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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문화유적
광주는 호남의 중심 도시다.
노령산맥이 힘차게 뻗어 내린 무등산을 배경으로
널찍하게 자리 잡은 아름답고 인정이 넘친 살기 좋은 고장이다.
광주라 이름 하게 된 것은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광주(光州)라 칭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천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도시다.
광주를 일명 “빛 고을” 이라 칭 한다.
빛 고을은 광주의 예명(藝名)처럼 느껴지기도 하여
광주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름이다.
광주를 의향(義鄕)이라 한다.
요즈음엔 민주성지라 부르고 있다.
우리 광주는 역사의 흐름 속에 많은 고난을 겪어 왔다.
일제의 암흑시대 땐 광주의 젊은 학생들이 분연히 일어나 민족운동의 횃불을 지폈고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을 도와 명량대첩을 이룩했다.
군사정권 때는 군인 독재의 총칼 앞에 온 몸으로 항거 했다.
“만약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若無湖南 是無國家) 라는 말은
우리 호남 사람들의 애국충절과 수난사의 산물이다.
남구 문화원(원장 이종일)에서 금당문화대학을 개설했다.
우리 고장의 전통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 방면에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우리고장의 전통문화를 재조명 하고 있다.
고고학으로 본 광주의 역사, 우리 고장의 역사인물, 우리 옷의 변천사, 전통장류음식,
전상의 장군의 생애와 사상, 전남 동서민속 문화비교, 우리 고장에 전해 오는 구비문학,
효 사상과 현대인의 삶, 불교문화의 이해, 사상체질과 건강법, 전통 주거 문화,
호남문학의 역사성과 향토성 등 이 고장 선인들의 얼이 숨쉬고 있는
전통 문화를 학습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도 광주의 문화유적 답사를 떠나 보기로하자.
지산재-양과동정-포충사-필운부조묘-고경명생가-운리사(매월제)를거쳐
신창동유적-월계동장고분-무진고성-충민사-충장사-금곡동도요지로 하여
김덕령 충효리 표리비-김덕령 부조묘-광주호 생태 공원-가사문학관을 돌아
식영정-원효사-환벽당으로 돌아 봅니다.
문화유적답사 코스를 보면 생소한 이름들이 많다.
이종일 원장님은 유적지에 대한 해설서를 책자로 만들었다.
유적지에 대해서 사전에 알고 현장에서 확인하니 이해가 빨랐다.
유적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핵심 부분만 말씀드리고자 한다.
참고로 순서대로 간단하게 설명코자 한다.
1). 지산재(芝山齋) : 남구 양과동. 시유형문화제 제10호.
신라 말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孤雲 催致遠)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사우로써
고운 선생의 영정을 모시다가 1886년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훼철 되었다가
1922년 다시 건립 되어 오늘에 으름.
2). 양과동정(良㧓洞亭) : 남구 이장동. 문화재자료 제 12호(남구)
양과동정은 이 지방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바르게 살자고
마련하였던 규약을 시행하는 장소로 사용 됨.
이 지방 출신들이 벼슬을 많이 하여 여기서 정치를 의론하였기 때문에
간원대 라고도 불렀다.
양과동 고문서(古文書)는 시문화제자료 제19호 지정.
3). 포충사(褒忠祠) : 남구 원산동. 시기념물 제7호(남구).
임진왜란 때 활약한 고경명(1533-1592)과 그의 장남 고종후,
둘째 아들 고인후 등 삼부자와 유팽로, 안영이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고경명은 임진왜란 때 60세의 고령으로 의병 7천명을 이끌고
왜군과 싸우다가 금산 전투에서 전사함(1592).
둘째 아들 고인후와 안영이도 모두 고경명과 함께 전사함.
큰 아들 고영후만 살았으나 다시 의병을 모아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으나
성이 함락 되자 김천일과 함께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 31년(1603) 광주 제봉산 아래 다섯 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마련하였고 나라에서 포충사란 이름을 내렸다.
재봉문집 목판각(481매)을 시유형문화제 20호로 지정.
4). 필문이선제부조묘(畢門李先齊不조廟):남구 원산동. 시문화재자료.
부조묘란 나라에 큰일을 한 사람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조선전기 문신인 이선제(1389-1454) 선생을 모신 사당이다.
☀. 괘고정수(掛鼓亭樹)-시기념물 24호.
원산동 마을 입구에 자라고 있는 괘고정수는 왕버들로
수령 6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15m 지름 1.7m 가 된다.
