵다. 그 나이에 이르도록 이어 온 습성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랴. 당장 그 입맛부터 고약하다.
“된장찌개를 끓여라 하니 거기에다 조개를 사다 넣어. 그렇다고 하나하나 입을 대자니, 그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그래, 에라, 나도 모르는 척 먹기도 해.”
이게 주지 스님의 푸념이다. ‘행자 하나에 지옥이 하나’란 말이 조금도 그르지 않다. 스님이 행자를 들인 게 아니라 아주 상전을 모신 셈이다. 물론 고달프기로 하면 행자가 더하다. 여기선 속가(俗家)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자신이 전문가임을 증명한다는 자격증이나 경력 따위가 여기서 필요하랴. 그는 별난 수단으로 남의 손을 빌기보다 당장 제 몸을 움직여 빨래하고 청소해야 한다. 이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하물며 밥을 지을 줄도 반찬을 만들 줄도 모르는 행자라니.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게 그 양반에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말썽거리가 한둘이 아니다. 주지 스님 또한 기가 막힌다. 아연하고 막막하다. 그래도 행자가 스님의 말에는 널름널름 대답을 하지만, 그 몸이 따르지를 못한다. 하기야 그게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미 그가 배우고 익힌 바가 그러니, 그 녀석이 이해가 되지만, 그러나 그게 어디 행자 노릇이냐. 아! 나무관세음보살[南無觀世音菩薩].
남루한 추억의 이화장여관
벌써 십 년도 더 지났구나. 내가 혼인할 즈음에 잠시 집을 나간 적이 있었다. 이곳 저곳에서 나는 이화장여관을 만났다. 거기가 충주였을까? 아니, 어쩌면 거긴 단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우울한 심정으로 비를 맞으며, 어둑어둑해지는 시각에, 지친 문을 밀고 여관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여관 이름으로 이화장(梨花莊)이 잘 어울리는지, 배나무는 한 그루도 가꾸지 않으면서, 가는 곳마다 그와 같은 이름의 여관은 있었다. 하기야 이런 상상 자체가 과분하다. 이화장이라면 오래 전에 죽은 권력자의 처소가 아니었던가? 그 인간이야 싫더라도 그 세도는 좋아서 누가 이름이나마 그렇게 정한 모양이다.
사람들이 비속하다. 언젠가 어느 여관에서 홀로 잠을 자다가 내가 문득 일어났다. ‘분명히 문을 잠그고 잤는데…….’ 잠도 덜 깬 눈으로 보니 내가 간첩인가 하여 누가 경찰을 데리고 온 것이다. 그는 제집에 온 손님을 수상한 사람으로 보고 이 기회에 팔자라도 고칠까 한 것이다.
여관에는 여관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방이 뜨뜻해도 뭔가 눅눅한 것만 같고, 어딘가 퀴퀴한 냄새가 남은 듯한, 거긴 이상한 공간이다. 특히 비가 내리는 날이면 그 기운이 더하다. 구태여 말하자면 고적함이라고도 하겠는데,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에도 뭔가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하여간 나한테는 상당히 비위가 상하는 환경이다.
그렇기로 내가 어쩔 것인가. 여기서 내가 개결함을 찾겠는가. 그나마 집을 나온 지 며칠이나 지난 터에, 객지에서 홀로 떠돌며 질퍽거리는 길을 걷자니, 여간 심사가 울적한 게 아니었다. 이런 터에 내 취향을 따진다는 자체가 이미 적절하지 않다. 나는 체념했다.
역시 여기에도 옷장이 있고, 화장대가 있고, 달력이 있고, 텔레비전이 있다. 수건과 칫솔도 있다. 침대 위에는 베개도 두 개 가지런히 놓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방에 머물렀을까? 그들이 여기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잤을까? 그거야 아무도 알 수 없다. 내가 알 필요조차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나는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누가 감히 인생을 우습다 이를 수 있으랴. 그런데도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한편으론 그게 가능한 것도 같다. 이게 다 오만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사람이 싫다. 나는 그렇게도 중얼거렸다. 내가 살던 곳을 떠나니 내 정신마저 해이해지려나.
