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광역시 동구 신천3동 850-6번지에 위치한 청구고등학교 전경
◇ '물심양면 축구부 지원 제2,3 박주영 만들 것'
대구 청구고는 축구부 성적이 좋은 해엔 학생들의 대학입시 성적도 좋다고 한다. 그 정도로 청구고 축구는 학교의 상징이자 학생들의 사기에 직접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축구명문교인 청구고는 학교에서 축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만큼 큰 것임을 어림진작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축구라는 운동은 월드컵에서 보다시피 세계인들이 모두 좋아하는 스포츠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보급된 종목이다. 따라서 축구는 이제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한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역할까지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청구고 축구가 배출한 스타플레이어는 향토의 명예를 높이는 동시에 국위선양에도 한 몫하고 있다.
청구고 축구가 배출한 수많은 스타들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좁혀서 보더라도 학교는 축구를 통해 선후배 관계를 돈독하게 해 주는가 동시에 경기장을 찾아 선후배들이 한데 어울려 소리를 외치며 실제 하나가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청구고는 5~6년 전부터 동창회가 주축이 돼 ‘축구부 후원회’를 만들어 선수들의 각종 대회 참가경비와 응원비용 등을 지원하고 있다. 또 대회 우승시에는 지도자와 선수들에게 격려금과 장학금도 지급하고 있다.
학교는 또 체육관에 ‘축구관’을 마련, 각종 축구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고 교직원들도 몇 년 전부터 축구후원회를 결성 지원에 나서고 있다.
학교와 동창회, 교직원 등 모두가 하나 되어 축구를 사랑하는 것이 청구고 축구의 강점이며 이런 분위기는 또 다시 제2, 제3의 박주영 같은 선수를 배출해 낼 것으로 본다.
▲변병주, 백치수, 백종철 선수와 함께 14회 졸업생으로 대통령금배 우승을 비롯하여 문화체육부장관기 전국고교대회 등 3연패를 석권하며 청구고를 전국 최강으로 이끈 박경훈 제주 유나이티드 감독
◇ 35년 축구역사 '한국축구 발전 견인'
흔히들 대구는 ‘구도(球都)’라고 한다. 대구시민들이 야구를 좋아하고 걸출한 야구스타들이 많이 배출된 탓에 붙여질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이젠 이 명칭이 바뀌어야 할 것 같다.
국민적 스타로 떠오른 축구영웅 박주영을 비롯, 김동현 등 한국축구의 걸출한 신세대 재목들이 바로 대구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대구는 70년대 초중반만 해도 축구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축구팀도 많지 않았는데다 국가대표급 선수들도 배출되지 않아 시민들의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구 청구고 축구부가 창단됐지만 그 꽃을 활짝 피우는데다 거의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변병주(대구FC 감독), 박경훈(전 U-17세 대표팀 감독) 등 국가대표급 선수들의 활약으로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전성기를 구가하던 청구고 축구부는 이후 다소 침체기를 보이다 2000년 이후 김동현(경남FC), 박주영(모나코) 등 걸출한 스타플레이어의 등장으로 중흥기를 맞게 된다.
박주영 졸업 이후에도 청구고는 금강대기 전국고교축구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각종 전국규모 대회에서 상위권에 올라 축구명문교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14회 졸업생으로 대통령금배 우승을 비롯, 문화체육부장관기 전국고교대회 등 3연패를 석권하며 청구고를 전국 최강으로 이끈 변병주 전 대구FC 감독
◇ 70년대 말~80년대 초- 제1의 전성기
청구고 축구부는 지난 1972년 당시 서경윤 교장의 축구열 덕택에 빛을 보게 된다.
1964년 설립된 청구고를 1971년 인수한 류규평 이사장은 자신의 맏사위로 당시 서울 한양여고에 근무하던 서경윤씨를 교장으로 데려왔다. 한양여고 재임시절부터 축구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고 있던 서 교장은 취임한 다음해인 72년 11월 축구부를 창단하게 된다.
그러나 창단은 했지만 축구저변이 넓지 않았던 대구에서 우수선수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던 당시 형편이었다. 청구고는 이 때문에 타 지역에서 우수선수를 스카웃하는 적극적인 축구부 육성책을 써 마침내 창단 2년만인 74년 전국대회 첫우승의 기쁨을 맛본다.
74년 문교부장관배 전국고교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75년엔 청룡기배 전국고교축구대회, 대통령금배전국고교대회, 전국대회우승팀초청 포철회장배대회 등에서 우승하며 실력 있는 신생팀으로 축구계에 명함을 내민다.
