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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녹색글 은 1997년 일기장을 컴퓨터로 옮길 때 기억을 더듬어 쓴 나(어른)의 설명 글입니다.
1978년 4월 3일 월요일
저녁 때의 일이다.
어머니께서 어제 여행을 가셨기 때문에 나와 동생 세호는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7시 30분, 버스 올 시간이 되었다. 그래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잠시 후 8시가 되어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나는 걱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혹시나 사고가 난 것이 아닐까? 사고가 났으면 엄마는, 엄마는….'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마을 어귀에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버스의 불빛이었다.
버스가 도착하자 버스 안에서 아직도 춤추고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중에서 우리 엄마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어머니께서도 내려 오셨다.
나와 세호는 얼른 '엄마!' 하고 달려갔다.
나는 마음이 푹 놓였다.
아무 사고없이 돌아오신 어머니를 보니 기쁘기 한이 없다.
1978년 4월 4일 화요일
아침 등교시간 때의 일이다.
난 일찍 학교에 가려고 집에서 나왔다. 오늘은 매우 일찍 학교에 가는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가는데 선생님께서 오시고 계셨다.[1]
"안녕하십니까?"
"오냐, 세억아 오늘 다른 선생님께서 들어 오셔도 떠들지 말고 자습해라."
"어디 가십니까?"
"오늘 안계에 볼 일 있어 가야겠다."
이건 내 혼자만 안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아이들이 떠들지 않을까? 좋아, 이 일을 다른 아이들에게는 절대 알려주지 말아야지!'
이렇게 해서 학교에 도착하니 벌써 몇몇 아이들이 있었다.
다만 이 아이들에게만 살짝 알려 주고 나를 도와 달라고 하니 쾌히 승낙해 주었다.
나중에 온 애들에게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첫째 시간이 돌아왔다. 5학년 선생님께서 우리 선생님의 사연을 아이들에게 이야기 해주셨다.
아이들도 알았다는 듯 조용히 자습을 하였다.
[1] 요즘도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땅을 보면서 걷는 습관이 있는데 당시에도 그랬는가 보다.
1978년 4월 5일 수요일
오늘은 할머니께서 여행을 가셨다.
그러나 기간은 짧았다. 아침에 가서 저녁 버스로 오게 되어 있었다.
잠시 후 버스 소리가 들렸다.
우린 '이제 오시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10분이 지나도 오시질 않으셨다.
정말 이상하였다.
'분명히 버스로 오신다고 하셨는데, 아직 안 오니 혹시 사고가 난 것이 아닐까? 사고 아니면 내일은 올 거야.'
이렇게 불안에 싸이고 있을 때 밖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런데 할머니 소리는 나지 않고 세란이, 형 소리만 들렸다.
형이 방에 들어오자 형 손에는 할머니께서 가져가셨던 손가방이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할머닌?"
"저…, 사람들과 회의가 있대요. 즉 여행 갔다 온 뒷 정리요."
우리 식구들은 그제서야 웃음꽃을 피웠다.
1978년 4월 6일 목요일
아침 학교 갈 때의 일이다.
유규와 천천히 학교로 가고 있는데 며칠 전에 심은 길가의 수양버들 나무가 논 쪽으로 누워 있었다.
"아니, 이거 누가 그랬지? 유규야, 이거 똑바로 세워 놓자."
유규도 찬성했다.
그래서 가방은 길에 놓고 일을 시작했다. 잠깐 동안 했는데도 줄도 딱 맞고 보기가 매우 좋았다. 버들나무도 고맙다는 듯이 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이젠 우리 학교에서 제일 큰 언니로서 동생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지.'
이렇게 생각하니 저절로 노래 소리가 나왔다.
우리 학교엔 이제 나무가 많이 불어나고 있다. 오늘 점심 때도 전나무를 비롯해서 황금화백 등 많은 나무를 심었다.
이 나무가 튼튼하게 자라서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직접 이 나무를 사용할 수 있을련지 궁금하다. 그러기 위해서 더욱 사랑하고 보살펴야겠다.
1978년 4월 8일 토요일
"세억아, 빨리 일어나."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았는데 아버지의 말씀이 귀에 들어왔다.
시계를 보니까 7시 !!
'어, 내가 오늘은 늦잠을 잤구나. 빨리 학교 가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막 가방을 들고 '후다닥' 나와서 학교로 가려 하는데 뒤에서
"하하하…."
