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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주후 34년경, 스데반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들 중 한명으로서, 성문 밖에서 무리에 의해 돌을 맞아 순교했다.
스데반은 그리스어로 왕관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한 명으로서, 하나님의 지혜와 믿음이 충만한 자였다(행6:5).
그는 구약 성경에 해박한 자였고, 말도 유창하게 잘하는 자였다. 그는 리버디노 구레네 인, 알렉산드리아 인, 길리기아와 아시아 출신의 유대인들로 구성된 이른바 자유인의 회당 출신 사람들 중에 스데반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합세하여 스데반과 논쟁을 하였다. 하지만 스데반이 말하는 지혜나 성령님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주고 사람들을 사서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소리를 우리가 들었다라고 거짓말을 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백성과 장로들과 율법사들을 화나게 만들고는, 스데반을 붙잡아 공의회로 끌고 갔다. 그들은 사람들을 시켜 이렇게 거짓 증언을 하게 했다. 이 사람은 항상 이 거룩한 곳인 성전과 율법에 대해 험담을 하는 자다. 우리는 이 사람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어버릴 것이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해 준 여러 관습들을 뜯어고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공의회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스데반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행6:9-15).
그 후 대제사장이 그에게 묻길, 이것이 사실이냐? 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하며 대답했다. 더구나 그는 마치 천국의 방언과 같이, 명백하게 구약의 성경을 예로 들어가면서, 그리스도가 참 메시아이시며 복음이 참 진리임을 선포했다(행7:1-53).
그러나 그가 이렇게 뜨거운 마음으로 그를 고발하여, 피에 굶주린 자들 앞에서 담대하게 말하자 그들의 분노는 마치 불이 붙는 듯하여, 이를 갈았던 것이다(행7:54절).
그러나 스데반이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시하더니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하늘이 열려 있고, 인자(人子)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내가 보노라고 했다(행7:55-56).
그러나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를 향해 달려들어, 그를 성문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치며,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57-58).
한편 그가 큰 소리로 불러 말하길,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그는 무릎을 꿇고 큰소리로 말하길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잠이 들었더라(59-60).
이것이 스데반이라는 의로운 사람의 최후였다. 그에게 주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욱 소중한 분이었다.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지 34년 되던 해에 일어난 일이다. 즉 티베리우스 재임 19년으로서, 이때 그의 나이 38세였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받으신지 7년째 되던 해에 일어난 일이다(Nic. lib. 2.cap.3).
스데반이 예루살렘 성 밖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는 장면. 주후 34년
이일이 일어난 후, 몇몇 경건한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돌보고, 그를 무덤으로 옮기고 이 신실한 순교자를 위해 통곡을 했다. 그에게 있어 그 돌들은 향기로운 강물과 같았다.
아리스다고는 바울과 여행을 함께 한 동역자로서 주후 70년 네로의 명으로 처형을 당했다.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출생으로 바울이 마게도니아에서 아시아로 여행할 때 바울의 동역자 가이우스(Gaius)와 함께한 사람이다. 가이우스와 함께 그는 에베소의 한 폭동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는 곧 탈출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는 죄수로 로마에 끌려왔는데, 이때 마침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으로 체포된 당시였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동역자를 골로새에 있는 교회에 칭찬한 사람이며 천거를 받은 사람이다. 즉 그는 다음과 같이 글을 보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가 ... 영접하라.”(골4:10).
그러나 이 투옥은 끝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또한 잔인한 사자의 밥이 되었기 때문이다. 네로는 바울이 죽기 전에도,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실한 목회자를 이런 식으로 처형을 하였다.
에바브라는 바울의 동역자로서 70년 네로의 명으로 죽임을 당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였다. 그는 로마에 갇혀있는 동안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골로새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냈다. “너희에게서 온 그리스도의 종인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그는 항상 너희를 위하여 열정으로 기도하나니, 너희가 하나님의 모든 뜻 안에서 완전하고 온전하게 서기 위함이니라. 내가 그에 대하여 증언하노니,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사람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였느니라.”(골4:12-13).
