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힘들다 하루에 글 두개 올리는게 이케 힘들다니..
하튼 여러분은 서진 사건의 끔찍한 기억을 뒤로 하고 이글을 보아주기
바란다.
오늘날과 같이 다수인이 결합하여 위계질서와 내부규율을 갖춘 조직폭력은 해방 이후의 김두한 삼촌에게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참고로 그분 안동김씨다...
김두한삼촌은 당시 서울 종로1가 소재 우미관, 국일관 등을 중심으로 주변 무리들을 장악하여 쪽바리양아치들과 맞서면서 상인들의 보호막 역할을 하였고, 그 중에서 상당한 그룹들은 활동영역을 도시중심가 상업지역으로 자리잡아 헹님들의 관할지역으로 해서 인근 불량배들을 통합, 장악하였다.
자유당정부 시절 국내어깨조직들은 정치어깨라는 새로운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선생님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자유당정부의 후광을 업고 야당정치인, 진보적 인사들에 대한
정치적 성향이 다분한 테러행위를 했었다..
1955년 대구매일신문난입 테러사건, 1957년 유지광선생님이 주도한 서울 장충단공원 민주당 시국강연회 폭력사건, 1959년 신도환이 책임자로 있던 반공청년단의 4.18 고대생 피습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제2공화국
1960년 4.19혁명으로 과도정부가 성립하면서 정치깡패사건과 각종 이권사업 및 정치활동에 개입하여 삥땅과 다구리를 행해온 어깨헹님들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이 시작되면서, 당시 반공청년단 단장 신도환, 종로구 단장 임화수, 종로동부특별단장 유지광선생님, 당시 청계상우회 회장 이정재, 부회장 김복록, 서울 가극단 단장 박호, 조열승, 홍영철 등 헹님들이 구속기소 되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제1심 공판에서 지나치게 가벼운 처벌이 내려지자 여론이 악화되었고, 이에 따라 소급처벌을 위한 개헌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항소중이던 사건들은 민생반역자에대한형사사건임시처리법에 따라 공판이 정지되었다가 (넘 어렵냐..? 우리 카페 회원 수준 그정도~~)
그 중 15명이 특별재판소로 이송되었고, 5.16 이후 혁명재판소에서 처리되었다. 참고로 박정희 아저씨는 깡패를 매우 시러하셨다.... 목에 두른 나는 깡패다란 비참한 팻말이..형님들을 기달렸다.
제3공화국
박정희아저씨의 군사정부는 혁명재판소및혁명검찰부조직법을 제정하여 반국가적, 반민족적 부정행위 및 반혁명적 행위를 처벌하였고, 폭력척결을 우선주요사업으로 선정하여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을 제정, 시행하면서 각종 폭력사범에 대한 *후리가리 를 실시하였다.
(후리가리=단속..씨팔 다 쓰러버려..~ 머..이런.거다)
군사정부는 헹님들에 대해서 사형 등의 중형을 선고하고, 국토노가다단을 설치하여 헹님들을 제주도에서 강제사역시켰다. .이에 다소 전국이
조용해졌나 싶었으나.. 우리헹님들이 그냥 조용히 살분들이신가..
1963년 12월 27일 민정이양 후 명동, 충무로, 을지로 일대를 제1공화국 당시 이화용헹님의 수하였던 신상현(일명 신상사)이 장악한 후, 1965년 이후 광주, 전주, 목포, 순천 등 호남지역의 폭력배들이 상경하여 무교동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 박종석의 번개파가 호남연합세력의 주축이 되었다. 두 계파는 정치세력과 연관되기도 하였으며 1971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의 폭력행사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용팔이 사건 이전이다.헷갈리지 말아라~
제4공화국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정부에 의하여 호남파의 두목급 9명이 일시에 구속되기도 하였으나 잔존세력들을 중심으로 오종철을 두목으로 한 조양은 등의 한 부류와 번개파의 박종석을 두목으로 한 김태촌 등의 한 부류로 새로운 계파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주류공급권, 정기상납금 등에 관련하여 신상사파와 갈등을 빚어오다 1975년 1월 신상사파가 사시미칼과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한 범호남파의 습격으로 몰락함에 따라 폭력세계의 세력구도가 바뀌게 된다.
