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대 교 회 의 신 앙 문 서
클 레 멘 트 제 1 서 신
클레멘트서신은 1628년에 예루살렘의 시릴 대주교에 의해 영국왕 찰스1세에게 헌정된 신구약외에 두 개의 문서중 하나이며 로마의 교회가 고린도에 있는 그 자매 교회에 보내는 긴 편지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비평가들은 그 연대를 주후 96년경으로 잡고 있다. 클레멘트는 사도 베드로의 계승자들 가운데 세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먼저 클레멘트는 구약 성경의 통달은 물론 베드로전서,야고보서,히브리서,로마서,고린도전후서,에베소서에 익숙했고 주후 100년경에 순교의 죽음을 당하였다고 한다. 서신이 쓰여진 이유는 사도바울 당시에 고린도 교회를 분열시켰던 논쟁과 다툼이 한 세대가 지나서 다시금 재연되었다. 젊은 층 가운데 혈기에 찬 어떤 자들이 정당하게 임명된 그들의 장로들에 반대하여 일어나서 그들을 그 직위에서 내쫓으려 하였다. 그 분쟁은 교리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개인적인 것이었고 연장자들의 권위에 불만을 품은 소수의 말썽꾼들을 명백히 꾸짖고 고린도 전 교회를 탄핵하고 권면하기 위하여 쓰여졌다. 그중 구약과 신약의 많은 인용 또는 관련된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중 신약 성경에 나온 말씀들을 중심으로 기록해 본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름 받고 거룩하게 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식민지로(고전1:1-3). 모든 은혜와 평강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있을지어다(고후1:2) 고린도인들에 대한 이전의 훌륭한 기록으로 그대들의 여인들은 그들의 남편들에게 모든 합당한 애정을 나타내며 흠 없는 헌신과 양심의 정결로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명하여졌으나, 즉 그들은 그들의 삶의 지도에 복종하며 단정하게 가정을 돌보며 모든 명에 있어 불별의 모범이 되도록 가르침을 받았도다(벧전 3:1-6) 또한 겸손과 완전한 겸허가 그대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었으니,그대들은 자기를 주장하기보다는 복종하기를 더 좋아하였으며,그대들의 마음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더 귀하게 여겼도다. 시기심의 죄악됨으로 나의 사랑하는 자가 먹고 마시므로 커지고 비만해져서 발로 찼다(히3:7-11). 바울은 질투와 다쿰을 인하여 인내로써 상급을 얻은 참된 모범이 되었다. 그는 일곱 번이나 감금을 당하고 추방되고,돌에 맞았다(고후 11:23-27) 회개하기에 결코 늦지 않았음에서 무모하고 헛된 迷妄들을 버리고 대신에 존귀하고 거룩한 우리의 전통의 법칙으로 돌아가자.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그분의 보시기에 선하며 기뻐 받으실만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피에 고정시키자. 성도들의 모범적 복종에서 그는 이 세상에서 옮겨져서 죽음을 맛보지 않게 되었다(히11:5) 완고와 분열을 버릴 것을 호소함에서 좀더 겸손을 가지자(빌2:3). 지혜로운 자는 자신의 지혜를 자랑치 않으며, 강한 자는 그의 힘을 자랑치 않고,부유한 자는 그의 부를 자랑치 않는다. 자랑하는 자는 그분을 구하며 의와 정직을 행함으로 주를 자랑해야 할 것이다(롬2:17.고전1:31.고후10:17) 너희가 자비를 얻기 위하여 자비를 베풀라(눅6:36). 용서하라.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다.너희가 행한 그대로 너희에게 행해질 것이며, 너희가 준 것을 너희가 받을 것이고, 너희가 친절을 베푼 대로 너희가 친절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몫이 너희 자신의 저울에 의하여 계량될 것이다. (눅36:36-38). 이 교훈과 계명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거룩하신 말씀에 순종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살도록 결심할 수 있는 힘을 주기를 원하노라. 온유하고(마5:5) 화평을 구하며(마 5:9.롬14:19)내 말을 두려워하는 자 외에 누구에게로 내가 향하겠는가?