바울과 함께 갇힌 동역자는 분명히 바울과 함께 지하 감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빌레몬에 보내는 편지 끝부분에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된 에바브라가 네게 문안하며”(몬1:23)라고 했다.
그러므로 근거는 제시할 수 없지만, 에바브라도 또한 네로의 핍박아래 참혹한 죽음을 당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의 동역자들과 친척들, 즉 브리스길라, 아굴라와 유니아도 네로의 명에 의해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아주 사랑하며 신뢰하는 그곳의 수많은 성도들 가운데, 특별히 그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두 사람을 추천하였다. 그가 분명히 함께 갇힌 자라 부르는 다른 두 사람은 그와 함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과 핍박을 받았다. 그는 모든 이름을 언급하였으며 사도의 형식을 따라 그들을 추천하였다.
먼저 그가 기록한 두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나의 목숨을 위하여 자신들의 목을 내놓은 사람들이라. 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모든 교회(敎會)들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16:3-4).
앞에서 언급한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있다. “나의 친척들이며, 나와 함께 감옥에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 가운데 유명한 자들이요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었느니라.”(롬16:7).
이 사람들의 최후에 관해서는 바울의 서신이나 다른 신약 성경에 특별히 언급된 바 없다. 그러나 다른 저자들이 주장하길, 네로가 핍박할 당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진실을 위해 끝까지 고난을 감당하고 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반박할 수 없음은, 그 당시 네로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박해가 극에 달한 상태였으므로, 그 당시 그 어느 누구도 피를 흘리지 않고, 비참한 죽음을 피해서 도망칠 수 없었던 것이다.
약 70년 실라(Silas) 혹은 실라바누스(Silavanus)는 마게도니아의 빌립보 지방에서 채찍을 맞고 순교자로 생을 마감했다.
실라바누스라 불리는 실라는 바사바(Barsabas)라는 별명이 붙은 유다와 함께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다닌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형제들 간에 리더로서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하나님 교회의 유익을 위해 결정내린 대로 간증을 해야 했던 것이다(행15:27,34).
한 때 실라는 바울과 함께 마게도니아의 빌리보에서 거룩한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또한 거기서 바울과 함께 체포되어, 지도자들 앞에서 조사도 받지 않고 채찍을 맞는 등, 온갖 혹사를 당하다 감옥으로 들어갔다. 여기에 이성도 의도 통하지 않았다. 발은 쇠고랑을 차야 했지만, 거룩한 하나님의 섭리가 기적으로 지진을 통해 한밤중에 옥문을 흔들어 열어줌으로 인해 나올 수 있었다(행16:19-39).
몇몇 저자들에 의하면, 나중에 그는 고린도교회의 감독이 되었으며, 그곳에서 수많은 설교를 감당한 후에 순교를 하였다. 이것은 신약성경이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즉 그는 복음을 위하여 체포되고 채찍을 맞았으며, 이생을 떠나기 직전까지 모욕받으며 고난을 받았다고 한다.
바울의 친구인 오네시보로와 그의 동역자 포르피리우스는 야생 말에 묶인 채 질질 끌려 다니다가, 갈기 갈기 찢겨져 약 70년경 네로의 명에 의해 헬레스폰두스(Helespontus)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오네시보로는 아시아 사람으로, 즉 소아시아에 있는 에베소의 시민으로서, 아주 경건한 삶을 산 사람이다. 그는 종종 로마에 갇혀있는 사도 바울을 위로하고자 방문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이로 인해 바울은 온 맘으로 기뻐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가 베푼 이 친절을 보답하시도록 기도를 드렸다. 이에 대해 바울은 디모데에게 글을 쓰길 “주님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하는 것은 그가 내게 자주 용기를 북돋아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여, 오히려 그가 로마에 있을 때에는 열심히 나를 찾아 만났느니라. 주님께서 그로 하여금 그 날에 주님의 긍휼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에베소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로 나를 섬겼는지 네가 잘 아느니라.”(딤후1:16-17). 이 편지 마지막 부분에 그는 오네시보로의 가족을 위로하며 말하길 “브리스가와 아굴라 그리고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몸이 아파서 밀레도에 남겨 두었느니라.”(딤후4:19-20).