그러나 이 당시에도 걸출한 스타 선수는 없었다. 국제심판으로 활약했던 전영현(10회), 김진옥(11회)씨 등이 당시 활약했던 선수였다.
청구고 축구가 꽃을 피운 것은 14회 졸업생들이 주축이던 79년과 80년이었다. 당시 선수로는 박경훈(전 17세 이하 청소년대표팀 감독)을 비롯, 변병주(현 대구FC 감독), 백치수(현 청구고 감독), 백종철(현 영진전문대 여자축구 감독) 등 쟁쟁한 멤버였다.
이들은 대통령금배 우승을 비롯, 문화체육부장관기 전국고교대회 3연패 등 당시 전국규모대회를 석권하며 청구고를 전국 최강으로 이끌었다. 당시 변병주와 박경훈의 활약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있다.
『파주 출신인 변병주가 스카웃돼 청구중 3학년에 다닐 때다. 당시 청구고가 대회에 출전했는데 왼쪽윙을 보던 선수가 다쳐 대타로 중학생이던 변병주를 내보냈는데 이 경기에서 무려 3골을 뽑아내며 팀을 우승으로까지 이끌었다.
이때 타 학교 감독들이 변병주가 중학생으로 고교대회에 출전했다며 부정선수라고 항의, 우승기를 반납했던 적이 있다. 그만큼 특출한 실력을 가졌었다. 당시 축구강팀이던 파주공고에는 왜 변병주를 놓쳤느냐는 파주 시민들의 항의가 들어올 정도였다고 한다.』
◇ 박주영, 김동현이 이끈 축구 중흥기
8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청구고 축구는 이후 걸출한 스타 없이 축구명문팀의 체면을 유지하는 수준에서 전국대회에서 우승한다.
그러나 비록 과거 전성기 때만은 못해도 청구고 축구는 올림픽과 국가대표를 역임한 우수한 선수를 계속 배출한다. 김동해(19회, 전 대구FC 코치), 박창현(현 포항 코치), 강정대(24회, 전 청구고 감독), 황연석(25회 현 청구고 코치), 이원식(26회), 김대회(26회), 김완수(34회) 등이 청구고 출신이다.
또 이영철(21회), 은종복(21회), 신동근(34회)은 선수생활을 거쳐 현재 국제심판으로 활약 중이고, 박석준(15회), 박무용(16회), 최재규(19회), 김동우(28회) 등은 대학, 실업대표로 선수생활의 꽃을 피웠다.
한동안 빛을 바래든 청구고 축구는 2000년대 들어 두 스타의 등장으로 다시 한 번 도약한다. 1년 선후배 사이로 초등학교와 중고를 나란히 다녔던 김동현(37회)과 박주영(38회)이 바로 그들이다.
반야월초교를 나와 청구중고에 앞서거나 뒤서거니 다녔던 두 선수는 2000년대 한국축구사를 다시 쓰게 할 슈퍼스타였다. 박주영에 비해 신체조건이 좋았던 김동현은 중고시절만 해도 박주영이 경쟁상대가 아니었다.
2002년 청소년대표로 출전했던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김동현은 MVP를 수상했고 곧이어 ‘21세기를 이끌 인재상’을 수상하는 등 화려한 고교시절을 보냈다. 김동현은 한양대와 수원삼성을 거쳐 포르투갈 프로팀에서 활약하다 현재 경남FC에서 뛰고 있다.
중고시절 김동현에 가려졌던 박주영의 진가는 2004년 마침내 빛을 낸다. 2004년 10월 청소년대표로 출전한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박주영은 팀 우승과 함께 득점왕, MVP를 휩쓸었다.
그해 박주영은 아시아축구연맹이 선정하는 ‘올해의 청소년상’을 수상했고, 다음해는 아시아8개국청소년축구대회에서 역시 팀우승과 MVP, 득점상을 모두 거머쥐었다.
이회택-차범근-최순호 등 한국 축구의 슈퍼스타 계보를 잇는 축구신동 박주영에 대해 청구고 한 관계자는 “주영이가 뛸 때는 우리가 두세 골 차로 지고 있어도 걱정을 안했다. 주영이가 공을 잡으면 항상 골 같은 슛을 만들었기 때문에 반드시 이길 것이라 믿었고, 실제 그렇게 이긴 경기가 많았다.”고 기억했다.
스포츠는 항상 스타 플레이가 있어야 사랑을 받는다. 이런 점에서 청구고가 배출한 걸출한 축구 스타들은 과거 한국축구 발전을 견인했고 미래의 한국축구에서도 분명 견인차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