어제 같으면 형은 벌써 학교에 가고 없을 텐데 세란이와 뒤에서 웃질 않는가?
"바보야, 지금이 몇 신데 학교 가."
방에 들어가 다시 시계를 보니 분명히 7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분명히 7시인데….'
나는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세란이가
"오빠가 좀 빨리 일어나라고 한 시간 빨리 가게 해 놓았어."
그제야 나는 동쪽을 보았다. 겨우 해가 산에 걸쳐 있었다.
'이젠 일찍 일어나겠다. 일찍 일어나서 운동도 하고 집안 일도 거들어야겠다.'
오늘 있었던 일이 나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주] 이런 일 이외에도, 안개 끼고 비오는 일요일 오후에 낮잠을 자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 갑자기 깨워 빨리 학교 가라고 하는 바람에 진짜 학교까지 갔다가 돌아온
적도 몇 번 있었다.
1978년 4월 9일 일요일
아침 때의 일이다.
태진이, 세호, 세열이, 세철이와 함께 진달래 꽃을 따러 갔다.
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여기 저기서 연분홍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국어 책에는 진달래가 수줍어 보인다고 했지만 별로 그런 감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울긋불긋하고 아무 곳에서나 활짝 피어 나 있었다.
우리들은 꽃을 꺾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한아름씩 꺾어서 산에서 내려왔다.
또 나는 진달래 꽃잎만 병에 가득 따 넣어 가지고 왔다. 꽃 술을 담그기 위해서이다.
'정말 진달래는 좋아. 먹을 수도 있고, 술도 만들고, 장식용으로도 쓰고…. 진달래는 정말 좋아.'
우리들은 꽃을 많이 꺾었다는 기쁨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다만 지금 와서 꽃을 마구 꺾은 것이 맘에 걸린다.
1978년 4월 10일 월요일
저녁 때의 일이다.
어머니께서 나에게 문득 이런 말을 하였다.
"세억아, 너 오늘 보리쌀 좀 삶아라."
"그것쯤이야 뭐, 하면 되지."
보리쌀을 씻고, 돌을 가려내기 위해 바가지에 일어 가지고, 솥에 넣어 불을 때었다.
잠시 후 김이 무럭무럭 났다.
'이젠 됐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바가지로 보리쌀을 떴다. 어머니께서는 다 된 것을 보시고
"아주 잘했네. 이 정도면 내보다 실력이 더 좋은데!"
"그런데 엄마, 왜 나에게 오늘 이런 일을 시켰어요?"
"응, 보고 너가 실력이 있으면 앞으로도 많이 시키려고."
"그럼 내일부터 밥도 할까?"
"밥은 아직 어려워서 안된다. 크면 해."
앞으로도 어머니 말씀 잘 듣고, 더 많은 효도를 해야겠다.
1978년 4월 11일 화요일
아침 때의 일이다.
세란이가 돈을 달라고 하고 있었다.
"빨리! 엄마 빨리!"
이렇게 세란이가 돈을 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나로서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 몰아 닥쳤다. 지금 이때는 우리 집에는 돈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봄이라 농촌에는 돈 때문에
허덕이고 있는 집이 많다. 이런 현상은 우리 집 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세란이는 자꾸 뭐 사니, 뭐 사니 하면서 매일 돈을 가져갔다.
더군다나 학용품을 산다고 했으면서, 이건 보통 과자를 사 먹는 일이 일쑤다.
결국 오늘도 세란이는 학용품을 산다면서 100원을 받아갔다.
이 순간을 보고 나는 학교에 갔다.
학교 갔다와서 세란이에게 산 물건을 보여 달라고 하였더니 풀과 색종이밖에 사지 않았다.
나머지 돈은 80원이 남아야 했다. 그런데 어머니께 돌려주는 돈은 50원 뿐이었다.
분명히 30원은 군것질을 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세란이를 나무라지 않겠다.
그러나 기회가 오면 (증거가 잡히면) 그땐 세란이 마음을 돌려주겠다.
1978년 4월 12일 수요일
오늘 어머니께서는 외할아버지께서 아프시기 때문에 외갓집에 갔다.
어머니께서 집에 안 계시니 어쩐지 집이 텅텅 비었는 것 같다.
이렇게 외롭고 쓸쓸한 날은 처음인 것 같았다.
보통 집에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는 아무 것도 느끼지도 못했는데…….
정말 이상하다.
저녁 때는 설걷이를 세란이(동생)와 함께 하였다.