몇몇 저자들은 기록하기를, 이 경건한 사람은 골로본(Colophon) 교회의 감독이었다고 하며, 혹자는 고로니아(Coronia) 교회의 지도자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당시 골로본이나 고로니아 한 교회이거나 동일한 이름의 교회가 아니며, 두개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다. 또는 만약 그들이 두개의 구별된 도시였다면, 그가 한 번에 양 쪽 교회를 돌아보았는지에 관한 문제는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그와 포로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역자로서 아드리아누스(Adrianus) 총독에 의해 헬레스폰두스(Hellepontus)에서 혹독한 매를 맞았으며, 후에는 네로의 피의 칙령으로 둘 다 야생마에 끌려 다니다가 갈기갈기 찢겨죽었다.
바돌로매, 거룩한 그리스도의 사도는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70년 아스티아게스(Astyages) 왕에 의해 아르메니아(Armenia)에서 목베임을 당했다.
바돌로매는 돌로매(Tholomaeus)의 아들을 뜻하는 말이며 다른 제자들과 같이 갈릴리 사람이다. 데오도르투스(Theodoretus)에 의하면 그도 또한 어부였다고 주장하지만, 몇몇 주장에 의하면 그는 왕족이었으며 시리아 왕의 조카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성경에는 그에 관한 내용이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 다. 하지만 주님은 그를 사도 부르시고, 유대와 갈릴리 즉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떼에게로 가라는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그는 사도권이 확정되었고, 다른 사도들과 함께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마10:3, 막3:18; 눅6:14-15; 행2:1-5).
사도들이 흩어진 후에, 그는 첫 사역을 리가오니아(Lycaonia)에서 감당했으며, 후에는 시리아와 아시아의 윗 지방에서 감당했고 뒤이어 인도까지 갔다. 그 지역에 관해 연대기는 기록하길 알렉산더의 스승인 반테누스(Pantenus)를 만나 마태복음을 전하였는데, 이로 인해 바돌로매는 그곳까지 가게 되었으며, 거기서 그는 인도인들에게 그들 원어로 가르쳤다고 한다.
마침내 그는 아르메니아 대 제국에서 복음을 전하였으며, 후에 알바니아와 알바노폴리스(Albanopolis), 즉 폴로노(Poleno) 왕국에서 복음을 전하여 아스티에게(Astyage)의 형제가 그의 아내와 함께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그의 두 아들과 딸도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수많은 사람들을 우상으로부터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알게 해 주었던 것이다. 그 나라의 열두 성이 아스다롯(Ashtaroth)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마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스다롯 제사장들은 이 일로 인해 화가 나 왕 아스티에게에게 불만을 토로하자. 그는 바돌로매를 체포하여 그 앞에 세우게 된 것이다.
바돌로매가 왕 앞에 서자, 왕은 그의 형제를 망쳐놓았으며, 온 나라가 섬기는 우상을 해방 놓았다며 그를 호되게 비판했다. 그러므로 즉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을 그만 두고 자신의 우상을 섬기지 않으면 죽이겠다며 협박을 했다.
바돌로매는 이 비난에 맞서 대답하길, 그는 망하지도 않았으며, 그의 형제를 망하게 만들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 나라에서 하나님의 참 경배에 대해 전했을 뿐이며, 양심과 신앙에 흠이 되느니 차라리 죽음으로서 모든 것을 증명하겠다고 했다. 이에 왕은 명을 내려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채찍을 맞으며,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으며, 산채로 계속 매를 맞고 결국은 도끼로 목이 베어졌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주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
바돌로매의 형 선고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는 십자가에서 목 베이지 않고 매 달렸으나, 심한 고문을 하였지만 살아있자 끝내 도끼로 목을 찍어 이런 일을 막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품으로 간 것이다.
맛디아(Matthias)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바위 위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돌에 맞아 죽고 목 베임 당했다.