(사66:5) 온유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땅에 거할 것이며,순전한 자들은 그 위에 머무를 것이나, 범죄자들은 그 곳에서 소멸될 것이다. 가난한 자의 곤궁함과 궁핍한 자의 슬픔을 인하여 이제 내가 일어나서 그를 안전한 곳에 둘 것이니, 내가 그를 보호함으로 나의 담대함을 나타낼 것이라.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겸손으로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었으나 오히려 자신을 낮추심으로 오셨다(빌2:6-7). 조화와 협력은 자연 자체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인것에 대해 우리의 여인들로 선함의 길을 걷도록 그들로 하여금 사랑스러운 순결의 모범이 되도록 가르치며(딤전2:15) 부활을 의심할 근거가 없다란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마음에 의심하는 자들은 얼마나 불쌍한가.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 조상의 때에도 이일들에 관하여 말해졌는데(고전15:19), 보라, 이제 우리가 늙게 되었는데도 그것들 중 하나도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았도다라고 한다(벧후3:4). 그분은 분명코 속히 오시리니 그분은 지체치 아니하실 것이다(계22:20.히10:37). 너희가 기다리는 거룩한 분이신 주님께서 그분의 성전에 갑자기 오실 것이다(살전5:2). 농부가 나가서 각 씨를 밭에 뿌리면, 그것은 땅에 떨어져서 알맹이가 되어 시들고 부패한다. 그러나 때가 되면 주님의 섭리의 능력이 그것을 부패로부터 일으키고, 그 한 알의 씨앗으로부터 수많은 다른 알갱이들이 솟아나와 그 열매를 맺는다. 믿음은 행위를 수반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그분께서 이미 우리에게 경고하시기를(롬11:36), 보라 주께서 가까이 오시니 그가 모든 자들의 행한 일을 따라 보상하려 하심이라(계22:12). 머리는 발들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발들은 머리가 없이는 헛된 존재이다(고전12:14-27)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축복을 사랑은 무수한 죄를 덮는도다(벧전4:8) 그 불의가 사함받고 그 죄가 덮임을 받은 자들은 복되도다. 주께서 그 죄를 생각지 않으며 그 입술에 거짓이 없는 자는 복되도다(롬4:7-8) 진정으로 하늘 나라의 시민된 자들은(빌3:20) 하나님께서 사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고, 성령이 그러함과 같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법을 겸손함과 항상 다른 사람들을 돌아봄으로 지키며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분명코 영광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는 자들의 수에 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영원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1:17,롬11:36)
이 그 나 티 우 스 의 서 신 들
저자는 속사도(續使徒) 시대에 안디옥 대교구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 데오포루스(Ignatius Theophorus)이다. 그의 서신들에는 그의 청년 시절이 난봉과 방탕의 시기였으며 그로 인하여 성 어거스틴과 같이 후에 자신을 심히 질책하는 표현들이 있다. 그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인 107년에 순교했다. 그의 7개의 서신 중 하나는 서머나교회의 감독인 폴리갑에게 썼다. 그의 영향은 그 자신의 인격과 그의 서신들이 가지는 신학적 가치와 그리스도인들의 순교적 이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다. 폭풍과 긴장의 시기에 대교회의 지도자로써 이그나티우스는 지혜롭고 두려움이 없는 모습을 보여 주며, 가장 엄격하고도 가장 부드러운 훈계를 베풀 줄 아는 인물이다. 동시에 그의 개인적 생활에 있어 그는 모든 일에 사도들을 닮은 사람이었고, 진실한 경건을 배양하는데 언제나 열심이었다. 그의 서신들 역시 그 고요하고 확고한 믿음과 모든 교회들을 위한 애정에 찬 염려와 그 자신의 교인들에 대한 부드러운 관심을 통하여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명확하게 비추고 있다.