이 선제 선생이 심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선생의 후손들이 과거에 급제하면 이 나무에 북을 걸어 놓고 잔치를 벌였다하여
괘고정수라 이름 하였다.
5). 제봉 고경명 생가(霽峯高敬命生家):남구 압촌동. 문화재자료 8호.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 했던 고경명 장군의 집터에
그의 후손들이 세운 집이다(1917년).
☀. 고씨 삼강문:남구 압촌동.
시기념물12호. 현건물은 1844년에 세움.
고씨 삼강문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 선생 일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문(충신, 효자, 열녀들을 표창하기 위하여 무덤이나 마을 앞에 세운 붉은 문)으로,
1충(忠), 3효(孝), 2열(烈), 1절의(節義)의 7명이 표창 되어 있다.
1충은 고경명, 3효는 그의 장남 종후, 차남 인후, 손자 부금이며,
2열은 그의 딸 장흔 고씨와 초카 며느리 광산 정씨, 1절은 그의 동생 경형이다.
6). 운리사(雲裡祠): 서구 풍암동.
선조 35년(1602)에 지방 유림들이 회재 박광옥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벽진동에 사우를 짓고 벽진서원 이라 하였다.
1871년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 때 철거 되었다가
1997년 풍암지구에 사우를 건립하고 운리사라 하였다.
☀. 회재유집목판(懷齋遺集木板)
서구 풍암동. 유형문화재 제23호지정.
회재유집목판은 회재 박광옥 선생의 유집을
그의 8대손 박성일이 간행하면서 판각한 목판이다.
☀. 개산방죽(介山防築)
선생은 광주 선도면 개산 (지금 매월동 회산)에서 살면서
개금산 아래 개산송당을 짓고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선생은 43세 때 개산 남쪽의 물을 끌어드려 농사를 짓기 위해 방죽을 막았다.
방죽 위에 수월당(水月堂)을 짓고 이 정자에서 고봉 기대승과 같이 성리학을 담론 하고,
사암 박순, 제봉 고경명, 율곡 이이, 옥계 노진, 사암 성세장, 칠계 김언거,
매정 이만인 등과 모여 시회(詩會)를 가졌다고 한다.
7). 신창동 유적: 광산구 신창동. 사적 제375호 지정.
이 유적지는 영산강 유역의 충적대지(沖積대地)와 낮은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초기철기시대(기원전 2-1 세기)의 늪과 못터, 토기가마터, 배수시설,
집 자리, 독무덤 등 고대 농경문화생활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출토 되었다.
출토 유물은 무문토기와 평저장경호(平底長頸壺) 등의 토기류, 청동제 칼자루장식,
돌도끼, 돌화살 촉, 땅파는 철제 도구 등이 출토 되었다.
늪과 못 터는 영산강의 범람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많은 층으로 구성 되었다.
출토유물은 빗, 괭이, 나무뚜껑, 굽다리접시, 검은 간토기, 돌화살촉 등 토기류,
철기류, 석기류와 탄화미(炭化米), 탄화맥(炭化麥), 볍씨, 살구 씨, 호도 씨,
오이 씨 등의 씨앗류, 민물조개류, 물고기 뼈, 짐승 뼈, 등이 출토 되었다.
이와 같은 유적 유물은 당시의 생산과 유통, 매장 유적의 일부를 엿 볼 수 있어
이 시기의 생활양식과 농경생활의 발전 전파경로 등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들이다.
8). 월계동 장고분(月溪洞 長敲墳): 광산구 월계동. 시기념물 제20호.
영산강 상류의 충적평야를 낀 낮은 구릉지대로 장구촌 마을에 있는 무덤이다.
앞이 네모이고 뒤가 둥근 전방후원형 무덤으로
일제시대에 도굴 되어 많은 유물이 유실 됐다.
1, 2호 모두 널길(연도)이 있는 굴식돌방무덤이며 돌방 벽은
할석을 이용하여 벽돌처럼 쌓았다.
출토유물은 금귀고리, 쇠 화살촉, 토기조각과 원통형 토기, 나팔 형 토기,
구멍 있는 아가리큰항아리, 쇠손 칼, 토기조각, 유리구슬,
적갈색 원통형 토기가 출토 되었다.
월계동 무덤은 고대무덤연구와 한일관계사를 밝히는데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9). 무진고성지(武珍古城址): 북구 두암동. 시기념물 제14호.