맛디아는 몇 사람들의 기록에 의하면 다윗 가계의 왕족이었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베들레헴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배웠다. 그는 그리스도의 70 제자 중 한명이며, 주님께서 승천하신 직후, 이스가룟 유다가 사도직을 버리고 자신의 생명을 던져버리자, 11명의 사도들만 남아있었다. 이에 120명의 성도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제비를 뽑자 앞서 언급한 이스가룟 유다 자리에 그가 선출된 것이다. 이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이자 대사로서 주님의 명령을 따라 복음을 전하며 믿는 자들에게 침례를 주었다(행1:23-26).
후에 그와 다른 열두 명의 제자들은 유대인 공회의 방해로 더 이상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었다(행5:38-40). 그러나 그들은 공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그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그리고 날마다 성전과 집에서 복음을 전하며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도들이 복음을 위하여 흩어진 후, 제롬(Jerome)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에디오피아 중심부로 갔다. 그곳은 그 어떤 사도도 내륙으로 들어가 그 나라 국경지대인 아스파르(Asphar)와 히수스(Hyssus)의 강어귀까지 간 사람은 없었다. 그곳은 바로 무지하며 야만인들이 살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 곳 사람들은 참으로 깊은 흑암과 무지 속에 살아가던 자들이었다. 그곳에서 이 사도의 사역을 통해 참된 복음의 빛이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 후, 역사에 의하면, 그는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로 돌아왔다. 사도들의 분산으로 인해, 그 지역에 거하던 유대인들이 거룩한 복음의 혜택으로 회심하는 자들이 적었기 때문이다.
70년경 사도 맛디아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며 돌에 맞고 참수를 당했다.
맛디아의 순교나 최후에 관한 기록에 대해, 어떤 자들은 그가 거짓 신 쥬피터(Jupiter)를 숭배하지 않는 다하여 이단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또 혹자는 주장하길 유대인들이 그에게 신성모독죄 즉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였으므로, 대제사장이 그에게 형을 내렸다. 먼저 십자가에 매달고 돌로 쳤으며, 나중에 도끼로 머리를 찍었다고 한다. 요약하면 그는 그의 구주 되신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으며, 끝가지 그분을 고백하자, 그의 다음과 죄목으로 형을 선고 받았다고 한다.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니, 이는 네 입술이 너를 대적하였음이라” 그리하여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혹자는 바위 위에 세운 십자가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돌을 맞았으나, 형 선고에 따라 참수를 당했다.
그리스도의 70인 제자들, 또한 이들과 동행한 그리스도의 동역 자들 70년경 네로의 박해 아래서 죽임을 당했다.
프로코로스(Prochorus)는 예루살렘의 첫 일곱 집사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경건한 순교자 스데반의 조카이며 사도 요한의 동역자이다. 후에 마게도니아의 비드니아(Bithynia) 교회의 감독이 되어, 안디옥에서 고난을 받고 죽었다.
니가노르(Nicanor)는 예루살렘의 첫 일곱 집사들 중 한 명이다. 그도 다른 사라들과 같이 복음의 진리를 위하여 처형되었다.
이와 같이 바르메니아(Parmenas)도 일곱 집사들 중 한 명이었다.
올림푸스(Olympus)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로마 감옥에 갇혔다.
가르부스(Carpus)는 바울의 심복으로서, 후에 드로아(Traos) 교회의 감독이 되었으며, 믿음으로 인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바울의 동역자 드로비무스(Trophimus)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참수를 당했다.
그리스도의 70제자들 중 두 사람인 마터누스(Maternus)와 이지투스(Egytus)는 그리스도인 집사 마리아누스(Marianus)와 함께 믿음으로 인해 독일에서 죽임을 당했다.
헤르마고라스(Hermagoras)는 아길리아(Aquileia) 교회의 감독으로서, 베드로에 의해 안수받았으며, 네로의 핍박을 받은 자이다.
오네시무스(Onesimus), 아레오파기테(Areopagitae), 디오니수스(Dionysus)와 다른 여러 사람들이 거룩한 진리를 위해 그 당시 죽임을 당했다.
이 핍박은 네로에 의해 시작이 되었으며 오랫동안 계속되어 베스파시안(Vespasian) 당시까지 지속되었다. 그래서 그의 재임 3년 째 기록에 의하면, 그곳에는 라비니아(Ravenna) 성에 예수님에 대한 고백으로 인해 수많은 죽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의 제자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이름이 언급되어있지 않았다) 죽임을 당하였다.