이그나티우스의 신학의 개념은 첫째, 성직자의 권위와 이단과 분열에 대한 증오와 순교의 영광이며, 이것은 그당시 거대한 도시 안디옥의 도덕적 명성이 추한 것이었고, 모든 종류의 방탕과 죄악이 시리아인들과 유대인들, 희랍인들, 로마인들로 혼합된 대중들 사이에서 번성하였다. 주민들의 방탕함이 그 도시를 동방의 헬라 도시들 중 가장 심하게 타락시켰다. 또한 분쟁과 폭동이 빈번하였으며, 성급한 성격을 가지고 난폭하고 흥분하기 쉬운 주민들은 수많은 폭력과 유혈 사태를 일으켰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인들을 지도하는 이그나티우스의 책임에 주어졌다. 둘째, 그는 교회가 세 파로 나뉘어진 것을 발견하고 좌파, 우파, 중도파중 좌파로 가현설자들인데 이들은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나타나서 특히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세력을 뻗쳤고 종교와 철학을 조화시키며 초자연에 대한 이성적 설명을 구하려는 지적 갈망에 그 기원을 둔 자들로서 이들을 정통 신앙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존재 보았으며 그들에 대하여 가장 날카로운 공격을 하였다. 우파로 유대주의의 "묵은 누룩"에 깊이 배어 있던 그리스도 인들이었다. 이들을 중심체에 연합케 함으로 분열되지 않은 교회를 이루는 방도를 찾는것의 해결이었다. 이 시대는 공통된 신조가 아직 존재치 않았으며, 어떠한 기독교 문서들로 충분한 권위를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인격적 요소에 의존했다. 그것으로 인해 이그나티우스 신학의 요점은 감독직을 높이는 것이라는 견해가 빈번하게 제시되었다.
이그나티우스는 가현설자들을 가장 강력하게 정죄하였고 그에 못지 않게 고질적인 자들은 유대주의로 안대옥에서 문제 야기의 근원이었다. 사도 바울도 처음으로 직면한 문제였고 사도 베드로와 충돌케 하였던 문제였으며 그로 인하여 첫번째 예루살렘 회의가 열렸고 갈라디아서 전체에 반영되고 있다. 이 분파에 속한 자들이 할례는 버렸으나 소중히 여기는 어떤 신조들과 관습들을 버리기를 주저하였음이 분명하고 교회 제도에 도입되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 복음의 가르침과 구약의 예언서들에 대한 그들 자신의 해석을 조화시키지 못하는 그들의 부족한 능력을 지적하고 있다. 아마도 그들의 주장이 에세네 공동체의 그것과 매우 공통된다는 점에 이 무리에 속한 자들이 기독교화한 에세네파들일 것이었다.
그러나 이그나티우스가 교회에 가장 깊이 남긴 인상은 그의 생애가 아닌 오히려 그의 죽음이었다. 그 죽음으로 교회에 새로운 빛에서 순교의 온전한 실체를 보게 하고 그것에 새롭고 신비로운 영광을 부여하게 하였으며 그는 "나는 그리스도를 위한 순전한 떡이 되기 위해 사자의 이에 곱게 갈리우는 하나님의 밀이다"라고 하였다. 순교의 이상과 그것을 최고의 상으로 여기고 갈망하는 그 자신의 열정을 로마서에 나타내고 있다.