밖엔 진눈깨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사방은 고요한데, 옆방에서 젊은 남녀가 뭐라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약하게 들린다. 남자는 ‘하자’ 그러고, 여자는 ‘말자’ 그런다. 이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여자의 높고 낮은 신음이 들리고, 그 여자가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남자가 여자를 달래는 소리가 두런두런 이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심신이 눅눅한 터에 이러니 잠이 더 오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텔레비전이나 볼까 하여, 스위치를 넣고, 채널을 돌렸다. 그러나 이미 밤은 깊어 방송도 끝이 났다. 그러자 당시로선 첨단이라 할 비디오가 제 몫을 한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그게 그 이화장여관에서 방영해 준 영화의 제목이었다. 그 얄궂은 이름에 걸맞게 그 영화의 내용도 무척 싱거운 거였는데, 나는 그 영화를 그 자리에서 끝까지 다 봤다. 사는 게 언제나 고상할 수야 없다. 그러니 사실은 그 분위기에 그게 꼭 어울리는 영화이기도 했다.
나중에 내가 어디서 그 영화를 봤다니까, 한 사나이가 반색을 했다. 자기는 그 영화를 보고 아주 감동을 했다나. 나는 그 말에 갑자기 까닭 모를 웃음이 터졌다. 내가 왜 그렇게 웃었을까? 나도 몰라. 그 파안대소가 내 물건도 그렇게 멀쩡하다는 잠재의식의 발로였을까? 그렇다면 나도 무척이나 우스꽝스럽고 상스러운 수컷이다.
방긋 웃는 그 얼굴
원효 스님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이나 초의 선사의 동다송(東茶頌)은 지극히 간략한 문장이다. 이 짧은 글을 아끼고 아껴 읽고 또 읽는 분들이 있다. 개중에 더러는 애정 어린 설명을 붙여 제법 두툼한 단행본으로 내기도 한다. 그 마음이 곱다. 그 정성이 고맙다.
앞날이야 아무도 모른다. 이건 다행이다. 그러나 역시 우리들 모두는 죽음의 눈길 아래에 있다. 이리하여 어떤 이들은 우리들의 삶을 덧없다 한다. 어떤 이들은 죽음을 애써 외면한다. 그러나 이게 원효나 초의의 길은 아니다.
한때 내가 폐결핵을 앓았다. 이미 치료약이 있는데, 내가 죽기야 하랴. 당시에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직감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의지와 무관하게 다 끝장이 날 수도 있겠구나.’
치료 기간 내내 나는 예민했다.
많은 이들이 무병장수를 기원하지만, 그들이 다 소원을 이루는 건 아니다. 누구는 건강하게 살다가 나이 백 살에 곡기를 끊었다지만, 당장 자신이 그렇게 오래 살 것이라 믿기 어렵다.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났더라도 나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
내가 병으로 진작 죽었더라면, 나는 이렇게 글을 쓰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죽고 사는 일이 언제라도 본질적으로 달라진 적 있었던가? 그게 그렇지 않다. 상황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게 조금 미뤄졌을 뿐이다.
‘나이 쉰만 넘으면 요절(夭折)이 아니다.’
이런 안씨가훈(顔氏家訓)의 가르침이 아직도 타당하다.
이런 사람은 이렇게 살고, 저런 사람은 저렇게 산다. 사람과 사물이 만나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같은 말과 글도 형편에 따라 각각 다르게 뒤섞인다. 이는 당연하다. 마침내 추억을 남기는 방식도 다 같지는 않구나.
‘무엇이 급하다고 그리도 서둘러 갔나…….’
은해사 수림장(樹林葬)에 갔더니, 누군가 그렇게 남긴 글이 있었다. 무척 젊어서 떠났구나! 여긴 납골당이니 뭐니 하는 것도 없다. 소나무 아래 땅을 조금 파서 분골(粉骨)을 흩었나 보다. 주위가 문득 고요하다. 조그마한 명패가 더러 나무에 달렸다. 누군가 다녀간 흔적도 솔바람과 함께 몇 송이 꽃으로 남았다.