성도들을 향한 2차 박해가 93년도에 시작이 되었다.
이 당시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이유로 체포되고, 추방당하며 죽임을 당했다.
누가는 세 명의 거룩한 복음 사역자 중 한 사람으로 고대인들이 전하고 있다.
그는 안디옥의 시리아인이며 직업은 의사였다.
하나님의 뜻은 그가 영혼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인류에게 두 권의 영적인 의학 서적을 남겨둔 것이다. 즉 그의 복음서인 누가복음과 거룩한 사도들의 행적을 다룬 사도행전이다.
그의 부모님에 관해 언급된 내용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가계에 관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으며, 단지 그가 시리아에서 내려온 사람이라는 것 밖에 알 수 없다. 추정하건대, 다른 복음의 사역자들과 사도들은 대부분 결혼을 하였지만,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아 부인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롬의 의견에 의하면, 그는 회심하기 전, 유대교 개종자로서 이방인 혈통을 가진 자였다. 언어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것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의 문체는 히브리어 계통이라기보다는 그리스계통에 완벽할 정도로 동일했다는 것이다.
누가는 93년 초록색 올리브나무에 교수형을 당했다.
거룩한 복음 사역자 누가는 93년 초록색 올리브나무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후에 그는 바울의 전도를 통해, 38년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테베(Thebes)에서 안디옥으로 건너갔다.
그는 사도의 제자가 되었으며, 특별히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 동행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와 모든 고난을 함께 했으며, 육지로 바다로 다니며 함께 어려움을 나눈 사이인 것이다.
또한 그는 바울과 아주 절친한 사이였으며, 그의 특별한 친구이기도 했다. 고대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복음서를 바울이 낭독한 바를 받아 쓴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는 또한 바울이 로마에서 첫 번째 투옥하는 때 까지 바울의 주요 여행에 대해 신실하게 기록을 했다.
바울은 그의 서신 서에서 그에 관해 종종 언급을 했다.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문안하느니라”(골4:14). 빌레몬서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몬1:23,24) 이와 같이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딤후4:11).
그러므로 누가는 바울의 동역자로서 그와 함께 여행을 했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서 고난도 같이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바울과 함께 네로 황제 앞에 두 번이나 불려 간 것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마지막에 관해, 몇몇 사람들이 기록하길, 그는 그리스에서 복음을 전하는 도중, 올리브 나무 위에 매달려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른 사람은 또 기록하길 그는 그의 나이 84세에 생명이 다해 죽었다고 했다.
안디바(Antipas)는 95년 신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페르가모스(Pergamos)에서 불에 달군 쇠에 의해 타 죽었다.
안디바는 의로운 사람이며 하나님의 아들의 신실한 증인이다. 그는 자신의 믿음의 증거로 구세주를 불 명예롭게 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 자라 할 수 있다. 이 일은 사도 요한 당시 일어난 일이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도미티안(Domitian) 기간 동안 고난을 받은 첫 사람이다.
이런 하나님의 기사 이자 영웅에 대해, 주님은 그분의 종 요한에게 언급하셨다. 그에게 명령하여 버가모에 있는 그에 관해 기록하라 명하신 것이다. “버가모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이 양날이 선 날카로운 검을 가진 이가 이 일들을 말하노라. 내가 너의 행위들과 네가 거주하는 곳을 아나니, 곧 그곳은 사탄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네가 나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안디바가 나의 신실한 순교자(殉敎者)가 되어,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거주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하던 그 날들에도 나의 믿음을 부인하지 아니하였도다.”(계2:12-13).
그가 죽은 시와 방법에 관해서 성경에 기록된 것은 없다. 하지만 몇몇 고대 저자들에 의하면, 그는 뜨겁게 달군 놋쇠로 된 곳에 가두어놓고 산채로 고통을 가하며 태워 죽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난 시에 관해, 성경으로 추측해 보건대, 요한이 살아있는 동안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95년경으로 이 시기를 잡기도 한다.
안디바는 95년 산채로 “달군 구리”에 굽혀졌다.
