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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으로 퍼갈 수 없습니다.* 고구려의 첫 수도-졸본성 글/사진: 이종원
<사진설명:졸본성의 서쪽절벽-고주몽이 절벽위 평지에 나라를 세웠다.> "기원전 2-3세기경 고주몽은 비류수가에 나라를 세우고, 서쪽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 광개토대왕비와 삼국사기에 나온 이야기다. 천제의 아들 해모수, 물의 신인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 태어난 동명성왕(고주몽)의 신화가 바로 눈 앞에 펼쳐졌다. 신화는 얼토당토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늘에 우뚝 솟아난 바위 절벽위에 고구려의 첫수도인 졸본성이 있었다. 바로 고주몽이 하늘신 해모수의 자식다운 기상이 흘러나왔다. 졸본성에서 내려다본 비류수(혼강)는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의 머리결처럼 감미롭게 흘러간다. 하늘과 물의 만남 바로 고구려의 시작이다. 대제국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첫 걸음은 이렇게 신비스러운 곳부터 시작되었다.
고구려인이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절묘한 입지선정에 있다. 집안의 국내성과 환도산성, 평양의 안악궁과 대성산성 그리고 졸본성에서 보듯이 천혜의 요새를 확인하고 수도를 세웠던 것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절묘하게 이용하는 혜안이 고구려인들의 가슴 속에 불타고 있었다. 붉디 붉은 코스모스처럼.... 두 번째는 청한님이 말씀했듯이 고구려 사람들은 비류수와 압록강, 송화강등 물길을 절묘하게 이용했던 사람들이다. 미천왕이 왕이 되기전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소금을 팔았다는 것을 증명해주듯 거미줄처럼 연결된 수로를 통해 국가의 물자들을 실어 날았을 것이다. 졸본성에서 바라본 비류수의 물길과 집안에서 바라본 압록강과 통구하를 보니 더욱 그런 확신을 가지게 했다. 아마 평양의 대동강을 봤어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을거야. 세 번째는 신라가 금속공예의 민족이고, 백제가 흙의 민족이라면 고구려는 돌의 민족이다. 집채 만한 돌을 쌓아올려 장수왕릉을 세웠고 고구려의 수십개의 성이 아직까지 건재한 것은 고구려인의 돌 다루는 솜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여준다. 적은 병력으로 성에 진을 치고 장기전에 돌입했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적을 고사시키는 작전을 쓴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기다릴 줄 아는 국민이었다. 나 같이 성격 급한 사람은 고구려의 피가 덜 들어갔나보다. ^^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성. 바로 돌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중국의 고구려 유적지나 백두산에는 늘 중국 가이드가 따라 다녀야 한다. 전문 학술답사를 막기도 하고 태극기 흔드는 것도 방지하고...가이드라기 보다는 감시자로 따라온 것이다. 고구려 역사가 누구의 것인나 동명왕신화라든지...고구려에 관한 부분은 언급을 하지 않는다.아마 처음부터 가르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단지 뜬금없는 5선녀이야기와 일제때 항일전투에서 희생당한 5명의 여전사 이야기만 늘어 놓는다.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고구려 이야기인데.... 그래도 천성은 착하다. 우리를 위해 아리랑까지 준비했다.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성에서 듣는 아리랑 가락은 먼 땅에 온 코리안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다크호스님의 표정이 그걸 증명해주고도 남는다.
한국과 북한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졸본성(오녀산성)은 집안의 고구려 유적지와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중국은 동북공정- 즉 고구려역사편입 전쟁에 무려 1조원을 쏟아 부었다. 통일한국을 대비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다. 북한을 중국의 위성국가로 만들어 버릴려는 속셈이 숨어 있어 더욱 안타깝다. 포연 없는 전쟁의 한 가운데 졸본성은 어제도 오늘도 우뚝 솟아 있다. 마치 진리는 변치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듯...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어 오녀산성은 A가 4개인 국가등급 여행지다. 만리장성, 자금성, 계림등도 4A급.
서문주차장에서 내리면 까마득한 계단길이 하늘로 이어지고 있다. 직선의 계단길이 힘들면 '18반'이라고 불리우는 18굽이 지그재그 길이 있다. 이곳 역시 가마꾼이 있는데 처음엔 150원 달라는 것을 100원에 깎았다. 다리가 불편한 꽃님이님이 오늘 가마의 주인공이 되었다. 의자에 등을 붙이고 지긋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양반댁 규수댁이었다.