재미나는 것도 있었으나, 힘드는 일도 적지 않게 있었다.
솥 씻고, 그릇 씻고, 그 외 뒷 정리를 하는 것이 쉬울 것 같았으나, 어딘지 모르게 힘들다는 감이 든다.
'설걷이 때문에 엄마 손이 부드럽게 안되는구나. 정말 어머니는 좋으신 분이야. 항상 '건강하게 자라라' '공부 열심히 해라' 하는 것도 다 부모 마음이기에 그럴 거야.'
오늘부터라도 많은 효도를 해서 '효행 어린이'가 되어야지.
1978년 4월 13일 목요일
저녁 때는 어제 결심한 바를 꼭 실천하기 위해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다.
그 일은 설걷이였다. 밥 먹고 설걷이는 내가 하려고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집안 어른들께서 저녁을 다 잡숫고 나자 난 할머니께
"오늘은 내가 설걷이 할께요."
이렇게 허락을 받고 하려고 하자 세란이도 하겠다고 대들었다.
아마 세란이도 어제 느낀 점이 있었던 모양이다.
먼저 물을 많이 길어다 놓고 정성껏 했다.
솥, 그릇 등을 깨끗이 씻고 뒷 정리도 하고 나서 방에 들어오니 시간이 30분 걸렸다.
'내일은 더 짧은 시간에 더 깨끗이 해야지.'
할머니께서는 이 현장을 보시고
"야 ! 참 잘했다. 그릇도 깨끗이 씻어 놓고 정말 잘했는데?"
잠시 후 막내 세호도
"야 ! 남자가 설걷이 잘했네."
"남자라고 못해? 하면 되지."
난 이렇게 세호에게 대답했다.
"이젠 어미가 바쁘지 않겠다."
할머니께선 기쁘다는 듯이 즐겁게 웃으신다.
1978년 4월 14일 금요일
점심 시간에 집에 점심 먹으러 오니 어머니께서 외갓집에서 돌아 오셨다.
인상은 어쩐지 어두워 보였다.
나는 아무 말없이 밥만 먹고 다시 학교로 갔다.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몹시 편찮은 것 같았다.
방에 누워 계셨다.
"엄마, 어디 아파?"
"괜찮아, 머리가 조금 아플 뿐이야."
'몹시 아픈 것 같은데, 어머닌 괜찮다고 하셔.'
다시 시간이 지나 저녁 때가 되었다.
그래도 어머니께선 누워 계시며 앓고 계셨다.
더 아파 보였다.
아마 외갓집에서 잘못된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저녁 늦게야 그 이유를 알았다. 그건 할머니께서 가르쳐 주셨다.
"너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것 같단다. 어미가 올 때는 병원에 입원하셨단다.
'아, 그래서 어머니께서 병이 나셨구나!'
그제서야 어른인 어머니도 효도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외할아버지께서 곧 나으시면 좋겠다.
1978년 4월 15일 토요일
어머니 병환은 자꾸 더해 가기만 했다.
아침에 할머니께서 약 지으러 가셨다.
오후에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니 할머니께서도 돌아 오셔서 엄마는 약을 드셨다.
잠시 후 엄마는 일어 앉아있게 되었다.
'역시 약은 좋아. 그렇게도 편찮으신 어머니를 금방 정신 들게 하다니!'
저녁을 먹고 나니 아버지께서 다른 집의 대목 일을 마치시고 오셔서 외갓집에 가신다고 하셨다. 할머니께선
"내일 가지, 하필이면 야밤에 가느냐."
"내일 또 다른 집에서 대목일 해야 하고, 저녁에라도 가서 장인 어른 병환이 어떤지 보고 내일 새벽에 와야겠어요."
잠시 후 아버지께선 형 자전거를 타고 외갓집으로 가셨다.
7시 50분에 가셨기 때문에 지금은 도착했고, 아마 9시쯤에 도착했을 것이다.
다인면에 포함된 우리 외갓집 마을은 '시말'이라는 조그만 마을이다.
아버지의 결과는 내일 이 시간에 적기로 하겠다.
1978년 4월 16일 일요일
새벽에 아버지께서 외갓집에서 무사히 돌아오셨다.
아버지의 표정은 몹시 밝아 보였다.
제일 먼저 엄마가
"어떻게 되었어요?"