사도바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는 98년 에베소에서 이교도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다.
디모데는 리가오니아(Lycaonia)의 루스드라(Lystra) 태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인이며 어머니와 할머니는 유대인의 후손으로서 그리스도인이었다. 이들의 이름은 유니게(Unice)와 로이스(Lois)이다. 이들의 이름은 어릴 때부터 그에게 신앙을 가르친 인물로 성경에 등장하고 있다(행16:1; 딤후1:5).
디모데는 루스드라(Lystra)와 이고니움(Iconium)에 있는 형제들에 의해 칭찬받는 자였으며, 바울을 그를 이방인 가운데 거룩한 복음을 전할 동역자로 생각하였다(행16:2-3).
바울은 주의 사랑으로 그를 사랑했으며, 그를 주님 안에서 낳은 사랑하는 아들이라 칭했다(딤후1:2). 후에 그는 교회의 감독으로 교사로 임명했으며, 그의 구세주이신 주 예수님의 양떼를 돌보며, 훈계하며, 의로 먹이며, 양육할 것을 명령했다. 마지막에 바울이 그에게 보낸 특별한 편지에서 “오 디모데야”라는 말로 시작을 해서 “네게 맡겨진 것들을 전념하여 지키되 불경건하고 헛된 말장난과 거짓으로 일컬어지는 과학의 반론을 피하라.”(딤전6:20).
또한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부탁하노니 전에 네게 행하라고 주어진 그 예언들에 따라 너는 그것들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딤전1:18).
또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바울은,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으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기를 바라노라.”(딤후1:1-2).
사역을 통해 디모데가 얻은 이름은 강직한 복음의 설교자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으며, 이로 인해 그는 평범한 죽음이 아니라 복음을 위한 순교자로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보다 먼저 앞서간 영적인 아버지 바울과 함께, 또한 특별히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보다 수년간 앞서 고난 받으신 주님의 영광스런 면류관을 바라보며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후에, 역사는 에베소에서 15년 동안 감독이었던 그에 대해 그는 자신이 책망한 이교도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일은 도미티안 재임 시 주후 98년경으로 보고 있다.
99년, 경건한 성도인 우르티시누스(Urticinus)는 라바나(Ravenna)에서 도끼로 목베임을 당했다.
디모데의 뒤를 이은 사람은 이탈리아 라바나(Ravenna)의 의사로서 우르티시누스 또는 우리시니누스(Ursinius)이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재판관 파울리누스(Paulinus)에게 보고가 되자, 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고문을 받았다. 모든 고문을 인내로 이겨내면서, 끝가지 이교도의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을 거절하자, 재판관은 마침내 그에게 도끼로 목을 베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우르티시누스가 사형선고를 받을 당시, 그는 임박한 죽음 앞에 떨면서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그리스도를 부인할까? 그러면 죽음을 피할 수 있을 것인데”라며 고민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육신과 심각한 싸움을 하는 동안, 재판관 파울리누스의 한 동료인 비탈루스(Vitalus)가 뒤에서 그에게 한 발자국씩 다가와 다음과 같은 말로 그를 강하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나의 형제 우르티시누스여, 그대는 신실한 의사로서 수많은 병자들을 건강하게 회복시켜주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부인하므로, 네가 영원한 죽음과 저주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 충고를 듣고, 용기를 얻은 우르티시누스는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준비하고, 당당하게 목을 도끼에 내어놓았다. 그러므로 그의 머리는 몸으로부터 구별되어 성도다운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비탈루스(Vitalus)는 라벤나(Ravenna)에서 산채로 불에 던져짐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생명을 받쳤다. 또한 그의 아내는 채찍을 맞아 죽음을 맞이했다.
