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정년 퇴직시켜 주세요.
며칠 전에 사무실 제 자리를 옮겼습니다. 작년 9월에 IMEC 내에 High-k team 이 생겼으나, 그 동안 자리 정비를 못하고 모든 팀원들이 이 건물, 저 건물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Sematech assignee 들도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습니다. 당연히 누구를 만나려고 해도 멀리까지 가야 하니까 그 동안 업무 효율이 많이 떨어졌던 게 사실입니다. 제가 올해 1월에 여기에 도착했을 당시에 high-k 팀원을 한 곳으로 모으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6개월 이상이 지난 아직도 팀원들을 한 곳으로 모으는 작업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회사 경우는 조직 발표가 나면 Ready, Go! 해서 며칠 안에 전체 연구소의 자리 이동을 끝낼 수 있었음을 상기해 보면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IMEC 에서는 자리를 옮길 때 절대 동시에 옮기지를 않습니다. 한 사람이 cube를 비우면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오고 하는 식으로 1 사람씩 순차적으로 옮깁니다. 만약 순서가 된 어떤 사람이 1주일 휴가를 가고 없으면 1주일 동안은 일이 진척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짐을 자기가 직접 옮기는 것이 아니라 이사를 담당하는 “imec 직원” 3명이 대신 짐을 옮겨 줍니다. 개인이 짐을 옮기다가 허리라도 삐끗하면 소송을 걸 수도 있기 때문에 개인에게 짐을 옮기도록 하지는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imec 내에서 이사 같은 일을 전담하면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개인이 사소한 짐이라도 옮기다가 들키면(?) 곱지 않은 눈길을 받습니다. 한마디로 자기 일을 침범한다는 강한 불만의 표시입니다. 더 재미(?) 나는 것은 하루에 3~4명 정도의 이동을 하면 그 이상 이사를 진행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흩어져 있는 high-k 팀을 다 모으려면 3개월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IMEC 에서는 잡다한 청소 일은 모두 외부 업체에 하청을 주고 있는데, IMEC에 있으면 벨기에의 청소관련 직업이 얼마나 다양한지 볼 수 있습니다. 담배 재떨이만 청소하는 아저씨 (이 아저씨는 누가 재떨이 주변에 꽁초를 버리면 Thank you for creating work 하면서 농담도 합니다), 복도 바닥만 흡입하는 아줌마, 복도 옆 난간만 전문으로 청소하는 아저씨, 건물 벽만 닦는 아저씨, 유리만 닦는 아저씨, 복도 액자만 닦는 아줌마, 책상만 닦는 아저씨, 캐비닛만 닦는 아저씨, 회의실만 청소하는 아줌마, 쓰레기 통만 비우는 아저씨, 화장실 청소 전문가도 있고,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구름 다리 “지붕만” 청소하는 아저씨, … 이외에도 많이 있는데 생략하고…
아무래도 하이라이트는 개인 PC 에 묻은 이물질을 닦아주는 아줌마인 것 같습니다. 이 아줌마 때문에 가끔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Imec 지급 PC에는 한글 자판이 없고, 저는 한글 자판을 못 외워서 독수리 타법을 구사해야 하기 때문에 imec 지급 PC의 keyboard 에 유성펜으로 ㄱ ㄴ ㄷ ㄹ … 을 써 두는데 이것마저도 깨끗이 지워 버립니다. 저는 또 쓰고 아줌마는 지우지 말래도 또 지우고… 그래서 한번은 스카치 테이프를 작게 오려서 자판마다 붙였는데,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와서 그것마저도 하나하나 떼 버린 후 자판을 깨끗이 청소했더군요. 며칠 전에도 key board에 ㄱ, ㄴ, ㄷ,… 다시 쓴다고 15분 소모했습니다. 이제는 스카치 테이프는 붙이지 않으렵니다. 다음에 우리나라 들어가면 한글 자판을 하나 사와야겠습니다.
