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註]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에 거주하는 강병길 시인이 첫시집을 보내왔다. 편안히 읽히면서도 세상의 어지러움과 편린들을 도배하듯 써내려간 몇 편을 소개한다. 도배공 최초의 노동 서사시집으로 등단절차도 밟지 않은 시인의 진솔함과 절절함이 많은 감동을 준다. (박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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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 저는 학자가 아닙니다. 도배쟁이가 되어가는 도배장이입니다. 세상 모든 집을 도배할 수 없지만 하루에 한 집은 새집처럼 변합니다. 저의 깜냥만큼 일합니다. 저의 즐거움입니다. 활자의 집을 지었습니다. 윗풍도 있고 난방도 잘 안된 집입니다. 空門의 문지방 너덜너덜 수시로 고쳐도 그때뿐입니다. 모두 시집보내고 새집을 지어야겠습니다. (2010년 겨울 강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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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원
벽 외 13편
- 도배일기 45
강병길
미래는 벽에 막혀 있다고 말하는 미래학자는
벽을 모른다
벽이 있어야 앞날이 있는
도배장이의 미래를 모른다
면벽 십 년의 관절염과
면벽 이십 년에 얻은 허리통증과 친구가 된
도배장이의 앞을 막고 서 있는 것은 벽이 아니다
그것은 밥이다
지금도 쌓아올리고 허물어지는 벽은
도배수도의 도량이며 성지다
백팔 배 하듯 붙이고 천 배 하듯 붙인다
새벽밥 먹고 붙이고 때론 야간 작업등 켜고 붙인다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이 벽이라면
붙인 곳에 몇 번이라도 붙인다
미래의 벽을 미리 알기 위해 일하는 도배장이도 없지만
안다고 피해갈 수 있는 벽도 없기 때문에 붙인다
눈앞의 벽에 마주서서 훑어보고
당당하게 맞서면 그뿐이다
목욕탕을 훔쳐보다
- 도배일기 41
고단한 날개를 세차하듯
참새 무리가 모래목욕 하는 저녁
제 몸집만한 구덩이에 들어가
흙거품을 날린다
부산하나 나름대로 질서 있게
순서를 기다리고 망을 보고
공중목욕탕이 단체손님을 맞아 호황이다
하루를 살며 묻혀온 육두문자나
송곳 같은 사설 따위 털어버리고
똥 한번 찍 갈기고 집으로 간다
연장에 쓰레기까지 차에 실은 나는
빈손으로 집에 못가는 한 집의 가장
수심 근심마저 털며 몸 말리던 참새들이
목욕 끝내고 돌아간 궤적은
얼마 남지 않은 가을의 숲에 닿았다
벽지는 나무다
- 도배일기 27
벽지는 색이 바래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다
뿌리와 잎을 지녔던 나무였다고
보여 주는 것이다
안개와 비를 맞는 숲에서
새와 짐승들의 산에서
살아 있고 싶은 것이다
그늘에 갇혀 그늘을 만들지 못하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고 고육을 짜내는 것이다
벽에 매달려 입김으로 연명하지는 않겠다고
벽지에 그려진 꽃마저 떨어뜨리며
나무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바퀴벌레나 찾아드는 꽃은 더디게 지는데
반지하 백열등이 해처럼 떠서
꿈조차 잊을까 두려운 벽지는
알몸을 통째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꽃벽지