한참 묵묵하다가, 나는 돌아섰다.
‘우선 환하게 웃어야지.’
어둡게 보면 그 어둠이 너무 짙다. 가볍게 보면 만사가 다 가볍다. 이러니, 내가 시원스레 웃을 일이다. 설령 웃을 일이 없더라도 그렇게 웃으면 좋지 않을까……. 나 즐겁게 살아야지.
나 아직은 죽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도 어리고, 나도 바쁘니까. 과연 이게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누군들 이렇지 않았을까? 나이가 들어 귀가 먹고 눈이 어두워도 더 살겠다 하는 게 인간이다.
‘나야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런 분들이 차라리 드물다.
이제 내 나이도 마흔이 넘었다. 아직은 한창 좋을 때라지만, 그러나 이미 이 나이에 이르기 전에 이승을 떠난 이들도 많구나. 그래도 누가 사십대에 죽으면, 사람들이 그 나이를 아쉬워 한다. 그러니까 그 인간이 시원찮아도 아주 버림을 받지는 않는 나이인가 보다. 그러니, 웃어야지, 방긋.
수저 한 매
옴마니반메훔! 밥이 하늘이었다. 사람들은 쉬이 다반사(茶飯事)를 말하지만, 그러나 누구라도 다(茶)를 잊을 수는 있어도 밥을 거를 수는 없다. 그러니 우선 수저부터 한 매 챙겨야지. 설령 밥이야 밖에서 험하게 먹더라도 수저는 꼭 좋은 걸로 한 매 챙겨야지.
참선(參禪)이 다 뭐더냐! 이 수저가 바로 화두(話頭)로다. 나도 이미 예전에 이걸 실감했다. 짝이 맞지도 않는 수저를 잡고 밥을 먹자니, 어쩐지 내 인생마저 비루해져. 그래서 나도 한때 반듯한 수저 한 매를 챙겨 다녔다.
수저를 들고 다니는 내 소행을 두고 메뚜기는 논에서 별스럽다 했다. 그 말이 아주 그른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도 남의 집이나 식당에 손님으로 가서 내 수저로 밥을 먹지는 않았다. 나는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고자 했으니까. 그런데도 눅눅한 날 홀로 밥을 먹을 적이면, 나도 숟가락으로 밥알을 꾹꾹 누르고 만다.
사람이란 귀하게 보면 참 귀한 존재이지만, 천하게 보면 그 정도로 천한 존재이다. 마구 먹고 시끄럽게 떠벌리다 끝내 늙고 병들어 죽는 운명을 보나, 내 하루하루 연명하는 꼴을 보나, 살아도 살아도 제대로 살기는 사는 것인지 의아스럽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온갖 모습들이 그지없이 아름답다. 삼라만상이 늘 이렇다면, 내 굳이 해탈을 꿈꾸지 않아도 좋으리.
칠성무당벌레는 숲에서 말한다. 아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그 누군가 굵은 눈물 뚝뚝 흘리며 어설픈 수저 더 어설프게 잡고 꾸역꾸역 밥을 먹을 것이다. 과연 그는 언젠가 내가 겪었던 바로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 그렇겠지.
“이 놈아, 그 눈물도 그럴 여력이 있어 흘리는 줄이나 알아라, 이 쓸개 빠진 놈아!”
이런 매운 덕담 몇 바가지 더 얻어먹으면 그 눈물도 보석이 되려나. 하지만 아직은 그 놈도 서럽기만 하리라. 놈은 그저 복받치는 설움 주체하지 못해 눈물 콧물 쏟으며 가소롭게도 신세 한탄이나 하겠지.
누구라도 세상을 살면서 한 번도 사는 게 고달프다 외롭다 울어 보지 못한다면, 기실 그것도 불행이다. 어쩌면 그런 놈들은 인간도 아니라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궂은 날을 대비해 수저 한 매 챙기는 위인의 소행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하, 부전나비가 뭐라 하더냐, 호랑나비가 뭐라 하더냐.