"이젠 좀 괜찮아. 병원의 좋은 약으로 치료를 받으니 부운 것도 빠지고…. 많이 나으셔서 내가 병원에 가니 앉아서 말씀까지 하시더군.
이번에도 치료비가 많이 들어가겠지만, 그래도 며느리 집안의 병원이니까 제일 좋은 약을 사용해서 곧 완쾌될 거야."
그제야 엄마는
"후유."
하고 큰 숨을 쉬지 않는가 !
저녁 때가 되니 어머니의 병환은 많이 나으셔서 이젠 일까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가 저녁 설걷이를 하려 할 때 나와 세란이가 대신 설걷이를 했다.
좌우간, '이젠 외할아버지를 못 보는구나' 싶더니 다시 볼 수 있게 되어서 나 역시 기쁘다.
1978년 4월 18일 화요일
집에 오니 오늘도 소죽을 끓여 놓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우리가 끓이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소 여물을 넣고 끓이려고 준비 완료하였다. 그때 세란이가 와서 방으로 들어갔다.
"세란아, 네가 소죽 끓여!"
"안 돼."
그러나 세란이는 나의 강력한 주장으로 소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우리들(형, 나)은 심심하면 세란이에게 모든 일을 맡긴다. 세란이는 반대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위협에 결국은 항복하고 만다.
오늘도 세란이에게 소죽을 맡겨 놓고 방에서 세호와 노는데 어머니께서 들어 오셨다.
"아니 왜 너가 소죽 끓이니?"
"작은 오빠가 자기는 놀면서 나보고만 끓이라고 하는 걸."
"그래? 그럼 내가 세억이를 혼내 줄 테니 오늘은 네가 끓여라."
이렇게 되어 나는 어머니로부터 꾸중을 많이 들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읍니다'를 20번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나의 어리석은 일이 많은 것 같다.
오늘은 나쁜 일을 했으니, 내일은 꼭 착한 일을 2가지 이상 해야지.
1978년 4월 19일 수요일
아침 때의 일이다.
모든 전교생이 운동장에 나가서 놀고 있었다.
"땡땡땡 땡땡땡 땡땡땡."
교실에 들어가라는 뜻의 종소리가 들렸다.
그런데도 선도와 몇몇 아이들은 들어가기 전에 오늘은 조회가 있다면서, 진홍이는 앞에 나가서 아이들을 정렬시켰다.
조금 있으니 3학년 선생님께서 오셨다.
"얘들아, 오늘은 조회없이 교실에 들어갑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잘 생각해 본다.
'오늘 아이들이 종소리 종류를 분간 못하는 것은 아직 종소리를 확실히 몰라서 그럴 것이다.'
앞으로 난 힘닿는 데까지 하급생들에게 종소리를 분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1978년 4월 20일 목요일
넷째 시간에는 국민체조를 하였다.
전교생이 다 모여서 국민체조를 했는데, 다른 학년 담임 선생님은 다 나오셨는데 우리 선생님께서만 안나오셨다.
'야 좋다! 선생님께서 안나오시니 맘껏 해보자.'
회장인 나는 물론 6학년 모두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잠시 후 국민체조가 시작되었다.
모든 전교생은 음반에 맞춰 체조를 시작했다.
6학년들은 벌써부터 싱글벙글 웃으면서 하니 맞을 리가 없었다.
"6학년 ! 너희들 웃으면서 할래? 교무실에서 너희 선생님이 보신다."
4학년 선생님께서 호통을 치셨다.
오후 때의 일이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선생님으로부터 호되게 벌을 받았다.
그것은 토끼 뜀뛰기 50개 였다.
난 앞에서 구령만 붙였지만, 속으로는 벌을 받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아이들도 나를 원망하는 눈치였다.
'회장은 뭔데 우리만 벌을 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마 나에게 말로는 안하지만 속으로는 원망할 것 같았다.
1978년 4월 21일 금요일
여섯째 시간에는 클럽활동을 하였다.
난 서예부이기에 도구를 준비해서 4학년 교실로 들어갔다.
벌써 아이들이 와서 먹을 갈고 있었다.
"자, 오늘은 '금강산' 이란 제목을 붙였으니 각자 잘 써 봐요. 잘 안되는 것은 내가 도와줄 테니 마음 푹 놓고 해요."
대략 선생님께서 본보기로 써 주신 것은 아래의 것과 비슷하다 (실제로는 4학년 선생님은 아래에 흉내낸 것보다 훨씬 잘 쓰신다).