그의 서신들 중에 나타난 신약의 말씀들을 기록해 본다.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그가 예수께서 품에 안으셨던 어린아이 였다고 한다(막9:36) 크리스챤이라는 조소적인 별명을 들었다(행11:26)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구호금이 거두어졌고 바나바와 사울의 손을 통하여 전해졌다(행11:30)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사실에 방불한 것뿐이며(요일4:3) 그의 몸의 가시는 유대주의였다(갈2:13-21,행15:1) 너희의 선한 행위로 인하여 너희가 참으로 그의 아들의 몸의 시체임을 알것이라(마5:16,골1:10)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벧전5:5,잠3:34) 만물이 마지막이 가까왔도다(눅21:20)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그분의 성전이요 그분은 그 안에 거하는 하나님으로 그분 자신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처럼 행하자(고전6:19) 이제 너희의 지혜로운자가 혹은 변사가 어디있느냐?(고전1:20) 이는 육신을 따라 다윗의 자손이요(롬1:3-4) 마그네시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그대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그대들의 감독이 연조가 짧음을 멸시치 아니하며(딤전4:11) 그대들 자신들로 다른 사람들의 교훈과 헛된 이야기에 결코 미혹당하지 않도록 하라(딤전4:1) 그분과 그분의 죽음으로 인하여 생명이 처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밝았도다(고전15:11-13) 그러므로 이제는 부패하여 묵고 쓸모없게 된 누룩을 버리고 새로운 것인 예수 그리스도께로 변화하라(갈5:6-10) 트라레스 교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에 봉사하는 집사들 역시 모든 면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이어야만 하나니(엡1:5-9) 그의 아버지께서 그를 일으키심으로 그분은 진실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나니,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는 우리도 그의 아버지께서 일으키실 것임은 그분을 떠나서 우리에게 참된 생명이 없음이로다(롬6:4) 로마 교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그대들의 입술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그대들의 마음에는 세상을 품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딛1:16) 나 자신은 그 교회의 일원으로 자처하는 것을 부끄럽게 느끼노라(고전15:8)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선 그들은 결코 아버지께서 심으신 것이 아니며(마13:25-28) 그러나 나의 영적 자아에 대하여는 아무도 그럴 수 없나니,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그 근원과 목적지가 똑같이 그것에 알려져 있으며(요3:8)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룸이로다(롬8:28) 너희는 모두가 하나의 공통된 성찬을 행하도록 단단히 주의할지니(고전1:26-27) 서머나 교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높은 지위가 자랑의 이유가 아나니, 믿음과 사랑이 모든 것이 되며, 이것들이 다른 모든 것보다 첫째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여된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가진 자들을 보며,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어긋나는가를 보라. 그들은 사랑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과부와 고아를 전혀 생각지 않고, 고난당하고 갇히고 주리거나 목마른 자들을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마25:41-45) 나 자신으로 말하면, 그의 부활 후에도 그가 실제적인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계셨음을 나는 알고 믿는다(요20:25-28) 폴리갑에게 보내는 서신에는 그리스도의 훌륭한 용사가 마땅히 그리하여야 하는 것처럼 그들 모두의 연약한 것들을 그대 자신의 어깨에 지라(마16:24) 그러므로 모든 경우에 있어 뱀과 같이 지혜롭고, 그러면서도 언제나 비둘기 같이 순전하라(마16:16) 그러므로 하나님의 훌륭한 경주자와 같이 그대 자신을 엄격하게 다루라. 그 상급은 그대가 잘 아는대로 불멸과 영생임이라(딤후 3:7-8) 나의 자매들에게 주님을 사랑하며 또한 육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그들 자신의 남편들로 만족하라고 말하라(딛1:4-5) 마찬가지로, 나의 형제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의 아내들을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사랑하라고 권면하라(엡5:25) 너의 세례를 방패로 삼고, 믿음을 투구로, 너희 사랑을 창으로, 너희 굳건한 인내를 갑옷으로 삼으라. 그리고 군인이 그의 상금을 쌓듯이 선한 일들을 쌓으라(엡6:10-18)
서 머 나 의 폴 리 갑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와 더불어 서머나의 폴리갑(포리파르푸스, Polycarpus)은 속사도 시대의 또 하나의 대표 인물이다. 폴리갑은 사도들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았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보았던 많은 사람들과 친밀한 교제를 가졌다. 그러한 면에서 그는 2세기 후반의 교사들과 신학자들을 교회의 최초의 설립자들의 교리와 전승들에 연결시키는 말할 수 없이 값진 고리의 역할을 한다.
