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의 탄생
누가복음 1:57-66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여 문안한 후 석달동안 그곳에 머물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함께 있는 동안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불임이던 엘리사벳이 임신 한 것도 기적이요, 처녀인 마리아가 성령의 능력으로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것도 기적입니다. 그러니 두 사람은 할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 은혜로운 시간을 보낸 후 마리아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돌아간 후 엘리사벳의 출산일이 다가왔습니다.
1. 세례요한의 탄생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1:57-58)
이제 엘리사벳의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습니다(57절). 앞에서는 세례 요한과 예수의 수태에 관한 기사가 번갈아 가며 언급되었으며 이제부터는 그들의 탄생에 관한 기사가 나옵니다. 본절은 세례 요한의 탄생 기사가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은 이웃과 친족들이 와서 주께서 엘리사벳을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했습니다(58절). 원래 불임의 여인이었고 나이가 들어서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엘리사벳의 처지를 잘 알고 있던 이웃과 친족들은 하나님께서 그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으로 아들을 낳게 하신 것을 듣고서 함께 즐거워한 것입니다. 요한의 탄생의 기쁨은 엘리사벳 개인에게 한정되지 않고 그 소식을 접한 사람들 모두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메시야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가 탄생한 사실은 구속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 바, 본절의 기쁨은 모든 성도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2. 세례요한의 이름에 대한 문제
팔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그 모친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저희가 가로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그 부친께 형용하여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저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매 다 기이히 여기더라.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1:59-64)
엘리사벳이 요한을 낳은 팔일이 되어서 전례를 따라서 아이에게 할례를 베풀며 아이의 이름을 지으려고 친족들이 모였습니다(59절).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를 낳으면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에 이 할례가 갖는 의미는 여러 가지였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순종의 표이며, 둘째는 선민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구별되는 표(삼상 17:26)이며, 셋째는 여호와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케 하는 표이며, 넷째는 신약 시대의 세례에 대한 예표 등입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할례의 진정한 의미를 망각한 채 신체적으로만 할례를 받는 자들이 늘어감에 따라 소위 '마음의 할례'가 강조되었습니다.
생후 팔 일만에 할례를 행하며 이때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59절; 2:21). 아이에게 이름을 붙이는 일에 이웃이 참여하는 것은 예부터 내려오던 유대 풍습이었고(룻 4:17)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도 유대의 한 풍습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름이 갖는 의미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를 통해 지배권을 행사했으며(창 2:19, 20), 한 성읍의 이름을 명명하는 것은 그 성읍에 대한 통치권 확보와 동일시되었습니다(삼하 12:28). 그리고 여자들은 고통 중에 있을 때 남자의 이름으로 칭해지길, 즉 남자의 보호 아래 놓여지길 구했으며(사 4:1), 하나님의 보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칭함받다'라고 표현되었습니다(사 63:19). 따라서 친족들은 아이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사가랴’라고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엘리사벳이 반대를 하고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려고 했습니다(60절). 엘리사벳은 자신의 반대가 관습을 무시하는 처사이고 또 여자의 견해라하여 무시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거부 의사를 표했습니다. 엘리사벳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에 대해 어떤 이들은 그녀가 남편 사가랴처럼 직접 계시를 받은 것이라 주장하지만, 엘리사벳이 필담(筆談) 형식을 통해 사가랴가 받은 모든 계시의 내용을 전해받아 알았을 것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뜻을 가진 것으로서, 다음 몇가지 사실을 암시합니다. 첫째 노년기에 이르도록 무자하였던 사가랴 부부에게서 요한이 태어났으므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둘째 요한의 탄생과 더불어 사가랴에게 내려졌던 하나님의 징계가 철회된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64절). 셋째 장차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됨은 더욱 큰 은혜였습니다(3:10-14; 마 3:5-6).
그러나 친척과 이웃 사람들의 생각에는 요한이라는 이름이 부적합했습니다(61절). 왜냐하면 유대 사회에서는 어느 가문에서건 전승되는 이름이 있기 마련이었으며 가문 중에 사회적 명망(名望)이나 존경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이름을 따라서 이름을 짓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이웃과 친족들은 관례적으로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고 이름짓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태어난 아이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이름을 지을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이 아이는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므로(15절) 그의 위대한 생애에 걸맞는 이름이 필요하였습니다.