금 강 산
오늘은 바닥에 앉아서 글씨를 썼다. 책상에서 쓰는 것보다 더 쉽고 글씨가 더 잘되는 것 같았다.
성진, 찬규, 나 모두가 오늘은 잘되는 것 같았다.
"야, 오늘은 모두 잘 쓰는데! 올 가을에 낙정국민학교에 가면 특선은 꼭 팔등에서 차지할 거다."[1]
오늘은 칭찬도 받았고 기분도 좋아서 성진이와 나는 낙정 가서 꼭 좋은 성적을 내고 오겠다고 다짐, 약속했다.
[1] 면내의 5개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낙정초등학교에서는 가을마다 백일장을 개최하였다. 어떤 독지가가 당시에 거금인 백만원을 낙정초등학교에 기부하였고, 이를 기리기 위해 발생되는 이자로 상품을 주면서 그림, 글짓기, 서예 등의 백일장을 개최하였다. 그 백일장에 참가하여 상을 타는 것은 요즘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만큼이나 모든 아이들에게 큰 영광이었고, 지금 생각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던 그 백일장을 통하여 나도 미지의 세계에 대한 '꿈'을 키워왔다. 1978년 10월 27일 일기에그 백일장에 참가한 얘기가 나온다.
1978년 4월 22일 토요일
점심 때의 일이다.
우리 1조 어린이들은 뒷동산에 가서 어린이날 연습을 하였다.[1]
각자 자기가 원하는 종목에 연습을 하였다.
그러나, 몇몇 우리조 아이들은 나오지도 않았고, 때로는 강에 놀러간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조장이기 때문에, 우선 모인 아이들의 연습을 중단시키고 돈 관계를 이야기해 주었다.
"1학년은 내지 말고, 2학년은 10원, 3학년은 20원, 4학년은 30원, 5학년은 40원, 6학년은 50원 내야 해. 이렇게 돈을 다 모으면 약 750원쯤 돼. 그 돈을 어떻게 쓰냐하면 켄트지 50원, 색소 50원, 문종이 약 200원 (3장), 꽃종이 250원 어치 사야 해. 지금 예상으로 쓸 돈이 550원쯤 된다. 물론 이 말을 지난 일요일날도 이야기했지만, 오늘 또 말하는 것은 내일까지는 모두 돈을 마련해 두라는 뜻이야. 월요일날 받으러 갈 거야. 알았지?"
"알았어."
이렇게 어린이날 준비를 하면서 하루를 마쳤다.
[1] 요즘도 그렇겠지만 5월 8일에는 어린이날/어버이날을 기념하여 동네 대항 운동회가 매년 열렸다. 우리 학교는 우리 동네 아이들과 옆 동네 아이 몇 명만 다니는 학교였기 때문에 동네 대항전이 불가능해서 마을 위쪽부터 집의 위치별로 5개 '조'를 짜서 조대항 운동회를 하였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여 1등 하려고 4월 중순부터는 낮에는 강가 모래, 뒷동산 등에 모여 아이들 스스로 피나는 훈련을 쌓았고, 밤에도 또 모여서 창호지, 색종이, 색소 등으로 응원에 쓰일 깃발, 꽃, 모자 등을 손수 밤새도록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1978년 4월 23일 일요일
오후에 1조 아이들은 강가 모래사장으로 연습하러 갔다.
연습을 다 마치고 몇몇 아이들과 나는
"누가 조개 주우러 같이 갈 사람?"
"그래, 나도 갈 께."
이렇게 해서 우리는 강가에서 조개를 줍기 시작했다.
조개는 매우 많았다. 잠깐 주웠는데도 두 사람 분을 주웠다.[1]
그때 누가 옆에서
"그만 줍고 집에 가자."
"그래, 가자."
난 더 주워서 가고 싶었으나, 하는 수 없이 그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 이거 오늘 저녁에 끓여 먹자."
"안돼. 이렇게 양이 적은데 어떻게 끓여 먹어. 또, 끓여 먹는다 해도 누군 먹고 누군 안 먹니? 그러니 큰집 할머니 갖다 드려라."
나중에 큰집 할머니께 갖다 드렸더니 매우 기뻐하셨다.
큰집 할머니께선 혼자 사시기 때문에 드시기에 충분할 것이다.
[1] 1978년 당시까지만 해도 낙동강 지류 어디에서나 맑은 물 속에 각종 조개가 흔하게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오염이 되어 조개는 거의 없고 간혹 있어도 먹기에는 부적합하다.