누구는 내게 아주 겁이 많은 좀팽이의 방패를 말했고, 누구는 내게 이런저런 물정을 다 알아 버린 생활인의 고집을 말했다. 수저 한 매를 두고, 바로 이 수저 한 매를 두고, 누구는 내게 세상사에 더 미련이 없어진 회의주의자의 균형추(均衡錘)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게 평범한 인간이 드러내는 소박한 유머 감각이었으면 좋겠다. 옴마니반메훔!
│김인기 작품론│
다정다감한 마음의 촘촘한 결
이 하 석 (시인)
“산문은 도보, 시는 춤”이란 발레리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코플랜드 같은 이는 “우리는 모범적인 수필가를 생각할 적마다 그가 구경꾼이며, 방랑자요, 빈들거리는 게으름뱅이요, 가장 좋은 의미에서 세계 시민임을 발견하게 된다”라고 했다. 같은 의미의 말이라 생각된다. 또는 수필에 관한 유명한 산문으로 꼽히는 피천득의 “수필은 청자(靑磁) 연적(硯滴)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라는 글에서도 수필에 대한 같은 의미 또는 정서를 읽을 수 있다. 그러니까 수필은 격외(格外)의 것이면서도 격외 안에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문학의 여러 장르들 가운데서 가장 덜 취급받는 듯하면서도 기실은 가장 글쓰는 이의 체취와 향기가 강하게 묻어나는 장르가 수필이다. 고상한 논변이든, 딱딱한 설명이든, 여행기든, 마음의 풀어냄이든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수필을 잘 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김인기의 산문들을 읽으면서 나는 수필의 멋스러움과 더불어 한 자상한 몽상가의 체취를 느낀다. 가령 다음과 같은 말을 할 때도 말이다.
나는 이 세상을 살면서 수필가 아무개로 충분히 만족한다. 내가 수필가란 그 이름에 값하지 못할까 오직 그게 두려울 뿐이지, 내 특별히 바라는 명예는 없다. 그래서 그럴까? 나는 내 문장에 비어(鄙語)를 들일 때면 늘 조심스럽다. 그러나 의사가 극약처방을 알아야 한다면, 수필가는 마땅히 극언을 다룰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극약만큼 극언은 위험하다.
― 「성전청자(成田淸子), 그 사람」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태도를 밝히고 있는데, 그 한계를 선명하게 설정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안분과 지족의 체득, 해야 할 말과 하지 않아야 할 말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 그리고 남에 대한 극진한 배려 같은 게 느껴진다. 그것은 쉬운 일인 듯하지만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의 글들은 일상생활의 구석진 곳에 대한 관심이 많이 보인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들,
어느 봄날에 아내와 내가 서문시장에서 딸기를 샀다. 시세에 비해 무척 싸다고 우리들은 기뻐했는데, 집에 와서 보니, 그건 이미 많이 문드러졌다. 우리는 그 딸기의 태반을 버려야 했다. 한때 아내가 난전에서 알이 굵은 포도를 샀는데, 그 포도 속에 작은 구더기들이 많았다. 좋은 물건이 시세보다 쌀 수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한동안 속았다.
―「언젠가 그리울 나날들」
에서도 보이듯 세속 삶이 가지는 상처와 아픔들이 도드라지는 그런 장면들이 많이 보인다. 가족과 친구들, 동네 사람들의 궁벽한 삶의 모습들, 주변의 여러 가지 생활도구들, 여행기들…… 그러나 이런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것처럼 보이는 것들일지라도 그의 눈길에 잡히면 새삼 새로워지고 각별한 의미가 있어진다. 그것은 그의 시선이 분명하면서도 따뜻하면서, 사람 사는 그 속에서 맑은 샘물을 길어 올리려는 극진함이 사사건건 떠받쳐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 눈길은 생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면서 그윽해지기도 한다. 1999년에 나왔던 그의 첫 산문집 『함께 가는 우리들』의 세계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면서도 그 눈길은 훨씬 더 자상해지고 깊어졌음을 느낀다. 따라서 글의 맛도 훨씬 더 오묘해졌다. 그는 자신의 글에 대해 “이렇게 시시한 이야기를 당당하게 하기까지, 나는 참 힘이 들었다”(「규목필통기」)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는데, 그간의 글 세공력 연마에 각고의 힘을 들였음을 은연중 말하고 있는 듯해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의 수필의 맛은 다음과 같은 짧은 산문에서도 드러난다.