친족들은 엘리사벳이 말하는 요한이라는 이름이 합당하지 않게 여겨짐으로 사가랴에게 형용하며 이름을 무엇이라 할지에 대해서 묻습니다(62절). 그 당시 사가랴는 벙어리이자 귀머거리 상태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사가랴는 서판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합니다. 서판(書板)은 표면에 밀랍을 얇게 칠한 작은 나무판으로서 그곳에 첨필로 글을 썼습니다. 사가랴는 그곳에 요한이라고 썼습니다(63절). 사람들이 아이의 이름에 대해서 사가랴의 의견을 물었을 때, 사가랴의 대답은 ‘요한’이였습니다. 이것은 사가랴의 의견이 아니라, 계시에 의해서 이미 주어진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이히 여겼다는 것은 사가랴가 귀머거리였음을 강력히 뒷받침합니다. 만일 사가랴가 엘리사벳과 주위 사람들의 대화 내용을 모두 들었었다면 부인 엘리사벳과 똑같은 이름을 대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때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렸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64절). 사가랴의 믿음있는 단호한 태도와 순종은 결실을 맺고, 자신의 불신의 표적이었던 벙어리 상태에서 풀려나게 했습니다. 이로써 20절의 천사의 말도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사가랴는 그 혀가 풀리어 말할 수 있게 되자 먼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 찬양은 바로 뒤이어 나오는 68-79절의 내용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되어온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찬양이며 지난 10여개월 동안 말 못했던 답답함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아니라 크나큰 은총에 대한 깊은 감사의 찬양입니다. 아마 그는 장장 10여개월에 걸친 침묵의 기간 동안 하나님과 내밀한 교제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신의 불신에 대해 뉘우침과 아울러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도리를 절실히 배웠을 것입니다.
3. 요한을 인하여 두려워하는 사람들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산중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심이러라(1:65-66)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 대한 소식은 금방 그 근처에 사는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다 두려워’하게 됩니다(65절). 여기서 ‘두려워하다’는 말은 '공포'가 아니라 초자연적 사건에 접하게 됨으로 갖게 되는 종교적인 '경외감'을 의미합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주도면밀하게 이루어진 일을 목격한 것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한 것입니다.
그 모든 말은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게 되었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유대는 예루살렘 주위의 한정된 지역이었지만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서 때때로 그 지역이 확대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유대 본령(本領)은 한 면이 약 70km되는 거의 정방형(正方形) 모양이었습니다. 유대는 특히 '산지'로서 석회암으로 된 거대한 요새지가 헤브론의 북쪽에 600m에서 1,004m에 걸쳐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역사 이래로 계속해서 '광야' 또는 '사막' 지대로서 샘이 거의 없어 항상 인구가 적었습니다. 본문이 보도하고 있는 바 이 사건은 예루살렘 산간 지역 일대에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교역상(交易商)들이 항상 유대 주위를 통과했는데 이 교역상들을 따라 이 이야기가 점차 유대 전역으로 퍼져 나갔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요한의 일을 ‘마음에 두며’ 아이에 대해서 서로 말합니다(66절). '마음'은 인격의 중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람들은 요한의 이야기를 단순한 호기심이나, 소문 또는 낭설로 여기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꼬’라며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이 말은 아이가 선한 인물이 될지 악한 인물이 될지에 대한 물음이라기보다는, 이 아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민족을 위해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과 호기심 섞인 물음이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손’은 구약에서 창조에 있어서나 역사 진행 과정에 있어서 자주 하나님의 손에 대해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강한 손을 펼치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습니다. 창조와 구원은 모두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로서 영원토록 찬양을 받은 일이며 또한 하나님의 손은 개개인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역사하십니다(왕상 18:46). 그러므로 '주의 손'이 요한과 함께 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큰 권능으로 요한을 덧입히시며 돌보심을 의미합니다.
적용: 우리의 신앙고백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우리의 신앙고백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믿음을 그대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신의 신앙을 강조해도 신앙고백이 없는 신앙은 기초없는 집과 같이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오면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실로 우리의 신앙고백을 매시간 나타내지 않으면 안되지만, 매시간 신앙고백이 온전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믿고 고백만 하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가랴가 믿음으로 아이의 이름을 천사의 말대로 요한이라고 할 때 그 입이 열리는 것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할 때 우리의 문제가 열릴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해야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가지신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해도 이단에 빠지는 것은 그들에게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확신 가운데 신앙고백을 할 때, 우리의 삶 가운데 살아계신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셔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보다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the King)과 주(the Lord)가 되심을 고백해야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와 왕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예수님을 우리의 왕과 주로 고백하는 자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왕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일을 결정할 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우리의 삶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롬 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