그것이 그 유명한 사보이 호텔 커피숍 기습사건이다.
이 때 이후 낭만파 주먹은 사라지고 어깨 세계에서는 조직활동에 있어서 사시미칼, 일본도, 쇠파이프 등의 무기가 등장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후 세력다툼이 활성화 되어 조양은의 양은파, 김태촌의 서방파, 이동재의 오비파의 3파간의 구도로 압축되게 된다. 또한 이 3파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거물역할을 한 이승완은 태권도 국가대표선수에서 주류도매상운영, 국산양주 주류판매조합장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계와도 관련을 맺었다.
제5공화국
1980년 등장한 신군부는 그 해 8월부터 1981년 1월까지 삼청제5호라는 대대적인 조직폭력배 소탕작전을 실시하여 조직폭력배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우우~~우우~~~머냐고.. 모래시계다..모래시계보면 다 나온다.
결국 거대조직의 두목들은 거의 모두 구속되었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국내 폭력조직은 유흥산업의 비약적 발전과 함께 그 양과 질에 있어서 거듭된 발전(?)을 하게 된다.이때가 아주 조직계의 황금시대랄까.
유흥업소와 관련된 사업, 채권채무관계(현재 내가 하고있는 사업이다.^^)
와 관련된 사업 등을 통하여 자금을 축적하고 앞서 보았듯이 거대조직 보다는 소수정예화 된 안정적 자영조직의 형태로 조직을 변화시키면서 자생력을 키워왔다.쉽게말해.. 뭉치면 좆되고 흩어지면 산다란 법칙을 배운
거다..
1987년 4월에는 김용남(일명 용팔이) 등의 폭력배들이 통일민주당 지구당창당방해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웃긴 일화가 하나있는데
조양은 출연의 영화보스를 보면 용팔이가 조양은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야..콧수염..내려가" 장면인데..후에 용팔이는 자신은 무릅을 끓은적이없다며 조양은을 명예회손으로 고소하는 헤프닝을 벌였다.
제6공화국
노태우 정권의 출범 후에도 1988년, 1989년에 걸쳐 형님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각 지방과 연결된 전국적 규모의 조직을 결성하는 현상을 나타내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조직체를 숨기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회봉사나 사회기여를 위한 단체인 것처럼 위장하기도 하였다.
당시 전국적 규모의 조직으로는 1987년 7월 이승완이 주도한 우파적 성향의 호국청년연합회, 이리배차장파 두목 김항락이 주도하고 목포파 강대우, 영도파 천달남, 군산의 형철우, 온양의 김춘기 등이 참여한 일송회, 1988년 12월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환아저씨가 결성하고 일본의 극도(쩝..야쿠쟈)까지 참가한 화랑신우회, 1989년 3월 김태촌이 주도한 신우회, 오일환이 충남지역 폭력조직 두목 등으로 구성한 충우회 등이 있었다.
이상이 현재까지의 내로랄만한 국내 폭력조직의 계보였다..
다만 왜 자신의 속한 조직이나 아니면 자신이 결성한 조직이 왜 이계보에서 누락됐냐고 항의하는 분들도 있을거라 본다.
누락된 조직으론
남양주 일대를 장악하고있는 남양주 박치기 파나.. 대치동일대의
아가씨 관리및 커피숍 장악을 하고있는 대치동 버디파., 신사동 일대의
나이트를 장악하고 있는 댄싱머신파등등을 들수있다.
그 외 기타 군소 조직은. 너무 많은 관계로 나열하기 힘들었음을 다시
밝히면서..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형님들에게 아무런 감정없으니까. 이 글쓴놈
찾아서.. 담글 생각은 하지마시고..정의롭고 곧은 건달이 되려는 분이
있다면 그분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쓴 글이니 널리 이용하길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