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해방과 6.25 동란을 상동광업소는 어떻게 관통해왔는지 궁금하였지만 그간 기록이 제대로 보전된 것이 없어 아쉬웠는데 "대한중석70년사"에 일부 수록된 것을 이곳에 축약하여 옮깁니다.
이 사서 저자는 6.25에 관한한 매우 제한적인 표현과 사건 당사자들의 실명 노출을 의도적으로 피했음을 말하는 것이 휴전후 30년이 훨씬 지난 1989년도에도 동족상잔 내용의 표현은 여태 조심스런 자세를 보여준다.
8.15 해방 전후의 상동광업소
2차 대전 말기에 전쟁의 전략물자 텅스텐 광산인 고바야시광업은 호황을 누려 우리가 봐왔던 텃골의 우람한 회색빛 선광장 시멘트 시설물은 1943년 완공한 현대적 채광, 선광 시설로 2차 대전 전쟁 특수를 누렸었지만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게됩니다.
"전쟁이란 이긴자가 진자의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이 불문률" 이라 당시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의 통치권은 물론 일본인 소유 재산인 광산도 모두 승전국 미국에 소유권이 넘어가게됩니다.
1945년 8월 15일 부터 고바야시광업의 요직에 있던 일본인들은 축출 되고 절대 중석 수요처인 일본의 군수산업체도 붕궤되니 중석광산 생산 활동도 멈추게됩니다.
승전국이자 점령군인 미군은 9월 9일 한반도에 미군정 실시를 포고하고 10월 1일에 고바야시광업의 지배인으로 한국인을 새로이 임명하였지만 고바야시광업의 서무과장이 당분간 실무적 총괄을 했다고 한다.
1946년 1월이 되서야 고바야시광업 명칭은 조선중석광업으로 바뀌게 되며 미군정 휘하 국영업체로 변신합니다.
1947년 2월 미국에 중석 처음 수출.
1948년 8월 대한민국 건국 선포.
1949년 10월 대한중석광업으로 개칭.
한국 땅의 중석광산 상동광업소는 일본인 자본과 기술로 개발되어 조업하다가 일본이 전쟁에 패하자 승전국 미국에 소유권이 넘어갔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대한민국 정부 국영 기업으로 변신하는 기구한 세월이었다.
6.25 동란 전후의 상동광업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되었지만 남한만의 정부로서 북한의 김일성이 주도한 공산정권과 대립은 날로 격해지며 상동광업소에도 좌익세력들이 침투, 준동하여 상동의 일반 주민들까지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1948년 12월 위기감에 정부에서 경찰 1,000여명, 국군 200여명을 동원하여 상동광업소및 주민 상대로 좌익분자 색출, 숙청을 했다고 한다.
1950년 6.25 동란 발발.
당시 상동광업소는 종업원 1,200여명이 조업중이었고
전선이 낙동강까지 후퇴되며,
1950년 7월 8일 북한군 상동광산 점령.
북한 노동당 파견 지배인 상동광산 부임하여 활동.
1950년 9월 30일 상동 수복하여 10월 중순부터 조업 재개.
1951년말에 상동광산의 전략적 중요성에 치안 유지위해 미군 주둔 시작.
치랭이골 입구(지금 아파트 부지) 에 퀀셑 막사를 짓고 주둔했었다.
극동의 반도, 하고도 태백산 줄기의 암반과 바위 골짜기라 농, 임산물 생산지가 되기에도 척박한 곳이 현대전 전략 물자로 사용되는 텅스텐 산지로 부각되어 세계 열강의 주목을 받아 상동은 일본인에 이어 미국인의 지배도 경험하게 되었다.
더우기 그간 세계 텅스텐의 대부분을 값싸게 공급하던 중공이 6,25 전쟁 이후 북한 공산권에 동참하면서 대량 수요처인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적국이 되면서 공급처를 중국에서 급격히 한국으로 선회하여 상동광산은 텅스텐 특수를 한동안 누린다.
참으로 묘한 것은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그리고 8,15 해방과 6,25 동란등... 근세사의 국제사회 변화는 대한중석, 상동광업소에 실보다 엄청난 득을 가져왔고 다행인 것이 전쟁 중에 상동광산 생산 설비의 파괴가 심하지 않아 휴전 후에 조기 조업 재개가 되어 중석 특수로 대한민국 전쟁 복구 자금 조달에 역할이 지대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