비탈루스는 회심하기 전 밀란에 살고 있는 로마 시민으로서 직업은 기사였다. 그는 재판관인 파울리누스와 함께 라벤나에 왔다. 그러나 그가 주인의 잔혹한 면을 깨닫고 나서, 세상 식으로 열심히 섬기던 자기의 주인을 용감하게 버리고, 곧장 그리스도의 군사로 입문을 했다. 하지만 곧 진리의 적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파울리누스는 그의 주인으로서 왜 그가 자신을 떠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곧 그가 우르티시누스가 도끼로 목이 잘리기 직전 그에게 신앙으로 힘과 용기를 준 사실을 알게 되고, 또한 그가 우상 앞에 제물들을 바치는 것을 말리자, 그(우르티시누스)가 죽고 매장된 뒤, 혹 그도(비탈루스) 혹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의심하게 되었다. 곧 이 의심은 다른 사람들의 고소를 통해 확인이 되자, 곧 체포하게 되었으며, 그의 입술의 고백을 통해 그가 진짜 그리스도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를 고문대에 올려놓고 고문을 가해 그가 그리스도를 버리길 바랬다.
하지만 비탈루스는 잔혹한 재판관인 파울리누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대신했다고 한다. “당신도 당신의 논리를 벗어버리고 한 번 생각해보시오. 내가 당신한테 속을 수 있는지, 그리하여 내 영과 육이 영원한 고통과 죽음으로 갈 수 있는지 말이오. 오히려 나는 다른 사람들을 기만의 유혹에서 건져주고 싶소.”
악한 이단의 제사장은 그가 확고하게 그리스도를 붙잡고 있음을 알고는 더이상 다른 신을 섬기라고 그를 설득하는 것은 아무소용이 없다며, 파울리누스에게 그를 산채로 불태워버리라고 충고했다. 파울리누스는 그런 악한 제안을 받아들이고, 물이 나오는 지점까지 깊은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 비탈루스를 묻고 그 위에 돌과 흙으로 덮어버렸다. 그곳은 대게 그리스도인들이 매장되던 곳으로 종려나무가 무성해 에드 팔만(ad Palman)이라 불리는 지역이었다.
비탈루스의 아내 발레리아(Valeria)는 남편이 산채로 죽어 묻힌 후, 라벤나에서 밀란(Milan)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아이들과 거하였지만, 곧 그리스도인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가 우상 앞에 바친 음식을 먹지 않을뿐더러, 끝까지 거부하고 저항하면서 오히려 공개적으로 우상숭배자들을 책망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결코 당신들의 우상인 실바누스(Sylvanus)에게 바친 음식을 결코 먹지 않을 것이다.”
99년 말경 비탈루스(Vitalus)는 라벤나(Ravenna)에서 산채로 불에 던져져 죽었다.
이에 우상숭배자들은 그녀를 붙잡아 죽을 때가지 매로 때렸던 것이다. 그녀는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밀란에서 묻혔다. 이 일은 네로의 칙령 즉 일차 박해 때 일어난 일이다. 이런 박해는 베스파시안(Vespasian)과 도미티안(Domitian) 치하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났다.
이런 순교에 관한 이야기는 위에서 언급한 저자들이 우르티시누스에 관해 주석을 단 것을 참고로 하였다.
100년경 다른 이유로 인해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던진 사람들은 매우 많다.
고대 역사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 하다가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기록되어있다. 프랑스에서, 벨로바코(Vellovaco)의 감독인 루시아누스(Lucianus), 맥시미아누스(Maximianus) 와 율리아누스(Julianus) 장로들, 루앙(Rouen) 교회의 감독 니카시우스(Nicasius), 장로 쿠이리누스(Quirinus), 집사(Scubiculus), 동정녀 파시엔티아(Pacientia). 이탈리아의 페술라(Fesula) 교회의 감독 로물루스(Romulus)와 그 밖의 다른 지역에서 여러 사람들이 있다.
또 다른 기록으로는, 글라브리오(Marsilius Glabrio)는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과 진실된 믿음을 위해 고난을 받았다.
당시 상황은 “바로니우스(Baronius)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업신여김을 받으므로 대장장이로 불리었다고 이단저자의 관점으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출처] 초기교회 첫 1세기의 순교사 (킹스 메신저) |작성자 주님을 향하여
첫댓글 지금 우리에게 다시그런 핍박이 온다면 어찌 견딜수있을지.... 주님의 은혜로 어떠한 핍박이나 시련이 온다해도 능히 견딜수 있는 믿음 주시기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