1978년 4월 24일 월요일
오늘은 우리 학교의 '개교 기념일'이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아무 행사도 없었고, 그냥 집에서 쉴 뿐이다.
아침 때의 일이다.
난 일찍 일어나서 집안 청소를 하기로 하였다.
먼저 마당에 물을 뿌려 놓고 빗자루로 깨끗이 쓸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니 아버지께서 지게를 지고 들로 나가셨다.
뒷 마당도 깨끗이 쓸었고, 모든 하수구의 쓰레기도 정리하였다.
한 시간쯤 지나서 아침 밥을 먹으려는고 손을 씻는데 아버지께서 들에서 돌아 오셨다.
"세억이, 청소 한번 잘했는데!"
오늘은 내가 청소를 깨끗이 하여 아버지의 고된 마음이 좀 풀린 것 같다.
1978년 4월 26일 수요일
오후 때의 일이다.
선생님께서 날 앞으로 불러 내셨다.
조마조마한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선생님 앞으로 나갔다.
"다름이 아니고, 지금 보이스카웃트 때문에 학부형들께서 돈을 좀 내셔야 되는데, 지금 대상자 다섯 사람 중에서 세 사람은 냈는데, 그 외 사람이 돈을 안 내. 그래서 하는 수 없이 5, 6학년 각 회장의 아버지께서 냈으면 한다. 그러니 지금 당장 집에 가서 너희 아버지께 말씀 잘 전하고, 주민등록증 번호와 돈 1500원 좀 달라고 해 봐."
이렇게 선생님께서 말씀하실 때 난 마음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은 봄이라서 돈이 없어 빚 내야 할 판인데, 지금 당장 어떻게 1500원씩이나 가져온단 말인가?'
좌우간 난 집으로 뛰어 갔다.
집에 가긴 했으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못자리하러 간 것 같았다.
힘없이 다시 학교로 돌아오니, 선생님께서 대신 냈으니까 걱정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1]
오후 내내, 집에 가면 어떻게 아버지께 말씀을 전할지 고민하였다.
저녁을 먹고 난 지금까지 아직도 나는 아버지께 말씀을 못 드리고 있다.
[1] 6학년 때의 담임은 신기중 선생님이었고, 이 일기 내용은 아직도 나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당시 선생님께서도 교장 선생님의 지시를 받고 결국 나한테 기부금 1500원을 내달라고 하셨는데, 그 때 선생님의 그 난감해 하시던 모습과 미안해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시골 형편을 너무나 잘 아시는 그 분은 결국 당신의 돈으로 기부금을 내셨다. 초등학교 졸업하는 그 날까지 나는 그 돈을 갚지 못해서 마음 한 구석으로 선생님께 죄송한 마음을 늘 가졌고 또한 아직도 감사하고 있다. 이 사회가 참 스승을 배출하고, 스승의 권익을 향상시키려면 월급만 많이 준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스승 자신의 입으로 "빨리 등록금을 내라", "무슨 무슨 성금 내라" 등의 돈과 관련되는 말을 학생들에게 직접 전달하지 않아도 되는 교육 행정 체계가 되어 있을 때 비로소 참된 스승, 존경받는 스승을 배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78년 4월 27일 목요일
나도 단밀중학교에서 개최되는 육상대회[1]에 출전할 선수로 당선되었다.
그것도 다른 아이들은 벌써 25일 낮부터 연습을 시작했지만, 난 오늘 아침에서야 선수로 뽑혔다.
오늘 이렇게 된 것은 진달이의 힘이 컸다.
어제 오후 진달이와 함께 집에 올 때 진달이가
"우리도 내일 아침에 연습에 나와도 됩니까?"
하는 말에서부터 선생님의 허락을 받았다.
그 결과 오늘 아침에 연습에 참가하여 100 m 를 16.8 로 1등 하여 무난히 선수가 되었다.
여태까지 진달이와 약간의 말 다툼이 있어서 서로 사이좋게 못 놀았지만, 앞으로는 사이좋게 놀겠다.
또 우리 학교를 위해서 젖 먹던 힘까지 합해서 정정당당하게 싸워 우리 학교를 빛내겠다.
오후에 집으로 돌아 올 때는 우리 학교 체육복을 입고 왔다.
[1] 면소재지에 있는 단밀중학교에서는 교내 체육대회를 개최하였고, 장래 그 학교에 진학하게 될 면내 5개 국민학교 학생을 초청하였다.