서머나는 그 시대의 종교적 논쟁을 벌이는 교리들과 제의들 사이에서 혼란의 격투장이었고 황제의 권위에 의하여 격려된 이교 신앙이 열렬하고도 투쟁적인 부흥을 일으키고 있었다. 새로운 신전들과 성직자들, 의식들, 축제들이 일어나고 있었고, 점성술, 마술, 꿈, 징조들이 부흥하고 번성했으며,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서머나가 특출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온 기이한 종교들이 떼를 지어 그 도시에 자리를 잡았고 이교 신앙의 적대심 외에도, 그리스도교인들은 그 초창기부터 강력한 세력을 가진 유대 식민자들의 지독한 악의에 의하여 고난을 당하였다. 또 하나는 내적으로 분파와 분열에 의하여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 분파들이 나중에는 다양한 이단들로 요람에서부터 출현하기 시작하고 있었고, 새롭고 왜곡된 교리들을 가진 교사들이 어디에서나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이 폴리갑이 감독직을 수행함에 있어 어려움들이 되었다. 그가 새로운 박해로 체포 당할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도시로 끌려갔다. 원형극장에서 그의 신앙을 철회하도록 설득하는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고 평온한 위엄과 단호한 용기로써 순교했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바위에 닻을 내린 것과 같았으며, 일편단심의 충성으로 사도적 신앙의 보존을 확실케 하였다. 그의 단순한 경건심이 어떠한 모양의 이단에 대하여서도 본능적으로 반발하게 하였던 것이다. 예로 마르키온(Marcion)이 한 때 그에게 "우리를 인정하라"고 말하였고 폴리갑은 "나는 너를 사탄의 첫 번째 자식으로 인정한다"라고 하였다.
그의 순교는 화염에 둘러싸여 조금도 상함이 없이 서 있는 백발의 모습으로 그려졌고 순교 년도는 여러 추측에 의해 167년, 177년과 가장 유력한 155년 2월 23일이며 정확한 것은 새로운 증거들이 나타나야 알 수 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폴리갑의 서신의 내용은 그의 경고들 중 가장 진지한 것으로 빌립보 교회의 제직 가운데 한 사람을 실족시켰던 금전욕에 대한 것과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실체를 부정하는 가현설주의(Docetist) 이단자들에 대한 것과 그 외에 장로들과 집사들 그리고 평신도와 여인들의 직무에 대한 설명들이다.
그의 서신에는 어떠한 구약 성경의 인용구도 없고 마태복음, 로마서,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그리고 베드로전서로 인용된 형태나 뚜렷한 암시들이 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1,2)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5:3-10)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함(딤전6:7) 과부들은 그들이 우리 주님의 믿음을 시행할 때 분별 있게 할 것이니, 그들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끊임없이 중보의 기도를 드릴 것이며(딤전5:5) 우리의 집사들은 그분의 의로운 심판대에서 어떠한 책망도 받지 않도록 할지니, 그들은 사람들의 봉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봉사자임을 잊지 말 것임이라(딤전5:10-13) 간음하는 자나 우상숭배자나 남색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니(고전 6:9) 만일 우리가 주님께 우리를 용서하시도록 기도하려면, 우리 자신이 용서해야만 할지니(마5:23-24) 우리로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도록(마6:13) 힘써 간구하면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자(벧전4:7)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기 때문이로다(마26:41)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 위에서 그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며, 죄도 짓지 않으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면서(벧전2:22,24) 이 사람들이 달려간 길은 헛된 것이 아니라 신실하고 영예스러운 것이며(빌3:14) 그러므로 이같이 굳게 서서 주님을 너희 모본으로 삼으라(엡5:1) 서로가 형제의 사랑으로 돌보며, 진리를 위하여 합심 협력하라. 주님의 공손한 정신으로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아무도 멸시하지 말라(엡4:2.3)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 6:2)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4:26)
디다케(12사도의 교훈)
