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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뿐인 첫 외출
5학년 때에는 잊지 못할 두 가지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하나는 도중 하차한 핸드볼 팀의 경험이다. 새로 부임해 온 진흥재 선생님이 운동을
좋아해서 핸드볼 팀을 창단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운동을 잘 한다고
선발된 10명 정도의 친구들과 방학 내내 뙤약볕 속에서 맹훈련을 했다. 방학이 다 끝나갈 무렵 진흥재 선생님은 훈련이 어느 정도 되었으니 다른 팀과 연습경기를 해 보자며 당시 최강팀으로 알려진 명륜초등학교로 무턱대고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그런데 핸드볼 팀이 어디를 갔는지 나오지 않은 바람에 아이들을 다시 강팀 중의 하나인 금정초등학교로 데려갔다. 우리들이 실제로 핸드볼 시합을 해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동안 연습해 온 실력을 도저히 발휘할 수가 없었다. 연습할 때는 그냥 패스하고 다시 패스된 볼을 받아서
골키퍼가 지키는 골문으로 점프 슛을 하면 되었다. 그런데 막상 시합에 들어가니 덩치가 큰 아이들이 블로킹을 할뿐만 아니라 뒤에서 팔을 붙잡는 것이 아닌가. 슛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고 실제로 슛할 찬스를 제대로 만들지도 못했다. 게다가 상대의 공격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블로킹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덩치와 체력, 주력, 팀 플레이 등 모든 면에서 금정초등학교
선수들은 우리보다 여러 수 위였다.
우리 선수들은 슛을 두 번 밖에 하지 못했고 그나마 모두 골키퍼에게
안겨주고 말았다. 완전히 주눅이 들었던 탓인지 나는 슛 찬스가 왔는데에도 슛을 하지 못하고 공을 뒤로 돌려 버렸다. 이 바람에 화가 난
진흥재 선생님으로부터 그 자리에서 뺨을 한 대 맞기도 했다. 결국 11
대 0 이라는 참패를 기록하고 말았다. 완패를 한 연습 경기가 끝난 뒤
어느 짜장면 집에서 동항초등학교의 핸드볼 팀은 소리 없이 해체되었다. 하지만 핸드볼 경기 때문에 그 날 나는 처음으로 명륜동과 장전동이 있는 동래 방면으로 나와 보았고, 같은 학년이면서도 그렇게 덩치가 크고 실력이 월등한 아이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감만동 골짜기 부산 촌놈의 상처뿐인 첫 외출은 그렇게 끝났다. 아, 세상은 얼마나
넓은가!
또 하나의 경험은 부산시내에 있는 초등학교 대항 체육대회에 육상
선수로 출전한 것이었다. 부산 시내에 있는 수 십 개의 초등학교가 참가한 이 체육대회에서 동항초등학교는 가장 작은 규모의 선수단을 출전시켰다. 남녀 육상 100미터 선수와 400미터 릴레이 선수, 그리고 넓이 뛰기 등 몇 종목에만 출전한 12명 정도의 선수가 본부석을 통과할
때는 박수와 웃음소리가 교차했다. 이 대회에서 나는 100미터와 400미터 릴레이 결승 주자로 참가했다. 먼저 100 미터 예선에 나갔는데
같이 출발선에 선 선수들이 꼭 고등학생처럼 덩치가 컸고 다리통 역시 통나무처럼 우람했다. 미리 기가 죽어서인지 100미터 예선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우리 학교 최고의 주자가 예선에서 꼴찌에서 두 번째로 탈락하고 만 것이다. 이어서 열린 400미터 릴레이 예선에서는 운
좋게 2등을 하여 준결승에 올랐다. 그런데 준결승에서는 세 번째 주자가 꼴찌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꼴찌로 바통을 넘겨받은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두 명을 따라 잡았지만 이미 실격을 당하였다. 남의
코스로 뛰었던 것이다. 이 참담한 패배는 어린 내 가슴에 오래도록 남았다. 그리고 이 체육대회의 경험은 세상이, 아니 부산 바닥이 얼마나
넓은지, 그리고 대단한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는 기회였다.
위인들의 세계
“우와.”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머니 이게 우짠 일입니꺼?”
어머니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우짠 일은 우짠 일. 니를 위해 무리를 좀 했지.”
앉은뱅이 책상 옆에는 세계위인전집 50권이 즐비하게 꽂혀 있었다.