남들은 다 나와 같지 않던데, 나는 왜 이러냐. 혹시 그대가 이 순간에도 자신의 처지를 그렇게 불평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지는 말자. 때로는 공연한 비웃음을 당하더라도, 그대는 서러워 마시라. 나 혼자만 죽어라 고생한다고 여기지도 마시라. 못마땅한 시대를 너무 탓하지도 말라. 그대가 한탄하는 바로 그런 곳에 뿌리를 내린 저기 저 연꽃은 저리도 곱게 피지 않느냐.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무척이나 아프다…… 사방에 널린 숱한 들꽃들도 다 이렇게 피었다가 지나니, 내 삶이라고 그것들과 달라야 할 이유도 없나니. 그러니, 환하게 핀 연꽃들이 늘 그렇듯, 그대도 잠시나마 하늘을 우러러보라. 그러면 그대도 들을 것이니, 멀리서 뻐꾹뻐꾹 우는 뻐꾸기 소리를.
―「연꽃이 핀 풍경」 전문
연꽃을 바라보는 시각적인 묘사와 뻐꾸기 소리를 듣는 청각적인 인식을 교묘하게 배합하여 생에 대한 각성의 한 자락을 넌지시 드러내 보인다. 그가 지향하는 생의 자세는 자연스러운, 더 나아가 자연과의 조화와 합일을 통한 깨달음 속에 있다. 특히 그의 글에는 자연에 대한 인식이 극진하게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바람, 우리들을 부른 건 바로 바람이었다. 그러니, 누구라도 우리에게 죄를 묻지 말라. 죄는 다 바람에게 있으니. 그래도 그럴 수 없다고 한다면, 아름다운 자태로 우리를 들뜨게 한 산수유랑 매화에게도 눈을 흘길지어다. 동백꽃이 다 지기 전에 정겨운 여수의 봄빛에게도 그 죄를 물으시라.
―「동백은 죄가 없고」
라는 멋진 정서도 자연을 빗대어 나타날 때 생기를 띤다.
그의 자연관은 동양적인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많이는 불교적 인식과 닿아 있는 듯하다. <그대가 한탄하는 바로 그런 곳>에 연꽃이 뿌리를 내리고 곱게 핀다는 인식은 불교적 인식의 한 단면이다. 안분과 지족, 그리고 자기 한계를 분명하게 하고 짚어 나가는 자세가 「연꽃이 핀 풍경」이란 짧은 글에서도 느껴진다. 그러한 생각과 태도를 시각적인 묘사와 청각적인 인식으로 얽어 짜 보임으로써 이 글은 시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잘 쓴 수필은 시보다 낫다는 게 이런 때 해당되는 말이리라.
또한 그의 주된 관심은 사람 사는 이야기, 살아가는 일에서 생각의 중심을 잡는 이야기, 무엇보다 구석진 삶에 대한 관심, 그리고 가족애 같은 일들이다. 더러 자신의 업이라 할 수 있는 책과 문학에 관한 얘기들도 많지는 않지만 빠지지 않는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책에 관한 이야기도 사랑한다. 이 사랑이 더 깊어지면 그 이야기도 많이 알아서 이제는 더 알 것도 없어진다. 그런데도 끝까지 그런 이야기를 사랑하다가 이미 다 아는 그 이야기를 또 즐겁게 듣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하자면 이들은 아주 황홀하게 실성했다고 하겠다.