좌우간, 우리 사고로는 청소하시는 분들이 고달플 거라는 선입감을 가지고 있는데, 막상 청소 담당 직원들의 표정을 보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상당히 여유 있고, 표정이 너무 밝습니다. 왜 그런가 궁금했는데, 이 사람들의 월급이 연구원들의 월급보다 많다는 설(믿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이 있기도 합니다. 아마도 많이 번 사람은 세금을 많이 내기 때문에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수입이나 정신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수입이나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교수들과 수입이 차이가 나지 않는데 청소하시는 분들의 표정이 일그러질 수 있겠습니까? 벨기에라는 나라가 부러운 점은, 대부분 국민이 귀천이 따로 없는 “다양한” 직업을 하나씩 가지고 밝은 표정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온지 6개월이 넘었는데, 아직도 거리에서 거지를 단 한 사람도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한편, 유럽 사람들은 상당히 검소하다고 합니다. 입고 다니는 복장을 보나, 슈퍼에서 쇼핑하는 것을 보나 실제로 보아도 너무 검소합니다. 벨기에의 1인당 국민소득이 대략 3만불인데 (우리나라보다 3배 이상 더 잘 사는 나라지요) 살아가는 모습은 왜 이렇게 검소할까 라는 의문이 항상 있었는데, 이제서야 그 해답을 조금 얻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한 마디로 “당장 쓸 돈이 없어서” 검소한 것 같습니다. 여기 사람들도 부자들은 하나 같이 BMW 나 벤츠 몰고 다니며, 행동을 보면 있는 체 하는 게 눈에 금방 들어 옵니다. 그러나 일반 직장인들은 검소할 수 밖에 없습니다. IMEC 내의 어떤 친한 직원을 잘(?) 설득하여 월급을 물어 보았는데, 이것 저것 떼고 실제로 수령하는 평균 월급은 10년 정도 경력 되는 사람이 약 10만 BEF (현재 환율로 280만원, 연봉은 약 3400만원) 를 받는다고 합니다. 세금과 연금으로 원천 징수되는 돈이 최소 49% 에서 최고 70% 정도이므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대개 그 정도 받는다고 보면 맞다고 합니다.
벨기에 물가가 우리나라의 약 2배임을 고려하면 할 수 없이 검소하게 살면서 조금씩 저축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축이라는 것이 미래를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름 휴가나 기타 조금의 목돈이 필요한 경우를 대비한 최소한의 비용을 모으는 작업이라고 합니다. 혹시 지인 중 누가 유럽으로 취직하겠다고 하면,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리세요. 여기 남의 나라에서 노후까지 보내지 않을 이상은 세금과 연금 명목으로 나가는 50% 이상의 월급을 눈 뜨고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기에가 선진국 중에서도 앞서 있는 나라임에 틀림없는 것은 노후를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년 퇴임하는 그 순간부터는 국가에서 주는 연금으로 직장 다닐 때 보다 더 풍요롭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림 같은 전원 주택가로 가 보면 젊은 사람들은 거의 안 보이고, 노인들만 보입니다. 정년 퇴임 후 국가가 노후를 확실하게 책임지는 사회이지요.
IMEC 에도 50대 중반 정도 되는 평연구원들이 눈에 많이 띄는데, 이들은 가끔씩 농담으로 빨리 정년퇴임 하는 게 소원이라고 합니다. 퇴임 후에는 지금보다 더 편하게 더 윤택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살면서 아직도 적응이 잘 안 되는 부분은, 관공서, 학교는 물론이고 심지어 패스트푸드 햄버그집까지도 업무 처리 속도가 너무나 느린 것입니다.
이렇게 느긋느긋~ 세월아 내노라 하는 식이 몸에 밴 것은, 현재는 열심히 일해도 국가에 헌납하는 게 많고, 미래는 풍족함이 보장되어 있는 사회 시스템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다면 이들도 우리처럼 미래를 위해 정신없이 현재를 살아야 되겠지요.
2001. 7.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