퀴리 부인, 아인슈타인, 슈바이쩌, 에디슨, 링컨, 알렉산더, 징기스칸,
……
“어머니, 고맙습니다.”
그 정도의 책을 사자면 많은 무리를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머니의 얼굴은 환하기만 했다. 아무리 어려워도 좋은 책을 자식에게
읽히고 싶은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부터 하루에 한 권씩 읽고 독후감을 써봐라. 할 수 있제?”
“알겠습니더. 어머니.”
“니도 이 책에 있는 사람들처럼 훌륭한 사람이 돼야 된데이. 우리 석준이는 꼭 훌륭한 사람이 될끼다. 나는 니를 믿는다.”
그날부터 책에 빠져들었다. 당시에는 텔레비전도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 갔다오면 숙제 해 놓고 친구들과 놀거나 책을 읽는 게 전부였다. 5학년 접어들면서부터는 중학교 입시 준비를 해야 한다고 아버지도 집안 일을 면제해 주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과학자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 날부터 나도 과학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아직 어리고 뭘 몰랐던 나는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발명을 많이 해야 되는 줄 알고 내가 크기 전에 다른 사람이
다 발명해버리면 어쩌나 하는 얼토당토 않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 이 위인전에 있던 많은 지도자들의 일생이 알게 모르게 내
의식 속에 자리잡아 갔다. 이때 대부분의 아이들도 이리저리 알게 되는 링컨이나 알렉산더나 징기스칸 같은 인물 이외에도, 터키의 독립을 주도한 케말 파샤, 인도의 간디, 중국의 손문, 이집트의 낫세르 등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자기 나라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노력한 위대한 지도자들의 파란만장한 삶은 어린 내 가슴에 적지 않은 충격과 감동을 심어 주었다.
잊을 수 없는 스승, 김광덕 선생님
5학년 때는 어머니에게서 위인전을 선물 받은 일 말고도 큰 일이 있었다. 바로 일생 동안 잊을 수 없는 스승을 만난 일이었다. 김광덕 선생님이 그 분이다. 김광덕 선생님은 내가 4 학년 때 동항초등학교에 부임해 왔는데, 실력 있고 강직한 선생님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엄청 무서운 분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과 함께 이 땅에
돌아와서는 수산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나이가 늦도록 장가를 가지 않고 혼자 사는 노총각 선생이었다. 아이들에 대한 애정은 넘쳤지만 반골 기질을 타고난 김광덕 선생님은 교장이나 교감
선생님과 마찰이 잦았고 그 때문에 내가 6학년이 될 때는 다른 학교로
전출을 당했다.
5학년이 되어 등교하던 첫날 나와 한 반에 배정 받은 친구들과 담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니는 누가 우리 담임 됐으면 좋겠노?”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누가 되면 좋을 지는 모르겠는데 딱 한 사람은 안돼야 된다.”
“누구?”
“누구겠노. 학생을 때리면 얼반 죽이는 김광덕 선생님이지.”
“맞다. 김광덕 선생님만 담임 안 되면 된다. 그자.”
친구들도 내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깔깔대었다.
누가 담임이 되어 앞문을 열고 들어올까. 추측을 하며 내기를 건다고
교실 안은 온통 북새통이었다. 그러던 아이들도 앞문이 열리자 입을
닫고 숨을 죽였다. 한 순간에 교실 안은 찍 소리 하나 없이 조용해졌다. 바로 악명 높은 김광덕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선 것이었다.
“벌써 얼었나? 얼굴들이 와 그렇노?”
김광덕 선생님은 아이들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그렇게 만난 김광덕 선생님과의 인연은 나의 열여섯 번째 생일에, 선생님이 병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이어졌다.