―「책을 아주 좋아하다가」
무릇 벽(癖)을 갖는다는 게 어떤 일에 미치도록 집착하는 일이긴 하지만, 책을 좋아하고, 나아가 책을 써서 출판하는 문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런 상태를 <황홀한 실성>이라 했다. 그 실성은 심할수록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실성상태에 빠져 있으며, 그걸 행복해 하는 듯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의 관심은 역시 사람 사는 일에 대한 것이다. 특히 인생을 일관하여 산 이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가난하지만 비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는 참 많다고 그는 느낀다. 당연히 현실적인 문제들, 예컨대 남북 문제라든가, 4·3사태 등에 대한 관심도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런 태도는 내 삶은 물론 남의 삶에 대한 애정이 남달리 깊어서 그 인정과 배려의 마음이 극진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아울러 이웃과 역사에 대한 인식의 눈을 늘 맑게 뜨고 있으려는 지식인으로서의 자세 가다듬기도 쉬임 없이 유지됨을 우리는 든든하게 여긴다. 자연과 사람의 일을 하나로 버무려 엮어내는 그의 글은 아주 극진하고, 자상하면서 촘촘한 마음의 결을 잘 드러내 읽는 이의 마음을 강하게 잡아 끄는 매력이 있다.
│문학적 자전│
어느 나방의 내력
김 인 기
배추벌레한테는 배추가 세상의 전부이다. 아주 견문이 좁은 사람을 비유하여 누군가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을 두고 배추벌레라 할 수야 없겠지만, 나는 이런 표현에서 일말의 타당성을 느낀다.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들 또한 자기가 겪은 바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특히 열 살 이전에 체득한 것이 제 삶의 원형이 되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산골에서 자랐다. 내가 언제 한글을 깨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고향에 댐이 생긴 지도 이미 수십 년이 지났다. 산을 넘고 내를 건너 다니던 초등학교도 이제는 아주 사라졌다. 그래도 더러 물이 줄면 내 살던 마을도 드러나서 그 자리에 서 보는데, 내가 늘 확인하는 게 있다. 예전엔 그렇게나 넓어 보였던 데가 사실은 그렇지도 않구나. 여긴 정말 깊은 산골이구나.
거긴 집성촌이었다. 인근이 모두 다르지 않았다. 나는 한때 모든 동네가 다 이와 같은 줄 알았다. 겨우 스무 집이 작은 내를 사이에 두고 한 마을을 이루었는데, 거의 대다수가 일가였고, 타성 몇 집이라 하더라도 오랜 세월 동안 이웃하여 살아 기실 아무도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
이러니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로 어둠을 밝혔던 내 어린 시절에 보고 들은 것들이 무척이나 고색창연(古色蒼然)했다. 그래서 나는 요즘도 누가 산소를 어떻게 하였다거나 오밤중에 도깨비를 만났다는 둥의 이야기가 익숙하다. 정화수 앞에서 두 손을 싹싹 비빈다거나 객귀를 물린다며 마당으로 칼을 내던지던 할머니의 행동도 마치 어제의 일인 양 암암하다.
“김 주사! 아이고, 우리 김 주사! 하하하!”
도대체 주사란 게 대단한 벼슬도 아닌데, 왜 할아버지는 그러셨을까? 내 응석 또한 대단했는데, 할아버지한테 늘 ‘대감’이기도 한 ‘주사’는 또래보다 한참 늦도록 늙은 암소가 우두커니 서서 커다란 눈알을 굴리는 마당 한구석에 똥을 누고도 직접 뒤를 닦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유별난 손자 사랑이 두루두루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그게 우리들한테는 충분히 가능한 환경이기도 했다.
‘왜 아이들 싸움에 어른이 끼일까?’
‘아무개 아버지야 무슨 일을 하거나! 그게 어째서?’
