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뜻밖에 교원 나라에서 주관한 019 핸드폰 행사에 당첨되어 8월 10일부터 15일까지 연길, 백두산, 두만강 유역, 북경을 여행하게 되었다. 평소 산악회에 가입하여 우리나라에 있는 크고 작은 산은 거의 다 등정하여 보았지만 북쪽에 있는 산은 아직 가 보지 못한 아쉬움이 항상 가슴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백두산을 가게 되는 것만으로도 이번 여정을 대하는 내 가슴은 감동으로 벅차 올랐다.
드디어 8월 10일 한국을 출발하여 중국 수도 북경을 거쳐 저녁 늦은 시각에 조선족 자치주인 연길시에 도착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관광버스를 타고 숙소로 가는데 외국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거리의 상가 간판이 한글로만 되어 있는 것들이 많았고, 큼지막하게 한글로 쓰고 그밑에 조그맣게 한자로 쓰여 있는 간판도 있었다. 연길시는 조선 자치주 주도(州都)이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인구가 약 220만명 가량 되는데 조선족이 45%를 차지 한다고 한다. 조선 말기부터 자유와 독립을 위해 두만강을 건너 이주하여 개척한 곳으로 이전에는 북간도라 불렸다. 일제 강점하 독립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했던 그곳이다. 조선족이 주류를 이루는 연길시는 연변 자치주의 문화, 교육, 경제 중심지로서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한국어로 강의를 한단다.
둘째날 새벽 일찍 일어나 백두산 등정에 나섰다. 가는 도중 눈에 띄었던 상가 간판은 모두 한글이고, 소달구지, 자전거로 끄는 인력거, 아이들의 옷차림, 농촌 풍경, 조그만 마을에 펼쳐진 우리의 5일장과 같은 재래 시장들은 마치 한 20∼30여년전 우리네 고향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여 낯선 이국땅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고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게 하여 마음이 그지없이 편안하고 따뜻하였다. 약 4시간 반을 차를 타고 백두산 입구에 도착하였다.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 부른다. 도착하자 조금 있다 그 좋던 날씨가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오늘 일정은 천지를 보고나서 장백폭포를 구경하고 온천욕을 하기로 되어 있는데 비가오고 구름이 낀 관계로 일정은 온천욕, 장백폭포를 구경하고 천지를 가기로 바꾸었다. 온천욕을 하고 난 다음 장백폭포로 올라가는데 길옆으로 노천 온천수가 솟아오르는데 뜨거워서 손을 씻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길옆에는 온천수에 달걀을 삶아 3개에 천원씩 하는데 그 맛이 우리나라에서 먹는것과 달리 맛이 있었다. 10분쯤 걸어 올라 가니 드디어 장백폭포에 도달하였다. 높이가 68M의 웅장한 폭포로 거대한 폭음이 몇리밖에 까지 울리면서 흰 물보라를 흩날리며 무지개와 백룡이 날아 내리는 듯한 절경이다. 폭포옆으로 천지를 오르는 등산로가 있는데 사람들이 간간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천지까지는 걸어서 5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하였다. 나도 차가 아닌 걸어서 천지까지 등정해 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이번 여행은 짜여진 일정 때문에 생각을 접기로 하였다. 다음에 또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걸어서 백두산을 등정하고 싶다.
장백폭포를 구경하고 천지를 오르는데는 짚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천지를 오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 약 2시간을 기다린 후에 짚차를 탈 수 있었다. 오르는 도중 비와 안개가 끼여 10M 이상 볼수가 없었다. 천지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차로 약 20분 후에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주차장에서 천문봉까지는 약 50M 정도 거리였다. 천문봉 정상에 오르니 구름이 끼여 천지와 백두산 봉우리는 하나도 볼 수 없어 무척 안타까웠다. 정상에는 나무와 풀은 하나도 없고 바위와 흙 뿐이었다. 백두산을 알리는 돌비석 앞에서 사진을 몇 번 찍었다. 그러다가 10분쯤 후에 구름이 서서히 걷히더니 백두산 봉우리들과 웅장한 천지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여기 저기서 함성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사진 한 컷을 찍고 나니 다시 구름이 천지를 뒤덮어 볼수가 없었다. 또 몇분 지나니 천지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이제는 완연히 백두산 봉우리들과 천지가 제 모습을 자랑하였다. 이렇게 신비 스럽게 펼쳐진 천지를 구경할 수 있게끔 기회를 준 하느님게 그 순간 진정으로 감사 드렸다. 코끝이 찡해옴을 느꼈다. 살아 있을 때 백두산를 두발로 밟아볼 수 있을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다. 생전에 이곳을 찾은 등소평이 "장백산을 오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한다"라고 말하였다니 과연 그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천지는 화산 분화구에 물이 고인 커다란 산상 호수로 수면의 해발고도는 2,189M, 물의 깊이는 384M, 둘레는 14.4km로 서울 여의도 정도 크기다. 모 광고에서 나왔던 것처럼 그곳에 손을 한번 적셔보며 천지의 기운을 맘껏 받아보고 싶었으나 30분이라는 약속 시간이 다되어 아쉬움을 뒤로 남긴채 내려와야만 했다.