1978년 4월 28일 금요일
오늘은 소풍날이다.
우리 팔등국민학교 아이들은 각자 먹을 음식들을 갖고 소풍 길에 올랐다.
즐거운 소풍 !
이런 날이 매일 있었으면 좋겠다.
소풍 장소에 도착한 후 선생님의 지휘에 따라 음식은 각자 자기 부모님에게 맡겨 놓거나 한곳에 모아 놓았다.
"잠시 후 서예, 미술, 글짓기 이 세 가지 백일장을 할 테니 빨리 준비해 주세요."
하는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모두들 준비에 바빴다.
서예 부문에서 어떤 애들이 물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 허덕이고 있을 때 난 내가 갖고 온 물을 조금씩 나눠주었다.
'나도 준비성이라 할까 침착성이라 할까 좀 갖추었구나!'
난 서예에서 특상을 차지했다.
내가 글씨를 쓰는데, 따라오신 할머니께서 옆에 앉아 코치를 하셨다. 즉, 먹이 약간 덜 간 부분에 좀 더 칠하라고 하셨다. 나는 한번 붓이 지나간 곳에 다시 붓을 대면 표시가 나서 안된다고 배웠기에 그냥 두었다.
우리 할머니뿐만 아니라 다른 부모님들도 자기 아이들에게 힘을 주는 것 같았다.
오늘도 부모님이나 모든 식구들은 아들, 딸, 손자, 손녀를 어디서나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효도를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의 소풍은 중간에 비가 와서 좋은 소풍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매우 뜻있는 소풍이라고 느꼈다.
1978년 4월 29일 토요일
학교에 가니 오늘 시험 친다고 떠들썩하였다.
나도 아침 자습을 내고 나서[1] 다하고는 대충 시험 공부를 하였다.
후회가 된다.
'왜 내가 시험 준비를 평소에 안했지? 그런데 왜 하필이면 오늘 시험을 치는지 모르겠다.'
좌우간 근심과 불안에 싸여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빨리 시험 공부해야지.'
그때부터 난 열심히 머리 속에 넣었다.
외우는 것은 정말 싫었다. 머리 속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2]
드디어 시작 종이 울렸다.
'미치겠네! 시험 공부는 덜했고….'
선생님께서 들어 오셨다.
이상하게도 손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이들은
"오늘 시험 안 칩니까?"
"시험지가 아직 학교에 도착하지 않아서 모레 월요일 날 칠 예정이다."
"와!"
그제야 나도 마음 속으로 '후유'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아무쪼록 미리미리 준비하는 습관을 길러야겠다.
[1] 아침마다 칠판에 마음에 드는 문제 몇 개로 몇 명이 돌아가면서 아침자습 문제를 내었다. 글씨를 예쁘게 쓰는 편이어서 중고등학교 때까지도 항상 '서기'는 도맡아 하였고, 특히 학급일지와 출석부 정리를 하느라 고생한 기억이 아직도 난다.
[2] 이 문장을 보고 어릴 때 내 모습이 아직도 그대로 있음을 느꼈다. 요즘도 마찬가지로 외우는 것은 정말 싫어하며, 중고등학교 때는 수학, 물리처럼 안 외워도 되는 과목을 더 좋아했고, 생물, 국사 등은 제일 싫어했다.
1978년 4월 30일 일요일
난 요즘 굉장히 바쁘다.
집안 일을 돕고 싶어도 어린이날 운동 연습해야지, 시험 공부해야지…….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오늘도 들에 날 데리고 가려고 하셨다.
"세익이, 세억이 오늘 들에 가자."
"나는 어린이날 연습과 시험 때문에 들에 못 가요."
형은 도와준다고 했으나 나는 거절했다.
그 뒤 나는 시험 공부랑 숙제랑 다하고, 오후에는 어린이날 체육대회를 대비해서 우리조 애들과 연습을 하였다.
그럭저럭하다 보니 이미 해는 지고 저녁이 된다.
난 혼자 오늘을 마무리해 본다.
오늘은 마음이 편하지 않다.
1. 아버지께서 들에 가자고 했을 때 도와 드리지 못했고,
2. 그렇다고 시험 공부도 사실은 제대로 못했다.
'이렇게 많이 잘못했지.'
오늘 있었던 일은 결국 불효밖에 없었다.
앞으로는 효도를 많이 해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