‘장학사야 오거나 말거나. 그런데, 왜 이렇게 법석인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봄에 대구로 전학을 와서 무척 의아스러웠던 게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내가 조숙했던가? 그럴 리가! 그런데도 나는 이런 생각을 다 했다. 이게 지금도 신통하다. 나로선 어른들이 기이했다. 내 판단으로는 그게 그럴 일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문학의 내력이란 걸 따져는 보지만, 그래도 나는 역시 모르겠다. 나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내 정신의 풍경을 나도 헤아리기 어렵다. 나한테도 처음 만났던 시간과 공간이 심대한 영향을 끼쳤을까? 내 살던 집은 동네에서 조금 높은 곳에 떨어져 있었는데, 그 앞으로 보리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시야가 막히면 언제나 불편하다.
나는 늘 트인 공간을 앞에 둔다. 지금 내가 사는 집도 그렇다. 나는 서재에서도 벽을 등지고 앉게 책상 배치를 한다. 글마저도 처음부터 따옴표로 시작하는 대화가 나오면 어색하다. ‘이건 너무 느닷없어!’ 내게는 전후좌우로 어떤 여유가 필요하다. 사람들과의 사이에도 일정한 거리가 있어야지 친하다고 마구 대하면 그만 거북하다.
그런데 이 거리란 것이 다 자[尺]로 잴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마다 요구하는 거리가 상이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일기니 편지니 하며 글을 썼던 내 행위도 결국 내게 필요한 마음의 거리를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었던가! 이렇게 생각하니 그게 그랬던 것도 같다. 내가 수필가란 것도 그래. 수필가로 살고자 어렸을 적부터 의도한 게 아니라, 내 나름의 기준으로 늘 뭔가를 읽고 썼는데, 이게 바로 수필가의 길이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학교와는 인연이 별로 없는 분들이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고, 어머니는 그나마 초등학교도 몇 달 다니다가 말았다. 그런데 이게 한때 고향이나 외가에선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이분들이 독서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세상 물정에 어둡지는 않았다.
이승만 정권 시절의 토지개혁에 관한 글을 읽다가 내가 어머니한테 당시의 정황을 물은 적이 있다. 이게 생존과 직결된 일이어서 그랬을까?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겪은 그 일을 아주 소상하게 알았다. 한글도 제대로 깨치지 못한 분이 그 방면의 전문가에 필적하는 이해를 하다니. 군사정권 당시 그렇게나 방송에서 좌경이니 용공이니 하며 떠벌렸지만, 재야 운동권 인사들에 대한 어머니의 판단도 정확했다.
내가 부모 세대와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두 분이 다 돌아가신 지금 다시 생각하면, 적어도 한 가지는 같다. 그 누구를 함부로 찬양하거나 그에 대해 좀처럼 험담하지 않는다. 이건 그에 대해 무심해서가 아니다. 예전 어른들은 그런 걸 다 ‘상놈들의 짓거리’로 알았고, 요즘 나는 그런 걸 ‘천박한 소행’으로 여긴다. 이런 태도의 근원을 따지고 보니,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된 것들이 떠오른다.
나는 늘 뭔가를 읽는 상태이다. 더러 감정이 상해서 손에서 책을 놓아버리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건 일종의 사고라 할 일이고, 나는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살아왔다. 글을 읽거나 쓰면 머리가 맑아진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구해 읽으니 즐겁기도 하다. 그렇다고 내가 재미만 좇는 것도 아니다.
내가 내내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여러 신도들과도 어울려야 할 터이니, 그 교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군인들이 득세한 탓에 군사문화가 어떻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군대를 폐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령 그걸 그렇게 하더라도 뭘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나아가다 보니, 나는 해방신학이니 중관사상이니 전략전술이니 성리학이니 파시즘이니 하는 책들을 뒤적이게 되었다.
매사가 다 그렇지만 독서도 역시 새끼를 친다. 그 새끼가 또 새끼를 치는 격으로 나아가니까, 결국 책 사느라고 내 주머니가 다 빈다. 아마도 내가 죽을 때까지 읽지도 못하고 말 책들도 내 서재에는 제법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또 책 살 궁리나 한다. ‘요즘 영상매체가 저렇게 활개를 치는데, 저것들이 사람들한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서도 좀 봐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아직도 이렇게 미진하다.