- 도배일기 22
내년에 보자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네요 할머니
삼백 년 넘게 살아 찻길도 두 갈래로 비껴가는
노림 느티나무 벗이 되고 싶다던 바람이 먼저였나요
며느리 손자 방은 깨끗하게 꾸며주고
당신 방은 굳이 사양하더니
주인 떠난 방 이제 도배합니다
하얀 모시옷 입은 모습이
백합꽃 같았습니다
제가 조금 늦게 왔지만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리는군요
"내 방은 내년에 할 거여, 꽃벽지루"
먼지폭죽
- 도배일기 21
두툼한 솜이불처럼 먼지 쌓인 장롱을 들어내다
쏟아지는 편지봉투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많은 사연을 묵혀 두었는가 싶었는데
축의금 봉투였다
십 년은 족히 지난날의 축하가
먼지폭죽이 되어 터진다
즐거운 잔치에도 눈물 보이는 아쉬운 정서는
소리 없이 쌓여 있었다
차곡차곡 발길 닿은 순서대로
동그라미 안에 숫자까지 표시한 빈 봉투들
파먹고 남은 수박껍데기를 말려 놓은 듯 내용물 없는 봉투가
어떤 삶의 시작엔 발아의 거름이었으리라
쉽게 버릴 수 없는
답장을 보내지 못한 이름들을 추스르며 주인은 감회에 젖는다
허리도 펴기 전에 허공에 쓰는 엽서엔
비장한 먹물이 뚝뚝 흐른다
"이게 다 빚이여"
봄날
- 도배일기 18
양지쪽엔 쑥이 제법 새순을 틔웠다
봄이라고 부르기엔 이른 봄날
모양낼 것 없고 생긴 대로 깨끗하게만 해 놓으면 되는 월세방 일은 쉽게 끝났다
연장을 챙겨서 나오다 보니 주인이 대문에 종이를 붙인다
언뜻 보면 반야심경 한 구절 같은
'삭을새놈 보증오십 월십오만 지름보이라'
보증금 다 까먹고도 안 나가는 통에
내보내는데 애먹었다며 투덜거려도
유리테이프로 꼭꼭 눌러 붙이는 솜씨 능숙하다
누군가 인생의 한겨울 삭히고 떠나며 남긴 게송치곤 남루하다
선희엄마
- 도배일기 17
도배 보조로 따라다니는 선희엄마
풀칠 잘하는 선희엄마
딸이 오십이 넘었어도 선희엄마
딸 이름만큼 착하게 살아서 오라는 데가 많은 선희엄마
젊은 나이에 남편 보내고
자식들과 입에 풀칠하기 위해 풀칠을 시작한 선희엄마
경력은 삼십 년에 아직도 보조
글자를 몰라 기술자로 나서지 못한 선희엄마
큰아들 은행 지점장 만들고 막내아들 장사 성실하게 해서 항상 웃고 다니는 선희엄마
갱고개 옛집 지키며 사남매 잘 키우고
식구들 모두 모여 고기 구워 먹는다고
꼭 들려서 먹고 가라고 전화해 주는 선희엄마
족보
- 도배일기 11
늦둥이를 가슴에 품은 것 같은데 할머니란다
외자 이름을 연방 불러대고 어르며 고추를 말린다고 기저귀도 푼다
장식장에 진열된 제법 여러 권의 족보를 젊은 할아버지는 보자기에 싸서 옮긴다
두 손으로 공손하게 벽장에 넣는다
묻지도 않았는데 이 집은 종가이고 무슨 파 삼십 몇 대 종손이며 임야와 전답을 경영한다고 한다
그러니 적당한 대우를 받아도 된다는 배후가 깔려 있다
선산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곱다
별반 힘들이지 않아도 농사는 되는 모양이다
점심을 먹고 쉴 참인데 별도로 밥상이 차려진다
열리지 않던 문이 열리고 소반이 들어간다
저리된 지 오래 되었다며 제삿밥이나 얻어먹을 수 있겠냐고 말꼬리를 흐린다
차마 씨받은 사연 묻지 못한다
지도
- 도배일기 8
이사 나간 집 아이 방에 미처 따라가지 못한 세계지도가 붙어 있다
이학년 달반 이우주 라고 씌어 있다
평면의 지구는 양면테이프에 의지하였다
우주의 벽에 붙은 지구는 우주의 집에 세들어 살지 못하였구나
우주가 버린 미아로 남았구나
도배장이는 지도를 칼로 도려내
공처럼 뭉쳐 쓰레기봉투에 던져 넣었다
열반에 든 지구여 평안하신가?