김광덕 선생님에 대한 첫 기억은 엄청 두들겨 맞은 것이다. 나는 급장이라고 더 맞아야 했다. 반 아이들이 떠들면 급장이 통솔을 잘못해서
그렇다며 대표로 맞고, 누가 말썽을 부리면 그것도 급장이 급장 노릇을 제대로 못해서 그렇다며 맞았다. 그러면서도 정이 들었다. 선생님이 그렇게 무섭게 굴어도 얼마나 우리한테 애정이 많은 분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냥 무서운 게 아니라 원칙을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그 원칙을 어그러뜨리지 않으면 굉장히 헌신적이고 자상한데, 그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아주 단호했다. ‘절대로 거짓말하지 마라’ ‘잘못한 일이 있으면 변명하지 말고 솔직히 시인하고 사과하라’ ‘약하거나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놀리거나 괴롭히지 마라’ 등을
주문했고 이런 것을 지키지 못할 경우 누구든지 혼이 났다. 그런 반면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서는 육성회비를 대신 내어 준다든지 학용품을
사 주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음악을 좋아해서
사비를 털어 악기를 사서는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합주단을 만들었다. 음치인 나도 그 덕분에 피리며 하모니카 등을 연주하는 것을 배우기도 했다. 가난한 변두리 학교에서 합주단 만들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김광덕 선생님은 교장이나 교감 가릴것 없이 나름대로의 기준과 원칙을 가지고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했고, 그것이 잘 반영되지
않을 때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대들었다. 급장이라는 이유로 많이
맞기는 했지만, 실력 있고 자신만만한 모습, 언제 어디서나 할 말을 하고 사는 당당한 반골 기질을 가진 그 선생님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선생님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다른 학교로 자주 전출을 당했다. 그러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학생들에게 엄청난 애정을 쏟으면서도 자기의 일에 몰두하는 모습이 참 보기에 좋았다. 중학교에
진학한 뒤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 선생님은 뭔가 획기적인 것을 발명한다며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시대를 앞서 사는 사람의 고독
6학년으로 올라갈 때 대부분의 아이들과 학부형들은 당연히 김광덕
선생님이 6학년을 맡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김광덕 선생님은 해운대 근처의 어느 학교로 전출을 가고 대신 새로
전근해 온 선생님이 담임이 되었다. 중학교 입시가 있던 당시에는 어떤 분이 담임을 맡는지가 진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공부를 괜찮게 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담임 선생님에게 과외수업을 받는 게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그런데 새로 온 선생님이 담임을 맡게 되니 5학년
때부터 김광덕 선생님에게서 과외를 받아 오던 나와 친구들은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는 담임 선생님이 아니라 다른 학교로 간 김광덕 선생님에게 과외수업을 받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담임 선생님에게 과외를 받는 학생과 김광덕 선생님에게 과외를 받는 학생들로
반의 아이들이 나뉘게 되었다.
그런데 전교 회장이자 급장인 내가 다른 선생님과 과외를 하게 되자
새로 온 담임 선생님으로서는 부담스럽고 괘씸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나는 두 선생님을 모셔야 하는 6학년 시절이 무척 힘들었다. 결국 그러다 부산중학교 입학 시험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전과목에 걸친 필기고사와 체육 실기로 이루어진 입학시험에서 커트라인이 2개 반이었는데, 3개를 틀렸던 것이다. 반면 나보다 공부를 좀
못했던 다른 반의 두 친구가 부산중학교에 합격함으로써 내 체면이
완전히 구겨지고 말았다. 그 때문에 석차로는 전교 일등을 하고도 졸업식 때에는 일등에게 주는 교육감상을 부산중학교에 합격한 친구에게 양보하고 교육회장상을 받아야 했다. 이처럼 부산중학교 입학 시험에서 낙방함으로써 인생의 첫번째 도전에서 좌절을 맛본 셈이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까지도 김광덕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뚜렷이
남아 있다. 지금부터 30여년 전인 1970 년경에 이미 선생님은 요즈음의 메모리 펜과 비슷한 것을 발명했다. 중학교 2학년 때인가 감천동
근처의 어느 학교로 전출을 당해 간 선생님을 뵈러 갔다. 그 때 선생님은 매케한 냄새가 가득한 작업실에서 희한한 펜을 하나 보여 주셨다.
사인펜 같은 것인데 물에 번지지도 않고 칠을 해도 밑바탕의 글자나
그림이 그대로 보이는 신기한 발명품이었다. 특허 신청을 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상품화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아 세상 사람들은 선생님의 그 발명품을 알아주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다음에 다시 친구들과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에는 언젠가 이것이 필요한 세상이 올 거라며
수산대학 출신답게 요트 제작에 골몰하고 있었다.
확실히 시대를 앞서 사는 사람은 고독한 법이다. 그들은 시대와 화합하지 못한 채 세상에서 고립되어 잊혀지거나 혼자 쓸쓸히 사라지기
쉽다. 김광덕 선생님도 그런 분인지 모른다. 자기 일에 대한 애정과 몰입 때문에 37살의 노총각으로 결핵이라는 병을 안고 쓸쓸히 돌아가신
것이다. 그것도 나의 열 여섯 번째 생일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