이런 태도가 일종의 질병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런 일로 내가 그렇게 손해를 보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알고 보면 다 재미난 현상이거니와 나 자신을 지키는 결과도 되었다. 대학 새내기 때 내가 책으로 노장(老莊)과 간디와 백범을 만났는데, 감수성이 예민할 적이어서 그랬는지, 내가 감화를 많이 받았다. 노장은 ‘억지스러운 작위’의 폐단을, 간디는 ‘하느님이 진리가 아니고, 진리가 하느님’이라는 진실을, 백범은 ‘순박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용기를 보였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적이다. 어느 날 정권이 무너지자 그렇게나 유신헌법의 위대성을 역설했던 인물들이 돌변하였다. 그게 정녕 그렇게나 문제가 많은 것이었다면 진작 좀 그러지. 그러다가 정국이 또 흔들리자 상황은 다시 바뀌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이 한때 나를 무척 실망스럽게 했다. 어지러운 시대의 황당한 편린들이다.
한때 나는 난치병을 고친다거나 어떤 발명이라도 하는 과학자를 선망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분명 의미는 있을 일이다. 그러나 무고한 사람들이 마구 죽는 건 더 큰 문제이다. 무엇이든 의심하기 시작하면 다 의심스러운 법이다. 도대체 세상에서 훌륭하다는 것들이 훌륭해 보이지가 않았다. 그 판단 기준이 어디에 있으며, 그것에 제 삶을 다 바친다 하여 충분하다는 근거는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건 내게 깊은 수렁이었다.
나는 이런 저런 책들을 찾아 읽었지만, 항상 그 나름의 이유란 게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남들한테 자랑조차 되지 못하는 책들을 사느라 돈을 쓰지는 않았으리라. 그런데 이런 짓도 오래 하다 보니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이미 오래 전에 나와 같은 문제로 고민한 분들이 아주 많았구나.’ 이러면 내게 또 책을 살 구실이 생긴다.
나도 나이가 드는가? 근래에는 아주 정교한 논리보다 조금은 아득한 연민이 자꾸 생긴다. 이게 나 자신에 대한 것인지 남들에 대한 것인지 나도 모른다. 결국은 누구나 이러다가 늙어서 죽는구나. 삼라만상에 대해 허망하다는 인식은 없다. 그러나 모두 측은하지 않느냐. 그래서 논리로 따지면 외면해야 마땅할 비행마저 더러 인간적인 면모로도 보인다.
나는 아직도 문학이 무엇인지 모른다. 나야 그저 그 가까이에 있겠지. 어쩌면 이런 내 느낌조차 한갓 착각일지라도, 내겐 뭔가 건드려야 할 것들이 있지 않을까? 설령 이게 문학이 되지 못하더라도 누군가는 언급해야 하지 않을까? 저마다 먹고 산다고는 하지만, 그 삶의 내용이 너무나 비루하다.
더러 자신의 이력을 밝혀야 할 때가 있다. 어디에서 아무개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느 대학 무슨 학과를 나왔고, 직업은 무엇이고, 혼인은 하였는지 말았는지 하는 등속이다. 자기가 가진 게 뭐라는 식의 주장이 때로는 애틋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것들이 다 배추에 붙은 벌레의 구구한 사정이다.
배추벌레는 나중에 배추흰나비가 된다고 한다. 그러면 그 배추흰나비는 배추가 세상에서 하찮은 존재란 사실도 단박 깨달을 것이다. 배추벌레와 그리 다를 바 없는 인간도 나비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로선 영광이겠다. 그러나 이건 내 욕심이 아닐까? 어두운 밤 가물거리는 불빛에 홀려 날아들었다가 끝내 불길에 날개를 태우는 나방이라면 모를까! 퍼덕퍼덕. 그러고 보니, 나는 어쩐지 나비보다 나방에 더 가까운 생물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