백두산을 구경하고 연길시로 오는 도중 저녁을 먹었는데 음식은 우리 입맛에 딱 맞아 너무 맛있었고 소주도 곁들여 얼큰 하니 흥취에 젖을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그런데 화장실이 문제였다. 그날 들린 식당과 상점 세곳 모두 화장실 문이 없는게 특징이었다. 이쯤되니 연변을 여행할 때는 반드시 호텔 나오기 전에 미리 화장실을 들리고 나오는 것이 불편을 덜 수 있다. 연길로 돌아 올때는 지름길이라며 청산리를 거쳐 왔는데 김좌진 장군이 일본군을 무찌른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바로 그 곳이다.
다음 셋째날은 연길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용정을 구경 하였다. 용정시는 두만강 지류인 해란강이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고, 인구 30만명 중 70%가 조선족으로 간도 이민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먼저 윤동주 시인과 문익환 목사등이 다녔던 조선족 학교인 용정중학교(구,대성중학교)를 갔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했던 이땅의 자랑스런 청년을 기리고 기념하기 위해 교실앞 윤동주 시비에서 사진을 찍던중 그만 사고가 발생하였다. 5박 6일동안 호텔방을 같이 썼던 여천중학교 이옥근 선생님이 감격한 나머지 격정에 못이겨 부주의로 넘어져 앞니가 하나 부러지고 입술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급히 용정시에 있는 병원으로 가서 간단한 치료를 받고 연길시 병원으로 후송 되었는데, 우리나라 보다 의료기술이 뒤진 곳이라 치료를 잘할 수 있을가 너무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용정중을 정신 없이 구경하고 노래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과 해란강을 구경 하였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연길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두만강 유역 두문이라는 곳을 방문하였다. 두만강의 폭은 약 50M 정도 였고 북한땅 남양이 육안으로 환히 바라다 보였다. 전망대 위로 올라가 망원경으로 북측을 바라보니 북측 세관 건물 정면에 김일성 사진이 커다랗게 걸려있었다. 두문 근처 기념품 가게에서는 북한에서 생산된 소주, 화폐, 우표, 그림 같은 것을 팔고 있었다. 관광지의 풍경은 우리나라 어디와도 다를 바 없었는데 북측 세관 정면에 걸려 있던 김일성 사진은 그토록 생경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저 사진이 내려지는 날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아득하여 마음이 무거워졌다. 저녁을 먹고 북경으로 가기 위해 연길공항에 도착해 이옥근 선생님을 만났다. 연변 대학 병원에서 응급 치료를 받고 우리나라에 가서 치료를 하기로 하였단다. 다행히 앞니 하나만 치료하면 된다고 하여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거기에다 사고난 이선생님을 위하여 가족 보다도 더 신경써 주신 교원나라 사장님 이하 모든 직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어찌나 신경을 많이 써 주시는지 이옥근 선생님이 교원나라에 죄송하다고 말할 정도로 배려 해주셨다. 우리 교원들의 복지를 위해 이번 여행같이만 신경을 서 주신다면 걱정할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천지의 신비로움과 연변에서 나라 잃고 살아온 조선족의 애환과 교원나라의 동지애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고 내 생애 처음으로 이런 감동적인 경험을 갖게 해주신 교원나라 관계자 여러분께 다시한번 가슴깊이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