'열 두 사도들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주신 주님의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단순히 디다케(The Didache; 교훈)라고 알려진 이 문서는 1873년 콘스탄티노플의 한 수도원 도서관에서 1056년 희랍어로 쓰여진 120개의 양피지 조각들로 된 한 권의 조그만 책이다. 이 책은 그 내용이 "두 길"로 알려진 첫 번째 부분은 그리스도인의 도덕에 대한 해설로 이루어져 있으며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각각 이루는 다양한 덕과 악을 제시하며, 두 번째 부분은 세례, 금식, 성만찬, 순회 전도자들, 지역 교역자들 등 교회의 활동들을 다루는 규칙들에 대한 일람표로 되어있다. 이것은 여러면에서 디다케 그 자체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쓰여졌을 것의 추측이 있고 저자에 관하여는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디다케의 독특한 흥미와 중요성은 이 옛 규례들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으로 그것들이 1세기 마지막 무렵의 시리아의 어느곳에 있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생활을 반영하고 그 시대는 여전히 방랑 전도자들이 교회의 중요한 직분에 있었고 감독들이 장로들로부터 구별되지 않았던 때라는 것을 알려주며 즉, 신약 성서와 보다 충분히 발전된 2세기의 조직 사이에 놓여진 분명치 않은 시대의 교회 생활의 상태에 관한 증거물들 중 유일한 단편인 것이다. 신약의 인용 성구는 제1부 두 길 중 그는 감금되어 그의 행위에 대하여 조사를 받고 마지막 한 푼을 갚기까지는 나가지 못할 것임이라(마5:25-,26) 너희가 할 수 있는 것만큼 행하라(롬12:3) 제2부 교회 요람편에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28:19) 거룩한 포도나무를 인하여 당신께 감사를 드리나이다(마6:9-14) 영광이 영세토록 당신께 있으리로다(고후4:6) 영광과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신께 영원히 있사옵니다(마6:13) 모든 죄는 사함을 얻을 수 있으나, 이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없다(마12:31) 세상 마지막 때에는 거짓 선지자들과 미혹하는 자들이 많아질 것이며(벧후2:1-3)
바 나 바 의 서 신
본 서신의 기록 연대는 13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인데 바르코흐바의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하드리안 황제가 그의 전임자인 트라얀의 유대인들에 대한 가혹한 정책을 바꾸고 새로운 유화 정책으로 그들을 다루려고 했음이 알려지자 이것이 그들의 민족적 열정을 신속히 부흥시키고 이방인들의 개종화를 열렬히 재개하므로, 그들의 형제들 중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확신을 가졌던 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바나바는 거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기록하였다. 이 서신은 바나바서의 풍부한 성경 인용들 중 많은 것이 부정확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 자체로 혹은 다른 것들과 결합된 것으로 나타나는 이것들의 부정확성을 설명해줄 수 있는 요소가 있고 그는 그의 논증을 강화하기 위하여 성경 본문을 변경시키거나 덧붙이는데 별로 개의치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그의 인용구들은 원문과 대조될 때 때로는 거의 분간할 수 없을 정도까지 된다. 또한 이 서신은 신약성경의 문서들에 준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초대교회는 이 바나바서를 높이 평가하였고 성경 자체의 권위에 매우 근접함을 인정 받았다. 서신 중의 신약 인용 성구를 살펴본다. 보라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이러하니(마6:16-18) 청함을 받은 자들은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건축자들이 버린 들이 모퉁이의 돌이 되었도다(벧전2:1-7,엡2:20) 내가 종일 손을 펴서 나의 의로운 길을 거부하는 패역한 백성을 불렀노라(롬10:21)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마22:44) 큰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롬9:12) 보라 주의 하루는 천년 같이 될 것이라(벧후3:8)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서신
저자를 알 수 없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관습들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이교도의 요구에 답변하는 것이 목적이다. 124년 경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고 그 시대의 교회 생활에 대한 저자의 서술과 또한 그의 신학의 단순성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내용은 이교의 어리석음과 유대교의 어리석음들, 그리고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특징들과 기독교 계시의 초자연적 본질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성육신의 신비로움 등에 대하여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