깔딱고개라고 할까? 통천문이라고 해야하나. 2천개의 계단을 20분여 쯤 올라가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드넓은 하늘이 펼쳐진다고 하여 '천창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해발 800m 정상에 남북 600m, 동서 200m, 둘레 1km의 평지가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서문 외부 모습이다. 사면이 깍아진 절벽이지만 그나마 서쪽만 경사가 완만하다.내가 생각하기엔 서쪽도 험한데.... 어쨌든 유일한 물자의 통로이며 적들이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이 곳 문 앞까지 다달은 적은 기진맥진하여 칼 한번 못 휘두르고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다.
성문은 옆은 U자형태의 치를 가지고 있어 적은 포위되어 3면으로 공격을 받게 된다. 이런 기술들은 두 번째 수도인 집안의 국내성에서 보다 발전되 치와 옹성의 형태로 나타난다.
(사진설명: 고구려의 들여쌓기 공법. 국내성, 환도산성외에도 장수왕릉에서도 이런 공법이 보인다. 고구려성으로 추정되는 단양 온달산성과 신라의 삼년산성도 이 공법을 사용했다. 고구려에서 개발한 선진 건축기법이다. ) 고구려인들은 성쌓기의 달인이다. 산등성이를 따라 성을 쌓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공사다. 그래서 고구려인들은 울퉁불퉁한 바위를 제거하지 않고 그 위에 바로 돌을 쌓는 '그랭이 공법'을 사용했다. 쌓는 돌을 바위 생김새에 맞춰 완벽하게 이가 맞게 하여 구조적 견고성을 높였다. 두 번째는 '수직쌓기'를 한 만리장성은 얼마 못가 허물어지는데 고구려성이 2천년을 견디어 온 것은 바로 고구려 특유의 '들여쌓기' 공법 때문인 것이다. 들여쌓기는 돌을 계단처럼 쌓는 것으로서 위에서 내려오는 압력과 안쪽에서 밀고 나오는 압력을 동시에 견딜 수 있는 구조다. 처음엔 이 성도 고구려 성임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중국에 조공을 바친 힘 없는 고구려가 이렇게 견고한 성을 쌓은 것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성쌓는 기법도 한족과 다르고 고구려 유물이 대량 출토되면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라리 고구려사를 중국에 편입시키는 것이 여러 모로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을 위협했다는 말은 한마디의 언급이 없다. 바로 동북공정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중국인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돈은 벌기 위해서는 한국관광객을 유인해야 했고 모두 보여주면 자국 역사가 위험해지고...그들은 한국관광객이 성 흔적만 대충 보고 그냥 갔으면 하는 것이 그들의 본심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졸본성만은 대충 보면 안 된다. 눈을 부라리고 우리것을 찾아내고 고구려의 기상을 각인시켜야 한다.
서문 안쪽의 모습이다. 중간에 움푹 들어간 곳은 보초병이 서 있던 공간이란다. 성문 위에는 망루가 있었을 것이다. 적의 동태를 파악하며 전의를 다지는 고구려 장수를 그려본다.
바깥성벽의 돌은 반듯하게 잘 다듬어 놓았다. 헐렁하게 보이면서도 빈틈이 없어 보인다. 성문의 기둥을 세웠을 듯한 홈이 파여 있다.
졸본성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어찌나 감개무량한지...고구려 300대 후손 쯤 될려나
대형주거터가 나온다. 왕궁으로 추정된다. 주춧돌 7개가 늘어선 형태로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 토기와 철기, 돌칼등 중요한 고구려 초기유물이 출토되었다.
도교사원터다. 안내판에는 옥황관으로 되어 있다. 청나라때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곳이었고 1966년 폐쇄되었다고 한다. 고구려도 도교를 숭상한 나라가 아닌가? 그 신성한 자리에 건물을 다시 올리지 않았나 추측된다.
이틀동안 백두산 천지를 3번이나 봤는데 졸본성에서도 천지를 만났다. 하늘의 자손인 고구려인들은 늘 하늘을 꿈꾸었다. 800미터 석산위에 샘물이 솟는 것 자체만으로도 하늘의 선물이었다. 이 샘물이야말로 생명수다. 아무리 성이 견고하더라도 물이 없으면 항복할 수밖에 없으며 물의 양에 따라 성을 지키는 군인 수도 달라질 것이다. 그 물을 그냥 흐르게 만들지 않았다. 작은 저수지를 만들어 물울 효율적으로 사용했다. 배수구에는 또다른 저장공간이 있어 빨래나 기타 허드렛물을 사용하도록 했다.