무등산에 있는 성터로 무등산 북쪽 장원봉을 중심으로 잣 고개의 장대봉과
제 4수원지 안쪽의 산 능선을 따라 타원형으로 만들어졌다.
성벽은 바닥에 5단 정도 쌓아 올리고 그 위를 잡석으로 채우는 방식이다.
성벽의 남북 길이는 1000m이고, 너비는 약 500m, 둘레는 3500m에 달하는 규모가 큰 성이다.
성안에서 관(官), 국성(國城) 등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과 새 귀신의 얼굴을 새긴
막새기와, 순청자, 삼강청자, 자기 조각들이 발견 되었다.
특히 잣 고개 남쪽 위층 건물터에서 발견된 새 무늬, 수막새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새 무늬가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출토 되는 유물로 보아 통일 신라후기에서 고려 전 까지 사용된 성터로 추측하고 있다.
10). 충민사(忠愍祠) : 북구 화암동.
충민사는 전상의(全尙毅) 장군의 사당이다.
장군은 1575년 광주군 도천면(지금 광주 남구 구동)에서
아버지 용(容)과 어머니 평산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회재서당에서 박 붕(朴 鵬)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장군은 선조 36년 무과에 급제한 후 많은 관직을 역임 했다.
1627년(인조 5년)에 글안이 인조의 친명정책을 구실 삼아
3만 대군으로 침략하자 안주성 싸움에서 평안도 병마절도사 남이홍, 안주목사 김준,
구성부사 전상의 등이 싸웠다.
전상의 장군은 1627년 53세의 나이로 전사 했다.
난이 끝난 후 자헌대부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관직을 높였으며
그 해 예조정랑 임련을 파견하여 무등산 아래 장지를 정하고 예장으로 모셨다.
1682년 안주의 충민사에 배향되고, 1684년에는 충신정려를 내리고
고부 정충사에 김준과 함께 배향 했다가 1985년에 북구 화암동에 충민사를 신축하여
이곳에 충신정려, 유물관을 건립 하여 배향했다.
☀. 전상의장군 예장석묘: 북구 화암동. 시기념물 제3호.
11). 충장사(忠壯祠)
김덕령 장군은 임진왜란 대 의병장으로 진주 등지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비록 체구는 작지만 민첩하고 능력이 탁월해 왜 병장들은
그의 얼굴만 보고도 무서워서 도망갔다고 한다.
선조 28년(1595년) 이몽학의 난 때 적장과 내통 했다는 모함에 체포 되어 옥사 했다.
억울한 죽음이 정조대에 신원되어 충장공의 시효를 내리고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벽진서원에 모시고 의열사 라고 사액하였다.
충장사는 1965년 묘소를 이장하던 중 김덕령 장군의 시신이 미라로 발견 되었다.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사우를 짓고 충장사라 하였다.
☀. 김덕령장군의복 : 북구 금곡동. 중요민속자료 제 111호.
1965년 광주 무등산 이치에서 김덕령장군의 묘를 이장 할 때
출토된 400년 전의 의복들이다.
12). 광주금곡동도요지(光州金谷洞陶窯址):북구 금곡동. 사적 제141호.
무등산 동편 산록에 넓게 펼쳐져 있는 도요지로
제작 시기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로 추정 된다.
무등산 충장사에서 광주호 가는 갈림길의 금곡마을 일원에 7개소 가량의
도요지가 산재해 있다.
이 도요지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 기록 되어있다.
1963년 국립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결과 가마의 퇴적층과
완전 파괴된 가마등을 확인 했다.
출토된 것을 보면 상감청자파편, 분청자, 백자 등 많은 종류의 도자기파편들이 발견 되었다.
13). 충효동 정려비각(忠孝洞旌閭碑閣-表里碑)
북구 충효동. 시기념물 제4호.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 했던 김덕령(1567-1596)과 그의 부인 흥양 이씨, 형 김덕흥,
아우 김덕보 등 일가족의 충효와 절개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세운 비석과 비각이다.
이 비는 정조 13년 (1789)에 세워 졌다. 김덕령의 형은
고경명의 지휘 하에 참전하여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의 부인은 정유왜란 때 추월산에 피신해 있다가 일본군의 추격을 받고 순절했다.
동생은 두 형을 잃고 전쟁 후에 잠시 장릉참봉이란 벼슬을 지냈으나 곧 사양하고
은거 생활을 하며 노부모를 정성껏 모시며 효를 실천 했다.