새로운 우주를 붙이듯 펄이 별처럼 박힌 벽지를 붙인다
방 가운데 서서 한 바퀴 돌아본다
펄들이 별처럼 빛을 낸다
우주의 집이 아니어도 빛나는 별들
어디로 우주는 이사 가는가
지구를 찾는 지도는 없고
우주의 주소는 나도 모른다
벽화
- 도배일기 7
오래 묵은 집 벽지를 뜯어내다
삼양라면봉지를 붙인 걸 볼 때면
고구려벽화도 신비로울 게 없다
행여 삼천 년 후에 나의 지문이
벽지에 남아 유리칸막이에 갇힌다 하여도
이승의 파노라마는 보이지 마라
하염없는 손놀림만 만날 것이다
못
- 도배일기 6
도배하기 전에 망치로 못을 빼낸다
도배장이의 망치는 못을 빼낼 때 쓰는 연장이다
옷이나 가방, 액자와 액자 속의 사내가 따온 별을 걸거나 그 사내가 목을 매었던 못이라도 모두 빼낸다
일일이 하나씩 걸어서 겨루는 일도 만만치 않다
순순히 투항하는 못이 있는가하면
매달려도 빠지지 않는 못이 있다
제 한 몸 쏙 빠져나오는 못도 있고
벽의 살을 한 뼘이나 물고 빠지는 못도 있다
흔적과 자국을 지우는 일이 끝나야 새로운 벽지를 붙일 수 있기에
모두 빼버린다
못은 벽에 자란 뿔이다
동아줄 걸고 외줄 오르던
쥐뿔같은 가장의 뿔이다
나는 무교다
- 도배일기 5
오전에 광야교회 장판 깔아주고
오후에 청림사 산신각 자리 깔았다
교회에서 점심 먹고 절에 가서 점찍었다고 했더니
스님은 금강경 잘 배웠다고 하신다
목사님 기도할 때 아멘으로 답하고
부처님 전에서 합장하는 나는 무교다
연비연비(聯臂聯臂)로 길 따라가다
가끔 허방에도 빠지는 나는 종교가 없다
팔 다리 머리 따로 놀리고
성경 몇 구절 법구경 몇 자락 시 몇 편 소설 몇 장
점찍듯 들추다 팽개치는 그냥 필부다
뿌리까지 파고들어가 끝장을 보는 성찰이 호사로나 보이는 나는
풀이나 나무 같은 도배장이다
새순 트나 낙엽 지나
물 흐르듯 사는 것도 늘 여울인데
아멘과 합장의 구분이 무슨 대수랴
천지만물이 스승이라지만
올곧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금남의 집
- 도배일기 4
현관 자물쇠 풀고 중문 자물쇠 따고 방문 열쇠로 열어준 거처가 수녀님 방이다
이불 한 채와 가방 하나 놓여 있다
속가량으로 궁금하던 마음이 빈방처럼 허전하다
밀알이 발아되기도 전에 사람이 발효되지 않을까 싶기도 한 금남의 집에 여자 살림이라곤 없으니 발소리라고 더부살이 할 리 없다
한소끔 살펴봐도 도둑맞을 물건은 없는데
겹겹의 문단속은 꼭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마음을 붙잡으려는 시건장치가 아닌 모양이다
벽지 한 겹 더 붙이는 것으로 수도에 증감이 있지 않음을 핑계 삼아 돌아서 나온다
문 잠그는 소리 속절없이 들린다
도루코 칼날
- 도배일기 3
도루코 칼날은 잘 든다
열 개들이 한통이면 집 한 채 벽지도 바르고 장판도 깐다
무뎌진 칼끝을 톡톡 떼어내며 새날처럼 쓰는 도루코 칼날은 도배장이들이 즐겨 쓰는 소모품이다
칼날 만드는 공장이 우리 동네에 있고
그 사거리를 사람들은 도루코사거리라고 부른다
칼 만드는 공장에 출근하던 사람들이 도루코사거리에 서서 일 년 넘게 정문을 통과하지 못하며 망루를 세우고 현수막을 걸었다
'도루코의 칼날은 비정규직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잘라야 합니다'
잘린 비정규직들이 표어를 앞뒤로 걸머메고 부러진 칼날처럼 녹슬어 갔다
'왜 우리 마음 속에 칼을 갈게 하는가'
무딘 칼날을 벼리듯 사계절 버티고 선 그들의 구호는 날이 서 있었다
- 시집 『도배일기』(지혜, 2011)
* 강병길 : 경기도 이천 출생. <사람과 시>, <중원문학> 동인 및 애지문학회 회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