고구려인들의 생명수다. 이 샘물이 흘러 천지를 이루고 비류수를 흐르게 했다. 신성한 곳에 동전이 가득 놓여 있다. 물을 오염하게 하는 주범일텐데....
아래 절벽으로 가면 동굴이 보인다. 이곳에서 바라본 비류수가 일품이다.
동굴에서 절벽을 만났다. 세상에 이런 요새가 없다. 신이 만들어준 최상의 보금자리가 아닐까?
대형 멧돌을 만났다. 곡식을 빻아 밥을 해먹었던 고구려인들. 돌이 닳고 달았다.
천지를 지나면 식량창고터가 나온다. 이곳에 군량미를 쌓았을 것이다.
고구려의 주거지다. 무슨 용도에 쓰였는지 모르지만 작은 집들이 듬성듬성 자리잡고 있다. 눈여겨 봐야 할 것이 바로 온돌구조다. 이 온돌은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런 삶의 방식들은 이어졌다. 중국은 침대에서 자기 때문에 온돌을 사용하지 않는다. 요령성과 길림성 일부산간지역으로 들어면 온돌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요령성 어느 마을...집안에 온돌을 들여 놓았고, 외부 창고도 고구려 문화의 흔적들이다. 강원도 산골에도 이런 흔적들이 남아있다.
발부리에 걸리는 돌의 흔적을 지나면 장대가 나온다. 선돌에는 요령성 제 1경치라고 쓰여있다. 환인댐을 만들어 놓아 인공호수가 되어 한때 높다란 산들이 섬이 되어 장쾌한 볼거리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고구려의 풍경은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천지 가기전 정자에서 바라본 서쪽 풍경이 내겐 더 기억에 남는다. S자로 굽이도는 수태극과 산태극이 절묘하게 그림을 그려놓았었다. 이곳이 천하의 명당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모놀가족과 함께 비류수를 바라보며....
서북쪽은 높이만 200미터에 이르는 절벽이 감싸고 있어 별다른 방비책 없이 자연지세를 고스란히 이용했고 그나마 상대적으로 오르막이 완만한 동남쪽에만 성을 쌓아 외세에 침략에 대비했다. 동문으로 내려가는 길 역시 만만치 않는 경사다. 그 바위절벽 사이에 한사람만 간신히 내려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놀랄만하다.
졸본성의 숨통이다. 이 바위길이 없었더라면 고구려의 해상교통로인 비류수로 향하는 길이 무척이나 멀었을 것이다. 아래에서 바라보니 까마득하다.
거의 80도 계단이다. 용감한 사람은 이곳을 이용하고 나머지는 절벽에 간신히 붙어 있는 잔도를 이용했다.
절벽을 따라 길이 놓여 있다. 바위 틈사이로 성위로 올라가는 길이 놓여 있다.
잔도를 내려오면 끝없는 계단길이 나온다. 지그재그 나사길이다.
한참 아래를 내려오면 우물이 나그네의 발목을 잡는다. 예나 지금이나 이 물은 생명수였다. 고구려인들이 마셨을 물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산동이나 단동에서 마셨던 물맛이 아니었다. 바로 우리 시골 우물에서 퍼올렸던 바로 그 물맛이었다. 나는 물맛을 보고 이 땅이 우리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고 생태작가인 양영훈 작가는 산성을 둘러싼 수목을 보고서야 우리땅임을 것을 확신했다고 한다. "중국 땅값 쌀 때 이 곳을 우리가 사야 한다. 아니면 조차를 하든지..."
절벽이 천연요새로서 내성의 역할을 한다면 절벽 아래는 외성을 담당하는 성이 길게 이어졌다. 이제서야 졸본산이 아니라 졸본성을 만나게 된 것이다. 2천년이 지났건만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고구려의 지켜온 힘이 핏줄을 타고 흘러 급기야 전신을 뒤흔들었고 심장을 고동치게 만들었다. 조심히 다가가 성돌을 어루만졌다. 고구려인의 체온을 느껴보려고...
