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철도에서
옛 촉나라에 마씨 형제들이 살았다고 한다. 형제들 모두 뛰어났지만 그중에서도 눈썹이 흰 마량이 가장 뛰어나 후일 백미가 특출난 사람이나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흰 눈썹이 본디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후천적인지에 대해 전해지는 바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놀림을 받았을지도 모를 마량의 흰 눈썹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 특별하기는 했을 것 같다.
멀리 흘러간 마량을 소환하지 않더라도 백미를 되치기 할 만한 일이 있다. 밤 열두시가 되면 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이 길게 울리던 때가 있었다. 입버릇처럼 국민을 친애하여 존경받을만한 분들이 종각에 모여 제야의 종을 치는 날에는 자못 성은이 망극하게도 해금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큰 은혜에 감격하며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추산으로 일만 명쯤이 모였을 거라는 진행자는 다섯 넷 셋 둘 하나를 함께 외치자며 송구영신의 종소리에 환호하였다. 타종이 끝나면 마치 영원한 해금을 약속 받은 듯하였다. 나라에서는 적색분자들의 준동이 어쩌고 하며 일상의 통금은 시민의 안위를 위한 것이라 말하지만 대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통금을 어기는 사람도 흔치는 않았다. 이런 날 자정 무렵에 파출소 근처를 지날라치면 발끝이 쫄깃해지며 괜스레 급해졌다. 그러나 호루라기 소리에 후다닥 골목으로 스며들거나 파출소에 끌려가지 않아도 되었다. 해금된 그 하얀 밤의 백미, 여인숙은 모처럼 만실이 되고 등골 후끈 거리며 몸뚱이 어디가 근질거리다 총각은 무슨 딱지를 떼기도 하였다. 인공지능 시대 통행금지라는 말은 먼 나라 민주공화정부의 그럴듯한 명분이거나 박물관 유리상자 속 그림자가 되었다. 민주화 꽃핀 글로벌 K-문화시대에 공사장 안내판의 빨간 글씨에 불과해졌다.
엄혹하던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카운트다운 제로가 되는 순간 어김없이 새해는 밝는다. 올핸 좀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로 트랙 위의 안대 쓴 경주마처럼 다시 전력질주를 해보지만 남은 건 숨소리만 거친 한 해가 한 해씩 쌓여갔다. 어제의 등에 업혀 온 새해가 희망이라는 내일의 물감을 칠하지만 괄호 벗겨 낸 문장처럼 의미 약해진 기분이 드는 것은 나뿐이었을까?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이즈음의 모임은 자꾸 뒷전에 서게 되었다. 친구 녀석은 나이 들어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야한다며 머리카락 숫자라도 줄여가며 지구의 어깨를 가볍게 해주는 위대한 우리들이니 한 해라는 이름의 하루를 보내는 마당에 쐐주 한잔 꺾어야 한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결국 코 흘리며 땟국 줄줄 흐르던 어릴 적 동무들 송년모임을 했다. 모처럼 육두문자로 쌈을 싼 삼겹살에 소주 몇 순배 돌리고 이젠 술이 약해졌다며 통금도 해금도 없는 송년모임에 앤분의 일인지 십시일반인지 계산을 마치고 너 나 없이 슬금슬금 자리를 파했다. 어쭙잖은 휘파람에 박자도 리듬도 없는 가락을 섞으며 전철을 탔다.
스크린도어가 닫히고 타지 못한 까만 겨울이 허둥지둥 따라붙는 검암역, 칠피가죽인 듯 반짝거리는 검정구두를 거의 다 덮다시피 한 카부라가 분홍색 임산부석 옆자리에 부석(浮石)처럼 떠올랐다. 통 크게 헐렁한 바지를 입고 삼십년쯤 설산을 넘어온 듯 쉰 사내, 하느님께 근하신년 카톡 문자라도 받았는지 올라간 입 꼬리. 얼굴빛 정수리에 비치는 실내등이 사월의 청명한 아침처럼 반짝였다. 새해 새날 새로운 시간에는 뭔가 새 일이, 그것도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듯 빛났다. 자음과 모음이 한꺼번에 눌릴 것 같은 굵은 손가락으로 즉석복권을 긁 듯 전화기 키패드를 일구다 문득 피자나 통닭이 생각난 걸까,
딸!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빠가 사갈 게
응 알았어
자기! 먹고 싶은 거 없어엉?
내가 사갈 게
방금 통화했지
음 알았어요옹.
환한 적막을 싣고 달리는 자정 무렵 전철 안에서 전신에 엉겨 붙는 저 배후가 전부 백미다. 전화기 속 답변이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스물네 시간 배달은 민족이 모두 책임지는 이 땅에서 귀가길 아버지가 사 들고 가는 한 봉지 별미를 생각했다.
새해 새날 0시5분의 운서역 광장, 깃발처럼 펄럭이는 바짓가랑이 앞세우고 북쪽의 어둠을 무찌르며 나아가는 사내의 어깨에 따듯한 얼굴이 함박눈처럼 쌓이는 것을 보았다.
백미다.
첫댓글 오우, 멋진 작품입니다.
한 말씀도 겹치지않은 훌륭한
감동적인 산문 작품 감상했습니다. 회장님!
과분한 말씀입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