^^
초소터가 보인다. 고구려인들은 눈을 부라리며 적을 감시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철기그릇과 철기무기가 대량 출토되었다고 한다. 적들과 싸우다 장렬하게 죽은 고구려사람들의 흔적이다.
5미터쯤 되는 성벽이 또 한번 놀라게 한다. 촘촘히 쌓아 올린 돌은 투박하게 다듬어져 있으며 그 위에 말과 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폭이 넓게 만들었다.
잡초만 무성한 성벽..우리 모놀식구들은 이 성벽을 보고 무슨 생각에 빠졌을까?
저 위에 있는 돌산이 조금전에 요령성 제 1경치를 자랑하는 장대가 있던 자리다. 위대한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든 요새중에 요새다.
성벽에는 고목의 구르터기만 나뒹글고 있다. 눈물과 한숨 소리만 새어나오는 것은 왤까?
2천년의 세월동안 2천번의 꽃을 피었을 것이다. 산화한 고구려인들의 영혼이 꽃으로 환생하였다.
숲길 또한 일품이다. 남한산성,북한산성을 산책하고 있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기쁨과 환희보다도 왠지 모를 찜찜함이 나를 괴롭힌다. 나라를 빼앗긴 것도 서러운데 역사와 정신마저 빼앗겨 버렸으니 고구려인들에게 어찌 얼굴을 들 수 있는가? 또 우리의 먼 후손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얼마나 원망할까?
비류수 고구려의 수도는 모두 기름진 땅에 도읍을 정했다. 집안의 압록강, 평양의 대동강, 졸본에는 비류수가 있었다. 환인이라는 지명 역시 환웅의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오늘날까지 단군신화는 살아있었다. 중국의 아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놀고 있었다. 2천년전 고구려의 아이들도 옷을 던저 버리고 비류수에서 물놀이도 하고 고기를 잡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들이다.
졸본성에서 만난 코스모스 . 유난히 피빛처럼 붉은 색을 띄고 있다.
#1 꽃이름 가르쳐 주세요. 환인의 민가 담벼락에서 만난 꽃이다.
환인과 단동경계선에서 만난 마타하리꽃 . 백두산 가려면 대관령 고개를 8번을 넘어야 한다.
왠지 씁쓸한 마음 때문에 제 정신으로는 단동에 못 돌아간다. 알콜기가 들어가서 몽롱한 상태가 되어야 찜찜함이 사라질 것 같다. 실컷 노래도 불러제켰다.
어제 백두산에서 본 노을의 감동이 채 가시기 전에 단동근처에서 시뻘건 노을을 만났다. 어제 만난 노을은 백두산이 준 선물이라면 오늘 노을은 고구려인들이 건내준 선물이었다. 분에 넘친 선물을 가득 짊어지고 단동으로 넘어온다. 고구려! 평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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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수야..너 고주몽 알아?' "MC몽은 아는데...고주몽은 몰라."
ㅋㅋㅋ MC몽. 대장님의 구구절절 호소하는 이글 들 잘 읽고 보고 갑니다. 살수만 있다면 정말 땅값 쌀때 매입하면 좋으련만.....
^^.. 역시 대장님의 글에 깊이와 포근감에 감동의 물결이 파도가 되어 내 빈 머리를 쥐어박는군요.. 요렇게 좀 넌 못써 하고 말입니다.. 너도 똑 같이 보고 왔으면서....^^ 잘 보고 갑니다.
대장님 대장정인데... 무사히 잘 다녀 오셨군요. 함께 못한 아쉬움이 사무칩니다. 아랫사진은 "과꽃"으로 보입니다.
뮈토스님...토요일 박람회때 꼭 오십시요..기다리겠습니다. 시가 너무나 듣고 싶습니다.
과꽃 맞구요...졸본산성 동문 비좁은 바위협곡을 내려 올때 요새중에 요새로구나 하고 감탄 했습니다.멀리 태극을 그리며 휘돌아 나가는 비류수며,산성에 풀이며 나무들이며 그 숲길이 전혀 낯설지가 않았습니다..거긴 분명이 우리민족이 있어야 할 땅이었습니다..우리 조상들이 살던곳 ,고구려,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시뻘겋게 불타오르고 있네요. 장관입니다^^
행여 내년에 가게될까 부지런히 읽고 보고, 정말 대단한 곳이네요. 어린 정수도 저 절벽을 올랐나요
늘 좋은글과 사진이 감동을 주네요,,,역시나 대장님이 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